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5/18)

4장

아직 어색한 사이. 서로를 의식하는 두 청년. 마법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업적을 함께 해나가며 피어나는 로맨스….

“백작, 헤베의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이 단어는 에녹 타하난이 해석한 <마법의 역사>를 참고해서 ‘문학’이라고 적어야 해요.”

“이 단어는 ‘문예’가 맞습니다. 엔더웨이 공작은 제가 부궁사가 된 지 벌써 반년째인데도 계속 백작이라고 부르시는군요.”

“헤베가 에녹 타하난의 해석본을 참고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요. 백작의 개인적인 의견은 필요 없어요.”

“에녹 타하난의 해석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궁사께서도 제게 동의할 겁니다. 검만 잡아 온 무식한 자라서 응용할 줄 모르나 봅니다. 그리고 전 백작이 아니라 부궁사입니다.”

“아, 미안해요. 부궁사라기엔 턱없이 모자라 보여서요. 실력은 부족한데 자신감은 넘치네요. 부궁사 유지도 얼마 못 하겠어요.”

로맨스 따위는 없고 아주 살벌했다. 다투면서 정든다지만 이건 있던 정도 떨어질 판이었다.

헤베를 사이에 두고 피 튀기는 시선이 오갔다. 정확히는 루니스 한쪽만 피 튀기고 있고, 테이든은 루니스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때문에 루니스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궁사님, 말씀해주십시오. 이 단어는 문예로 해석하는 게 맞습니까?”

루니스가 책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헤베가 해석해보니 ‘문학’과 ‘문예’ 모두 가능한 단어였다.

“이 부분은 원문을 유지해. 굳이 우리 시대의 단어로 표현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 역시 헤베는 정말 현명해요. 맞아요. 원문에 쓰인 단어 자체가 고유명사인데 그걸 번역하는 것도 말이 안 되죠. 정말 멋있어요, 헤베.”

테이든이 감격에 찬 어조로 칭송했다. 헤베와 루니스는 초판본을 복원하는 업무 중인데 테이든 혼자 다른 업무 중인 것 같았다.

헤베 뮨을 칭찬하기, 헤베 뮨을 부끄럽게 만들기, 헤베 뮨을 칭송해서 양심 찔리게 하기. 이런 것들.

“최연소로 대마법사가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그 어떤 마법사도 헤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거예요. 마법 실력에도, 이론에도요.”

“호들갑 떨 거면 나가.”

“부끄러워요?”

테이든이 빙긋이 미소 지었다. 오늘 그는 하얀 바탕에 금색 브로치를 단 예복을 입었는데 정말 눈부시게 근사했다.

복원 작업 일주일째, 초반에는 제법 신경 써서 입고 나온 루니스도 이제는 편한 복장인데 테이든은 매일매일 다른 의복을 입고 나왔다. 오늘은 날이 덥다면서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으며 팔뚝을 드러냈다. 펜촉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아주 훌륭한 근육이었다.

“날이 조금 덥네요.”

마침 그때 테이든이 셔츠 단추를 한 개 더 풀었다. 아까부터 덥다면서 하나씩 풀기 시작해 이미 세 개 풀린 상태였는데 어느새 넓고 탄탄한 가슴이 다 드러났다.

헤베는 침을 꿀꺽 삼키고서는 의아해했다.

왜 자꾸 마른침이 생길까.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데 혹시 흑혈화 현상 중 하나인가?

이쪽으로는 문외한인 그는 테이든이 열렬하게 성적인 어필 중이라는 것도, 그 어필이 통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일이나 계속해.”

왜 심장이 빨리 뛰는지 연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신 차리고 일에 집중하자.

헛기침하며 짐짓 근엄하게 말하는 그때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테이든이 헤베를 보며 웃음 지었다. 헤베는 홱 고개를 돌렸다.

“…….”

공교롭게도 고개를 돌린 방향에 루니스 율리가 있었다. 루니스는 ‘이것들 지금 뭐 하는 짓거리들이지?’라는 표정이었다.

헤베는 굉장히 민망해졌다.

얼른 파릇파릇한 스무 살끼리 연결해줘야 하는데….

타이밍을 봐서 둘만 남기고 자리를 비켜줘야겠다.

괜히 종이만 팔랑팔랑 넘겨대다 문득 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마왕이라고 불렀다]

원문은 ‘마왕’이지만 현시대 표현으로는 ‘마물왕’이라고 부르는 게 맞았다. 삼백 년의 전쟁 동안 마물왕은 여덟 번 등장했는데, 그중에는 인간 형태와 매우 닮은 것도 있었다. 그러한 개체는 ‘마물’이라는 단어를 떼고 ‘마왕’으로 불렀는데, 헤베가 태어나기 수십 년 전 있었던 일곱 번째 왕이 그 예였다.

마지막인 여덟 번째 왕의 경우에는 헤베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거북이 비슷하게 생긴 짐승 모습이었다고 했다.

‘마왕이라.’

마계와의 통로가 닫힌 지금 마물왕에 대해 연구하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헤베는 수명을 대가로 실드를 만들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유지될 것이다. 누군가 실드의 존재를 알아채고 일부러 찢어놓지 않는 이상은 영원히 이 세계에 마물이 유입될 일 없다.

‘그 누군가가 테이든이 될 줄은 몰랐지.’

멸망한 비센티아를 떠올리니 순식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헤베, 추워요?”

테이든이 예민하게 알아채 왔다.

“안 추워. 일이나 하랬지.”

“손을 떨고 있어요.”

“내가 손 떨든 말든 상관하지 마.”

테이든은 헤베의 신경질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협탁에서 담요를 꺼냈다. 헤베는 저곳에 담요가 들어 있는 줄도 몰랐다. 테이든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이걸 당장 찢어버려야 하나.

루니스 율리가 보는 상황에서 담요를 걷어 차버리면 테이든으로서는 상당히 모멸감이 들지도 모른다. 헤베가 착잡한 마음으로 고민하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간식을 가져왔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진이었다.

“제가 불렀어요. 우리 조금 쉬었다 해요.”

테이든이 일어났다.

‘이건 좋은 타이밍이야.’

헤베는 결심했다. 그래, 지금이 짜증 낼 기회다. 한시가 바쁜 와중에 무슨 간식 타임이냐고 엄청 성질내서 정떨어지게 만드는 거야.

“크랜베리를 뿌린 갓 구운 옥수수빵과 블루베리, 앙버터를 섞은 잼을 준비했어요.”

문이 열리고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짜증이 가라앉았다. 헤베는 혼내려던 것도 잊고 테이든이 앞에 놓인 책을 차곡차곡 정리하도록 가만 놔뒀다.

간식을 가지고 들어온 진은 테이든의 다 풀어 헤쳐진 앞섶을 보고 잠깐 멈칫했으나 곧 냉정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진은 깨끗한 앞접시와 나이프, 포크를 헤베의 앞에 두고 루니스는 헤베의 접시 위에 빵을 올렸다. 전쟁터에서부터 이어져 온 자연스러운 행동에 헤베는 자신이 챙김 받는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빵에 못 박혀 있었다. 윤기 흐르는 갈색 표면은 탐스러워 보였고 각종 견과류가 뿌려진 노란 옥수수알 사이사이 크랜베리의 붉은색이 무척 어울렸다.

“전 가 보겠습니다.”

“같이 안 먹어?”

“예.”

같이 먹을 줄 알았던 진은 간식만 내오고 일어났다. 헤베가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전에는 마차에도 같이 안 타고 마부석에 오르더니 이제는 같이 먹지도 않는구나. 역시 흑마법사와 함께 있는 게 싫어서….’

그 순간 헤베의 안에서 피해망상이 샘솟고 있다는 걸 진은 물론이고, 테이든과 루니스도 눈치챘다. 걸음을 멈춰선 진은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고 관자놀이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테이든이 얼른 입을 열었다.

“요정족도 같이 먹는다면 좋을 텐데, 바쁜 일이 있다니 어쩔 수 없네요.”

“예, 맞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정말, 대단히, 몹시 급한 일이라서. 저는 같이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 급하다면 어쩔 수 없지.”

둘은 헤베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받아들이는 듯했다.

“바쁜 와중에도 갖다줘서 고마워요. 아, 백작도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테이든의 말에 루니스는 잠깐 움찔했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저도 약속이 있군요. 나갔다 오겠습니다.”

“뭐? 갑자기?”

“예,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

루니스는 책을 챙기고 바로 연구실을 나가려다가 맑은 갈색 눈에 피해망상이 그렁그렁 피어나는 것을 보고 잠깐 멈췄다. 어느 정도 헤베에게 신뢰받는 진과는 달리 루니스는 헤베에게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다는 걸 알았다. 이대로 나간다면 완전히 멀어질 것이다.

문손잡이를 붙잡고 머뭇거리던 루니스가 말했다.

“너무너무 아쉽습니다. 내일은 꼭 같이 식사하기를.”

루니스는 문을 닫고 나왔다. 자괴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

복도에 진이 서 있었다. 진과 루니스, 둘 다 무표정하기로 소문이 난 이들이었으므로 금방 표정을 수습했다.

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테이든 공작은 옷차림이 왜 저 모양입니까.”

“궁사님을 유혹한다고 단추를 하나씩 풀더군요.”

“헤베 님의 눈치로는 그런다고 유혹당하지 않습니다만.”

“통하는 듯했습니다.”

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정말 심각하군요….”

성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테이든 엔더웨이의 맨 가슴에 유혹당한다니. 정말 무슨 일이 생기려는 모양이었다.

***

둘만 남아 조용해진 연구실에서 헤베는 피해망상이 피어오를락 말락 하는지 여전히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테이든이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헤베, 빵을 잘라드릴까요?”

“내가 자를 수 있어.”

“그럼 제 빵도 잘라주세요.”

헤베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테이든은 다섯 살 애처럼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전 빵 나이프질은 잘 못 한단 말이에요.”

지금까지 수없이 빵을 잘라온 테이든이 엄살을 부렸다.

“세상에 초월자가 잘 못 쓰는 칼이 있다는 걸 믿으라고?”

“…예전엔 제가 말 안 해도 잘라주셨으면서.”

“그거야 네가 어릴 때고.”

그러자 테이든은 아, 하며 손뼉을 쳤다.

“헤베가 지금까지 왜 연애에 흥미 없었는지 알겠어요. 헤베는 어려야지만 좋아하는 거지요?”

위험한 발언에 헤베가 펄쩍 뛰었다.

“말을 왜 그렇게 해?”

“맞잖아요. 제가 스무 살 되니까 바로 이렇게 버리잖아요. 질렸다 하시고, 지겹다 하시고. 몇 달 전만 해도 절 그렇게나 귀여워해 주셨는데.”

“본래도 지겨웠는데 참고 있었던 거라니까.”

“작년 11월 2일 오후 3시에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착한 귀염둥이야.’ 하셨고, 12월 11일 밤 10시 50분에는 저를 끌어안고 볼을 꼬집으면서 ‘귀여워 죽겠다. 한입에 먹고 싶네.’라고 하셨는데 갑자기 본래 지겨웠다고 하면 제가 믿겠어요?”

“내가 그랬을 리가….”

“저는 그때보다 키나 체중이 확 늘지 않았어요. 외모도 달라지지 않았고요. 갑자기 절 대하는 태도가 변하신 건 제가 헤베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제 나이가 스물이 넘었기 때문이었다면 헤베는 어린애를 좋아한다고밖에-”

“잘라줘. 예쁘게 잘 잘라야 해.”

헤베가 빵 접시를 내밀었다. 테이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봐준다는 식으로 빵 나이프를 들었다. 역사상 가장 검을 잘 다루는 초월자답게 빵 부스러기조차 떨어트리지 않고 가지런히 잘랐다.

회귀 전에는 헤베의 말을 거스른 적도 없고, 말대꾸를 하는 편도 아니었다. 헤베가 테이든을 귀엽고 가여운 어린 소년 영웅으로만 여기니 테이든도 기꺼이 귀엽고 가여운 어린 소년 영웅이 되어줬다. 그러나 헤베의 태도가 변하면서 테이든의 태도 또한 적극적이고 저돌적으로 변했다.

어느새 다 자른 테이든이 포크로 빵 한 조각을 찌른 뒤 헤베에게 내밀었다. 헤베는 군말 없이 받아먹었다. 윤기 흐르는 옥수수빵은 짭짤하면서도 달콤했다. 부드럽다기보다는 쫄깃쫄깃한 식감이었다. 굳이 잼을 바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요.”

테이든이 턱을 괴고 헤베를 구경했다.

“헤베가 수도원에 왔을 때요. 두 손에 한가득 빵을 사 왔었죠. 어린애들은 모두 당연히 빵을 좋아할 거라 생각하고요.”

“남녀노소 빵을 좋아해. 그리고 그건 파르테가 산 거야.”

“헤베의 친구분이 빵을 사 온 건 헤베가 사 오라고 말했기 때문이잖아요. 당신은 빵 사는 방법을 모르니까.”

“이, 이젠 살 줄 알아.”

“오, 그래요? 나중에 같이 빵집 가서 저 하나만 사주세요.”

테이든이 살풋 웃었다. 키 크고 몸 좋은 남자인데도 웃는 얼굴에는 소년미가 남아 있었다.

“아무튼 당신 말대로 모두가 빵을 좋아했어요. 모든 아이가 달려가 빵을 뜯었죠. 다들 손으로 덥석 집어서 뜯어먹는데 저만 안 먹으니까 헤베가 다가와 왜 빵을 안 먹는지 물었어요. 손을 씻지 않아서 못 먹는다고 대답하니 직접 빵을 잘라주고 제 입에도 넣어줬죠.”

“내가?”

“네, 얼마나 황당했는지 몰라요.”

“왜 황당해? 빵 잘라주겠다는 사람이 없었어?”

“만신창이로 다친 사람이 빵을 잘라주겠다 하니까요.”

헤베는 습관적으로 그랬구나, 하려다가 문득 멈췄다. 만신창이로 다친 사람이라고?

의아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테이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기억 못 하는군요. 헤베는 항상 자신이 아팠던 건 기억 못 하더라고요. 당신은 그때 오른팔에 부목을 대고 있었어요.”

헤베는 코웃음을 쳤다.

“고작 그 정도로 만신창이라고 하지는 않아.”

전쟁터에서 그는 부러져서 뼈가 나온 손목을 반대쪽 손으로 움켜쥔 채 마법을 외우기도 했었다.

“오른쪽 다리도 부러져 목발을 짚었어요. 폐에 깊은 상처를 입어 숨쉬기도 어려워했고, 목덜미의 화상은 연고 바르기를 소홀히 해 물집이 잡혀가고 있었죠.”

헤베는 미간을 좁히며 그때를 떠올렸다. 열아홉 살, 십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기억이 상당히 희미했다.

그때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황성에 머물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마침 황성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대마법사가 성에 머물고 있을 때 신탁이 내려온 건 운명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때 황성에 머물렀던 게 부상 때문이었나. 몸이 좋지 않았던 건 기억 난다. 그래서 신탁의 소년을 안아주지 못했으니까.

“잘 생각해봐요.”

테이든의 그윽한 시선은 헤베가 스스로 떠올려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약간은 가라앉은 듯한 분위기에 헤베도 덩달아 차분해져서 좀 더 기억을 더듬었다. 흐릿한 안개 속에서 떠오르는 사실이라고는 전쟁터에서는 항상 아팠다는 것밖에는 없다. 멀쩡한 상태로 참전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크고 작은 부상을 매달고 마물들을 상대해왔다.

안 돌아가는 머리를 계속 굴리니 회상은 점점 또렷해졌다.

열아홉 살, 폐에 입은 상처가 너무 심해서 잠시 전쟁터를 벗어나야만 했다. 보조 마법사이자 친구인 파르테와 함께 황성으로 떠났는데, 전쟁터에 동료들을 내버려 두고 마음이 너무 불편해 쉬지 못했다. 열심히 재활 훈련을 할 때… 아니, 재활 훈련을 시작하려고 할 때 신탁이 내려왔고 사람들은 마침 헤베가 성에 머물던 게 운명이라고 말했다. 헤베는 그대로 신탁의 주인공을 찾아 길을 떠났다.

“당신은 얼굴에 부기도 빠지지 않은 상태였어요. 눈 주위가 보라색이었다고요.”

“웃겼겠네.”

“아무도 웃지 못했죠. 수도원의 장난기 많은 어린아이들도, 남 놀리는 거 좋아하던 아이들도 그 누구도 웃지 못했습니다. 그 귀한 빵을 먹으면서도 왁자지껄 떠들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요.”

테이든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기억 안 나세요?”

“자세히는 안 나. 여기저기 다치긴 했겠지. 참전 병사들이 다 그렇잖아.”

“아니요. 일반 병사들은 그 정도로 다치면 전쟁터를 떠납니다. 거금을 받고 집으로 귀환해 휴식을 취하죠.”

바라보는 자색 눈빛에 고통이 서려 있었다. 무척 안쓰럽고 안타까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헤베는 그 시선이 껄끄러웠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테이든은 어렸을 때부터 그를 이런 눈으로 쳐다보고는 했다. 비단 테이든뿐 아니라 진이나 마우도, 파르테, 지첸. 모두가 어렸을 때부터 부족함 없이 살아온 대마법사의 삶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럴 때마다 헤베는 살갗에 뾰족뾰족 가시가 돋는 것 같은 불편하고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최전선에서 뛰니 부상이야 당연하고, 아무리 심한 부상이라 해도 마법으로 며칠이면 회복한다. 일반 병사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헤베는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편하게 살았다. 일단은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무능한 상관 때문에 죽은 사람들만 안타깝지.’

진짜 동정받아야 하는 건 그들이었다.

“헤베는 그동안 너무, 혼자서 고생했어요.”

“자꾸 불쌍하게 만들지 마. 나는 혼자도 아니었고 잘 살아왔어.”

“선황과 전 궁사는 당신에게 미안하지도 않았을까요?”

“테이든.”

정말 화가 나기 시작한 헤베가 테이든을 쏘아봤다.

“선황은 직접 검을 들고 전쟁의 선봉에 섰고, 전 궁사는 아흔 살의 나이에도 궁사로서 황제의 옆을 지켰어.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시고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전사하신 분들이야. 나한테 미안할 이유가 없어.”

“…죄송해요. 제가 너무 나갔어요.”

테이든은 전혀 미안하지 않았지만 순순히 사과했다.

적막이 흘렀다. 헤베는 자기가 나무라놓고서는 눈치를 봤다. 테이든의 보라색 눈은 음울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때 테이든이 손을 뻗었다. 헤베는 손끝을 쳐다봤다.

저 손가락이 내 얼굴을 만지지는 않겠지? 약간 초조한 기분으로 끝까지 쳐다봤는데 진짜로 오른쪽 뺨에 안착해버렸다. 헤베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꼼짝도 못 했다.

“소, 손 떼.”

“빵 부스러기가 묻어서요.”

“거짓말하지 마.”

“이제 행복해질 일만 남았어요, 헤베.”

얼굴을 감싸는 손바닥은 크고 따스했다. 매일 검술을 단련하는 검사답게 딱딱했는데 한편으로는 아주 부드러운 기분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햇살처럼 포근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테이든이 언제 이렇게 컸을까.

헤베는 자신의 어디가 얼마나 다쳤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신탁의 주인공이 얼마나 작았는지는 기억했다. 이거 언제 다 키워서 영웅 만드나 싶었는데….

열세 살짜리를 황성으로 데려와 제일 먼저 한 훈련은 마법 훈련이었다. 하지만 도통 재능을 보이지 않아 검을 잡게 했더니 굉장한 두각을 나타냈다. 겨우 2년 훈련했을 때 성인 남성 기사 중에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테이든이 열다섯이 되었을 때부터 전쟁에 투입시키자고 말했지만 총사령관인 헤베는 허가를 내리지 않았고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야 처음으로 참전을 허가했다.

“제가 행복하게 해줄게요.”

커다란 손은 무척 단단하고 따뜻했다. 결코 매끄럽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부드러웠다.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헤베는 포크를 들어 녀석의 손목을 가볍게 쳤다.

“은근슬쩍 만지지 마.”

와, 테이든이 감탄했다.

“저번에도 알더니 이번에도, 은근슬쩍 만지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나 바보 아니라고 말했잖아.”

“말도 안 된단 말이죠. 당신은 내가 끌어안고 엉덩이를 주물러대도 눈치 못 챌 사람인데.”

“나랑 싸우고 싶은 거야?”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회귀 전이라면 테이든이 중심을 세운 채 옷을 벗겨오더라도 눈만 커다랗게 뜬 채 어리둥절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헤베는 성장했다. 테이든의 망상 때문이었다.

헤게르미가 준 마법으로 테이든의 생각을 읽을 때마다 정말이지 문란하고 원색적인… 그런 광경을 보다 보니 헤베도 아주 조금은 이런 쪽으로도 의식하게 되었다.

“너 나중에 호감 있는 사람한테 이런 짓 하면 큰일 난다.”

“제가 호감 있는 사람은 헤베뿐인데요.”

테이든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둬갔다.

“생각해봤는데, 헤베의 말대로 이 지긋지긋한 성을 나가 한적한 곳에서 연인과 함께 평화를 누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알면 방해 그만해.”

테이든은 느긋하게 웃었다. 상처받으라고 한 말인데 그새 날카로운 독설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헤베는 포크로 빵 조각을 찍었다. 빵은 누르면 누르는 대로 바스라지는 포슬포슬한 것도 좋지만, 움푹 들어갔다가 볼록 솟아오르는 탄력 있는 종류도 참 먹음직스러웠다. 입안에 넣어 쫄깃쫄깃한 식감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사르르 녹아 있다.

“제과제빵을 배울까 봐요.”

테이든은 자신의 몫에는 손대지도 않고 턱을 괸 채 구경했다.

“설마 나한테 빵 만들어주게?”

“네, 이미 스물이 넘은 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빵은 맛있게 만들 수 있어요.”

“어디 가서 그런 말 하기만 해봐. 내가 어린 애를 좋아한다느니 뭐니. 난 연상이 좋아. 적어도 나보다 여섯 살은 많아야 해!”

“우연이네요. 저도 저보다 여섯 살 많은 연상이 취향인데. 남자가 좋고요.”

얘가 왜 이러지? 헤베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능글맞은 면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럼 파르테를 소개해줄까? 걔도 솔로거든.”

헤베는 그와 동갑인 친구 녀석의 이름을 꺼냈다.

“그 정도면 생긴 것도 준수한 편이고, 성격도 좋아. 좀 바보 같긴 하지만 백치미라고 해줄 수 있는 범위 안이고. 꽤 귀여워.”

“…귀엽다고요.”

“응, 특히 놀렸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아주 재밌어. 걔가 표정 변화도 되게 다채롭거든. 눈을 부릅뜨고 바르르 떠는 게 얼마나 웃긴지. 확실히 걔랑 사귀면 자주 웃을 거야. 그리고-”

“그리고요?”

“…그리고….”

“…….”

“…….”

방 안에 당장이라도 고드름이 맺힐 것 같은 서늘한 기운에 헤베는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테이든은 웃음도 멈춘 채 딱딱한 얼굴로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자주색 눈동자가 아주 무서웠다. 아무리 눈치 없는 헤베라도 조금 쫄았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그는 입술만 달싹였다.

“계속 말해보세요.”

한 마디라도 더 칭찬했다간 당장 파르테의 목을 베어버릴 기세였다.

“백작에 이어서 친구분까지. 그런 사람들이 헤베의 취향인가요?”

테이든은 살면서 한 번도 웃은 적 없는 사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허리에 찬 검집에 손을 올렸다. 헤베는 화들짝 놀라서 닥치는 대로 내뱉었다.

“물론 걘 내 취향하고 거리가 아주 멀지. 세상에 인류가 그 녀석 한 명만 남아도 차라리 돌멩이를 선택하겠어. 그냥 사람이 괜찮다는 거지 연인으로서는 영 아니야.”

“돌멩이보다 못한 자를 제게 소개해주려고 한 건가요?”

테이든의 목소리가 여전히 스산했다. 얼굴에는 서늘한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헤베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취소할게. 걔한테 넌 너무 과분한 것 같아.”

“…….”

“넌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을 만나야 해. 다재다능하고 완벽하고 엄청 예쁜 사람. 왜냐면 네가 다재다능하고 완벽하고 엄청 잘생겼으니까.”

마음에 들만한 말을 했는데도 테이든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녀석을 앞에 두고 이걸 달래줘야 하나 오히려 성질을 돋워야 하나 헤베가 고민하는데 테이든이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 들었어요.”

“갑자기 무슨 생각?”

“제게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제가 사랑할만한 정말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면 저도 헤베를 포기할게요.”

“뭐?”

“저는 다재다능하고 완벽하고 예쁜 사람을 만나야 한다면서요. 하지만 헤베는 저랑 연애해줄 생각이 없잖아요. 그렇죠?”

“응, 죽어도 너랑은 연애 안 해.”

자기가 물어봤으면서도 즉답에 기분이 상했는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테이든은 이내 꽃처럼 어여쁜 미소로 짜증을 감췄다.

“맞아요. 당신은 절대로 저와 사귀지 않을 텐데, 다재다능하고 완벽하고 예쁜 사람은 제가 알기로는 헤베 한 명뿐이란 말이에요. 그렇다고 이렇게 완벽한 제가 조금이라도 덜 다재다능하고 덜 완벽하고 덜 예쁜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헤베가 저와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주세요.”

헤베는 고민했다. 물론 테이든 만큼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은데 설마 한 명이라도 없겠는가.

사실 테이든이 말하는 ‘완벽한 사람’의 기준치도 보통보다 낮은 것 같기도 했다. 왜냐하면 타락한 배신자인 헤베에게도 계속 완벽하다고 하니까 말이다.

다만 이 똑똑한 녀석이, 좀처럼 포기하지 않을 것 같던 녀석이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해오는 게 수상했다.

헤베는 테이든이 혹시 꿍꿍이가 있나 해서 오늘 내내 아꼈던 생각 읽는 마법을 사용했다.

-내 말을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군. 정말 귀여워.

뭐…?

-똑똑해졌어.

뭐야? 내가 원래는 안 똑똑했다는 소리야?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게!

-왜 표정이 변하지? 혼자 또 무슨 생각을 하길래.

흘러들어오는 생각에 헤베는 움찔했다. 그러자 테이든의 생각은 점점 더 무섭게 변했다.

-가끔 헤베는 날 빤히 쳐다보면서 혼자 무언가를 생각할 때가 있어. 지금처럼… 무언가를 귀 기울여 듣는 것 같기도 하고.

헤베는 소름이 돋았다. 테이든이 아무리 관찰력 뛰어난 천재라지만 이렇게 빨리 의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당황하고 있어.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잡아냈다. 헤베도 표정 관리에 서투르지만, 테이든도 눈치가 굉장히 빨랐다.

때마침 마법의 효력이 다해 생각이 끊겼다.

테이든은 예쁘고 앙큼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감탄스러웠다. 생각을 읽지 않았다면 그저 귀엽다고만 여겼을 것이다.

“좋아. 대신 내가 사람을 소개하면 넌 그 사람을 좋아하도록 성의를 보여야 해.”

“물론이에요.”

테이든은 아주 자신만만했다.

“헤베가 소개해줬는데 제가 무성의하게 대할 리가 없죠. 그 사람을 좋아하도록 노력할게요.”

“……응.”

다른 이를 좋아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건 분명 자신이 원했던 대답인데 이상하게도 헤베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 시기가 다행히 망나니짓을 하기 전이라 주위에 사람을 소개해줄 놈들은 널렸다. 헤베는 가슴 언저리의 따끔거리는 통증을 무시하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명단을 정리했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한테 반한 걸 보면 테이든은 눈이 아주 낮은 편이니까.

***

“테이든이… 좀 눈이 높은 편이죠.”

마우가 떨떠름히 말했다.

“좀이 아니라 매우 높죠. 외양뿐만 아니라 인품과 능력도 완벽해야 하니까요.”

“눈이 천상에 달려 있다 보면 돼요.”

파와이와 밀리안이 굉장히 떫은 표정으로 거들었다. 그들은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면서 누군가 엿듣진 않을지 경계했다. 흑마법사 헤베 뮨과 뮨의 친위대 세 명이 정원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구경 중이었다.

“우리 어디 들어가서 얘기를….”

“그렇게 눈이 높은 것 같진 않은데.”

그들의 곤란함을 모르는 헤베는 턱을 쓸었다.

헤베는 테이든이 외양과 인품과 능력, 삼박자가 모두 갖춰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이든은 헤베가 죽었다고 세상을 멸망시켜버릴 정도로 헤베를 사랑한다. 헤베는 테이든이 자신을 좋아하는 걸로 보아 절대 눈이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에요, 궁사님. 테이든 공작은 전 세계 사람 중에 가장 눈이 높은 사람일 거예요.”

마우가 헤베를 빤히 응시하며 그렇게 말했다.

헤베는 확신했다. 이들은 테이든이 날 좋아한다는 걸 아직 모른다는 걸.

“알았어. 그럼 너희가 아는 사람 중에 테이든이랑 어울릴만한 사람들을 좀 말해봐.”

헤베는 빈 종이를 펼쳐 무릎에 대고는 펜을 잡았다.

“나이대는 테이든 보다 다섯 살 연상까지만 허용할게. 성별은 상관없고. 자, 다 말해봐.”

“…….”

“…….”

세 명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매우 난감해했다.

왜 야외에서 이런 걸 묻는지도 당황스러웠고, 금방이라도 테이든이 나타날 것 같아 무서웠다.

“응? 빨리.”

“아, 그… 왜 하필 다섯 살인가요?”

“여섯 살부터는 녀석하고 안 어울리니까.”

“…….”

헤베의 당당한 대답에 셋은 다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마우가 모두의 혼란스러움을 대표해서 물었다.

“궁사님,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지부터 말씀해주세요.”

“왜긴 왜야. 녀석한테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려고 그러는 거지.”

“테이든 공작이 소개받겠다고 하던가요?”

“내가 찾아주면 만나보겠대.”

“…….”

셋이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헤베도 지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희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연애할 생각 없는 사람한테 자꾸 누구 소개해주고 연애하라고 결혼하라고 종용하는 건 무례한 짓이지.”

“알면서 왜 그러세요.”

“세계 평화를 위해서.”

“뭔 소리예요, 대체.”

수하들은 갑갑한 듯 가슴을 쳤고, 헤베도 모든 진실을 밝힐 수 없음에 답답했다.

‘너넨 모르겠지만 테이든은 나를 너무너무 사랑해. 하지만 나는 곧 죽는단 말이야. 내가 죽으면 테이든은 이 세상을 멸망시킬 거라고. 그러니 빨리 테이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말하면 안 그래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다고 의심 중인 녀석들이 당장 그를 상담소로 처넣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흑마법으로 인한 정신 착란 증세라고 생각하거나.

“루니스 율리는 어때? 굉장히 예쁘게 생겼잖아.”

헤베는 루니스가 전쟁 중에도 사방에 티 날 정도로 테이든을 좋아해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물었다.

이에 테이든이 전쟁 중에도 사방에 티 날 정도로 헤베를 좋아해 왔다는 사실을 아는 동료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이 되었다.

“물론 부궁사도 상당한 미모이시긴 하지만, 그 이전에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이 전혀 없으시잖아요.”

헤베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서로에게 마음이 전혀 없다고 표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루니스는 테이든을 사랑하잖아’라고 말하기에는 사생활 침해인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루니스와 테이든을 엮으려 하다니 정말 무섭기까지 하군요…. 설마 궁사님, 이번 복원 작업에 부궁사를 추천하신 거 그 이유였던 건 아니겠죠?”

돌연 밀리안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겸사겸사야. 루니스의 실력이 필요하기도 했어.”

“테이든은 그 허술한 계략을 눈치챘을 거예요.”

“걔는 순수해서 몰라.”

“대체 궁사님은 그 녀석이 얼마나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밀리안의 언성이 높아졌고 파와이는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리는 연인의 손을 잡고 진정시켜줬다.

“솔직히 말할게.”

헤베는 그를 쳐다보는 세 명에게 진실 반 거짓 밤을 섞어서 말했다.

“나는 이번 복원 작업만 끝나면 성을 나갈 생각이야.”

“네… 그건 들었어요.”

“그런데 테이든이 자꾸 쫓아오겠다잖아.”

“그렇겠죠. 그 사람이라면.”

“테이든은 성에 남아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야. 날 따라서 한가하게 여행이나 다닐 처지가 아니라고. 전쟁은 이제 막 끝났을 뿐이고 일을 산재해있어. 테이든은 자기 의무를 책임져야만 해.”

그때 파와이가 손을 들었다. 헤베는 턱을 까닥했다.

“질문 있으면 해.”

“저기… 그렇게 따지면 테이든 보다 궁사님이 더 필요한 상황 아닌가요?”

“내가 왜?”

헤베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흑마법사잖아. 내 의무는 성을 나가는 거야.”

헤베는 종전 후 탈리 제국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흑마법사가 아니라 그저 대마법사로 남았다면 여기저기 할 일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된 이후에는 회의나 연회에 그를 부르지도 않았고, 이전에는 자문을 요청했을 법한 큼직큼직한 사건에도 그를 제외했다. 헤베의 업적은 지금도 지워져 가고 있었다.

회귀 전에는 성에서 쫓겨날까 봐 덜덜 떨었다. 하지만 이제는 얼른 성을 나가야만 하는 형편이다.

“나는 성을 나가야 하지만 테이든은 반드시 성에 필요하지.”

“테이든 공작을 성에 잡아둘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가요?”

“맞아.”

정확히는 ‘세상에 잡아둘 사람’이었다.

“으음, 글쎄요.”

마우와 파와이, 밀리안은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헤베는 가만히 기다렸지만 셋은 계속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누굴 추천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헤베는 지첸과 파르테한테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첸은 바람둥이지만 발이 넓고, 파르테는 마법에만 관심 있는 책벌레지만 의외의 인물을 알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예 황제에게 부탁해버리는 수도 있었다.

문득 탈리 전역에 공고를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월자이자 비센티아의 영웅, 테이든 엔더웨이의 반려자를 찾습니다>

각지에서 지원자가 속출할 터였다. 지원자가 많으면 걸맞은 사람이 등장할 확률도 높아질 것이고.

“헤베.”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헤베가 뒤를 돌아보니 테이든이 빙긋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노을 진 하늘 아래에서 내게 걸어오는 청년이 너무 근사한 것뿐인데 왜 심장이 뛰는지 알 수 없었다. 헤베는 종이와 펜을 주머니에 넣었다.

“무슨 대화를 그렇게 즐겁게 했어요?”

“하나도 안 즐거웠어. 넌 루니스는 어쩌고 나왔어?”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헤베를 부르러 왔어요.”

“가자.”

“네.”

테이든이 헤베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부드럽게 에스코트했다. 헤베는 손을 붙잡거나 손등을 쓰다듬는 건 알아채면서 허리에 팔을 감는 건 의식하지 않았다.

둘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우가 부르르 떨었다.

“지금 좀 아슬아슬했네요. 저 소름 돋은 것 좀 보세요.”

“헤베 님이 즐거워하고 계셨으면 우리 다 죽었을지도.”

테이든은 마우와 파와이, 밀리안에게 단 한 번 시선을 두었을 뿐이었다. 인사가 아니었다.

그 무감정한 눈이 드러내는 건 헤베에 대한 집착이었다.

언젠가 전쟁터에서 테이든은 모두에게 말했다.

‘헤베가 굳이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우리 말고는 더 생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누구라도 우리처럼 완벽하게 헤베를 이해하지는 못해요. 결국 그를 떠날 거고 그는 상처받겠죠….’

헤베의 충실한 수하들은 테이든의 말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서 따르기로 했다. ‘뮨의 친위대’의 울타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헤베가 가장 신뢰하는 이가 누군지 잘 알았다.

테이든의 한 마디로 인해 그들에 대한 헤베의 인식이 변할 수 있으므로, 테이든이 묵인하는 선을 제대로 인식하고 지키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

마우와 파와이, 밀리안에게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헤베는 이튿날 빈방으로 진과 파르테, 지첸을 불러 모았다.

파르테와 지첸의 반응은 마우, 파와이, 밀리안과 비슷했다. 테이든에게 소개해줄 사람으로 누가 좋겠느냐, 라는 헤베의 질문에 지첸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창문 밖을 살폈고, 파르테는 방문이 제대로 닫혀 있는지 확인했다. 밀폐된 공간임을 확인한 둘은 오들오들 떨면서 붙어 앉았다.

전날 동료들에게서 미리 언질 받았지만 막상 질문받으니 겁먹은 것이다. 테이든은 대개 너그럽고 웬만한 일에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며, 장난 걸면 해맑게 웃어 오기도 하는 순한 청년이다. 그러나 헤베와 관련된 일 만큼은 가차 없었다. 그 능력치와 집착으로 보아 이 대화도 듣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그 와중에 진이 엄중하게 물었다. 얼굴엔 호기심의 ‘호’자도 떠오르지 않은 무표정이었다.

“테이든한테 연인을 소개해줄 거야.”

“좋은 생각이군요.”

“드디어 내 계획에 찬성하는 사람을 만났네.”

헤베는 펜을 들었다.

“주위에 다재다능하고, 외양이 준수하며,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 있으면 말해줘.”

“…….”

진이 헤베를 빤히 응시했다. 깊은 밤을 담아낸 듯한 검은 시선과 마주치며 헤베가 눈을 깜빡했다. 왜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사람은 테이든 공작에게는 너무 과분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야. 테이든의 반려가 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사람이어야 해.”

“…….”

“일단 네 주위에 괜찮다 싶은 사람 있으면 얘기해 봐. 판단은 내가 할게.”

아직까지도 비어있는 종이 위에서 펜을 까딱까딱했다.

진은 다른 반응을 보이나 싶었는데 입을 다물고는 아무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헤베는 실망하며 지첸과 파르테를 쳐다봤다.

“우, 우리 보지 마요. 우린 아무것도 몰라요.”

“헤베… 뭘 소개를 해. 그냥 테이든이 알아서 하게 두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둘에게선 아무 소득도 없을 것 같았다.

헤베는 허무하고 속상해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결국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구나. 이제 물어볼 사람이 없는데…. 나는 본래도 사교적이지 않은 데다가 흑마법사가 되고 나서 나랑 대화하는 사람들은 너희가 끝이니까….”

“…….”

“흑마법사니까 불안하겠지. 아니, 흑마법사가 되기 전에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령관이었으니까 나한테는 말해주고 싶지 않을 텐데 강요해서 미안해….”

헤베가 울적하게 사과하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연기가 아니었다. 그는 저런 작전을 짤 정도의 능청스러움이나 야비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자책한다는 걸 아니 더욱 난감했다. 지첸과 파르테는 일단 이름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첸은 파르테를, 파르테는 지첸을 추천하려는 찰나였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몇 명 있군요.”

진이 바로 이름 세 개를 말했다.

‘어쩌려고….’

‘맙소사….’

파르테와 지첸은 서슴없이 이름을 댄 진을 보고 기겁했다. 반면 헤베는 감동받은 얼굴이었다.

“나한테 말해줘도 괜찮겠어?”

“예.”

“고마워. 테이든이 좋은 사람을 만나 예쁘게 연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진실된 마음이 느껴져.”

“…….”

진이 몹시 떫은 표정으로 식은 차를 마셨다.

“헤베, 정말로 소개해줄 생각이야? 테이든 공작은 연애할 생각이 없을 텐데.”

“테이든이 소개해달라고 직접 말했다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파르테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꾸욱, 꾹 눌렀다. 지첸은 진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헤베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목숨 걸 수도 있는 진정한 부사령관이었다. 부럽지는 않았다. 저런 신임 딱히 필요 없으니까…. 그때 헤베가 명단을 지첸에게 내밀었다.

“지첸, 네가 이 사람들 신상명세 좀 조사해줘. 앞에 두 명만.”

“제가 왜요?”

삶에 최대 위기가 닥친 지첸이 입을 쩍 벌렸다.

“간단한 조사잖아. 해 줘.”

“난 아직 살아서 할 게 많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시켜요. 여기 파르테도 요즘 할 거 없어서 심심해하던데.”

“이런 일엔 네가 제격이지.”

“아, 못해. 절대 못 해요. 이제 정찰대도 아니라고. 전쟁이 끝나고 벌써 삼 개월이나 지났는데 씨발….”

내뱉고 나서야 말실수를 알아챈 지첸은 빠르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싸늘한 적막이 공간을 집어삼킨 후였다.

“방금 씨발이라고 했어…?”

헤베의 갈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심한 욕을 할 수가 있어? 내가 흑마법사라서 그래? 너무 밉고 증오스러워서 이제는 막 욕도 하는 거야…?’

라는 얼굴이었다.

지첸은 너무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헤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아니, 궁사님. 내가 말실수를 했어. 그러니까 나는 이발, 이발해야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제 곧 추방 탄원도 하겠네. 이미 사람도 모아 놨지? 서명도 다 마쳤어? 갖다줘. 나도 서명할게….”

“그게 뭔 소리예요. 왜 자꾸 추방 탄원 거려? 누가 그런 짓 한 대요?”

“하지만 욕했잖아. 씨… 라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욕설을…. 이제 곧 추방시킬 사람이라서 그런 심한 욕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거지.”

“아악, 씨발이 뭐가 심하다고 씨발… 내가 잘못했어요. 말실수였어. 헤게르미한테 맹세합니다. 다시는 욕 안 할게요. 한 번 더 욕하면 내 혀를 자르세요.”

지첸이 머리를 뜯으면서 빌었다. 하지만 헤베가 세운 마음의 벽은 이미 하늘 높이 치솟은 상태였다. 지첸은 도와달라는 뜻에서 동료들을 쳐다봤는데, 파르테는 이미 애잔한 얼굴로 지첸의 명복을 빌고 있었고, 진은 ‘헤베 님이 방을 나가시면 내가 당신을 죽이겠습니다’라고 눈으로 말해왔다. 사실 진이 아니더라도 뛰어난 청력으로 대화를 듣고 있을 테이든이 죽이러 올 것이다…. 결국 지첸은 정찰대 역할을 받아들이고 테이든의 연인 후보자들 조사를 맡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살아날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들 협조해줘서 고마워. 그럼 사흘 후에 보자.”

이야기가 끝나고 헤베는 기분이 좋은 듯 맑게 웃으며 총총총 방을 나갔다.

기분 좋은 건 헤베 뿐이었다. 지첸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으며 파르테는 창백해진 상태였다. 오직 진만이 멀쩡하다 할 수 있었다.

“죽다 살았네, 어휴.”

“진, 어쩌자고 이름을 댔어? 테이든이 화낼 텐데. 걔가 화내면 무서워… 진짜 무섭다고. 알지?”

파르테의 물음에 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공작이 스스로 소개받겠다 했으니 생각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진과 테이든은 헤베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사고방식이 같았다.

헤베 뮨은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을 수 있는 대마법사이다. 최근 수상하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어떤 방법을 써서든 곁에 붙잡아둬야만 했다. 진과 테이든, 둘에게 헤베 뮨은 언제나 모든 선택지의 가장 위에 있었다.

***

장갑 낀 손이 파르르 떨렸다. 헤베는 어떤 명단을 보고 있었다.

[헤베 뮨 추방 탄원서]

다시 읽어도 그 제목이 맞았고, 명단의 가장 위에 있는 이름은 루니스 율리였다. 그 밑으로 마우와 파르테, 지첸, 파와이, 밀리안… 익숙한 이름들이 있었다.

진과 테이든이 없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걸까.

그 두 사람도 단지 시간이 없어서 못 쓴 것일지도 모른다.

새삼스럽게 가슴이 아프지도 않았다. 헤베는 종이를 다시 접어 넣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성에서 나가면 난 어떻게 살지?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몸도 아픈데…. 너무 막막했고 배신감도 느껴졌다. 그러나 나중엔 막막함도 배신감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짙은 허무였다. 허무가 모든 감정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없어져도 좋은 감정들이었다.

헤베는 눈을 감았다….

“아.”

그는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악몽을 꾸면서 깨어나는 건 익숙하다. 다만 회귀 전의 기억까지 합세한 악몽은 갈수록 더 끔찍해졌다.

-삐익.

-빽.

식은땀에 젖어서 눈을 떠 보면 새끼 마물들이 꼬물꼬물 침대를 기고 있을 때가 많았다. 마우를 비롯한 수하들이 몹시 바빠서 일단은 헤베가 챙기고 있었는데, 운동량이 많아지면서 슬슬 벅차 왔다.

헤베는 새끼들을 품에 안고 명상했다. 흑혈화 현상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매일 아침마다 명상이 필수였다.

수다쟁이 꼬물이들이 쉬지 않고 삐약 거렸지만 헤베는 고요하다고 느꼈다. 반면 머릿속은 시끄러울 정도로 폭풍이 일고 있었다.

예전에는 성을 나가는 게 무섭고 싫었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그런 것들이 막막했는데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냥 테이든과 떨어지는 게 싫어서였던 것 같다.

평화로운 세계에서 행복해하는 테이든의 모습이 보고 싶어서 목숨을 걸었는데,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게 싫었다.

이 비뚤어진 감정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물론 너는 테이든을 사랑하니 쉽지 않겠지만….’

신의 말이 떠올랐다. 헤베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복잡해서 명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마법의 역사> 복원을 끝내기까지 한 달 남았어.’

이 안에 테이든에게 좋은 사람을 찾아주고 복원을 완성함과 동시에 깔끔하게 성을 떠나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진이 말해준 명단에는 헤베가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우선 모르는 사람들부터 시작할 예정이었는데 일단 지첸이 조사를 해와야 시작할 수 있었다.

따스한 봄 햇살이 넓은 창을 통해 들어왔다. 문득 그는 이 햇볕을 쬐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흑혈화 현상은 이미 가슴을 뒤덮고 주위까지 퍼졌다. 내장이 진창이 되었는지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올해가 지나기 전에 죽을 것이다.

‘이제 행복해질 일만 남았어요, 헤베. 제가 행복하게 해줄게요.’

테이든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둥둥 떠돌았다.

헤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 말은 틀렸어.

나는 이제 죽음만이 남았어….

***

사흘 후 지첸이 신상명세 조사 결과를 가지고 왔다. 걸린 시간에 비해 설명이 너무 짧았지만, 이제 와 다시 조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그냥 이 결과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헤베는 테이든이 황제에게 불려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오후 복원 작업을 루니스에게 맡기고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시험대에 오를 첫 번째 인물은 백작가의 도련님으로 테이든과 동갑이었다. 부유한 가문은 아니지만 부모님이 상당히 선한 성품을 지녔다고 했다. 마침 성에 머무르고 있어서 첫 번째 관찰 대상으로 정했다.

-먀앙.

“조용히 해. 들킬 수도 있어.”

-뭉?

“쉿. 쉿, 하라고. 쉿.”

입가에 검지를 대고 몇 번 말하자 먕먕이가 꼬리를 살랑이며 품에 안겨 왔다.

“윽.”

헤베는 꽤 무거운 먕먕이를 안은 채 나뭇가지 위에 자리 잡았다. 나뭇잎이 풍성하고 아주 높게 자란 나무라서 마른 몸이 충분히 가려졌다.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떨어지진 않을 정도로 자리 잡은 헤베는 망원경을 꺼내 목표한 곳에 초점을 맞췄다. 성에 방문한 귀족가 도련님들의 모임이었는데, 야외 다과회라 관찰이 쉬웠다.

첫 번째 후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검소한 의복을 차려입고 푸른색 스카프를 둘렀다. 플러스 십 점. 쿠키 부스러기를 손바닥에 덜어서 다람쥐에게 줬다. 플러스 이십 점. 사교적인 성격은 아닌 듯 다른 사람들과는 멀리 떨어졌다. 마이너스 오 점.

전체적으로 얌전하고 순한 성격인 듯했다. 그 점은 테이든과 비슷하다. 헤베는 이 사람이 테이든의 옆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함께 팔짱을 끼고, 거리에서 데이트도 즐기며 서로를 달달하게 바라보는 모습. 테이든이 그에게 했듯 매너 있는 에스코트로 마차에 태워 함께 시찰을 나가기도 하고….

그림처럼 보기 좋은 광경일 텐데 이상하게 상상할수록 기분이 좋지 않고, 머리도 조금 어지러웠다.

“여기서 뭐 하세요?”

“조용히 해. 관찰하잖아.”

“누굴요?”

“테이든 연인 첫 번째 후보.”

“와, 속이 울렁거리네요.”

“…….”

헤베가 삐걱거리는 목을 틀자 옆에 뻗은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은 남자를 발견했다.

근사한 회갈색 옷을 차려입은 테이든이 부드럽게 미소지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엄청 예쁜 사람이 나무 위에 오르고 있어서 따라와 봤는데 그게 헤베였어요.”

“알았으면 이제 가.”

“탈리 제국의 하나뿐인 궁사가 스토킹이라니요. 사람들이 알면 뒤집어질 거예요.”

“난 흑마법사야. 스토킹보다 훨씬 끔찍하고 나쁜 짓도 할 수 있어.”

“정말 무섭네요….”

테이든의 눈이 휘어졌다. 통통한 배를 까뒤집고 아주 귀여운 애교를 부리는 먕먕이를 볼 때처럼.

“우리 내려가서 스토킹해요. 나무 위는 위험해요.”

“난 무시무시한 흑마법사라서 이 정도 높이쯤은 무섭지 않아.”

“알아요. 제가 무서워서 그래요.”

테이든이 자세를 바꿨다. 녀석이 올라탄 나뭇가지는 헤베가 앉은 가지보다 가느다랬고 무척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매앵.

먕먕이가 좀처럼 쓰지 않는 날개를 써서 허공에 날아올랐다. 먕먕이도 불안했는지 테이든 주위를 맴돌았다.

“빨리 내려가. 이러다 부러지겠어.”

“헤베가 내려가면요.”

“안 돼. 아직 할 일이 남았어.”

헤베는 망원경을 들어 보였다. 이게 다 테이든을 위한 것인데 맘을 몰라주는 게 원망스러웠다.

“아무래도 헤베는 모르나 봐요.”

“뭘?”

테이든은 짐짓 실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 도련님은 연인이 있답니다.”

“뭐? 으악.”

헤베는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뒤늦게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두 발이 허공에 뜨고 헤베는 곧 닥쳐올 고통을 예상하며 눈을 감았다. 아무리 나뭇잎이 풍성하게 매달린 나무라지만 가지에 여기저기 부딪혔다가 땅에 떨어지는, 끔찍한 결과를 예상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깊은 한숨이 머리 위에서 들려오자 헤베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헤베 때문에 심장 떨어지겠어요….”

어느새 테이든이 그를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그제야 등 뒤에 닿는 단단하고 따뜻한 몸이 느껴졌다.

테이든은 헤베를 안정적으로 받쳐 안은 뒤 천천히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만 이러고 있어요.”

테이든은 그를 안은 채 나무 기둥에 기대앉았다.

정말 놀랐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수십 킬로미터를 달려도 땀 한 방울 안 나는 초월자인데도.

먕먕이가 파닥파닥 내려와 옆에서 울어대도 테이든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헤베는 품에서 빠져나오려다가 조금 미안해져서 가만히 있다가 테이든의 떨림이 멎어갈 때쯤 입을 열었다.

“테이든… 내 특기가 비행 마법인 거 알지?”

“알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진심으로 놀라고 그래.”

“헤베가 마법을 펼칠 마음이 없었잖아요.”

단호한 말에 헤베는 움찔했다.

어떻게 알았지. 수명이 소모된다는 사실 때문에 마법은 쓰지 않으려 했다.

“그대로 떨어지려고 했잖아요….”

테이든이 헤베를 당겨 세게 끌어안았다. 다소 강한 힘이라 숨쉬기는 어려웠지만, 헤베는 가만히 안겼다. 곧 온몸을 옥죄던 힘이 풀어졌고 헤베는 고개를 젖히며 테이든을 빤히 올려다봤다.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는 금발과 불안함이 스며든 자색 눈동자. 건강한 살구색 뺨….

테이든이 헤베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

“…….”

“뭐해?”

“저 쓰다듬어 주시려던 거 아니었어요?”

진짜 어떻게 알았지.

헤베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 읽는 마법은 사실 내가 아니라 테이든이 펼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스물네 시간, 하루종일.

“이거 놔.”

헤베가 테이든의 팔을 찰싹 때리자 천천히 놔주었다. 헤베는 얼른 일어나 더러운 것에 닿기라도 한 듯 옷을 털었다. 하지만 테이든은 일련의 행위에 조금도 상처받지 않은 듯했다.

“어디 다친 곳 없죠?”

“없어. 네가 온몸으로 끌어안았잖아.”

“너무 많이 말랐어요. 마지막으로 몸무게를 잰 게 언제예요?”

벌써부터 몸매 걱정하기에는 일렀다. 헤베는 앞으로도 살이 쭉쭉 빠져 나중엔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 될 예정이었다.

“그건 됐고 저 도련님한테 연인이 있다는 건 무슨 소리야?”

“진짜예요. 같은 백작가의 영애와 사귀는 중이죠. 비밀 연애라 가족도 몰라요.”

“너는 어떻게 아는데?”

테이든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청력과 시력이 너무 좋아서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가끔 어두운 밤에 밀회하는 연인들의 대화를 듣고는 합니다.”

테이든은 정말 스토킹이 아니라고 재차 해명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입은 회갈색 의복은 테이든과 정말 잘 어울렸다. 결 좋은 금발이 조금 흐트러졌다. 헤베는 꿈틀거리는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도련님한테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그전에 너 머리 정리 좀 해.”

“아, 네.”

테이든은 싱긋 웃으며 잘 대답해놓고서는 자신의 머리를 더 헤집어놨다. 새 둥지도 저거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 봐.”

“네….”

“허리 좀 숙이고.”

“네.”

보다 못한 헤베가 손을 뻗어 테이든의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줬다. 매끄러운 금발이 그의 손가락 사이를 휘감자 가슴이 간질거렸다. 쓰다듬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원래 틈만 나면 만져댔는데 회귀 후로는… 이번이 두 번째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염없이 쓰다듬는데 문득 손바닥 아래 머리가 부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돼, 됐어. 이제 고개 들어도 돼.”

헤베는 손을 거두고 쌀쌀맞게 말했다.

조금 더듬었지만 충분히 쌀쌀맞았던 모양이다.

고개를 든 테이든이 울먹거리고 있었으니까. 헤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넌 다 큰 애가 왜 이렇게 울음이 많아!”

“하지만 정말 오랜만인 걸요… 헤베가 제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거.”

테이든은 눈물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정말 좋아요. 헤베, 앞으로도 계속 절 쓰다듬어 주세요. 밀어내지 말고요. 계속 이렇게요.”

입술을 깨문 채로 말해서 ‘증믈 즣으으, 흐브….’로 들렸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다만 헤베는 앞으로 다시는 테이든의 머리를 쓰다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

둘은 아직 다과회가 진행 중인 백작가 사교 모임으로 향했다. 비센티아를 구한 영웅과 타락한 흑마법사의 등장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만 무사히 첫 번째 도련님만 빼내 올 수 있었다.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자 도련님은 굉장히 겁에 질렸다.

“제, 제게 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고요?”

도련님은 헤베와는 멀찍이 떨어진 채 테이든을 힐끔거렸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헤베에게는 두려움, 테이든에게는 선망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으니 그야말로 전형적인 보통 사람이었다.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요.”

“말을 놓, 놓아주세요. 궁사님.”

“혹시 너 애인 있어?”

“흐익!”

도련님이 매우 놀랐다. 얼마나 기겁했는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땅에서 일 미터는 튀어 올랐다.

“어, 어떻게 그걸? 흑마법입니까?”

“진짜 있단 말이야?”

“예….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여자친구의 오빠가 정말 무서운 분이란 말이에요. 살려주세요, 흑마법사님.”

도련님이 헤베의 옷자락을 붙들고 애원했다. 무시무시한 흑마법사보다 여자친구의 오빠가 더 무서운가. 헤베는 조금 기가 찼다.

“그만 하세요. 헤베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을 겁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테이든이 도련님의 팔을 붙잡고 다소 거칠게 떼어냈다.

내려보는 눈길이 아주 싸늘했다. 하지만 내동댕이쳐지고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한 도련님은 계속 헤베에게 애원했다. 진짜 말하면 안 됩니다. 얻어맞을 게 분명해요. 죽을 수도 있어요….

헤베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이 도련님은 연인이 없어도 탈락이다.

이런 겁쟁이는 테이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알겠으니 이만 가봐. 우리가 널 찾은 이유를 물으면 비밀이라고 하고.”

“정말이시죠? 말하지 않을 거죠?”

“확성기에 대고 소리치기 전에 얼른 가.”

“네… 아, 혹시 괜찮으시면.”

도련님은 푸른색 스카프를 벗더니 사방의 주름을 펼치고는 앞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공작님, 여기에 사인 좀 부탁드립니다.”

이 상황에 사인이라니 엉뚱하긴 하지만 테이든의 인기를 생각하면 당연했다. 조금 뿌듯해진 헤베가 여전히 서늘하게 서 있는 테이든의 팔을 툭 쳤다.

“뭐해? 사인해줘.”

“…네.”

테이든은 싫은 듯 뚱했지만 헤베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매우 무성의한 사인이 이어졌음에도 도련님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아주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니 못마땅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헤베도 덩달아 흡족해졌다.

‘우리 테이든이 인기가 좀 많지.’

어깨가 절로 으쓱거렸다.

테이든의 사인이 끝나고 도련님은 헤베를 힐끔 쳐다봤다. 누가 봐도 헤베의 사인도 받고 싶은 시선이었지만 그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다.

‘흑마법사 따위가 영웅 곁에 있다고 짜증 내는 건가.’

헤베가 덩달아 노려보자 도련님은 기겁했다.

“가, 감사합니다. 꼭 비밀로 해주세요!”

도련님이 스카프를 소중하게 안고는 멀리 뛰어갔다.

“겁쟁이네.”

“겁쟁이는 저와 안 어울리죠. 전쟁 영웅 정도는 되어야….”

“그렇지.”

헤베는 테이든의 열렬한 시선은 눈치채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첫 번째 후보 이름에 선을 그었다. 그래도 두 명 남았다.

“이건….”

테이든이 바닥에서 뭔가를 주워들었다. 네모난 엽서였는데 엽서 내용을 확인한 테이든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테이든은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저 사람이 펜을 꺼내면서 이게 떨어졌는데요. 헤베 글씨체네요.”

“응.”

헤베도 저게 무엇인지 안다.

저 엽서에는 [곧 있을 야외 다과회에서 당신을 스토킹할 예정인데 싫으면 붉은 스카프를 착용하고 오시오] 라고 적혀있다. 어떻게 아냐면, 그가 직접 적어 보냈기 때문에 안다.

“스토킹이 중단됐으니 복원 작업이나 해야겠어.”

“같이 가요. 저도 마침 작업하러 가는 중이었어요.”

성으로 돌아가는 헤베를 테이든이 따라왔다.

테이든은 아주 즐거운 얼굴이었는데, 꼬리가 있었다면 엄청 흔들었을 것이다. 그는 엽서를 입술에 가져가 댔다. 마치 뽀뽀하는 것처럼 보여서 헤베는 고개를 돌렸다.

“헤베는 스토킹보다 훨씬 더 나쁜 짓도 할 수 있는 흑마법사죠?”

“당연하지. 난… 도둑질도 할 수 있어.”

“만약 무언가를 도둑질한다면 그 주인에게도 조만간 물건을 훔치겠다는 예고 쪽지를 보낼 건가요?”

“생각 안 해봤는데.”

헤베는 진지하게 고심했다.

“나는 흑마법사라서 나타나면 많이 놀랄 테니까 미리 예고한 뒤에 훔치는 게 나을 것 같아.”

“정말 귀엽겠네요.”

헤베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도둑질하는 모습이 귀여울 거라니. 전쟁터에서 마물들 살육하는 모습을 하도 봐서 기준이 이상해졌나.

-매옹.

도련님을 만날 때는 숨어있던 먕먕이가 둘만 남자 바로 나타났다. 헤베가 먕먕이를 품에 안으려 했는데 테이든이 얼른 낚아채 갔다.

“제가 안을게요.”

“응.”

헤베도 먕먕이가 좀 무거워서 부담스럽던 차였다. 먕먕이가 살찐 게 아니라 헤베의 힘이 많이 약해졌다. 식사량이 부족하다 보니 근육이 준 것이다.

테이든은 엽서를 제 주머니에 넣고 먕먕이를 안았다. 헤베의 시선이 먕먕이를 따라갔다. 먕먕이는 근육질의 단단한 팔뚝 위에서 제일 편한 자세를 취했다. 헤베의 품에 안길 때는 이리저리 바꿔가며 오래 걸렸는데 테이든 품 안에서는 아주 빠르게 편한 자세를 찾아냈다. 아무래도 안는 힘이 안정적이서인지.

헤베는 테이든 품 안의 먕먕이 턱을 손가락으로 긁어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아직 오전이지만 오늘 더 이상 다른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고, 테이든의 생각을 읽어봐도 될 것 같았다.

헤베는 그의 단정한 옆모습을 힐끔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헤베가 날 죽이려 했으면 좋겠어.

가벼운 마음으로 능력을 사용한 헤베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헤베?”

-나는 그에게 영원히 잊지 못하는 존재가 되겠지.

“헤베, 왜 그래요?”

테이든이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하다는 듯 헤베를 바라봤다.

-아니면 내가 지금 그를 죽이는 거야. 내게서 더 이상 멀어지지 못하게.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해야 하는데 연달아 생각도 못 한 말들이 들려오니 온몸이 삐걱거렸다.

테이든의 눈 색이 짙어졌다.

-또 이상해졌군.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듣는 것처럼.

헤베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 행동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었다.

-왜 지금 고개를 돌린 거지?

테이든에게 의문을 갖게 해버렸으므로.

“가자.”

헤베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팔다리 움직임이 매우 어색하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다. 하지만 능력의 시간이 끝나 테이든의 생각이 들려오지 않았기에 ‘왜 지금 고개를 돌린 거지?’ 이후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테이든은 헤베가 제 생각을 읽는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전과 같이 태연했다. 그는 그저 먕먕이를 안은 채 다정하게 미소를 띠고 헤베를 따라올 뿐이었다.

2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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