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950년, 12월.
흐린 날이었다. 달 주변에 푸른 그림자가 모여드는 걸 보니 내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벌써 엿새째 쉬지 않고 비가 내린다. 한바탕 쏟아지는 게 아니라 찔끔찔끔 끊이지 않고 내려서 사람 기분을 우중충하게 만들었다. 다들 지쳐갔다.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끝나지 않는 전쟁과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하늘에.
“궁사.”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헤베에게 지첸이 다가왔다.
“요즘 하늘을 많이 보네요. 위에 뭐 있수?”
“달무리가 졌어. 내일도 비 올 것 같아.”
“지긋지긋하구만요. 그래도 오늘 협곡 너머까지 마물을 몰아냈으니 내일은 쳐들어오지 않겠죠. 한겨울에 비까지 내리니 다들 많이 지쳤어요. 아까 어떤 놈이 그러더라고. 헤게르미께서 우리에게 등을 돌린 걸까요, 라고.”
“그랬으면 신탁의 영웅이 있었겠어?”
헤베는 한곳을 향해 턱짓했고 그곳을 본 지첸이 피식 웃었다.
신탁의 주인공, 테이든 엔더웨이는 벌써 둘의 키를 추월해 늠름한 기사가 되었다.
그렇게 날뛰고도 힘들지 않은지 부상자들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신관들을 도와주는데 정말 영웅이라는 단어를 안 뱉을 수가 없다.
제법 먼 거리였는데 시선을 눈치챈 테이든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딱 눈이 마주쳤다.
“아, 이쪽 발견했네. 인사해줘요.”
“너도 해줘. 웃어.”
헤베는 녀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테이든도 활짝 웃으며 화답했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면서 전혀 춥지 않은 듯 환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곧 다른 신관의 부탁을 받고 부상자를 옮겨주러 가야만 했다. 테이든은 굉장히 아쉬워하며 헤베에게 고개를 꾸벅하고는 사라졌다.
테이든은 누구보다 많은 마물을 죽이고, 누구보다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정말 대단한 놈이에요. 오늘만 해도 지는 전투였는데, 저 녀석이 억지로 승전시킨 거나 마찬가지고. 확실히 영웅은 영웅이야.”
“그래, 맞아.”
열아홉 살짜리 영웅을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걸까.
헤베는 홱, 돌아섰다.
“어디 가게요?”
“쉬려고. 가서 부상자들이나 살펴.”
“귀찮은데. 궁사도 좀 거들어요. 요새 계속 잔업에 빠져버리네. 나도 땡땡이치고 싶다.”
“너 가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파르테한테 물어볼 거야.”
“아, 진짜. 갑니다, 가요.”
지첸은 헤베의 친구인 파르테의 잔소리를 유난히 무서워했다. 하긴 헤베도 파르테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으면 괜히 사과하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그는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눈앞인데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인사하는 병사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겨우 막사 앞에 도착했다.
식은땀에 옷이 다 젖었다. 천막을 들치고 들어오자마자 마법을 걸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윽.”
그대로 쓰러지는 바람에 딱딱한 땅바닥과 부딪친 무릎이 매우 아팠다. 하지만 더 아픈 곳은 마물의 발톱이 할퀴고 간 옆구리였다.
틀어막고 있던 마법을 풀자 피가 쏟아졌다. 지긋지긋한 피비린내. 재빨리 약물을 쏟아붓고 붕대를 동여맸다. 아무래도 독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헤베는 이 정도 해독 주문은 가능한 대마법사였다. 마법으로 독을 빼내는 과정은 몹시 고통스러웠다. 신음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아파 죽겠구나….
머리도 어질어질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거대한 마물 한 마리한테 내동댕이쳐져 머리부터 땅에 부딪혔었지. 뒤통수부터 뒷목 위쪽까지 손으로 쓱 훑으니 아니나 다를까 피가 묻어나왔다. 대충 닿는 부분만 닦고는 붕대를 둘렀다.
가끔 다쳐줘야 하니까 괜찮다. 이렇게 보란 듯이 붕대도 둘러준 채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보여야 계속 자신을 따른다는 걸 헤베는 일찍 깨우쳤다.
그는 총사령관이며 비센티아의 모든 존재를 이끄는 자였다. 마법사는 후방에서 지원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만은 가장 최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일부러 다치려 하지 않아도 자질구레한 부상을 겪지만, 이렇게 붕대를 두른 채로 모두의 앞에 서면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진다. 총사령관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인식을 주기 때문이었다.
헤베는 그 점이 조금 우스웠다. 정말 이상한 건 그가 진짜로 위중한 상태가 되면 사기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진짜 심각하게 다쳤을 때는 오히려 부상을 숨겨야 한다니, 정말 우습고 이상했다.
마음을 추스르며 쉬고 있는데 누군가 천막을 두드렸다.
“헤베, 있어요?”
결계 때문에 들어 오지는 못해 그를 부르는 소리에 헤베는 표정과 옷매무새를 수습하고 밖으로 나갔다.
“헤베.”
테이든이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지쳐서 대충 아무렇게나 입은 반면 어느새 옷까지 말끔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
어두운 밤인데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한 떨기 꽃보다 아름다웠다.
“수습은 다 했어?”
“아직이요. 그냥 좀 쉬러 왔어요.”
테이든이 헤베의 등 뒤를 기웃댔다.
“피 냄새가 심하네요. 머리를 다치셨어요?”
“응, 넌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보네.”
“헤베는 마법사인데 왜 앞에 나와서 싸우는 거예요?”
테이든은 무척 속상하다는 듯이 헤베가 대충 동여맨 붕대를 쳐다봤다. 헤베는 허리춤에 메고 있는 검집을 가리켰다.
“모르나 본데 나 검술도 제법 해.”
“알아요. 하지만 마법을 더 잘하잖아요. 제발 앞으로 나오지 말고 다른 마법사들처럼 뒤에서 지원하세요.”
테이든이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기울어진 눈썹을 매만져 주고 싶었다.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 어떡할까…. 전쟁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인데 전쟁터에 둘 수밖에 없다는 게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제발 앞으로 나오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건 바로 헤베였다.
“오늘 애썼어. 이제 들어가서 쉬다가 밥 먹어.”
“같이 신관을 보러 가요.”
“나도 여기서 쉬고 싶은데.”
“다쳤잖아요.”
“다들 다쳤지.”
테이든은 헤베가 들어가라 해도 말을 듣지 않고 졸졸 따라왔다. 몸만 커졌지 어린애였다.
아직 어린애….
***
헤베는 막사를 나와 테이든과 함께 부상자들을 모아놓은 곳으로 향했다. 둘을 발견한 신관이 달려왔다.
“궁사님, 다치셨습니까.”
“심하지 않아. 그보다 오늘은 몇 명이 죽었어?”
“아직 시신 수습 중인데… 일단 팔백여 명입니다. 저번보다는 양호해요. 궁사님과 테이든 경 덕분에.”
팔백 명이라니 지나치게 많았다.
헤베는 부상자들과 한 명, 한 명 악수하며 응원의 말을 전했다. 쉬라니까 기어코 따라 나온 테이든도 어쩔 수 없이 팬서비스를 펼쳐야만 했다.
그래도 테이든은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겨우 열여덟 살짜리가 벌써 어른처럼 행동했다.
헤베는 부상자들을 둘러본 다음에는 마법사들 진영에도 향했다. 잊지 않고 신관들과 함께 헤게르미에게 기도를 올린 뒤 마지막으로 취사병들을 도와 음식 재료를 손질했다. 모든 일에 테이든이 함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치지 않는 것 같지만 헤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치지 않을 리가 없지. 체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테이든은 정말 여리고 순하다. 눈물도 많고 잔정도 넘친다. 지치지 않을 리가 없다.
생각 같아서는 테이든의 참전을 더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열여덟 살이 되면서 다들 어서 내보내자고 하고 본인도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피할 수가 없었다.
작년에 처음으로 참전한 테이든은 엄청난 무위를 보이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녀석은 순식간에 기사단장이 되었고 충실히 신탁의 영으로 자리매김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수년 뒤에는 정말로 마물의 왕을 무찌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식사는 소량의 감자, 대량의 먼지와 흙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탓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함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때 헤베의 시야에 붉은 머리 마법사 루니스가 보였다. 그는 뜨거운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가 헤베와 눈이 마주치자 돌아서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하긴 테이든을 좋아하지 않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헤베는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도 비가 올 것 같아요.”
테이든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헤베도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 내내 올려다봤더니 목이 아파서 그냥 바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추운 날씨에 바위는 딱딱하고. 머리는 어지럽고 옆구리는 쑤셔온다. 헤베는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꾸욱 참았다.
“다음번에는 꼭 뒤에 있어요, 헤베.”
테이든이 나직이 말해왔다.
너나 뒤에 있어, 라고 말해줄 수 없는 무력감에 환멸이 났다.
하늘에는 노란 달과 먹구름이 껴 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다.
헤베는 저 하늘에 달과 별, 구름 외에 또 무엇이 있는지 알았다. 그건 끊임없는 연구 끝에 발견한 것이었다.
마계와의 통로.
그곳에서 마물이 끝없이 쏟아져 내려온다. 그 사실을 안 헤베는 통로를 닫을 방법을 연구했고 마침내 가능성 있는 방안을 찾아냈다.
‘이대로 아무 변화 없이 시간이 흐른다 해도 성장한 테이든이 마물왕을 죽일 것이며 전쟁은 인간의 승리로 끝나겠지.’
분명, 오 년. 길어야 십 년이다. 십 년만 버티면 이 전쟁은 끝이 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옳은 걸까. 지금 당장 전쟁을 끝낼 방법을 아는데, 십 년을 기다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나는 방법을 아는데.
전쟁을 끝낼 방법을 아는데.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이렇게.
머리가 복잡하다. 누군가 정답을 알려준다면 좋겠다. 내가 어떡해야 하는지.
나태한 정신을 일깨우듯 한 줄기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고 달아났다.
헤베는 몸을 일으켰다.
‘……사실 알아.’
무엇이 정답인지 알고 있다.
오늘 팔백 명은 그의 망설임 때문에 죽었다. 다른 방법이 있기를 바라는 안이함과 희생을 미루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그들을 죽였다.
자꾸 망설이게 됐다. 연구를 거듭하여 통로를 찾아낸 것처럼, 더욱 파고들다 보면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는 것이다. 흑마법 이외의 저 통로를 막을 방법.
헤베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희망이란 인간을 좀먹어 가는 병임을 깨달았다. 희망이란 건 심각한 전염병이라 어느샌가 자신도 그 병에 옮아버렸다.
‘결정을 내려야지. 또 다시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
이튿날, 하늘이 헤베의 결정을 등 떠미는 듯한 사건이 일어났다.
협곡 너머로 몰아냈던 마물들이 오후에 갑자기 습격해왔고, 그 교전에서 테이든이 참전 후 처음으로 부상을 입은 것이다.
허벅다리가 거의 잘려나갈 뻔했다. 테이든은 독 때문에 보라색으로 물든 다리를 단검으로 찔러 독을 빼냈다. 헤베가 다가가자 테이든은 당신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고작 열아홉 살짜리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당한 게 당신이 아니라 나라서 다행이라 말해오는데 헤베는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신탁의 영웅의 첫 부상은 아군의 사기를 심각하게 떨어뜨렸다. 눈앞에서 많은 이가 죽어갔다. 살려달라는 비명조차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살려주지 못할 것을 아니까.
격렬했던 전투는 결국 인간의 패배로 끝났다.
많은 이가 죽고 부상당했다. 이제는 헤베에게 직접 무덤을 만들라고 하는 노인은 없었다. 그러나 헤베에게는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네 탓이다. 다 네 무능과 태만과 무책임함 때문에 죽은 것이다…….
동료의 무덤을 만드는 병사들을 보며 헤베는 생각했다.
‘나는 뭘 망설이는 거지?’
수명이 아깝다거나 명예의 추락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사실은,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부질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가 망설이는 진짜 이유는, 자신을 향한 테이든의 시선이 달라질 게 두려워서. 자신에 대한 존경심으로 반짝이는 저 아름다운 자색 눈에 경멸이 담기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러나 세상엔 그런 것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날 밤 헤베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황성으로 돌아갔고, 서쪽 탑의 뒤편에서 흑마법을 받아들였다. 알고 있었다. 이 선택을 함으로써 그의 명예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거라는 걸. 모두가 곁을 떠난다는 것과 수명이 얼마나 남는지도. 길어야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과 혐오를 받다가 죽을 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모든 것을 알고서 내린 선택이었다.
***
잠에서 깨어난 헤베는 지끈지끈한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꾸욱 눌렀다.
루니스가 던지고 간 질문 때문인지 그날 일을 꿈으로 꿨다.
‘그렇게 많은 걸 알고 계신 현자께서 왜 흑마법사를 선택하셨는지만은 모르겠군요.’
많이 받은 질문인데 왜 허를 찔리는 기분이 들었는지. 테이든의 (미래의) 연인으로 점찍어둔 상대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악몽 덕에 잠에서 깼지만, 눈앞에 보이는 게 어둠 뿐일까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가슴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무언가 아주 무겁고 커다란 것이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으윽….”
흑마법의 부작용은 고통스럽다. 헤베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다 감내하기로 마음먹고 받아들였지만 무언가 묵직한 바위가 심장을 누르는 듯한 이 고통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먀옹.
응?
-매옹. 매앵.
익숙한 먕먕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다. 하얀 털뭉치가 가슴 위에 앉아 있었다.
-애애앵.
눈이 마주치자 먕먕이는 얼른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듯이 옷자락을 벅벅 긁었다.
먕먕이 무게를 고통이라고 여긴 게 무척 민망했다.
“먕먕아, 무거워. 좀 내려가.”
-매옹.
“난 예전처럼 튼튼하지 않아서 이제 네가 올라오면 죽을 수도 있어. 일단 지금도 늑골이 파열되기 일보직전인데.”
-우우웅….
먕먕이가 작은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 아래로 펄쩍 뛰어내렸다. 부르르 떠는 먕먕이를 보며 헤베도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몸이 찌뿌듯하고, 늘 그렇듯 현기증이 닥쳐왔다. 오늘은 비가 오려는지 뼈마디마다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먕먕이가 앉아 있던 가슴도 욱신거렸다.
헤베는 협탁에 손을 뻗어 항상 진이 놔두는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머리를 꾹꾹 눌렀다. 현기증이 가시자 어기적어기적 거울 앞으로 향한 그는 잠옷 상의를 들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상체를 뒤덮은 검은 혈관은 징그럽고 흉측했다. 팔뚝까지 내려왔는데 다행히 쇄골 위쪽으로는 번지지 않았다.
-우웅… 맹. 먀옹. 우우웅.
먕먕이가 작게 울어대면서 발치에 몸을 비볐다. 뭐라고 말을 거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 없어서 미안했다.
우리 먕먕이 그렇게 큰 편도 아닌데 가슴에 얹는 것조차 못 해주고….
“미안. 안아줄게, 이리 와.”
-매옹!
헤베가 바닥에 주저앉자 먕먕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 뛰어 들어왔다.
-먀약! 맥! 앩!
먕먕이는 위협적으로 울면서 두 앞발로는 옷을 들치려는 듯한 행동을 했다. 자기 기억과 다르게 온통 검게 변한 주인의 신체에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헤베는 먕먕이의 작은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다독였다.
“별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따끈따끈하고 동그란 게 낑낑거리며 몸을 부비적거리니 마음도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나대족은 다 커져도 작더라.”
-웅.
“테이든도 참 작고 귀여웠는데. 지금도 귀엽지만.”
-웩욱.
“뭐?”
-먀옹.
순간 먕먕이가 구역질한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겠지.
헤베는 따끈따끈한 먕먕이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자신과 테이든을 털빨로 유혹한 마물답게 손에 감기는 감촉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황성을 나갈 때 먕먕이도 데리고 갈까라는 생각도 잠깐 했었는데…. 새끼들도 생긴 마당에 전부 데리고 나갈 수는 없다. 마우에게 맡기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 새끼들을 본지도 한참 됐다. 마우와 진 말로는 건방이 하늘을 찌르긴 하지만 건강하게 잘 지낸다고 하는데 오늘은 한번 보러 가야겠다.
“궁사님.”
한참 먕먕이를 쓰다듬고 있으려니 진이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왔다. 진은 들어오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왜 바닥에 앉아 있습니까.”
아침부터 타박이었다. 그 타박은 심지어 먕먕이에게도 던져졌다.
“궁사가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는데 좋다고 쓰다듬이나 받다니.”
“얘한테 뭐라 하지 마. 애가 뭘 안다고.”
헤베가 다 억울했다. 먕먕이는 말 못 하는 마물인데.
-무웅….
먕먕이가 품에서 벗어나더니 다리에 자기 머리를 비벼댔다. 따끈따끈한 것이 사라져서인지 순식간에 춥게 느껴졌다.
진은 테이블에 들고 온 식사를 빠른 속도로 차린 후 헤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십시오.”
헤베는 진의 하얀 손을 가만히 보면서 잠시 고민했지만 붙잡고 일어나는 쪽을 선택했다.
부드럽게 섬세한 요정족의 하얀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는데 안 그래도 주름이 져 있던 진의 미간이 이번엔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왜, 또.”
“몸무게가 많이 줄어들었군요. 몇입니까?”
테이든도 그렇고 보는 사람마다 몸무게에 집착했다.
“몰라. 재 본 적 없어.”
“최근 두 달 사이 5kg은 빠진 것 같습니다.”
“그래?”
5kg이면 매우 선방한 수치다.
“궁사님.”
순간 좋아했던 표정이 드러났는지 진이 혼내는 듯 노한 목소리로 불렀다.
“안 그래도 마른 분이 계속 이렇게 살이 내리면 저희도 가만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저희’가 누군데….
말 안 듣는 어린애를 엄하게 혼내는 아버지 같은 얼굴로 내려다보는 진에게 헤베는 삐딱하게 굴었다.
“가만 안 두고 보면 어쩔 건데. 강제로 빵을 목구멍에 쑤셔 넣기라도 하게? 나는 대마법사이자 흑마법사야.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날 강제할 수 없어.”
“단식투쟁하겠습니다.”
“…….”
잘못 들었나.
순간 얼이 빠진 헤베가 눈만 깜빡이며 진을 쳐다봤다. 매사 얼음장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진심을 알려왔다.
“궁사님이 하루 세끼를 챙기지 않는다면 저도, 마우 경도. 지첸 남작과 파르테 부단장님, 파와이와 밀리안까지 모두 식사를 거르기로 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네가 어린애들도 아니고.”
“마물도.”
“뭐?”
“먕먕아.”
-먀양.
앞발을 핥던 먕먕이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귀엽게 대답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먕먕이도 단식투쟁할 거지? 동의한다면 대답해.”
-먕.
먕먕이가 짧게 답하고는 다시 앞발을 핥기 시작했다.
“먕먕이도 동의하는군요.”
진이 드디어 미친 건가? 아니면 내가 아직 꿈을 꾸나?
검은 머리의 미남 요정족이 아침부터 더없이 진지하고 무뚝뚝한 얼굴로 헤베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내가 동의 못 하겠다. 먕먕이한테 다시 물어봐.”
헤베는 먕먕이 이름을 불러 집중하게 한 뒤 물었다.
“우리 먕먕이는 내가 끼니를 거르든 말든 계속 마음껏 먹을 거지? 동의하지 않는다면 세 바퀴를 구른 다음 물구나무를 서.”
그러자 먕먕이가 몹시 피곤한 눈으로 헤베를 쳐다보더니 두 발로 섰다.
“…….”
멋지게 앞구르기를 세 번 하고 물구나무를 선보이는 먕먕이를 보며 헤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헤베는 진과 먕먕이한테 붙들려 작은 빵 반 개를 해치운 다음에야 연구실에 올 수 있었다. 루니스는 이미 먼저 와서 복원 작업 중이었다.
<마법의 역사> 자필 초판본 복원 작업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앞으로 나흘 정도만 매진하면 완성할 것 같은데…. 그 시간 안에 루니스와 테이든 사이를 어떻게든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소개팅]
-장소는 외진 곳으로
-시간대, 해 질 녘이 좋을 듯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미기
“궁사님.”
“어? 왜! 안 수상한 짓 안 했어.”
열심히 테이든의 소개팅 계획을 끄적이던 헤베가 화들짝 놀라며 수상한 짓 했음을 실토했다. 그는 노트를 덮고는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빡였다.
“왜 불렀어? 궁금한 거 있어?”
“…오늘 테이든 공작은 오지 않습니까?”
얼음 같은 냉정한 마법사가 짝사랑 상대를 오늘 만날 수 있는지 없는지 물어오는데 순식간에 마음이 짠해졌다.
테이든은 왜 날 좋아하는 거야. 이런 미인이 사랑하는데….
“걱정하지 마. 오전 중에 오겠다고 했으니까 금방 올 거야.”
“…그렇군요.”
칫, 하는 게 혀를 차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잘못 생각한 거겠지.
루니스는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헤베도 테이든-루니스를 엮기 위한 계획 착수에 들어갔다.
헤베는 연애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에 남들을 어떻게 이어줘야 하는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단지, 행복하게 살았으면 했다.
둘 다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와서 고생한 녀석들이니까. 지금도 무거운 중책들을 맡았고.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이 연인이라면 마음을 위안하기도 쉬울 것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만 해도 한 폭의 명화처럼 아름다울 텐데….
테이든의 커다란 손이 루니스의 손을 붙잡고, 내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 기대게 하며 붉고 풍성한 곱슬머리를 손에 휘감으면….
“…….”
순간 가슴이 따끔거려 헤베는 당황해서 손을 올렸다.
흑혈화 현상인가? 그는 루니스에게 티 내지 않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베가 진득하게 작업하지 않고 어수선하게 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루니스는 관심 갖지도 않았다.
헤베는 지끈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연구실을 나왔다.
연구실이 있는 이 층은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기에 복도에 나온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제 테이든이 나타날지 모르므로 헤베는 복도에서 벗어나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목적지는 성 뒤쪽에 있는 개인 소유 정원이었다. 정원 주인이 황제에게 하사받은 후 이곳을 깜빡 잊는 바람에 관리인을 붙여두지 않아 덩굴이 아무렇게나 자랐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이라 헤베는 죽기 전에도 혼자 고통을 참는 용도로 이 장소를 두어 번 이용했다.
흑혈화 현상의 통증은 보통 심장부터 시작된다. 처음에는 마법을 사용한 직후 짧은 격통으로 끝나지만 점점 간격과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중에는 온몸을 두들겨 맞는 고통이 종일 지속된다. 이때쯤이면 계산상 수십 분은 지속될 것이다.
헤베는 미리 준비해둔 진통제를 꺼낸 뒤 통증을 기다렸다. 사실 상용되는 진통제는 소용없고, 통증을 잊는 방법으로는 술과 마약이 최고였다. 그래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즈음엔 항상 약물에 절어 있었다.
뇌가 녹을 만큼 약을 먹고, 골목에 버려진 그를 테이든이 건져와 황성으로 데리고 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헤베는 깨끗이 씻긴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 뒤로는 황성에서 절실한 간호(그때는 그게 간호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를 받으며 머물다가… 테이든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잠시 낮잠에 빠졌다.
그 뒤로 눈을 뜨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한심한 죽음이었다. 현명한 죽음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번 생의 헤베는 정말 한심했다.
“…….”
사아아- 초여름 향긋한 바람에 수풀이 살랑거렸다.
분명 심장에 찌릿한 느낌이 왔는데. 흑혈화 현상 시작의 신호인 줄 알았는데… 왜 통증이 엄습하지 않는 거지?
헤베는 나무 기둥에 기대앉았다.
이상하다. 분명 느낌이 있었는데.
테이든과 루니스가 함께 걷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헤베.”
“으워어억!”
갑자기 상상 속 두 명 중 하나가 시야에 나타났다.
“이런….”
너무 놀라서 펄쩍 뛰어오르는 그를 테이든이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다른 손으로는 손목을 붙잡고 쓰다듬었다. 헤베의 손에는 마법 구체가 떠올라 있었다.
흑혈화 현상과 지긋지긋한 통증 때문에 안 그래도 예민하던 때에 갑자기 불쑥 얼굴을 들이미니, 자신도 모르게 공격 마법이 튀어나온 것이다.
검은 안개가 뒤덮어버린 마법 구체가 타닥타닥 불에 타오르는 소리를 냈다.
헤베는 얼른 마법을 사그라뜨렸다. 하지만 이미 테이든의 아름다운 금발이 몇 가닥 상했다.
“이거 놔.”
“죄송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괜찮으니까 놓으라고.”
“죄송해요.”
테이든은 거듭 사과하며 거리낌 없이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헤베는 저항하던 손에 힘을 풀었고, 테이든이 맘껏 끌어안게 놔두었다.
테이든의 품은 단단하고 따스하다는 걸 이미 수많은 경험을 통해 학습했다. 헤베는 넓은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달래듯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과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집착 어린 손길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나타났을까…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테이든은 누가 어디에 있든 기척을 느낄 수 있으니까.
조금 진정한 후에 녀석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테이든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물어왔다. 헤베는 그제야 테이든의 모습을 살폈다.
오늘도 테이든은 화려한 차림새였다. 상의에 광택 흐르는 은색 브로치가 달려 있었지만, 헤게르미가 공들여 그려놓은 이목구비와 산란하는 햇살처럼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에 보석 브로치 따위는 힘을 잃었다. 어쩌면 그가 황제나 황태자보다 더 화려하지 않을까? 눈을 뗄 수가 없다.
“너 어디 가?”
“아무 데도 안 갑니다.”
“그런데 왜… 오늘따라 화려한데.”
“그런가요?”
테이든이 근사하게 웃었다. 자색 눈이 헤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헤베도 정말 예뻐요.”
한두 번 듣는 게 아닌데도 새삼 부끄러워진 헤베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게나 자란 수풀을 봐도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어떡하면 너한테 못생겨 보일까. 못생겼다는 소리 좀 듣고 싶어.”
“알려줄까요?”
테이든의 음성은 포근한 카스텔라 빵처럼 나긋나긋했다.
“‘못생기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바꾸면 돼요. ‘즐거움과 기쁨을 줄 만큼 예쁘고 곱다’라는 의미로 바꾸면 매일 매일 헤베에게 못생겼다고 해줄게요.”
“그런 말은 어디에서 배워왔어?”
“헤베한테서 배웠나.”
“내가 언제 그런 식으로 말했다고.”
“그럼 그냥 제 진심인 걸로 해요.”
“좀… 나 쳐다보지 마.”
헤베가 고개를 돌려도 테이든은 계속 눈을 마주치기 위해 시선을 따라왔다. 헤베는 결국 테이든에게서 뒤돌아선 채 나무 기둥에 코를 박았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나.
심장이 왜 이렇게 뛰지?
낯선 감정이 들었다.
이 심장 소리가 테이든한테도 들릴 거라는 생각이 든 헤베는 나무 기둥을 앞에 두고 말했다.
“이 거센 심장 박동은 방금 네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런 거야. 오해하면 안 돼.”
“어떤 식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거예요?”
“절대로 네가 잘생기거나 근사해서 심장 뛰는 게 아니라고. 알겠어? 난 네가 정말 싫…어.”
“싫다는 말 그만 하세요. 빈말이라도 마음 아파요, 헤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몹시 처량 맞았다. 대번에 마음이 약해진 헤베는 입을 다물었다.
정떨어지게 하는 계획은 글렀다. 녀석에게 상처 줄 수가 없으니까.
헤베는 한숨 쉬며 뒤돌았다. 대륙 남쪽 바다처럼 넓은 어깨가 한껏 처진 채 풀 죽어 있었다.
기운 내라고 할 수도 없고….
고민하던 중 녀석이 제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정말 살이 내리긴 했네요. 요정족은 5kg 빠졌다고 했지만 정확히는 5.96kg이에요.”
순간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진, 그 녀석은 몸무게가 얼마 빠졌다 하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테이든한테 다 일러바친단 말이야? 그리고 왜 저렇게 수치가 정확해?
헤베는 얼른 화제를 돌리고자 아무 말이나 했다.
“얼른 들어가서 루니스나 도와줘. 혼자서 열심이잖아.”
“말 돌리지 마세요, 헤베. 안 그래도 마른 사람이 너무 많이 빠졌어요. 이건 심각한 문제란 말이죠.”
“내 살 내가 알아서 해. 상관 마.”
“헤베는 제가 갑자기 6kg이 빠지면 어떨 것 같은데요?”
그야…… 걱정하겠지.
가정임에도 벌써 속이 울렁거렸다.
“그거 봐요. 걱정되고 불안하죠.”
테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심지어 헤베는 흑마법을 받아들인 사람이잖아요. 그럼 걱정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그냥 입맛 없는 거지 전염병 같은 건 아니야.”
“알아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전염병이든 뭐든 간에….”
“잔소리하지 마. 또 멀리 순간이동 해버린다.”
“…….”
테이든이 조용해졌다.
테이든도 잘 아는 것이다. 지금이야 기척을 읽고 가볍게 찾아낸다지만, 헤베는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도 찾지 못할 곳으로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아주 먼 곳으로.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순간이동 마법은… 정말 귀찮아요.”
테이든이 나직이 읊조렸다. 그늘진 얼굴에서 서늘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언제였더라. 아직 전쟁 중일 때 누군가 헤베에게 당신은 테이든 공작을 얼마나 여리게 생각하는 거냐고 쏘아붙인 적 있었다. 그때는 의미를 몰랐지만 이제는 헤베도 알았다. 녀석이 생각했던 것만큼 마냥 여리고 순진무구하진 않다는 걸.
“복원 작업이나 하러 가자.”
“…네.”
말이 복원 작업이지 사실, 데이트 조성 작업이었다.
일단 루니스 옆에 앉힌 다음 은근슬쩍 일어나 자리를 피해줄 계획이었다. 루니스가 붙임성 없어서 걱정이긴 하지만. 테이든이 먼저 말 걸어주면 좋겠는데 가능성 낮겠지. 숙제 하나를 던져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어려운 문장 주면서 둘이 같이 이 부분 해석하라고. 머리를 맞대며 연구하는 미남과 미인은 참 보기 좋은 그림이리라.
상상을 하는데 또 심장이 따끔, 했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리는데, 정말 낯선 통증이었다.
본래 그의 성격이라면 이 이상한 통증의 원인은 누군가 말해주지 않는 이상 절대로 몰라야 했다. 하지만 회귀 후 여러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직감적으로 이 통증이 흑혈화 현상과는 관련 없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깨달아버리는 순간 세상이 뒤집히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
헤베가 앞서 걷자 테이든도 바로 곁에 붙어 따라왔다. 테이든은 바람에 부드럽게 날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황성은 다 깔끔하게 관리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구잡이로 자란 곳도 있었네요.”
“정원 주인이 이곳의 존재를 까먹고 있었거든. 방금 알게 됐지만.”
“방금 알게 됐다니… 혹시 주인이 저예요?”
“응.”
“제가 언제 이런 곳을 받았죠….”
“2년 전이었나, 너 첫 전투 때 승리한 공로로 황제가 정원을 만들어줬잖아.”
당시 한참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까먹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라도 관리인 들여서 예쁘게 꾸며봐. 연인이랑 함께 거닐만한 아름다운 정원으로 말이야.”
“그거 좋네요.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성을 나가고 싶어 해서요.”
헤베가 테이든을 노려봤다. 좋아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화도 낸 것 같은데.
아주 날카로운 시선에도 테이든은 방긋 웃기만 했다.
‘이렇게 능글맞은 성격인 줄 몰랐지.’
죽기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테이든에 대해 ‘그저 순하고 착한 녀석’, ‘보호해야 하는 아직 여린 소년’, 이런 묘사만 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 시간대에서 테이든은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생각보다 느물느물한 구석이 있고, 듬직하면서도 가끔은 더없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생각을 읽는 마법을 준 헤게르미에게 고마운 부분이었다. 헤베는 테이든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죽게 되어 기뻤다.
“헤베는 여길 안 잊었네요. 역시 대단해요.”
“성 내부 정원 선물은 흔한 게 아니거든. 너는 어려서 몰랐겠지만 말이야.”
“헤베도 정원을 받은 적 없어요?”
“난 황제한테서 선물 같은 건 받은 적 없어.”
“…….”
테이든은 열여덟 살에 공을 인정받아 이런 귀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새삼 자랑스러웠으나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그 공로가 세워진 곳이 전쟁터만 아니었어도 마음껏 좋아했을 텐데…. 테이든을 전투에 투입시키는 건 최대한 늦추고 싶었지만 전장 상황도 그렇고, 여론이 거세서 더는 늦추기 힘들었다. 헤베는 테이든의 어린 시절이 무척 가여웠다.
“……?”
속도에 맞춰 함께 걷던 테이든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니 테이든은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서 있었다.
“테이든?”
헤베가 불러도 녀석의 서늘한 눈빛은 풀어지지 않았다. 분위기가 살벌했다.
또 뭐에 꽂혀서 갑자기 사나워졌지.
당장이라도 살기가 뻗어 나와 테이든 주위의 풀들이 다 시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살기가 자신을 향할 일은 없다는 걸 알아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헤베는 공격 태세를 취했을 것이다.
“왜 선물을… 받은 적이 없어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흠칫 놀란 헤베는 곧 내용을 파악하고는 긴장이 확 풀렸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공헌을 했는데.”
헤베가 혀를 찼다. 고작 이거 때문에 화가 났다고?
“어떻게 당신에게.”
근처에 있던 새가 푸드덕 날아갔다. 테이든의 살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로 이렇게 분노할 일이냐고. 헤베는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바로 당신이잖아. 왜 당신에게는 정원을 주지 않았어요?”
“내가 활약하던 시기는 달라. 그런 선물을 주고받을 때가 아니었어.”
“같은 시대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요. 당신과 나 중 누구 활약이 더 많았는지.”
“다 너라고 대답할걸. 그리고 이런 눈에 보이는 선물을 안 받았다는 뜻이지 배려는 많이 받았어. 연구실도 혼자 쓰게 해주고, 연구에 필요한 물품은 물심양면 지원해줬지.”
“그 물품, 다 당신이 스스로 구했잖아요.”
“응…. 내가 구해오도록 기회를 줬다고.”
“제가 바보인 줄 압니까? 기회? 선황이 당신이 물품을 구하도록 잠시 전쟁터를 나가게 해줬어요? 그게 아니라 당신은 휴식 시간을 쪼개서 물품을 구해야만 했잖아요. 연구도 전쟁터에서 사용할 무기 연구였죠.”
헤베가 땀을 삐질 흘렸다. 어떻게 알았지. 신탁이 내려오기도 전의 일인데.
“지첸이 말해줬나.”
“모두가요. 모두가 얘기해줬어요.”
“…궁사라는 지위도 내려줬잖아. 잊지 않고 인장도 찍어줬고.”
헤베가 소심하게 변명했지만, 테이든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져갔다.
“대마법사잖아요. 주고 싶지 않아도 안 줄 수가 없는 지위예요.”
“어쨌든….”
끝내 테이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헤베도 표정을 굳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라리 서늘하게 굳히고 있는 게 나았다. 무섭도록 화내는 편이 좋다.
이렇게 상처받은 표정을 할 바에야.
“헤베는 모든 걸 희생했는데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했어요.”
낮은 목소리에 괴로움이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넘칠 것 같은 들끓는 분노와 비탄이었다.
햇살이 밝게 비치는 초여름의 기분 좋은 오전 시간대에 갑작스레 어둠이 찾아왔다. 헤베는 우거진 수풀을 바라봤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쳐다봤다가 마지막으로 괴로움이 가득한 테이든을 보았다.
‘생각을 읽을까.’
지금 테이든이 품은 생각이 궁금했다. 하지만 읽지 않았다.
“상관없어. 돌려받으려고 한 일도 아니고. 나보다 큰 희생을 하고서도 죽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테이든이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욕심이 없어요. 세상에 원하는 게 없죠.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매일 부상을 달고 다니면서도 인지하지 못하는 거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테이든이 고개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더 이상 표정을 보지 못했다. 헤베는 섣불리 위로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씁쓸하게 말했다.
“네 멋대로 날 불쌍한 사람 만들지 마. 내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 없고, 자부심 느끼며 잘 살아왔어.”
“죄송해요.”
테이든이 나지막하게 사과했다. 전혀 반성하지 않으면서.
헤베는 녀석을 내버려 둔 채 정원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헤어져도 얼마 후면 연구실에 더없이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나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어댈 것이다.
테이든이라고 상처 안 받지는 않을 텐데.
‘헤베는 모든 걸 희생했는데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했어요.’
테이든은 헤베가 피해자라도 된 것처럼 표현했다. 하지만 헤베는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흑마법을 받아들이기 싫다는 이유로 수많은 죽음을 방조한 죄인이다.
헤베는 테이든이 흑마법을 받아들인 이유를 영원히 모르길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내가 망설였다는 사실을 알면 싫어하게 될까.’
테이든은 헤베 뮨을 사랑한다.
모든 걸 희생했는데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한 사람을.
어렸을 때부터 전쟁터에 뛰어들어 항상 부상을 달고 다닌 사람을.
아무것도 돌려받지 않으려 하는 헤베 뮨을 사랑한다.
전쟁을 끝낼 방법을 알면서도 머뭇거렸던 비겁한 헤베 뮨이 아니라.
만약 자신이 알고 있던 게 틀렸다는 걸 안다면 그는 날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건가.
헤베는 정말이지 알고 싶지 않았다.
며칠간 봄비가 내렸다. 주변 온도가 내려가자 헤베도 대번에 감기에 걸렸다. 오래전 전쟁터에서 부러졌던 발목이나 무릎, 어깨 등 온갖 곳이 비 올 때마다 쑤시는데 감기까지 겹치니 헤베는 정신을 못 차렸다.
그는 이틀간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테이든이 떠주는 수프를 마시고, 먕먕이의 앞발과 말랑말랑한 뱃살,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낸 덕인지 다행히 감기가 독감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이틀간 먹은 게 수프 세 스푼 뿐이라 눈에 띄게 살이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헤베는 착잡한 마음으로 테이블 위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과 음료를 쳐다보며 이마를 짚었다.
“헤베, 머리 아파요?”
“응, 너 때문에.”
매몰차게 대답하자 테이든은 얼른 근처의 빵, 버터를 바른 크로와상을 손에 들고는 코앞에 들이밀었다.
“얼른 빵 냄새 맡아요.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고양이에게 캣닢 주듯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웃긴 건 진짜로 고소한 빵 냄새를 맡자 두통이 나아졌다는 사실이다.
진통제 대신 빵 향수나 조향해서 갖고 다녀야 하는지. 헤베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나아졌으면 얼른 앉아요, 궁사. 배고파 죽겠수.”
허기를 유난히 못 참는 지첸이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옆에서는 파르테가 난감하다는 듯 웃었고, 그 맞은편에서 파와이와 밀리안이 서로의 빵을 잘라줬다. 와중에 마우는 빵을 한 입 깨물다가 진의 날카로운 시선에 슬그머니 내려놨다. 그 모든 모습을 한심하게 보고 있는 루니스 율리도 빼먹으면 안 된다. ‘내가 왜 여기 있지’라는 얼굴이었다.
그렇다. 진은 정말로 며칠 전 한 말을 지켰다.
당신이 끼니를 챙기지 않으면 모두가 굶을 거라는 말을.
그래서 모두가 헤베의 방에 모여 함께 점심을 드는 웃지 못할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헤베는 진이 실없는 농담 같은 건 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너네 진짜로 단식투쟁하는 거야? 내가 안 먹으면 안 먹겠다고?”
“네.”
“우린 모두 의기투합했습니다. 먕먕이와 새끼들도요.”
“새끼들이라니?”
-먕.
그때 먕먕이가 바구니를 입에 물고 쫑쫑쫑쫑 걸어왔다. 바구니 안에는 삑삑이와 빽빽이가 있었는데 아직도 너무 작은 꼬물이들이었다.
“삑삑이랑 빽빽이도 굶을 거예요.”
맙소사. 헤베는 마우를 쳐다봤다. 마우가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었나.
“시, 싫으면 얼른 앉아서 식사하세요.”
마우는 몹시 티 나게 테이든을 의식하며 시선을 피했다.
헤베가 테이든을 노려보자 테이든은 빙긋 웃었다.
“배고파요, 헤베.”
‘배고파요, 헤베.’
언젠가 전쟁터에서 검은 재를 묻힌 채 그렇게 말하던 어린 테이든의 모습이 떠올라버린 헤베가 성큼성큼 걸어 의자에 앉았다. 진이 기다렸다는 듯 빵을 잘라줬고 헤베는 잼을 듬뿍 발라 입에 집어넣었다.
빵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죽기 전에는 빵 맛이 느껴지지 않아서 정말 괴로웠었다.
“지금 먹는 거 안 보여? 너네도 얼른 먹어.”
“예.”
“잘 먹겠습니다.”
-먀앙.
헤베를 물끄러미 보던 녀석들이 각자 식기를 들었다. 헤베만 빵과 수프이고 다른 놈들 앞에는 각자 취향에 맞게 차려졌다.
고기를 좋아하는 지첸이 칠면조 다리를 손에 들고 뜯는다. 마우도 고기를 써는 중이고. 파르테는 소박한 해산물 스튜를 소심하게 떠먹는다. 파와이와 밀리안은 서로에게 먹여주며 주변에 깨소금을 뿌렸다. 루니스는 여전히 ‘내가 왜 여기에….’라는 표정으로 천천히 식사 중이다.
전쟁터에 있을 때 그들은 대부분 이렇게 모여서 식사를 했다. 후반에 합류한 루니스와는 몇 번 함께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다 같이 먹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황제는 공식적으로 종전을 선언한 후 아흐레간의 축제 기간 동안 매일 매일 모두를 불러 만찬을 열었다. 흑마법사인 헤베는 초대받지 못했다. 초대받았더라도 부상과 고된 심문으로 자리보전하고 누웠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기 전에도 이렇게 모두 모인 풍경은 상상도 하지 않았는데.
이번 생은 망나니짓을 시작하지 않아서인지 여러모로 달랐다.
“입맛에 맞아요?”
“맛있네.”
“다행이에요.”
테이든은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면서 크게 기뻐했다. 헤베도 테이든에게 묻고 싶었다. 맛있어? 입맛에 맞아?
묻지 않아도… 테이든은 뭘 먹든 맛있게 잘 먹지만.
***
빵을 2/3가량 먹고 나자 배가 불러왔다. 포크를 내려놓자 진이 능숙하게 차를 내왔다.
헤베의 식사량은 전쟁터에 있었을 때부터 적었다. 그걸 아는 이들은 헤베에게 끼니를 챙기라고는 강요해도 ‘더 먹어라’라고는 하지 않았다.
차 위에는 작고 예쁜 하얀 꽃잎이 둥둥 떠 있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거 제가 띄웠어요”
테이든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요정족 말고 제가 했어요.”
“아… 그래.”
진이 차를 주길래 진이 한 줄 알고 칭찬하려던 헤베가 시치미를 뗐다.
테이든은 헤베와 비슷하게 식사를 마쳤다. 일부러 속도를 맞춘 것이다.
테이든이 쿠키를 아작 깨물었다. 뭐든 잘 먹는 건 정말 장점이었다. 달달한 것도, 매운 것도, 정말 맛없는 것도. 헤베는 잘 먹는 테이든을 보는 게 좋았다.
“테이든.”
“네.”
헤베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린 채 삐딱하게 기대며 물었다.
“네 이상형이 뭐야?”
“…….”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식기 부딪치는 소리도 음식 씹는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다들 그대로 동작을 멈춘 채 헤베를 쳐다봤다. 그 루니스 율리까지도.
“이상형이라면 전에도 말했잖아요.”
“더 정확히, 구체적으로 말해봐. 그래야 찾기 더 쉽지. 다들 잘 들어두고 해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얘기해.”
테이든의 눈가가 조금 굳었다.
수하들도 떫은 표정이 되었다. 특히 지첸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상 끝까지 달리고 싶은 얼굴이었다.
다들 왜 이럴까. 생사를 함께한 동료의 연애 상대를 찾아주는 일인데.
설마… 테이든이 날 사랑한다는 걸 다들 아는 건 아니겠지?
무서운 생각이 든 헤베가 미간을 찌푸리고 녀석들을 하나하나 노려봤다.
모두 시선을 회피했다.
“일단… 외모가 예뻤으면 좋겠어요. 전 정말 눈이 높거든요.”
평정심을 찾은 테이든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유능하고.”
“…….”
“선하고.”
“…….”
“이타적이며.”
“…….”
“너무 순수해서 다소 엉뚱한 행동을 하거나 지나치게 느긋한 면도 있지만.”
“…….”
“올곧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 제 이상형이에요.”
헤베는 테이블을 탁 치며 일어났다.
“말도 안 돼. 그런 사람이 어딨어?”
다들 헤베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게요…. 어디에 있을까….”
“저 이만 나가도 됩니까? 토하고 싶은데요.”
-우우욱.
실제로 지첸은 ‘이타적이며’에서 이미 연구실을 뛰어나가 버렸다. 지첸을 따라갈 타이밍을 놓친 녀석들이 열린 문을 힐끔거렸다.
다른 녀석들의 반응 따위야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루니스 율리니까.
“루니스, 이 이상형을 어떻게 생각해? 너무 어렵지 않아?”
루니스는 다소 창백해진 낯빛으로 대답했다.
“정말이지 알고 싶지 않은 정보군요.”
헤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짝사랑 상대의 이상형과 자기 스타일이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 슬프니까.
하지만 루니스도 정의롭고, 아름답다. 유능함이야 말할 것도 없으니 노력하면 이상형이 될 수 있다. 열심히 엉뚱해지고 느슨해진다면….
“그러는 헤베는요?”
“응?”
“헤베는 어떤 스타일이 이상형인가요?”
테이든이 근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조금 화난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그를 향한 미소는 정말 멋있고 근사했다.
“내 이상형이야 뭐….”
최대한 테이든과 반대를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헤베는 테이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일단 보라색 눈이 아니고, 금발도 아니고, 못 생겨야 하고, 체격도 가냘파야 해. 거칠고 터프한 성격에 무능력하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여섯 살 연상이 내 이상형이야.”
“…….”
“…….”
달그락, 탁. 식기 소리와 함께 파와이와 밀리안이 일어났다.
“우리는 이만 가볼게….”
“맛있게 잘 먹었고 다시는 함께 식사하지 말도록 해요….”
뒤이어 파르테와 마우도 따라갔다. 진은 아주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쉰 뒤 그릇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동안 누구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 엄청나게 살벌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테이든 때문이었다. 진이 트레이를 끌고 가는데 루니스가 답지 않게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뒤를 따랐다.
-먕… 맹….
먕먕이도 새끼들이 들어 있는 바구니를 입에 문 채 열린 문틈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혔다.
누가 닫은 거지?
“헤베.”
“어, 응?”
헤베가 퍼뜩 놀라며 정신차렸다. 테이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아 마치 천둥 소리라도 들은 듯했다.
이렇게 소스라치게 놀라면 응당 ‘괜찮아요?’하고 토닥였어야 할 테이든은 냉담하기만 했다. 헤베는 죄인이라도 된 심정이었다.
“왜 정색해…. 네가 물어봤잖아. 그래서 대답해준 건데.”
“정말 몰라서 물어요?”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차가웠다.
흑마법을 받아들이고 마기를 내뿜던 모습이 떠올랐다. 깊고 어두운 마기를 내보내며 성을 무너뜨리던 그.
“표정 풀어. 너 지금 누구 한 명 죽일 것 같아.”
“처량하게 우는 척이라도 할까요.”
테이든의 한쪽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 마냥 순수하고 여리진 않다는 건 헤베라도 어느 정도는 눈치챘다. 하지만 타이르듯 말하면 바로 전처럼 돌아왔는데, 지금 테이든은 무시무시하게 분노했다.
“제가 울면 좀 나아지겠어요? 아니지, 당신은 내가 우는 모습을 보면서도 냉정하게 돌아섰잖아.”
“난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했을 뿐이야.”
“제가 당신을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복수하는 거예요?”
“그건 아닌데.”
내뱉고 바로 후회했다. 차라리 그렇다고 할 걸 그랬다.
“저한테 왜 그렇게 잔인해요?”
테이든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화를 억눌러 참고 있지만, 표정 관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떨리는 턱과 꿈틀거리는 뺨. 허벅지에 놓인 손은 힘주어 주먹을 쥐고 있었다. 단단한 주먹조차 바르르 흔들렸다.
누가 봐도 화가 난 모습인데,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차가운데 어째서인지 헤베에게는 처량 맞아 보였다. 차라리 무섭기만 했다면 마음 약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헤베는 테이든에게 약하게 굴지 않기 위해 눈을 치켜떴다.
“왜 잔인하냐고? 지금까지 몇 번을 말했잖아. 네가 너무 싫어서 네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싫어.”
“그러니까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왜 그렇게 말하는지. 헤베는 절 좋아하잖아요.”
헤베는 눈을 치켜뜬 채 그대로 굳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저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성애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어진 말에 그는 속으로 깊이 안도했다.
순간 정말 놀랐는데 다행이었다.
테이든은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고서는 뭐에 또 열 받았는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왜 그렇게까지 해요? 사실은 절 좋아하면서.”
“안 좋아한다니까….”
“제대로 다시 물을게요. 왜 절 좋아하면서 자꾸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겁니까. 목적이 뭐예요.”
“널 안 좋아한다고. 네가 싫다고. 몇 번을 말해.”
이번엔 헤베가 머리를 헝클였다. 테이든이 손목을 홱 잡아채 갔다.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듯 입을 벌렸던 테이든은 놀란 듯이 입술을 꾹 다물고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날이 갈수록 가늘어지는 손목과 손 아래에서 잡히는 아주 연약한 맥박 때문이었다.
헤베는 맥박을 재는 손을 급히 떨쳐내려 했지만 테이든이 더 빨랐다.
“가만히 있어요.”
“아파.”
“아파도 참으세요.”
아프다고 하면 그래도 풀어주고는 했는데….
보기 드문 박력에 심장이 요동쳤다. 과거에는 이렇게 강하게 나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죽기 전까지 헤베에게 테이든은 지켜줘야 할 여린 소년이었고, 테이든도 그렇게 여기게끔 행동했다. 강한 힘과 성격을 숨기고 앞에서는 항상 나약하고 여리게 굴었다. 헤베가 흑마법사가 되었을 때도 큰소리치며 싸운 적은 있었지만, 힘은 이용해 강압적으로 군 적은 없었다.
그때도 이런 성격을 알았다면 둘의 관계가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난 힘으로 제압하는 걸 아주 싫어해. 널 더 싫어하게 만들고 싶어?”
“그건 당신이겠지.”
테이든이 냉소했다.
“내가 당신을 싫어하게 만들고 싶은 거죠?”
내뱉는 당사자가 더 상처받는 말이었다.
헤베는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 행동했다. 하지만 그도 모르게 어떤 표정 변화가 있었던 건지 테이든의 자색 눈이 끈질기게 얼굴을 훑었다.
“왜요? 왜 내가 당신을 미워해야만 하는 겁니까. 이유를 말해봐요. 누구에게 사주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무슨 저주에라도 걸렸어요?”
“널 싫어하니까. 너무 싫은 네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이 소름 돋고 끔찍해서. 그래서 차라리 날 싫어하게 됐으면 하는 거야.”
이곳은 전쟁터나 마찬가지다. 방심하면 안 돼.
헤베는 스스로 세뇌하면서 녀석을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서, 어때? 정떨어졌어? 날 미워하게 됐어?”
“아니요. 더 사랑에 빠졌어요.”
“거짓말하지 마. 이렇게 화를 내잖아.”
“당신한테 화난 게 아니에요.”
“그럼 뭐에 화가 났다는 건데.”
테이든이 붙잡은 손목이 점점 저려왔다. 평소라면 배려해줬어야 할 테이든은 더욱 더 강한 힘으로 팔을 붙잡았다.
“화난 게 아니라 상처받은 거예요.”
여유를 잃은 듯한 모습을 보니 회귀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테이든의 모습이 겹쳐졌다. 시체를 끌어안고 울부짖던 그.
“당신이 아무리 매몰차게 말해도 저는 당신이 싫어지지 않습니다. 그냥 제 마음만 아프게 될 뿐이죠.”
“…….”
“알겠어요? 제 마음만 아프다고요, 헤베.”
내용만 들으면 너무나 가엾고 불쌍해 보이지만, 테이든이 분노를 억누르며 잇새로 새어나가듯 내뱉은 탓에 위협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왜일까. 헤베는 테이든이 일부러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굴 때보다 이렇게 위협적으로 말하는 지금이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
“목적이 뭔지 아직은 짐작도 할 수 없지만 헤베는 그 망할 계획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내 계획이 뭔데.”
“내게 차갑게 대해서 당신을 싫어하게 만드는 멍청한 계획 말이에요.”
헤베가 삐뚜름하니 입을 다물었다.
이 멍청한 계획은 내가 아니라 헤게르미의 머릿속에서 나왔으니 내 계획이 아니란 말이야. 나도 죽기 전부터 이런 계획은 세워놓긴 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으니 헤게르미가 멍청한 거야.
“저는 그런 걸로 당신이 싫어지지 않아요. 제 마음만 아프게 되죠. 그러면 헤베도 마음이 아파지잖아요.”
“나, 난 전혀 안 아파. 네 맘이 아프다니 너무 좋네. 올해 들은 소식 중에 제일 기쁘다.”
자신이 들어도 오래된 가구처럼 삐걱거리는 말투였다.
테이든은 헤베의 말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4월 초부터 이상해졌죠. 계속 일부러 제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제 마음을 아프게 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제가 다시 멀쩡하게 웃는 얼굴로 당신을 대하면 당신은 안심해요. 눈에 띄게 안심하며 예쁜 얼굴로 웃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싫어할 수가 있겠어요?”
헤베와 달리 테이든의 말투는 무척 단호했다.
“헤베가 원하는 건 모두 이뤄주고 싶지만 이것만은 무리입니다. 당신을 싫어하는 척은 못 해요. 흉내도 낼 수 없어요.”
테이든이 의자에서 내려와 헤베의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영웅이고 공작이었지만 늘 바닥에 앉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테이든은 가냘픈 손목을 끌어당겨 자신을 내려다보게 했다.
“계획을 바꿔요. 당신을 싫어하길 바란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요. 당신은 똑똑하잖아.”
테이든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고,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았다. 자색 눈동자는 캄캄한 밤처럼 보이기도 했다.
헤베는 테이든이 지금 스스로 내뱉은 말에 상처받았다는 걸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당신을 싫어하길 바란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요.’라고 말해야 하는 것에 대해.
“…그럼 물어볼게. 어떻게 해야 날 싫어할 건데?”
헤베는 일그러지는 미간을 바라보며 헤게르미가 준 생각을 읽는 마법을 외웠다.
혹시라도 테이든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갈 ‘싫어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 수 있을까 해서.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그런 방법 같은 건 없어.
새어 나오는 속마음은 너무나 괴로운 목소리였다. 음성이라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신음 같았다.
“헤베는 천재잖아요. 언제나 방법을 찾아내지요. 분명히 제가 당신을 싫어할 방법도 찾아낼 거예요.”
-그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서 더 마음이 아파.
“저는 당신 손아귀에 붙잡힌 가련한 동물에 불과하니까요.”
-어떻게 하면 될까.
“더는 밀어내지 말아요.”
-그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아.
“다른 방법으로 제가 당신을 미워하게 하세요.”
-내게 상처 주면서 그가 상처받는단 말이야.
차마 전하지 못하고 속에 품기만 한 말들이 귓가에 들려오니 이번엔 헤베가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이만 이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알겠으니까 너도 날 싫어하도록 노력해.”
“미안해요. 그 부탁도 들어주지 못합니다.”
“다 안 된다고만 말하고. 나한테만 맡기겠다는 거야?”
“네, 죄송해요. 저는 헤베를 싫어하는 방법을 모르거든요.”
테이든이 손을 놓자 붙잡혔던 손목에는 아주 붉고 커다란 손자국이 남았다. 테이든은 그 자국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자기가 만들어 놓고 속상했는지 손가락으로 살결을 문질렀다.
“읏.”
살갗이 쓰려와 몸을 움츠렸다. 테이든도 덩달아 움찔했는데, 헤베는 그 틈을 타 팔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든은 여전히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네 말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어. 아무튼… 내가 냉정하게 대하는 것만으로는 날 싫어하게 되지 않는다는 건 알아들었어.”
“…….”
“따라오지 마. 여기서 머리 식혀.”
“…네, 그럴게요.”
-이렇게 흔적이 남을 줄은 몰랐어. 그는 정말 약해졌어. 약재를 가지고 와야지. 내가 줬다고 하면 받지 않을 테니까 요정족에게 부탁해서….
이 와중에도 들려오는 테이든의 생각은 너무 상냥하고 다정했다.
헤베는 테이든을 혼자 두고 연구실을 나왔다.
앞으로 연구실에 올 때마다 녀석과의 대화가 떠오를 게 뻔했다. 복원 작업이 막바지라서 다행이다.
-흑마법 때문임이 분명하다. 자세히 물으면 헤베는 진심으로 화를 내겠지.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복도를 걷는 와중에도 테이든의 생각이 들렸다. 효력 시간이 이렇게 길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계속 들려왔다.
-너무 혼란스러워. 전에는 안 그랬는데.
헤베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이제 그의 생각을 그만 읽고 싶었다. 멈추고 싶다고 멈춰지지 않는 건 이 능력의 최대 단점이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전쟁이 끝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아.
-차라리 전쟁 중이었을 때가 나았어.
-우린 항상 함께였는데.
-전쟁이 다시 일어났으면 좋겠어.
들려오는 생각은 점점 섬뜩해졌다.
이 말을 내뱉은 자가 언제나 다정했던 이라고는 믿기도 어려울 정도로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헤베는 걸음을 멈췄다. 설마 싶으면서도 좀 걱정스러웠다.
설마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로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겠지…. 아니… 그런데 테이든은 정말로 나한테 미쳐 있잖아. 세상을 멸망시킨 전적이 있는데.
-용서하지 않을 거야.
테이든이 이를 까드득 갈았다.
-헤베가 날 떠나면 헤게르미를 용서하지 않겠어.
“…….”
긴장했던 헤베는 조금 황당해졌다.
내가 널 떠나는데 왜 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거야?
헤게르미가 무슨 죄라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생각이 들려오지 않았다. 맙소사. 헤베가 걸음을 멈춘 채 입을 가렸다.
왜 갑자기 이번에만 더 오래 생각이 들렸는지 짐작이 갔다. 헤게르미가 일부러 들려준 것이다. 테이든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을 하는지를…….
***
며칠이 흘러 복원 작업이 완전히 끝났다. 헤베와 루니스는 풀 에자르 위튼 <마법의 역사> 자필 초판본 원서와 복원서를 상등급 봉인 마법을 걸어놓은 케이스 안에 넣어 황제에게 전달했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산재한 일거리들에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고 있는 황제는 케이스를 열어 보지도 않았다. 수고했고 이만 들어가 보라길래 헤베는 이제 궁사 자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황제가 화들짝 놀랐다.
“아, 깜짝했군. 그대에게 맡길 문제가 있었는데 마법학 교육서 개정 작업을-”
“제 자리는 루니스 부궁사에게 물려주세요.”
“마법 전용 학교를 건설할 생각인데 설계에 자문을-”
“그럼 안녕히 계십쇼.”
“헤베 뮨!”
황제가 체통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그대가 나가면 테이든 공작은 어떻게 하겠다던가? 테이든 공작은 세계 재건에 반드시 필요한 자일세.”
“저 성 안 나갈 건데요. 궁사직만 그만둡니다.”
“안 나간다고? 황성을 나가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지 않은가.”
“나가길 바라면 나갈게요.”
“제발 나가지 말아주게.”
황제가 구르듯 달려와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듯 애원했다. 헤베는 황성에 남기로 했다고 헤게르미에게 맹세한 이후에야 알현에서 풀려났다.
루니스의 궁사 즉위식은 열흘 후, 6월 첫날에 올리기로 했다. 헤베는 좀 더 빨리 열기를 바랐으나 궁사라는 지위가 워낙 높은 탓에 즉위식도 화려하게 거행되어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헤베가 궁사가 되었을 때야 전쟁 중이었다지만 지금은 전후니까.
탈리의 최고 권력자는 총 셋으로 황제, 대신관. 그리고 마법사의 탑의 탑주인 ‘궁사’이다. 헤베는 어려서부터 궁사가 황제, 대신관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게 불만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궁사가 된 후에는 일부러 황제, 대신관의 아래로 들어가고 규칙도 뜯어고쳤다. 루니스를 궁사에 앉힌 것도 그와 뜻이 같기 때문이었다. 다른 부궁사들은 모두 나이가 많아 보수적이었다.
“왜 갑자기 궁사에서 내려오신다는 겁니까.”
황제 앞에서는 조용하던 루니스가 알현실을 나오자마자 물었다.
“그동안 너무 바빴잖아. 정말 쉴 틈 없이 일했지.”
“그동안 황성 안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늘어지게 쉬었잖습니까.”
“…그냥 너 가져. 싫어?”
“싫은 건 아닙니다.”
루니스는 궁사가 된다는 데에 조금 설레하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떨떠름해 했지만 다섯 부궁사 중 가장 어린 자신이 올라간다는 점이 뿌듯할 것이다.
사실 루니스 말대로 헤베는 공식적으로 백수가 되려면 열흘이 남았지만 지금도 이미 백수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 바빠야 할 궁사가 흑마법사인 탓에 부궁사들만 바쁘게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헤베는 우선 몸을 깨끗이 씻었다.
흑마법사가 목욕할 땐 상당히 커다란 각오가 필요하다. 목욕한다는 건 옷을 벗겠다는 뜻이므로. 상체를 뒤덮은 검은 핏줄은 몇 번을 봐도 볼 때마다 징그러웠다.
헤베는 팔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른쪽 손목에 검푸른 손자국이 남았다. 테이든이 화냈던 유일한 흔적이다.
요근래 테이든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다정하고 부드럽기만 했다. 바람에 살랑이는 꽃잎처럼 팔랑팔랑 부드럽고 연약하게….
헤베는 테이든의 조언대로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다. 생각해둔 게 하나 있으니 이걸 확인받기 위해 헤게르미에게 갈 예정이다.
오늘, 지금, 당장.
목욕재계 후 가장 단정한 옷을 꺼내 입었다. 흑마법사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의복이지만 신과 만나는데 이 정도는 입어줘야 하지 않겠나. 회귀 첫날에는 너무 혼란스러워 준비 없이 신전에 방문했지만, 또다시 건방지게 굴 수는 없다.
헤베는 허리끈을 질끈 동여매고 거울 앞에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하얀 옷을 입은 마르고 창백한 남자가 눈앞에 서 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거울 속의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잠깐 그 모습을 보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그만두고 방을 나왔다.
“외출하십….”
“…….”
황제가 붙인 감시병들이 인사를 건네오다 말았다. 둘은 오랜만에 차려입은 헤베 뮨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나갔다.
물론 헤베는 ‘흑마법사가 흰옷 입었다고 싫어하네.’라고 해석했다.
“궁사님.”
성 아래 내려가니 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은 최대한 자제하기 위해 미리 진을 통해 마차를 불러놨다. 평민들의 마을에 갈 예정이니 요란하지 않은 걸로 불러 달랬는데 말을 잘 따르는 진은 정말 평범한 마차로 구해놨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마차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진이 헤베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응, 맞는데. 잘 구했어. 이 정도면 튀지 않을 것 같아.”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너 파와이랑 밀리안의 예식장을 같이 보러 가기로 했잖아.”
파와이와 밀리안은 결혼을 약속하고 여름이 지나기 전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과거보다 시기가 굉장히 일렀다.
과거에 워낙 망나니처럼 살았기 때문에 다른 녀석들이 어떤 시간을 겪었는지는 모른다. 그나마 기억하는 커다란 사건이 파와이, 밀리안의 결혼과 파르테의 가출 정도.
파와이와 밀리안은 952년에 결혼했다. 헤베가 죽기 반년 전이었고, 성대하게 열린 결혼식에 그는 초대받지 못했다. 대신 테이든이 그날 밤 헤베를 찾아와 둘의 행복한 모습이 담긴 그림 한 폭을 선물했다.
이번에는 결혼식에 초대받았다. 파와이와 밀리안은 주례를 봐달라는 부탁까지 해왔다. 헤베는 흑마법사가 주례를 본다 하면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고 거절했는데, 그러자 둘은 하객이야 아무도 오지 않아도 된다고 대답했다. 어쨌든 헤베는 끝까지 거절했고 둘은 대신 하객으로 참석은 하겠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물러났다.
“살면서 한 번뿐인 결혼식에 요정족 안목이 필요하다는데 가서 골라 줘.”
헤베는 굳이 따라오려 하는 진의 팔을 툭 치고 마차에 올랐다. 진은 마차 문을 닫지 않았다.
“…하지만.”
무척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헤베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째서지? 흑마법사인 내가 홧김에 사람을 죽이기라도 할까 봐?
…일리가 있는 불안이다.
저번에만 해도 마구간 주인과 싸움이 일어 흑마법을 사용하려고 했다. 테이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자를 멧돼지나 흑염소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수명을 이틀 정도 잃고.
이쯤 되니 헤베도 불안해졌다. 누군가 감시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 성에 누가 있더라 생각하는 그때 앞쪽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같이 갈게요.”
헤베를 볼 때만 해도 고개만 까딱하던 마부가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테이든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테이든은 마부를 향해 빙긋 웃어주고는 곧장 헤베에게 걸어왔다.
오늘 그는 칠흑 같은 검은 비단으로 지어진 단정한 핏의 의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분명 검은색인데 너무 눈부셔 순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여름을 고대하며 피어난 꽃도 기죽을 것 같은 아름다운 금발과 이목구비, 떡 벌어진 탄탄한 체구. 그 몸을 감싸고 있는 상등품의 비단옷. 모든 게 완벽했다.
“헤베, 오늘… 정말 예쁘네요.”
가까이 다가온 테이든은 헤베를 실명시키려는 듯 예쁘게 미소 지었다.
‘예쁜 건 자기면서.’
헤베는 고개를 돌렸다.
“사고 안 치고 잘 다녀올 테니 진, 너는 이만 밀리안한테 가 봐.”
“테이든 공작과 함께 가십시오.”
“혼자 갈 거야.”
“같이 가요, 헤베. 저 지금 한가하거든요.”
테이든은 빙긋 웃으며 헤베를 부드럽게 안쪽으로 밀고는 좁은 마차석에 기어코 자기 엉덩이를 걸쳤다.
‘안 되는데. 네 일에 대해 상담하러 가는데 네가 같이 가면 어떡해.’
헤베는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다녀오십시오.”
진이 냉큼 문을 닫고, 곧 마차가 부드럽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제일 상관인데,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헤베는 오른쪽 벽에 달라붙어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다. 테이든에게서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창밖으로 무척 경치 좋은 풍경이 지나갔지만 헤베의 신경은 온통 테이든에게 쏠렸다.
“저한테 냉정하게 대해봤자 소용없다니까요.”
“알아.”
“…….”
“…….”
짧은 웃음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홱 돌리니 테이든이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웃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테이든은 고개를 기울이며 사과했다. 오랜만에 보는 귀여운 얼굴이었다. 스무 살 다운.
“제가 착각했어요. 냉정한 게 아니었네요. 부끄러워하는 거였네.”
“…….”
맙소사. 얘가 뭐라는 거야?
창밖이나 볼걸!
하지만 이미 테이든의 자색 눈동자에 사로잡힌 헤베는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테이든은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석을 손에 넣은 보석 수집가보다 더욱 아름답게 웃었다.
정말 강하지 않은가. 최근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순수한 웃음이 나오지 않을 법도 한데 말이다.
헤베는 순간 테이든의 생각을 읽어보고 싶어졌지만 관뒀다. 다만 오늘 헤게르미에게 기도할 때 이 능력을 거둬달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회귀 첫날 충동적으로 왔던 작은 신전 앞에 도착했다.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어딜 가나 했더니, 신전이었어요?”
테이든이 헤베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을 휘감으며 물어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헤베는 의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체력이 부족한 그는 단단한 팔에 살짝 기대기까지 했다.
“불만이면 가든가.”
“아니에요. 들어가요.”
신전에는 미리 진을 통해 어느 시간대에 방문하겠다고 말을 전해놨다. 흑마법사의 방문이라 방문객을 통제해놨는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전전긍긍 입구에서 기다리던 신관이 둘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예정에 없던 영웅의 등장으로 놀란 것이다.
“들어가도 됩니까?”
“죄, 죄송합니다.”
헤베의 물음에 신관이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안내했다.
신전 내부는 저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소박하고 군데군데 허름하기도 한 것이 테이든 엔더웨이가 방문했다는 소문을 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해하는 바였다. 그 얘기를 하려면 흑마법사가 먼저 왔었다는 얘기까지 해야 하니까.
“헤베는 작은 곳이 좋아요? 우리가 함께 짓는 대신전에는 관심도 없더니 여긴 두 번이나 방문하네요.”
“대신전은 내가 관심 안 둬도 잘 지어질 거잖아. 너는 현장에 방문해봤어?”
“저는 두 차례 방문했어요. 생각보다 순조로워서 삼 년 안에 무사히 완공될 것 같아요.”
“틈나는 대로 거들어 줘. 헤게르미께서 그곳을 기대하고 계셔.”
“저도 기대돼요. 헤베와 제 이름이 함께 오르는 첫 신전이잖아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마지막이라뇨…. 지금 우리 검토를 기다리는 설계도만 수백 장인데요. 대부분 대규모 공사이긴 하지만.”
테이든은 서운한 듯 울상을 지었다.
헤베도 서운했다. 그게 마지막이란 게. 그리고 완공된 건물을 볼 수도 없다는 게.
“헤베가 작은 곳이 좋다면 작은 곳으로 선정해요.”
“이왕이면 큰 게 낫지. 뭐든 크고 봐야 돼.”
“다행이네요. 전 정말 남다르게 크거든요.”
“응?”
“너무 커서 어떻게 잘라내야 하나 했는데.”
“무슨 말이야? 신앙심을?”
“아니에요.”
순진무구한 갈색 눈에 테이든은 빙긋 웃기만 했다. 정작 헤베는 알아듣지 못하고 그들을 인도하는 신관만 얼굴이 붉어졌다.
기도실에 도착하자 신관은 마음껏 자유롭게 있다 나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빠르게 도망쳤다.
테이든과 헤베는 함께 기도실로 들어갔다.
좁고 허름했지만 그 어느 곳보다 안락하게 느껴졌다. 낡은 나무 냄새가 오히려 헤베의 마음에 평화를 찾아줬다.
난 알고 보면 작은 곳을 좋아하는 건가.
헤베가 분위기를 만끽하는 동안 테이든은 방석 세 개를 차곡차곡 쌓았다. 헤베는 그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테이든은 방석 없이 철푸덕 앉았다가 헤베가 노려보자 자세를 고쳤다.
“양쪽 무릎을 꿇은 자세는 힘들어요.”
테이든이 두 무릎을 바닥에 대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헤베처럼 무릎을 꿇은 채 편히 앉지 못하는 불편한 근육질 신체였다.
“그래도 신 앞에서는 예의를 차려야지.”
“네, 헤베. 말 잘 들을게요.”
테이든이 웃었다. 헤베는 또 갑자기 심장이 떨려 오려 해서 고개를 돌렸다.
헤게르미 신상과 눈이 마주쳤다.
헤베는 기도하는 척 양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에 가득한 건 테이든 뿐이었다.
테이든은 수도원을 나와서도 하루 세 번 기도 올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 보통 어린애들이라면 기절해버릴 정도로 혹독한 수련을 하면서도 꼬박꼬박 기도 시간을 챙겼다. 퉁퉁 부은 눈으로 자다 일어나 기도하고, 온몸이 멍들어 거동도 불편한 와중에도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았고, 이틀 굶어 허기진 상태에서도 식사를 앞에 두고 기도부터 올렸다.
헤베도 헤게르미의 충실한 신도였지만 테이든 만큼은 아니었다. 사는데 바빴기 때문에 기도를 안 한 채 자버리는 날들도 많았다.
고된 훈련을 반복하면서도 꼬박꼬박 기도드리는 어린 소년에게 한번은 나쁜 유혹을 해본 적도 있었다.
‘안 피곤해? 무릎 꿇기도 힘들잖아. 오늘은 그냥 자.’
‘안 돼요. 기도드려야 해요.’
‘누운 채로 눈 감고 기도해도 돼. 헤게르미는 어떤 상황이든 기도는 모두 들어주실 거야.’
‘제가 정말로 힘이 없을 때는 그렇게 할게요.’
테이든은 지친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며 무릎을 꿇었다.
소년이 기도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기다란 속눈썹과 오뚝한 콧날 아래에 간절하게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하는 옆모습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풍경이었다.
그 뒤로는 헤베도 웬만하면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테이든이 열아홉 살 되던 날, 북부 지역에서 교전 중이었는데 마침 혹한의 눈보라가 불어 마물도 인간도 움직일 수 없었다. 뜻하지 않는 휴식 기간에 생일이나 챙겨보자 하여 파르테와 지첸이 주도한 테이든 생일파티가 열렸다.
테이든이 지내던 수도원의 늙은 사제님이 마침 근처에 와계셔서 초대했는데, 그때 사제님은 테이든이 수도원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짧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테이든은 정작 수도원에서는 매우 불성실한 신도였다. 수도원 사제들은 테이든이 기도를 너무 안 해서 수도원 생활이 안 맞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다정하고 착하며 또래 아이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도 있는데 신앙심만은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고.
놀란 헤베가 그가 보아 온 테이든에 대해서 말하자 사제님은 주름진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 아이에게 기도하고 싶은 게 생겼나 봅니다. 다행이지요.’
어린 테이든이 고된 생활을 하면서도 빼먹지 않고 기도할 정도로 간절히 바랐던 게 뭐였을까. 헤베는 늘 그게 궁금했다.
종전 후인 지금도 매일 그렇게 기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둘은 함께 생활하지 않으니까.
“헤베, 지금 기도 안 하고 다른 생각하죠?”
헉.
헤베가 깜짝 놀랐다. 불쑥 들린 목소리에 너무 놀라서 거의 일 미터는 튀어 올랐다.
“미안해요. 왜 이렇게 잘 놀라요?”
테이든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어깨를 토닥였다.
헤베는 녀석을 노려봤다. 테이든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솟구치던 화가 푸시식 식었다. 그래도 혼내지 않을 수는 없으니 헤베는 매우 화난 척했다.
“신성한 기도실에서 뭐 하는 짓이야.”
“헤베가 이렇게 놀랄 줄 몰랐어요. 전쟁터에서는 뒤에서 집채만 한 마물이 달려들어도 안 놀랐잖아요.”
“본래 잘 안 놀라. 지금은 다른 생각 하다가 네가 갑자기 말 걸어서 그래.”
“그랬군요. 죄송해요.”
사과가 무척 건성이었다. 헤베가 사실은 화나지 않았다는 걸 아는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기도하러 왔으면서 기도 안 하고 무슨 생각했어요?”
“너야말로 다른 사람만 쳐다보면서 뭐 했어?”
“헤베가 기도하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요. 새겨두고 싶었어요.”
“그렇게 좋으면 아예 망막에 그려 넣든가.”
“그럴까요. 문신 시술하는 사람을 알아보면 되나.”
테이든이 턱을 쓸며 고민했다. 설마 농담이겠지. …농담이겠지?
헤베는 녀석을 팔꿈치로 툭 쳤다.
“얼른 기도나 해. 할 생각 없으면 나가고.”
“기도할게요.”
테이든이 다시 손을 모았다. 이번엔 표정이 진지한 것을 확인한 헤베도 다시 헤게르미 신상을 올려다보았다.
‘헤게르미, 듣고 계신가요? 아니면 대리자님이라도.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헤게르미께서는 제게 ‘테이든이 너를 싫어하게 하라’고 말했죠. 그 방법은 도저히 못 하겠어요. 이 녀석은 절 싫어하게 될 것 같지 않아요. 대신 제가 생각한 계획으로 해볼게요. 싫으면 제 꿈에 나와서 뜯어말리세요. 저도 혼란스러워서 제 선택이 옳은지 모르겠으니까요….’
정중하게 기도를 마친 다음에는 편하게 앉았다. 전쟁으로 인해 여러 번 깨지고 망가졌던 무릎은 잠깐 꿇은 것만으로도 욱신거렸다. 방석을 충분히 깔아놓지 않았다면 뼈가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슬쩍 테이든을 보니, 장난칠 때는 언제고 아주 경건하고 묵직한 모습으로 기도 중이었다.
무슨 내용일까. 물어보면 알려주려나.
헤베는 어린 테이든이 간절히 빌었던 기도가 너무 궁금했다.
‘전쟁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어요.’
‘배부르게 먹고 싶어요.’
‘모두가 살아남게 해주세요.’
그 시기 모든 사람이 빌었을 법한 기도들이 몇 가지 떠올랐는데, 왠지 테이든의 소원은 그런 평범한 소망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테이든의 기도는 생각보다 길었다.
지루함을 참지 못한 헤베가 기도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때 테이든이 기도를 마쳤다.
“뭘 빌길래 그렇게 길어?”
“여쭐 게 많았어요. 특히 제 옆자리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달라고 빌었지요.”
“소름 돋아….”
“죄송해요. 너무 궁금해서요.”
옆자리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헤베가 시치미를 뚝 뗐다.
그러고 보니 이 능력을 없애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일단은 조금 더 갖고 있어야 할 것 같다.
“헤베는 뭐라고 기도했어요?”
“비밀이야.”
“너무해요. 저는 알려줬잖아요.”
테이든이 또 처량한 척 눈썹을 대각선으로 기울였다. 헤베가 무시하고 일어나자 테이든도 급히 일어나 부축했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기도실을 나왔다.
‘죽기 전에는 테이든이 내 뒤만 졸졸 따라올 때가 많았는데.’
회귀 후에도 처음엔 뒤만 졸졸 따라왔다. 그러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니 뒤만 따르고 있을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테이든은 열심이었다. 어떻게든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나라면 상대가 나한테 한번 냉정하게 굴면 바로 포기해버렸을 텐데.
‘아니지.’
그 냉정한 태도가 원해서 취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 나도 구질구질하게 매달렸을지도 모르겠다.
“헤베는 항상 기도 내용을 안 알려줬지요. 제가 어릴 때부터요.”
“너도 안 알려줬잖아.”
“물어보지 않았잖아요.”
테이든은 과장되게 울상을 지었다.
“물어보길 바랐는데 한 번도 묻질 않았어요.”
“내가 그랬나…?”
헤베가 고개를 기울였다. 궁금했는데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물어보면 말해줄 거야?”
“그럼요.”
“사실 진짜 궁금하긴 했지. 넌 대체 뭘 그렇게 간절히 기도드렸어?”
“얼른 전쟁을 끝내고 헤베랑 저랑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요.”
“…….”
“사실 헤베한테만 말하는 건데 전 수도원에서 성실하게 기도하는 타입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헤베와 함께하면서 간절한 소원이 생긴 바람에 열심히 기도한 거예요.”
테이든의 목소리가 무척 진지했다.
“헤게르미께서 한심해했겠다. 행복하게 살려면 다 같이 행복해야지. 딱 둘만 말하냐.”
“그러게요. 저는 딱 우리 둘만 중요해요. 그때도, 지금도요. 정말 이기적이죠.”
테이든은 반성하겠다며 웃음 지었다. 기울어진 그의 눈썹을 보며 헤베도 실없이 웃었다.
***
신전을 나온 둘은 진이 마차에 준비해놓은 후줄근한 후드 로브를 두르고 마을로 향했다.
보이는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는데, 헤베는 한입 먹고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종이를 씹어먹는 맛이 났다. 보통 종이도 아니고, 아주 오래된 서점 구석에 처박혀 있는 낡은 서적 같다.
“이게 뭐야….”
“염소 고기래요.”
감자와 호박, 당근, 파프리카를 함께 볶은 염소 고기는 보기엔 좋았으나 맛은 형편없었다.
“왜 그래요, 헤베? 또 입맛 없어요? 그럼 단식투쟁법에 따라 저도 안 먹을래요.”
“아니, 이번엔 진짜 맛없어서 그런 거야. 성에 돌아가면 엄청 먹을 테니까 넌 먹어.”
“이게 맛없어요?”
테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넌 뭐든 잘 먹잖아….”
힘없이 대답하던 헤베는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흑혈화 현상이 심해지면 미각도 잃어버린다. 무엇을 먹어도, 버터 바른 빵을 산딸기쨈에 찍어 먹어도 종이를 우걱우걱 먹는 느낌이 든다. 어제까지만 해도 달콤한 향을 풍기던 포도주가 하수구 물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드디어 이 지경까지….
절망하는 헤베에게 옆 테이블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이봐, 주인장. 당신 미각을 잃었소? 이것도 음식이라고 파시오? 꼭 오래된 서점 한구석에 처박힌 낡은 서적의 종이 씹는 맛이구만. 음료도 하수구 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형편없고!”
“오늘만 봐주시오. 아흔 넘은 할머니가 요리하셨는데, 죽기 전 반드시 해보고 싶은 리스트 중 하나가 ‘음식점에서 요리하기’라더군. 그래서 잠시 주방을 맡겼소.”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하니 손님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손님들도 움찔했지만 컴플레인은 걸지 않았다.
“헤베, 입맛 정확하네요. 정말 맛없긴 한가 봐요. 전 잘 모르겠지만.”
“넌 뭐 맛없게 먹어본 게 있긴 해?”
헤베는 숟가락으로 고기볶음인지 야채탕인지 모르겠는 요리를 휘휘 저었다.
“네, 있는데요.”
“…맛없는 게 있다고?”
이 음식 같지 않은 음식보다 훨씬 흥미를 끄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테이든은 무척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도원에서 먹었던 음식들이요. 정말 맛없었어요.”
“전쟁터에서 아무렇게나 만들었던 건 잘 먹었잖아. 흙먼지에 뒤덮인 싹 난 감자도 맛있다고 먹었고. 수도원이 전쟁터보다 안 좋진 않았을 텐데.”
“전쟁터에서 먹은 것들은 다 맛있었으니까요.”
“대체 수도원에서는 얼마나 형편없는 것들이 나왔다는 거야?”
수도원을 아동 학대로 신고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때 테이든이 아, 하며 손뼉을 쳤다.
“함께 먹는 사람이 문제였나 봐요.”
“그게 무슨 말이야.”
“수도원에는 당신이 없었잖아요.”
“…….”
테이든은 사랑을 고백하는 소년처럼 수줍게 두 볼을 붉혔다(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느껴졌다).
“헤베를 만나기 전엔 맛있는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케이크나 과자도. 초콜릿, 아이스크림도. 제게는 영양 섭취 의미 외에는 없었어요. 그냥 주니까 먹었고, 살기 위해 먹었죠.”
정말 충격적인 얘기였다.
얼마나 충격적이냐면 멸망한 비센티아와 시체를 끌어안고 우는 테이든의 모습을 봤던 그때만큼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아는 테이든은 무엇이든 다 감사해하며 맛있게 잘 먹는 아이였니까.
“수도원을 나와 헤베와 함께하면서 처음으로 ‘이런 감각을 맛있다고 하는구나’ 깨달았어요. 헤베가 뜯어준 빵을 먹으면서요.”
“그 빵이… 엄청 실력 있는 요리사가 만든 질 좋은 빵은 아니었을 텐데.”
“제게는 처음으로 맛을 알려준 빵이었어요. 더 귀하고 값지죠….”
“…….”
테이든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감동적인 연극이라도 본 듯이. 아마 회상하는 것 같았다.
헤베에게 그 장면은 흐릿하게 남아 있었지만 테이든에게는 선명하게 남은 소중한 추억인 것이다.
헤베는 자각도 없이 마음이 아팠다. 그와 별개로 입 밖으로는 새침하게 내뱉었다.
“착각이겠지. 너는 황성에서 훈련받으면서도 뭐든 잘 먹었다고 전해 들었어.”
“헤베라는 너무나 멋있고 아름다운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 알았잖아요. 그러니 제게는 세상의 모든 게 맛있을 수밖에요. 열심히 먹어서 얼른 헤베를 지킬 만큼 성장해야 할 필요도 있었고요.”
“너무 이상해.”
“이상할 것 없어요. 사랑은 본래 이런 거예요.”
여섯 살 어린놈인데 여섯 살 연상 같았다. 다독이는 듯한 말투하며….
헤베는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따끈따끈했다. 후드를 써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발개진 뺨이 드러났을 것이다.
“헤베도 그 음식을 맛있게 느낀다면 좋겠어요. 저와 함께라면 그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먹는다면….”
“맛없어.”
“네, 언젠가는요.”
테이든의 말투는 무척 부드러웠다. 후드를 벗기면 목소리 못지않게 눈빛도 부드럽고 따스할 것이다.
헤베는 숟가락으로 으깨고 있던 고기를 한 점 퍼먹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맛있으면 안 되잖아. 나는…. 이제 와서 이런 음식들이 맛있어지면 안 되잖아.
문제는 산적해 있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헤베는 아주 오랜만에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심장은 지끈거리고, 상체는 계속 둔통이 느껴지고, 왼쪽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은 여전했지만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작은 마을 음식점에서 서로 속에 묻어 두었던 대화를 나누고 함께 음식을 먹는 건 평화로웠다.
언젠가 또 이럴 기회가 있을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
식사 후 차도 한잔한 뒤 마부와 약속한 시간에 맞춰 신전 입구에 향했다. 마부는 정확한 시각에 도착했다.
마차 안에서 헤베는 잠깐 졸았다.
흔들림이 멎어서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굳은살이 잔뜩 박인 단단한 손바닥이었다. 테이든이 따가운 여름 햇살을 가려 그늘막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테이든은 헤베가 일어났음에도 손은 허공에 그대로 둔 채 빙긋 웃었다.
두근, 두근.
헤베의 귓가에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착각이겠지만.
헤베와 어울리느라 오랜 시간을 비운 테이든은 곧장 업무를 보러 가야 했다.
헤베는 방으로 돌아왔다. 먕먕이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열린 창문에서 들어온 바람에 커튼이 나부꼈다. 헤베는 홀린 듯이 창가 앞에 앉았다.
‘무슨 무슨 기사단 훈련 현장에 방문한다고 했지.’
헤베의 방은 서쪽 성의 고층에 있어서 성 동쪽을 제외하면 거의 다 내려다보였다. 역시나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미니 훈련장을 방문한 테이든이 보였다. 개미만큼 작았다.
시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모습이 무척 답답했다.
‘안경 어디 갔지.’
안경을 찾아 헤매기엔 이 방은 너무 넓었고 체력은 없었다.
눈앞에 테이든이 있는데 볼 수 없다니. 답답해진 헤베는 마법을 사용했다.
시야가 확 밝아지고 선명해졌다. 수명이 한 시간 정도 줄었겠지만… 가치가 있었다. 헤베는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테이든이 기사들을 향해 뭐라 뭐라 얘기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저보다 나이 많은 놈들이 태반이었는데, 테이든이 가장 성숙하고, 가장 잘생겼고, 가장 든든했다. 테이든을 향한 기사들의 눈빛에서 열렬한 존경심이 읽혔다.
헤베는 그 어린아이가 저렇게 듬직하게 자랐다는 게 뿌듯했다.
“귀여워.”
장하고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그때 테이든이 헤베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헉, 헤베는 놀라서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
신체 능력이 인간 수준이 아닌 녀석이니 보였을지도 모른다. 귀엽다는 중얼거림도 들었을 것이다.
헤베는 마법을 거두고 손만 뻗어 창문을 닫았다. 커튼도 꼼꼼하게 쳤다.
녀석이 자신을 목격했는지 안 했는지 알고 싶었던 그는 테이든의 생각을 읽었다. 능력을 사용하자마자 생각이 쏟아져 들어왔다.
-헤베가 날 보고 있었어.
-몰래 창문에서.
-내게 귀엽다고 했어.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
-지금 달려가면 부끄러워하며 날 내치겠지.
정답이야. 제발 오지 마.
-헤베 쪽을 보지 말걸.
-참았어야 했는데.
-이제 다시 날 안 보시려나.
-그는 다람쥐 같아.
-밤에 차와 쿠키를 가지고 가 볼까.
-쫓아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
헤베는 무조건 테이든이 오기 전에 잠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방문했을 때 그가 잠들어있으면 어떡하지?
-잠든 헤베의 얼굴은 정말 예뻐.
-그 무방비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리고 이어지는 낯뜨거운 생각들에 헤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게, 또! 또!
순수하고 여린 소년인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을 하든 다 새빨갛고 뜨거운 불길로 귀결되는 걸 보면, 과거에는 저런 성욕을 어떻게 숨기며 살았는지 의문이었다.
“…으.”
얼굴이 홧홧해서 열심히 손부채질하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마법 조금 사용했다고 통증이 온몸을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시야를 밝히는 마법 정도면 후유증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헤베는 그에게 집중하는 테이든이 신음을 들을까 봐 주먹을 깨물고 고통을 참았다.
가슴도 아프고 팔다리도 저리지만 아직 참을만하다. 사실 신체 고통보다는 심적 고통이 더 크다.
문득 더 많은 얘기를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테이든과… 과거에.
그는 테이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과거에는 요즘처럼 진득하게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하루하루 살육의 연속이었고, 종전 후에는 각각 흑마법사, 영웅이 되어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같은 곳에 살지만, 너무 멀었다. 바쁜 와중에도 하루에 몇 번씩 꼬박꼬박 얼굴을 보러 오는 테이든을 헤베는 끝없이 밀어내기만 했고, 밀어내기만 하다 갑자기 죽어버렸다.
사실 어릴 적에는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 아니었다는 것도, 기도의 내용을 물어보면 언제든 답해줄 수 있었다는 것도, 순수한 얼굴로 순수하지 못한 생각을 잔뜩 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부분을 모르고 살았나.
과거의 너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사소하고 한가로운 대화를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함께 의원에게 가자며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돌아갈 수 없다. 다시는 과거의 너와 만날 수 없다. 그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헤베는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
-그 계획은 너무 위험해요.
어둠 속에서 어린 소년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하얀빛이 동동 떠 있었다. 헤베는 바로 상황을 알아챘다.
“또 대리자이십니까? 헤게르미는 아직 주무세요?”
-그분께서는 좀 더 쉬셔야 해요.
또다시 하얀빛 형태로 나타난 대리자가 앞에 날아왔다. 헤베가 손을 내밀자 대리자는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팔랑팔랑 나비 같았다. 몇 번 봤다고 그새 그 형체가 귀여워진 헤베는 손가락으로 구체를 간질였다.
-그 계획 하지 마세요.
역시나, 대리자는 헤베의 계획을 말리러 왔다.
“할 겁니다. 이미 결정했어요.”
-위험 부담이 너무 커요. 본래 한번 행복을 맛본 사람이 더 절망에서 못 빠져나간다고 했어요.
“행복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해서 갈망이 더 클 수도 있죠.”
-그자는 욕심이 많은 존재예요. 당신에 대한 갈증으로 메말라 있죠. 손에 들어온 행복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요. 당신도 들었죠? 감히 신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잖아요.
“테이든은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 같은 게 아니거든요. 굉장히 눈치도 빠르고 똑똑한 애란 말입니다.”
-당신에게나 ‘애’지 다른 이들에게는 짐승이나 다름없는…. 으앗!
헤베는 테이든을 험담하는 대리자가 얄미워서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빗줄기가 새어 나왔다.
-뭐 하는 짓이에요. 깜짝 놀랐잖아요.
손바닥을 펴니 납작하게 눌린 빛이 방방 뛰며 성질을 부렸다. 빛은 금방 원형으로 돌아왔다.
헤베는 병 주고 약 주듯 손가락으로 구체를 슬슬 쓸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헤게르미가 테이든이 절 싫어하게 만들라 해서 그대로 했더니 실패한 거잖아요. 대리자님도 내려다보고 있었으면 알 거잖습니까. 도저히 절 싫어하지 못하겠대요. 다른 방법을 찾아보래요.”
-그렇다고 그 다른 방법이 테이든과 연애하는 거면 어떡해요?
대리자가 꽥 소리 질렀다. 헤베는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살폈지만 주위엔 어둠뿐이었다.
“비밀 연애할 거니까 조용히 하세요.”
여섯 살이나 어린 세기의 영웅과 흑마법사가 연애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제명을 다하기도 전에 영웅 숭배자들에게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하며 죽을지도 몰랐다.
아픈 건 정말 싫었다.
-테이든이 당신을 포기할 마음이 없는 건 맞습니다. 오히려 갈수록 탐욕만 커지고 있죠. 하지만 연애는 아니에요. 다른 방법을 생각하세요.
“저한테만 생각하라고 하지 말고 그쪽도 좀 뭔가 제안해보세요. 제가 뭘 하면 될까요?”
-…….
“거봐. 방법이 없잖아요. 테이든은 웬만한 일로는 절 싫어하지 않는다고요.”
-하지만….
“신들은 모르겠지만 인간 중에는 정작 연애를 시작하면 식는 부류도 있다고 해요.”
-당신이 연애에 대해 뭘 안다고….
“사람은 쟁취하지 못한 것에 매달리는 습성이 있죠. 특히 테이든 같은 정복자 타입은 더 그래요.”
테이든은 헤베를 존경하면서도 발정하고, 아끼고 싶어 하면서 한편으로는 살 한 점 남겨두지 않고 잡아먹고 싶어 한다. 헤베도 처음 테이든의 본능을 알았을 때는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매일 매일 생각을 듣다 보니까 지금은 적응됐다.
갈증을 해소해주고, 갈망의 대상이 사실은 별거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면 그 무겁고 커다란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연인으로서 지내다 보면 겹겹이 싸인 포장지도 떨어져 나가고, 제 하찮은 실체를 알게 될 겁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건 그럴듯한 포장지였을 뿐이라는 사실을요.”
헤베가 단정 지어 말하자 하얀빛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일이 있겠냐고요. 알맹이가 진짜인데. 오히려 더 반하면 반했지…….
“무슨 말씀이세요. 제 실체 몰라요?”
-아니까 이러죠.
대리자는 굉장히 답답해했지만 헤베는 영문을 몰랐다. 오히려 지금 진짜로 답답한 건 자신이건만. 부아가 치민 헤베는 이제부터는 그냥 뻔뻔해질까 생각했다. 굳이 대리자를 설득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행동하는 건 자신인데.
실제로 헤베는 무거운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이 상황이 답답했다.
지금이야 테이든이 날 좋아해서 어쩔 줄 모르지만 그건 아직 손에 넣지 못한 것에 대한 신비감과 소유욕 때문이다. 정작 연인이 되면 생각보다 하찮고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깨달으면서 서서히 마음이 식을 것이다.
이런 비관적인 생각을 사실처럼 여기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후에 대리자는 긴 한숨이라도 내쉬듯 흐린 빛을 내뿜으며 말했다.
-좋아요. 마음대로 해봐요.
“허락 없어도 마음대로 했을 건데요.”
-정말이지.
하얀빛이 씩씩거렸다. 이쯤 되니 빛이 아니라 콧김 같았다.
-이 일로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되면, 그래서 절대로 포기 못 하게 되면 어쩔 셈이에요?
“그러면….”
헤베도 생각해 본 적 있는 가정이었다. 정말 가능성은 낮지만, 그럴 일은 없지만, 혹시 테이든이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러면….
“괜찮아요. 생각해둔 수가 있어요. 어떻게든 세계 멸망은 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 방법이 뭔데요.
“저는 테이든보다 강하니까요. 동반 자살이라도 할게요.”
헤베는 씩씩거리는 빛을 향해 웃었다. 슬픔으로 가득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