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8장 (9/18)

8장

궁사직을 내려놓고 백수가 된 헤베의 일상은 아주 한가롭고 느긋했다. 새끼 마물들과 산책할 때나 테이든과 데이트할 때 외에는 방을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오늘도 그는 한낮이 되도록 침대에서 나가지 않았다. 힘을 지닌 사람이 게으름 피우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던 영웅은 타락해버렸다. 과거에 한번 망나니짓을 했기에 더 거리낄 게 없었다.

안락한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먕먕이와 삑삑이, 빽빽이들이 꼬물꼬물 노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럴 때가 아닌데.”

헤베는 버릇처럼 중얼거렸다. 먕먕이가 귀를 쫑긋 세웠다.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닌데….”

-미양.

“그런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맹.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신전에나 한 번 더 가볼까.”

-삑.

-빽빽.

이번엔 새끼들도 대답에 어울렸다.

헤베는 침대에 늘어진 채 손을 뻗었다. 빽빽이가 먼저 작은 날개를 파다닥거리며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짧은 다리로 손목을 기어오르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만약 성을 나가서 살게 되면… 너네도 같이 가자.”

-빼액.

“여기선 아무도 너네를 챙겨주지 않을 거야. 나랑 테이든이 없으면.”

-삑.

헤베는 빽빽이를 가슴에 얹었다. 따끈따끈하고 작고 동그란 걸 올려놓자 마음이 평안해졌다.

-애옥!

질투심 폭발한 먕먕이가 훌쩍 올라와 그의 옆구리에 자리했다. 요즘에는 주인의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고 가슴 위에는 올라오지 않는다.

안쓰럽고 기특해서 먕먕이의 털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래에서 혼자 남은 삑삑이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결국 먕먕이가 내려가 삑삑이를 물어와 헤베의 옆구리에 붙였다.

-삑삐익.

-우웅.

먕먕이는 삑삑이의 털을 열심히 핥으며 달랬다.

“먕먕이도 아직 어린데 벌써 보호자 다 됐네.”

-먕.

먕먕이의 대답이 퍽 새침했다.

“테이든도 잘 보살펴줘야 해.”

-앵.

“왜 그때 옆에 없었을까.”

헤게르미가 절망에 빠진 미래의 테이든을 보여준 뒤 계속 가진 의문이었다.

먕먕이가 죽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절망에 빠진 테이든에게 그런 괴로움마저 있었다고는….

‘보고 싶다.’

연애 열흘 차. 의식의 흐름 끝에 남자친구를 떠올린 헤베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오늘은 오후 늦게 만날 예정이었다. 오전 내내 외국 국빈이 방문해서 테이든도 동석해야만 했다. 헤베는 건강상의 이유로 빠졌다. 사실상 그들이 기대하는 대상은 탈리 제국의 황제나 타락한 흑마법사가 아니라 신탁의 영웅 테이든 엔더웨이니까.

‘고생 좀 하겠어.’

테이든은 수줍음이 많아 낯선 이와의 만남은 꺼린다. 궁사인 루니스 또한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고. 그래도 잘하긴 할 것이다.

어린놈들이 고생 중이겠구나. 생각하던 헤베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생각을 읽는 주문을 외웠다.

-‘왜 그때 옆에 없었을까’라…. 전부터 의미 모를 말을 하는군.

응?

흘러들어온 생각이 아주 심상치 않았다.

방금 내가 한 말이잖아.

자리에 대한 불편함과 어색함을 토로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테이든은 외국 국빈을 만나는 자리에서 헤베에게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헤베는 두 달간 아주 이상한 말을 했지.

그는 헤베가 회귀 후 내뱉은 말을 되짚어갔다.

‘먕먕아, 난 헤게르미 말대로 진짜 이기적인가 봐.’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어? 테이든 옆에서 위로해줬어야지.’

‘<마법의 역사> 풀 에자르 자필 초판본이라고? 그게 어디서 났어? 말도 안 돼. 이런 일은 없었는데.’

헤베가 벌떡 일어났다. 빽빽이가 작게 울면서 침대로 떨어졌지만 살필 정신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말실수를 많이 했었나.

테이든은 황성 내에서라면 헤베가 어디에 있든 기척을 감지할 정도이니 소리 내서 말한다면 얼마든지 듣는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들으라고 말한 거나 다름이 없다.

-그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해. 갑자기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과 연관이 있을까. 내가 그를 싫어하게 만들려고 한 것과.

다행히 아무리 똑똑한 테이든이라도 헤베가 ‘회귀’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는 못했다.

테이든은 그 뒤로도 헤베에 대한 여러 추리만 선보였다. 아마 겉보기에는 수줍음 많고 단정한 청년이 황제와 국빈들의 대화를 경청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헤베는 그것이 귀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먁.

“아.”

옆구리에 붙었던 먕먕이가 폴짝 뛰어와 입술을 앞발로 살짝 건드렸다. 헤베의 입술은 하도 깨물려서 엉망진창이었다. 먕먕이에게 ‘헤베가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해야 돼. 알았지?’라며 당부하는 테이든을 보고 웃었는데, 먕먕이는 정말로 그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알았어. 안 할게.”

-매웅.

헤베는 테이든이 소리를 듣고 있다는 걸 의식하며 먕먕이를 끌어안았다.

그도 테이든에게만은 사실을 얘기해줘야 한다는 걸 안다. 다름 아닌 연인이다. 전과 같은 사이가 아니라, 서로에게 비밀이 없어야 하는 연인. 특히 수명을 숨긴다는 건 기만이나 마찬가지였다.

‘성을 나와 아주 먼 곳에서 우리 둘만 함께 살자고 한다면…….’

이 말을 하면 기다렸다는 듯 환영할 것이다. 테이든이 영웅이 아니었다면 헤베도 주저 없이 그 길을 택했다. 하지만 테이든은 세상에서 가장 할 일이 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전쟁은 이제 막 끝난 참이고 세상엔 분명한 그늘이 있다. 테이든은 그늘에 드리우는 햇살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곧 죽으니까. 잠깐 빌려가는 건 괜찮지 않을까.

“읏.”

그때 가슴께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헤베는 항상 머리맡에 두는 약병에서 잡히는 대로 알약을 꺼내 삼켰다.

-먀아. 미야양.

먕먕이가 걱정됐는지 몸을 일으키고 길게 울었다. 헤베는 먕먕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통증은 상당히 오래 지속됐다. 헤베는 신경 쏟고 있을 테이든이 듣지 못하도록 최대한 평정심을 가졌다.

질끈 깨물 입술에서 피가 비쳤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고통을 참았다.

***

테이든은 세상에서 가장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알 법한 험악하고 서늘한 시선으로 헤베의 상처 난 입술을 길게 응시했다. 식기를 나르는 시종들조차 움찔움찔할 정도였는데, 다만 그 입술의 주인은 세상에서 가장 눈치 없는 사람보다 더 눈치 없는 사람이므로 그 어두운 시선을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흑마법사는 테이든이 손수 만든 과일차를 작은 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테이든, 오늘 밤에 신전 갈 건데 같이 갈래?”

“좋아요. 전의 그곳이지요?”

“응, 마차는 진이 준비할 거야.”

“제게 먼저 말해주셨다면 제가 준비했을 텐데.”

“너는 바쁘잖아.”

사실을 얘기하자면 희귀한 요정족인 진도 상당히 바빴다. 백수 흑마법사의 보좌관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헤베는 제가 일 관두고 옆에만 붙어있고 싶다고 하면 싫어할 거죠?”

“…….”

평소라면 ‘응’이라고 바로 대답했어야 할 헤베가 조용하자 테이든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헤베는 능력 있고 힘 있는 자가 게으름 피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가진 힘만큼 책임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전쟁터에서 그는 비센티아의 존폐를 짊어진 최고 사령관이었고, 일개 병사들에게는 한없이 후했으나 테이든을 비롯한 ‘재능 있는 자들’에게는 아주 엄격했다.

부상 당한 병사들에게는 후한 위로금을 내리고 바로 고향으로 돌려보냈지만, 부상 당한 지휘관들에게는 재활 훈련 후 바로 복귀하게끔 했다. 크게 다쳐 사경을 헤매다 겨우 복귀해도 가차 없이 바로 참전시키는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사령관 앞에서 모든 불만은 엄살로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사령관은 멀쩡한 상태가 드물었으니까.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어도 마법으로 긴급 처치한 후 바로 전투에 나서는 대마법사였다. 헤베는 자신이 천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천재적인 재능을 보유했다는 걸 잘 알았고, 그 재능은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쓰여야 한다고 여겼다. 헤베의 보호 범위에 ‘헤베 뮨’은 들어가지 않았다.

“나중에 부르겠습니다. 나가 보세요.”

테이든이 시종을 물렸다. 시종들이 나가고 테이든은 헤베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헤베는 어딘지 불안한 표정으로 테이든을 바라봤다. 테이든은 쉽게 불안해하는 그에게 편안함과 신뢰감을 주기 위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사실 저는 헤베가 궁사를 관둘 거라고 예상했어요. 흑마법사가 궁사로 있으면 사람들이 두려워할 테니까요. 헤베도 권력에 욕심이 없으니 당연히 관둘 줄 알았죠.”

‘흑마법사’라는 단어가 나오자 바로 경계심 어린 눈을 하는 게 보였다. 발톱을 내밀고 털을 삐쭉 세우는 새끼 고양이 같았다.

‘연애하자’고 했으면서도 절대로 연인에게 보내는 눈길이 아니었다.

테이든은 조금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저한테 기사단장을 관두라고 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예상치 못했네요.”

“그렇게 말하진 않았는데.”

“관둬도 된다는 거잖아요.”

“…….”

헤베가 눈살을 찌푸림과 동시에 테이든이 말했다.

“정말 기뻐요, 헤베.”

테이든은 아무리 눈치 없는 자라도 기쁘다는 걸 알 만큼 환하게 웃었다.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저를 좋아해 주겠다는 말이니까요. 제가 사람들에게 도움 주지 않아도요.”

테이든이 헤베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의 이마에는 언젠가 입었던 흉터가 있었다. 비단 이마뿐만 아니라 왼쪽 눈썹에도. 오른쪽 눈꺼풀과 턱 밑에도.

헤베는 시력이 좋지 않다. 어렸을 적 마물의 발톱이 오른쪽 눈을 찢어서 안구를 적출할 뻔했기 때문이었다. 왼쪽 귀는 윗부분이 잘려나갔다가 아무렇게나 아물어 보기 흉했고, 청력도 상당히 떨어졌다. 본인은 멀쩡하다고 생각하지만… 수하들이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에 서서 말을 건넨다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계속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 헤베의 살결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따끈따끈해진 그는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저를 정말 좋아하나 봐요.”

“연인이니까. 당연히 좋아하니까 연인이 됐지.”

“오, 안 더듬는 걸 보니까 거짓말 아니네요.”

“당연하지. 이런 걸로 거짓말하진 않아.”

“하지만 절 좋아해서가 아니라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연애하자고 한 거잖아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

테이든은 시선을 피하려는 헤베를 붙잡고 사랑스럽게 물든 뺨에 입 맞췄다.

말랑거리는 감촉, 따뜻하게 잘 익은 체온. 손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는 움직임은 테이든을 희열에 젖게 했다. 입술을 떼고 나서도 도망가지 않는 걸 보니 정말로 연인이라는 자각은 있는 듯했다.

“당장 사직서 내고 올게요.”

“아직은 안 돼.”

“왜요? 헤베 마음 바뀌기 전에 내야 하는데.”

“일단 우리 살 집부터 구해야 하고… 사직서 말고 휴직서만 내고 와.”

“휴직서요?”

“5개월… 아니, 6개월만 쉬겠다고 해. 너는 황성에 꼭 필요한 존재니까 황제도 수락할걸. 그만두는 것보다야 낫지.”

테이든은 헤베가 가장 귀여워할 각도로 고개를 기울이며 애처롭게 눈을 깜빡였다.

“저는 원거리 연애는 자신 없는데요. 헤베도 6개월 후에 같이 성에 돌아올 거지요?”

반 장난식으로 물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아주 격했다.

부끄러움에 달아올랐던 얼굴은 처형을 앞둔 죄수처럼 두려운 감정으로 물들었고, 전쟁터에서처럼 온몸이 뻣뻣하게 긴장했다. 테이든이 눈썹을 들어 올린 채 변화를 살피는데, 그때 헤베가 읏, 신음을 내뱉으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헤베!”

테이든은 헤베를 급히 끌어안았다. 온몸이 잘게 떨렸고, 식은땀이 흘렀다.

헤베는 지금 테이든이 알지 못하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심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은. 헤베가 어디에 진통제 약병을 두는지 아는 테이든은 헤베의 허리춤을 더듬어 약병을 꺼냈다. 그때 그들의 아래에 마법진이 생겨났다.

순간이동 마법진이었다.

또다시 도망가려 하는 것이다.

“하.”

진심으로 화가 난 테이든은 야속한 연인의 턱을 들어 자신을 보게 했다.

갈색 눈은 눈물과 두려움에 젖었고, 다시금 깨문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다.

순간이동 마법이 발동되는 찰나 테이든은 단검을 꺼내 자신의 팔을 찔렀다.

헤베 뮨은 검을 찔러넣는 각도와 깊이를 보고 부상 정도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전문가였다. 테이든은 어설프게 전문가를 속이려 하지 않고 정직하게, 전완근을 잘라 놓을 듯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큿.”

흘러나오는 신음은 일부러 참지 않았다.

“테이든!”

헤베의 비명이 귓가를 찔렀다. 와장창, 테이블 위의 찻잔들이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가지 마세요.”

테이든은 굵은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팔로 헤베를 붙잡았다. 착하고 다정한 그가 안쓰러워하도록 신음도 내뱉고, 입술도 잘게 떨었다.

“이대로 도망가면, 제 팔을 자르겠습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제가, 못할 것 같은가요?”

테이든이 단검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는데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헤베가 마법으로 막은 것이다.

순간이동 마법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안심할 순 없다. 테이든은 거칠게 단검을 뽑았다. 뜨거운 피가 붉게 솟구쳤다.

“너 미쳤어? 어떻게 자해를 해…!”

헤베가 크게 소리쳤다. 테이든은 헤베를 힘주어 붙잡았다.

“가지 마세요.”

헤베의 가느다란 손목은 거대한 두려움 앞에 선 인간처럼 덜덜 떨렸다. 그는 지금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테이든은 그 원인을 모른다. 원인도 모르는 병을 앓는 연인이 도망가게 둘 수는 없다.

“곁에 있어 주세요.”

헤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밖에 대기 중인 시종들에게 의원을 불러오라 하고, 겉옷을 찢어 테이든의 상처를 지혈했다. 굉장히 깊게 찌른 터라 온몸의 근육이 경련했다.

“젠장….”

잘 욕하지 않는 헤베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테이든은 헤베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물기에 젖은 채 흔들리는 갈색 눈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테이든은 웃음을 참고 대신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테이든은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헤베가 왜 이상하게 행동하는지 의아해하기만 했고, 의미 모를 발언에 의문을 갖기만 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헤베는 테이든을 믿고서 마음속에 품은 어두운 감정을 고백해왔다. 그건 굉장한 발전이었다.

이제 전과 같이 소극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움직일 때가 되었다.

***

테이든의 자해는 엄살이 아니었다. 엄살이야말로 헤베가 혐오하는 것이었고, 얼마나 중태인지 쓱 보면 단번에 파악하는 이를 앞에 두고 속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테이든은 진심으로 스스로를 찔렀고, 평범한 신체였다면 다시는 검을 들 수 없을 만한 심각한 중상을 입었으나 다음 날 완쾌되어버렸다……. 초월자가 지닌 회복력이 예상보다 뛰어난 탓이었다.

이는 의원과 수하들만의 비밀로 남기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헤베는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테이든의 곁을 지켰다.

“많이 아파 보이는데 진통제를 더 투약해줄까?”

“괜찮…아요, 버틸게요…….”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니야. 아프면 언제든 얘기해.”

“네…….”

테이든이 일부러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게 둔 식은땀을 헤베가 물에 젖은 수건으로 닦았다.

지켜보는 수하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헤베의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여전히 병약한 척, 가련한 척하는 초월자를 끌어내리고 싶은 감정이 치솟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전 사령관의 못된 버릇을 이 기회에 끝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헤베는 속이기 쉬우나 다루기 어렵다. 가증스러운 모습에 속이 뒤틀리지만 이게 정답이었다. 수하들은 테이든의 연기를 까발리지 못하고 동참했다.

“이제 들어가서 주무세요….”

“그래. 진, 네가 곁을 지켜.”

진이 대답하기 전에 테이든이 먼저 말했다.

“저는 혼자 있어도 돼요. 헤베가 더 걱정이에요…. 그 정체 모를 격통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넌 지금 정신이 불안정해. 또 자해라는 미친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진이 잘 막아.”

“예.”

진도 테이든도 서로 눈을 마주 보지 않았다. 이름이 호명되지 않은 수하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헤베는 테이든의 붕대 감긴 팔을 힐끗 보고 병실을 나왔다.

그는 부하들이 얼마나 착잡한 상황에 빠진지도 모르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에 돌아왔다.

머리가 복잡했다. 잘 쓰지 않는 욕탕에 몸을 담그며 상념도 같이 씻겨나가길 바랐지만 혼자 있으니 오히려 더 마음이 번잡했다.

헤베는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고 수건으로 감싼 채 침대에 누웠다. 테이든이 저렇게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가지 마세요. 곁에 있어 주세요.’

극단적인 방법에 붙잡힌 헤베는 모두에게 감추고 싶었던 고통을 들켰다. 바꿔 말하자면 테이든은 그렇게 해서라도 헤베의 고통을 나누려 한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깨닫게 되었다.

과거에서부터 테이든에게 품어 온 비뚤어진 감정의 정체.

‘물론 너는 테이든을 사랑하니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말씀하신 걸 보면 헤게르미는 이미 알고 계셨다.

이게 사랑이라는 것을.

신의 말이 맞았다. 과거에는 너무나 어리석어서 외면했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회귀 후에는 막연하게 느끼고는 있었다. 이게 사랑이지 않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게 이런 감정이 아닐까. 깨달아버리면 더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웠는데, 정작 자각하고 나니 세상은 뒤집히지도 않았고 멀쩡했다. 오히려 후회가 들었다.

왜 이렇게 늦게 받아들였는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이렇게 힘들구나.’

한 팔을 다쳤는데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정말 죽는다면, 세상에서 없어진다면 얼마나 암담할까. 퉁퉁 부은 눈으로 의원에게 함께 가자 권하던 과거의 테이든이 떠올랐다.

회귀 전 헤베는 잠깐 잔다 해놓고서 영원히 눈을 뜨지 못했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까. 멀쩡히 회복하게 되리라는 걸 아는데도 이렇게 아프고 암담한데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상대를 보며 너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나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야. 네가 버티지 못했듯이. 어쩌면 나도…….

헤베는 눈을 감았다.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채 밤이 깊어갔다.

***

“이 정도면 일상생활에 무리는 없을 겁니다. 일주일 만에 이렇게 낫다니 기적입니다….”

일주일 후 더 이상의 연기는 무리라고 판단한 의원이 공식적으로 완쾌 진단을 내렸다.

헤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그와 달리 테이든은 아쉬워했다. 테이든의 시선이 의원 옆에 선 진의 허리께를 향했다. 정확히는 허리춤의 검을.

“미쳤어?”

헤베가 앞을 가로막고는 핏줄 선 눈으로 부리부리하게 노려봤다.

“왜, 또 자해하게? 이젠 아예 팔 자르게?”

“자르진 않아요. 나중에 헤베가 불편해지니까.”

“네가 팔을 자르는데 내가 왜 불편해져.”

“헤베를 더 크게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양팔이 있는 편이….”

“무슨 소리야?”

“크흠.”

의원이 헛기침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의원이 사라지고 방에는 테이든과 헤베, 진 셋만 남았다. 평소라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리를 비켜줬을 진은 끝까지 헤베 옆을 지키고 섰다.

일주일간 아팠던 사람은 테이든 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테이든 보다 헤베가 문제였다. 본인이 극구 거부해 진찰 한 번 하지 못했지만….

사경을 헤매는(척하는) 테이든이 붙잡아 아무 데도 도망치지 못한 헤베는 모두에게 고통을 앓는 모습을 들켰다.

그들의 전 사령관은 타인에게 강하게 보이고 싶어 하므로 단 한 번, 헤베가 가진 진통제가 떨어진 걸 안 진이 황성 밖으로 나가 구해온 것 외에는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아무리 목적이 있다지만 자기 몸을 해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다시는 그러지 마. 난 제정신 박힌 사람이랑 연-”

헤베가 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바꿨다.

“연, 연날리기를 하고 싶으니까.”

거짓말이 서툰 흑마법사였다.

“알겠어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오늘 휴직서를 쓰러 갈 건데 헤베도 같이 갈래요?”

“뭐라고 하면서 낼 생각이야?”

“의원이 이미 소견서를 써줬어요. ‘고작 스무 살이란 어린 나이에 막중한 책임을 지면서 부담을 느낀 것 같다. 이대로 두면 또 자해를 저지를 테니 휴식이 필요하다’”

테이든이 소견서를 꺼냈다. 헤베는 대충 훑고는 돌려줬다.

“아직 쓰지 마. 좀 더 여기 머물게.”

“왜요? 성을 나가고 싶어 했잖아요.”

“그럴 이유가 생겼어.”

헤베는 둘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던 진에게 물었다.

“진, 내 연구일지 못 봤어?”

둔한 헤베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진과 테이든이 동시에 움찔했다.

“연구일지 말입니까.”

“나만 볼 수 있게 마법을 걸어놔서 펼치면 텅 빈 것처럼 보일 거야. 연구실에서 가지고 왔는데 어디 있는지 안 보이네. 며칠간 찾아도 없어.”

“찾아보겠습니다.”

“응, 난 못 찾겠어.”

이제 와 찾아도 없는 게 당연하다. 헤베의 연구일지는 이미 오래전 진이 파르테에게 넘겼다.

“그러고 보니 요즘 성 내에 도둑이 있다 하더라고요. 설마 헤베의 일지도 가져간 건 아닐까요.”

테이든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헤베는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추적 마법을 걸어놨으니까 언제든 알 수 있어.”

“…그렇군요.”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진은 어질러진 테이블을 정리하는 척 테이든에게 눈짓했다. 어떻게 수습하느냐는 의미였는데 테이든은 당황한 모습은 전혀 없고,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도둑이 일지를 아예 없애버렸을지도 모르잖아요.”

“당연히 보호 마법도 걸어놨지. 물에 젖지도, 불에 타지도 않아.”

“찢어지지도 않아요?”

“내가 찢으면 찢어지고 내가 태우면 태워지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기 손만 아플걸. 나보다 마력이 강한 사람이라면 없앨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

“그렇지.”

헤베는 자기 학대적인 성향이 있고 자존감이 낮으며 피해망상까지 가졌지만, 때에 따라 코끝이 하늘을 찌를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라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한 적이 없었으며, 누군가 부정하려 한다면 오히려 그자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럼 요정족은 이만 헤베의 연구일지를 찾으러 가보세요.”

“나도 다시 한번 찾아볼게.”

일어나는 헤베의 팔목을 테이든이 붙잡았다.

“헤베는 저를 좀 더 보살펴주세요. 우리는 여기서 같이… 연날리기를 해요.”

“…….”

헤베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흑마법사는 다시 다소곳하게 앉았고, 진은 둘에게 인사한 뒤 방을 나왔다.

***

진이 곧장 향한 곳은 헤베의 방이 아니라 파르테의 연구실이었다.

헤베와 동갑내기 친구인 파르테는 기사인 동시에 헤베의 공격 마법을 보조했던 보조마법사였다. 주무기는 검이었으나 보조마법사로 있었던 시간 덕분에 누구보다 헤베의 마법에 대해 잘 알았다.

뮨의 친위대는 모두 헤베를 따라 황성에 머물고 있으므로, 파르테의 연구실 또한 황성의 한구석에 자리했다.

연구실에서는 여러 가지 실험과 분석이 이뤄졌다.

헤베 뮨이 테이든에게 흑마법으로 만들어준 마검, 헤베 뮨이 주문 제작한 특제 진통제, 헤베 뮨의 연구일지….

그냥 헤베를 연구하는 곳이었다.

진이 연구실로 들어가자 파르테와 지첸이 헤베의 연구일지를 가지고 온갖 실험 중이었다.

둘은 진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역시 추적 마법을 걸어 놨구나. 아깝네. 루니스가 자신이 살펴보겠다고 했는데. 그 녀석이라면 풀 수 있을 거야.”

“일단 돌려놓고 다시 기회를 노려야겠습니다.”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한 채 제자리에 가져다 둬야만 했다. 파르테는 아쉬웠는지 일지를 만지작거렸다. 겉보기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렇게 마법을 덕지덕지 걸어놨을 정도면 흑마법에 대한 연구가 맞는데….”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지첸이 일지를 빼앗아 들었다.

“왜 진즉 추적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건 진과 파르테도 가진 의문이었다.

“이상하지? 없어졌다는 걸 알았을 때 바로 사용했어도 될 텐데.”

“방 안에 있겠거니 했겠죠.”

“방 안에 있겠거니 했어도 추적 마법 사용할 수 있잖아. 그 녀석은 대마법사야. 그 녀석 마력에 비해 추적 마법은 아주 작고 하찮지. 얼마든지 다시 걸어놓을 수 있단 말이야. 왜 그렇게 하지 않고 진에게 찾아달라고 한 걸까.”

“혹시 우리가 가져갔다는 걸 눈치채고 얌전히 돌려놓으란 뜻에서….”

“그건 아닙니다.”

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정도 눈치는 절대로 없습니다.”

찬서리가 내릴 만큼 단호했다.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하긴 절대 그런 눈치는 없지.”

“맞아요. 그리고 우리가 훔친 거 알았으면 난리 났어. 역시 흑마법사를 불신하는 거라면서 당장 성을 나가겠다고 날뛰었겠죠.”

지금까지 보아 온 사령관의 불신에 대한 강한 신뢰였다.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이 눈치가 없을까. 테이든이랑 사귀는 것도 언제까지 모른 척해야 하는 거냐고.”

그 얘기에 분위기가 침통해졌다.

테이든이 자해하기 전, 친위대를 모아놓고 수줍게 말했다.

‘헤베가 사귀자고 고백해와서 연애하게 되었습니다. 비밀 연애이니 헤베의 안정을 위해 모른 척해주세요.’

그 충격적인 발언을 들으며 모두 이를 갈았다.

‘저 짐승이 기어코 일을 냈구나….’

‘스무 살이 되자마자 헤베 님에게 손을 대다니 이런 파렴치한….’

고이 키운 대마법사가 파렴치한 짐승에게 넘어갔다는 현실은 아직도 믿고 싶지 않았다.

“조만간 헤베 님을 설득한 뒤 연애 사실을 공개하겠다더군요.”

“놀라는 표정 미리 연습해야겠다. 이거 어때?”

지첸이 파르테를 보면서 콧구멍을 크게 벌렸다. 벌름거리는 콧구멍을 보고 기겁한 파르테가 팔꿈치로 퍼억, 얼굴을 찍었다.

“너무하네. 이 잘생긴 얼굴에.”

파르테는 지첸의 손아귀에서 구깃해져가는 연구일지를 구해냈다.

“하여튼 왜 추적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지는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야. 헤베 녀석의 그 어질러진 방구석에 처박혔다 해도 추적 마법 한 번이면 찾아내는데 그걸 굳이 진한테 찾아달라 한다고? 너무 이상해.”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게 그거라는 뜻이야. 왜 추적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지.”

“가서 물어볼까?”

“난 진지해.”

파르테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하고는 말했다.

“딱히 ‘추적 마법’이 아니라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거라면. 정확히는 사용하지 ‘못하는’ 거라면, 헤베가 요즘 이상하게 구는 이유와 관련 있을지도 몰라.”

“요즘 마법 사용이 뜸해지긴 했습니다. 순간이동 마법 말고는 사용한 적 없으시지요.”

본래 방에서 내려올 때도 비행 마법을 사용해 착지할 만큼 마법을 즐겨 쓰던 사람이 요즘에는 계단을 이용했다. 두 층만 걸어 내려와도 헉헉거리면서 끝까지 비행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헤베는 마력을 아낄 필요가 전혀 없는 대마법사였다. 특히나 흑마법을 받아들였으니 마력은 더욱더 넘쳐날 것이다.

“마법을 사용하면 고통이 오나?”

지첸이 그럴싸한 추측을 내뱉었다.

그들이 분석한 바에 의하면 헤베가 손수 재료를 선별해 제작했다는 진통제는 통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했다.

헤베는 아프다.

겉보기에는 살이 좀 내린 것 말고는 다친 곳은 없지만, 흑마법이 신체 내부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도 모른다.

약하게 보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약간의 허세도 있는 헤베 뮨은 전쟁터에서도 부상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하필 강한 대마법사라 간단한 상처 정도는 마법으로 커버하기 때문에 주변인들이 아주 주의를 기울여도 부상 사실을 눈치 못 챌 때가 많았다.

한 예로 전쟁터에서 마물에게 독상을 당했음에도 무려 보름이나 숨긴 전적이 있었다. 외관으로는 멀쩡했기 때문에 헤베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 직전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테이든이 필사의 자해를 하면서 헤베를 붙잡아 놓은 덕에 모두가 목격했다. 가슴을 부여잡은 채 식은땀 흘리는 전 사령관을.

“일단 가져다 놓긴 해야지.”

파르테가 진에게 연구일지를 건넸다. 진은 접힌 부분을 꾹꾹 눌러 펼쳤다.

“공작이 오늘 밤 모이자더군요. 헤베 님의 ‘이상한 발언’에 대해 말할 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 녀석 말 이상하게 하는 게 한두 번은 아닌데… 알았어. 전달해둘게.”

“헤베는 테이든이랑 같이 있나? 둘이 지금 뭐 하고?”

“…….”

잠깐 망설인 진이 대답했다.

“연날리기합니다.”

연애라고는 곧 죽어도 말하기 싫었다.

***

황제는 테이든의 휴가서를 받고 한참 한숨 내쉬었지만 결국 허가를 내렸는데, 단, 예정된 일정 몇 가지만은 해야만 했다. 대외 국빈들과 함께 하는 일정이었기에 테이든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사람한테 일을 시키다니….”

헤베의 입에서 절대로 흘러나올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테이든은 기분이 무척 좋아서 헤베를 끌어안았다.

“헤베도 같이 갈래요?”

“여기서 기다릴게. 잘 다녀와.”

“오늘은 신전에 다녀온다고 했죠.”

“응.”

테이든이 헤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 손길은 옆 머리칼을 지나 귓바퀴, 턱, 뺨으로 내려왔지만 손길에 익숙해진 헤베는 만져지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안 갔으면 좋겠는데, 굳이 신전까지 가서 기도드리는 건 다 이유가 있겠죠?”

“그렇지.”

헤베는 헤게르미에게 직접 듣고 싶은 말이 있고, 교류와 소통을 위해서는 신전에 가야만 했다. 신전에 가서 기도를 드려야 헤게르미와 강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만약 신전에 방문하지 않더라도 헤게르미와 연결될 방법이 있다면 사람들은 전쟁 중 굳이 목숨을 걸어가며 신전을 건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도 헤게르미에게 드릴 말씀이 있는데, 헤베가 대신 전해줄래요?”

“그래, 뭔데?”

“우리 사이를 이간질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요.”

순순히 대답하던 헤베가 잠시 이해하려는 듯 눈을 깜빡, 깜빡했다.

“뭐?”

동그란 갈색 눈이 테이든을 향했다. 테이든은 빙긋 웃었다.

“헤베한테 제 짝사랑을 알려준 사람 말이에요.”

“내, 내가 눈치챘는데.”

“그럴 리가. 당신 혼자서는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다정다감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손길에 헤베는 뒤늦게 반응했다.

“너 지금 나 둔하다고 깐 거지?”

“오, 이 정도는 아네요.”

“너 내 전 직업이 뭔지 몰라? 눈치 없었으면 전쟁터에서 이미 죽었어.”

“단순히 눈치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천성이 느긋하고,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천하태평하기 때문에 내가 당신의 발목을 분지르고 손목을 묶어 감금한다고 해도 첫날만 심각하고 곧 느긋해질걸요.”

헤베는 너무 충격받아 아무 말도 못 했다. 수위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었다.

발목을 분지르고 손목을 묶어 감금한다니, 어떻게 그런 폭력적인 말을 할 수 있어?

폭풍 속 촛불처럼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테이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진짜로 저지른다는 게 아니라….”

“얼마 전에 부러뜨리려고 했잖아….”

“결국 안 부러뜨렸잖아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조심해줘. 너도 알다시피 심장이 안 좋아서.”

“…네.”

테이든은 창백한 뺨을 감싼 채 사과의 의미라며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이래서 태평하다 한 것이다.

아픈 걸 죽어라 숨기던 사람이 들키고 나니 그걸로 협박해오지 않는가.

그의 연인은 아주 여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너무 강했다. 고작 이 정도 수위 발언으로 크게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서, 막상 그 상황에 닥치면 하루 만에 적응할 것이다. 다루기도 소유하기도 어려운 사람이다.

테이든은 헤베의 보드라운 살결 이곳저곳을 만지면서 살살 달랬다.

“제 말은, 헤베는 언젠가, 삼백 년 정도 지나면 제가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겠지만.”

“이게 진짜.”

“그 사실을 좀 더 일찍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는 거죠. 그 사람은 저랑 당신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했잖아요. 제 연적일지도 모르니 알아야겠어요. 헤게르미는 절 아끼시니까 알려주지 않을까요?”

“…….”

헤베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찔린 듯 시선을 피하는 모습은 아주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저 대신 물어봐 주세요.”

“음….”

대답도 시원치 않았다.

“딱히 이간질이라기보다는 다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러신 걸 거야.”

“질투 나니까 편들어주지 마세요.”

“다 너를 위해서….”

“정말 귀엽네.”

테이든이 변명 가득한 헤베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이미 입술을 제외한 모든 신체에 입맞춤 당했다는 사실은 오로지 헤베 혼자만 몰랐다.

“게다가 그 사람이 당신에게 할렘가의 마약 굴을 알려주기까지 했죠. 정말이지 용서할 수 없어요.”

“아, 아니야. 그곳은 진짜로 내가 알아냈어.”

“어떻게요?”

“골목을 헤매다가 찾았어. 너무 아파서 술로는 안 되니까 마약이면 될까 싶어서….”

“…….”

테이든의 눈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하지만 다시 코끝에 입술이 다가오는 바람에 헤베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랬군요. 대체 언제 그랬을까. 전혀 몰랐네요.”

목소리 또한 무척 부드러웠기 때문에 헤베는 안심하고 테이든의 손길에 기댔다.

때맞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려왔다.

-테이든 공작님.

“네, 말씀하세요.”

이미 기척을 느꼈던 테이든은 헤베를 끌어안은 채 대답했다.

시종은 귀빈들이 모였으니 이만 와 달라는 황제의 ‘부탁’을 전했다.

“곧 가겠습니다.”

테이든은 대답하면서 헤베의 하얀 미간에 다시금 입을 맞추고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럼 저는 일하러 다녀올게요.”

“왜 이렇게 속삭이면서 말해.”

간지러웠는지 헤베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체온이 조금 높았고, 심장 박동이 거세졌다.

“밖에 시종이 있으니까. 우리 사귀는 거 들키면 안 되잖아요.”

이미 성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 그렇지 참.”

헤베가 덩달아 조그맣게 속닥였다.

“얼른 가 봐. 지각하면 안 되지.”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이렇게 순진무구한 그를 세뇌해 멀어지게 하려 한 자는 대체 누구인가. 헤베는 대체 언제 술을 마셨고, 대체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골목을 헤맸나. 그를 잠식한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남자의 눈빛은 연인을 끌어안고 있다기에는 무척이나 어둡고 서늘했다.

***

밤이 되어 헤베는 신전을 찾았다.

벌써 세 번째로 흑마법사를 맞이한 신전의 신관들은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간식과 차까지 준비해놓았다. 헤베는 차를 홀짝이면서 신께 기도를 드린 뒤 성에 돌아왔다.

그날 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헤베가 겨우 잠들고 신의 대리자가 꿈에 나타났다.

대리자는 손바닥 위에서 퉁, 퉁 뛰었다.

-축하해요. 사귄 지 19일째네요.

“20일째인데요.”

-하, 날짜까지 세요?

“안 셉니다.”

헤베가 날짜를 다 세는 건 아니었다. 그의 남자친구가 입술을 뚫어지게 보면서 “이제 13일 남았네요.”, “이제 11일 남았네요.” 하니 모를 수가 없었다.

-아주 알콩달콩 연애질이나 하지 저는 왜 불렀어요?

신의 대리자는 왜인지 몹시 삐져 있었다. 하얀 밤송이 같았다.

“제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보려고요.”

-길어야 4개월이에요. 지금처럼 행동하면 3개월 후면 죽고요.

“아니, 왜 그렇게 줄었어요?”

-당신이 마법을 얼마나 남용했는지 나열해줄까요?

“…….”

할 말이 없어진 헤베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때까지 헤게르미와 직접 대화할 기회는 없습니까?”

-그분은 지치셨습니다. 좀 더 쉬어야 해요. 멸망을 앞두고 물어볼 게 그거뿐이에요?

대리자가 뾰족뾰족 화가 난 이유가 밝혀졌다.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혐오하고 증오하게 만들어도 부족할 판에 오히려 연애나 하니 답답한 것이다.

“걱정 마세요. 죽으면서 테이든도 데려갈 테니까.”

-아직도 모르겠나요. 그자는 절대로 동반 자살을 허락하지 않아요. 당신과 살아서 하고 싶은 게 무척 많은 탐욕스러운 인간이니까.

“테이든을 짐승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니까요.”

-자기 남자친구라고 편드는 거예요?

하얀 밤송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헤베는 한숨을 쉬면서 밤송이의 빛 가시들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그만 싸워요. 어떤 수를 써서든 테이든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게 할게요. 테이든이 동반 자살하지 않겠다고 해도… 제가.”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신의 대리자가 봐준다는 듯이 뾰족뾰족한 빛을 조금 둥글게 깎았다.

“그보다 미래의 헤게르미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 중 수상한 점이 있습니다.”

-전 당신이 수상한데요.

“그분은 저를 과거로 돌려보내면서 ‘테이든이 너를 사랑하지 않게 하라’고 말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말은 좀 이상하잖아요.”

헤베는 오늘 테이든의 질문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자꾸 이간질이라고 표현하는데, 가만히 궁리해 보니 이간질이 맞았다.

‘그가 널 사랑하지 않게 해라.’

‘너는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랑이 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기억하거라. 테이든이 널 사랑하지 않게 해야 한다. 오늘 본 참상을 영원히 잊지 말고 되새기면서. 계속해서 그를 관찰하고 의식해라. 알겠느냐?’

그때 헤게르미가 했던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기억했다.

“처음엔 저도 경황이 없어서 단순히 그 말이 세계 평화를 지키라는 말인 줄 알았죠. 하지만 그분은 사랑이 깊어지지 않게 하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입니다.”

-그게 그 뜻이에요. 테이든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세계를 멸망시킨 거니까.

“테이든이 절 사랑하지 않게 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걸 헤게르미가 몰랐을 리 없잖아요.”

헤베는 좀 더 분명히 말했다. 이런 말 하기엔 아직은 부끄럽고 수줍지만, 테이든의 사랑은 너무나 깊고 커다랬다.

-…….

마찬가지로 대리자 또한 그 한계가 없는 사랑만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분인데, 대체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 후 대리자가 물었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였다.

-당신의 가설을 말해보세요.

“제 가설은 일부러 테이든이 상처받게끔 했다는 겁니다. 상처받은 테이든이 무슨 일을 저지르기를 원했다거나.”

-틀렸네요. 그자는 상처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대리자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까지 상황만 봐도 알죠. 당신이 그를 밀어내고 깎아내리는 발언을 할 때마다 그가 조금이라도 상처받던가요?

“네.”

-…….

“너무 상처받던데요.”

헤베가 보는 테이든과 대리자가 보는 테이든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저번 생에서 헤베는 테이든을 여린 소년으로만 여겼다. 이제는 그렇게 여리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다른 이들이 테이든에게 갖는 시선을 쫓아가기에는 아직 멀었다. 아마 영원히 못 따라갈 터였다.

그 음험한 짐승은 헤베 앞에서 본성을 드러내지 않을 테니까.

-헤게르미께서는 그자를 분노하게 만들려고 한 것 같네요.

대리자는 합의점으로 ‘상처’ 대신 ‘분노’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현재 비센티아에서 가장 강한 초월자를 분노하게 만들어서 무언가를 일으키려고 한다면….

세계 멸망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멸망을 피하기 위해 헤베를 과거로 보낸 헤게르미가 그 끔찍한 결과를 의도하진 않았을 것이다. 둘은 다시 고민에 잠겼다.

“헤게르미를 깨울 순 없습니까? 제가 과거로 오는 것까지 다 예상했으니 그것도 아시겠죠.”

-그건… 불가능해요. 이 일은 각자 좀 더 고민해봐요.

헤베는 대리자가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치 없는 그였지만, 극도의 피해망상 덕분에 이런 쪽으로는 밝았다.

-보름 후 다시 신전에 방문하세요.

“보름이나 지나야 답해주겠다고요? 제 수명 이제 3, 4개월 남았다면서요.”

-어차피 지금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니면서.

“…….”

-주변인들한테도 남은 수명 들키기 일보 직전이잖아요. 조심 좀 해요.

“무슨 말이에요. 절대로 모릅니다. 완전 잘 숨기고 있거든요.”

그는 충실한 수하들이 물밑에서 어떤 작업 중인지 전혀 몰랐다. 연구일지를 돌려받고 나서도 다른 이들의 손에 한참 가 있었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왜 자신은 못 찾고 진은 찾느냐만 신기해했다.

“그런데 수명 관련해서는 사실 최근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헤베는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모두에게 남은 수명을 알려줄까 해요.”

해맑은 폭탄선언에 하얀빛이 부르르 떨더니 희미하게 깜박거렸다.

-미쳤어요? 그는 절대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신들을 협박하다가, 당신이 죽고 나면 세계를 멸망시키겠죠.

“왜 이렇게 극단적이세요? 테이든은 말하면 듣는 사람이에요.”

-듣는 척하다가 당신이 죽으면 바로 멸망시킬 사람이라니까요!

대리자가 펄쩍 뛰었다. 헤베가 시끄럽다고 한쪽 귀를 파는 시늉을 하자 대리자는 더욱 크게 날뛰었다.

“수명을 미리 알려주지 않으면 테이든은 마음의 준비를 못 합니다. 그게 더 큰일이잖아요.”

-그가 당신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게 만들어야죠. 인간 중에는 정작 연애를 시작하면 식는 부류도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땐 언제고….

“그런 부류가 아니었나 봐요.”

-정말 무책임하군요!

“헤게르미는 남은 수명을 비밀로 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헤베는 꿈임에도 조금 지쳤다.

“제가 테이든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할 거라고… 예상했을 거예요. 그분은 저도 몰랐던 제 마음을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한 분이니까. 깨워서 물어보시든지요.”

대리자는 부글부글 끓는 물처럼 부르르 흔들렸다. 하지만 더는 헤베를 비난해오지 않았다. 확실히 미래의 헤게르미가 이런 헤베의 행동을 예상했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짧은 만남은 그렇게 의견 통일되지 않은 채 마무리되었다.

꿈에서 깬 헤베는 어두운 방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헤게르미는 테이든이 너를 사랑하지 않게 하라고 말했다. 헤베는 그게 일종의 힌트나 메시지처럼 느꼈다.

전지전능한 창조신, 헤게르미. 모든 것을 예견했을 그분께서 이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을 리 없으니까.

과거로 돌아간 대마법사가 테이든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을.

***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살고 싶다.

과거에는 감히 삶에 대한 소망은 갖지 못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선택한 길이며, 이 선택을 하기까지 헛되이 희생된 수많은 사람을 생각하면 감히 이런 바람을 가질 수 없었다.

헤베는 회귀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한번 죽었으면서 초탈하기는커녕 삶에 대한 미련만 싹 틀 줄은 몰랐다.

사랑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헝클였다.

‘흑마법 때문에 수명이 줄어서 이제 4개월 남았어.’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흑마법을 왜 받아들였냐’고 물으면 답해줄 말이 없어서였다. ‘실드’는 수명보다 더 중요한 비밀이고, 전쟁을 끝낼 방법을 알면서도 망설였다는 부끄러운 사실이 드러나는 건 두렵다.

그러나 이제는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테이든의 4개월이 엉망이 될 거라는 것.

미련하게도 테이든의 자해로 인해 이제야 깨달았다.

혼 상태로 깨어나자마자 테이든과의 추억을 회상했던 것.

내 죽음에 슬퍼하기를 바라면서도 상처받지는 않았으면 했던 것.

마계의 문을 닫는 걸 망설였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

모두 사랑이었고, 신이 그 사실을 말고 계셨다….

사랑하는 사람이 끝없이 암담한 절망에 빠지리라는 걸 아는데 어떻게 말할까. 나는 곧 죽는다고….

‘머리 아파.’

헤베는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대마법사의 연구일지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먕먕. 매애앵.

먕먕이가 이때다 싶어 테이블 위로 길게 누웠다. 하얗고 통통한 배를 보이면서 애교를 피우니 넘어가지 않을 길이 없다. 말랑말랑한 배를 주물럭거리자 먕먕이가 기분이 좋은지 그르릉 소리를 냈다.

‘먕먕이 애교 보는 것도 이제 4개월 남았구나.’

다시 머리가 아파진 헤베는 진통제 약병을 꺼냈다. 진과 마우가 새로 제작해온 것이었다. 둘은 헤베가 만들었던 약병을 강제로 빼앗고 이것을 안겼다.

‘그건 몸에 안 좋은 성분이 너무 많습니다. 앞으로 이걸 드십시오. 진통 효과는 똑같습니다.’

확실히 어떤 전문 의원에게 자문을 구했는지 진통 효과가 뛰어났다.

습관적으로 약병을 탈탈 털던 헤베가 문득 멈췄다. 그는 다시 개수를 헤아려 딱 두 개만 손바닥 위에 남겼다. 본래 집히는 대로 삼켰었는데 테이든이 남은 알약 수를 날마다 점검하는 걸 보고 과다복용은 자제하기로 했다.

헤베는 물도 없이 약을 꿀꺽 삼켰다.

‘왜 테이든이 날 사랑하지 않게 하라고 하신 걸까.’

헤게르미와 직접 대화를 해야 풀릴 듯한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헤베는 그 점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그분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대로 둔다면 테이든이 헤베가 죽은 뒤 세상을 멸망시킬 테니까.

“테이든….”

-애웅.

먕먕이가 짧게 울고는 다시 귀여운 짓을 했다. 헤베는 다시 먕먕이의 복슬복슬한 배에 집중했다. 긴 꼬리가 헤베의 손목을 감아왔다.

한숨 자고 싶었지만, 연구실에는 침대가 없다. 침대를 두면 이곳에서 나가지 않을 것을 우려해 테이든이 놓지 못하게 했다.

테이든은 이제 공식 백수였다. 둘의 보금자리는 기후, 분위기, 거리 등 모든 면에서 만족할 만한 곳에 짓기로 하고, 테이든이 직접 찾으러 나섰다.

체력이 극도로 약해진 헤베는 함께 떠나지 않았다. 안락한 방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테이든이 보금자리를 꾸며놓으면, 세상에서 가장 푹신한 마차에 누워서 두 손 가볍게 이사할 예정이었다.

요즘 테이든은 대외적으로 우울증을 이유로 휴가를 청해놓고서 항상 웃는 얼굴로 다녔다. 그 밝고 즐거운 분위기에 황성 사람들도 영웅의 게으름을 탓하기는커녕 진즉 휴가를 내어드렸어야 했던 거 아니냐고 웃었다. 그 유쾌한 분위기에 헤베는 다시 다짐했다.

대리자에게는 수틀리면 테이든과 동반 자살하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전혀 진심이 아니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영웅을 허무하게 죽게 할 수는 없다.

테이든은 세상의 평화에 꼭 필요한 존재이고, 세상의 평화를 실컷 누릴 자격이 있으니까.

‘그렇게 즐거워하는데.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밝히면….’

같이 살 생각이 신이 나서 싱글벙글 웃고 다니는 청년은 사라질 것이다. 남은 4개월은 이별하는 과정이 될 뿐이다. 배신감, 분노와 슬픔은 시간이 적응시켜주겠지만 분명 4개월보다는 길겠지.

지금 와서는 연애를 시작한 것도 후회됐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곧 죽을 사람이… 희망 고문도 아니고.

“윽.”

헤베는 다시금 통증을 느꼈다. 이번엔 머리도 아프고 심장도 지끈거렸다.

-먕.

먕먕이가 귀를 쫑긋 세우고는 몸을 일으켰다. 먕먕이는 다시금 진통제를 꺼내는 헤베의 손등을 열심히 핥았다.

-헤베 님.

“으악악!”

그때 누군가 갑자기 헤베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 놀란 헤베가 의자에 앉은 채 뒤로 엎어졌다.

쿠당탕, 의자 넘어지는 요란한 소리에 헤베를 부른 이가 문을 벌컥 열었다.

“헤베 님!”

진은 바닥에 넘어진 헤베를 보고 급히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응… 난 괜찮은데.”

“어디 다치셨습니까.”

진이 헤베의 마른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상체를 부축했다.

-우웅.

먕먕이가 헤베의 등 뒤에서 쏙 모습을 드러냈다.

딱딱한 바닥과 부딪치기 전 재빨리 헤베와 바닥 사이로 들어간 먕먕이가 쿠션이 된 덕분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

“먕먕아, 괜찮아?”

마물인 먕먕이는 이 정도로는 타격도 없었다. 그래도 걱정된 헤베가 묻자 먕먕이는 먕, 귀엽게 대답하고서는 진을 향해 수직으로 꼬리를 세웠다.

-애우웅. 우웅, 애애애앵.

“놀랐어, 먕먕아.”

-우우웅. 우오옹. 애오옹, 무웅우웅.

날카로운 잔소리가 이어졌다. 먕먕이도 매우 놀랐는지 발톱까지 꺼낸 상태였다. 헤베는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먕먕이를 품에 안았다. 꼬리가 딱딱했다.

진은 작게 한숨 쉬었다.

“제가 좀 더 조용히 노크했어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너무 놀라서 넘어진 거야.”

양심에 찔리는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너무 놀랐다.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안 된다.

진은 헤베를 의자에 앉힌 뒤 다친 곳이 있는지 살폈다. 전 사령관은 부상 숨기기가 특기였기 때문에 꼼꼼히 봐야만 했다.

“다친 곳이 있는지 봐야겠습니다.”

“없다니까, 좀!”

검은 핏줄을 보이기 싫은 헤베는 끝까지 옷자락 하나 들추지 못하게 했다.

진의 미간에 생긴 주름이 진해졌다.

‘테이든 공작에게 말해야겠군.’

결국 뒷일은 한창 연애 중인 자에게 맡기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이제 여름임에도 긴 소매에 치렁치렁한 의상을 고수한 흑마법사에게 진은 손대지 않겠다는 의미로 양손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갈색 눈에 깃든 경계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절대로 몸수색 당하지 않으려고 몸을 둥글게 말고 구석으로 처박힌 조그만 대마법사는 꼭 고슴도치 같았다.

“용건이나 말해. 무슨 일이야?”

“궁사께서 부르십니다.”

“루니스가?”

궁사가 된 루니스는 아주 독립적으로 일했다. 자기 일만으로도 복잡한 헤베는 인수인계도 대충 해주고 말았는데, 그 뒤에도 헤베를 찾으러 오거나 부르지 않았다.

“헤베 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사실 헤베는 궁사의 직무에 대해 세세히 알지 못했다.

그는 전쟁 중인 세계의 궁사였지 전쟁이 끝난 평화로운 세계의 궁사가 아니었으므로.

열아홉 살, 궁사가 되었을 때부터 스물여섯인 올해 궁사직을 물러나기까지. 헤베가 한 일이라고는 전쟁터에 나가 마물을 학살하고 동료들의 시체를 묻는 일 말고는 없었다. 중간에 했던 연구들은 모두 마물을 효율적으로 죽이기 위해 공격 마법과 무기를 제작하는 것뿐이며 ‘평화로운’ 연구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 흑마법사가 되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가 흑마법사가 되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것이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저 타락자는 자신의 성급한 결정을 후회하고 있겠군. 꼴 좋다.’

그러한 비아냥을 받는 자가 이제 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연구를 한다고 해도 믿어줄 이는 아무도 없다.

때문에 궁사로 있었을 때도 부궁사들만 참석해 회의를 진행했고, 아무도 헤베를 찾지 않았다.

황제가 아닌 이가 자신을 찾는 건 그가 흑마법사가 된 후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래?”

방금 전까지 진을 경계하던 헤베가 금방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다.

오랜만에 생기가 도는 갈색 눈을 보며 진은 조금 안쓰러운 어조로 말했다.

“흑마법사와 관련된 일이라고 합니다.”

***

헤베는 예민한 고슴도치처럼 한껏 가시를 세웠다. 흑마법사의 상징인 새카만 로브를 두르고 나타난 게 그 증거였다. 한자리에 모인 부궁사들은 진짜 흑마법사처럼 등장한 헤베를 보고 움찔, 놀랐으나 루니스 율리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옷차림이 화려하시군요. 이 여름에 덥지 않으십니까?”

“전혀 안 더워.”

헤베가 회의실의 빈자리로 향했다. 원형 테이블 정중앙석이었다. 진이 의자를 빼주고는, 자신은 뒤에 서서 대기했다.

-먕.

헤베의 앞에는 테이든이 붙여두고 간 든든한 호위 마물이 뛰어올랐다. 먕먕이는 배부른 아기 사자처럼 한가롭게 하품하면서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을 훑었다.

요정족과 마물은 누구든 이 사람에게 험하게 대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를 노골적으로 뿜어댔다.

“무슨 일로 불렀는데? 나는 사악한 흑마법사라 순순히 도와주진 않을 거야.”

‘흑마법사’를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피해망상이 다시 하늘까지 솟구친 헤베는 먕먕이와 진을 제외한 모두를 경계하는 중이었다.

한껏 오만하게 팔짱 낀 흑마법사를 향해 루니스가 말했다.

“제3 마법사의 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근처 마을의 어떤 의원이 흑마법사로 보이는 자를 발견했다더군요. 아직 추측일 뿐이지만 헤베 님 외에도 흑마법사가 된 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뭐? 어떤 미친 인간이?”

헤베가 테이블을 쾅! 치며 벌떡 일어났다. 진과 먕먕이와 루니스의 시선이 헤베의 주먹으로 향했다. 소리가 큰 걸 보아 온 힘을 다한 듯한데, 생채기가 났을 것 같았다.

“흑마법이 얼마나 악하고 위험한데. 비센티아가 흑마법사 때문에 삼백 년간 어떤 고통을 겪었는데 그걸 반복하겠다는 거야?”

심지어 너무 급히 일어난 바람에 현기증이 나는지 이마를 짚었다.

-우웅!

먕먕이가 벌떡 일어났다. 루니스도 움찔거렸다.

진이 재빨리 뒤에서 부축했다.

“헤베 님, 앉으십시오. 천천히.”

“너무 배신감 들어. 죽을 둥 말 둥 힘들게 마물들 물리쳤더니 왜 흑마법사가 되냐고.”

“그러게 말입니다. 천천히 앉으십시오.”

“붙잡아서 본보기로 처형해야 돼!”

“천천히.”

흥분한 헤베가 부축받는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다시 앉았다. 진은 미지근한 차(따로 준비했다)를 따라줬다. 먕먕이는 찻잔 옆에서 통통한 배와 분홍 발바닥을 보이며 마음껏 애교를 부렸다. 헤베는 적당한 온도의 차와 애완마물의 애교로 심기를 다스렸다.

그 모습을 보는 이들은 굉장히 불편하고 미묘한 표정이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 변절한 흑마법사가 뭐라는 거야. 그리고 왜 저렇게 과보호야….

“진정하셨습니까.”

“그래, 얘기 계속해.”

“제3 탑주의 말로는-”

“설마 내가 흑마법사가 됐다고 따라 하는 놈들이 생긴 건 아니겠지? 다 나 때문에….”

헤베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다리도 덜덜 떨었다. 모인 이들로서는 ‘당연하지 않느냐’라고 반문하고 싶었다.

헤베 뮨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마법사였다.

비난 여론이 강하니 숨어서 드러내지 않지만, 헤베를 존경하는 자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특히 선악 개념이 아직 제대로 잡히지 않은 어린 마법사 지망생들은 충분히 헤베를 따라 흑마법을 택할 수 있었다. 다행인 점은 흑마법에 대한 연구는 완전히 맥이 끊겨서 헤베 같은 천재가 아니라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아닐 겁니다.”

짧은 텀을 두고 루니스가 부정해왔다.

“헤베 님은 자신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을 과신하시는군요. 그자가 우연히 흑마법에 관심을 가졌을 뿐 헤베 님과는 상관없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어린애들은 전쟁놀이할 때 흑마법사를 맡으려고 한다면서.”

“대체 그건 누가 알려줬습니까?”

“우연히 들었어. 진짜야? 역시 나 때문에….”

“아닙니다. 그 소문은 유언비어이고 어린애들은 흑마법사를 싫어합니다. 또한 세상 모두가 당신을 존경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설마 제 말 못 믿으십니까? 저는 당신이 직접 궁사로 앉힌 사람입니다.”

“루니스, 네 말이라면 믿지. 나 때문이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다….”

헤베가 안도했다.

세 명의 부궁사는 어이없어하며 루니스를 쳐다봤다. 시선을 느꼈을 아름다운 궁사는 차분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본인은 부정하지만 역시 루니스 율리 또한 헤베에게 미쳐있는 ‘뮨의 친위대’ 중 하나인 것이다….

“흑마법사로 추측되는 그 자는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남성이라고 합니다. 탑주가 보고서를 보내왔으니 읽으면서 들으십시오.”

루니스가 헤베에게 마력이 있는 자만이 읽도록 가공 처리된 보고서를 넘겼다.

“한 의원이 자신의 의약실에 못 보던 혈액 시험관이 있어 분석했는데, 흑마법사로 의심되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즉시 마법사의 탑으로 가져갔고, 탑의 마법사들이 분석한 결과도 동일했습니다. 의원 말로는 혈액을 자신이 왜 가지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더군요. 마을의 다른 이들은 흑마법사로 추측되는 자를 만났던 것도, 생김새도 기억하지만 이상하게 의원만이 기억을 못 한다고 합니다. 어떤 흑마법의 저주일지 모르니 일단 탑에서 정화하게 했습니다.”

“잠깐.”

헤베가 손을 들어 설명을 멈추게 했다.

시선은 보고서의 한 단어에 못 박혀 있었다.

‘욘로 마을.’

헤베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 빵집이 있던 마을 의원이 피를 뽑아 갔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왜 의원의 기억만 지워놓았을까? 정말 멍청했다. 수명을 아끼고 싶은 생각에 눈이 멀었다.

“이 사실은 황제께서도 알고 계셔?”

“예.”

이제 와 입을 막기도 너무 늦었다. 낯빛이 변한 헤베를 루니스가 유심히 바라봤다.

“뭔가 알고 계십니까?”

“아니! 난, 난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겠고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여.”

헤베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너무나 무언가 아는 사람 같은 행동이었다.

“헤베 님, 차 마시십시오.”

진이 입술 깨물지 말란 소리 대신에 차를 따라줬다. 헤베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찰랑, 찰랑. 찻잔 속 물이 요동쳤다.

“제가 그자의 피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네가? 갖고 있다고?”

“그 피를 헤베 님의 혈액과 비교하고자 합니다.”

“하! 어이없군.”

헤베가 쾅! 테이블을 치며 일어났다. 주먹이 몹시 아팠다. 먕먕이가 매앵 작게 울고는 헤베의 주먹을 할짝거렸다. 진이 찻잔을 멀리 치우고, 연고를 꺼냈다.

“지, 지금 내가 욘로 마을에 나타나 의원의 기억을 지우고 사라진 잔인한 흑마법사라고 의심하는 거야?”

“그건 아니었습니다만.”

“그럼 왜 내 피랑 비교해.”

“당신은 우리가 아는 ‘확실한’ 흑마법사니까.”

잔뜩 긴장한 헤베와 달리 루니스는 냉정하고 침착했다.

“비센티아는 흑마법 연구를 지양해왔습니다. 삼백 년 전, 일부 마법사들이 연구를 시작하려 했지만, 마계와의 전쟁이 발발한 후 모든 기록이 불태워졌죠. 때문에 저희는 흑마법을 받아들인 자의 혈액과 신체가 어떻게 변하는지 모릅니다. 우선은 이 마을에 나타난 이가 흑마법사가 맞는지 여부를 알아야 합니다.”

루니스의 설명에 헤베가 생각에 잠겼다.

“…….”

루니스와 진의 시선이 헤베가 굳게 쥔 주먹으로 향했다. 떨림은 멎었지만 피부에 생채기가 났다.

본래 상처가 잘 나는 약한 피부였다. 헤베는 노출되는 부위에 문제가 생기면 곧장 마법으로 없앴다. 치유 마법이 아니므로 아픔은 그대로 있되 흉터만 사라지거나 피만 틀어막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겉보기로는 티가 안 나고, 몸뚱이의 둔한 주인도 자주 자신이 다쳤다는 사실을 잊기 때문에 친위대는 눈에 불을 켜고 헤베의 온몸 구석구석을 살피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헤베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저런 생채기는 바로 사라지게 했어야 됐는데….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평소에는 대화도 하지 않는 이들이었으나 지금은 같은 추측을 했다.

파르테의 말이 맞다.

헤베 뮨은 마법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좀 이상해. 그럼 단지 혈액만으로 흑마법사라고 추측했다는 거야?”

자신을 대상으로 어떤 시선과 추측이 오가는지 전혀 모르는 헤베는 여전히 수상쩍어했다.

“어떻게 알고? 대체 무슨 근거로… 설마 피가 검은색이었어?”

그때 의원이 뽑은 피는 붉었다. 만약 검은색이었다면 혈액을 남겨놓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나중에 검에 변한 건가 싶어서 물었으나 루니스가 고개를 저었다.

“피는 붉었습니다. 다만….”

하얀 미간에 골이 파였다. 바다를 담아놓은 듯한 푸른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개인적으로는 그자의 피와 헤베 님의 피가 같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자의 피는… 마물의 피와 성분이 거의 동일했으니까요.”

***

채혈은 하루 금식하여 불순물을 제거한 뒤 하기로 했다. 몇몇은 어차피 흑마법사의 피이니 불순물을 제거할 시간은 없어도 된다며 바로 뽑자고 주장했지만, 진이 “자신이 없을 때 헤베 님의 살결을 어루만지며 날카로운 바늘을 찔러넣었다는 걸 알면 ‘그분’이 크게 분노할 텐데 괜찮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깨갱 꼬리를 말았다.

헤베로서는 다행이었다. 몸 상태를 테이든이 아닌 사람에게 가장 먼저 밝히고 싶지 않았다.

이미 욘로 마을 의원이 알긴 하지만….

그 노인은 모르는 혈액이 있으면 술김에 뽑았구나 하고 버리면 될 것을 왜 분석한단 말인가. 그렇게 학구열 높은 줄 알았다면 피를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아…….”

진이 찾아놓은 연구일지를 탐독하던 헤베가 한숨을 내쉬었다. 먕먕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테이블 위로 올라와 옆에 발라당 엎드렸다. 언젠가부터 먕먕이는 헤베에게 주의를 기울이다가 뭔가 우울해 보이면 바로 동그란 배를 드러내며 애교를 부렸다. 그러나 헤베는 먕먕이를 한번 쓰다듬어 주지도 않고 옆으로 치우고는 다시 일지를 읽어나갔다.

흑마법, 마계, 마물.

본래도 금기시되던 주제는 삼백 년의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헤베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반드시 흑마법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10대 초반부터 십 년을 넘게 몰래 연구한 결과 마계의 출입구에 대해 알아냈다. 연구일지에는 마계의 출입구와 실드, 흑혈화 현상, 중화제 등 모든 것을 기록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일지를 불태워버릴까 고민하기도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 자신이 죽은 뒤 누군가 일지에 걸린 마법을 해제해 기록을 볼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나중에는 일지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어차피 현시점에서는 봉인을 풀 능력이 있는 자도 없다고 생각했고, 망나니짓을 하고 약물에 빠져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내가 너무 과소평가했어.’

헤베는 사람들이 실드의 존재를 깨달으려면 수백 년은 흘러야 할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헤게르미가 보여준 끔찍한 풍경 속에서 실드는 없어졌고 마계의 출입구는 활짝 열려있었다. 헤베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회귀 전 내가 죽고 나서 누군가 일지의 봉인을 풀었던 거야.’

신의 말에 따르면 친위대는 죽은 헤베를 살려내기 위해 방법을 찾아 헤맸다고 한다. 그러다가 연구일지에도 닿았을 것이다. 그들은 헤베의 예상과 다르게 일지에 걸어놓은 봉인 마법을 해제하는데 성공했고, 헤베가 흑마법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이유와 죽게 된 원인을 알게 됐다.

테이든은 사랑하는 이를 죽게 만든 원인을 알아냈지만 되살려낼 방법은 끝내 찾지 못했다. 분노한 테이든은 그렇게 실드를 없애버린 것이다….

봉인을 푼 이는 아마 루니스였을 것이다. 회귀 전 헤베는 루니스가 그렇게 뛰어난 학자인 줄 몰랐다. 그러나 복원 작업을 함께한 이제는 알았다.

“하아.”

헤베가 두 번째로 한숨을 내쉬었다. 먕먕이가 귀를 쫑긋 세우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나 헤베는 이번에도 먕먕이를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하얀 팔을 들여다봤다. 마르고 앙상한 하얀 팔. 아니, 이걸 하얗다고 할 수 있을까. 검은 핏줄이 가로지르는 팔뚝은 사람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자의 피는 마물의 피와 성분이 거의 동일했으니까요.’

루니스의 말을 들었을 때는 미처 생각지 못한 의문이 생겼다.

몸속에서는 까맣던 피가 왜 뽑고 나니까 붉게 변했을까. 분명히 검은 핏줄에 바늘을 꽂았고 직접 피를 뽑았다. 왜 그때는 이런 의구심을 갖지 않았는지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헤베는 붉은 핏줄이 검게 변하는 현상을 ‘마물화’와 ‘흑혈화’ 중에서 고민하다가 흑혈화라고 이름 붙였다. 마물과는 다른 현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마물의 피는 살아 있는 마물의 몸 안에서는 붉고, 죽고 나면 검게 변한다. 헤베의 몸속에 흐르는 피는 마물의 피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성분은 마물과 거의 동일하다니.

“마물화라고 이름 붙여야 했을까.”

-매웅.

먕먕이는 한숨이나 혼잣말에도 곧바로 대답하며 헤베의 손목에 보드라운 털을 비벼왔다. 마음을 치유해주는 반려동물 역할에 충실한 먕먕이에게 헤베도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일지를 계속 읽는다고 새로운 내용을 발견할 것 같지도 않았고.

“일단은… 없애야겠지.”

헤베는 촛대를 가져와 일지를 태웠다. 십수 년의 연구 결과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기록과 함께 남긴 고통과 외로움도 모두.

이 연구는 비센티아를 구했다.

나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허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헤베는 먕먕이를 안은 채 침대로 뛰어들었다.

“아….”

뭐 얼마나 거칠게 움직였다고 눈앞이 핑 돌았다. 헤베가 습관적으로 가슴 위에 올려놓자 먕먕이는 자기가 알아서 침대 위로 내려가 얼굴에 몸뚱이를 붙였다. 헤베는 배려받았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따끈따끈하고 말랑거리는 마물을 조물조물했다.

“먕먕아, 말해봐.”

-먀앙.

“내가 마물이라면 네 말을 알아들어야 하잖아.”

-먕.

“넌 내 말 알아들어?”

-먀웅.

먕먕이 말 알아듣기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

테이든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물의 왕은 처음부터 피가 붉지 않고, 까만색이었지요. 죽은 뒤에는 오히려 붉게 변했고요.’

그 사실을 듣고 잠깐이었지만 연구욕이 치솟았다. 회귀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니까.

만약 그날 <마법의 역사> 자필 초판본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면, 잠시 시간이 남아 샛길로 빠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몰랐을 것이다.

‘이건 헤게르미께서 안배하신 운명일까.’

마물의 왕.

비센티아의 존폐를 위협하던 적을 죽일 때 헤베는 그곳에 없었다. 흑마법사로 변질한 이유를 심문당하며 황성에 갇혀 있었다. 만약 자신도 그 장소에 있었다면 피 색깔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연구에 착수했을 것이다. 신성한 황성에서 흑마법을 연구할 수 없으니 아주 먼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헤베는 손목을 들여 보였다. 어쩌면 수명을 늘릴 실마리가 몸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늦었다. 수명은 3, 4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분석하고 실험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피를 뽑으면 안 돼.’

채혈은 내일로 미뤄졌지만 여전히 초조했다.

‘마물의 피와 동일하다는 게 밝혀지면 난 쫓겨나겠지.’

어차피 나갈 생각이었으니 성에서 쫓겨나기만 하면 다행이지만, 마물 취급당하며 처형을 명할 수도 있다.

‘테이든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고.’

성내의 모든 병력을 합친 것보다 강한 사람이 연인이므로 쉽게 처형당하진 않을 것이다. 또한 헤베는 모르지만, 헤베에게 처형을 명한다면 들고 일어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감옥에 가두려나.’

헤베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감옥은 싫기에 가두려고 한다면 수명을 좀 잃더라도 순간이동으로 떠나버리는 게 나았다.

춥고 더러운 곳에서의 기억을 떠올린 헤베는 푹신푹신한 침대에 파고들며 포근한 이불을 덮었다.

“먕먕아, 루니스는 생각보다 성격이 무르네. 내가 궁사라면 마물로 추정되는 흑마법사는 바로 감옥에 가뒀을 텐데.”

-미양.

자신이라면 이런 좋은 방의 좋은 침실이 아니라 당장 감옥에 가두고 주거지를 수색하라 명했을 것이다. 애초에 ‘흑마법사’라는 존재를 성에 머무르게 두지도 않았고….

새삼 이렇게 고급스러운 방에서 어떤 부족함 없이 잘 지내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모두 테이든의 힘일 것이다. 진도. 그리고….

‘다들 헤베를 좋아해요. 헤베가 흑마법사가 되었다는 이유로 꺾어질 만큼 얄팍한 감정이 아니지요. 모두 당신을 지나치게 존경한다고요.’

그게 사실일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고 팔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헤베는 진통제를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헤베 님, 들어가도 될까요?

그때 똑똑, 노크와 함께 아주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에도 놀라버린 헤베는 쿠당탕,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번에는 먕먕이도 여유를 부리느라 쿠션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애웅!

“헤베!”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온 사람은 테이든이었다. 그 뒤로 진과 루니스도 보였다.

“으….”

테이든은 어깨를 감싸 쥔 헤베를 보고 곧장 품에 안아 들었다.

“의원에게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넘어진 건데.”

“너무 강하게 부딪쳤어요. 분명 타박상을 입었을 거예요.”

“고작 멍이잖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난 예전에 뼈도 내놓고 다녔어!”

헤베가 테이든의 가슴팍을 퍽퍽 쳤으나 마치 꽃잎이 부딪치는 듯 아무런 타격감이 없었다. 오히려 테이든은 헤베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 다쳐요.”

소중히 안은 채 바로 문밖에 나서는 테이든을 진이 저지했다.

“의료실에 가시지 않아도 이곳에 구급함이 있습니다. 헤베 님이 자주 다치셔서 구비해놨습니다. 헤베 님도 의원은 불편할 겁니다.”

연장자다운 차분함이었다. 테이든은 눈썹을 찌푸렸지만 품 안에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헤베의 모습에 결국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루니스는 방문 앞 황제가 세워둔 감시병들을 돌아가게 하고, 아무도 방 안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결계를 만들었다.

“커튼을 칠게요.”

테이든은 헤베를 침대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침실 커튼을 내렸다.

“어디에 멍들었는지 봐요. 오른쪽 어깨예요?”

“싫어. 억지로 벗기지 마.”

“제발 제가 힘쓰게 만들지 마세요. 당신이 다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더 벗기면 순간이동해버릴 거야.”

“그럼 전 또 자해하죠.”

“미쳤어?”

“되도록 참고 싶은데 당신이 자꾸 미치게 하네요.”

눈앞에서 침실이 닫힌 진과 루니스는 연인이라기엔 다소 과격한 투닥거림을 들으며 인내해야만 했다.

-먀앙.

먕먕이가 테이블 위로 뛰어오르며 진과 루니스의 주의를 끌었다. 흰 털에 묻는 회색 재를 보고 두 사람은 헤베가 연구일지를 태웠음을 바로 알아챘다.

-삑삑.

-빼애액.

헤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데리고 온 새끼 마물들이 먕먕이를 보고 반가워하며 바구니를 빠져나갔다. 셋은 곧 한데 모여 어울렸다. 먕먕이는 귀찮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고는 삑삑이와 빽빽이의 털을 번갈아 핥았다. 하얀 털이 방 안에 휘날렸다.

***

테이든과 헤베의 투닥거림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 진과 루니스도 함께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갔다. 사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추궁이었다.

“거짓말할 생각 마세요.”

테이든은 헤베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양팔로 끌어안은 채 위협했다.

“욘로 마을에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이가 나타난 날짜와 당신이 갑자기 사라져서 심장 떨어지게 한 날짜가 동일해요. 마을 주민들도 세상에서 본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증언했고요.”

“뭐? 아름답다고? 그럼 나 말고도 다른 흑마법사가 있었다는 뜻인데.”

헤베가 심각해졌다.

그 말고도 흑마법사가 존재한다면 큰 문제였다. 어떤 사연으로 흑마법사가 되었든 간에 질이 안 좋은 씨앗은 초기에 짓밟아버려야만 했다.

“그 흑마법사도 내가 방문한 당일에 왔단 말이지? 나와 마주치지 않았다니 운이 좋구나. 우선은 욘로 마을로 돌아가서 그자의 추적을 해야겠어. 진은 초상화를 만들고, 루니스는 다른 지역에도 흑마법 사용 흔적이 있는지 파악해.”

“헤베….”

“방심하면 안 돼. 흑마법은 어지간한 재능 있는 자가 아니라면 몸에 받아들이는 즉시 신체를 죽여버리거든. 고대에는 백 명 중 한 명만 성공했을 정도야. 나 정도 되는 자가 또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랬군요….”

헤베가 자기 입으로 흑마법을 받아들일 때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음을 실토했다.

“일단 욘로 마을로 직접 가봐야겠어.”

헤베가 벌떡 일어났다. 행동력 넘치는 전 사령관을 테이든이 다시 살살 달래며 앉혔다.

“진정하세요. 그날 마을에 방문한 낯선 사람은 헤베 뿐이에요.”

“하지만 용모가 아름다웠다면서. 나 말고도 누군가 있었던 거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치 없는 자가 갈색 눈을 홉뜨면서 경계했다.

헤베를 진정시키기까지는 그 후로 수십 분이 소모되었다. 결국 테이든이 잘못 파악했다고 말하고 나서야 헤베도 다른 흑마법사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도 내 피가 마물과 비슷하게 변했을 줄은 몰랐어. 알았으면 애초에 뽑지도 않았지.”

돌고 돌아 원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긴장 때문에 크게 들썩이는 어깨를 본 진이 테이블 위에서 뒹굴거리는 삑삑이를 헤베의 무릎 위에 올렸다. 먕먕이가 질투심에 맹, 하고 울었지만 헤베의 연약한 무릎이 버티기에는 너무 무거운 먕먕이를 올릴 순 없었다. 대신 먕먕이는 헤베의 발치에서 따뜻한 몸을 비비적거렸다.

-삐익.

헤베는 삑삑이의 보드라운 앞발바닥을 만지작거렸다.

“혈액 성분이 마물과 비슷하다고 해서 나도 마물이 된 건 아니야.”

“저희는 압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르죠. 피에 대해 우리에게 언질만 미리 하셨어도 괜찮았을 겁니다.”

루니스가 혼내듯이 말했다. 욘로 마을 사건이 이미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마을에 방문한 자의 인상착의가 헤베 뮨과 동일하다는 소문까지 퍼져나갔다. 미리 알았다면 사실이 알려지기 전 막을 수 있었다.

“저는 믿지 못하더라도 테이든 공작이나 진 부사령관, 마우 백작 등 당신 주위의 많은 사람 중 한 명에게라도 말할 수 있었잖습니까.”

“말한다고 뭐가 달라져? 오히려 흑혈화 현상이 전염되는 게 아니냐며 경계나 하겠지.”

“터무니없는 말을 하네요.”

테이든이 헤베의 귓바퀴를 살짝 꼬집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믿었어야죠.”

“이젠 믿어.”

“정말 고맙네요.”

테이든의 말투가 몹시 불손했다. 루니스, 진, 테이든 모두 눈초리가 사나웠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가 정작 이쪽을 믿지 못하고 있었으니 배신감과 자조를 느끼는 게 당연했다.

헤베는 테이든을 제외한 이들은 완전히 신뢰하진 않았다. 회귀 전에 멀어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직 마음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테이든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테이든이 위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확실했다. 그러므로 테이든이 믿으라 한다면 믿을 수 있었다.

“황제한테는 내일 내가 직접 말할게. 내 피가 맞다고. 설마 처형하라고 하진 않겠지. 감옥은 싫으니까 너희들이 힘써 줘.”

“그럴 필요 없어요.”

테이든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이미 조치는 취해놨거든요.”

“무슨 조치?”

“황제에게는 제 피를 보냈어요. 헤베의 피라고 하면서요.”

“뭐어?”

이번에도 발딱 일어나는 헤베를 테이든이 또다시 살살 달래며 앉혔다. 헤베의 무릎 위에 있던 삑삑이도 파닥파닥 날아올랐다가 헤베가 앉자 다시 고롱거리며 무릎 위에 엎어졌다.

테이든은 헤베의 갈 곳 잃은 손목을 조심스레 붙잡고 삑삑이의 털 위에 올렸다. 헤베는 본능적으로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으며 테이든을 쳐다봤다.

“너 진짜 요즘 왜 미친 짓 해? 황제를 기만하면 즉결처형이야.”

“기만은 아니죠. 황제께서도 절대 믿지 않을 테니까. 이미 당신이라는 정황이 확실하다고요. 하지만 어쩔 거예요. 우리가 그렇다는데.”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 수 있는 건 일명 ‘뮨의 친위대’라고 불리는 이들이 모두 한 자리씩 꿰찬 권력자들이기 때문인데, 특히 테이든 엔더웨이의 존재가 컸다.

“헤베를 쫓아내기야 하겠지만 상관없죠. 이미 헤베가 좋아할 만한 먼 곳에 집도 봐뒀어요. 뒤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고, 앞에는 잔잔한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곳이에요. 입주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아주 먼 거리니 가면서 여행이나 해요.”

“우리 둘만 사는 거야?”

“네.”

헤베는 호수가 보이는 아름다운 집에서 테이든과 보내는 4개월을 상상했다.

행복하겠지. 하지만 불안할 것이다.

테이든에게 못 할 짓 한다는 생각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테이든이 덧붙였다.

“그 집에서는 우리 둘만 살겠지만 당신 추종자들이 따라오겠죠. 이미 집도 짓고 있을걸요.”

“가까운 마을에 집을 봐뒀습니다. 두 분의 사생활을 위해 근거리에는 짓지 않습니다. 저희는 많아야 한 달에 이틀 정도 방문할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휴가를 낸 게 고작 며칠 전인데 헤베만 모르는 사이 이야기가 척척 진행되었다.

“그전에 헤베의 건강을 확인해야겠어요. 마물과 성분이 비슷하다니, 신체가 평범한 인간을 벗어났다면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평범한 인간에게는 약인 게 헤베에게는 독일 수 있잖아요.”

테이든이 눈짓하자 진이 들고 있던 의료상자를 꺼냈다. 빈 약병과 주사기였다.

“피를 뽑을게요, 헤베. 허락해주세요.”

“…….”

헤베는 진과 루니스, 테이든을 차례차례 쳐다봤다. 걱정이 깃든 검은 눈, 살짝 인상을 쓴 루니스, 그리고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는 테이든까지.

헤베는 몰랐지만 방 밖에서 다른 수하들 또한 조마조마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여차하면 제압할 생각에 무기에 손을 올린 상태였으니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고작 피야.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까지는 드러나진 않겠지.’

고민을 끝낸 헤베가 약병을 들었다.

“내가 뽑을게.”

“역시 스스로 할 줄 알았어요.”

테이든은 놀라지도 않았다.

“잠깐만요. 두 사람은 나가세요.”

헤베의 살결은 손과 목 위 말고는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테이든이 진과 루니스를 내쫓았다.

“왜?”

군말 없이, 조금 착잡한 얼굴로 나가는 둘과 달리 헤베가 고개를 갸웃했다.

“헤베의 몸은 저만 볼 수 있으니까요.”

“…아.”

탁, 문이 닫히고 헤베는 목덜미부터 순식간에 빨개졌다.

“너, 그랬다가 우리 사이가 들키기라도 하면….”

몰랐다 해도 이 발언으로 들켰다.

“우리는 함께 연날리기하는 친밀한 사이라고 말하면 되죠.”

테이든은 생글 웃으며 헤베에게 좀 더 달라붙었다.

헤베는 주사기를 든 채 주저했다.

딱히 맨살을 사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전쟁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마법 중 하나가 상처를 감추는 마법이었다. 잠시간 피를 멎게 하거나 환부를 맨살로 보이게끔 하는 마법. 그렇기에 테이든에게도 당당하게 연애하자 할 수 있었다.

그는 마법을 사용해서 테이든을 속일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 검은 혈관을 보여줄지 고민했다.

…사실 무의미했다.

눈을 감으라거나 나가라고 하지 않은 것으로 고민의 결론은 이미 정해졌으니까.

“보여주기 싫었는데.”

헤베가 왼쪽 팔의 소매를 걷었다.

회귀 전에도 삼 년간 항상 치렁치렁한 옷을 고수하며 피부를 가리고 다녔던 헤베가 처음으로 타인에게 흑혈화 현상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앙상한 팔, 피부를 뒤덮은 검게 변한 혈관을 처음으로 본 테이든의 동공이 커졌다.

헤베는 추운 겨울밤, 서쪽 탑 뒤쪽에서 흑마법을 받아들였다. 수상한 마기를 느낀 테이든과 동료들이 달려왔을 때 헤베는 이미 흑마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때 테이든은 굉장히 분노했다. 그의 분노는 불길이었으며 얼음이었다. 주위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 같은 극렬한 분노와 배신감.

언제나 상냥하게 웃으며 부드러운 모습만을 보여주려 했던 테이든이 처음으로 여유를 잃은 순간은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았다.

그러나 지금, 검게 변한 핏줄을 본 테이든의 모습은 흑마법을 받아들였던 그 날보다 두려웠다.

-먀앙.

어둠보다 깊은 침묵 속에서 먕먕이가 짧게 울었다. 긴장감 속에서 어린 마물이 헤베의 팔에 앞발을 올리고 열심히 핥았다. 평소라면 긴장을 깨뜨렸을 귀여운 모습에도 누구도 웃지 못했다. 그 누구도.

***

황제는 골치가 아팠다. 다름 아닌 ‘뮨의 친위대’ 때문이었다. 마을에서 발견된 혈액의 주인은 헤베 뮨이라고, 모든 정황이 그렇게 가리키는데 헤베 추종자들은 황제에게 그 사실을 모른 척하라 협박해왔다.

더 골치 아픈 건 그 협박에 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막 삼백 년간의 전쟁이 끝난 비센티아는 아직 어지러웠고 탈리 제국의 황권 또한 위태로웠다. 참전 영웅들이 황제보다 훨씬 더 인기 많으니 섣불리 반격할 수 없었다.

베일에 싸인 흑마법사의 피가 ‘마물’과 동일하다는 게 밝혀졌다. 헤베 뮨, 역사상 최고의 대마법사가 마물이 되었다고. 즉결처형을 내려도 부족한 상황인데 그 어떤 신하도 총대 메고 헤베 뮨의 처형을 청하지 않았다.

골치 아픈 와중에 헤베가 성을 나가겠다는 찝찝하고도 반가운 소식을 들고 직접 찾아왔다.

다만 그 옆에는 테이든 엔더웨이도 함께였다.

“꼭 테이든 공작이 함께 가야 하나?”

“어차피 폐하께서 휴가를 수락하신 걸로 아는데요.”

“그렇다고 아예 자리를 비우려는 줄은 몰랐지. 성에 머무르면서 휴식을 취하라는 의미로 수락한 것이다. 아직 불안한 시기에 제국의 수도를 떠나는 건….”

“4개월 후에는 돌려보내겠습니다.”

헤베의 말에 테이든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전 돌아올 생각 없는데요.”

“최대 반년. 그 안에 돌려보내겠다고 헤게르미에게 맹세하죠.”

“헤베!”

삐지다 못해 화가 난 테이든이 헤베의 팔을 붙잡았다. 헤베는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테이든의 머리칼을 톡, 톡 토닥였다. 발광할 것 같던 초월자가 얌전해졌다.

황제도 테이든이 전 궁사를 열렬히 사모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만 저 대마법사는 너무나 둔하고 한편으로는 너무 예민해서 두 사람은 영영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신탁의 영웅이 결국 열렬한 짝사랑을 쟁취해냈다는 소문이 진짜인 모양이었다.

며칠이 지나 헤베가 황성을 떠나는 날이 왔다.

시선이 몰리는 게 싫은 헤베는 캄캄한 밤을 택했고, 아무런 행사 없이 조용히 떠나겠다고 했다. 오늘 이후 헤베가 다시는 황성의 문턱을 밟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한 황제는 몸소 배웅을 나왔다.

연한 갈색 머리, 긴 속눈썹, 맑은 눈동자. 전쟁터에서 마물을 학살한 사령관이라기보다는 온실 속 화초로 자란 귀족가 외아들 같은 모습이었다. 뭐하러 나왔냐고 툴툴대는 헤베에게 황제는 고개를 숙였다.

“헤베 뮨, 그동안 수고했네.”

“뭐, 뭐 하는 겁니까! 황제가 머리를 숙이다니…!”

헤베는 몹시 놀라며 황제를 덥석 붙잡으려 했는데, 그전에 테이든의 손에 의해서 막혔다. 테이든은 폐하께서 하실 말이 있는 것 같다며 부드럽게 달랬다. 그러면서 다소 가까워진 둘의 거리를 슬금슬금 벌렸다.

헤베의 옆에는 테이든이, 그 뒤로는 진과 마우를 비롯한 친위대가 있었다.

황제를 보는 시선이 아니라 경계하는 시선이었다. 저들의 경계심은 다른 이들이 헤베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황제는 앞으로 다시는 보지 못할 타락한 영웅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대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비센티아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 우리는 모두가 그대에게 빚이 있다. 그 헌신과 희생은 절대로 잊지 않겠네. 앞으로 평화롭게 살도록 하고 혹여 부탁할 것이 생긴다면 반드시 말해주게. 후에 우연히라도 만나는 일이 있다면 좋겠군….”

황제는 헤베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았다. 온갖 감정이 교차하고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하지만 황제는 최대한 담백하게 전하고 입을 다물었다. 헤베 또한 담담하게 건강히 지내시라고 답해왔다.

헤베 뮨은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옷으로 꽁꽁 싸맸지만 전보다 앙상해진 몸이었다.

왜 흑마법사가 되었나.

당장 달려가서 어깨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 너무 원망스럽고 야속했다.

전쟁이 끝나면 선대 황제가 해주지 못했던 온갖 치하를 베풀 계획이었는데, 삼백 년간 비센티아를 유린한 마물의 편이 된 이자는 훗날 역사서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할 운명이 되었다. 많은 이가 헤베 뮨의 행보에 실망했다.

하지만 지척에서 봐온 황제로서는 지금도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헤베를 처음 만났을 때 황제는 십대 중반이었다. 당시 궁사는 허리만큼도 오지 않는 작은 어린애를 데리고 와서 전쟁터에 데리고 갈 거라고 말했다.

고작 여덟 살이었다.

여덟 살.

세상 물정 모르는 게 당연했다. 사과 한 알이 얼마인지, 어떻게 물건을 구매하는지, 사람들은 당연히 아는 상식을 배우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마물의 사체를 처리하는지, 어떤 마법을 사용하면 대략 살상이 가능한지는 알아도 사람들과 교류하거나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방법 따위는 몰랐다.

‘이런 어린애를 참전시키겠다면 나는 부궁사를 관두겠소.’

당시 부궁사는 극렬히 반대하다 못해 부궁사직을 그만두고 은거해버렸다. 마물을 가장 잘 아는 자였기에 모두가 곤란해했다. 가차 없이 떠나버리는 뒷모습을 보면서 황태자는 주먹만 쥘 뿐이었다.

‘저 어린애를 참전시킨다면 황태자에서 내려가겠습니다.’

그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어린애는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수많은 마물을 학살한 아이에게 선황과 전 궁사는 칭찬하며 사탕과 빵을 줬고, 아이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전투를 연이어 크게 승리시켰다.

전쟁을 이끄는 자리에 서기엔 지나치게 심약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이가 총사령관이 된 것 또한 전 궁사의 계략이었다. 전쟁터에 확실하게 붙들어놓기 위해 전쟁의 모든 전사자가 헤베 뮨의 책임이 되게 만든 것이다. 인마전쟁에 자기만의 긍지를 가지고 참전한 병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수천수만의 병사보다 헤베 한 명이 더 가치 있었으므로.

탓하고, 비난하고, 끌어내리고. 끊임없는 정서적 학대가 이어졌다.

그 모든 과정에서 황제는 침묵했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 빚을 지고 있어.’

마차에는 헤베와 테이든, 진이 탔고 다른 이들은 말에 올라타 양옆으로 호위하듯이 붙였다. 그들은 어두운 밤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마 그는 마차를 대여하는 방법조차 모르리라. 그렇기에 동료들은 헤베를 더욱 과보호했다. 저들 사이는 너무나 견고하여 타인은 들어갈 틈이 없었다. 저들은 감히 황제에게 충성을 보이지도 않았다. 선황이 고작 여덟 살 아이를 전쟁에 데려다 놨으니 황가에 대한 불신은 당연했다.

황제는 헤베 뮨과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았다. 그래야 세상이 평화롭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그의 마음에 여유가 생겨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날이 오기를.

늦은 밤, 측근이 들어가길 청해왔지만 황제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의 오랜 영웅과 작별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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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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