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대리자에게는 ‘테이든과 연애할 거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했지만,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테이든은 이미 헤베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차였기 때문에 사귀자고 새삼 고백해오지 않으며, 그렇다고 헤베가 하기에는 지금까지 너무 많이 밀어내기만 했다. 아무리 눈치 없는 헤베라도 전날까지 혐오스럽니 뭐니 하다가 바로 다음 날 사귀자고 고백할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다.
테이든에게 연애하자고 말할 기회는 많았으나 언제나 햇살 같은 청량하고 부드러운 미소만 감상하다가 헤어질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검은 핏줄은 어깨를 넘어 팔뚝까지 퍼져나갔고, 이제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통증이 느껴졌다.
과거에 헤베는 진통제를 복용하지 않았다. 몸 상태를 숨기느라고 진통제 구하기도 어려웠고, 대부분 술과 마약으로 통증을 달랬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르다.
헤베는 밤중에 몰래 방을 나와 황궁도서관의 책을 탐독해 필요한 성분을 기록하고, 외진 곳의 의약원에 방문해 진통제를 제작했다. 회귀 전 망나니 시절에 마약을 구하러 음지를 돌아다닌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잡화점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일은 못 해도, 마약성 진통제의 주문 제작은 할 수 있었다.
약사가 성분을 모르게 하고 싶어서 헤베가 직접 약재를 구해다 줬는데, 음지의 약사는 나머지 재료들로도 대충 짐작했는지 얼빠진 얼굴을 했다.
‘이보시오. 혹시 수상한 실험 같은 걸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만 왜요?’
‘이 정도면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소.’
‘상관없습니다. 바라던 바예요.’
탐탁지 않은 약사에게 보석을 던져주고 이틀 후 진통제가 든 약병을 받았다. 물과 함께 마시는 알약 형태로, 총 열두 알이 들어있었다. 먹고 효과 있으면 더 주문해야지, 했는데 통증이 올 때마다 바로바로 먹는 바람에(헤베는 아픈 게 정말 싫었다) 사흘 만에 열두 알을 모두 소진해버렸다. 헤베는 다시 약재를 준비해서 약사를 찾아가 다섯 병을 주문했다.
시간이 흐르고 테이든과 그가 함께 공식 석상에 서는 날이 되었다. 바로 루니스 율리의 궁사 취임식이었다. 헤베의 은퇴식도 겸하는 날인데, 흑마법사가 공식 석상에 오르면 사람들의 불안감만 자극하기 때문에 은퇴식은 지인들끼리만 하기로 했다.
궁사 정식 복장을 차려입은 루니스는 정말 근사했다.
‘미안, 루니스. 네 짝사랑 상대는 나와 연애할 예정이야…. 걔가 내가 좋아죽겠다는데 어쩌겠어.’
헤베는 속으로 사과하면서 루니스에게 궁사의 상징인 스태프와 책을 넘기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루니스의 소감이 이어졌다.
아직 혼란스러운 비센티아의 평화와 탈리 제국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판에 박힌 소감이었다.
헤베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황제 바로 다음 자리에 앉은 테이든을 힐끔 쳐다봤다.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자 테이든이 방긋 미소 지었다.
예상한 바였다.
헤베가 다른 행동을 하다가도 테이든에게 시선을 던지면 반드시 눈이 마주쳤다. 테이든의 시선이 언제나 헤베를 향하기에.
그는 테이든에게 입 모양으로 말았다.
‘이따 할 말 있으니까 잠깐 나랑 만나.’
테이든은 ‘네!’ 하며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먕.
루니스는 평소엔 단답형에 말수도 적지만 스테레오 타입답게 소감은 길었다. 지루한 시간에 하품하는데 먕먕이가 발목에 조그만 머리를 비볐다.
“산책 나왔어?”
먕먕이 옆에는 삑삑이와 빽빽이도 있었다. 새끼들은 어느새 먕먕이 뒤를 쫑쫑쫑쫑 따라다닐 만큼 컸다. 잘 기지도 못하는 꼬물이들이었는데 짧은 다리로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정말 귀여웠다.
-삐이익.
-빽빽.
새끼들은 목을 치켜들고서 진로를 가로막은 발을 치워주길 종용했다. 헤베가 발을 옆으로 살짝 비키자 다시 삑삑삑 거리며 걸었다. 맹랑한 새끼들은 헤베의 옆자리에 앉은 진 발치에서도 빽빽 울었다. 그때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진과 눈이 마주쳤다.
“…….”
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발을 살짝 들었다. 새끼들이 뺙뺙뺙 울면서 지나가고 헤베는 안도했다.
***
취임식이 끝난 후 크게 연회가 열렸다. 당연히 참석하지 않으려던 헤베는 조용히 돌아가려다가 수하들에게 붙잡혔다.
“사령관님도 연회에 참석 좀 해요. 특히 이건 당신을 위한 자리잖아요.”
“아니, 이 연회는 새로운 궁사를 위한 자리지. 그리고 사령관이라고 부르지 마. 지금이 전쟁 중도 아니고.”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이제 궁사도 아니신데.”
“그냥 이름 불러.”
“자, 헤베 님. 얼른 앉아요. 앞으로는 연회 좀 즐기며 삽시다.”
뮨의 친위대는 헤베를 테이블 앞에 앉히고 양옆으로 둘러앉았다.
“덥지도 않아요? 이 날씨에 손목까지 덮는 옷을 입고.”
“별로 안 더운데. 오히려 더 껴입고 싶어.”
검은 핏줄은 아직 팔까지 뒤덮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검은 핏줄이 손등까지 덮을 테고 그때 갑자기 장갑을 끼고 다니면 수상하므로 미리부터 치렁치렁 긴 옷을 입고 다녔다.
“지금이 한여름인 건 알죠?”
“알지.”
“희한하네. 의원한테 한번 가봐요. 몸이 안 좋은 걸지도 모르잖아.”
“흑마법으로 인한 전염병 아니니까 걱정 마.”
헤베가 신경 거슬리는 얘기를 하는 지첸을 노려보자 그는 그런 뜻 없었다며 양손을 들었다. 헤베는 흥, 하고는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누군가 건강에 대해 걱정하면 계속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잔소리들이 퍽 줄었다.
‘다들 내 흑마법사다운 난폭하고 흉포한 성격에 질려서 이제 이 부분은 건드리지 않겠지.’
그러나 헤베의 생각은 어리석었다.
“한번 의원을 만날 필요는 있습니다. 테이든 공작이 부른 의원이 아직 성에 머물고 있으니 고려해보십시오.”
진이 더 긁어왔다. 과거에 모두가 헤베를 떠날 때도 끝까지 옆에 남은 진은 언제나 예외였다.
“맞아요. 맨날 전염병 아니네 뭐네 염불만 외우지 말고 의원을 보러 가요.”
동생들이 많아 보호자 역할에 익숙한 마우도 빼고.
“제 말이요. 그러다가 우리 혼인식에도 못 오면 어떡해요?”
“얼른 의원한테 가 보세요. 더 살 빠지면 우리가 주문 제작한 의복 핏이 안 맞을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할 말 다 하고 사는 파와이와 밀리안도 빼고.
“그래, 헤베. 내친김에 오늘 갈래?”
유일한 동갑인 파르테도 빼고.
헤베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난폭하게 반응하는데도 신경 긁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왜 과거와는 다르지? 흑마법사의 위엄 어디 갔어.
“몰라. 시끄러워.”
“어디 가십니까?”
헤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도 따라 일어났다. 여러 쌍의 시선이 날 향했다.
“바람 좀 쐬고 올게. 따라오지 마.”
“이대로 도망가려는 거죠?”
“따라오면 진짜 이대로 도망갈 거니까 절대 따라오지 마.”
헤베는 진을 도로 앉히며 엄포를 놓았다.
연회장에는 많은 사람이 북적였지만 헤베가 걸음을 옮기자 그를 중심으로 화악 갈라졌다. 마물이라도 등장한 듯이. 사람들은 각자 모여 수군거리며 헤베를 훔쳐봤다.
정상적인 반응을 접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헤베는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 상황을 예상하고 미리 후드 달린 로브를 챙겼다.
아직 초저녁이라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하늘에 붉은 노을이 가득했다. 정원에서 친구, 연인과 노을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흑마법사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헤베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연회장 뒷정원에는 사람이 적고 한적했다. 화단이 사람 키보다 높아 헤베는 서둘러 연인들의 밀회를 감춰주는 정원으로 들어갔다.
빈 벤치에 앉아 잠시 기다리니 곧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고 당당한 태도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다가온 남자가 헤베 옆에 앉았다.
“혼자 뭐 해요?”
테이든이 헤베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냥 앉아 있어.”
“저도 앉아도 될까요?”
“벌써 나와도 괜찮아? 찾는 사람도 많은 녀석이.”
“제가 찾는 사람이 여기 있어서요. 할 말 있으니까 잠깐 보자던데요.”
테이든이 빙긋 웃었다. 오늘 녀석은 앞머리에 컬을 넣어 이마를 반만 노출했고, 리폼한 기사단 제복에 은색 망토를 둘렀다. 은색 망토에는 칠흑 같은 펠레털이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취임식에서도 느꼈지만, 황제보다 화려한 모습이었다. 테이든이 영웅이 아니었다면 분명 허영심 많은 귀족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넌 대체 옷을 몇 벌이나 가지고 있어?”
“아주 많이요. 지금 제작 중인 것만 해도 수십 벌이에요.”
“돈이 넘치나 보네.”
“좋아하는 사람한테 잘 보이려면 이 정도 소비는 해야죠.”
잘 보이다 못해 눈이 멀 것 같으니까 그만 좀 평범하게 입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헤베는 주위에 테이든 뿐인 걸 확인하고 후드를 벗었다. 나름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걸 입었는데 위에 망토를 걸치는 바람에 소용없게 됐다.
“헤베, 오늘 정말 아름다워요.”
테이든이 헤베에게 꽃을 내밀었다. 연분홍 라넌큘러스였다.
“꺾지 않았어요. 바닥에 떨어진 걸 주운 거예요.”
“나한테 바닥에 떨어진 걸 준단 말이야?”
“네, 꺾었으면 저를 크게 혼내셨을 거잖아요.”
“…….”
말문이 막힌 헤베는 꽃을 빼앗아 가듯이 홱 잡아챘다. 테이든이 조금 웃었다.
헤베는 꽃을 코끝에 대봤다. 단 한 송이였지만 향기는 매우 진했다.
이제 6월. 나는 올해를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꽃향기를 맡을 수 없는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하늘 위 붉은 노을이 아주 찰나이듯, 이 꽃향기도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있잖아, 테이든.”
“네.”
왠지 모를 조바심이 든 헤베가 물었다.
“너 아직 내가 좋아?”
“‘아직’이요?”
테이든이 고개를 기울였다.
“표현이 이상하네요. 영원히 사랑할 건데요, 헤베.”
“…….”
헤베는 꽃으로 열심히 붉어진 얼굴을 부채질했다. 꽃잎 한 장이 살랑살랑 떨어졌다. 헤베의 허벅지에 떨어진 꽃잎을 테이든이 떼어냈다. 두툼한 손가락이 허벅지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헤베는 정욕 가득한 테이든의 시선은 보지 못한 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연애하자.’
‘…네?’
‘사귀자고. 싫으면 말고.’
‘…….’
내가 그동안 봐온 모습 중에 가장 얼빠진 얼굴이겠지. 그럼에도 잘생겼겠지.
‘연애하자.’
‘또 무슨 농담이에요?’
‘농담 아니야. 진짜야. 사귀자.’
‘싫어요. 저 시험하는 거죠?’
믿지 못하면 어떡하지. 지금까지 밀어내기만 했으니 못 믿을 수도 있다. 그래도 잘생겼겠지만….
살면서 이렇게 초조했던 적이 있었던가?
흑마법을 받아들인 그 날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콩닥대는 가슴이 정말 낯설었다.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연애를 시작한 거야. 전쟁터에서 20년 가까이 굴렀는데도 이렇게 떨리는데. 밀리안이 파와이에게 고백했다고 했었나? 존경스럽다.
“할 말 있으면 편히 하세요. 입술 좀 가만히 두고. 피 나겠어요.”
망설이면서 계속 입술을 질근질근 깨무는 바람에 새빨개졌다. 헤베는 자신의 입술로 뻗어오는 테이든의 손가락을 응시하다가 빠르게 내뱉었다.
“너 그냥 나랑 사귈래?”
“네.”
“어?”
“네, 사귀어요.”
“…….”
김이 빠졌다.
헤베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테이든을 노려봤다. 그는 헤베의 입술을 살짝 건드린 후 주머니에서 연고를 꺼내고 있었다.
“뭐야… 왜 놀라지도 않아?”
“예상했으니까요.”
테이든은 라넌큘러스보다 훨씬 더 화사하게 웃었다.
“며칠간 헤베가 황궁도서관에서 읽은 책들이 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법’, ‘고백 필승법’, ‘사귀자의 123가지 표현’ 같은 거라 방법을 바꿨다고 생각했죠. 대체 뭐가 목적인지는 몰라도 냉정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연애하는 쪽으로 풀려나 보다, 하고. 언제 고백해오려나 기대하고 있었어요.”
“내 고백 상대가 네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잖아.”
“그럴 순 없어요. 제가 죽였을 테니까요.”
꽃보다 더 예쁘게 웃으면서 하는 말에 순간 끄덕일 뻔한 헤베가 벌떡 일어났다.
“미쳤어? 무서운 말 하지 마!”
안 그래도 헤게르미나 대리자가 테이든을 말이 안 통하는 짐승이라고 여기는 지금, 민감한 발언이다.
“죄송해요.”
테이든은 바로 사과해 오며 헤베의 손목을 붙잡았다. 헤베는 테이든이 이끄는 대로 다시 앉았았다가 괜히 하늘 눈치를 봤다.
‘테이든은 사람 함부로 죽이는 사람 아닙니다. 그냥 말만 저렇게 하는 거예요.’
딴생각하는 헤베의 뺨을 테이든이 톡, 건드렸다.
“이제 연인이니 제가 연고를 발라 드려도 될까요?”
“아, 안 돼.”
헤베가 연고를 빼앗았다.
“돌아가서 나 혼자 바를게.”
“꼭 바르셔야 합니다. 입술이 조금 찢어졌어요.”
“알았어.”
“얼굴은 만져도 되죠?”
“…진도는 천천히 나가자.”
“오, 진도라는 단어도 알아요?”
“당연하지.”
헤베는 너무나 음란하고 문란한, 그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망상들로 채워졌던 테이든의 생각을 떠올리며 어깨를 떨었다.
“스킨십은 최대한 천천히 할 거야. 끝까지는… 아예 안 나가도 좋고.”
“무서운 말을 하시네요.”
테이든이 생글생글 웃으며 헤베의 보드라운 뺨을 감쌌다.
“만지는 건 괜찮잖아요. 얼굴만요. 지금까지도 계속 만져왔고. 그렇죠?”
“그럼, 얼굴만… 다른 데는 안 돼. 접촉 금지야.”
“다른 데 접촉 금지면 키스는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키스?!”
헤베가 갓 잡힌 생선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갈색 눈이 상처받은 어린 다람쥐처럼 울망거렸다.
“이, 이제 막 사귀었는데 벌써 키, 키스 얘기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죄송해요. 진정하세요.”
테이든이 어깨를 감싸며 토닥였다. 굉장히 딱딱한 미소를 머금었지만 헤베는 눈치채지 못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그럼 언제쯤 키스할까요?”
“하, 한 달은 지나서 다시 논의하자.”
헤베가 부끄러움의 파도 속에서 간신히 대답했다. 한 달 후에 키스를 하는 게 아니라 키스 논의를 하는 것이었다.
“정말 너무하네요. 사람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하나. 당신으로서는 최대한 노력한 것일 테니 더 뭐라 하지도 못하겠고.”
테이든은 헤베의 작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헤베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빼자 이번엔 더 멀어지지 못하도록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우리 오늘 1일이에요.”
“…응.”
“너무 기뻐요. 이렇게 쉽게… 빨리 당신과 연인이 될 줄은 몰랐거든요.”
너무 기쁘다는 말과는 다르게 말투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헤베는 사실 테이든이 너무 행복해서 날뛰진 않을까 라는 상상도 했다. 행복으로 가득한 보라색 눈을 예상하며 그 또한 조금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테이든은 날뛰기는커녕 오히려 침착했고, 헤베의 심장만 쿵쿵쿵쿵 난리가 났다.
‘이상하네. 더 기뻐해야 할 것 같은데. 내게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나?’
만약 그렇다면 진짜 꿍꿍이가 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테이든의 침착한 반응 덕분에 헤베도 조금은 차분함을 되찾았다.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로 해. 너와 사귀는 걸 알면 다들 폭동을 일으킬 거야.”
“전 괜찮아요. 그 사람들이 저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상관없어요. 그 짐승이 기어코 일을 냈다고 생각하겠죠.”
“무슨 말이야? 나를 욕하겠지.”
“헤베를 왜요?”
“흑마법사가 여섯 살 어린 영웅을 잡아먹었다고. 역사서에 실릴만한 일이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실려서 후손들도 우리 사이를 알게 되면 좋겠네요. 헤베 뮨은 테이든 엔더웨이의 것이라고 모두가 알게.”
목소리가 가라앉은 정도가 아니라 서늘하기까지 했다. 기쁘지 않은 건가? 이 고요한 분위기는 뭘까. 눈치 없는 헤베라도 알 정도의 서늘한 분위기였다. 폭풍 전의 적막 같았다.
그때 테이든이 헤베의 목 뒤로 손을 가져가 고정했다. 자색 눈동자에 욕망이 넘실거렸다.
헤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테이든이 뭐 하려는 건지 지켜봤다. 몇 번 깜빡이는 사이 테이든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왔다. 고개가 대각선으로 기울고,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한 거리가 되어서야 헤베가 기겁하며 밀쳐냈다.
“너 뭐 하는 거야!”
놀라지도 않고 엄청 단조롭게 반응하던 놈이 대뜸 입을 맞추려 들다니. 극도의 배신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온힘을 다했지만 겨우 5mm 정도 밀려난 테이든이 헤베를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반응이 너무 느려요, 헤베. 제가 조금만 더 나쁜 맘 먹었으면 당신은 당했다고요.”
“어떻게 심각한 척으로 방심하게 만들고 기만할 수가 있어?”
“헤베가 분위기를 살피는 게 신기해서 그랬어요.”
눈치라곤 전혀 없으면서 무슨 분위기 살피는 척을 하냐는 뜻이었지만 헤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보며 테이든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두운 정원에 퍼지는 낮은 웃음소리가 불안하게 요동치던 헤베의 심장을 어루만졌다.
“한 달은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 헤베도 저도 한창 때인데, 당신은 저한테 키스하고 싶지 않아요?”
“평균에 맞춘 거야.”
“죄송해요. 제가 처음이라 평균 속도를 몰라서요.”
물론 헤베도 처음이라서 몰랐다.
테이든은 아쉽다는 듯 자기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래도 우리 조율해봐요. 저는 한 달 후 첫 키스는 너무 멀다고 생각해요.”
“정확히 말해. 한 달 후 첫 키스가 아니라 첫 키스 시기 논의야. 정 싫으면 세 달 후로 미룰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헤베는 단정한 금발을 툭툭 가볍게 쓰다듬었다. 테이든은 삐진 척하는가 싶더니 곧 배시시 웃어버렸다.
“알겠어요. 한 달만 참죠. 몇 년을 참았는데 한 달을 못 참을까. 전 평생 수절할 각오도 했었다고요.”
“힘내.”
그는 쓰다듬는 손길이 좋은지 고개를 좀 더 숙였다. 헤베도 테이든을 따라 배시시 웃었다.
답답하게 짓누르던 분위기가 풀리면서 헤베도 기분이 좋아졌다.
체격 차이가 커서 테이든이 헤베를 끌어안으니 완전히 폭삭 품에 들어갔다. 적당히 따뜻한 체온과 단단하고 넓은 가슴이 마음에 든 헤베는 무릎을 모으고 품에 파고들었다. 테이든은 잠깐 움찔했다가 곧 헤베가 편하게 기대도록 자세를 취했다.
엉덩이 쪽에 두껍고 딱딱한 게 느껴졌지만 일전의 그 무기겠거니 했다.
마음이 가벼워진 헤베는 남은 수명을 계산했다.
너무 당황해서 첫 키스 논의는 한 달 후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빨리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연애의 목적은 질리게 하는 것이니까. 질리게 하려면 진도를 후딱 빼는 게 낫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헤베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전쟁터에 지냈고, 처음 그가 들어왔을 때 주위에는 아저씨들뿐이었다. 만약 헤베가 열다섯 살, 아니 열 살만 되었어도 음흉하고 음란한 농담을 하면서 놀렸겠지만, 헤베는 여덟 살이었다…. 황제와 궁사를 뒷배로 둔 여덟 살. 그러다 보니 용병이고 기사고 할 것 없이 헤베 앞에서는 성적인 농담을 지양했고, 그 조심스러운 분위기는 헤베가 청소년기에 들어선 후에도 유지되었다.
헤베는 마물의 짝짓기 습관에 대해서는 모든 마물의 종족별로 학습했지만, 사람 간의 짝짓기는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못했다. 그렇게 헤베는 짓궂은 그림책 한 번 본 적 없이 어른이 되었다.
회귀 전 망나니 시절에도 그런 쪽으로는 빠지지 않았고, 생각조차 안 했다.
‘이 녀석의 꿈대로 하는 건가?’
헤베가 아는 성적인 행위는 테이든의 생각을 통해 본 것 뿐이었다.
생각을 읽을 때마다 99%는 문란한 상상 중이었다. 사실 테이든의 상상은 평균 이상으로 음란하고 저속했지만 헤베는 평균이 어떤지 모르는 순진무구한 마법사였다.
‘내가 그런 자세를 버틸 수 있을까. 허리가 부러지고 멍이 들 거야. 뼈가 부서질지도 몰라. 게다가 테이든의 그게….’
헤베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커다란 걸 어떻게?’
언젠가 녀석의 것을 본 적 있었다. 그때 테이든은 열여덟 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이들과는 같이 씻어도, 헤베에게만은 알몸을 보이지 않았던 테이든이 그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같이 온천에 몸을 담갔다.
헤베는 온몸이 빨개진 채 타올로 허리 아래를 칭칭 가린 채 물속에 들어왔던 어린 테이든을 기억한다.
열여덟 살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완성된 몸과 단련된 근육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타올 폭이 너무 짧았기에… 테이든의 것이 가려지지 않은 것이다.
정말 살벌한 크기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테이든의 그런 모습에 얼굴을 붉히며 나름의 유혹이라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성적인 것엔 백지와 같은 헤베는 그냥 구경만 했다.
크기에 대한 순수한 감상뿐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키도 커졌으니까 그것도…….’
아픈 게 정말 싫은 헤베는 걱정되는 마음에 테이든의 품을 빠져나왔다.
“헤베?”
“잠깐만.”
헤베는 테이든의 중심을 들여다봤다. 의식하고 보자 보였다. 상당히 부푼 것이….
설마 저게…? 테이든은 단검을 가지고 다니잖아. 착각이겠지.
“저기요, 헤베… 뭘 보는 거예요….”
집요한 시선에 테이든이 손으로 중심을 가렸다. 헤베는 침을 꿀꺽 삼켰다.
“테이든, 보통 연인들은 끝까지 진도를 나가잖아.”
“그럼요. 당연하죠.”
“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런 스타일의 연인이 있고, 저런 스타일의 연인이 있는 거지. 굳이 끝까지 진도를 나갈 필요가 있을까? 난 플라토닉한 사랑이 더 좋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하하.”
테이든이 무척이나 딱딱하고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플라토닉 따위는 개나 처먹으라고 해요.”
헤베 앞에서는 늘 언행을 조심하는 테이든답지 않게 거친 어조였다.
“전 헤베 안에….”
“테이든!”
음탕한 발언이 이어졌다. 너무 놀란 헤베가 또다시 튀어 오를 뻔했으나 테이든이 꾹 누른 탓에 바르작거리기만 했다.
“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헤베가 먼저 잔인한 말을 했잖아요.”
“이게 뭐가 잔인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요. 당신의 잔혹함에 몸서리칠걸. 지나가던 먕먕이도 날 불쌍히 여기겠네.”
테이든은 헤베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정말 모르겠어요. 당신의 최종 목적도 모르겠고. 첫 키스는 한 달 후지만, 잠자리는 앞으로 평생 없다. 이건 정말 너무합니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헤베는 속으로 의아했다. 그게 그렇게 너무한 건가? 세상 모든 연인은 다 그, 그런 행위를 하고 있나? 그러나 물어볼 이가 없었다. 파와이와 밀리안에게 물어봤다가는 비밀 연애가 들킬지도 몰랐다.
“내가 죽어도 섹, 섹… 그 행위를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쩔 거야?”
“헤베도 원하게끔 만들어야죠.”
테이든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헤베는 이마를 짚었다.
수줍음 잘 타고 부끄럼 많던 소년은 어디 가고 어쩌다 이런 풍기문란하고 음란한 생각만 가득한 남자가 된 걸까. 교육이 잘못됐나. 음욕을 숨기지조차 않는다니 정말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제 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라요. 헤베는 절 어리게만 보지만 제 그건 결코 어리지 않답니다. 지금 보여드릴까요?”
“그래서 문제인 거니까 닥쳐 봐.”
헤베는 바로 바지 내릴 기세인 테이든을 말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험악한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헤베의 입에서 닥치라는 말이 나오자 테이든도 양손을 들고 물러났다.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한 달 후에. 난 이제 방에 가서 쉴 테니까 너는 연회장으로 돌아가. 우리 둘만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가서 난 피곤해서 들어갔다고 말해.”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들키면 안 된다니까.”
“바래다줄게요.”
“내 말 듣고 있어?”
테이든은 첫 키스는 양보해도 바래다주는 건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헤베는 테이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
늦은 밤, 휘영청 뜬 달은 야속하게도 너무 밝았다. 헤베는 지나치는 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테이든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와서 뭘. 제가 헤베를 안은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괜찮을 거예요.”
테이든은 여유로웠고, 허리에 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헤베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테이든 말대로 이런 자세를 취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비밀 연애를 시작하고 나니 모든 사람이 의심해올 것 같았다.
“당신이 그렇게 불안하다면 아예 제가 안고 갈까요?”
“뭐어?”
“넘어져서 발목을 접질렸다고 하면 되잖아요.”
“그건….”
망설이는 사이 테이든이 그를 달랑 들어 안자, 깜짝 놀란 헤베는 서둘러 테이든의 목에 팔을 둘렀다.
“뭐 하는 거야. 얼른 내려놔….”
“아, 이런. 헤베. 발목을 다쳤군요! 제가 방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테이든은 큰소리로 외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사방에 메아리까지 만들며 울려 퍼졌다.
“지금 헤베가 제게 안긴 이유는 발목을 다쳤기 때문이지요.”
“그렇군요….”
“헤베가 발목을 다쳐서 제가 안았답니다.”
“그렇습니까….”
테이든은 정원을 걷다가 누군가와 마주치면 아무도 묻지 않은 설명을 했다. 마주친 이는 머쓱하게 대답하고 가던 길을 걸었다.
헤베는 테이든의 어깨에 이마를 붙이고 방에 도착할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방 앞에는 황제가 붙인 감시병 두 명이 서 있었다. 둘은 테이든을 보고 차렷 자세로 경례했다. 테이든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헤베가 발목을 다쳐서 제가 안고 있는 거예요.”
“발목을 다치셨습니까? 바로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제가 있을 테니까 괜찮아요. 오늘은 들어가 보세요.”
“정말 괜찮으실지.”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예, 수고하십시오.”
감시병들은 헤베에게도 인사한 후 서둘러 사라졌다.
그제야 헤베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새빨갰고, 입이 댓 발 튀어나와 있었다.
테이든은 헤베를 정말 발목이 접질린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너 다시는 그러지 마. 부끄러워 죽겠어.”
“그래도 사귀는 걸 들키진 않았을 거예요.”
“그건 그렇지만….”
“이따 와도 돼요? 연회가 끝난 다음에요.”
테이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헤베는 미쳤냐는 눈길을 보냈다. 분명 의미를 파악했을 텐데도 테이든은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잘생긴 놈이 잘생긴 표정으로 잘생긴 연기를 하니 공격력이 무척 강했다. 헤베가 아니라면 누구나 백기를 들었을 것이다.
“안 돼. 누가 보면 바로 들킬 거야. 첫 연애를 가장 빨리 끝난 연애로 만들고 싶으면 들어오든가.”
“절대 안 올게요. 그럼 우리 내일은 언제 볼까요?”
“이 시간에 만나자. 황성 밖에서.”
“이 시간이요? 너무 늦는 것 같은데. 연애 초기 연인이 이런 야심한 시각에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어떻게 되는데?”
“…….”
“응?”
흑마법사의 순진무구하고 맑은 갈색 눈에 테이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서탑에서 볼까요?”
“그래.”
시간과 장소를 정한 뒤 테이든이 헤베를 와락 끌어안았다. 헤베가 어떻게 거부할 틈도 없이 순식간이었다.
“포옹은 괜찮죠?”
“이미 저질러놓고 묻지 마.”
헤베도 녀석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단단하고 따스한 품이었다. 끌어안는 힘은 다소 강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헤베는 테이든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물었다.
“그런데 너 내가 황성도서관에서 연애 관련 책을 읽었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아, 도서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헤베가 빌린 책들이 조금 수상하던데요.”
“수상하다고?”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피해망상이 피어올랐다. 흑마법사가 황성도서관에 들락날락거리니 뭐든 수상해 보인 건가.
“헤베가 며칠 전 읽은 약재 서적들이요.”
“…….”
“요즘 소화도 잘 못 시키고, 살도 내리고 있는 사람이 의약 서적들을 탐독하시니 너무 수상하잖아요.”
헤베가 삐질 땀을 흘렸다. 마법 사용을 자제하더라도, 이렇게 테이든이 정곡을 훅 찌르는 것 때문에 명줄 짧아질지도 모르겠다.
테이든은 포옹을 풀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말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왜 약재 서적들을 살펴본 거예요? 그리고 며칠 전 밤중에 순간이동 마법은 왜 사용했어요?”
“내, 내 뒷조사했어? 정말 뻔뻔하다.”
“죄송해요.”
테이든은 흥분하는 헤베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바닥에서 온기가 전달되어왔다. 헤베는 그제야 제 얼굴이 몹시 차가웠다는 걸 알았다.
“뒷조사하지 않으려 해도 그냥 느껴지는걸요. 알잖아요. 제가 얼마나 먼 거리까지 기척을 느끼는지.”
“그럼 멀리 갔구나 할 것이지 무슨 책을 봤는지는 왜 알아봐?”
“책 이야기를 하며 이야깃거리라도 만들까 했지요.”
“…….”
순식간에 화를 가라앉게 만들어버리는 말이었다.
“에덴타인들에게 조언을 들었거든요. 좋아하는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으면 상대의 관심사를 알아보고 자신도 그것에 관심이 있다는 걸 드러내야 한다고요. 공통관심사가 있어야 한대요.”
관심사를 알고 싶어서 무슨 책을 읽는지 알아봤다는데… 어떻게 화내겠는가.
“그래서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은요?”
테이든이 재차 묻자 헤베는 숨을 집어삼켰다.
어차피 나는 죽는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테이든도 알게 된다. 알려줘야만 한다. 미리 알려줘서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헤베가 입을 다물자 테이든은 표정을 신중히 살피고는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 준 줄 알고 안심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내일 다시 물어볼 테니까 대답 생각해놔요.”
“다시 묻지 마.”
“다시 물을 거예요.”
“내일 만나지 말까.”
“그렇게 협박해도요.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테이든은 헤베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밤중에 황성 밖에 몰래 나가 밀회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제게 정말 중요한 문제거든요.”
“그,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내일 봐요.”
조용한 웃음소리와 함께 귓불에 따스한 감촉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헤베는 화들짝 놀라서 손으로 왼쪽 귀를 감쌌다. 테이든은 그를 방 안에 밀어 넣고 손을 흔들었다. 헤베가 눈만 크게 뜨고 보는 사이 문이 닫혔다. 테이든의 발걸음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와….”
입술 안 된다니까 귀에다 키스를 하다니.
다리에 힘이 풀린 헤베는 그대로 문에 기대앉았다.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어 소리가 다 들릴 게 뻔했다. 내일 녀석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헤베는 화끈거리는 귓불을 감쌌다.
그렇게 주저앉아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는데 정면으로 반쯤 열린 창문이 보였다.
하늘의 해는 넘어간 지 오래였다. 노을이 사라진 하늘은 이제 어두운 밤이었다.
세상에는 찰나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이 저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
밤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본래도 심한 불면증을 앓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꿈 때문에 계속 깼다.
여섯 살 어린 남자친구가 귀에다가 입술을 좀 갖다 댔다고 꿈이 아주, 아주… 아주… 평생 순결하게 살아온 헤베로서는 너무 음란하고 저속하여 떠올리는 것도 부끄러웠다.
그는 성적으로 아주 담백한 삶을 살았다. 과거에도 지금도. 만사 포기하고 망나니짓만 하며 지낼 때도 성적으로는 깨끗하고 순결했다.
마법은 정신을 어지럽히는 음란한 것은 멀리하는 학문이며(그래서 흑마법은 더욱더 대척점에 있다) 헤베는 이 분야에서 최고 경지에 다다른 대마법사였다. 제대로 된 성교육도 받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오래 지내온 그에게 인간의 벗은 몸은 근육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살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특히 테이든을 성적인 시선으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에 녀석과 자신이 그런 종류의 신체 접촉을 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죄악감이 일어났다.
하지만 테이든은 그런 종류의 상상을 아주 거리낌 없이 했다. 사귀기 전에도, 심지어 그가 아주 매몰차게 차버린 날에도 ‘헤베를 깔아뭉개고 거칠게 안고 싶어.’, ‘헤베의 배는 정말 납작해서…,’, ‘내 몸에 깔아뭉개진 채로… 헤베의 얼굴은 정말 환상적일 거야.’ 같은 생각을 서슴없이 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음란한 거라면 당장 이 세계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저 순한 테이든도 부드러운 미소 아래로 변태 같은 성욕을 품고 있는데, 진이나 마우, 지첸 등도 그럴 거라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그 성욕이 저를 향한 게 아니라도 순결한 헤베로서는 그런… 음란한 욕구를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연애 첫날이니 당연히 이런저런 문란한 망상을 할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생각을 안 읽고 지나가야지, 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마법사란 호기심을 먹고 사는 존재. 헤베는 녀석이 키스하고 간 (감각이 정말 오래 남아 있었다) 귓불을 매만지다가 결국 자정이 지나기 전 능력을 사용했다.
-정말 귀여웠지. 그대로 씹어 삼키고 싶었어.
-발버둥치는 그를… 울면서 애원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앞으로 참기 더욱 힘들어지겠지. 하지만 내가 본심을 드러내면 그는 겁을 내고 도망칠 거야.
-순간이동 능력은 정말 거슬려….
-그의 숨소리가 들려. 아직 잠들지 않았군.
-당장 그에게 달려가 기절할 때까지 안고 싶어.
남자친구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잠이 오겠는가?
망을 봐줄 먕먕이도 어디론가 가서 없고 덜덜 떨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도 테이든이 나와서 귀를 위협했다.
헤베는 소스라치듯이 잠에서 깼고, 일어나자마자 헤게르미에게 기도를 올렸다.
‘테이든이 귀 좀 입술로 만졌다고, 날 상대로 음란한 상상을 했다고 덩달아 흥분해버렸습니다….’
겸허하게 죄를 고백했는데, 여담으로 그때 헤게르미의 대리자는 기도를 들으며 굳이 몰라도 됐을 정보에 괴로워했다.
그렇게 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워버린 헤베는 창가 의자에 앉아 진을 기다렸다.
아침 식사는 항상 방에서 했다. 잠에서 깬 뒤 먕먕이가 있으면 먕먕이를 쓰다듬어 주고 씻고 나와 명상을 좀 하다 보면 식사를 가지고 온 진이 문을 두드린다. 아침은 굶고 싶지만 자신이 굶으면 다 같이 단식투쟁을 벌인다니 뭐라도 먹어야 했다. 그나마 아침 식사는 간편한 수프가 대부분이어서 다행이었다.
‘테이든은 왜 그렇게 성욕이 넘칠까.’
멍하니 있으니 다시금 떠올랐다.
녀석이 조금만 덜 욕정 한다면 나도 부담 없이 옷 벗을 수 있을 텐데.
“하….”
오늘은 쓰다듬어 줄 먕먕이도 없는 탓에 헤베는 머리만 헤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룻밤 만에 아침 식사를 기다리면서도 음란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헤게르미여, 저를 보살펴주소서….’
똑똑.
발소리도 못 들었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랐다.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난 헤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들어오라고 했다.
“헤베 님, 일어나셨습니까.”
“응….”
진이 트레이를 끌면서 들어왔다. 하지만 헤베의 시선은 진이 아니라 뒤를 따라오는 사람에게 향했다.
“테이든?”
“네, 헤베. 저도 따라왔어요. 머리가 왜 그래요?”
“아, 아무 일도 없었는데.”
테이든이 빙긋 웃으며 헤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정돈했다.
“잠 못 잤어요?”
“…앉아, 얼른….”
누가 봐도 못 잔 안색일 테니 거짓말로 대답하진 않았다. 대신 헤베는 앉으라고 의자만 가리켰다. 진이 당연한 듯 이인분의 식사를 테이블 위에 차렸다.
헤베의 것은 수프와 샐러드, 요거트 음료가 끝이지만 테이든의 것은 테이블 위에 다 올라가지도 않아 따로 트레이에 담았다. 헤베는 테이든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가슴팍에 하얀 실로 자수를 놓은 하늘색 정복을 입었는데, 허리에 매달린 검집은 처음 보는 것으로 오팔색 보석이 달린 게 무척 근사했다.
어제는 묵직하고 박력 있는 차림새였지만 오늘은 하늘하늘 가벼운 자태가 동화 속 왕자님 같았다.
“오늘 정말 예쁘네요, 헤베.”
테이든의 발언이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사실 헤베는 오늘 사귄 지 이틀째 되는 날이고, 저녁때까지 못 참은 테이든이 분명 불쑥 나타날 거라고 짐작해서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괜찮은 걸 찾아 입기는 했다.
“궁사님, 그런 옷도 있으셨습니까?”
“있더라고…. 그리고 나 이제 궁사 아니야.”
“그래서 드레스룸이 엉망이군요. 식사하십시오. 저는 드레스룸을 정리하겠습니다.”
어느새 식기를 다 차린 진이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이것저것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느라 조금 엉망이긴 했다…. 본래 손에 집히는 대로 입기 때문에 깔끔한데.
헤베는 힐끗 테이든을 봤다. 테이든의 시선은 드레스룸 쪽을 향해 있었다. 눈살이 살짝 찌푸려진 게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보라색 눈도 다소 차가웠다.
‘설마 이 녀석 지저분한 걸 싫어하나? 앞으로 지저분한 행동을 하면 정떨어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시선을 느낀 테이든이 고개를 돌렸다. 테이든은 언제 찌푸렸냐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헤베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테이든의 포크는 고기부터 향했고, 그 고기가 헤베에게 내밀어졌다.
“헤베의 식사는 수프가 끝인가 봐요. 제 거 하나만 먹어요. 아, 하세요.”
“아침부터 고기 먹으면 배 덥수룩해.”
“…더부룩하다고 말하려는 거였죠?”
“…….”
헤베는 시치미를 뗐지만 얼굴이 새빨개졌음을 자각했다.
“저도 종종 헷갈려요. 너무 비슷하잖아요. 덥수룩, 더부룩.”
“얼른 먹기나 해.”
“네.”
테이든은 활짝 웃었고 헤베는 홧홧한 얼굴에 손부채질했다.
같이 아침 식사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긴 했다. 생각해 보니 전쟁터가 끝난 후 처음이었다. 일단 그들은 일어나는 시간도 달랐다.
헤베는 수프를 한 입 삼키며 물었다.
“테이든, 넌 훨찍 일어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아침 안 먹었어?”
“훨찍이요?”
“…….”
“아, 훨씬 일찍이요? 네, 일찍 일어났는데 헤베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어요.”
테이든이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하지만 헤베는 녀석을 칭찬할 겨를이 없었다.
이 짧은 새에 말실수를 두 번이나 저지르다니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난 연인 앞에서는 평정심을 잃고 실수하는 타입이라는 걸.
지금까지 누구도 사귄 적 없었기에 몰랐다. 헤베는 갑자기 어떤 실수를 할지 모르니 조용히 수프나 먹기로 결심했다.
***
헤베가 조용히 식사를 계속하자 테이든도 차려진 음식을 비워나갔다. 식사량 차이가 엄청남에도 희한하게 식사를 마친 시간은 비슷했다. 테이든이 허겁지겁 먹은 것도 아니었다. 녀석은 정갈하고 예의 바르게 정말 왕자님처럼 포크를 움직였다. 먹는 자태도 어떻게 그렇게 모범적인지 그대로 그려서 교재에 실어야 할 것 같았다.
<왕자님처럼 먹는 법>
생각해 보면 테이든은 전쟁터에서도 이랬다. 옆에서 지첸이 게걸스럽게 처먹을 때 테이든은 깔끔하고 단정하게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고, 입술을 다문 뒤 묵묵히 씹었다. 누가 보면 썩은 감자 스튜가 아니라 고급 비료를 뿌려 키운 밀로 구운 빵인 줄 알았을 것이다.
부모님을 보고 배운 걸까. 아니면 수도원 사제들?
그때 테이든이 조용히 말했다.
“헤베는 정말 왕자님처럼 먹네요.”
“응?”
“아, 이런 얘기를 하면 황족에게 무례한가요? 들은 사람은 헤베밖에 없으니까 비밀로 해주세요.”
테이든이 장난치듯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헤베는 어…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누가 왕자님처럼 먹는다는 거야. 지금 자기 얘기 한 거야?
“정말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자태예요. 먹음직스럽고요.”
“먹음직스럽다니?”
“하하, 흐뭇하다는 뜻이에요.”
옷을 정리하던 진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테이든을 노려봤지만 헤베는 눈치채지 못했다. ‘훨찍’처럼 테이든도 말실수했다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헤베, 오늘은 계획은 어때요?”
“그냥… 루니스한테 인수인계하는 게 끝이야.”
“궁사실에서요?”
“응.”
헤베가 샐러드의 마지막 채소를 먹고 포크를 내려놓자 테이든이 얼른 빈 식기를 치웠다.
“후식은 따뜻한 음료를 준비했어요.”
“진이 준비했잖아.”
“아니에요. 이건 제가 가지고 왔어요. 달콤한 과즙 차예요.”
테이든의 목소리가 좀 불퉁해졌다.
헤베는 잘했다고 칭찬하는 대신 진을 불렀다.
“진, 너도 와. 우리 다 먹었어. 같이 차나 마시자.”
“두 분이서 드십시오. 저는 청소를 마저 하겠습니다.”
보통 헤베가 식사를 마치고 나면 여기저기 정돈하던 진이 후식을 내와 함께 차를 마시는데, 오늘은 유난히 청소가 늦어졌다. 그렇게 어지럽혔나 싶어 미안해진 헤베가 진 쪽으로 조금 길게 시선을 두었다.
쪼르르.
개울물처럼 깨끗한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헤베의 시선은 자연스레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했다. 고귀한 자태를 뽐내며 차를 따른 테이든이 헤베에게 찻잔을 쓱 밀었다.
“드세요.”
잔뜩 삐진 말투였지만 헤베는 눈치채지 못했다.
슬쩍 입술만 대 온도를 살폈는데 딱 마시기 좋은 따뜻한 상태였다.
한여름에도 따뜻한 차를 좋아하는 취향에 맞춘 것이다.
“맛있네.”
“그래요? 다행이에요. 오늘 새벽에 과수원에서 직접 딴 보람이 있네요.”
“…직접 땄다고?”
“헤베가 마실 거니까 제가 직접 수확해 왔죠. 오늘 새벽에요. 밤사이 이슬이 내려서 공기가 꽤 차더라고요.”
테이든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헤베는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사랑에 미친 사람들은 다 이런가?
상대 비위 맞추려고 그런 짓까지 하는 게 좀 우습기도 했다. 갑을 관계도 아니고 서로 동등한 연인인데.
헤베는 차를 다시 한 모금 맛봤다.
“첫맛은 씁쓰름하지만 끝맛은 달콤하게 끝나면서 혀끝에 맴도는 달달한 향이 일품이네. 제이 빵집에서 파는 밀크 크로와상과 궁합이 잘 맞을 것 같고 묘하게 여운이 남아.”
물론 헤베는, 상대 비위 맞추려고 이런 짓까지 하는 자신에 대한 자각은 없었다.
“제이 빵집이면 욘로에 있는 곳 말하는 거죠?”
“응, 예전에 우리 같이 간 적 있어.”
“기억해요. 더운 여름이었죠.”
한창 전쟁 중에 테이든과 헤베만 전쟁터에서 떨어져 나와 기밀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었다. 작전지가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 근처이다 보니 치안 확인 겸 마을에도 들렀는데, 마침 임시 빵집이 문을 연 참이었다. 빵집 주인은 헤베를 알아보고 갓 구운 빵을 건넸다.
‘지, 진짜 맛있다. 어떡하지. 이거 애들한테도 꼭 먹여야 돼.’
한 입 베어 먹은 뒤 너무 맛있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헤베를 보고 테이든이 가진 돈을 전부 써서 빵을 구매했다. 헤베는 돈도 없었고, 물건을 사는 방법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비센티아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이던 헤베가 몹시 맛있어하자 자신감 생긴 주인이 그 뒤에 빵집을 확장했다.
“거기 주인이 마물의 습격을 당해 죽고, 딸인 제이 어쩌고가 가게를 이어받았다던데 지금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네. 한번 가볼까.”
“마차를 준비할까요?”
“바쁘잖아. 오늘 당장 안 가도 돼.”
“그 빵집의 빵이라면 헤베가 한 개를 다 먹을까요.”
“입맛이 없는 거라서 맛이랑은 상관없어….”
테이든은 헤베의 식사량이 퍽 걱정스러운 듯했다. 아침부터 배가 더부룩하면 하루종일 기분 안 좋기 때문에 아침에는 항상 적게 먹는데, 심지어 날이 갈수록 식사량이 적어져서 이제는 새 모이 같아졌다.
“오후랑 저녁엔 이것보단 많이 먹어.”
“그나마 다행이네요. 오늘 저녁엔 제가 가장 맛있는 빵집으로 안내할게요.”
“응.”
열린 창으로부터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햇살이 비춰오는 가장 좋은 자리에 티 테이블이 있어서 조명과 각도가 아주 완벽했다. 맞은편에 앉은 미청년의 머리칼이 바람에 조금 흔들렸다. 어깨 부근의 털 장식도 하늘하늘….
“이제 한여름인데 안 더워?”
“멋있어 보이려면 이 정도는 견뎌야죠.”
헤베는 그 대답을 조금 곱씹었다.
“설마 나한테 멋있어 보이려고 이렇게 입는다는 거야?”
“눈치챘어요? 역시 헤베는 천재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예요.”
헉, 우리 사귀는 거 들키면 어떡하려고.
헤베는 깜짝 놀라서 진을 힐끗 살폈다.
다행히 진은 둘의 대화에 관심 없는 듯 드레스룸에서 잠옷을 개고 있었다. 그 모습에 헤베의 관심사는 곧바로 진에게 옮겨졌다.
‘저 잠옷 아까도 개고 있었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헤베는 조금 떨떠름했다. 이렇게까지 어지럽히진 않았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진의 정리 속도가 느린 것 같다. 식사 다 마치고 차를 마실 때까지 저 좁은 공간을 정리 중이라니, 테이든이 내가 얼마나 지저분한 줄 알겠어!
“요정족.”
테이든이 갑자기 나지막하게 진을 불렀다. 멀쩡한 이름 놔두고 종족 이름을 불러제끼는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진은 화내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한 진을 향해 테이든이 미소 지었다.
“나머지는 제가 정리할게요. 그쪽은 이제 들어가 보세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둘은 잠시 시선을 마주쳤고, 헤베만 눈치채지 못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마침내 진이 개다 만 잠옷을 자리에 놓고 일어났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저녁 식사 때 뵙겠습니다. 헤베 님.”
“수고했어.”
진이 방을 나가고, 테이든이 벌떡 일어났다.
“너도 가게?”
“아니요. 드레스룸 정리 마저 하려고요. 헤베는 계속 차를 마셔요.”
헤베는 찻잔을 들고 테이든을 졸졸 따라갔다. 테이든은 드레스룸에 자리 잡고 앉더니 아까 진이 만진 잠옷을 손에 들었다. 헤베는 벽에 기대서서 정리하는 테이든을 구경하려다가 다리가 아플 걸 예상해 바닥에 앉았다.
“이런, 바닥은 딱딱해서 안 됩니다.”
깜짝 놀란 테이든이 헤베를 한 팔로 달랑 들은 뒤 바닥에 방석을 깔고, 벽에는 쿠션을 놓았다.
헤베는 푹신푹신한 방석 위에서 쿠션에 기댄 채 테이든을 구경했다.
“너 옷 정리도 할 줄 알아?”
“…네, 잘하진 않지만요.”
“대단하다. 못하는 게 뭐야.”
“하하….”
선황과 전 궁사는 어린 헤베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면서 다루기 쉽게 굴렸을지언정 허드렛일은 일절 시키지 않았다. 정신적인 면을 제외하고는 정말로 어화둥둥 자란 것이다.
“헤베의 시중은 요정족이 다 해주고 있어요?”
“응, 아침 식사도 차려주고 침실 정리도 해주고 가끔은 무슨 옷 입을지도 골라줘.”
“앞으로는 제가 할게요.”
“뭐?”
너무 놀라서 차를 들이부을 뻔했다.
테이든은 조금 느긋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잠옷을 만지고 이불을 개는 건 정말 내밀한 행위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내 연인의 잠옷과 이불을 만지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너도 시중들어주는 사람 있잖아.”
“전 제가 직접 해요. 멀쩡한 두 손이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을 시키나요?”
“…….”
헤베는 멀쩡한 두 손을 내려다봤다.
그 행동을 본 테이든이 하하, 소리 내서 웃었다.
“물론 헤베는 예외지요. 당신은 손가락 까딱 안 하고 다른 사람들 시키면 돼요. 옷 개는 방법 같은 거 평생 모르고 살고, 귀찮은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침실이나 드레스룸은 너무 개인적인 공간이니 타인이 손 안 댔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이제 당신은 연인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침실은 이해해도 드레스룸이 그렇게 개인적인 공간이었나 의문이 들었지만 테이든의 표정이 어딘가 서늘해서 물을 수 없었다. 분명 입매는 올라갔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그럼 내일부터는 내가 할게. 그러고서 안 되면 너 부르면 되잖아.”
“헤베가 직접 하겠다고요? 옷 정리… 할 줄 알아요?”
“날 무슨 어린애라고 생각하나. 옷 정리 정도는 할 줄 알지.”
헤베의 목소리는 아주 경쾌했다. 테이든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든이 손으로 뭉개며 주무르고 있던 잠옷을 개기 시작했다. 능숙한 모습에 헤베는 내심 감탄했다.
아주 어렸을 적 전쟁터에 들어와 모두가 업어 키운 헤베 뮨은 잠옷을 개 본 적이 극히 드물었다. 전쟁터에서는 잠옷이랄게 따로 없었고, 가끔 성에서 머물 때는 항상 시종이 정리해줬다. 솔직히 이렇게 각 잡아서 갤 자신은 없었다.
영웅의 자연스럽고 능숙한 모습을 감탄하며 구경하는데, 테이든이 가지런히 갠 잠옷을 서랍에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헤베는 호로록 차를 한입 마시며 물었다.
“왜 멈춰?”
“아뇨, 그냥….”
“……?”
“…….”
테이든이 잠옷을 품에 안더니 헤베를 번질번질한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이거 저 주세요.”
“…뭐?”
“주세요. 잘 쓸게요. 혼자서… 유용하게.”
잠옷을 가져가서 뭘 어떻게 잘 쓰겠다는 거야…? 어안이 벙벙해 대답도 못 하는 그때 헤베는 목격해버렸다. 테이든의 바지 중심 부근을….
화르륵.
테이든 손에 들어간 잠옷이 불타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 너무 놀라 본능적으로 마법을 사용한 헤베의 짓이었다. 수명이 오 분 정도 증발했지만 너무 당황스러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장 나가!”
“너무해요. 아깝게.”
테이든이 풀죽은 목소리로 재를 그러모았다.
“갑자기 왜 태웠어요?”
“내가 모를 줄 알고? 내 잠옷을 가지고 음란하고 망측한 행위를 할 생각이었잖아. 그래서 네, 그, 그것도 흥, 분한 거지?”
“제 상태를 눈치챘단 말이에요?”
진심으로 놀란 테이든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요? 이런 걸 알려면 오 년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무슨 일 있었어요?”
헤베에게는 굉장히 진도가 빠르고 거침없는 스승이 있었다. ‘테이든의 생각’이라는 스승이.
“정리 깨끗이 하고 나와!”
헤베는 홱 돌아섰다.
목덜미까지 붉어진 채였다. 드레스룸에서 햇살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헤베는 남은 차를 한입에 들이켰지만 열이 가라앉지 않아서 잘 찾지 않는 찬물까지 들이켰다.
‘정신 잘 붙잡아야겠어.’
저 욕정꾼 때문에 나도 옮아버리지 않게 제정신 차려야겠다! 헤베는 굳게 다짐했다.
***
꿀꺽.
“…….”
조용한 궁사실에 침 삼키는 낯뜨거운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창가에 매달린 채 꿀꺽, 침만 삼키는 그는 바로 타락한 배신자, 헤베 뮨이었다. 창 아래 수련장에서는 웃통을 내놓은 채 목검을 휘두르는 테이든 엔더웨이가 있었다.
테이든과 헤어진 헤베는 궁사 인수인계를 마치기 위해 루니스 율리를 만나러 왔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잘 온 적 없는 궁사실에서 이것저것 인수인계하던 중에 문득 루니스가 고개를 들더니 창문을 보는 것이다.
‘왜?’
‘밖이 소란스럽군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정말로 밖이 시끌벅적했다. 그들은 자리 잡고 창밖을 살펴봤다. 아래에 못 보던 기사 수련장이 생겨 있었다. 궁사실은 매우 고층인데 이곳에도 들릴 만큼 소리가 우렁찼다.
‘저쪽도 우리처럼 열심히 수련하나 보다. 여기에나 집중해.’
‘테이든 공작이 방문해서 더 소란스러워진 모양입니다.’
‘뭐? 어디?’
‘가운데입니다.’
‘안 보여! 어디? 어디? 왜 나한테만 안 보이는데!’
‘…….’
헤베가 얼굴을 바짝 붙여오자 멈칫한 루니스는 곧 뒤로 빠지면서 망원경을 내밀었다. 헤베는 왜 망원경이 있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그렇게 궁금하진 않은데 일단 주니까 받을게.’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설명을 덧붙이며 망원경을 받아든 헤베는 눈에 불을 켜고 테이든을 찾았다. 그는 중앙에 있었는데 옆 사람들에게 뭐라 뭐라 말하더니 상의를 벗어젖혔다. 환호성이 더욱 거세졌다.
‘헤베, 오늘은 계획은 어때요?’
‘그냥… 루니스한테 인수인계하는 게 끝이야.’
‘궁사실에서요?’
‘응.’
설마 그 대화가 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계략이었던 걸까.
다른 이가 들었다면 헤베를 짤짤 흔들며 어떻게 눈치챘냐며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냐며 오열했을 터였다.
“…….”
테이든이 웃통을 벗은 채 목검을 휘둘렀다. 헤베는 루니스에게 망원경을 양보하지 않았다.
잔뜩 성이 난 상완근과 삼각근, 골에 손가락을 넣으면 끼일 것 같은 복직근, 한 손으로는 절대 안 잡힐 것 같은 탄탄한 대흉근. 옆통은 두꺼운데 허리는 잘록하고 어깨는 쩍 벌어졌다. 이게 어떻게 스무 살의 신체란 말이야.
테이든은 수십 명과 대련을 해도 땀방울조차 맺히지 않았다.
크게 목검을 휘두를 때마다 근육이 요동쳤다. 탄탄하고 섬세하게 짜인 근육이 움직이며 눈길을 사로잡았다.
언제 저렇게 컸지. 그 어린애가….
궁사실 창문이 조금 높아서 발돋움해야 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헤베 님, 인수인계 안 하십니까.”
“어? 해야지.”
“…….”
“너도 테이든 보고 싶지….”
헤베가 루니스를 몹시 의식했다.
자기도 보고 싶은데 나만 망원경을 독차지하는 게 싫은가 본데, 테이든과 이어주려고 할 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응했으면 당장 망원경을 넘겼을 거야. 이제 기회는 지나갔어. 일단은 내가 테이든의 연인이고, 사귀기로 한 이상 나도 충실한 연인이어야 하지 않겠어?
알게 모르게 가시 돋은 헤베의 옆에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 무언가를 끄는 소리와 함께 탁 소리가 났다.
“앉아서 보십시오.”
헤베는 망원경에서 잠깐 눈을 뗐다. 루니스가 푹신한 방석이 깔린 의자를 가져다 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
빨간 머리 미인의 뒷모습을 보니 헤베는 지금 내가 어린애랑 뭘 하고 있나 진한 자책감이 들었다.
그는 발꿈치를 내리고 루니스에게 다가갔다.
“구경 더 안 하십니까?”
루니스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헤베는 망원경을 건넸다.
“이제 네가 구경해.”
“…….”
루니스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헤베는 갸웃했다.
“원하는 거 아니었어?”
“절대 아닙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군요.”
루니스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헤베는 내친김에 바로 물어보기로 했다.
“좋아하는 거 맞잖아. 전쟁터에서 늘 테이든을 보고 있었지.”
“제가 본 건 공작이 아니라-!”
루니스는 일순 발끈했다가 헤베의 말똥말똥한 갈색 눈을 보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됐습니다. 인수인계나 해주십시오.”
“어….”
헤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빨리 인수인계 끝내고 흑마법사와 그만 마주치고 싶었던 것 같다고, 속으로 납득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때 욱신, 가슴께가 아파왔다.
“헤베 님?”
순간 너무 고통스러워 표정 관리를 못 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수그리자 루니스가 급히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흑혈화 현상으로 인한 고통이었다. 십여 분은 지속될 텐데 이곳은 궁사실이고 복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게다가 아래에 테이든이 있다.
‘테이든은 지금도 내 기척을 느낄 텐데.’
“어디 아프십니까?”
쓰러지려는 몸을 루니스가 부축해왔다. 테이든도 아프냐고 묻는 루니스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신음소리도. 어쩌면 이미 올라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읏.”
참으려 해도 신음이 흘러나왔다. 테이든이 이 소리를 들었다고 확신한 순간 이미 마법이 발동되었다. 순간이동 마법진이 헤베의 발아래에 생기고 당황한 루니스가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다.
다음 순간 헤베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찬 외부 공기가 느껴졌다. 바람 한 줄기가 머리칼을 간지럽히고 떠났다.
“하아…….”
본능적으로 마법을 사용해버리느라 장소를 특정한 게 아니라서 헤베는 가슴께를 부여잡은 채 주위를 둘러봤다.
동그란 분수대, 갓 공사한 듯한 돌바닥, 아기자기한 가게들.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자를 보고 놀라서 경비를 불렀다.
헤베가 도착한 곳은 작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정확히 잡히는 간판이 있었다.
[제이 빵집]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침에 잠깐 떠올렸다고 바로 여기로 이동하다니. 무의식이란 참 솔직하구나…….
***
‘이 마을 이름이 욘로였나.’
기억 속 그곳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발전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피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잠시 머무르는 천막촌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영지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마을이란다. 특히 이 마을의 발전을 이끄는 곳은 ‘제이 빵집’이며 테이든 엔더웨이를 비롯한 영웅들이 먹은 빵집으로 명성이 자자하다고 했다.
처음 빵 맛을 보고 이름을 알리게 한 건 헤베였는데 헤베 뮨의 이름은 쏙 뺐다.
아주 장사를 잘하는 집이었다.
“맛있니?”
“네, 맛있어요.”
“그래, 많이 먹고 얼른 탑으로 돌아가렴. 스승 줄 빵들도 챙겨주마.”
“감사합니다.”
헤베는 어리숙한 학생 흉내를 내며 빵집 주인 제이 어쩌고에게 인사했다. 제이 어쩌고는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였는데 아버지와 매우 닮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헤베에게 커다란 단팥빵을 억지로 안겼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어째 한번 입을 대니까 술술 먹혔다. 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헤베가 무척 허기진 상태였다고 받아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둥글게 모여서 헤베를 구경했다.
“마법사의 탑 수련이 힘들기로 유명해도 입학은 더욱 어렵지 않니. 겨우 전쟁이 끝나서 삼백 년 만에 제자를 받았잖아.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마음 바로잡고 조금만 더 고생해서 대마법사가 되어야지.”
“네….”
제이 어쩌고가 대마법사에게 충고 겸 잔소리를 시전했다.
주민들 앞에서 순간이동 마법을 보여버린 헤베는 마을 근처에 마법사의 탑이 있다는 걸 기억해냈고, 천재적인 순발력으로 마법사의 탑에서 투명 마법으로 잠깐 도망쳐 나왔다고 거짓말했는데, 주민들이 순순히 납득했다.
마법사의 탑은 전쟁으로 인해 황성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탑을 제외하고는 모든 곳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종전을 앞두고 몇 군데가 빠르게 재건축되어 문을 열고 제자를 받았다. 수련이 힘들어서 도망치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궁사였을 적 보고받은 기억이 있었다.
“다 먹으면 탑에 돌아가는 거야. 알았지? 세상은 예쁜 얼굴만 믿고 살기에는 각박한 곳이란다. 능력도 있으면서 예쁜 마법사가 되자.”
“네… 네?”
“정말 귀엽네. 새로운 궁사님이 그렇게 어여쁘시다는데 마법사들은 원래 외모가 출중하신가.”
“어이, 다는 아니지. 헤베 뮨은 아주 흉측하다잖아.”
갑자기 들려온 이름에 헤베는 깜짝 놀랐다.
“그 타락자 얼굴 본래는 봐줄 만 했대요. 흑마법을 받아들인 후 괴물이 된 거고요.”
“쯧, 괴물을 성에다 두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우리 제국을 얕보잖아. 빨리 처형해버려야 하는데.”
“나는 헤베 뮨이 황성에서 아주 편하게 잘 지내는 것만 생각하면 아주 성질이 나서 죽겠어.”
“하다못해 쫓아내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질 않으니까 문제죠. 요즘엔 그 타락자를 존경한다면서 흑마법에 관심 보이는 어린애들이 많다잖아요.”
“뭐라고요?”
헤베가 벌떡 일어났다가 현기증 때문에 다시 털썩 앉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물었다.
“어린애들이 흑마법에 관심을 가진단 말입니까?”
“우리 마법사님은 몰랐구나. 어린애들이 전쟁놀이하면서 흑마법사를 맡고 싶어 해. 서로 흑마법사 하겠다고 싸운다고. 다 헤베 뮨 때문이지.”
“그럴 수가….”
궁사 때 받은 보고에 이런 내용은 없었다. 헤베는 큰 충격을 받았다. 흑마법이란 악 그 자체이다. 흥미 위주로 다뤄지는 건 특히 금기시되어야 했다.
‘나 때문에….’
성에서 평안을 누리는 흑마법사라는 존재가 이런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헤베가 정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사람들 의식 속에 흑마법사가 되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질 수도 있었다.
잠시 사라졌던 자기혐오가 순식간에 머릿속을 뒤덮었다. 입맛이 사라진 헤베는 먹던 빵을 내려놓았다.
“자네 건강이 매우 안 좋아 보이는구만.”
모인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처음부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말이여. 어디가 안 좋은가?”
“…누구시죠?”
예민해진 헤베가 말한 사람을 사납게 노려봤다. 안경 쓴 노인으로, 겉보기에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경계하지 마. 우리 마을 의원님이셔.”
“의원이셨군요.”
“본래 여행 중이셨는데 내 빵 맛에 길들여져서 마을에 눌러살기로 했지. 그렇게 빵 맛을 보고 중독된 사람들이 이 마을을 만들었단다.”
제이는 맛에 대한 자부심이 과도하게 넘쳤다.
“한창 전쟁 중일 때 잠시 마을에 들른 테이든 공작님과 지첸 남작님, 에블 기사단 단장님과 부단장님, 마우 백작님과 파르테 기사님, 진 기사님도 이 빵을 먹고는 눈물을 흘리며 이 작은 빵집을 위해서라도 전쟁은 끝내야 한다고 다짐하셨어.”
사실을 말하자면 이 마을에 들린 건 헤베와 테이든 뿐이고, 일행은 두 사람이 바리바리 싸 들고 간 빵을 맛봤을 뿐이며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물론 얼른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다짐은 매 순간 했지만.
“특히 테이든 공작께서 빵을 한 입 드신 후 오열했다는 사실은 널리 퍼져있단다.”
“오열이요….”
테이든이 빵이 너무 맛있어 운 적은 없지만, 어느 전투에서 승리한 날 밤 눈물 흘리며 모래 섞인 수프를 삼킨 적은 있었다.
안 그래도 예민했던 헤베는 테이든의 우는 얼굴까지 상상하게 되면서 기분이 몹시 가라앉았다.
지금도 울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더니 자신도 기척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 순간이동 해버렸다. 얼마나 걱정스럽고 괴로울까.
헤베는 이렇게 떠나버리면 어쩔지 잠깐 생각해봤다. 이대로 이 작은 마을에서 죽는다면 테이든은 내 죽음도 모른 채 나를 찾아 헤맬까.
적어도 세상은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에 내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하면 세상의 평화는 지켜진다. 흑마법에 관심을 보이는 어린애들도 없어지고, 헤게르미와의 약속도 해결된다.
그러나 테이든 엔더웨이의 평화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대로라면, 아직 나를 사랑하는 지금 헤어진다면….
정말 잔인한 짓이다.
가장 잔인한 건 이런 생각을 ‘괜찮은 방법인데.’라고 여기게 하는 현실이었다.
“심장이 아픈 게 맞군.”
“네?”
상념에 끼어든 의원이 헤베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는 갈색 눈을 들여다봤다. 순간 헤베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가 곧 이들이 흑마법사의 외모를 모른다는 걸 기억해냈다.
황성에 들락날락하는 이들이야 흑마법사의 외모를 알지만 이런 작은 마을 평범한 사람들은 모른다. 나이도 3, 40대라고 아는 경우도 많았다.
헤베는 긴장을 내려놓고 당당하게 응수했다.
“이거 놓으세요. 전 남자친구 있습니다.”
“손목이 말랐어. 흰자위의 실핏줄이 터졌고, 자꾸 근육 경련이 일어나 팔꿈치를 떠는군.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갑작스러운 발작을 염려해 몸이 늘 긴장 상태인 거야.”
의원은 놀랄 만큼 정확하게 진단했다. 그저 손목을 붙잡고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어머, 예쁜 마법사님. 정말 아픈 거예요?”
“데려가서 진찰해봐야겠군.”
의원이 헤베를 붙잡고 일으켜 세우는데, 힘이 아주 장사였다.
헤베는 사실 뿌리친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체를 모르는 의원에게 한번 보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 마을 의원이니 검은 피로 물든 상체를 봐도 이게 흑마법 때문이라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흑마법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미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서 한번 제대로 진찰받을 필요가 있긴 했다.
어차피 죽을 텐데 보여서 뭐 하냐는 생각과 한번 진찰만 받자는 생각이 충돌했다.
“학생인지는 모르겠지만… 따라와라.”
그 와중에 의원은 손목을 붙잡은 채 발길을 재촉했다. 옆에서 빵집 주인과 마을 사람들이 얼른 따라가 보라고 몰랐던 병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헤베는 순순히 뒤를 따랐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의원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사람들이 저렇게 따른다는 건 실력이 좋다는 의미였다.
***
도착한 곳은 불 꺼진 2층 주택이었다. 의원은 익숙하게 전등을 켜고 의원실로 안내했다. 1층은 의원실이고 2층이 주거하는 곳인듯했다.
“이걸 입에 물고 앉아 있어라.”
“이게 뭡니까?”
“체온 측정계. 내가 만들었지.”
의원이 처음 보는 동그랗고 작은 걸 건넸다.
보통 귀나 겨드랑이로 측정하지 않나? 입안에 넣으면 축축해질 텐데 이런 걸로 어떻게 체온을 측정한다는 말이야? 호기심을 먹고 사는 마법사로서 의문이 들었지만 의원의 말대로 입에 물었다.
의원은 바쁘게 움직였다. 달그락, 뚝딱거리며 정체 모를 병을 열어 내용물을 덜기도 하고, 처음 보는 딱딱한 것을 빻기도 하고, 물에 넣어 젓기도 하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십 분이 지난 후 손바닥만 한 그릇을 가지고 앞에 앉았다.
“이걸 먹어라.”
헤베는 체온 측정계를 뱉었다. 침이 묻었는데 의원은 상관하지 않고 덥석 집어 들었다. 의원이 유심히 측정계를 살피는 동안 헤베도 그가 내민 그릇을 관찰했다.
겉보기에는 진이 매일 내놨던 검은 약물처럼 생겼는데 혹시 맛이 그 약물처럼 쓸까 봐 입을 대지 않았다. 헤베는 그릇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의원은 측정계에 정신이 팔려서 그가 마시는지 안 마시는지 보지 않았다.
“왜요, 심각합니까?”
측정계를 보고 있는 의원의 표정이 무슨 괴물 보듯이 해괴하게 변해서 가볍게 물었는데 의원이 온몸을 들썩이며 놀랐다.
“어떻게 이런 마력이….”
“마력이요?”
“이건 사실 체온 측정계가 아니라 마력 측정계다. 내가 직접 만들었지.”
의원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렸다. 헤베는 고개를 갸웃했다.
“신체 내부에 넣어서 마력을 측정하는 도구는 처음이네요. 제 마력이 얼마만큼이라고 뜹니까?”
측정계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측정 불가….”
“그렇군요.”
헤베는 조금 실망했다. 언제나 ‘측정 불가’였다. 여덟 살에 처음으로 측정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그 결과로 헤베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혹시 자네는 마탑의 교수이신가?”
“아닌데요.”
“그럼 자네가 정말 학생이라고?”
“네? 아, 진, 진짜 학생입니다.”
“거짓말을 못하는구만.”
의원이 혀를 찼다.
“진, 진짜, 맞는, 데.”
딸꾹, 딸꾹.
거짓말 못하는 정도를 떠나 딸꾹질까지 시작하는 헤베에게 의원이 물컵을 건넸다. 헤베는 한번에 들이켰다가 크게 기침했다.
“마법의 탑 교수 중에 이렇게 심약한 자도 있었다니.”
헤베는 심약하지 않다고 발끈하려 했지만 피해망상이 제동해왔다. ‘심약한 성격이 아닌 동시에 마력 측정 불가라면 흑마법사인 헤베 뮨밖에 없다’라는 추측을 해올까 봐.
“교수는 싫어. 근처 마탑이 복구되자마자 마력 측정계를 가져갔는데, 이런 도구는 필요 없다며 내쫓았지. 교수들은 순 겁쟁이뿐이야.”
의원의 눈빛에 반감이 서렸지만 타락한 배신자라는 정체를 아는 것보다는 나았다.
헤베의 딸꾹질이 멎은 후 의원이 약물을 가져갔다.
“이건 안 마셔도 되네.”
“이게 뭔데요?”
“수면제.”
“…….”
“재워서 마탑에 돌려보내려고 했지. 가출한 학생을 돌려보내면 돈을 받거든.”
마법사의 탑, 문제가 많은 곳이었지만 궁사일 때는 전혀 보고받지 못했다. 루니스는 알았을까.
“마력 측정계는 의미 없는 게 맞으니 마탑 탓하지 마세요. 마력이란 건 매시 매분 매초 달라지거든요. 지금 당신에게 얘기하는 지금도 내 몸속 마력은 줄어들었다가 늘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죠.”
“변장 마법인가? 당신처럼 어린 나이의 교수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네.”
“저 나이 많습니다. 무려 십 년 이상이나 전쟁에 참전했다고요.”
“십 년이라니.”
의원이 정색했다.
“아동 착취라도 당한 건가.”
정확했다.
“나는 전시라는 이유로 아동을 보호해주지 않는 종자들은 극도로 혐오하네. 내가 이끌던 부대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바로 관두고 전쟁터를 나왔지.”
“도망을 합리화하는 걸로 들리는데요.”
“도망친 게 아니라 신념을 지킨 걸세.”
신념이라니, 헤베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체를 물고 늘어지면 자신만 불리해졌다. 헤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찰 봐준다고 해서 왔는데. 다른 소리만 한다면 난 가보겠습니다.”
“허어, 앉으시오.”
의원이 말투까지 바꿔가며 얼른 붙잡아왔다. 헤베는 내키지 않는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의원이 진찰 도구를 꺼냈고 옷을 벗어보라 했다.
회귀 전 헤베는 여러 복잡한 이유들 때문에 한 번도 의원에게 몸을 보인 적이 없었다.
우선, 흑마법으로 인한 죽을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황성에서 쫓겨난다. 아니, 쫓겨나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지. 분명 여우 같은 황제가 몰래 살수를 보내 목숨을 끊어놓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검은 핏줄은 역병처럼 보일 테니까. 역병 보균자를 풀어놓는 지도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안 벗으시오?”
“고민 중입니다. 남자친구가 있거든요.”
“나도 아내가 있소. 사별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자네도 남자친구와 사별하기 전에 얼른 아픈 곳을 보이시오.”
실제로 남자친구와 사별하기 직전인 헤베는 고민에 잠겼다. 이 의원에게는 보여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법사는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헤게르미 신도들은 헤게르미가 모든 운명을 안배했다고 믿는다. 위대한 대마법사이자 신앙심 깊은 신도인 헤베는 때에 따라 ‘이건 운명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오늘 갑자기 이 빵집이 생각난 것, 무의식중에 이곳으로 순간이동 한 것, 마법에 대해 아는 게 많은 의원을 만난 것. 모두 헤게르미의 안배라면 그는 이 의원에게 흑혈화 현상을 보이는 게 맞았다.
의원은 상대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사실은 알아도 ‘헤베 뮨’이라는 건 모르고, 이게 흑마법 때문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결론 내린 헤베가 단추를 풀었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의원이 혀를 찼다.
“왜 이렇게 떠시오? 나까지 기분 이상해지는구만.”
“남자친구가 질투가 많으니 오늘 일은 비밀로 해요. 저도 하늘에 가면 그쪽 배우자에게 비밀로 할게요.”
“…….”
의원은 헤베의 말에 받아치지 못했다. 단추가 풀어지고 살갗이 드러나자 의원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심장에서부터 시작되어 온몸에 퍼져가는 검은 핏줄.
헤베는 상의를 완전히 벗었다. 처음엔 부끄러웠으나 나중엔 추워서라도 얼른 옷을 입고 싶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의원은 한동안 가만히 살피다가 조용히 물었다.
“전염병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역시나 보자마자 전염되는 것인지 두려워한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저주의 한 종류가 아닐까 합니다.”
“마탑 교수들도 모른다던가?”
“비밀이라니까요. 그리고 말해도 모를 거예요.”
“남자친구는?”
“모릅니다.”
“아픈가?”
“엄청요.”
사방에 퍼져있는 핏줄을 통해 피가 흐를 때마다 찌릿찌릿 고통이 따라온다. 온몸에서 피를 다 빼낼 수도 없고. 지금도 계속 약한 통증을 느끼고 있다.
문제는 이러다 갑작스럽게 격통이 온다는 점이다. 방금도 갑작스러운 고통 때문에 순간이동 해버리고 만 것처럼.
특제 진통제는 사흘 후에 찾으러 오라고 했으니 헤베는 사흘이나 통증을 참아넘겨야 했다. 그는 모두의 앞에서 고통을 참을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숨어 있다가 진통제 찾고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저주의 한 종류라면 저주 건 자를 찾아가면 되질 않은가.”
“그게 어려워요. 진짜 저주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피를 검게 만드는 종류는 나도 처음 접하네. 마치 마물을 보는 것 같군.”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만 뜨끔, 했다.
“마물은 죽고 나서 검게 변하잖아요. 살아 있을 때는 빨갛고.”
“꼭 그렇지만은 않네.”
헤베는 실없이 웃었다. 아무렴 이 시골 마을 의원이 나보다 마물에 대해 잘 알까.
“흑혈화 현상은 됐고 그냥 건강 상태나 진찰해주세요.”
의원이 순간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기울이길래 헤베도 덩달아 놀랐다.
“왜요? 내가 뭐 말 잘못했습니까?”
“흑혈화 현상이라는 용어는 처음 들어서.”
“제가 만들었어요.”
의원은 그 용어가 아주 마음에 든 듯했다. 두어 번 더 중얼거린 뒤에야 헤베의 손목을 가져가 신중하게 진맥을 살폈다.
헤베는 그에게 협조적으로 굴었다. 하란 대로 숨을 깊게 들이마신 채 참기도 하고, 오른팔을 둥글게 돌려보기도 하고, 소리 내어 ‘아-’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협조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의원은 헤베의 신체 오른편이 전체적으로 긴장한 상태라 이대로 두면 반신마비가 온다고 경고했으며, 여러 번 부러졌다가 붙었다 한 어깨뼈나 팔다리도 조금이라도 무리하면 바로 덧날 수도 있다고 했다. 특히 완전히 아작난 적 있었던 무릎과 팔꿈치는 극도로 조심하라고 주의했다. 또한 영양 상태가 매우 좋지 않으니 식사량을 늘려야 하는데, 위장 상태도 소화력도 약해서 더 늘릴 순 없을 거고 약이나 먹으며 연명하라고 말했다. 위와 폐를 비롯한 신체 내부 장기는 새 걸로 갈아 끼우지 않는 한 답이 없다고 가차 없이 진단 내렸다.
“아주 만신창이로군. 평생 전쟁터에 있기라도 했나.”
정확했다.
“피도 좀 뽑겠네.”
“마음대로 하세요.”
검은 피는 몸 밖을 빠져나가면 평범한 빨간색을 띠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허락했는데 결과는 가볍지 못했다. 의원 놈팽이가 피를 주사기로 다섯 통이나 뽑은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어질어질했다.
“조금이 아니잖아요. 가뜩이나 자주 어지러운데.”
“저주인지 병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괴상하구만. 몸 밖에서는 평범한 붉은 피처럼 변한다니… 중화도 안 되는가?”
“시도도 못 해봤습니다. 용액을 못 찾아서.”
“내가 해보겠네.”
“열심히 해보세요. 성공한다면 제 생명의 은인이 되겠군요.”
“뭔가 잘못 아나 본데 혈액이 아니더라도 자네의 몸은 엉망진창이라서 오래 살지 못할 걸세.”
“고마운 소리네요.”
헤베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일어났다. 진찰을 다 받고 나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의원은 문밖까지 배웅을 나왔다.
“위장약은 내일 찾으러 오게.”
“아. 네.”
“거짓말이군.”
헤베가 식은땀을 흘렸다. 어떻게 알았지?
“안 오면 마탑에 들고 가겠네.”
“마탑에는 비밀이라니까요.”
“비밀을 지키고 싶다면 순순히 찾으러 오시든가.”
의원은 헤베에게 손을 내밀었다.
“천오백 골드다.”
“…….”
“뭐하시오?”
“내일 가지고 올게요.”
헤베는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순간이동이 아니었어도 평소에 돈은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돈이 없었으니까.
진통제 외에는 텅텅 빈 주머니를 보여주며 이튿날 돈을 가지고 오겠다고 간신히 의원을 설득했다.
“꼭 가지고 오게나. 어차피 위장약을 받으려면 다시 와야겠지만.”
“알겠습니다.”
굳이 배웅해주겠다고 집 앞 길목까지 나온 의원이 안경테를 고쳐 썼다.
“이만 들어가세요.”
의원은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고 집으로 돌아갔다.
헤베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법을 걸었다.
이제 저 자는 내 용모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한 시간 후면 대화 내용도 잊고 하루가 지나면 존재 자체를 잊을 것이다. 사람의 기억에 혼선을 주는 마법인데, 평범한 인간의 마법 저항력으로는 반년 후가 지나야 기억이 다시 되살아난다.
‘어차피 그때는 내가 죽은 후니까….’
헤베는 이 마법을 테이든에게 사용할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아마 초월자인 테이든이라면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기억이 되살아날 것이다.
“윽.”
마법 사용의 후유증이 왔다. 헤베는 나무 뒤에 숨어 가슴을 붙잡고 몸을 웅크렸다. 한번 통증이 있을 때마다 진통제를 서너 알 한 번에 삼키는데, 지금 남은 양이 딱 그 정도라서 약 없이 고통을 견뎠다. 남은 것은 순간이동으로 황성에 돌아갈 때 먹어야 했으므로.
***
고통은 십여 분 후 멈췄다.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했다. 손발이 저려와서 한참을 주무르다가 일어났다.
‘아까워.’
되도록 마법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수명이 줄어드는 게 너무 아까웠다.
빵집 주인이나 마을 사람들의 기억도 없애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수명이 일주일은 줄 것 같아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들은 마탑 가출 학생으로 여기니 굳이 수명 소모해가며 마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해가 지는 작은 마을에서 헤베는 잠시 방황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듯 여기저기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회색 연기는 노을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빵을 실컷 먹은 그는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을 피해 인적 드문 숲길로 빠졌다. 나무 기둥과 수풀, 바위가 나오자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헤베는 눈앞에 보이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숲은 그렇게 높고 울창하지 않아 하늘을 가리지 않았다. 하늘은 빠르게 저물었다. 해가 진 하늘에 결계가 반짝거렸다. 비센티아의 어느 곳에서도 위를 올려다보면 실드가 보였다. 오로지 헤베의 눈에만.
이제 곧 밤이 오겠지. 추워지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의원은 면역력도 약해진 상태라고 했다. 얼른 돌아가야….
‘어디로?’
황성의 내 방으로?
헤베는 집이 없다.
언제부터 없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냥 전쟁터에서 지내다 보니 돌아갈 곳이 없어졌고, 부상 당하면 황성에 머물며 재활 훈련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황제는 흑마법사를 성에서 쫓아내려고 했는데, 테이든이 그가 나가면 자기도 나가겠다고 선언해서 실패했다. 그때 헤베는 다소 안도했다. 갈 곳이 없고 가진 돈도 없었으니까.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명예는 추락했고, 몸은 부서지기 직전이고….
아픈 건 싫었다. 진통제도 소용없을 만큼 아파지기 전에 죽고 싶었다. 테이든만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 이곳에서 조용히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테이든.”
헤베는 문득 녀석의 이름을 불러봤다.
수풀에 바람 스치는 소리만 화답해줬다. 하긴 언제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던 녀석이지만 여기까지는 올 수 없을 것이다.
굉장히 걱정할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테이든이 걱정된 헤베는 헤게르미가 준 생각을 읽는 마법을 사용했다. 주문을 외우자마자 테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리를 부러뜨릴까.
귓가를 스치는 음성은 굉장히 어둡고 차가웠다.
-마력 제어구를 채우고 방에 가둘까.
-약물을 먹여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거야.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백치 상태로 만들어 나만 보게 하자.
뭔가 굉장히 섬뜩한 계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바로 기절시켜야 해.
헤베는 경악했다.
가고 싶어도 못 가겠다. 보자마자 기절시키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돌아가….
-헤베, 얼른 돌아와요.
그 와중에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만은 너무나 애절하고 애달팠다.
굉장히 미안해졌다. 하늘하늘 왕자님 같은 옷을 입고서 저녁에 예정된 데이트를 기대했을 텐데.
-어디예요, 헤베. 내가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지 마세요….
가냘픈 애원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울고 있는 걸까.
헤베는 고민을 끝냈다.
‘정말로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하진 않을 거야.’
자기혐오와 피해망상으로 범벅된 그라도 테이든이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확실하게 알았다.
헤베는 마법을 사용하기 전 미리 진통제를 전부 털어 넘긴 뒤 순간이동 마법을 펼쳤다.
순식간에 황성의 아늑한 방으로 이동했는데, 불이 켜져 있었고,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난장판 상태였다.
-먁!
황망함과 현기증 때문에 가만히 멈춘 사이 먕먕이가 품에 뛰어들었다. 먕먕이는 헤베가 바로 받지 못하자 날개를 펼쳐서 가슴에 얼굴을 비벼댔다. 미리 진통제를 먹어서 다행히 더 이상의 고통은 없었다.
곧 와장창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무언가에 부딪쳤다. 아니, 와락 껴 안겼다.
“헤베…!”
‘날 기절시키진 않겠지?’
헤베는 테이든을 믿으면서도 급하게 방어 마법을 외웠다.
퍼억.
목 뒤쪽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테이든은 곧장 헤베의 뒷목을 손날로 내리쳤는데, 헤베가 만들어낸 방어막이 간발의 차로 막아내고 부서졌다.
보라색 눈에 순간 섬뜩한 기운이 스쳤다. 테이든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헤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너야말로. 잠깐 이거 놔 봐.”
“싫습니다.”
“테이든!”
헤베가 다시 한번 방어 마법을 사용했다. 방어막에 부딪힌 테이든의 몸이 뒤로 밀려났지만, 그는 순식간에 일어나 헤베를 품에 안았다.
“헤베.”
“잠깐 대화 좀 하자. 진정해.”
공격이 아니라 포옹이라서 헤베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젠장….”
테이든은 헤베를 끌어안고 더욱 몸을 붙여왔다. 녀석이 내뱉는 욕지거리는 아주 흔한 단어였음에도 얼음처럼 서늘하고 차가웠다. 헤베도 녀석의 넓은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는데 양팔까지 몸에 붙이고 통째로 끌어안겨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날 기절시키려고 한 거 아니지?”
“그걸 알면 그냥 얌전히 기절해주시면 안 됩니까?”
“기절시켜서 뭘 어쩌려고.”
“저만 볼 수 있는 곳에 가둘 건데요.”
“그래봤자 마법으로 또 빠져나갈 건데.”
“마력 제어구로 구속하고요.”
“안 통해. 마력 제어구는 흑마법은 구속하지 못하거든. 그냥 내가 널 조금 싫어하게 될 뿐이야.”
“…….”
테이든이 조용해졌다. 분명 속으로 욕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베는 테이든이 진정하기를 얌전히 기다렸지만 테이든은 좀처럼 차분해지지 못했다. 주인에게 한번 버려진 동물처럼 덜덜 떨었으며, 헤베를 끌어안은 힘도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거세졌다. 이대로면 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 고통은 테이든이 받은 마음의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미안해.”
헤베는 테이든이 기다렸을 말을 했다.
“내가 도망가서 널 불안하게 했어.”
“…왜 그랬어요?”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것도 미안해.”
“…….”
테이든이 잇새로 신음을 내뱉었다. 욕설에 가까웠다.
“헤베, 어디가 아픈 거예요?”
“지금 온몸이 아픈데.”
그제야 테이든의 팔 힘이 조금 약해졌다. 헤베가 그 틈을 타 슬그머니 품을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테이든은 완전히 놔주지는 않았다. 헤베는 테이든과 가슴을 맞댄 채 그대로 안기게 됐다. 그래도 얼굴을 올려다볼 틈은 생겼다.
아주 엉망이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던 눈가는 발갛게 부었고, 항상 단정하던 금색 머리칼은 새 둥지처럼 헤집어졌다. 표정은 더 엉망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절망에 찬 표정은 아닐 것이다.
그 모습은 헤게르미가 보여줬던 광경을 떠올리게 했다.
시체를 껴안은 채 절망으로 울부짖던 남자를.
“어디가 아픈지 말해주세요.”
테이든이 울먹거렸다.
“대체 무슨 병인지 알려줘요. 종종 심장이 아파서 가슴 부근을 붙잡은 거 알아요. 들키기 싫어서 도망갔다는 것도. 요즘 식사량이 줄은 이유, 자꾸 신전에 가는 이유. 일부러 내가 헤베를 싫어하게 만들려고 한 이유도 다 병 때문이었죠.”
굉장히 정확한 추측에 헤베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일부러 마약 소굴에서 진통제를 만든 것도 병의 고통이 극심하기 때문인 건가요? 헤베, 함께 의원에게 가요.”
“그런 거 아니야. 난 아무 데도 아프지 않아.”
“이제 와서 거짓말하지 마세요.”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몰라서 헤베는 그저 쓰게 웃었다.
그냥 아프다고 할까. 당장 옷을 들치고 ‘맞아, 난 아프고 곧 죽어.’ 해버릴까.
진실을 밝힐 수 없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가장 우려하는 부분. 소문이 퍼져나가 악한 사람이 ‘실드’를 악용하려 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실드’라는 방법을 알면서도 전쟁을 끝내지 않고 망설였다는 부끄러움.
마지막으로… 진실을 알았을 때 가까운 이들이 마음 아파할 것이라는 점.
‘혼란을 잠재울 책임이 있는 테이든과 네 수하들은 너를 되살려낼 방법을 찾는 데 집착하느라 세상을 돌보지 않았지.’
‘이기적인 희생에 절망한 그들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헤게르미가 회귀시키면서 말해준 내용은 한 글자도 잊지 않았다.
헤베는 테이든은 물론이고 수하들 그 누구도 절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털어놓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실드의 존재를 깨달으려면 수백 년은 흘러야 했다. 후대의 마법사는 실드를 알아챌지도 모른다. 하늘에 떠 있는 어떤 마법사의 결계 마법이 마계의 통로를 막고 있다는 사실과 저 실드를 만드는 건 오직 흑마법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챌지도 모른다. 그때 세상의 유일한 흑마법사이자 타락한 영웅인 헤베 뮨이 실드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려질 것이다.
명예는 회복되겠지. 양지바른 곳에 무덤이 만들어지고, 역사서에 자신을 희생해 비센티아를 구한 영웅으로 실리겠지.
그때라면 괜찮다. 그 사실에 상처받을 동료들은 모두 죽은 후일 테니까. 초월자인 테이든은 걱정스럽지만, 몇백 년이나 지나면 테이든도 마음이 무뎌지리라 믿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헤베는 자신만 상처받고 끝날 일인데 굳이 다른 사람들까지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만약 반대로 테이든이 흑마법을 받아들여 실드를 만들었고, 이 평화가 테이든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안다면 헤베는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흑마법이 좀먹어 들어가는 검은 핏줄을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 평생을 헤매다 죽었을 것이다.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전쟁이 끝났으니 수하들은 이제 평안하게 삶을 즐기면 되니까.
“……!”
순간 헤베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마법을 일으켜 테이든을 날려 보냈다. 콰앙-! 큰소리와 함께 벽에 처박혔던 테이든이 부스러기들을 털며 침울하게 투덜거렸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다칠 뻔했잖아요.”
‘날 기절시키려고 한 것 같았는데.’
헤베가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순간적으로 서늘한 기운이 스쳤는데… 내가 밀어내지 않았다면 정말로 공격했을까?
“한 번 더 날 기절시키려고 하면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하겠어. 이번엔 성에 돌아오지 않을 거야. 진짜인지 궁금하면 또 공격해 봐.”
테이든의 얼굴에 한층 어두운 그늘이 졌다. 언제나 빛나던 자색 눈도 싸늘히 가라앉았다.
“그 마법은 정말 거슬려요.”
“거슬리면 어쩔 건데.”
“그러게요. 전 정말 무력합니다. 당신은 너무 강하고요.”
테이든이 스스로 무력하다고 하는 건 사실 좀 우스운 말이었다. ‘초월자’라고 불리며 비센티아에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로 강하다. 오죽하면 헤게르미조차 테이든을 이기지 못했을까. 다만 헤베는 테이든에게 영원히 천적이었다.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내가 영원히 찾지 못하는 곳으로 숨을 수 있죠.”
“네가 또 위협하지만 않는다면 안 숨어.”
“저는 왜 자꾸 당신이 숨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죠? 지금도 숨겠다고 협박하고 있잖아요.”
“계속 위협하니까….”
“당신을 의원에게 데려가겠다고 하는 게 어째서 위협이 되는 겁니까.”
“내가 원하지 않아.”
헤베는 경계심을 잃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테이든은 몹시 괴로운 병을 앓는 사람처럼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우리 사귀는 거 맞죠? 연애를 하기로 했잖아요.”
“…….”
“연인한테 건강 상태를 숨기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정말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연인이 비밀이 좀 있다고 가둬버리려는 사람은 어디 있냐고.
계속 경계하고 있으려니 체력이 떨어진 헤베는 나동그라진 의자를 일으켜 세우고 앉았다. 테이든은 여전히 벽에 붙어있었다.
“사실 오늘 진찰받고 왔어. 위장병이 있고 면역력이 많이 떨어졌대.”
“심장은요?”
“잘… 잘 관리하면 괜찮다는데.”
“어느 의원한테 다녀왔어요? 다른 나라예요?”
“대륙 끝에 있는… 섬나라.”
헤베의 거짓말은 무척 서툴렀다. 테이든은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지치고 힘없는 모습은 마치 기력이 다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사람 같았다.
헤베는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토닥여주고 싶다. 괜찮다고 다독이고 싶다. …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사흘 후, 수도 근처 마약굴에 진통제 받으러 가는 거 알아요. 그때… 같이 가도 돼요?”
테이든은 고개를 떨군 채 물었다.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결 좋은 금발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부서진 벽의 돌 부스러기가 왕자님 같은 푸른 옷에 떨어져 엉망이었다. 테이든이 전쟁터에서도 이렇게 지친 모습을 보인 적 없다는 걸 아는 헤베는 가슴이 너무 쓰라렸다.
내가 뭘 하는지….
테이든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 시한부인 걸 숨기는데, 이 사실이 녀석을 아프게 한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이야.
헤베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테이든.”
나직한 부름에 테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자색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일렁거렸다. 헤베가 이름을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테이든은 무릎걸음으로 기어 왔다.
“진통제만이라도 같이 받으러 가게 해주세요. 저도 헤베의 몸 상태를 알고 싶단 말입니다.”
무릎 위에 얼굴을 포갠 테이든이 다시 한번 애원했다.
그들은 연인이었으나 전혀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헤베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난 정말 이기적이고 나쁜 흑마법사야. 테이든이 너무 가엽다. 왜 나 같은 걸 사랑하게 된 걸까.
그는 테이든의 엉망이 된 머리를 쓰다듬었다. 테이든은 처량하게 훌쩍거리며 헤베의 종아리에 손을 올리고 커다란 손바닥에 살짝 힘을 줬다. 헤베가 놀라며 테이든을 쳐다봤다.
‘정말 부러트리려는 건가?’
계속 이어진 시도에 헤베는 이번엔 테이든을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지켜봤다. 도박이라기보다는 믿음이었다.
“하아.”
잠시 후 테이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끝끝내 헤베의 발목은 멀쩡했다. 상상으로는 온갖 짓을 다해도 실제로는 솜털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헤베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 비뚤어진 감정은 정말이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
‘헤베 뮨 가출 사건’ 이후(마우가 그렇게 이름 붙였다) 테이든은 헤베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황제도 가출 사건을 들었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
함께하는 며칠간 테이든은 진통제를 함께 받으러 가자고 조르고 졸랐다. 자다가도 환청이 들릴 정도라 헤베가 결국 패배를 선언하고 같이 받으러 가기로 했다. 테이든은 아주 신나서 마차를 준비했는데, 그 마차에는 진과 마우가 이미 타 있었다.
“너넨 뭐야?”
“제가 불렀어요.”
“왜?”
“제가 의술은 잘 몰라서요.”
“……?”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헤베를 테이든이 부드럽게 마차에 태웠다.
테이든은 밤중에 움직이는 헤베의 기척을 느꼈을 뿐 의약원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마약이 유통되는 할렘가에 숨겨진 곳이란 것만 알았다. 헤베로서는 몹시 껄끄럽긴 했으나 같이 받으러 가기로 했으므로 위치를 불러줬다. 테이든이 마부에게 알려주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진, 마우. 너네는 왜 같이 가냐니까.”
“저희가 진통제 성분에 대해서는 좀 알거든요.”
“너네한테 진통제 한 알도 안 줄 건데.”
“과연 그럴까요.”
테이든은 생글생글 웃었고, 마우는 난처한 듯 시선을 돌렸고, 진은 무표정했다. 헤베는 얼이 빠져서 셋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나랑 싸워서 빼앗겠다는 뜻이야?”
“물론 헤베 님은 어마무시한 대마법사이시지만, 3 대 1이면… 승산이 좀 있지 않겠어요?”
마우가 실토했다. 어이가 없다 못해 순간이동 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진, 너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 끼어든다고?”
테이든은 사랑에 미쳤고, 마우는 본래 좀 미쳤다지만 냉정 침착한 진은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묻자 진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헤베 님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
헤베가 입을 쩍 벌렸다.
테이든이 손가락으로 헤베의 턱을 톡톡 두들겼다. 아주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왜 내 주위엔 뻔뻔한 놈들뿐일까. 삶을 되돌아보는 헤베였다.
***
의약원은 아주 깊은 골목에 있었다. 밤에는 사람이 들끓지만 한낮에는 한적한 할렘가. 마약에 중독된 부랑자들 몇몇이 화려한 일행에게 시선을 던졌다.
진과 마우, 테이든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음지의 유통처를 알아냈는지 수상쩍어했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곳을 알려줬을까요. 제가 당신을 은애한다는 걸 말해준 사람과 동일합니까?”
“아니야. 전혀 달라.”
“대체 누굴까요. 짐작이 안 가네.”
전혀 추측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회귀 전 망나니 시절에 알게 된 곳이니까.
황성 안의 술을 거덜 내는 헤베에게 누군가가 차라리 할렘가에 가서 약쟁이나 되라고 악담을 퍼부었고, 헤베는 바로 할렘가에 향했다. 그때 그는 빈손이었지만, 약쟁이들은 병약한 미인에게 매우 유했다. 그곳에서 마약 성분이 돌 때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다음번에는 모아둔 보석을 들고 할렘가를 찾아 의원에게 강한 진통제를 대량 주문했다. 그때의 경험으로 회귀 후 일찌감치 의원과 거래를 시작한 것이다.
항상 후드를 뒤집어쓴 채 혼자 오던 이가 이번엔 저보다 키도 훌쩍 큰 사람들을 세 명이나 끌고 가자 의원은 매우 겁먹었다.
진통제 약병은 손바닥보다 작았다. 스무 알밖에 들어있지 않아서 헤베는 조금 우울해졌다. 세 영웅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그 작은 약병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잠깐 고민하던 헤베는 한 알을 순순히 넘겨줬다. 널리 소문이라도 내려는 듯 반짝반짝 빛나는 외양을 가리지도 않았고, 누가 봐도 영웅 같은 자태로 전투에 임할 준비를 하는데 싸우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딱 한 개뿐이야. 더는 넘보지 마.”
“이것도 감개무량이지요. 싸우지 않아도 돼서 다행입니다. 헤베 님의 전투 스타일을 잘 알아서 팔 하나 날아갈 각오 했거든요.”
마우가 챙겨온 주머니에 조심스레 넣었다. 테이든은 헤베의 어깨를 감싸며 마우와 진에게 말했다.
“백작에게 가보세요.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백작이 누군데?”
헤베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린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데이… 아, 그,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마우가 어색하고 웃고는 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진은 헤베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 다시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헤베는 테이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테이든, 백작이라니?”
“헤베가 전에 예쁘다고 했던 빨간 머리 궁사요. 진통제 성분을 함께 봐주기로 했거든요.”
“루니스가? 왜?”
“그자도 당신을 걱정하니까요. ‘뮨의 친위대’ 중 하나거든요. 본인은 아직 부정하지만.”
“말도 안 돼. 걔는 날 엄청 싫어하는데.”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에덴타인들과 남작도 기다리고 있답니다. 헤베의 친구도요.”
“…….”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우린 데이트만 즐기면 돼요.”
테이든은 순순히 음모를 밝히고는 헤베에게 몸을 붙여왔다. 몸 좋은 미남이 생글생글 웃으며 유혹해댔지만 헤베는 근심에 빠졌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루니스가 아는 건 좀 위험한데.
루니스는 정말로 천재였다. 헤베 때문에 현시대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는 호칭은 얻지 못했지만 헤베가 죽고 나면 천재라는 칭호는 루니스에게 옮겨갈 터였다.
“뭐할까요. 연극을 볼까요? 날도 좋은데 야외 데이트? 아니면… 어디 으슥한 곳에서 서로의 뜨거운 호흡을 느껴볼까요.”
‘진통제 성분이 뭐였더라….’
남들이라면 눈 돌아갈 몸 좋은 연하 미남의 유혹 속에서 헤베는 차분하게 진통제 성분을 떠올렸다. 대부분 통증 억제, 피 흐름을 막는 종류가 몇 개 있다. 그것만으로 흑마법과 관련 있다고 추측하긴 어려울 듯했지만….
“헤베.”
“응, 그래, 가자.”
“어딜요. 으슥한 곳에요?”
“아니… 그.”
“저 데이트가 처음이라서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건 헤베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아무 데나 들어가자.”
한낮인데다가 사람도 많고 테이든의 외모와 차림새가 너무나 범상치 않았기 때문에 시선이 쏟아졌다. 헤베는 후드를 뒤집어쓰려고 뒤쪽에 손을 댔는데, 이제 보니 이미 쓰고 있었다. 헤베가 생각에 잠긴 사이 테이든이 덮어씌운 것이다.
“이 마을은 처음이라 사전 조사는 못 했어요. 제일 유명한 빵집이 어디인지 사람들에게 물어볼게요.”
테이든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움찔거리면서도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마치 간택을 기다리는 것처럼….
“사람 많은 곳은 싫어.”
“찬성입니다. 우리 으슥한 숲 쪽으로 가요.”
테이든의 팔이 헤베의 허리를 감쌌다. 단단하고 포근했다. 하지만 헤베의 머리는 조금 차가워진 상태였다. 기분이 들떠있던 테이든도 그걸 느꼈는지 점차 조용해졌다.
***
마을을 벗어나 인적 드문 숲이 나왔을 때 헤베의 기분은 완전히 가라앉아버렸다. 테이든은 행상을 위해 만들어진 벤치를 찾아 늘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을 깔고는, 헤베를 앉혔다.
“헤베… 화났어요?”
“…….”
헤베는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난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헤베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고, 자신의 기분이 왜 가라앉았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테이든은 나름의 추측을 했다.
“다들 걱정해서 그래요. 헤베의 건강이 안 좋다는 것도, 그걸 숨기려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았거든요. 흑마법이….”
테이든이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흑마법이 분명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테니까….”
그 단어가 헤베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결국 흑마법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테이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연약한 손을 붙잡았다. 테이든은 헤베의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운 채 꿇어앉았다.
헤베는 이제 화도 내지 않았다. 그는 보는 사람이 더 아플 만큼 처연한 표정이었다.
“왜 다들 날 못 믿는 거야. 이게 전염병이라면… 내가 전염병인 걸 알고도 감추고 여기서 지낼 것 같아? 모두에게 옮겨가면서. 내가 그런 쓰레기로 보여?”
“전염병인 걸 염려해서가 아니에요. 그냥 헤베의 몸을 걱정하는 겁니다.”
“알아. 너는 그렇겠지. 너는 날 사랑하니까.”
헤베는 테이든의 마음은 인정했다. 아무리 자존감 낮고 피해 의식 깊은 그라도 테이든의 순수한 사랑과 걱정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테이든은 그런 순수한 걱정으로 진통제 성분을 알아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라.”
“어떻게 다르다는 거예요?”
테이든은 헤베와 눈높이를 맞추며 차분하게 물었다. 보라색 눈이 품은 진심 어린 걱정이 헤베의 흔들리는 감정을 건드려왔다.
오만한 타락자라는 세간의 평과 다르게 헤베 뮨은 피해망상이 가득한 자존감 낮은 마법사였다. 모든 이를 의심하고 언제든 배신할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테이든 만은 아니었다. 비센티아의 마지막을 본 헤베는 테이든의 사랑만은 믿었다.
“얘기해주세요. 당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싶어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털어놓으라고 말한다. 그건 굉장한 유혹이었다. 붙잡은 두 손은 따뜻했으며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단단했다. 진심을 담은 곧은 시선이 응시해왔다.
“진은….”
헤베는 언제나 혼자 품어왔던 의심을 처음으로 입에 담았다.
“진은 요정족이고 마물을 증오해.”
“…….”
“내가 흑마법사가 되자 진은 전쟁터를 떠나려 했어. 마우도 한동안 피했고, 루니스는 날 쫓아내기 위해 탄원서까지 썼어. 아니… 아직은 안 썼지만 분명히 쓸 거야. 다들 날 걱정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전염병을 퍼뜨리는 건 아닐지 의심하는 거란 말이야. 너랑은 목적이 달라.”
“…….”
“어쩌면 고의적으로 전염병이라는 분석 결과를 내서 날 쫓아내려 할 수도 있어. 황제도 네 눈치 보느라 자제하지만 내가 눈엣가시겠지. 흑마법사가 황성에서 편히 사는 바람에 평범한 사람들까지 흑마법에 흥미를 갖잖아. 트집 잡으면 바로 날 쫓아낼 거야. 처형하려 할지도 몰라.”
헤베는 지금까지 마음속에 품었던 어두운 감정을 쏟아냈다.
그건 실제로 회귀 전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루니스는 헤베 뮨을 내쫓자는 탄원서를 작성했고 거기에 진과 테이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서명했다. 밀리안과 파와이는 가장 먼저 뒤돌아섰다. 그들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헤베에게는 초대장조차 주지 않았다. 지첸과 파르테는 두문불출했고 마우는 계속 전염병을 의심해왔다.
회귀 전은 지금과 달리 망나니 짓거리를 했다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헤베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헤베.”
테이든이 손을 내밀었다. 따뜻한 손가락이 입술이 닿았다. 헤베는 그제야 자신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 생각은….”
테이든이 가라앉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전쟁터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이들을 일절 신뢰하지 않는 연인에게 뭐라고 말할지 고르는 것이다.
헤베는 테이든이 뭐라고 말해올지 궁금했다.
테이든의 뒤로 햇살이 비춰왔다. 역광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이 맞아요.”
테이든이 헤베의 얼굴을 감싸고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실은… 순수하게 헤베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은 저뿐이에요.”
낮은 목소리에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무언가 아주 차가운 것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순식간에 훑고 간 느낌이었다.
“제가 의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당신을 싫어하는 걸 알고도 그들에게 맡겼어요…. 정보만 얻을 테니 걱정마세요.”
“거, 거짓 정보를 줄 거야.”
“잘 걸러 들을게요. 그리고….”
헤베는 따스한 손에 얼굴을 기댔다. 테이든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짓는 것 같았다.
“헤베를 쫓아내면 저도 성을 나갈 거예요. 그럼 우리는 어디 먼 곳에서 둘이서만 함께 살아요.”
“황제는 널 놓아주지 않을 텐데.”
“제가 나가겠다고 하는데 누가 감히 날 막을까요.”
테이든이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쿵, 쿵.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헤베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에 진통제 약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지 못하고 떨리는 손을 테이든의 커다란 손이 덮어왔다. 헤베는 고개를 들었다.
역광에서 벗어난 테이든은 아주 예쁘게 웃고 있었다.
“어때요?”
“뭐가? 네 계획이?”
“아니요, 지금 헤베의 기분이요.”
“…….”
“어떤데요?”
“그냥… 좋진 않아.”
의심만 하던 걸 확인받았을 뿐인데 기분이 무척 우울했다.
그들은 함께 전장을 헤쳐온 사이다. 서로의 목숨을 수없이 구해주며 함께 지옥을 헤쳐왔다. 흑마법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만으로 증오스러운 자가 되진 않을 것이다.
전쟁터에서도 싫어했다는 뜻이다. 잘못된 작전으로 많은 이를 죽여온 총사령관. 평소에 불만이 있었기에 흑마법사가 되자마자 버린 것이다….
“헤베.”
테이든이 헤베에게 허리를 숙였다.
작은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리고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헤베는 화들짝 놀라서 녀석을 뿌리쳤다.
“누가 입술 갖다 대래!”
“우린 연인인데 이 정도도 안 돼요?”
“안 돼. 분명히 말했어.”
“알았어요. 우리 첫 키스날, 이십오일 남았죠.”
“벌써 그렇게 됐어?”
사실 오늘은 첫 키스를 언제 할지 논의하는 날이었으나 헤베는 테이든의 농간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벌써라니요. 애타 죽을 것 같은데.”
“삼 개월 후로 해버릴 거야.”
“그랬으면 제가 황제한테 말해서 달력 바꿨어요.”
테이든은 상큼하게 웃고는 헤베의 옆에 앉았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헤베는 몹시 슬펐다. 테이든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마음을 잠식하는 억울함과 서러움 때문에 자꾸 가라앉았다.
억울한 감정은 전부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억울하다고 하면 죽은 이들이 용서하지 않을 텐데.
동료들이 그를 버리는 건 그의 선택에 따른 결과였다. 뒤돌아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과거에도 이미 한번 겪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픈 걸까.
나는 이제 곧 죽는다. 내가 죽고 나면 다들 검은 피에 물든 몸을 발견할 테고 역시 전염병을 앓으면서도 숨겼다고 생각하겠지. 시체는 불태워지고…. 본래 정떨어지게 만들 계획이었다. 내 죽음에 슬퍼하지 않도록. 그 계획이 성공했는데도 헤베는 우울했다.
서럽고 억울하고 답답했다.
“전부 거짓말이에요.”
그때 테이든이 입을 열었다.
“뭐가?”
헤베가 묻자 테이든은 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부드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저만 헤베를 걱정한다는 거요. 다른 사람들은 헤베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 거, 거짓말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다들 진심으로 헤베의 건강을 걱정한다는 소리죠.”
“…….”
헤베는 어안이 벙쪄서 아무 말도 못 했다. 테이든은 세상에서 가장 예뻐 보일 각도로 고개를 기울인 채 말했다.
“전염병이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헤베가 어렸을 때는 전쟁 중에 전염병 돈 적도 있었다면서. 다들 전쟁 겪은 사람들인데 그걸 두려워하겠어요?”
“걔네는 전염병 겪은 적 없어. 사라진 후에 참전했잖아. 전염병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전염병이 아무리 무서워도 당신의 죽음보다 무섭겠어요.”
테이든이 씁쓸한 말투로 말하고는 헤베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당신은 요정족이나 백작이 전염병 걸리면 쫓아낼 거예요?”
“쫓아낼 건데.”
“그리고 당신도 따라가겠죠.”
“…….”
“모두 마찬가지예요. 설령 그게 전염병이라고 한들 누구도 헤베만 혼자 두지 않습니다. 황제야 당신을 내보내려 하겠죠. 큰 문제 아닙니다. 어차피 다들 찰거머리처럼 따라올 거고, 우리가 머무는 집 옆에 집을 지을 거예요. 전 헤베랑 둘만 있고 싶지만, 당신의 광신도들이 그렇게 두지 않을 거란 게 슬프네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헛소리 아니에요. 이게 사실이에요. 다들 헤베를 좋아해요. 헤베가 흑마법사가 되었다는 이유로 꺾일 만큼 얄팍한 감정이 아니지요. 모두 당신을 지나치게 존경한다고요. 물론 저로서는 모두가 당신을 싫어해서 제가 당신을 독차지한다면 기쁘겠지만…. 반목과 갈등을 방조하는 건 정말 유혹적인 가정이었지만.”
테이든이 헤베에게 손을 뻗었다. 이제는 그 손이 닿을 거라는 사실만으로도 온기가 퍼지는 느낌이었다.
“당신이 날 믿어서 마음을 털어놓아 줬으니까.”
헤베는 테이든의 손에 얼굴을 살포시 기댔다. 테이든은 더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을 보는 시선으로 헤베를 바라봤다.
피해망상 가득한 흑마법사조차도 부인할 수 없는 감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속상하게 하기 싫어서 큰맘 먹고 진실을 알려주는 거예요.”
“…걔네가 나 싫어한대도 하나도 안 속상한데.”
“정말 귀엽네요.”
테이든이 손가락으로 헤베의 입술을 꾹 눌렀다.
“저한테는 거짓말할 때마다 입 튀어나온다고 했으면서 이 입술은 거짓말만 내뱉는데도 왜 이렇게 작고 예뻐요?”
이곳에 다른 이가 있었다면 당장 토악질하면서 테이든에게 필사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을 발언이었다.
“너 진짜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지첸이야?”
“제가 보고 배운 사람은 헤베밖에 없는데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작년 5월 28일 11시 50분에 작고 예쁜 입으로 오물오물 먹는 게 귀엽다면서. 요걸 깨물어버릴까 하며….”
헤베가 허겁지겁 손바닥으로 테이든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 내가 언제.”
“맨날 다 발뺌만 하시고.”
“그런 변태 같은 말을 했을 리가 없어.”
헤베가 놀란 물고기처럼 펄쩍 뛰었다. 사실 그때 헤베가 했던 말은 “많이 먹어라. 오물오물 먹는 게 귀엽네.”였고, 테이든이 마음대로 왜곡한 것이었다.
“이제 제 입술은 작고 예쁘지 않지요? 크고 못생겼지요?”
“못생기진… 않았는데.”
“못생기진 않은 입술, 맛이 어떨지 궁금하지 않나요.”
“얼굴 좀 치워.”
헤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런 화제는 불편하다. 차라리 동료들이 자신을 싫어한다, 안 싫어한다 얘기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무튼 네가 말하는 바가 뭔지는 알았어.”
“오, 그래요?”
테이든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입 맞춰주세요.”
“그게 아니라.”
헤베가 테이든의 입을 밀어냈다.
보라색 눈빛에는 욕망이 넘실거렸으나 헤베가 미는 대로 순순히 밀려났다.
“내가 흑마법사가 되었어도 걔네들은 아직 날 좋아한다는 거지.”
“정답이에요.”
물론 지금은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회귀 전과 달리 망나니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헤베에게는 아직 죽기 전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테이든의 말 한마디로 마음을 열기에는 과거에 냉대받고 비난받은 기억의 무게가 너무 컸다.
“그렇게 혼란스러울 일이 아닌데….”
테이든의 말투가 퍽 씁쓸했다. 테이든은 헤베의 손을 붙잡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
“괜찮아요. 지금 너무 혼란스러우면 더는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그 조그만 머리로 내 생각만 해도 부족한데 왜 남 생각하느라 골치를 썩여요.”
“네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잖아.”
“이제는 생각하지 마세요. 시간이 흐르면 믿게 될 날이 오겠죠.”
“시간?”
“네, 살다 보면요.”
그 말에 헤베는 불현듯 정신 차렸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반년. 아니, 반년도 남지 않았다.
만약 수하들이 자신을 좋아한다면, 정말로 존경하고 아낀다면 그건 오히려 있어서는 안 되는 불운한 일이다.
‘내 죽음에 슬퍼했으면 좋겠지만 마음 아파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헤베 자신도 모순적인 문장임을 알았다.
“또 엄청 흉악한 생각 중인가 봐요.”
테이든이 헤베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헤베의 고민거리는 자연스레 테이든에게로 옮겨졌다.
날 정말로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지도 못하는 녀석들보다는 당장 눈앞의 남자가 문제였다.
상대에 대한 애정이 넘치도록 담긴 다정한 보라색 눈. 곧은 콧대와 미소를 머금은 입술.
고작 스무 살인 비센티아의 영웅.
헤베는 이 잘생긴 얼굴이 얼마나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는지 선명히 기억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서 웃고 있는 테이든이었다.
3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