소설리스트

3장 (4/18)

3장

-삐약삐약.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뺘약뺙.

-삑.

다시 들으니 새 소리와는 조금 달랐고,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헤베는 눈을 번쩍 떴다. 자리를 박차고 한 바퀴 요란하게 구른 그는 허리춤의 단검을 꺼내려 했다.

“…….”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챙기는 걸 잊어버렸지? 그렇다면 마법을….

헤베는 눈을 깜박였다.

요람에서 잘 자던 마물 두 마리가 꼬물꼬물 기어와 침대 위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이곳이 전쟁터가 아님을 깨달았다.

“잘 기지도 못하는 게 가만히 누워나 있지 왜 나왔어….”

-삑.

헤베는 새끼들에게 다가갔다. 빵실빵실한 배에 손가락을 찌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끼들을 돌본지 오늘로 사흘째였다. 헤베의 계산상 수명도 이틀 정도 줄었다. 그는 점점 말라가는데 새끼들은 반대로 포동포동 살이 올랐고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반면 헤베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서 으슬으슬 추웠다.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고, 전쟁은 끝났다는 걸 아는데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의 최초의 기억이 전쟁터에 있을 때니 꿈에 전쟁터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이런 꿈은 반드시 악몽이라는 것이었다. 차라리 기억이라도 안 나면 좋을 텐데, 이번 꿈에는 멸망한 비센티아까지 나왔다.

몸에서 마기를 내뿜는 테이든과 파괴된 실드, 쏟아지는 마물들….

-헤베 뮨이 죽였어.

어디선가 원망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배고프다고 뺙뺙거리는 새끼 마물들 말고는 없었다.

-저 어린놈을 사령관에 앉히면 안 되는 거였어. 패전이 벌써 몇 번째인가. 저번 교전에선 고작 열여덟 살인 친척 동생이 죽었지.

-저자는 위대한 마법이 있어서 안전하다지만 우리는 아니라고. 우리는 그가 마법 주문을 외우는 동안 희생될 개미들일 뿐이야.

-이것 봐. 헤베 뮨이 기어코 비센티아를 멸망시켰다.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렸다. 먼 곳, 가까운 곳. 여자, 남자. 어린 사람, 나이 든 사람. 구분 없이 한 명을 비난하고 있었다. 헤베는 이게 모두 환청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현실이 아니라고 해도 두렵지 않거나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궁사님.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헤베가 어깨를 들썩이며 놀랐다. 그는 급히 새끼들을 품에 안았다.

***

‘악몽을 꾸신 것 같죠?’

그때 문밖에는 테이든과 진, 마우 세 명이 있었다. 그들은 헤베와 새끼 마물들이 있는 방에서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들려서 황급히 와 본 참이었다.

‘호흡이 거칠어요. 문을 열까요?’

‘기다리십시오.’

진은 마우를 막으며 테이든을 쳐다봤다. 테이든은 한 번 더 문을 두드릴까, 아니면 헤베를 부를까 고민했다.

방 안쪽의 기척을 느낀 테이든이 나지막이 지시했다.

‘혼자 들어갈게요. 조용히 있으세요.’

지시를 내린 그는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대는 보지도 않고 바로 방구석으로 향했다. 파티션을 젖히자 새끼들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은 대마법사가 보였다.

안 그래도 작은 사람이 두 팔로 무릎을 모으고 있으니 더 작게 느껴졌다.

테이든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이러고 있어요, 헤베?”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표정을 확인한 헤베의 떨림이 조금 사그라졌다. 그는 뒤쪽을 연신 힐끗했다.

“내가… 실패해서 사람들이 죽었는데.”

헤베가 두서없이 말했다.

“흑마법사가 되었으니까 날 죽이려고 할 거야. 바깥이 시끄러운 건 환청이겠지. 하지만 분명 사람들이 올 거야. 처음부터 마계 편에 들 계획이라 일부러 패배했다고 생각하고… 어린애가 죽었거든. 난 너무 많은 잘못을 했어. 애들에게 마력을 주입한 게 정말 먕먕이인지 의심스러워.”

“그렇군요.”

헤베가 말하는 동안 테이든은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있는지, 눈빛과 체온 등을 확인했다. 조금 긴 머리카락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삐익.

새끼 마물들이 헤베의 품 안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꼬물거리는 것들이 거슬려서 테이든은 두 마리를 한 손으로 들고 바닥에 내려놨다. 헤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새끼들을 왜 그렇게 거칠게 다뤄?”

“…죄송해요.”

“저리 가.”

“…….”

헤베가 테이든을 밀어내고는 다시 새끼들을 품에 안았다. 테이든은 말없이 앞에 앉아 있었다.

힘든 일을 많이 겪은 사람이다…. 정신적으로 연약해서 자주 악몽을 꾼다는 것은 이미 알았다. 하지만 사령관으로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수하들 앞에서는 강한 척하고는 했는데, 연기하는 것까지 잊고서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워한 적은 처음이었다.

덜덜 떠는 헤베를 보며 테이든은 오만 감정이 다 들었다. 확실히 요근래 헤베의 행동은 이상한 점이 많다.

“잠깐 안아도 돼요?”

“안 돼.”

테이든은 헤베의 거절을 무시하고 작은 몸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몸이 차갑고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테이든은 헤베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헤베, 흑마법사가 되었다고 해도 사람들이 다 당신을 미워하지는 않아요.”

“네가 몰라서 그래. 난 추방 탄원까지 받고, 많은 사람이 거기에 서명할 거야.”

“저는요? 전 당신을 사랑하는데요.”

“너만 빼고… 너는 탄원서에 서명하지 않아.”

헤베는 눈을 몇 번 빠르게 깜박이더니 말했다.

“진도 빼고.”

여기서 요정족이 왜 나오지? 테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진 또한 이 상황에서 왜 자기 이름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기분은 좋았다. 옆에서 마우는 자기 이름이 나오기를 가만히 기다렸지만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 누가 당신을 사형시킬까요. 그러려면 우선 절 이겨야 하는데, 세상에 저보다 강한 사람이 없네요.”

“나는 너보다 강한데.”

“진심으로 겨루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해볼래?”

“무서운 소리 하지 말고 일어나세요.”

테이든이 헤베를 부축하며 천천히 일으켰다. 헤베는 현기증이 이는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새끼들은 단단히 안고 있었다.

헤베는 푹신한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테이든은 그 앞에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주물럭거렸다. 아직 차가운 손에 온기가 전해지자 점차 따뜻해졌다. 호흡 또한 안정적이었다.

“좀 나아졌어요?”

“응.”

갈색 눈에는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맴돌고 있었다. 테이든은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빙긋 웃었다. 우물쭈물 눈치 보는 다람쥐 같았다.

‘이만 가죠.’

‘예.’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마우와 진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더 있으면 테이든이 화를 낼지도 몰랐다.

복도를 걷는 마우의 어깨가 축 처졌다. 바닥에 닿을 기세였다. 반면 진의 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무뚝뚝한 얼굴이지만 얇은 입술 끝이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마우가 뾰족하게 말했다.

“기분 좋아 보이네요. 그러다 날아가겠어요.”

“…….”

진은 무심하게 말했다.

“유감입니다.”

“예에….”

추방 탄원서에 서명하지 않을 사람으로 내 이름은 말씀하지 않으시다니. 마우는 정말 섭섭했다.

***

헤베의 악몽 사건은 하루 만에 모든 친위대에게 전달되었다.

그들의 사령관은 약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는 이였다. 아무리 금방 진정했다지만 전쟁 중도 아니고 전쟁이 다 끝난 마당에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인다는 건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수하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임을 확신했다. 누군가 반드시 헤베의 곁을 지켜야 했는데 그 인물로는 당연히 테이든이 선정되었다. 바쁜 일정을 보내는 그는 당분간 수하들과 임무를 나누기로 했다.

모두의 도움 덕분에 테이든은 많은 시간을 헤베와 함께할 수 있었다.

“진은 어디 가고 네가 와? 너도 외상 후 스트레스로 휴가 얻었어?”

헤베는 아침 식사를 가지고 나타난 테이든을 보고 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제 악몽 꿨다고 신경 쓰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돼. 다시는 그런 일 없을 테니까.”

“아쉽네요. 겁에 질려 떠는 모습 귀여웠는데.”

“뭐?”

헤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갈색 눈동자가 충격으로 일렁거렸다. 겁에 질려 떠는 모습이 귀엽다니 어떻게 그런 이상하고 나쁜 말을 할 수 있어…?

테이든은 속으로 아차 싶어서 더욱 어여뻐 보이도록 웃었다.

“당연히 농담이지요.”

“놀랐잖아….”

“죄송해요. 아침 식사는 건포도호밀빵과 라즈베리잼, 감자 수프, 자몽에이드를 준비했어요.”

“넌?”

“전 먹고 왔어요.”

테이든이 테이블 위에 식기를 가지런히 차렸다.

헤베의 갈색 눈이 테이든의 위아래를 천천히 훑었다.

화려하고 짙은 보라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몸에 딱 맞게 떨어지는 게, 헤베가 의류점에 가 본 적은 없지만 기성품이 아닐 것 같았다. 특히 상의 전체에 검은색 실로 수놓은 꽃문양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너무 밋밋하지도 않고, 테이든에게 굉장히 잘 어울렸다.

-삐이익.

헤베는 꼬물거리는 새끼들을 작은 요람 안에 집어넣은 후 요람을 안은 채 앉았다. 조금 무게가 있는데, 라고 생각하는 찰나에 테이든이 헤베의 품에서 요람을 가져갔다.

“벌써 어제보다 조금 큰 것 같아요. 새끼들이라는 건 정말 하루가 다르게 크네요.”

“그렇지. 너도 그랬어.”

“…저 그렇게 어리진 않았는데.”

“무슨 농작물처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데 무서웠어. 열여섯 살에 이미 내 키였잖아.”

테이든은 작고 말라서 더 어려 보였다. 맨날 바지 끝자락 붙잡고 애처롭게 ‘절 두고 가지 마세요….’ 하던 어린애였는데 어느 순간 확 어른이 됐다.

언제였더라. 혼수상태였다가 깨어났을 때 눈앞에 있는 사람이 테이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던 기억이 있다. 깊게 가라앉은 자주색 눈과 서늘할 정도로 차분하던 그의 얼굴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물론 가장 잊기 어려운 얼굴은 헤게르미가 보여준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던 남자의 얼굴이지만.

“저는 키만 멀대처럼 컸지 속은 아직 어린애인걸요. 헤베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지나치게 겸손한 발언이었다. 아무것도 못 한다는 테이든 엔더웨이가 열아홉 살에 지휘했던 기사단 총인원이 삼만 명이었다. 알맹이가 어린애라면 핏이 딱 떨어지는 짙은 보라색 의복을 입지도 못할 것이다. 테이든의 몸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넓게 뻗은 어깨와 단단한 체구. 정말 근사한 자태였다.

그 어린 게 어느새 이렇게 잘 자라서 사랑도 하고… 뿌듯했다. 가능하다면 테이든을 바구니에 눕히고 둥개둥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홍빛 말랑말랑한 생각과는 다르게 헤베는 딱딱하게 말했다.

“얘네 체중이랑 신장 기록해놔.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보게.”

“네.”

테이든이 빙긋 미소 지었다. 헤베는 괜히 새끼 마물들만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삑삑.

손가락을 사냥감인 줄 아는지 네 발을 우다다다 움직여댔다. 그 모습이 귀여워 헤베가 소리 내서 웃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들려온 작은 웃음소리에 테이든이 미소 지었다.

“너무 귀엽네요.”

“응.”

-빽.

새끼들이 화답하듯 울었다. 헤베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먕먕이는 어딨어요?”

“일어나니까 없었어. 또 먹이를 구하러 갔나 봐.”

어린 동생들이 생긴 먕먕이는 책임감을 느끼는지 매일 먹이를 구해왔다. 아직 쥐는 잡아 온 적 없지만 어제는 벌레였고 그저께는 박쥐였다.

헤베는 숟가락으로 수프를 휘저었다.

감자는 곱게 갈아 넣어 건더기가 없었다. 한 숟갈 떠먹은 뒤 빵을 나이프로 자르자 부스러기가 사방에 튀었다.

“아, 제가 잘라드릴게요.”

“신경 쓰지 말고 걔네나 보살펴.”

반쯤 일어났던 테이든은 금방 추욱 쳐지며 다시 앉았다. 그래도 요람을 느릿하게 움직여주는 건 잊지 않으니 헤베로서는 정말 세상에 어떻게 이런 착한 놈이 있을까 싶었다.

헤베는 빵을 손으로 작게 뜯었다. 잼을 발라 입에 넣으니 예민했던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빽빽.

-삐익삑.

고소한 냄새가 나자 새끼들이 흥분했다. 헤베는 빵을 딱 절반 뜯어서 조각조각 잘라 빈 접시 위에 올렸다.

“테이든.”

새끼들한테 주라는 뜻으로 접시를 내밀자 테이든이 받아 안에 넣었다.

“지금까지 계속 애들한테 빵을 줬습니까?”

“응.”

“애들이 살찌는 이유가 있네요. 고기도 먹고 빵도 먹고.”

“어렸을 땐 포동포동해야 해.”

“그렇긴 하죠.”

테이든이 빙긋 웃었다. 새끼들에게 나눠줄 것까지 예상해서 크고 두꺼운 빵을 준비하길 잘했다.

새끼들이 빵을 먹느라 조용해졌다.

조용한 방 안에 욤뇸뇸, 열심히 먹는 귀여운 소리만 가득했다. 잘 먹는 새끼들을 보고 있자니 헤베도 허기가 돌아서 식사를 계속했다.

빵을 작게 찢어 수프에 찍거나 스푼으로 잼을 펴 바르기도 하면서 먹는데 갑자기 테이든이 중얼거렸다.

“정말 귀엽네요.”

헤베가 고개를 드니 테이든은 요람 안을 보고 있었다.

아무리 정 떨어뜨리기 대작전 중이지만 이건 매몰차게 굴 수 없었다.

“귀엽지. 열심히 먹는 거.”

“네, 평소에 잘 안 먹으면서 빵은 좋아하는 게 참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아니야. 애들 평소에도 잘 먹어. 얘네는 먕먕이와 같은 나대족이라는 마물인데 나대족은 모두 잡식성이야.”

“…아, 그렇네요.”

테이든의 반응이 한 박자 늦었지만 헤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테이든은 헤베를 쳐다봤다. 활짝 웃는 얼굴이 너무나 눈부신 나머지 헤베는 잠깐 멍해졌다가 이어진 테이든의 물음에 정신 차렸다.

“혹시 오늘 점심 저랑 같이 드실 수 있어요?”

“안 먹어. 밥맛 떨어지는 소리 하지 마.”

“…네… 죄송해요.”

테이든이 다시 풀이 죽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 떨어뜨리기 계획이 초반부터 다소 어긋나긴 했지만 아직 복구할 여지는 충분했다. 헤베는 세계 평화를 지킬 책임이 있었다.

“아, 참. 오후에 풀 에자르 위튼 <마법의 역사> 자필 초판본이 기증된다고 하더라고요.”

챙그랑.

갑작스러운 소음에 새끼들이 귀를 쫑긋하며 머리를 들었다. 헤베가 떨어뜨린 숟가락이 접시와 부딪쳐서 난 소음이었다.

대마법사는 숟가락이 떨어졌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의 역사> 풀 에자르 자필 초판본이라고? 그게 존재해? 어디서 났어?”

“어떤 귀족분이 기증하셨어요. 부궁사분들이 가셔서 진품임을 확인했고요.”

“말도 안 돼! 이런 일은 없었는데.”

전쟁 중에 유실된 줄 알았던 <마법의 역사> 자필 초판본이 존재했다니. 회귀 전까지 통틀어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헤베는 심장이 세차게 뛰어서 가만히 있질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얼른 보러 가자!”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요. 귀족이 가지고 오고 있어요.”

“그럼 마중 나가자!”

“이런… 식사를 마치신 후에 말씀드릴 걸 그랬네요.”

헤베는 테이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겉옷을 챙기기 위해 급히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테이든이 따라 들어오더니 콧김을 뿜고 있는 대마법사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일단 식사를 마저 하고요. 아직 다 안 드셨어요.”

“지금 밥이 넘어가겠어? 호위는 충분히 보낸 거야?”

“남작이 직접 경호 중이에요. 열 시간만 기다리면 헤베의 손에 들어올 거예요. 일단 식사하고 차분히 기다려요.”

“남작? 지첸?”

“네.”

“지첸이면… 분명 강하지만… 네가 갔어야지! 갑자기 사고라도 생기면 어떡해? 그 책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녔는지 몰라?”

“알아요, 헤베. 지금 너무 흥분했어요.”

-뺙뺙.

-삐야악.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 새끼 마물들이 덩달아 목청을 키웠다. 새끼들도 헤베도 호들갑 떠는 상황에서 테이든 혼자 침착했다.

“그럼 식사를 다 한 뒤 함께 마중 나가는 걸로 해요. 그럼 되죠?”

“다 먹었어.”

“남았잖아요.”

테이든이 떼쓰는 어린애를 타이르듯이 어깨와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헤베를 드레스룸에서 데리고 나왔다.

실제로 헤베는 너무 흥분해 현기증으로 머리가 살짝 어지러운 상태였다. 비틀거리며 테이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의자에 앉자 테이든은 등받이 사이에 쿠션도 넣어주고, 무릎 위에도 쿠션을 올려줬다. 그리고 바구니에서 새끼 마물 중 한 마리를 꺼내 품에 안겼다.

“잠깐 쓰다듬으면서 진정하세요.”

선택된 마물은 삑삑이였다. 새끼가 너무 작고 연약하니 팍팍 만져댈 수도 없고, 헤베는 가빠졌던 호흡을 진정시키며 꼬물이 발바닥의 분홍색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후우….”

거칠었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었다.

헤베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과거에 없었던 일이 생긴 건 놀랍지만… 이 꼬물이들을 키우는 것도 과거에 없었던 일 아닌가. 이 정도 이벤트는 일어날 수 있었다.

세상에 <마법의 역사> 초판본이라니. 무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삼백 년 전의 책이었다. 그것도 자필 초판본. 대체 누가 그걸 가지고 있었던 걸까? 집안의 가보로 소중하게 지켜왔을 것이다.

‘저번 세계에서는 테이든이 세계를 멸망시킴으로써 함께 없어졌겠지.’

생각해 보면 전쟁과 세계 멸망으로 없어진 서적이 얼마나 많을까 싶었다.

“헤베.”

헤베는 그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테이든이 어느새 의자를 가까이 끌어와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자색 눈은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아주 깊고 그윽했다.

“좀 진정됐어요?”

“응.”

“그럼 이제 식사 마저 해요.”

“그만 먹을래. 배불러.”

“정말로요?”

“진짜야. 억지로 먹일 거 아니면 그만해.”

단호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힘없이 흘러나왔다. 테이든은 식사가 너무 많이 남아 작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강요하지 않았다.

***

테이든이 차곡차곡 식기를 정리하는 동안 헤베는 외출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나가기 직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둘 다 나가버리면 새끼들은 혼자 남잖아. 아직 마력 조절이 필요해서 애들만 둘 순 없어.”

“데리고 가면 되죠.”

“그런 위험한 길에 애들을 데리고 간다고?”

“…….”

놀라 목소리가 커진 헤베를 테이든이 가만히 바라봤다.

“왜 그렇게 보는데….”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에 헤베의 목소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키 차이가 상당해서 헤베의 고개가 높이 들렸다. 테이든은 의자를 끌어다 헤베를 앉히고는 시선을 맞추듯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는 아주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위험한 길이라고 하는 거예요?”

“위험하니까 위험하다고 하지. 갑자기 도적이 나타나거나 마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어.”

“하지만 세상은 평화를 찾았는데요. 우리가 함께 싸워서 평화를 이룩해냈잖아요.”

헤베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린애 같은 말 하지 마. 전쟁이 끝난 지 아직 이 개월밖에 안 됐어. 숲속에 새끼 마물들이 있던 것처럼 커다란 마물이 아직 숨어있을 수도 있고, 그 책의 가치를 아는 누군가가 훔치려 할지도 몰라. 너랑 내가 아무리 강하다지만 세상에 백 프로 지킬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알잖아.”

헤베는 회귀 전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생을 떠올렸다.

방심하는 순간 절망이 손을 흔든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헤베야, 봐라. 오늘만 오백 명이 죽었다는구나. 네 방심이 무고한 오백 명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보이니?’

전 궁사는 전투가 끝나면 높은 곳으로 헤베를 데리고 가 시체의 산을 보게 했다. 그게 싫어서 울면서 거부하기도 했지만 궁사는 한 번도 봐주지 않았다.

헤베는 거대한 무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정말 방심했나?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나 때문에 죽었구나. 방심하면 안 돼. 항상 긴장해야 해….

“평화를 찾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제 막 마물과의 전쟁이 끝났을 뿐이야. 너무 마음을 놓지 마. 너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 숨어있는 마물들. 세상에 위험한 건 널리고 널렸어.”

“헤베….”

테이든은 헤베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덮었다. 순식간에 온기가 퍼져나가고 몸이 이완되었다.

“알겠습니다. 헤베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군요.”

내 전쟁이라니? 생뚱맞은 소리였다. 헤베는 이해를 못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나뿐만 아니라 너도,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사항이야.”

“네, 그 말이 맞아요.”

테이든은 입매를 끌어올리며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자주색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어서 소용없었다. 스무 살 영웅은 감수성이 뛰어나고 눈물이 많았다. 헤베는 멍하니 테이든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도 기막히게 잘생겼구나 감탄했다.

“제가 좀 더 노력할게요. 평화를 찾기 위해서. 헤베도 노력할 거잖아요. 그렇죠?”

정인에게 애원하듯 아주 애절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데, 평화가 있을 수 있을까.

“헤베.”

대답이 없자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테이든의 손은 좋은 말로라도 매끄럽다고 표현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검을 잡아 온 손은 단단하고 까슬까슬했다. 하지만 따뜻하다고는 말할 수 있었다. 그 어느 손길보다 따뜻하다고.

“그래, 당연히 나도 노력해야지.”

헤베가 입을 열었다.

“평화를 위해서.”

네 평화를 위해서.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 평화롭도록.

헤베의 대답을 들은 테이든은 그제야 안심하는 듯 긴장했던 숨을 토해냈다.

***

둘은 바로 출발하지 못했다. 접선에만 반나절은 걸릴 긴 여정이기에 최대한 안락하고 편안한 마차를 준비해야 했다. 헤베가 누울 정도로 넓으며 천장도 높은 것으로. 마차 준비는 진이 맡았다.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 테이든은 업무를 보러 갔다.

다른 이들과 달리 한가로운 헤베는 새끼 마물들을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품에 안았다.

“얘들아, 먕먕이 좀 불러봐. 이제 곧 나갈 건데 안 보이네.”

-삐이이익.

“그렇지. 좀 더 우렁차게 불러봐.”

-삐약삐약.

새끼들은 아침부터 고기 두 덩이에 빵 반 덩이까지 먹어놓고 계속 밥 달라고 울었다. 꼭 새들의 지저귐 같았다.

“진짜 돼지 되겠어.”

헤베는 새끼들이 큰 모습을 조금 기대했다. 동그래진 두 솜털뭉치는 정말 귀여울 것이다. 두 솜털뭉치와 먕먕이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정말 즐거웠다.

내가 죽기 전에 그렇게 된다면 좋겠다.

“먕먕아.”

헤베는 창문을 열고 먕먕이를 불렀다. 테이든의 주먹 두 개만 한 작은 몸집이지만 마물이라고 청력이 굉장히 좋았다. 근처에 있다면 목소리 정도는 듣는다.

“먕먕아, 얼른 와. 나갈 거야.”

헤베의 혼잣말이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날이 아주 좋았다.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와 머리칼을 흔들었다. 완전한 봄이었다.

“궁사님.”

창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를 진이 불렀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새끼들은 주십시오. 무겁습니다. 제가 안겠습니다.”

“응.”

헤베는 진에게 냉큼 새끼들을 넘겼다. 무거워서라기보다는 진에게 일을 떠넘겨 정떨어지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진의 품에 안긴 새끼들은 검은색 긴 머리를 가지고 장난을 쳐대기 시작했다. 진은 아주 무심한 얼굴로 새끼들을 내려다봤다.

이년 전, 테이든이 먕먕이를 처음 데리고 왔을 때도 진은 저런 얼굴이었다. 테이든은 아주 감성적이고 순하고 여린 반면 진은 이성적이고 차갑고 무뚝뚝했다.

‘이건 마물입니다. 이걸 거두면 분명 시비 거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어리잖아요. 죽게 내버려 두기엔 너무 불쌍해요.’

‘지금은 가여워 보여도 성장하면 인간을 향해 발톱을 내밀 것입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이 아이가 자라면 발톱을 미리 뽑아 놓을게요.’

헤베는 회상 속 대화를 다시 더듬었다.

지금 떠올려 보니 테이든도 거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먀앙.

“먕먕아.”

성문에 도착하니 먕먕이가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이 나타나자 하얀 꼬리가 살랑거렸다.

“이리 와. 타자.”

-먕.

진이 마차 문을 열었다. 지난번 평민들의 시장을 구경했을 때와는 다르게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마차였다. 내부도 훨씬 더 높고, 넓었다. 아예 신발을 벗고 타게끔 되어 있었으며 누울 자리도 있었다. 진은 헤베의 신발을 두 손으로 받아 서랍에 넣었다.

헤베는 바로 길게 자리를 차지하며 누웠다. 담요가 깔려서 생각보다 푹신했다. 아이고,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테이든은?”

“저 왔어요.”

테이든이 늦으면 우리끼리 가자고 할 생각이었던 헤베가 혀를 찼다. 역시 늦을 리가 없다.

테이든은 일찌감치 침상을 차지한 헤베를 보고 부드럽게 웃고는 옆에 앉았다. 진이 밖에서 마차 문을 닫으려 하자 헤베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진, 너는 안 가?”

“저는 마부석에 탑니다.”

“왜, 여기 대여섯 명은 더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데.”

진은 고개를 갸웃하는 헤베와 부드럽게 웃고 있는 테이든을 번갈아 보더니 바깥 공기를 쐬고 싶다는 대답을 하고 문을 닫았다.

곧 마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네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황제가 화 안 내셨어? 너 오늘 일정 다 취소했잖아.”

“폐하는 이런 걸로 화내지 않으세요. 오히려 헤베와 함께 외출한다니까 좋아하셨어요.”

헤베는 삐뚜름히 입술을 올렸다. 황제야 흑마법사가 황궁을 나가기만 한다면 짧은 외출일지라도 환영할 것이다. 어쩌면 자리 비운 틈을 타 방을 샅샅이 뒤질지도 몰랐다. 미지의 학문인 흑마법을 연구하며 혹시 헤베의 존재가 위험을 불러오진 않을지 알아보는 것이다.

-맹옹.

-삐익.

-먕앙.

-삑삑.

먕먕이와 새끼들이 열심히 대화했다. 날개 크기를 비교하는 듯 세 마리가 날개를 펼쳤다가 접었다가 하는데 정말 귀여운 모습이었다. 누워있으니 잘 안 보여 상체를 일으켰는데, 그거 움직였다고 눈앞이 핑 돌았다.

“괜찮으세요?”

테이든이 귀신같이 눈치채고 부축해왔다.

“손 떼.”

헤베는 차갑게 팔을 휘둘렀다. 테이든이 서둘러 손을 거뒀다. 상처받은 얼굴일 게 뻔해서 돌아보지 않았다.

차분히 혼자 생각해 보니 아까 식사할 때 테이든이 왜 그렇게 슬퍼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걸 보며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그러고 보니 너….”

헤베가 테이든을 흘겨봤다.

“단검을 가지고 다니잖아. 갑작스러운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서 갖고 다니는 거 아니야?”

“…….”

헤베가 테이든의 오른쪽 허벅지를 가리켰다. 거침없는 시선이었다.

“잘 준비하고 있으면서 왜 괜히 그렇게 말했어. 네가 세상이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방심한 줄 알았잖아. 여차할 때는 꺼내서 휘둘러.”

“이건… 아직 한 번도 휘두른 적 없어서요.”

“장식용이야?”

“그건 결코 아닙니다. 언젠가 꼭 보여드리지요.”

테이든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때 도로에 돌이 있었는지 마차가 크게 움직였다. 헤베가 휘청거리자 테이든이 빠르게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

“역시 약을 먹는 게 좋겠어요.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서요.”

“싫다고 했지.”

“헤베가 싫다면 저는 약 짓는 데 손 안 댈게요. 요정족과 에덴타인들, 헤베의 친구들에게 만들라고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드셔주세요.”

요정족은 진, 에덴타인들은 파와이와 밀리안, 헤베의 친구들은 지첸과 파르테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모두 멀쩡히 이름이 있지만 테이든은 헤베 외에는 다른 이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그만 말해. 너 때문에 더 머리 아파.”

“…….”

아프다고 하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헤베는 테이든의 우울한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침울한 기운은 막을 수가 없었다.

-뺘아악.

먕먕이는 둘의 눈치를 보는데 꼬물이들만 태평하게 울었다.

헤베가 마차 벽에 기대앉아 새끼들을 구경하자 테이든은 쿠션 두 개를 내밀었다. 헤베는 이건 거부하지 않았다. 등 뒤에 하나, 품 안에 하나. 마차 안에 있던 쿠션 두 개를 모두 차지했다.

헤베는 새끼들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힐끔 테이든을 봤다. 속상하고 서운하다는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느끼고는 퍼뜩 눈을 마주쳐왔다. 화악- 표정이 밝아지는 게 강아지 같기도 하고 무척 귀여웠다. 하지만 헤베는 일부러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관심사는 오직 이 마물들 뿐이라는 듯 단호하게.

“저… 새끼들한테 이름 안 지어주세요?”

테이든이 머뭇머뭇 말을 걸었다.

헤베는 대답하지 않았다.

“헤베가 짓지 않는다면 제가 지어줘도 될까요?”

“…….”

“헤베랑 제 이름, 먕먕이 이름까지 따서… 테헤먕이랑 이베먕 어때요?”

“미쳤어?”

어지간하면 심한 말 하지 않는 헤베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심한 말을 해버렸다.

“왜요? 이상해요?”

“일부러 이상하게 지어도 그렇게는 못 짓겠는데.”

이상하다 못해 괴기한 이름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테이든은 헤베에게 타박받았음에도 오히려 활짝 웃었다.

“죄송해요. 옛날부터 저더러 네이밍 센스가 없다고 헤베가 그랬잖아요.”

“그랬지. 넌 먕먕이 이름도 ‘마물이’라고 지으려고 했었어.”

모두가 기함하며 귀를 의심했던 순간이었다.

“헤베가 지어주세요. 전 그런 이상한 이름밖에 생각이 안 나요.”

“먕먕이가 주워온 애들이니까 최대한 같은 결로 하자. 삑삑이나 빽빽이 어때.”

“너무 좋아요. 정말 잘 어울리는 좋은 이름이에요.”

테이든이 손뼉을 치며 칭찬해왔다. 마부석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진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옛날부터 생각했지만 헤베는 이름을 잘 지어요. 센스가 있어요.”

“동물들 이름을 몇 번 짓다 보니까 능숙해졌나 봐.”

“오, 이름 지어준 동물이 또 있어요?”

“어릴 때 새 두 마리를 키웠거든. 꼬꼬랑 꾸꾸라고 이름 지어줬어.”

“정말 귀엽고 예쁜 이름이에요.”

“이 정도 가지고 뭘. 아, 예전에 키운 강아지 이름은 멍멍이였어.”

“무척 잘 어울리네요.”

테이든은 ‘어울린다’, ‘좋은 이름이다’라는 말밖에 못 하는 인형처럼 굴었다.

“그런데 헤베가 새랑 강아지를 키운 적 있는 줄은 몰랐어요. 몇 살 때요?”

“거의 15년 전인가….”

“열한 살이면 전쟁터에 있을 때네요.”

“응, 편지를 전달해주는 매 두 마리랑 마물탐지견 한 마리를 키웠어.”

“아….”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키운 게 아니라 헤베가 속한 마법사단에서 오로지 전투 목적으로 키운 동물들이었다.

“진짜 귀여웠는데. 시간이 없어서 자주 못 놀아줬어.”

헤베는 동물들과 놀고 싶었는데 전 궁사가 개와 놀 시간에 숨어있는 마물이나 한 마리 더 찾으라고 혼을 내는 바람에 자주 놀지 못했다. 한번은 반항심이 싹 터서 강아지랑 한 시간이나 놀았고, 이튿날 교전에서 패배했다. 전 궁사는 훈련해야 할 시간에 개나 끌어안고 게으름을 피우니까 이렇게 된 거 아니냐며 시신을 묻을 무덤을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파라고 했다. 헤베는 울면서 땅을 팠다. 그 뒤에는 강아지와 새들이 어떻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랬군요.”

테이든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헤베의 설명이 없더라도 어떤 이별을 맞이했을지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 테이든은 헤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제는 애들과 실컷 놀라든가, 당신을 착취한 전 궁사와 선황은 쓰레기라든가…. 그러한 말을 해서 어설프게 위로하거나 화내게 만드는 대신 테이든은 헤베의 손을 들어 먕먕이 배 위에 올렸다.

-먀악.

먕먕이가 짧게 울면서 손길을 음미했다. 헤베도 마찬가지로 먕먕이의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뱃살을 음미했다.

그리고 테이든도 헤베의 손등을 만끽했다….

테이든은 완전히 안심했다. 먕먕이 배를 만지는 척 헤베의 손을 주물럭거린다는 걸 절대로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손 떼.”

그랬기에 테이든은 헤베의 살벌한 말투에 무척 놀랐다. 그는 설마 싶어서 서운한 시선을 보냈다.

“너무해요. 저도 먕먕이 배 만지고 싶단 말이에요.”

“먕먕이 배가 아니라 내 손 만지고 있잖아.”

“…그걸 눈치챘다고요?”

테이든의 눈이 더 커지기 힘들 만큼 커졌다.

마부석의 진 또한 놀라서 마차를 멈출 뻔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았죠? 오십 년은 지나야 눈치챌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바보인 줄 아나. 수작질하지 말고 얼른 떼. 사랑하는 마음 숨기라고 분명 말했어.”

“죄송해요.”

테이든은 다소 마른 손등에서 손을 떼며 사과했다. 하지만 눈빛은 매우 스산하고 어두웠다. 이런 식의 야비한(?) 신체 접촉을 헤베가 알아챘다는 건 놀라운 정도를 떠나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이 또한 요근래 헤베가 일으키고 있는 큰 변화 중 하나였다.

헤베는 그 서늘한 시선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틈만 나면 날 만지려고. 정말이지.’

헤베는 먕먕이를 안고서 테이든에게 등 돌렸다.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창밖으로 봄 풍경이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초록 가득한 나무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사실 헤베가 테이든의 수작질을 알아낸 건 요며칠 들려온 생각 때문이었다.

살이 다 비치는 얇은 옷을 입은 자신이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면서 테이든의 벗은 몸을 쓰다듬는 것까지는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테이든은 그런 자신 위에 올라타더니 양손을 구속한 채 목덜미를 깨물고… 자신은 얌전히 누워 얼굴을 붉히질 않나…. 왜 깨무는 거야. 이갈이야?

테이든의 음험한 생각과 망상을 떠올리던 헤베는 몹시 더워져 손부채질했다. 성적인 경험이 전무한 헤베로서는 처음 그런 망상을 봤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다.

이렇게 순수하고 여린 애가 그런 욕망을 품고 있다는 건 정말 충격적이었다.

‘본래 사랑이 성적인 그런 걸… 동반하는 거라지만.’

먕먕이를 쓰다듬던 손바닥은 따뜻했고, 테이든에게 덮였던 손등은 뜨거웠다. 저 녀석은 파렴치하게도 손가락까지 얽히려 들었다. 헤베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포효하고 싶고 마차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싶었다.

‘그런 자세가 가능하긴 할까?’

자꾸만 망상이 떠오르자 헤베의 목덜미까지 빨갛게 익었다.

그 모습을 테이든이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지만 귀족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진은 마차 안에 들어가서 기다릴 것을 권했지만 헤베는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숲을 거닐고 싶었다. 마음도 좀 가라앉히고 싶었고, 인적 드문 숲을 발견하면 꼭 주변을 둘러봐야 불안감이 사라졌다.

헤베의 습관을 아는 진이 말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아니, 너는 먕먕이랑 새끼들을 봐줘야지.”

“제가 따라갈게요.”

테이든이 손을 번쩍 들었다. 헤베가 움찔했다.

“너는 더더욱 싫어. 세상에 너 혼자 남아도 너랑 같이 안 갈 거야.”

“물론 제가 너무 싫으시겠지만, 말씀하셨던 것처럼 마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고 도적도 너무 위험하고요.”

“내가 그따위 것들한테 당할 것 같아?”

“헤베는 강하죠. 제 얘기는 헤베가 위험하다는 게 아니라… 절, 보호해달라고요. 헤베가 없는 곳에서 저는 마물이나 도적한테 당할 수도 있어요. 너무 위험하단 말이에요….”

테이든의 말을 들은 헤베는 기가 막혔다. 황궁에서 수도 외곽까지 뛰어오는 인간이 할 말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진조차 드디어 미쳤냐는 눈빛으로 테이든을 쳐다봤다.

“저도 다치고 피가 나오는 사람인데….”

테이든이 어깨를 움츠리며 우물쭈물하자 헤베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테이든이 이런 숲 하나 정도는 검 한번 휘둘러서 다 파괴해버릴 정도로 강하다는 걸 아는데, 저 애처로운 자색 눈동자와 가련한 표정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단검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한 번도 휘두른 적 없다는 마음 약한 애가 아닌가….

“절 보호해주셔야지요. 수도원에서 데리고 나올 때,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위험에 빠지게 하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언제나 지켜주시겠다고.”

“알았어. 대신 말도 걸지 말고 이상한 짓도 하지 마.”

“네.”

테이든은 급기야 어렸을 적 얘기까지 꺼내며 헤베의 감성을 자극했다. 이러다 녀석이 울어버릴까 걱정됐던 헤베는 결국 수락했다. 거창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근처 산책일 뿐인데, 신이 난 테이든 뒤로 방방 흔들리는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

테이든과 헤베는 진에게 먕먕이와 새끼들을 맡겨두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솨아아-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무척 아름다웠다. 백사장에 부딪히며 흩어지는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수많은 군중이 모인 시장 소리 같기도 했다. 사실 헤베는 백사장에 가 본 적 없었지만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바스락, 바스락. 한 발 디딜 때마다 수풀과 흙 내음이 퍼졌다. 하얀 햇살이 초록색 잎사귀 사이사이로 비쳐왔다. 거대한 나무 기둥에는 이름 모를 벌레들이 기어 다녔고,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에도 연두색 이파리가 매달렸다.

과거에도 똑같은 봄이 왔을 텐데, 헤베는 그때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만끽하질 못했다. 오히려 죽고 나서야 봄이 왔다는 게 실감 났다.

꼭 살아 있는 것 같다.

헤베는 도저히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옆을 올려다봤다.

예상대로 그를 보고 있던 테이든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우거진 나뭇가지로 비춰오는 봄 햇살에 반짝이는 금색 머리칼, 눈이 마주치자 잠시 놀랐다가 곧 웃음 지어오는 자줏빛 눈동자. 밝고 건강한 상아색 피부와 곧은 콧대, 완벽한 비율의 이목구비. 근사한 보라색 의복은 그와 상당히 잘 어울렸다. 당장 화가를 불러 그림으로 영원히 남기고 싶을 정도로.

“헤베….”

테이든이 멍하니 말했다.

“지금 정말 멋있어요. 잠시만 그대로 계셔주시면 안 돼요? 화가를 불러올게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헤베는 다시 틱틱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냉정해지려고 해도… 오랜만에 테이든과 함께 산책하니 참 좋다.

전쟁터에서는 종종 한밤중에 이렇게 막사를 나와 같이 걷고는 했다.

과거 그가 죽을 때쯤엔 방 안에서 몇 걸음 걷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산책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진통제 대용의 마약을 구하러 갈 때는 수명을 갉아먹는다는 걸 알면서도 무조건 마법을 이용했고, 마법을 사용하면 흑혈화 현상으로 더 고통스러워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혈관이 검게 변한 뒤에는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고 통증이 멈추지 않는다. 헤베는 그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고통스럽기 전에 죽을 생각이었다.

“잠깐만요. 독 있는 가시덤불이에요.”

갑자기 눈앞에 팔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테이든이 검을 뽑더니 헤베에게 파편 하나 튀지 않게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고서 앞에 있던 수풀 가지를 쳐냈다.

‘이 녀석이 이렇게 컸었나?’

심장이 또 뛰기 시작했다.

독 있다는 가시덤불 가지와 이파리가 다 녀석 몸에 부딪혔지만 걱정조차 들지 않는 듬직한 등이었다. 소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된 건지.

“이쪽으로는 사람들 왕래가 없었나 봐요. 동물들도요.”

“그렇게 깊은 숲은 아닌데 이상하네.”

마차를 세워둔 곳에서 오십 미터도 채 되지 않은 거리였다. 수상한 느낌이 든 헤베는 테이든을 앞세워 좀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발밑 조심하세요.”

테이든이 아까보다는 진지한 표정으로 전진해나갔다. 과연 동물들도 다니지 않는 길이 맞는지 발밑이 무척 험했다. 비춰오는 햇살이나 살랑이는 봄바람까지 달라진 건 없는데 수풀이 좀 더 우거졌다. 테이든은 걸음을 멈췄다.

“안쪽에 뭔가가 있습니다.”

“살아 있어?”

“아니요. 차갑고 작아요. 사체 같은데요.”

“마물 사체인가. 마물이라면 동물들이 근처에 오지 않는 것도 설명돼.”

“정말 싫으시겠지만 제가 헤베를 안아도 될까요?”

“싫은데….”

“하지만 길도 너무 험하고 갑자기 위험한 게 튀어나올지도 몰라요.”

“너한테 안겨 있으면 그 위험한 게 날 공격하지 않아?”

“네.”

“…….”

“제가 이 숲에서 가장 강한 포식자라서 공격하지 않을 거예요….”

테이든이 무척 수줍게 몸을 꼬며 말했다. 언제는 약한 것처럼 굴더니 이제는 자기 자랑을 하는 두 뺨이 발그레해졌다.

“이건 사랑하는 감정과는 별개예요. 전쟁터에서도 이럴 때면 제가 당신을 안고 이동했잖아요.”

사실 그 말이 맞았다. 헤베는 테이든에게 자주 안겨 이동했다.

테이든은 열여덟 살에 본격적으로 전쟁이 투입되었다. 열세 살에 황궁으로 들어와 오 년간 훈련을 받던 테이든은 전쟁터에 들어오고 나서야 헤베가 얼마나 위험한 환경에 둘러싸여 살았는지를 알았고, 얼마나 덤벙거리는지도 알게 되었다.

사실 덤벙거린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다.

보통 마법사는 후미에서 공격하지만 헤베는 사령관으로서 항상 선두에 섰고, 당연히 부상도 잦았다. 발목이 골절되고, 정강이가 부러지고, 팔뚝이 꿰뚫리고, 뇌진탕을 당하기도 하고…. 헤베의 신체는 다 부서진 유리 세공품을 강력한 마법으로 수습해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몸으로 독을 내뿜는 마물들 시체로 뒤덮인 바닥이나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는 동굴을 걷는데, 계속 휘청거리고 비틀거려 도저히 가만 볼 수 없어진 테이든이 헤베를 안아 들었다.

펄쩍 뛰는 총사령관에게 테이든은 침착한 목소리로, 이렇게 이동하는 게 효율적이라며 설득했고, 수하들도 그게 낫겠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귀가 얇은 헤베는 친위대의 세뇌에 넘어갔다.

“이젠 안 그래.”

헤베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는 너한테 안겨서 이동하지 않아.”

수줍던 테이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상처받은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자신이 없어서 헤베는 테이든을 등지고 앞서 걸었다.

마법을 사용해 검을 만들어낸 후 우거진 수풀을 쳐내자 뒤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헤베, 제가… 제가 할게요.”

“시끄러워.”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비센티아와 테이든을 위해서 이러면 안 되는데.

헤베는 지금까지 자신을 아주 굳은 의지를 가진 마법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갈팡질팡하는 갈대였다. 테이든도 상대가 저한테 다정했다가 쌀쌀맞다가 하니 헷갈릴 만했다. 차라리 헷갈리게 들었다 놨다 하는 자신에게 정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뒤에서 침울한 훌쩍거림이 들렸다.

‘우는 건 아니겠지.’

테이든이 울고 있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 정말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그때에도 그랬다.

수도원에서 테이든을 데리고 나올 때.

***

헤베의 십대 시절은 온통 피와 살점, 고막을 찢을듯한 비명뿐이었다. 여덟 살부터 스물여섯까지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보낸 시간을 다 합쳐도 백일이 안 될 것이다.

열아홉 살, 어느 날. 어떤 이유로 친구인 파르테와 함께 황성에 머물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헤게르미의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신관이 달려와 외쳤을 때 뭘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백 년 만의 신탁에 모두가 흥분했던 것만은 기억한다. 열아홉 살에 이미 ‘궁사’라는 지위를 받아 탈리 제국의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대마법사 헤베는 황제와 함께 신탁의 내용을 들었다.

「푸른 불꽃의 지대에서 태어나 달빛을 품으며 성장한 어린 소년이 장차 비센티아에 평화를 이룩할 것이다」

한 마디로 세계를 구할 영웅의 등장을 예고하는 내용이었다.

푸른 불꽃의 지대는 마물에게 먹힌 농작지를 말하는 것이고 달빛을 품으며 성장했다는 건 수도원에서 자랐다는 뜻이다. 대마법사인 헤베 뮨이 신탁의 주인공을 찾는 일에 나선 건 아주 당연했다. 사람들은 그가 마침 황성에 머물고 있었던 것 또한 헤게르미가 안배한 일이라고 말했다.

헤베와 파르테는 신탁의 주인공을 찾아 한 수도원까지 다다랐다.

수많은 아이 중에서 한 명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처음 보는 순간 그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파르테도 알았을 것이다.

꼬질꼬질한 아이들 가운데에서 홀로 꼿꼿한 등과 밝고 총명한 눈빛, 건강한 살구색의 피부. 마치 확인사살을 해오듯 햇빛 한 줄기가 테이든 엔더웨이를 내리쬐고 있었다.

다만 아이는… 강단 있어 보였던 첫인상과는 달리 매우 여리고 순한 성격이었다.

수도원을 나올 때 아이는 계속 훌쩍거리며 울었다. 헤베와 파르테가 강제로 데리고 나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테이든은 헤베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떠나지 말라, 여기서 함께 살자고 말하며 울었고, 헤베가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 그럼 너도 같이 가겠냐 했더니 그러겠다면서 또 울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헤어지면서도 울고, 뒤를 따라오면서도 내내 울었다.

헤베의 옷자락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꼭 붙잡은 채.

총명한 아이는 자신이 무언가 특별하다는 사실도, 수도원을 나가야만 한다는 것도 인지했지만 그럼에도 두려워했다. 어린 나이에 낯선 이를 따라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향한다는 걸.

그 두려움은 헤베도 아주 잘 알았다.

당시 테이든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고, 헤베가 처음 낯선 이를 따라 전쟁터로 향했던 나이는 여덟 살이었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헤베는 어린 소년을 안아 올리지도 못하고 다정하게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다만 눈물범벅이 된 소년의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널 지켜줄게.’

‘…….’

‘보호해줄게. 두렵겠지만… 괜찮아. 나는 아주 강하단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넌 위험에 빠지지도 않을 거고 아주 안전하게 영웅이 될 거야.’

‘영웅이 되면… 뭐가 좋은데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지.’

‘다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너도, 다른 사람도.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할 수 있단다.’

‘그럼 전 영웅이 되고 싶어요.’

‘그래. 내 목숨을 걸고 약속할게.’

‘…….’

‘널 영웅으로 만들 거야.’

그 짧은 대화를 통해 헤베는 알았다.

자신이 마법에 재능을 타고난 건 이 소년이 완전히 성장할 때까지 보호하라는 신의 뜻이었다는 것을.

***

“헤베!”

테이든의 외침이 들리고 몸이 홱 돌아갔다. 헤베는 과거의 상념에서 깨어나 퍼뜩 정신 차렸다.

“괜찮아요?”

심장 떨리게 하는 잘생긴 음성이 몹시 지척에서 들렸다. 그렇게 눈물이 많았던 소년이 이제 남자가 되어서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거 놔. 건들지 말랬지.”

“죄송해요. 하지만 너무 놀라서….”

헤베는 허리를 끌어안은 녀석의 손을 탁 치자 테이든이 우울하게 팔을 거뒀다. 자유롭게 풀려난 그는 그제야 주위를 살폈다.

테이든은 놀란 것 같지만 헤베로서는 예상대로였다.

마물 사체가 있었다. 다만… 한 구가 아니라 두 구였다.

“사랑하는 사이인가 봐요.”

테이든이 나직하게 말했다. 마물 보고 연인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 단어가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어 보였다. 다른 종의 마물 두 구가 서로를 품에 안은 채 죽어 있었으니까.

테이든이 가까이 다가가 검으로 사체를 뒤집었다. 악취는 나지 않고 다만 서늘한 기운만 풍겨왔다.

“주변 수풀이 우거진 걸 보면 죽은 지 오래됐는데 사체는 안 썩었네요. 겉으로 보기엔 꼭 동반 자살한 것 같기도 합니다. 둘이 끌어안고 있잖아요.”

“하나가 죽은 뒤 다른 하나가 따라 죽은 걸지도 모르지.”

“정말 마물도 자살을 하나요?”

“응.”

헤베는 전쟁터에서 마주친 마물들을 떠올리며 답했다. 생김새는 징그러운 괴물들이었으나 강력한 마법에 두려워하고, 두려운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모습을 보며 ‘저것들도 살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상하네요. 왜 안 썩었을까요.”

테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헤베도 의문이었다. 아무리 마물이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라도 썩지 않는 마물은 없었다. 헤베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살펴봤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독성이 있을지도 몰라요.”

“내가 흑마법사인 건 알지?”

“그래도…….”

“뒤집어봐.”

“네.”

테이든이 검집으로 사체를 뒤집었다. 아주 새까맸다. 사체는 온전한 모습이었으나 새까만 것에 뒤덮여 있었다.

“피를 많이 흘렸네요.”

그 새까만 것은 바로 피였다. 마물의 피는 사람처럼 붉지만, 시간이 지나면 밤하늘처럼 새카만 색으로 변한다.

마치 지금 헤베의 몸속 피처럼.

흑마법을 몸에 받아들인 후 나타난 흑혈화 현상.

붉은 피가 검게 물드는 현상. 헤베가 처음으로 발견했고, ‘흑혈화 현상’이라고 이름 붙였다. 흑마법사가 되면 피가 까맣게 변한다는 사실은 마법 학문을 뒤집어엎을 경이적인 발견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현상을 아는 사람은 그 밖에 없어서 찬사받지 못했다.

“사체에 깊은 상처가 있군요. 이 개체가 곧 죽을 걸 알고 다른 하나도 따라 죽은 모양이에요. 정말 사랑했나 봐요. 종이 다른데도… 너무 안타까워요.”

테이든은 헤베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알 것 같아요. 저도 이런 선택을 할 거니까요.”

“내가 죽으면 따라 죽겠다는 뜻이야?”

“저한텐 헤베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으니까요….”

테이든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면서 두 뺨은 또 수줍게 물들였다. 헤베는 혀를 찼다. 하긴 녀석은 자신을 따라 동반 자살한 것이나 다름없긴 했다. 다만 그 자살 스케일이 비센티아 전체 규모라서 그렇지….

“너는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됐어. 어렸을 때부터 날 동경해 온 마음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거지. 많은 사람을 만나봐. 마음이 달라질 거야. 가령… 루니스 율리라든가.”

“누구요? 그 백작이 여기서 갑자기 왜 나와요?”

루니스 율리는 과거엔 백작이었고 지금은 부궁사라는 지위에 올랐다. 다른 부궁사들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져서 흑마법사인 헤베가 성을 떠나고 나면 루니스 율리가 궁사가 될 터였다. 그러나 테이든은 아직도 그 자식을 백작이라고 불렀다.

“예쁘잖아.”

파직.

갑자기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리니 테이든의 검집이 ‘너무 안타까운’ 사체 두 구를 짓이기고 있었다.

“헤베는… 그렇게 생긴 게 예뻐요?”

테이든의 목소리가 무척 음산하게 들렸다. 헤베는 고개를 삐걱거리며 녀석을 쳐다봤다.

“예, 예쁘지. 화려한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이 무척 잘 어울리고 새침한 성격도 귀엽고….”

“귀엽다고요?”

다시 퍼억, 소리가 났다. 마물 사체가 완전히 짓이겨졌다. 하지만 테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사체 짓이기는 소리보다 더욱 섬뜩했다.

“그런 여리여리한 팔목으로는 헤베를 지켜줄 수 없어요. 마법 주문을 외우는 사이 가장 먼저 당할 거예요. 붉은 머리가 뭐가 화려해요? 지긋지긋한 색깔인데. 그리고 눈동자 색이, 파랬다고요? 파란색이었는 줄도 몰랐네요. 너무 평범해서요. 자세히 들여다본 적도 없는데 헤베는 참 자세히 관찰했나 보네요.”

이 년간 같은 전쟁터에서 동고동락했는데….

“헤베는 정말 차가운 사람이네요.”

지금 이 순간 네가 제일 차가워….

헤베는 차마 말로 하지는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언제는 절 가장 귀엽다 해주셨으면서.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지금 너무 흥분했어.”

“죄송해요. 이제 제가 귀엽지 않다고 하셨죠. 징그럽다고도 했죠. 그럼 이건 어때요? 제가 붉게 머리를 물들면.”

“하지마!”

헤베는 기겁해서 소리쳤다.

“염색 같은 소리 꺼내지도 마. 그 찬란한 금발에 무슨 짓이라도 했다간 가만 안 두겠어.”

금발은 흔했지만 테이든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은 세상에 없다. 지금도 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저 금발은 테이든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헤베가 주먹까지 쥐며 협박하자 테이든은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래도 아직 제 머리색은 어여쁜가 봐요.”

서늘했던 목소리가 좀 누그러졌다.

“이 얘기 그만해. 네 머리칼 건들지 말고. 그리고 날 좋아한다는… 표현도 앞으로는 하지마. 부담스러우니까.”

“네, 죄송해요.”

테이든은 대답은 바로 했지만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헤베는 한숨을 쉬며 테이든이 짓이겨놓은 마물 사체를 바라봤다. 이젠 그냥… 덩어리에 불과했다. 덩어리들.

테이든의 조치가 거칠긴 했지만, 이대로 두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썩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바스러트리는 게 옳긴 했다. 그래야만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썩어 없어지고 이 숲에 사는 많은 생명도 평화를 찾을 테니까.

“얘네 묻어주고 가자.”

“흙이 튈 수 있으니 떨어지세요.”

테이든은 예상했다는 듯 검집으로 주변의 흙을 파내 사체 위로 덮어주었다. 빠르게 작은 무덤이 만들어졌다. 헤베는 그게 테이든과 자신의 미래 같았다. 회귀 전 테이든과 자신의 미래.

이 세계에서는 그렇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

돌아가는 길은 두 사람이 오면서 다져놓은 덕분에 걷기 수월했다. 그래도 중간중간 옆으로 뻗친 잔가지들이 있었는데 테이든이 재빠르게 제거했다.

헤베는 검집에 묻은 검은 피가 신경 쓰였다. 테이든은 검이 많고 검집도 수십 개 가지고 있는데 오늘 차고 나온 것은 그나마 검은색이라서 티가 덜 나긴 했다.

그래도 주위에 나뭇가지 많은데 그걸로 뒤적거리지 왜 검을 써가지고….

“검집, 돌아가면 바로 씻어.”

“네, 헤베도요.”

“나?”

“손목에 튀었어요.”

그 말에 헤베는 양손을 들여다봤다. 테이든이 오른쪽이요, 라고 나직이 말했다. 과연 오른쪽 손목에 검은 피가 튀었는데 아주 작아서 보려고 해도 잘 보이지 않았다.

“…….”

하필 피가 튄 부분이 손목 혈관 쪽이었다. 순간 이게 지워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 헤베는 길을 따라 걸으며 손목의 검은 피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살짝 흐려졌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테이든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마물의 왕은 처음부터 피가 붉지 않고, 까만색이었지요. 몸에서 나온 뒤에 오히려 붉게 변했고요.”

“뭐?”

헤베는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테이든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모르셨어요?”

“완전 처음 듣는데.”

과거를 통틀어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마물의 왕 피가 처음부터 까맸다고?”

“정확히는 살았을 때만 검은색이었어요. 죽고 나니까 붉어졌죠. 마물과는 반대로요.”

마물의 피는 몸 안에 있을 땐 붉은색을 띠고, 마물이 죽으면 검게 변한다. 헤베는 지금까지 모든 마물이 그렇다고 알고 있었다.

“아, 그때 헤베는 부상당해서… 못 왔으니까요. 그래서 몰랐나 봐요.”

테이든이 마물왕을 죽일 때 헤베는 부상당한 몸으로 심문받고 있었다. 흑마법사가 된 이유가 무엇인지, 이후로 악한 짓을 하지는 않을지.

그 사실은 당연히 테이든에겐 비밀이었다. 안다면 당장 황제에게 앙갚음하고 탈리 제국을 떠나버렸을 것이다. 테이든 뿐 아니라 친위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모두 몰랐다.

“그럼 나중에라도 얘기해줬어야지.”

“왜요? 그게 중요한가요?”

태평한 물음에 헤베는 조금 흥분했다.

“말이라고 해? 마물왕의 피가 죽은 후에 붉어졌다는 사실은 흑마법이란 학문에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어.”

“흑마법은 학문이 아니에요. 마물이 인간에게 남긴 저주이죠. 연구할 가치가 없습니다. 헤베가 흑마법사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말이에요.”

가차 없는 말이었다. 과거에도 테이든은 헤베가 흑마법을 받아들인 걸 몹시 싫어했다. 함께 헤게르미에게 기도를 올리곤 하던 신앙심 깊은 신도인 헤베가 갑자기 흑마법사로 전향하니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둘은 이 문제로 자주 다퉜다. 헤게르미에게 사죄의 기도를 드리고 흑마법을 버리라는 충고도 많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헤베는 짜증 내며 녀석을 내쫓았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제발요, 헤베. 제 말을 들어요. 흑마법은 분명히 당신 몸에 이상이 생기게 할 거예요.’

‘걱정하는 척하지 마. 흑마법 때문에 전염병이 생겼을까 봐 의심하는 거잖아.’

‘아니에요. 제가 걱정하는 오직 당신 하나뿐입니다. 설령 전염병이 생겼다 하더라도 전 언제나 헤베 곁에 있을 거예요.’

‘거봐. 역시 내가 전염병을 유행시킬까 봐!’

지금 떠올려 보면… 테이든은 헤베를 진심으로 걱정했던 게 맞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이상이 생길까, 노심초사하던 청년이었다.

죽는 날은 가까워지고 몸 상태는 악화되고, 누구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악순환에 속은 좁아지기만 해서 헤베는 녀석의 걱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시체를 안고 울부짖던 모습은. 헤베는 과거의 테이든을 만나서 사과하고 싶었다.

날 사랑했던, 그래서 동반 자살을 선택한 그 애에게 네 걱정을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일은 신인 헤게르미조차 불가능하다.

후회가 마음을 잠식해왔다.

미안해진 헤베가 테이든을 쳐다봤다. 본인이 가차 없이 말해 놓고서 상대의 기분이 안 좋아진 걸 알고 눈치를 살피는… 흑마법사를 사랑하는 청년.

헤베가 사과할 대상은 이 세상에 없다. 영원히, 헤베는 자신을 걱정하던 그 아이에게 사과하지 못하게 됐다.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래, 흑마법 따위가 무슨 학문이겠어.”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네 말이 맞아. 마물왕의 피가 원래 까맣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그걸 연구한다고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 혼란만 일으키고 끝이지.”

“…그럼 헤베도 흑마법을 그만둘 거예요?”

테이든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테이든의 눈 색은 주로 자줏빛이지만 때에 따라 보랏빛을 띨 때도 있고 햇빛을 받으면 붉게 빛날 때도 있다. 지금이 그러했다.

“난 안 그만둬.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몸속의 마기를 내보내면 되잖아요.”

“이미 늦었어.”

회귀 전에도 여러 번 들어온 소리였다. 흑마법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흑마법사가 되었다면, 다시 내보내면 되는 것 아니냐.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이미 헤베의 몸은 마기와 하나가 된 상태였다. ‘실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완전히 하나로 융합해야만 했다.

“과거에는 몸 안의 흑마법을 내보내 정상으로 돌아온 흑마법사들의 기록이 있어요.”

“정말 웃기는구나.”

헤베가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렸다.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감히 나를 가르치려 해? 평생 검만 잡아 왔으면서 뭘 안다고? 지금 나와 겨룬다고 해도 네가 검을 꺼내기도 전에 내 마법이 이길 텐데. 이 세계에 흑마법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자가 있나?”

헤베가 턱을 한껏 치켜들고 아주 오만하게 말하자 테이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헤베는 지금까지 한 번도 테이든의 실력을 폄하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로서 다소 자만하긴 하였어도 남의 실력을 깎아내린 적은 없었으니 테이든도 내심 놀란 것이다.

충격받은 듯이 다소 커진 눈을 보면서 헤베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나에 대한 호감이 떨어졌을까.’

기대인지 불안인지 모를 감정이 든 헤베는 하루에 한 번 사용 가능한 생각 읽는 마법을 사용했다. 읊고 싶지 않은 주문을 외우자 테이든의 생각이 흘러들어왔다.

-그의 말이 맞아. 나는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어쩌면 흑마법은 생각만큼 사악한 마법이 아닐 수도 있어. 정말 악한 것이었다면 헤베가 그 마법을 사용할 리가 없잖아.

헤베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맙소사.

날 얼마나 사랑하면 흑마법에 대한 시선마저 달라지는 거야.

“이 얘기는 그만하자.”

헤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테이든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머뭇거렸지만 곧 뒤를 따라왔다.

-그는 정말 작아. 어렸을 때는 그렇게 커 보였는데.

테이든의 생각이 이어졌다.

-나는 너무 큰데 괜찮을까.

-넘어질 것 같아서 불안하군.

-안고 가면 안 될까. 거부한다면 힘으로 억누르고.

-그런 짓을 하면 날 싫어하겠지만 이미 날 싫어한다면 저질러도 되지 않나.

헤베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자 생각의 방향은 금세 바뀌었다.

-추운가.

-내가 그를 안고 간다면….

-그는 아주 가볍지. 힘주면 바로 부러지기 때문에 세심하게 조절해야 해. 안고 싶어.

“다 왔다, 저기 보이네!”

마차 지붕 끄트머리가 보이자 헤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법의 시간이 끝났는지 그 뒤로 테이든의 생각은 들려오지 않았고, 다행히 강제로 안으려 하지도 않았다.

헤베는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마물왕의 피는 어째서 다른 마물과 달랐던 걸까. 여덟 번, 모든 마물왕의 피가 그런 특징을 지녔을까?

학자로서 호기심이 일어났으나 연구할 방법이 없었고, 괜히 테이든에게 한 번 더 말을 꺼냈다가는 쓸데없는 호기심이 피어날까 봐 무서웠다.

***

돌아갔을 때 이미 귀족 일행은 도착한 후였다.

“궁사, 왜 이렇게 늦어. 산책 갔다는 사람들이 너무 안 와서 사람 풀 뻔….”

지첸이 왜 이렇게 늦게 오냐며 타박하려다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테이든이 저렇게 가당찮은 우울한 표정을 한다는 건 반드시 헤베와 관련 있다는 뜻이다.

“언제 도착했는데?”

“방금, 왔어.”

지첸의 대답을 믿지 않은 헤베는 테이든을 노려봤다. 멀리서도 귀족 일행이 도착했다는 걸 알았을 텐데 말하지 않은 것을 힐난하는 의미였다. 테이든은 움찔하며 커다란 몸을 옹송그렸다.

<마법의 역사> 초판본 접견을 앞둔 상태에서도 헤베의 우울한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애써 감추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우선 책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꺼내 보시지요.”

“그게… 어흐흐흑.”

책을 가지고 온 귀족은 헤베와 동년배로 보였는데 초상난 사람처럼 울었다.

헤베의 피해망상이 다시 피어올랐다.

“왜 울어요? 흑마법사가 나올 줄은 몰랐어요? 흑마법사인 제가 책을 파괴하기라도 할까 봐요?”

“아뇨… 그게 아니라, 크흡.”

콧물이 뚝뚝 떨어졌다. 보좌관으로 보이는 옆에 있던 자가 손수건을 대주자 킁, 코를 풀었다.

“제가, 제가 실수로.”

엄청난 불길함이 목덜미를 스쳤다.

“오는 길에 음료를 마시다가 쏟아버렸습니다…. 허어어엉.”

귀족이 애처럼 오열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헤베도 오열하고 싶었다. 믿을 수 없어서 진을 쳐다봤다.

“궁사님.”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의 진이 들고 있던 보관함을 내밀었다. 헤베는 삐걱거리며 보관함 안을 살폈다.

“…….”

풀 에자르 위튼 <마법의 역사> 자필 초판본이었다.

붉은 음료에 홀딱 젖은.

헤베는 어이가 없어서 지첸을 쳐다봤다.

“너는 옆에서 뭐 했어? 구경했어?”

“내가 이들을 만났을 때 이미 책이 젖은 상태였어. 오해하지 마요.”

“보나 마나 늦장 부리다가 늦게 도착했겠지. 이리 와. 너도 같이 피에 젖게 해줄게.”

“살려줘, 궁사님!”

지첸이 겁에 질린 척 테이든의 뒤로 숨었다. 테이든은 헤베를 보며 난처하게 웃음 지었다.

이 녀석 뒤에 숨으면 내가 화 못 낼 줄 알아? 피범벅으로 못 만들 줄 아냐고.

헤베의 손이 화로 부들부들 떨렸다.

“궁사님, 탓하시려면 절 탓하세요. 절 죽여주세요.”

그때 갑자기 귀족이 울부짖으며 무릎 꿇었다.

“우리 가문이 삼백 년 동안 지켜온 것인데 한순간 망쳐버렸으니 어떻게 하늘에 계신 양친을 뵙는단 말이에요. 끔찍한 흑마법으로 저를 잔혹하게 죽여주시어요!”

“이봐요. 흑마법으로 죽는다고 당신이 지옥에 가진 않아요. 나만 지옥에 가지.”

“흐… 흐어어어엉.”

헤베는 애처럼 우는 귀족을 내버려 두고 보관함 속 처참한 모습의 초판본을 살폈다. 차마 건드릴 수도 없는 상태였다. 손가락으로 툭 하면 바로 찢어질 것 같았다.

“음료를 흘린 게 아니라 음료에 책을 담갔다 뺀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하면 이 지경까지 됩니까?”

“그게 참 이상합니다, 궁사님.”

귀족의 보좌관이 말했다.

“저희는 한 마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인님께서 보관함을 품 안에 끌어안고 한 시도 놓지 않으셨지요. 아주 순조롭게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상인이 나타나더니 제발 와인을 사달라고 애원하더군요. 이 와인을 사지 않으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고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 따뜻한 우리 주인님은 기꺼이 와인을 구입했습니다. 바로 적포도주였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상인을 찾아내 벌을 내리라고 해야 하나.

“상인은 서비스라며 바로 따라 마실 수 있는 와인잔도 줬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잠깐 목을 축이기 위해 보관함을 옆에 내려놓았고, 제가 와인을 따라드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열린 창으로 돌풍이 불어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설마 돌풍이 보관함 뚜껑을 열었다는 소리는 아니겠죠.”

“맞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척 매서운 돌풍에 정신 못 차리는 사이 와인이 흘러서 보관함 안의 책을….”

맙소사. 헤베가 이마를 짚었다. 동시에 테이든이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했다.

“그만 말하세요. …헤베, 괜찮아요?”

헤베는 괜찮지 않았다.

아니, 우연히 상인이 와인을 팔고 우연히 돌풍이 불어 이 사달이 났다는 게 말이 돼?

차라리 이 귀족 일행의 자작극이라고 하는 게 더 설득력 있었다. 수백 년간 지켜온 귀중한 책의 초판본을 황제가 강탈하려 하자 이렇게 빼앗길 바에야 망쳐버리자는 속셈인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 초판본이 황성에 진상되면 분명히 성에 기생하는 흑마법사 따위가 이 책을 펼쳐볼 테니까. 흑마법사가 한 번이라도 손대는 게 너무 끔찍한 나머지 이런 자작극을….

“흐엉어엉, 우리 조상님들이 황궁에 진상하기 위해 목숨 걸고 지킨 유물인데 어찌 이런 일이. 전쟁이 끝나고 비센티아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하게 하는 게 양친의 평생 소원이었는데. 내가 무덤에서 어떻게 조상님들을 뵌단 말입니까.”

귀족이 체통도 잊고 펑펑 울었다. 아무리 봐도 거짓 눈물 같지는 않았다.

-먀아악.

먕먕이가 저 시끄러운 인간을 어떻게 해달라는 듯 헤베를 쳐다봤다. 헤베도 잔혹한 흑마법으로 어떻게든 해버리고 싶었다.

“일단… 테이든, 네가 먼저 성으로 돌아가.”

“저만요?”

“네가 빠르잖아. 먼저 돌아가서 복원가를 불러놓고 학자들 명단 만들어 놔.”

“순간이동 마법으로 가면 되잖아요.”

테이든의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지만 헤베는 머리가 아프고 기분도 매우 좋지 않았으며, 수명을 깎는 마법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테이든은 잠시 헤베의 표정을 살펴봤다.

“하긴 굳이 마법까지는 쓰지 않아도 돼요. 먼저 가 있을게요.”

“응.”

테이든이 출발하고 헤베는 먕먕이를 끌어안은 채 마차에 올랐다.

“보관함은 진, 네가 들고 타.”

“예.”

“지첸은 마을로 돌아가서 상인을 수배하고.”

“알았어.”

“그쪽은 알아서 성으로 오세요.”

“예… 죄송합니다. 어흐흐윽.”

헤베는 머리가 아파 왔다. 복원가를 구할 수 있을까. 마차 안에서 꼬물이들을 쓰다듬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굉장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그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급하게 부른 서적 복원가는 자신으로서는 이 책의 복원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기술 전수는 해줄 수 있지만, 지식의 한계 때문에 읽기조차 어렵다고. 글자와 그림이 거의 다 사라진 상태였으므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천 년 이상 이어져 온 마법이란 학문을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며, 이 분야에 있어서 가장 저명한 학자만이 내용을 완벽히 파악하여 복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원가의 말에 황제를 비롯해 모인 이들이 일제히 헤베를 바라봤다. 헤베는 가시 돋친 고슴도치처럼 반응했다.

“왜요, 뭐요?”

“궁사, 방금 복원가의 말을 듣지 못했는가.”

“들었습니다만 저 말고도 유능한 학자는 많습니다. 당장 최연소 부궁사인 루니스 율리도 있고, 다른 부궁사 어르신들이랑 제2 마탑주 펜네도 있고, 아브리타 교수도 있고요.”

“그대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네.”

황제가 느물느물 웃었다.

“거절한다면 그대가 추천한 이들에게 맡기기로 하지. 나야 마법을 잘 모르니 그들이 해석한 내용을 전적으로 믿는 수밖에 없다는 건 알겠지? 그들이 틀리게 해석하더라도 나는 알지 못하니 틀린 그대로 보관될 것이야. 물론 궁사가 추천한 이들이니 완벽하게 내용을 복원할 수 있으리라 믿네.”

황제는 헤베를 여덟 살 때부터 보아왔으므로 그를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

‘이런 귀중한 책을 오역한 채 후대에 전해줄 순 없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흑마법사한테 이런 중대한 일을 맡기려 하지?’

헤베는 거절하려 했지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 이 멍청한 작자들에게는 맡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복원할 테니까 사람 한 명만 붙여주세요.”

“알겠네. 원하는 사람을 말하게. 바로 임명장을 쓰도록 하지.”

황제가 빙긋 웃었다.

“곧 성에서 나간다고 들었는데 안타깝게 됐군.”

헤베는 그 웃는 얼굴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안타까운 건 흑마법사를 내보내지 못한 황제가 더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복원을 도와줄 보조로는 루니스 율리 한 명만 말했다. 부궁사로서 함께 자리하고 있던 루니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헤베는 와인 상인을 심문하는 일에서는 빠졌다. 일반 백성은 흑마법사인 그를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에 직접 심문했다가는 안 좋은 소문이 퍼질지도 몰랐다.

루니스와 함께 새끼 마물들 방으로 향하는데 진과 테이든이 쪼르르 따라왔다.

진은 본래 하는 일이 헤베의 보좌이지만 테이든은 맡은 기사단이 있는 기사단장이었다. 전후 제일 바쁠 녀석이 이렇게 졸졸 뒤를 따라다니기만 하고, 훈련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헤베가 노려보자 테이든은 커다란 덩치로 연신 눈치를 봤다. 쫓아낼까 봐 무서운 모양이었다. 잘생긴 눈썹을 아래로 기울인 채 시종 불안해했다.

헤베는 루니스에게 말했다.

“새끼 마물들 마력 안정 때문에 내일까지는 여기서 하고, 모레부터는 연구실로 갈 거야.”

“마탑 연구실이라면 아직 공사 중으로 압니다.”

“아니, 이 성에도 내 연구실 있어.”

“동쪽 별관 말이군요.”

“응.”

테이든이 마련해줬는데, 흑마법사인 헤베가 연구실 쪽으로 방향을 틀기만 해도 기겁하는 이들 때문에 지금은 먼지만 쌓인 상태였다.

“진, 연구실 미리 청소해 놔.”

“예.”

진이 테이블 위에 보관함을 올려놓은 뒤 방을 나갔다. 헤베는 루니스에게 마법으로 젖은 부분을 말리라 지시하고, 삐약삐약 우는 새끼 마물들의 마력을 확인했다. 살짝 불안정해진 마력을 안정시킨 뒤 침대에 걸터앉았다.

“테이든, 너 왜 날 따라다녀. 할 일 없어?”

숨죽이고 서 있던 테이든에게 묻자 화들짝 놀랐다. 가만히 종이를 말리던 루니스도 고개를 들었다.

“저도 헤베를 도울게요. 복원할 때 필요한 잡무를 시켜주세요.”

“네 일정은?”

“이미 황제랑 조율했어요.”

황제는 테이든이 성을 떠날까 봐 눈치 보고 있으니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고 있는 듯했다.

“비센티아의 영웅이 여기서 한가하게 잡무나 하겠다는 소리야?”

헤베는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자를 굉장히 싫어했다. 물론 과거 헤베 또한 죽음을 앞두고서 게으르고 방탕한 망나니짓을 했지만 별개의 문제였다.

잔소리가 쏟아지려고 하자 테이든이 돌연 정색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복원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그 책의 문화적,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 잘 압니다. 헤베는 그럼 이 중요한 업무를 누구에게 맡길 생각이었는데요? 요정족? 그자가 저보다 몸을 더 잘 쓰나요? 세상에 저보다 더 몸을 잘 쓰는 사람이 존재하긴 합니까?”

“그런 사람은 없지만 복원에 딱히 몸 쓰는 일이 필요하지도 않아.”

“과연 그럴까요. 저는 아주 유능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 있는 백작이 실수로 음료 잔을 쏟는다면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책이 젖지 않도록 막아낼 수 있지요.”

루니스가 움찔했다.

테이든이 헤베 모르게 루니스에게 지시를 내린 것이다.

“루니스는 최연소로 부궁사가 되었어. 그런 어린애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

“궁사님.”

루니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해왔다.

“요즘 제가 수전증이 생겼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오늘 오전 중에도 찻잔을 엎질러 옷을 젖게 만들었습니다.”

“…….”

헤베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테이든, 너도 여기 있어.”

“네.”

“일단 창문부터 닫아.”

또 이상한 돌풍이 불어올까 봐 창문 닫기부터 시켰다.

테이든은 기죽어서 눈치만 볼 때는 언제고, 이제는 기쁜 선물을 받은 듯 생글생글 웃으며 창문을 닫았다.

“복원 업무는 얼마나 걸릴 것 같으신가요?”

“날밤 새워도 한 달은 걸리겠는데.”

“후후.”

“…….”

“밤은 새우지 마세요. 건강에 안 좋아요.”

테이든의 말투에 웃음기가 가득 담겨있었고, 자색 눈은 기대감을 품고 초롱초롱 반짝였다….

헤베는 한숨을 쉬었다. 새끼 마물들을 돌보는 것도 며칠이면 끝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성을 나갈 생각이었는데, 타이밍이 묘하게 맞물려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수명에서 한 달이 또 이렇게 가버리는구나….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좋은 기회였다.

헤베는 테이든을 힐끔거리는 루니스 율리와 행복하게 웃고 있는 테이든을 번갈아 쳐다봤다. 둘은 아주 잘 어울렸다. 둘 다 남자인 건 문제가 아니었다. 한쪽은 어여쁘고 한쪽은 잘생겼고. 나이도 동갑이며 곧 궁사가 될 천재 마법사와 세계를 구한 초월자의 조합이다. 게다가 루니스는 테이든이 마지막 마물왕을 죽일 때도 함께 자리했다. 목숨을 걸고 적지에 뛰어든 영웅인 것이다. 말수가 적고 냉정한 면이 있지만 정의롭고 선한 이다.

헤베가 초기에 세웠던 계획 중에는 테이든과 루니스를 연결하는 방법도 있었다. 둘의 접점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막연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둘을 엮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

설마 이건 헤게르미의 안배일까. 시한부 흑마법사의 행동이 너무 답답해서 이러한 사건을 안배하신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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