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10/18)

9장

진과 마우를 비롯한 이들은 황성 밖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따라와 테이든과 헤베가 숙소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성으로 돌아갔다.

피해망상 가득한 흑마법사가 ‘배웅도 나오지 않는구나. 역시 날 미워해서….’라고 생각할까 봐 없는 시간을 쪼개서 따라온 것이었다.

“저희가 집을 꾸밀게요. 여러분은 헤베 님의 피를 분석해주세요.”

“잘 부탁해.”

그들은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황성에 남아 헤베의 피를 분석하고, 한쪽은 헤베과 테이든의 보금자리를 꾸미기로 했다. 결혼식을 미룬 밀리안과 파와이는 다른 신혼집(?)을 꾸며주기 위해 말 위에 올랐다.

헤베는 뒤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자신을 돕는지 전혀 몰랐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고, 헤베는 무척 피곤했다.

“귀찮은데 안 씻고 그냥 잘래.”

“얼른 주무세요. 헤베가 자는 동안 제가 몸을 닦아드릴게요.”

그 말에 잠이 깬 헤베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마을에서 가장 좋은 여관이었지만 욕실은 좁았고, 욕조도 없었다. 이 정도면 무난했다. 전쟁터에 있을 땐 제대로 씻지도 못했으니까.

헤베는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얼마 전까지는 마법으로 말렸는데, 이제는 수명이 아까웠다.

“테이든, 씻어.”

“…네.”

창가에 기대서 밖을 보던 테이든이 눈을 질끈 감고 헤베를 피해 옆으로 걸었다.

어이가 없어진 헤베가 앞을 지나가는 테이든의 팔을 붙잡았다.

“너 뭐 해?”

테이든은 마르고 힘없는 손을 떨쳐내지도 못하고 쭈뼛한 자세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놔주세요. 물기에 젖은 헤베는 너무 자극적이란 말이에요.”

“처음 본 것도 아니면서.”

“그때는 짝사랑 상대였고 지금은 연인이잖아요.”

“그럼 더 당당하게 봐야지.”

“안 돼요. 못 참는단 말이에요. 헤베는 아직 마음의 준비 안 됐잖아요.”

테이든은 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목덜미가 시뻘겠다.

“제발 놓으세요. 그, 그렇게 물에 젖은 야한 모습으로 제 팔을 만지면 저는… 흑.”

마치 자기가 희롱당하는 것처럼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온갖 불결한 상상을 하면서 고작 이런 데에 면역이 없다니. 이 녀석은 순진한 걸까, 음란한 걸까. 헤베가 손을 놓자 테이든은 쏜살같이 욕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앉은 헤베는 테이든이 꺼내둔 잠옷을 입고, 머리를 마저 말렸다.

쏴아아.

“…….”

여관 욕실은 방음도 되지 않았다. 쏟아지는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씻은 테이든이 욕실을 나와서 처음 본 광경은 방금 전 자신처럼 창밖을 바라보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이었다.

“저 다 씻었어요.”

“응.”

바깥을 내려다보는 헤베의 귓가가 불긋불긋했다.

저 둔한 사람이 이런 쪽으로 의식한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하지만 테이든은 웃지 못했다. 다소 편한 차림새의 잠옷이 헤베의 검은 핏줄을 드러냈기 때문에.

신체의 이상 현상을 밝힌 헤베는 그 뒤로 테이든 앞에서 신체 노출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성격은 정말 유별나서… 그토록 피하던 상황이라도 일단 맞닥뜨리고 나면 언제 당황했었냐는 듯 느긋해진다.

자아정체성이 확립되기도 전에 무섭고 두려운 현실을 맞닥뜨려야 했던 헤베는 적응력을 키웠다. 성격은 조금 더 느긋하게 바꾸고, 눈치는 낮췄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아직 머리도 안 말렸어요? 밤엔 날씨가 쌀쌀해요. 제대로 말려야죠.”

테이든은 헤베의 어깨를 감싸고 침대에 앉혔다. 헤베는 입안에 넣고 한입에 깨물고 싶은 새침한 표정이었으며 얼굴이 붉었다.

자신을 의식하는 게 역력한 대마법사의 물에 젖은 갈색 머리를 보드라운 수건(성에서 챙겨왔다)으로 말리면서 테이든은 역대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의식하지 않고 마냥 순수하면 모를까. 의식해오니 더욱 자극적이었다.

“피곤하죠? 얼른 자요.”

“응.”

헤베가 침대 안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테이든은 동그랗고 작은 엉덩이에서 겨우 시선을 돌렸다.

“제가 바닥에서 잘게요.”

“왜?”

“침대가 하나니까요.”

“같이 자. 우린 연애하는 사이잖아.”

“안 돼요. 못 참을 것 같거든요.”

“뭘 못 참아?”

“…….”

“흑마법사랑 같은 공간에서 자면 너무 혐오스럽고 끔찍해서 치밀어오르는 살해 욕구를 참지 못할 것 같은 거라면….”

“살해 같은 헛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잠이나 자요. 안 그러면 이런 얇은 옷은 단번에 찢어버린 다음 당신의 작은….”

테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협박해왔다.

그 음탕하고 외설적인 내용에 충격을 받은 헤베는 얼어붙어 버렸다. 테이든은 헤베의 잠옷을 여며주고 침대에 눕혔다. 어깨가 굳고 몸이 딱딱한 걸 보니 굉장히 긴장한 듯했다.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는 정말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테이든의 눈높이에서는 헤베의 가슴도 내려다보였다. 봉긋한 것이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가슴 주위를 뒤덮은 검은 혈관이 아직 손대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다.

테이든은 가슴께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앞머리를 걷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밤이 늦었으니 얼른 주무세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여행 시작이니까 푹 자야 합니다.”

“진짜 따로 자게?”

“네, 저는 신사거든요. 대단하죠.”

“…….”

손바닥 아래에서 안도하는 근육이 느껴졌다. 헤베는 이불을 두 손으로 붙잡고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이불 밖으로 두 눈만 빼꼼 나와서 테이든의 행동을 지켜봤다. 테이든은 자신의 신체변화를 딱히 숨기지 않았는데 안타깝게도 헤베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이런 쪽으로 의식하게 돼봤자 아직 성장하려면 멀었다.

테이든이 바닥에 이불을 깔고, 헤베가 누운 침대에 옆에 앉았다.

“같이 자도 되는데.”

헤베가 전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테이든은 가만히 헤베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픈가요?”

“응? 뭐가?”

“검은 혈관 말이에요.”

“아프진 않아.”

눈이 마주치자 헤베는 이불을 좀 더 끌어올렸다.

테이든은 검은 혈관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더 물으면 헤베의 수줍게 열린 마음이 닫힐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보금자리까지 가는데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걸립니다. 그동안 실컷 여행해요. 더 길어져도 상관없고요.”

“맨날 먕먕이 안고 잤는데….”

“내일 백작에게 데리고 오라고 연락할게요.”

“응.”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뒤로 미루고 대신 헤베의 마음을 편하게 할 대화만 했다.

헤베는 곧 잠들었지만 테이든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잠든 갈색 머리 마법사는 아이처럼 순해 보였다.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가슴과 새액새액 내쉬는 얕은 숨, 베개에 살짝 눌린 뺨과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칼. 무슨 꿈을 꾸는지 이불보를 붙잡은 채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테이든은 여러 번 빠지고 깨진 손톱 때문에 흉한 손가락 끝에 조심스레 입 맞췄다.

그의 몸은 얼마나 만신창이인 걸까.

검은 피, 마물과 비슷한 성분.

이것 외에도 헤베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더 있다. 그걸 알아야만 했다. 더 늦기 전에….

***

테이든은 평민들이 입는 평상복 차림새로 방에서 나왔다. 하얀 셔츠에 갈색 조끼, 흔하디흔한 옷인데 몸매가 워낙 훌륭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헤베가 입을 벌리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너는 왜 그런 옷도 잘 어울려.”

테이든은 볼을 긁적였다.

“이런 옷은 너무 오랜만이라 부끄러워요.”

그는 항상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세팅한 차림새로 헤베 앞에 등장했다. 전쟁 중에도 이렇게 편한 차림새는 하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고 테이든이 어디 있나 주위를 둘러보면 이미 씻으러 갔다 하고, 잠시 후 말끔한 차림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놈들이 며칠 동안 빨지 않은 양말을 신고 돌아다닐 때도 테이든의 양말은 언제나 하얬다.

전쟁 중에도 그렇게 깔끔했으니 전쟁이 끝나고서는 황족보다 화려했다.

“맨날 화려하고 근사한 옷만 입지 말고 이렇게도 입고 다녀. 그런 옷들은 움직이기도 불편하잖아.”

“헤베가 워낙 외양을 가리다 보니….”

“나?”

“단정하든 화려하든 보기 좋아야 한 번이라도 당신 시선을 더 받잖아요. 헤베의 눈이 너무 높아서 그동안 저도 의상 제작에 들이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어요.”

테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헤베는 연인의 매도에 불을 뿜었다.

“내, 내가 언제 그랬어! 나는 외양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흥분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이 외양으로 사람을 판단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안 그랬으면 제게 승산은 없었겠죠.”

“아니라니까! 나는 인성이 제일 중요해. 사람은 마음이 착해야 하고 성실하며 게으르지 않아야 하고….”

“네, 네.”

테이든은 얼굴이 빨개진 흑마법사를 달래며 품에 안았다.

“오늘 일정을 말해줄게요. 우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우편 취급소에 들렀다가 옷을 사고 마을을 나설 거예요. 마차를 타고 세 시간 정도 달리면 다음 마을에 도착합니다. 그곳은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니까 원한다면 며칠 머물러도 좋아요.”

“난 사람 얼굴 안 보거든.”

“제발 봐주세요. 그래야 당신이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안 가죠.”

테이든은 헤베의 동그랗게 부푼 뺨에 입 맞췄다. 그러자 헤베는 테이든을 밀어내려 바르작거렸다. 정말이지 미약한 힘이었다. 테이든은 낮게 웃었다.

“헤베는 다람쥐 같아요.”

“넌… 넌 능구렁이야. 이런 줄 몰랐지….”

“어쩔 거예요. 우린 이미 연인인데.”

헤베가 테이든의 가슴을 꼬집었다. 테이든은 과장되게 엄살을 부리고는 헤베를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거야. 내려줘. 너 팔도 다쳤잖아.”

“제 팔은 다 나았고요. 이대로 내려갈 거예요. 여기 계단이 좀 높더라고요.”

“…내가 고작 피 검게 변했다고 계단 하나 못 내려갈 것 같아?”

헤베의 말투가 달라졌다. 아차 싶었던 테이든이 얼른 헤베를 내려놓고 시치미를 뗐다.

“물론 장난이었지요. 자, 가요.”

“…응.”

다행히 둔한 헤베는 테이든이 진심이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헤베는 이리저리 스트레칭하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여관의 나무 계단이 꽤 높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렸기 때문에 테이든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여관 1층은 텅 비어 있었다. 헤베는 몰랐지만 테이든이 1층을 통째로 빌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헤베에게 가발과 안경을 씌우고 내려왔을 것이다.

헤베는 영 입맛이 없어서 메뉴판을 보는 둥 마는 둥 했고, 테이든이 빵과 수프, 샐러드, 과일 음료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왔을 때도 헤베는 빵만 세 조각 뜯어먹고 말았다. 테이든은 한 끼를 해치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계산은 언제 해?”

여관을 나올 때 헤베가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

“우리 하루 숙박한 거랑 식사, 돈은 언제 내는 거야?”

“아… 어제 이미 계산 마쳤어요.”

“가지고 온 짐들 다 버려두고 와도 돼?”

“안 버렸어요. 다음 숙소로 배달될 거예요.”

둘은 긴 여행을 나온 사람들치고는 짐이 아주 약소했다. 헤베는 빈손이고, 테이든은 헤베용 구급함 하나만 들었다. 황성에서 챙겨온 이불과 수건 등은 여관에 두고 나오면 심부름꾼이 세탁 후 다음 숙소로 배달해줄 것이다. 옷은 방문하는 마을에서 구매한 뒤 하루 입고 버릴 예정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본래 여행 갈 때 짐 바리바리 챙기지 않나.”

“여행해 본 적 없어서 모르겠네요.”

“나도 처음이라….”

“이런 여행도 있는 거죠. 혹시 헤베의 얼굴을 알아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안경을 쓰세요.”

“걸리적거리는데.”

헤베는 귀찮다면서도 서둘러 안경을 착용했다. 안경 쓴 헤베는 스물여섯이라기보다는 열여섯처럼 보였다. 테이든은 헤베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

전쟁 직후 재건에 힘쓰는 시기, 작은 마을의 아침도 한가롭다기보다는 분주했다. 소음이 많았다. 여기저기 도로 공사하는 소음과 신전 건설 일꾼을 찾는 소리, 물건을 판매하는 호객 행위 등.

헤베의 왼쪽 귀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아는 테이든은 최대한 소음이 없는 길을 골라서 우편취급소에 도착했다.

“백작에게 먕먕이랑 삑삑이, 빽빽이 데리고 오라고 할게요.”

“응.”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헤베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마음을 무겁게 했던 비밀을 한 가지 밝힌 그는 반응도 좀 더 솔직해졌다.

“손님, 황성으로 보냅니까?”

“예, 오늘 내로 도착해야 합니다.”

헤베는 호기심 많은 다람쥐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테이든이 지갑을 꺼내는 모습을 구경했다. 테이든과 우편취급소의 직원은 굉장한 부담을 느끼며 거래를 마쳤다.

“이제 옷 사러 가자. 편한 로브가 좋겠어.”

“굳이 로브 안 입어도 돼요. 더울 텐데.”

“그래도 불안해서 입어야겠어.”

오늘 아침 테이든은 헤베에게 로브를 입게 하는 데 실패했다. 본래 무조건 로브를 입히고 내보낼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피할 만한 음침한 색으로 황성에서 직접 챙겨왔는데, 막상 마을을 구경한다는 생각에 반짝반짝 빛나는 헤베의 모습을 보니 입히려는 마음이 안 들었다. 후드를 쓰면 시야가 가려지니까.

헤베의 아름다운 외모에 얼굴을 붉힐 사람들 생각하면 짜증 나지만, 그것 때문에 헤베를 귀찮게 하면 안 된다. 따지고 보면 잘못은 사람들 탓 아닌가. 제 분수도 모르고 감히 헤베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결국 로브를 숨겨두고, 챙기지 않았다고 했더니 헤베는 당황하면서 로브부터 사자고 말해왔다. 헤베가 원해서 입고 싶다 한다면 말릴 이유는 없었다.

마을 의상실은 아주 작고 허름했으며 로브는 몇 벌 있지도 않았다. 헤베가 찾는 건 후드를 깊이 눌러 쓸 수 있는 종류인데, 전부 얇고 후드도 안 달려 있었다.

“로브 찾으시면 마법사의 탑 근처 마을로 가셔야 해요.”

“아, 굳이 마법사용을 찾는 건 아닌데.”

“그럼 어떤 용도를 찾으세요?”

의상실 주인은 안경 쓴 갈색 머리 미청년에게 굉장히 친절했다. 당황한 헤베는 눈을 깜박이다가 테이든에게 조르르 달려왔다.

헤베는 테이든에게 살짝 몸을 붙이고 나서야 대답했다.

“후드가 달려 있으면 됩니다. 얼굴 가릴 만큼 깊숙해야 하고요.”

“도톰한 재질이라도 괜찮다면 창고에 있을 것 같은데, 찾아볼게요.”

“감사합니다.”

테이든은 헤베의 조금 높아진 체온과 벌렁거리는 심장 소리를 고스란히 느꼈다.

헤베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굉장히 서툴렀다. 이렇게 평범한 가게에 와서 옷을 사는 경험도 처음일 것이다. 어째서인지 마약 소굴에서 야매 약사와는 능숙하게 거래했지만.

그건 정말 의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성을 빠져나가 할렘가를 알아냈는지는 나중에 천천히 파헤칠 것이다.

테이든은 헤베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헤베, 굳이 로브를 걸칠 필요 있어요? 날이 춥지도 않잖아요.”

“무조건 로브 입어야 돼. 왜냐면….”

헤베는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더니 테이든에게 손짓했다. 테이든은 조금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흑마법사 헤베 뮨의 초상화가 퍼졌을지도 모르잖아. 갑자기 날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나면 여행을 망칠 거야.”

“아하….”

어떻게 이런 사람한테 로브를 입게 한단 말인가. 테이든은 간신히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미소를 만들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당신은 안경을 썼기 때문에 절대로 헤베 뮨으로 안 보여요.”

“고작 안경 하나 썼다고?”

“안경이 얼마나 큰 차이인데요. 사람이 달라진다고요. 저라도 지나가다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걸요.”

“그런가.”

“그럼요. 굳이 가리고 싶다면 귀여운 모자 하나만 쓰세요. 이런 빵모자는 어때요?”

테이든은 마네킹이 쓴 모자를 집어 들었다.

“빵모자? 이름 진짜 귀엽네.”

빵에 환장한 헤베는 거부감없이 모자를 썼다. 테이든은 입을 가렸다. 생각보다 더욱 귀여웠기 때문에. 발그레한 뺨이며 반짝이는 눈동자, 긴 갈색 머리칼이 살짝 흔들리는 것까지.

헤베가 빵모자를 쓴 채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동안 테이든은 여러 번 생사를 오갔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하지만 돈 없는 헤베 대신 계산해야 한다는 생각에 간신히 버텼다.

“너도 모자 하나 사. 내가 사줄게.”

“헤베, 돈 없잖아요.”

“보석 가지고 왔어.”

“보석…?”

헤베가 조끼 속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천 뭉치를 꺼냈다. 그 천 뭉치 속에는 보석 몇 개가 있었다. 손톱만 한 크기에 세공도 안 된 원석이었지만, 각각 십만 골드에서 백만 골드까지 하는 것들이었다.

돈이 없는 헤베는 주로 보석으로 물건을 구매했다. 회귀 전에는 보석들을 쏟아부어서 마약을 산 경험도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테이든은 무척 놀랐다.

“대체 이 보석들은 어디서 났어요?”

“전쟁터에서 주웠어. 비싸게 팔린다길래 숨겨놨지.”

“맙소사. 언제요? 이런 거 줍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는데.”

“너 들어오기도 전 완전 어렸을 때야. 전쟁 끝나면 이거 팔아서 맛있는 빵 사먹으려고 열심히 모았는데 안 끝나더라고. 그래서 나중엔 안 주웠어.”

“아… 그랬군요.”

더 주울 걸 그랬다며 아쉬워하는 헤베와 달리 테이든은 뒷덜미가 차가워졌다. 미소가 사라졌지만 다행히 헤베는 테이든에게 어울리는 모자를 골라주겠다고 정신이 팔렸다.

여덟 살, 조막만 한 손으로 마물 사체를 뒤적이면서 보석을 줍는 어린애가 테이든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피와 먼지를 씻어내고, 전쟁이 끝나면 맛있는 빵을 사 먹을 꿈에 부풀어 보석을 품고 잠드는 어린아이. 하지만 전쟁은 오랫동안 끝나지 않았고 아이는 더 이상 보석을 줍지 않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 무언가 하겠다는 생각조차 없어진 아이가 모자를 사주겠다며 오래전의 보석을 꺼낸 것이다.

테이든은 주먹을 힘주어 쥐고,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밝게 웃었다.

“사실 저는 모든 모자가 잘 어울리지 않나요? 다 사주세요.”

“이걸로 다 살 수 있어?”

“그럼요. 세공까지 하면 가게를 사고도 남을걸요.”

“세공해야겠다. 당장 하자.”

“세공사를 찾으려면 정말 큰 마을에 가야 하는데….”

“여행이 길어져도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렇죠. 일정에 추가할게요.”

헤베는 생글생글 웃는 테이든에게 모자를 씌웠다. 중절모는 지금 차림새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헤베는 무척 마음에 든 듯했다.

“계산하겠습니다.”

테이든은 병약미 넘치는 안경 미청년에게 로브를 갖다 드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아직도 창고를 뒤지던 직원을 불렀다.

직원은 빵모자를 쓴 미청년과 중절모 쓴 미남을 보고 잠깐 가슴을 부여잡고 그냥 가져가시라고 외치려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이천 골드입니다.”

테이든이 지갑을 꺼냈다.

“보석은 세공 후 환전한 다음 사용하기로 하고 오늘은 제가 계산할게요.”

“응.”

평생 남이 주는 것만 받아온 헤베는 당연한 듯이 보석을 다시 천으로 소중하게 감싸서 품에 넣었다.

그들의 짐에 모자 두 개가 추가됐다.

헤베야 그렇다 쳐도 테이든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지만 워낙 당당한 자태와 그린듯한 외모 덕에 충분히 근사했다.

이튿날 방문한 마을은 첫날 방문한 마을보다 컸다. 마을에서 가장 저명한 세공사에게 원석 세공을 맡겼는데 아무리 빨라도 사흘은 걸린다고 해서 테이든은 동료들에게 급히 연락했다. 며칠 머무르게 되었으니 이불과 베개 등은 이쪽 숙소로 와야 한다는 급전에 그날 밤 마우와 진이 바로 마차를 몰고 왔다.

둘은 침구와 함께 먕먕이와 새끼 마물들, 새로 조제한 약 등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다 놨다.

“헤베 님은요?”

“잠들었어요. 피곤했나 봐요.”

“굳이 깨우진 마세요. 우리는 짐만 놓고 갈게요.”

“……? 당연하죠. 헤베를 왜 깨워요.”

“…….”

진과 마우는 자는 헤베를 한번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다시 황성으로 떠났다.

어제 일정이 무리였는지 헤베는 한낮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약을 먹여야 하는 테이든이 슬슬 깨울까 할 때,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더니 팔 한쪽이 나타났다. 기지개를 켜는 것이었다. 쫙 핀 손가락 다섯 개가 너무 귀여웠다. 가느다란 팔에 테이든이 침을 꿀꺽 삼켰다.

-먕먕!

먕먕이가 헤베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헤베는 잠이 덜 깨 눈을 다 뜨지도 않은 채로 먕먕이의 흰 털을 쓰다듬었다.

“먕먕이 왔어?”

-먀앙. 매애앵. 매야앙.

“응, 먕먕아….”

겨우 이틀 떨어졌다고 말이 많은 먕먕이의 동그란 머리를 헤베가 만지작거렸다.

몹시 부러워진 테이든은 슬쩍 헤베의 손 밑에 자신의 커다란 손을 들이밀었다.

-우우웅.

먕먕이가 위협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헤베, 일어나요.”

“일어났어.”

헤베는 여전히 눈 감은 채로 테이든의 손을 쓰다듬더니 손가락을 서로 얽혔다. 헤베의 손은 자잘한 흉터들로 인해 절대 매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테이든은 이보다 예쁜 손은 세상에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헤베는 새로 만들었다는 약을 보고 인상을 확 썼지만 다행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밤사이 왔다 갔어?”

“네, 자고 있어서 안 깨웠어요. 다들 헤베의 컨디션이 우선이니까. 어차피 곧 지겹게 보게 될 거고요.”

헤베가 ‘역시 흑마법사 얼굴 보기 싫어서 깨우지 않은 거지’라고 또 피해망상 터뜨릴까 봐 테이든이 미리 방어막을 펼쳤다. 헤베는 별말 하지 않았다.

둘은 숙소에 마물들을 두고 나왔다. 헤베의 두 손은 아주 가벼웠지만 테이든의 두 손엔 온갖 짐이 들려 있었다.

햇살이 반짝반짝 내리쬐는 좋은 날씨였다. 푸른 하늘에 점점이 박힌 하얀 구름을 올려다보는 헤베의 표정은 최근에 본 것 중 가장 가벼웠다.

오늘 그들이 방문할 곳은 유적지로, 삼백 년의 전쟁에도 크게 붕괴하지 않은 고대 신전이었다.

“사람 많네.”

“다른 곳으로 갈까요? 아니면 밤에 올래요?”

“뭐 하러 그래. 얼른 줄이나 서자.”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가 부담스러울 줄 알았는데 헤베는 오히려 신나 보이는 얼굴이었다. 테이든은 웃돈을 얹어서 줄 서지 않고 바로 유적지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회백색 벽, 바위틈 사이에 피어난 이끼, 염료가 벗겨진 명화와 칠이 떨어져 나간 조각상. 둘의 발걸음은 헤게르미의 상징 앞에서 잠시 멈췄다. 많은 이가 그 앞에서 머물렀다.

이제 막 재건되어가는 세계에서 많은 이가 간절한 소원을 신에게 빌고 있었다.

“우리도 기도드리자.”

“좋아요.”

둘도 다른 이들과 함께 비센티아의 창조신께 기도를 드렸다. 사실 테이든은 기도드리는 척하면서 헤베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바람에 살랑이는 옅은 갈색 머리칼, 가지런한 속눈썹과 단정하게 오므린 입술. 황성에서는 얼굴에 항상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한결 밝다. 하지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사람이니 안심할 수 없었다.

며칠 곁을 지키면서 헤베가 얼마나 잦은 고통에 시달리는지 알았다.

통증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며, 심장부터 시작된다. 약을 먹어도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대략 하루에 대여섯 번. 통증이 지나가고 나면 헤베의 몸은 식은땀으로 차갑게 젖어 있다. 하루가 끝날 때쯤엔 체력이 크게 떨어져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전날 밤 테이든은 헤베가 잘 때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음험한 욕정 때문이 아니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콩닥, 콩닥 뛰는 심장을 느껴야만 안심할 것 같아서였다.

소리만으로는 도저히 안심이 안 되어서….

테이든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와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테이든은 이제 스무 살이었다. 열세 살부터 그의 기도는 한결같았다.

어린 테이든은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헤베 뮨의 소문을 들어왔다. 당연히 나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어렸고, 곧 죽을 것처럼 파리한 안색이었다. 어디 멀쩡한 곳이 없어 보였다. 헤베의 동행인은 옆에서 시종 화를 냈다.

‘왜 너를 보내냐고. 다쳐서 돌아온 사람을 이렇게 멀리까지!’

테이든도 공감했다. 황성에 아무리 인력이 부족하더라도 이런 병자를 보내는가.

황성으로 온 그는 곧 헤베가 황성에 머무는 경우는 다쳤을 때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열여덟 살, 참전하기 전까지 심각하게 다쳐 사경을 헤매는 헤베의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와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테이든은 간절하게 기도했다. 열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기도는 언제나 같았다….

***

“더 못 걷겠어….”

유적지는 매우 넓어서 다 둘러보지 못했다. 헤베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여기 앉으세요.”

테이든은 벤치를 손수건으로 닦은 뒤 들고 다니던 푹신한 방석을 위에 깔았다. 헤베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모습을 보다가 당연하다는 듯 방석 위에 앉았다. 미청년들에게 관심을 갖던 주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조금씩 멀어졌지만 헤베는 눈치채지 못했다.

“과일 음료를 사 올게요. 여기 계세요.”

“응.”

“도망치면 안 됩니다. 제가 다 기척 느끼는 거 알죠?”

“도망칠 이유도 없고 힘도 없는데….”

테이든은 음료를 사면서도 헤베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슬슬 다리가 아파 오는지 종아리를 주무르는 헤베에게 거리 화가 한 명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거리 화가들은 아까부터 둘을 열렬하게 주시 중이었다.

“여행 오셨습니까?”

“네… 누구세요.”

“화가입니다. 혹시 당신을 그려드려도 괜찮을까요? 잠깐이면 됩니다.”

“저를요?”

“예, 당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제 화폭에 남긴다면….”

화가는 당연한 부탁을 해왔다. 그림을 전혀 그려보지 않는 자라도 헤베를 본다면 그림으로 남기고 싶지 않겠는가. 테이든은 헤베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봤다.

헤베는 크게 흔들리는 눈으로 입술을 오므렸다가 곧 화가를 노려봤다.

“하, 어이없군요! 저는 흑, 흑마법사가 아닙니다. 이것 보세요. 안경도 썼잖아요. 그자는 안경을 안 낍니다.”

이런.

테이든은 웃음을 머금은 채 급히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헤베가 급히 일어나 테이든의 뒤로 숨었다.

“이 사람이 내 얼굴을 초상화로 남겨서 각지에 퍼뜨리겠다잖아! 난 흑마법사가 아닌데. 알지? 나 흑마법사 아니잖아. 그렇지?”

테이든이 자신의 말뜻을 눈치채지 못할까 봐 걱정된 헤베가 눈을 1초에 세 번씩 찡긋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테이든은 손으로 떨리는 입가를 가리고 심각한 척했다.

“흐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봐봐. 내 얼굴을 그리겠다고 했어. 흑마법사는 황성에서 쫓겨나 멀리 유배 갔는데. 추운 곳에서 얼어 죽을 예정이잖아. 그런데 내 얼굴을 그리겠다고 했다니까.”

세간에는 황제가 헤베 뮨을 북국으로 유배 보냈다고 발표했다. 거짓말로라도 ‘얼어 죽을 예정’ 같은 표현은 하기 싫었지만 일단 헤베를 진정시키기 위해 쿵짝을 마주쳐줬다.

“그랬죠. 당신은 마법 같은 것도 모르고, 연인과 여행 중일 뿐인데 왜 그런 오해를 했을까요.”

“나는 안경도 꼈는데.”

“그러니까요.”

테이든은 헤베를 품으로 당겨 끌어안고 화가를 노려봤다.

“그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하신 겁니까.”

“흐, 흑마법사 같은 말은 한 적 없습니다. 그냥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했는데 이 사람이 과잉 반응해서-”

“이분은 괜한 말에 과잉 반응하는 분이 아니에요. 그쪽이 뭔가 말실수를 했겠죠.”

과잉 반응으로는 세상에서 첫째가는 사람일 것이다.

“이, 이…!”

테이든의 박력에 진 화가가 콧김만 씩씩 내뿜다가 자리를 떴다. 너무 근사한 미청년들이 귀족인 데다가 미친놈들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줄어들었다. 화가야 몹시 억울하겠지만 테이든이 알 바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품 안에서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오해였나 봐요. 아무도 당신의 정체를 모르니 안심하세요.”

테이든은 쿵쿵쿵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을 들으면서 헤베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잠시 후 좀 진정된 헤베가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갈색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오해면 왜 갑자기 내 얼굴을 그리겠다고 하지?”

“헤베가 너무 예뻐서 그렇죠.”

“그럼 네 그림을 그려야 맞잖아.”

“…….”

테이든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당신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솔직한 말을 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원망스러운 투로 내뱉은 테이든은 얼음이 녹아가는 과일 음료의 빨대를 헤베의 입에 쏙 물렸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어여쁘니 거리 화가들이 모두 내 얼굴만 그려야 한다니. 어떻게 이런 말을 이렇게 순수하게 할 수 있지?

물론 헤베는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다.

테이든도 과잉 반응이라면 헤베 못지않았다.

데이트는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화가 일이 있고 나서 헤베는 계속 주위 사람들을 의심하고 의식했고, 테이든은 결국 헤베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뮨의 친위대는 타인에 대한 경계가 매우 뚜렷했다. 전쟁터에서부터 그들이 받아들이는 이들은 한정되었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마을 사람들에게 헤베가 어떤 피해 의식을 갖든 테이든은 해명할 필요는 못 느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도 야외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서 헤베를 앉혀놓고 계속해서 설득했다.

“흑마법사라고 의심하진 않았을지도 몰라요. 본래 예쁜 거 보면 그림으로 남기고 싶잖아요. 헤베는 예쁘고 귀여운 저를 그리고 싶었던 적 없었어요?”

“있긴 있었는데.”

“그렇죠. 저도 항상 당신을 그리고 싶었어요. 실력이 따라주지 않아서 포기했지만.”

테이든은 헤베의 손을 붙잡고 마디마디 쓰다듬었다.

“당신의 그림 실력은 아주 유명했어요.”

“내가 언제 그림 그린 적 있어?”

“네, 마물 몸 구조를 설명하면서요.”

헤베의 그림 실력은 굉장히 뛰어났다. 이렇다 할 화구도 없는 전쟁터에서 펜으로 빈 종이에 쓱쓱 그리는데 아주 거침없는 선에 묘사 실력도 훌륭했다. 지첸이 몰래 모아놨는데, 전쟁 중 모두 유실되었다.

“그림을 취미로 해보는 건 어때요? 집 안에 화실을 만들게요.”

“그다지.”

“전 헤베한테 그림을 배우고 싶어요.”

“나한테?”

헤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여운 반응에 테이든은 기대를 가졌다.

자기가 어떻게 가르치냐고 기겁하려나. 아니면 전문가를 부르라고 할까? 같이 배우자고 했으면 좋겠다.

“너는 불가능해. 너한테 가르친다면 동그라미 그리는 데 10년은 걸릴 거야.”

“…….”

테이든은 생글생글 미소를 유지했다.

“꼭 배워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네요.”

“안 된다니까. 10년은 걸리는데….”

“뭐 어때요. 앞으로 우리에게 남는 건 시간뿐인데.”

헤베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테이든은 놔주지 않고 오히려 헤베를 와락 껴안았다.

“이제 헤베도 취미를 찾긴 해야 합니다. 그림이나 글, 음악. 아니면 그 예쁜 손으로 무언가 조물조물 만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요.”

헤베는 대답이 없었다.

테이든은 헤베의 앞머리를 쓸어올려 고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약속한 첫 키스(날짜 논의)날이 닷새 뒤라는 걸 헤베는 알까? 몰라도 상관은 없었다. 테이든은 멍해진 헤베의 코끝에도 살짝 입 맞춘 후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알았어.”

대답하는 목소리가 매우 음울하고, 심장 박동도 조금 빨라졌음을 테이든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군.’

하지만 테이든은 어떤 눈치도 못 챈 것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일어났다.

***

이틀 후 헤베는 부자가 되었다. 어렸을 때 주워놓은 보석들을 세공한 뒤 돈으로 바꾸자 천문학적인 액수를 손에 넣었다.

‘회귀 전에 나는 진짜 멍청했구나.’

망나니 시절 헤베는 마약을 구매할 때 보석을 사용했는데, 지금 계산해 보니 제값의 열 배나 비싸게 구입한 것이었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죄다 사기꾼들이었다.

액수가 굉장히 컸기 때문에 일단 세 개만 현금화하기로 했다. 그래도 많아서 보석을 담는 천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지갑을 사야겠네요.”

“지, 지갑…!”

“네, 그 돈을 다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순 없잖아요.”

테이든은 긴장한 헤베의 손을 잡고 잡화점에 지갑을 사러 갔다. 헤베는 만져보고, 들어보고, 주머니에도 넣어보고, 돈도 넣어보는 등 굉장히 긴 고민 끝에 테이든의 것과 비슷하게 생긴 하얀색 주머니를 골랐다. 금색 실로 헤게르미의 상징을 수놓은 것이었고, 크기는 손바닥만 했다.

테이든은 헤베가 고른 지갑을 계산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자기 돈으로 무언가를 산 적 없는 헤베는 돈을 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뒤에서 기다렸다.

“자, 헤베의 첫 지갑이에요.”

테이든이 떨리는 손바닥 위에 지갑을 올렸다. 헤베는 지갑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쌌다.

이제 그는 지갑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살면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곧 죽는데 이제 와 지갑이 생겨서 뭐 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헤베는 설렜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무언가 몽글몽글한 감정이 생겼다.

테이든은 잔뜩 상기된 헤베를 이끌고 근처 빵 가게에 들어갔다. 주문을 마친 테이든이 보석과 현금을 지갑에 넣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자 헤베가 몹시 놀랐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돈을 옮기면 다 훔쳐 갈 거야. 지금도 여길 힐끗거리잖아.”

실제로 사람들이 둘을 힐끔거리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외모와 분위기 때문이었고, 돈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안 그래도 피해망상이 있는 사람이 처음으로 지갑이 생기자 주위 모든 이가 내 지갑을 훔쳐 가려는 잠재적 도둑놈으로 보이는 것이다.

“제가 지킬게요, 헤베. 절 믿으세요. 설마 이런 곳에 저보다 강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알았어. 잘 지켜봐. 내 전 재산이야.”

“네에.”

든든한 초월자의 설득에 헤베는 큰맘 먹고 지갑을 열었다.

보석과 현금을 모두 넣자 찰랑찰랑 소리가 들렸다.

마침 빵과 음료가 나왔는데, 기분이 좋아진 헤베는 크루아상을 반 개나 먹었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은 식사량이었다. 헤베는 먹으면서 중간중간 지갑을 건드려 찰랑, 찰그락 소리를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테이든은 연거푸 가슴을 붙잡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아픈 이가 헤베가 아닌 테이든인가 싶었을 것이다.

“다음 마을은 지금 출발해야 저녁쯤 도착해요. 마차는 마을 출입문에서 대기 중이고요. 혹시 여기서 더 구경하고 싶은 곳이 있어요?”

“바로 가자. 숙소 가서 먕먕이랑 애들 데리고 와야지.”

“이미 마차 안에 뒀어요. 우리 짐들도, 전부.”

“대체 언제?”

“당신이 자는 동안에요.”

“내가 그렇게 늦잠 잤나.”

왠지 게으름 피운 느낌이 든 헤베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테이든은 헤베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숙여왔다.

“당신이 늦잠 잔 게 아니라 제가 부지런했어요. 부지런한 남자친구 칭찬해주세요.”

테이든이 애같이 구는 걸 몹시 좋아하는 헤베는 결 좋은 금발을 톡톡 쓰다듬었다. 테이든은 헤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한동안 그 손길을 즐겼다.

둘은 한참 후에야 마을 출입구 쪽으로 향했는데, 헤베의 걸음이 느려졌다. 테이든은 헤베가 지쳤는가 하여 금방 촉각을 기울였는데 알고 보니 출입구 쪽에 줄지어 늘어선 꽃집을 발견한 탓이었다.

수많은 꽃 중에서도 헤베의 시선을 빼앗은 건 라넌큘러스였다.

얼마 전 황성에서 테이든이 줬던 연한 다홍빛의 꽃송이.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정원에 버려둔 채 방으로 돌아갔다.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고 했으니 그 꽃은 어차피 시들 운명이었다.

그리고 저 노점상들이 가진 꽃들 또한 모두 죽을 운명이었다.

줄기부터 잘린 꽃들은 보기엔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저건 모두 꽃의 사체를 진열한 것이었다.

‘나도 똑같아.’

지금 이렇게 지갑을 사고, 많은 재산에 기뻐하면 뭘 한단 말인가. 이제 곧 죽는데. 얼른 테이든에게 그 사실을 말해줘야 하는데….

“꽃 사고 싶어요?”

테이든은 헤베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르는지 빠르게 눈치채고 곧장 지갑을 꺼냈다. 그런 움직임을 헤베가 차분히 막았다.

“내가 살게.”

“네?”

“꽃, 내가 사준다고.”

“…네….”

대단한 각오가 담긴 어조에 테이든이 미소를 머금은 채 지갑을 집어넣었다.

헤베는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노점상에게 향했다.

회귀 전, 정체를 숨기고 어두운 할렘가를 돌아다닐 때는 보석을 주면 그만이었다. 계산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돈을 주고 물건을 받는 거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뭐, 그렇게 어렵겠는가? 헤베는 얼마 전 마구간에서 말을 빌리는데 거의(?) 성공한 바 있었다.

삐걱삐걱, 몹시 긴장한 헤베의 손과 발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안경 낀 갈색 머리 병약한 미청년이 다가오자 꽃 상인도 굉장히 긴장했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노점상에게 가길 기도했지만 미청년은 똑바로 이쪽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 미청년 뒤쪽으로는 ‘그분께 실례를 하면 당장 목을 베어 죽이겠다’는 표정의 덩치 큰 미청년이 하나 더 있었다.

“주인장……!”

안경 미청년은 엄청난 결의를 품은 얼굴로 상인을 불렀다.

“예……!”

그 비장함에 상인 또한 비장하게 대답했다.

“꽃을 사겠습니다.”

“당장 드리겠습니다.”

상인이 허겁지겁 아무 꽃이나 포장했다. 라넌큘러스를 원했던 헤베가 눈썹을 찌푸렸다.

“저 다홍색 꽃은 얼마죠?”

“드리겠습니다!”

“…….”

공짜인가 보다.

헤베는 갑작스러운 이득에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포장을 기다렸다.

상인은 헤베의 머리보다 더 큰 꽃다발을 만들었다. 헤베는 지갑을 꺼냈다.

“얼마입니까.”

“도, 돈을 주신다고요?”

“네…. 공짜 아니잖아요?”

“공짜는… 아니지요?”

“……?”

“……?”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다행히 헤베보다는 눈치가 있는 상인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백 골드만 주시면 됩니다.”

“백 골드라. 싸네요.”

시세를 모르는 헤베는 온갖 여유로운 척하면서 지갑을 뒤졌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돈을 건넸고, 상인 또한 후들후들 떨면서 돈을 받았다.

처음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데 성공한 헤베가 테이든에게 달려왔다.

“테이든.”

“뛰지 말아요.”

테이든은 품 안으로 포르르 날아오는 헤베를 받아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헤베는 당장 꽃다발을 내밀었다.

“너 가져.”

“정말 기뻐요. 고마워요, 헤베.”

테이든의 반응은 헤베의 기대 이상이었다. 테이든은 다홍빛 라넌큘러스 꽃다발의 향기를 맡으며 감격스러움을 표현했고, 눈시울까지 붉히며 울먹거렸다.

“정말 너무 행복해요.”

“야, 너는 영웅이 왜 이렇게 자주 울어.”

헤베는 당황하며 발꿈치를 조금 세우고는, 옷 소매로 테이든의 눈가를 닦아줬다. 테이든은 헤베를 끌어안고 자그마한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헤베에게서 꽃 선물을 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걸요. 너무 좋아요.”

테이든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였다.

역시 마음이 여리고 순해. 가끔은… 위압적인 면도 있지만 테이든은 정말 여려.

헤베는 테이든의 두터운 등을 쓰다듬었다. 둘 사이에 낀 꽃다발에서 다홍빛 꽃잎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먕.

-삐이익.

-빽빽.

테이든과 헤베가 모습을 드러내자 마차 안에서 기다리던 마물들이 일제히 울면서 달려들었다. 다만 먕먕이는 헤베에게 부딪치기 직전 속도를 줄였다. 제 주인의 몸이 약해졌음을 인식하는 똑똑한 마물을 헤베가 끌어안았다.

“얌전히 잘 있었어?”

-미양.

“먕먕이 가볍네. 너보다 지갑이 더 무거워.”

테이든은 헤베가 마물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방석의 쿠션감을 체크했다. 헤베가 앉을 곳에 쿠션 하나를 더 추가한 뒤 자연스럽게 그를 이끌었다.

마차 높이가 굉장히 높아서 딱히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었다. 헤베는 테이든이 이끄는 대로 앉은 뒤 먕먕이와 삑삑이, 빽빽이를 앞에 나란히 앉혔다.

“이것 봐. 내 지갑이야.”

헤베가 하얀 솜뭉치들에게 지갑을 자랑했다. 그의 취향은 아주 확고해서, 옆에 두니 멀리서 보면 무엇이 먕먕이고 무엇이 지갑인지 헷갈릴 만큼 생김새가 비슷했다. 새끼 마물들이 자기를 닮은 지갑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먕먕이는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고 다만 꼬리만 살랑거렸다.

“다들 너무 귀엽다. 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지 알겠어….”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귀여운 풍경이었다.

그사이 마부에게 지시를 내리고 온 테이든이 앞에 앉았다.

“오, 마음에 들었어요? 다음 마을에서는 화구를 살게요.”

“그래, 뭐….”

화구는 몇 번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지겠지만 돈이 넘치도록 많은 그들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헤베 지갑, 저도 들어볼게요.”

“응.”

헤베가 선뜻 허락했다. 테이든은 하얀 지갑을 들고 신중하게 무게를 쟀다.

“먕먕이 무게랑 비슷하네요. 앞으로는 제가 들고 다니겠습니다.”

“그러든가.”

이번에도 선뜻 허락이 이어졌다. 정말로 지갑이 퍽 무거웠던 탓이다.

마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마부는 두 명이었는데, 말수 적은 용병들로 구해놨다. 다음 마을까지는 다섯 시간 정도 걸리는데, 헤베의 몸 상태에 따라서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므로 미리 거금을 줬다.

헤베는 하루에 보통 다섯 번 정도 격통을 느끼는데, 오늘은 아직 두 번밖에 겪지 않았다. 가는 길에 또 통증이 올 확률이 높았다.

“눕고 싶으면 누우세요. 자리 깔아줄게요.”

“아니야.”

헤베는 하품을 하면서 테이든에게 기댔다. 두껍고 단단한 팔뚝이 바로 긴장해왔다.

자기가 먼저 갖다 댈 때는 거침없으면서 헤베가 먼저 해오면 항상 이렇게 깜짝 놀랐다. 그러다가도 곧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더욱 깊게 안아왔다. 테이든이 헤베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허벅지 위에 올렸다.

“헤베… 저는.”

“삑삑아, 빽빽아. 이리 와.”

테이든이 뜨거운 숨을 내뱉는 찰나, 헤베가 어린 마물들을 불렀다.

-삑삑.

-빼액빽.

새끼 마물들이 파닥거리며 날아와 헤베의 품에 파고들었다.

“오구, 귀여워.”

헤베는 새끼들을 안고서 테이든 위에서 편한 자세를 취했다. 얇은 머리칼이 테이든의 턱을 간지럽혔다.

테이든의 중심을 깔아뭉갠 채 자기 좋을 대로 자세를 잡은 헤베가 테이든을 올려다봤다.

“뭐라고 말했어?”

“아니요….”

테이든은 눈물을 머금고 물었다.

“안고 있어도 안 무겁겠어요?”

“얘네는 가벼워. 둘이 합해도 먕먕이의 절반도 안 돼.”

-먕.

먕먕이가 새초롬하게 울고는 테이든 옆에 붙어서 몸을 길게 펴고 누웠다.

헤베는 테이든 품 안에서 삑삑이의 말랑말랑한 뱃살을 열심히 주물거렸다. 빽빽이와 손장난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털뭉치들이 움직일 때마다 흰 털이 마차 안을 나풀거렸다. 그러다 헤베의 손길이 점차 느려졌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부드럽게 진동하는 마차 안, 자신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은 테이든의 품 안에서 좋아하는 어린 마물들을 쓰다듬고 있자니 기분이 나른해졌다.

‘안 돼. 자지 말자.’

헤베는 잠들지 않기 위해 입안을 잘근 씹었다.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자면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테이든은 아침 일찍 깨우라고 해도 절대 깨우지 않았다. 때문에 오전은 내내 자면서 보냈다. 물론 중간에 통증 때문에 깨긴 했지만… 긴 시간이 정말 아깝게 사라졌다.

‘여행은 즐거워.’

헤베는 지금까지 몰랐던 즐거움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여행이 이렇게 편한 줄 몰랐어. 지첸은 다녀올 때마다 불평했잖아.’

전쟁 중에도 지금도 장거리 임무를 맡은 지첸은 여행이고 관광이고 신물이 난다고 했다.

물론 대부분은 헤베처럼 편한 여행은 하지 못했다. 그가 편한 건 테이든이 짐도 다 들고, 모두 맞춰주기 때문이었다.

‘몸도 안 피곤해.’

두 손에 들고 다니는 게 없고, 헤베의 근육 긴장도를 몸 주인보다 잘 아는 테이든이 적시에 휴식시킨 덕분이었다.

요 며칠 너무 즐겁고 편하다 보니 통증도 줄어든 듯했다.

‘이렇게 즐거우면 뭐 하냐고. 곧 죽는데….’

다시 우울한 생각이 치밀어오르려고 했다. 삑삑이와 빽빽이를 먕먕이에게 보내고 자세를 바꾸는데 그때야 배를 감싼 단단한 팔뚝을 발견했다.

이제 여름이라고 테이든의 옷차림도 슬슬 짧아졌다. 굵은 힘줄이 돋아난 팔은 눌러질까 싶을 정도로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졌다. 얼마 전 자해한 흉터도 남지 않았다.

어차피 연인이니까 괜찮겠지? 헤베는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침상이 부르르 떨렸다.

“헤베… 뭐 해요. 간신히 참는 사람한테.”

“뭘 참아?”

“…아닙니다.”

테이든의 뜨거운 숨이 정수리에 닿았다.

“저 몸 좋죠? 다른 데도 만지고 싶으면 만져요.”

테이든은 만사 포기한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헤베는 자세를 바꿔 테이든과 마주 봤다. 테이든은 헤베가 편히 기대도록 한 팔로 그를 받쳤다.

헤베는 자줏빛 눈동자에 넘실거리는 욕망은 읽지 못하고 단단한 가슴팍과 어깨를 주물렀다.

“정말 조그맸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컸어.”

테이든의 몸은 열여덟 살에 이미 완성되었다. 열세 살에 데려올 때는 삐쩍 마르고 가냘팠는데, 5년 만에 완전한 남자가 된 것이다.

“닥치는 대로 먹고, 기도하고, 훈련했죠. 하루라도 빨리 성장해서 헤베를 지키고 싶었거든요.”

“너무 급하게 클 필요는 없었어.”

“알아요. 헤베, 사실 저 때문에 곤란했었죠?”

“응?”

헤베가 깜짝 놀라며 테이든을 바라봤다.

“제 몸이 너무 빨리 완성돼서, 주위에서는 절 얼른 전장에 내보내라고 하고 헤베는 아직 이르다고 막고. 곤란해한 거 알아요.”

“그건….”

어떻게 알았지. 헤베가 마른침을 삼켰다.

소년병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던 시기였다. 마물과의 전쟁에 도움만 된다면 나이 따위는 상관하지 않았다. 헤베는 무려 여덟 살에 참전하지 않았던가. 전 궁사의 품에 안겨서 압도적인 마법으로 마물을 도륙했다. 아무래도 여덟 살이라는 나이는 심하게 어려서 세상에 밝히지는 않았지만.

헤베는 사령관에 오르자마자 열다섯 살 이하의 소년병은 출전을 금지시켰다. 그때 많은 반발이 있었다.

비센티아는 막다른 구석에 몰렸고, 소년들을 보호하려다가 아예 세상이 멸망할 판 아닌가. 윤리 이전 생존의 문제이다.

헤베는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에게 말했다.

‘소년병 천 명을 데리고 온들 내 마법 한번보다 못한데 굳이 왜 필요합니까?’

오만한 발언은 막강한 실력을 근거로 했고, 누구도 반발하지 못했다.

헤베는 그 뒤로도 천천히, 착실하게 소년병 나이 기준을 올렸고, 신탁이 내려온 그해에는 열여덟 살까지 만들었다. 대신 그는 전장에서 누구보다 앞에 서야 했고, 가장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야 했으며, 가장 늦게까지 남아야 했다. 큰 부상을 입어도 숨기는 버릇은 이때 만들어졌다. 그가 다쳐 전투에 빠진다면 그만큼 큰 공백이 생기고, 전력이 부족해지면 소년병 모집 연령을 낮춰야 했기 때문에.

“제가 열다섯일 때부터 출전시키자는 목소리가 나왔죠.”

“대체… 어떻게 알았어?”

“헤베보다는 눈치가 있는 편이거든요.”

테이든은 막 데려왔을 때 굉장히 가냘픈 소년이었다. 어떤 이들은 실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년의 성장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열다섯 살에 다른 청년 병사들만 한 신체 능력을 보였고, 많은 이들이 사령관에게 테이든의 출전을 건의했다. 신탁의 주인공이 참전했다는 사실 자체가 비센티아에 큰 희망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헤베는 ‘아직 이르다.’, ‘아직 멀었다.’는 말로 반려했으며, 견제하는 게 아니냐는 비아냥도 들었다.

“배려해주신 건 고맙지만 전 빨리 전장에 나가고 싶었어요. 당신은 볼 때마다 다쳐 있었고, 그때마다 제 가슴은 찢어져 갔죠. 내가 신탁의 주인공이라는데, 왜 헤베는 나를 부르지 않을까. 왜 나를 옆에 두지 않고 혼자 다쳐 오는 걸까….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테이든은 황성 안에서 훈련만 계속했다. 헤베가 황성을 방문할 때는 재활이 필요한 심각한 부상을 당했을 때뿐이었으므로 테이든은 항상 목발을 짚거나 붕대를 칭칭 감은 헤베 뮨을 보아야만 했다.

“당신이 사경을 헤맬 때 헤게르미께 기도드린 적도 있어요. 지금 당신의 목숨을 가져간다면 세상을 멸망하게 두겠다고 했죠.”

“그때부터 신을 협박했어?”

헤베가 혼내듯이 테이든의 어깨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런 식으로 협박하면 안 돼. 네가 그러니까 신이 널 짐승처럼 여기는… 여기면 어떡하냐고.”

“상관없어요. 당신이 없으면 전 짐승이나 마찬가지죠. 마물이라 표현해도 좋고요.”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

테이든은 몰랐지만, 헤게르미의 대리자가 분명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생각한 헤베는 당황하며 테이든의 입을 막았다. 테이든은 웃으며 헤베의 손바닥에 키스했다. 헤베가 깜짝 놀라며 손을 떼고는 옷을 문질렀다.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전 당신도 원망했어요. 절 곁에 두라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애원하고 싶었단 말이에요.”

“내가 생각한 적당한 시기가 있었을 뿐이야.”

“알아요. 이젠 원망하지 않아요.”

테이든이 헤베의 뺨을 감쌌다. 헤베는 커다란 손에 얼굴을 기대왔다.

결국 그는 테이든이 열여덟 살 되는 해에 출전을 허가했다.

걱정이 무색하게 테이든은 큰 부상 없이 말로 다 읊지도 못할 정도의 많은 활약을 했고, 그로부터 이 년 만에 전쟁이 끝났다.

사실 전쟁은 더 길어질 운명이었다. 한 번도 다치지 않았던 테이든이 작은 부상을 당했을 때 너무 놀란 헤베는 바로 그날 흑마법을 선택했다. 그날이 아니었더라도 헤베는 결국 흑마법사가 되었겠지만….

만약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십 년을 훌쩍 넘겼을 터고, 테이든은 큰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라넌큘러스 꽃 상인도, 의상실 주인도, 거리 화가도.

“아무튼 다 과거의 일이에요. 전쟁은 끝났고, 비센티아는 영원히 평화로울 거고… 헤베와 저는 연인이 되었고요. 실감은 안 나지만요.”

“아직도 실감이 안 돼?”

“당신 성격으로 봐서는 정말 오래 걸릴 줄 알았으니까요. 오십 년은 걸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확실히 회귀 전을 떠올려 보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상이 한 번 멸망하고 나서야 사랑이라는 걸 믿지 않았던가.

시체를 붙잡고 오열하던 테이든의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그때 나는 남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고. 밀어내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상념에 빠진 헤베의 미간에 주름이 지자 테이든이 손가락으로 슬슬 쓸었다.

“우리가 이 자세 그대로 옷만 벗고 있었다면 연인이라는 걸 실감할 텐데.”

“뭐?”

헤베는 펄쩍 뛰며 기겁했다.

테이든의 말이 정말 충격적이라 과거의 상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말을…!”

“죄송해요. 진정하세요.”

“어떻게 그런 부끄럽고 음란한… 저속한 말을 할 수 있어. 너는… 정말이지 너무 난잡해!”

테이든은 생선처럼 팔딱팔딱 뛰는 헤베의 등을 부드럽게 쓸며 진정시켰다.

“당신을 위해 순결을 지켜온 사람한테 난잡하다니요.”

“너무 음탕하고… 불결한 상상도….”

“상상이요?”

“앞으로는 그런 방탕한 종류는… 상상도 하지마!”

“하하….”

테이든은 웃음만 흘리며 대답하지 않았고 그 모습에 헤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왜 대답 안 해! 역시 넌, 넌 정말 너무 음란해.”

“헤베가 학자가 아니었다면 이보단 덜 심했을까요….”

테이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헤베는 여전히 펄쩍펄쩍 날뛰었다. 먕먕이가 무슨 일이냐고 고개를 들 정도였다. 테이든은 헤베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물었다.

“제가 그런 상상을 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나, 나도 눈치는 있어. 너는 날 사랑하고 한창때의 성인 남성이니까 날 상대로 그, 그런… 저속한 망상을 하겠지.”

“헤베는 그런 깊은 헤아림을 할 정도로 눈치 있지 않은데요.”

“있…다니까.”

“당신 절대 눈치 없어요. 이상하네. 그것도 누가 언질해줬습니까?”

테이든은 정말 정확했다. 엄밀히 말하면 헤게르미가 언질해줬다. 테이든의 생각을 읽는 마법이 아니었다면 헤베는 테이든이 순수한 얼굴 아래로 어떤 풍기문란한 상상을 하는지 두 번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했을 테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말해준 그자예요?”

“…아, 아닌데.”

“대체 그자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아니라니까….”

헤베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반대로 심장은 쿵쿵쿵 세차게 뛰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열이 올랐다.

헤베는 테이든의 멱살을 잡았다.

“너, 솔직히 말해. 내 심장 뛰는 소리 들리지?”

“들리지만 아직 제 심장 뛰는 소리를 따라오려면 멀었습니다. 좀 더 분발하세요.”

그러자 헤베는 테이든의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꼭 붙이고 귀 기울였다.

“…….”

너무나 사랑하는 연인의 자비 없는 신체 접촉에 테이든은 돌덩어리가 되었다. 테이든은 헤베의 등을 쓸어내리던 손을 급히 떼었다. 더 만지고 있으면 자신이 무슨 짓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참고 있다니까… 혹시 참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인가요?”

“조용히 해 봐. 심장 소리 듣게.”

“…….”

잔인한 헤베는 가여운 영웅의 몸이 완전히 익어버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귀를 뗐다.

“왜 이렇게 빠르게 뛰어? 이러다 터지겠다.”

“걱정되면 이렇게 몸을 비벼오지 말아 주세요.”

테이든이 이마를 짚었다. 커다란 중심이 단단해져 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던 헤베가 테이든의 터질 듯한 심장 박동과 빨갛게 익은 얼굴을 보고 조금 몸을 비켜줬다.

그러자 이번엔 테이든이 손을 뻗어서 헤베를 단단히 안아왔다.

“비비지 말라며.”

“몰라요.”

테이든은 새침하게 말하고는 헤베의 체향을 느끼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헤베는 다시 테이든에게 편히 기댔다. 단단한 가슴에 볼이 눌렸다.

“집에 도착하면… 할 말이 있어.”

“지금은 말 못 하고요?”

“응.”

“궁금해서라도 여행을 빨리 끝내야겠는걸요.”

테이든의 낮은 웃음이 진동이 되어 헤베의 심장을 건드리고 떠났다.

헤베의 시선 끝에 꽃다발이 잡혔다.

다홍색 라넌큘러스와 테이든의 화려한 외모는 정말 잘 어울렸다. 꽃다발은 시들고 버려지겠지만, 이 기억은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오래라고 해봤자 4개월이지만.

‘첫 키스는 언제 하지.’

첫 키스 논의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헤베는 테이든이 날짜를 앞당기자고 말해 올 줄 알았다.

잊었나.

아니면 이제 키스하고 싶지 않아진 걸까.

무언가 알 수 없는 병을 앓는 흑마법사와는 입 맞추고 싶지 않은 건가.

‘나한테 욕정하면서.’

욕정하질 말든가. 혼자 다 참는 것처럼 얘기하면서 키스 얘기는 안 꺼내고.

헤베는 조금 삐뚜름해져서 테이든의 허리를 쿡 찔렀다.

“헤베, 제발요….”

테이든이 우는 소리를 했지만 봐주지 않았다.

***

다음 여행지에서는 헤베의 취미 찾기 대작전이 이어졌다. 그림과 글, 악기 연주 등.

헤베는 역시나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단, 마물 그림 한정으로.

먕먕이나 삑삑이, 빽빽이는 극사실적으로 당장이라도 그림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잘 그렸지만, 꽃다발은 자갈 덩어리들이었고 테이든은 동그라미들의 연결에 불과했다.

생각만큼 쉽게 그려지지 않자 헤베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값비싼 화구들은 딱 한 번씩 사용된 뒤 버려졌다.

글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헤베의 문장 구사 능력은 굉장히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잦은 보고서 작성으로 문장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걸 가지고 창작을 하지는 못했다.

“쉽게 생각하세요. 옛날 옛적에 한 공주님과 왕자님이 살았습니다… 동화를 떠올려봐요.”

“동화 읽은 적 없는데. 소설이나 시도 한 번도 안 봤어.”

“…….”

테이든은 즉시 그 마을에 존재하는 모든 서적을 사들였다.

오랜 전쟁으로 서적도 귀해졌다. 전쟁이 끝나고 출간된 소설들의 주제는 한결같았다.

마물의 편에 붙은 악랄한 흑마법사의 최후.

마물과 맞서 싸운 빛의 영웅들.

등등.

헤베는 흥미를 보였지만 테이든은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다음은 악기 연주였다. 헤베가 어떤 악기를 다루는지 미리 파악한 테이든은 연주 가능한 악기들만 사모아 숙소로 가져왔다.

헤베는 다양한 악기를 평균 이상으로 잘 다뤘다. 주로 하모니카와 피리 같은 가볍게 소지 가능한 악기들이었다.

“대단하네요. 본격적으로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왜 이렇게 잘해요?”

테이든은 옆에서 열심히 박수 치면서 감탄했다. 먕먕이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흥을 돋웠다.

겸손을 모르는 헤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옆에서 보고 따라 한 건데.”

“정말 천재네요. 마법에만 천재인 줄 알았는데 악기 연주까지 잘하다니.”

“뭐… 전쟁터에서 음악은 필수였으니까.”

전시에 음악은 음식과 물 만큼 중요했다. 황제는 사기진작을 위해 종종 음유시인들을 초대했고, 그때가 되면 병사들은 부상자들까지 전부 모여 둥글게 앉아 구경했다. 공연은 짧았지만 여운은 길었다. 음유시인이 돌아간 뒤에도 다함께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하모니카를 불거나 노래를 합창하고는 했다. 모인 인원이 줄어들고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가 또다시 없어지고, 사람은 계속해서 바뀌었지만 전쟁 속의 작은 여흥은 멈추지 않았다.

여덟 살 헤베도 전 궁사의 품 안에서 음유시인들의 공연을 즐겼다. 음유시인들은 왜 이런 어린애가 전쟁터에 있는지 의아해했다. 그들이 주고 간 사탕을 맛있게 먹은 헤베는 힘을 내서 다음날 또다시 마물을 도륙했다.

사령관이 된 후에는 여흥을 즐기는 병사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시력도 청력도 좋지 않아 멀리서는 그전처럼 즐길 수 없었지만, 그 시간 자체가 위안이었다.

과거의 상념에 빠진 듯한 헤베를 보며 테이든이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 집에도 연주실을 만들어요. 백작에게 악기를 사놓으라고 우편을 보내야겠네요.”

“굳이 안 그래도 돼.”

“나중에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전문가한테 배워.”

“아, 그럼 전문가를 초청해서 같이 배울까요? 음… 그런데 헤베가 제가 아닌 누군가랑 가까이 있는 건 싫은데… 곤란해요. 악기 연주 자세를 취하면서 신체 접촉 해오면 전 참지 못할 거예요.”

테이든은 살기까지 피어 올리면서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헤베는 가볍게 넘기며 웃었다.

***

우중충한 날이었다. 어젯밤 하늘을 보고 이미 비가 오리라는 걸 예측한 둘은 오늘 하루는 숙소에 머물기로 했다. 본래 칠일을 예상했던 여행은 벌써 열흘이 지났다. 테이든은 헤베에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으려는 마음인지 길을 재촉하지도 않고, 첫 키스날도 조용히 지나갔다. 다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헤베로서는 슬슬 초조해졌다.

그는 테이든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돌아올 반응은 무서웠지만 언제까지 속일 수는 없으니까.

테이든이 마련해놨다는 집에 도착하면 알릴 예정이었지만 여행이 길어지니 조바심이 들었다.

쏴아아- 빗줄기가 쏟아지는 창밖을 보며 테이든이 말했다.

“비가 많이 오네요. 내일도 올 것 같은데.”

“내일은 출발하자.”

“비가 와도요?”

“이미 일정이 많이 늦어졌잖아. 시간이 별로 없어.”

“…….”

테이든은 헤베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요람 위를 뒹구는 삑삑이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 헤베의 품에 안겼다.

-삐익.

헤베는 반사적으로 하얗고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면서도 당황해했다.

“왜 갑자기.”

“왜 시간이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제 휴가 기간을 말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늘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쟁은 끝났으니 여유를 가져요.”

“…알았어.”

테이든이 이렇게 나올 때마다 헤베는 너무 미안해서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도 하얀 털뭉치를 쓰다듬고 있으니 초조함이 조금 나아졌다.

오전 나절 내내 애완마물들의 재롱을 보면서 침대를 뒹굴다가 점심이 되어서 1층으로 내려갔다. 그들이 머무는 숙소는 2층부터는 숙박, 1층에는 음식점을 운영하는 곳으로 마을이 유명 관광지였기 때문에 사람이 많았다.

“음료는 자몽에이드로 할까요?”

“내가 주문할게.”

헤베는 후다닥 카운터로 달려갔다. 지갑이 생긴 헤베는 혼자 주문하고 혼자 계산하는 데에 재미가 들렸다.

어제 숙박을 시작한 미청년 일행이 다가오자 직원은 긴장했다. 직원들은 둘을 여행 중인 귀족과 기사라고 추측했다. 저 안경 낀 갈색 머리 미청년은 어딘지 창백해 보이는 낯빛에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대단히 체격이 좋은 금발 미청년이 극진히 모시는 걸로 보아 몹시 고귀한 신분임이 분명했다.

‘실수하지 말아야지!’

긴장한 직원들 앞에서 헤베 또한 긴장했다.

메뉴판에는 간단한 설명과 금액이 표기되어 있었다. 헤베는 테이든의 양을 고려해 열 가지가 넘는 요리를 주문했고, 자기 몫으로는 음료 하나만 시켰다.

지갑을 꺼내는데 열려있었는지 바닥으로 후두둑 내용물이 떨어졌다. 세공된 보석들을 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석함에 보관하는 게 아니라 돈과 함께 가지고 다닌다니 대체 저들은 얼마나 부자라는 말인가….

“제가 주울게요. 헤베는 자리에 가 있어요.”

어느새 다가온 테이든이 쪼그려 앉은 헤베를 부드럽게 붙잡고 일으켰다.

“…방에 가서 먹자.”

헤베는 완전히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돈을 떨어뜨리고 계산에 실패한 게 무척 자존심 상하는지 입을 댓말 내민 헤베가 테이든의 어깨에 얼굴을 박았다. 테이든은 헤베를 매단 채 보석과 돈을 모두 주워 담고 한 팔로 헤베를 안아 들었다.

“음식은 방으로 가져다주세요.”

“네, 네. 감사합니다.”

계산을 마친 후 바로 방으로 올라갔다.

“지갑 잘못 골랐어. 하얗고 귀여워서 샀는데 금방 고장 나!”

헤베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지갑에 화풀이했다. 실제로 고무줄 부분이 늘어나 완전히 잠기지 않았다.

“내일 사러 가요. 튼튼한 걸로.”

“네 지갑은 어때?”

“제 건 아직 멀쩡하죠.”

테이든이 지갑을 꺼냈다.

헤베는 냉큼 지갑을 가져가 날카롭게 살폈다. 단정하고 깔끔한 가죽 재질의 지갑.

“몇 년 썼어?”

“열다섯 살에 샀어요.”

“생각보다 오래됐네.”

5~6년 된 것 치고는 생활 기스 외에는 멀쩡했다. 헤베는 아무렇지 않게 남의 지갑 속 내용물까지 살폈다. 테이든의 손가락이 잠깐 움찔했다.

“이게 뭐야?”

지갑 안에는 돈 외에 손수건 뭉치가 있었는데, 헤베가 그것을 펼치자 웬 크고 작은 단추들이 나왔다. 예비 단추라고 하기에는 종류가 다양했다.

“들켰군요….”

테이든이 생글 웃으며 곤란한 척 턱을 괴었다.

“사실 이 지갑은 헤베의 단추를 보관할 용도로 샀답니다.”

“이게 다 내 단추라고?”

“네, 당신 몰래 훔친 것들이에요.”

테이든은 도둑질을 고백하는 것 치고는 굉장히 당당했다. 문제는 헤베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단추를 왜 훔쳐? 이상하네. 앞으로는 훔치지 말고 말하고 가져가.”

“…헤베, 저 말고 다른 사람이 단추 훔쳤다면 화냈을 거죠?”

“화낼 것까지야 없지. 그게 뭐라고.”

“화내야죠. 내야 합니다. 당신에게 음심을 품다 못해 당신의 신체와 맞닿았던 물건을 훔쳐다 자기 위로에 쓰려는 변태 이상성욕자라고요.”

변태 이상성욕자의 외침에도 헤베는 갸웃했다.

“단추로 마음의 위로가 된다면 좋잖아.”

“…….”

“나도 가죽 지갑으로 살래. 씻을 테니까 음식 오면 먼저 먹고 있어.”

이 대화 맥락에서의 ‘자기 위로’가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는 스물여섯 살 흑마법사가 욕실로 들어갔다.

아직 갈 길이 멀군. 허탈해진 테이든은 주섬주섬 지갑을 챙기는 그때였다.

-으읏.

솨아아, 물소리 속에서 언뜻 신음이 들렸다. 테이든은 그대로 멈춘 채 숨죽였다.

“…흐윽.”

고통에 찬 신음소리임을 확신한 테이든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곧바로 잠겨있던 욕실 문이 테이든의 괴력에 우지끈 부서졌다.

“헤베.”

테이든은 헤베를 흥분시키지 않기 위해 조용히 그를 불렀다. 헤베는 물을 최대한 튼 채 가슴을 붙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테이든은 우선 물을 끈 뒤 황성에서 챙겨온 가운을 들고 다가갔다. 헤베는 후다닥 욕실 구석에 몸을 붙였다.

“헤베.”

“…윽 …흣.”

구석에 붙어서 웅크린 작은 등에 테이든의 표정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몸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어째서?

한번 고통을 들킨 뒤 헤베는 딱히 숨기지 않았다. 그가 앓기 시작하면 테이든은 작은 몸을 꽁꽁 싸안은 채 진통제를 먹였고, 헤베는 테이든의 품 안에서 안정을 찾고는 했다.

왜 갑자기 숨기려 하는 거지?

테이든은 솟구치는 분노를 눌러 참으며 가운으로 헤베의 몸을 감쌌다. 가벼운 몸을 안아 들고 욕실을 나온 테이든은 어째서 헤베가 숨으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검은 혈관의 면적이 더욱 넓어졌다.

“보…지마!”

헤베가 꿈틀대며 테이든을 밀어내려 했다. 테이든은 미약한 저항을 간단히 제압한 뒤 헤베를 침대에 눕혔다. 헤베는 똑바로 있지 못하고 태아처럼 허리를 접었다. 주인의 이상 증세에 마물들이 털을 삐죽 세우고 주위를 빙 둘러쌌다. 테이든은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한 마리를 들어서 헤베에게 안겼다. 헤베는 본능적으로 털이 보송보송한 마물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선택된 마물은 먕먕이였고 작은 혀로 열심히 살결을 핥으며 위로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테이든으로서는 어느 정도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은 십여 분 후에야 멈췄다.

***

“좀 괜찮아졌어요?”

“응….”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테이든은 헤베를 부드럽게 일으켜 앉히고 등허리에 쿠션을 받쳤다. 이불을 허리까지 꼼꼼하게 감싸고 두 팔은 가지런히 모아서 이불 안에 넣었다. 헤베는 테이든이 하는 대로 가만히 앉았다.

테이든은 헤베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천천히 심기를 가라앉혔다. 헤베의 살결은 말랑말랑했고,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아무런 힘이 없었다. 이쪽에서 가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인형 같았다.

-삑삑.

테이든은 옹기종기 모인 마물들 중 가장 가벼운 삑삑이를 선택했다. 삑삑이를 헤베의 무릎 위에 올려놓자 헤베의 경직된 몸이 조금 풀어졌다.

그동안 종업원이 식사를 가지고 왔는데, 헤베가 음식 냄새를 못 견뎌 해서 수프만 빼고 전부 돌려보냈다. 테이든은 적당히 데워진 수프 그릇을 들고 헤베의 옆에 앉았다.

“기운 없어. 안 먹을래.”

“입맛 없는 거 알지만 약을 먹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식사를 해야 해요.”

“나는… 약하지 않아.”

“알아요. 너무 강해서 탈이죠.”

테이든은 수프를 조금 떠서 후후 불었다. 진이 다 빠진 헤베는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봤지만 귀여운 고슴도치나 다람쥐 같기만 했다. 테이든이 숟가락으로 헤베의 다 까진 입술을 톡 건드렸다.

“차라리 내가 직접 먹을게.”

헤베가 손을 들었다.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테이든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크게 들썩했다.

“저 너무 배고픕니다. 헤베가 한 그릇을 다 비워야 저도 식사를 하는데요. 제가 얼마나 많이 먹는지 알죠? 뱃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너도 얼른 먹어.”

“헤베가 다 먹은 뒤에야 식사할 건데요. 그 후들거리는 손으로 혼자 다 먹으려면 한 시간도 넘겠네요. 아, 정말 배고프다.”

헤베가 테이든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정말 뾰족한 눈초리였지만 테이든에겐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결국 헤베가 백기를 들었고 테이든은 천천히 수프를 떠먹여 주었다.

-삐이익.

수프를 받아먹으며 헤베는 몇 차례 삑삑이를 쓰다듬었다. 쓰다듬는 것도 노동이라 나중에는 지쳐서 팔을 늘어뜨리자 삑삑이가 조그맣고 동그란 머리를 헤베의 손바닥에 비벼왔다.

-빽빽.

-애웅.

빽빽이와 먕먕이도 헤베의 옆구리에 자리를 잡고 흰 털을 묻혀댔다.

“진짜 귀엽다.”

아무리 까칠하게 굴고자 해도 하얀 솜뭉치 같은 마물들의 애교는 이기기 힘들어서 헤베는 헤실헤실 웃어버렸다.

그렇게 수프를 반쯤 비우자 헤베도 힘이 생겼는지 팔다리를 쫙 펴며 여유롭게 기지개도 했다.

“이제 그만 먹을래.”

“네.”

수프 한 그릇을 다 먹일 것처럼 굴 땐 언제고 헤베가 진짜로 배부르다 말하자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너도 유치하게 단식투쟁하지 말고 얼른 먹어.”

“이따 내려가서 먹을게요.”

“여기서 먹어도 되는데.”

“냄새 싫잖아요.”

“먕먕이랑 새끼들도 밥 먹여야 해.”

“데리고 가서 육질 좋은 걸로 챙겨 먹일게요.”

헤베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발라당 누워 애교 부리는 먕먕이의 뱃살을 말랑말랑 만져댔다.

“우리 몰래 뭐 먹은 거 아냐? 배가 통통하네.”

“어렸을 때부터 통통했죠. 헤베가 너무 먹여대서.”

“네가 엄청 먹여댔지. 진이랑 마우가 먕먕이 돼지 된다고 잔소리하고 그랬는데.”

“그러는 둘도 우리 모르게 많이 먹였을 걸요.”

“하긴, 진은 처음엔 심하게 반대했어도 나중엔 우리보다 먼저 먕먕이를 챙겨줬어.”

열여덟 살, 전쟁에 투입된 테이든은 헤베 곁에서 함께 싸웠고, 그동안은 몰랐던 여러 모습을 발견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 마물을 상대할 때는 가차 없다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더.

헤베는 자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잔인하게 마물을 살육하는 대마법사는 하얀 털에 동그랗고 작은 마물들만은 살려줬다.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 날 헤베의 마법이 휩쓸고 간 대지에서 ‘역시 대단하다’ 감탄하는데, 작고 하얗고 동그란 것이 빼꼼 고개를 들고 눈치를 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연히 살아남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몇 번 반복되면서 헤베의 취향을 알게 되었다.

그때도 이미 ‘뮨의 친위대’는 그들끼리 강한 결속력과 유대감을 지닌 그룹이었고, 헤베에게 접근하는 다른 이들은 배척했다. 대마법사와 말 한 마디라도 섞고 싶던 사람들은 친위대에 막혀 씁쓸히 포기해야만 했던 시기였다. 당연히 테이든도 처음엔 배척당했다. 열여덟 살에 불과하던 테이든은 헤베를 어화둥둥 감싸기만 하는 저 친위대가 헤베를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한 원인이라는 걸 알았다.

싫지 않았다.

헤베는 이제와 밖에 내보내기에는 너무나 순수하고 여려서 테이든은 친위대를 와해시키기보다는 친위대의 일원이 되는 걸 택했다.

테이든이 하얀 털의 어린 마물을 주워왔을 때, 친위대의 반발은 무척 심했다.

‘궁사의 곁에 마물을 두자고? 대체 무슨 심리인지 모르겠군. 다른 이들이 궁사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싶나?’

‘사령관이 마물에게 정들었다가 손속이 약해지면 어떡합니까. 이곳은 전쟁터인데….’

근거 있는 걱정들이었다. 테이든은 그들에게 허가받기를 포기하고 바로 헤베에게 새끼 마물을 데리고 갔다. 동글게 몸을 만 연약한 하얀 털뭉치를 보자마자 헤베의 표정은 사르르 풀어졌고, 테이든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았다.

‘마물이라지만 아주 작은 새끼이고, 전쟁에 지친 사람에게 큰 힘이 될 거예요. 동물 테라피의 힘은 무시 못 하죠.’

테이든의 말은 정확했다. 헤베는 새끼 마물에게 먕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매일 품고 다녔다.

진이나 다른 이들이 먕먕이를 챙겨준 이유는 먕먕이가 헤베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흐아암.”

고통을 견디느라 진도 빠지고, 수프도 배부르게 잘 먹은 헤베가 이제 평안을 찾았는지 하품을 했다.

“헤베, 정말 단순하네요. 배부르면 바로 졸린가 봐요.”

테이든은 헤베의 등허리에 받친 쿠션을 꺼내고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서 눕혔다.

“낮잠 안 잘 거야. 시간 아까워.”

“어차피 비가 와서 밖에 나가지도 못해요.”

“비 그치면 저녁에 나가자. 지갑도 사고… 술도 마시고.”

“좋지요.”

헤베가 베개를 베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테이든은 이불을 덮어주다 말고 잠시 눈앞의 풍경을 내려다봤다.

하얀 가운이 풀어 헤쳐져 있었다. 옷자락 사이로 움푹 파인 쇄골이 드러났다. 뽀얀 허벅지에 남은 흉터들이 음란한 상상을 부추겼다. 납작한 배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천천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검은 혈관은 번개 맞은 흔적처럼 상체를 뒤덮었다. 그것은 어깨를 넘어 팔뚝까지 내려왔다. 헤베는 징그럽고 끔찍하게 여기는 듯하지만 오히려 음심을 부추기는 원인이었다.

둘만 있는 공간에서 무방비하게 누워 울망울망한 갈색 눈으로 올려다보는 헤베 뮨은 너무 자극적이었다.

테이든은 이불을 내려놓고, 가운을 추슬러주는 척하면서 손끝으로 헤베의 살결을 음미했다.

헤베가 흠칫 떨었다.

“너 열 있어?”

“제 손이 어떤데요?”

“네 손가락… 뜨겁고 딱딱해. 끝부분은 두껍고 몽퉁하고….”

“헤베, 제발 좀. 왜 말을 그렇게 해요. 열심히 참고 있는 사람 놀리냐고… 진짜 울고 싶네.”

“응?”

테이든은 한숨을 삼키며 헤베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하얀 이마에 입 맞추자 헤베가 배시시 웃었다. 광대가 동그랗게 솟았다.

“당신 차림새를 자각 좀 해줄래요.”

“아.”

헤베는 고개를 슬쩍 들어 다 풀어 헤쳐진 가운을 보고는 다시 폭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검은 혈관의 면적이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죽어라 감춘 게 얼마 전인데, 들키고 나자 바로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예민하게 까다로워 다루기 어렵지만 한번 적응하면 다루기 굉장히 쉬운 이였다.

“미안, 징그럽고 흉측하지.”

“전혀요.”

“징그럽고 흉측한 상태라는 걸 자각 좀 하라는 거잖아.”

“그게 아니라… 욕구불만 연인 앞에서 이렇게 노출하면 어떻게 될지 좀 위기감을 느끼라는 거예요.”

“어떻게 되는데?”

“…얼른 주무세요.”

테이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헤베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머리맡에 아무거나 잡히는 털뭉치를 한 마리를 놔뒀다.

-먀앙.

헤베는 옆으로 누워 먕먕이를 가슴께로 끌어안았다.

자세 때문에 이불이 흘러내리고 기껏 모아놓은 앞자락이 다시 풀어졌다. 테이든은 손가락으로 가늘고 가느다란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헤베가 간지럽다고 불평했다. 손가락은 목울대를 훑고 쇄골까지 내려왔지만 헤베는 거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상대가 검은 혈관을 징그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데에 만족한 듯했다.

테이든의 손가락은 어깨선을 쓰는 척하다가 슬쩍 가슴팍으로 내려왔다. 아무도 닿은 적 없을 여린 살결을 꾸욱 눌렀다.

-우우웅,

주인은 가만히 있는데 먕먕이가 털을 세우며 위협했다. 테이든의 손가락을 물까 말까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먕먕아, 왜 그래.”

-우웅.

“갑자기 왜 털을 세우지.”

“그러게요.”

인간보다 마물이 더 눈치가 빨랐다. 테이든은 시치미를 뚝 떼며 이불을 가슴 위로 끌어 올려줬다. 지나치게 순진무구해서 이렇게 애타게 만드는 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혼자 아파하며 고통을 숨기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혼자 고통 속에서 신음을 참던 방금 전 모습을 떠올리니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하고 두려운 광경이었다.

“그건 ‘흑혈화 현상’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했죠?”

“응.”

헤베는 어째서인지 갑자기 털을 세우는 먕먕이를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당신이 왜 흑마법을 받아들였는지는 압니다.”

헤베는 한 발짝 늦게 그 말을 이해했다.

“뭐?”

테이든의 희롱에도 가만히 있던 헤베가 눈을 크게 뜨며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제게 준 마검을 만들기 위해서 흑마법을 받아들인 거잖아요.”

“어?”

“…….”

“아, 어, 맞아. 마물왕을 죽일 마검을 만들기 위해. 오직 그 이유 하나뿐이고 다른 이유는 없지. 그래, 그것 때문이야.”

헤베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다시 누웠다.

지극히 안도하는 모습에 테이든이 이마를 짚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군요.”

“아닌데. 와, 완전 마검 때문인데.”

“저희도 그런 줄만 알았죠.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뭐 때문입니까?”

“아, 졸리다. 너무 피곤하고 지쳤다.”

헤베가 눈을 꾸욱 감았다. 테이든은 팔짱 낀 채 헤베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러나 곧 헤베가 절대로 진짜 이유를 답해주지 않으리라는 걸 안 테이든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풀었다. 헤베는 캐물을까 봐 걱정스러운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테이든은 손가락으로 주름을 슬슬 폈다.

“잘 자요. 저녁에 깨울게요.”

“으응.”

헤베가 피곤하고 지친 건 사실이라 그렇게 눈 감은지 얼마 안 되어 정말로 잠들었다.

새근새근.

테이든은 헤베가 곤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살짝 벌린 입술에 입을 맞췄다. 따스한 감촉은 애달파질 만큼 사랑스러웠다. 삑삑이가 헤베의 등 뒤, 빽빽이는 헤베의 다리 아래에 자리했다. 헤베의 품 안에 안긴 먕먕이는 이불 밖으로 꼬리만 빼꼼 내밀었다. 먕먕이는 열이 많은 마물이라 분명 더울 테지만 제 주인의 가냘프고 연약한 팔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테이든은 조심스레 문을 닫고 방을 나왔다.

“외출하십니까.”

복도에는 용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헤베는 몰랐지만, 그들은 황성을 나오고부터 내내 따라다녔다. 마부이자 심부름꾼인 동시에 호위병이었다.

“잘 부탁할게요. 아까 돈 쏟는 걸 많은 사람이 봐서 누군가 시비를 걸지도 모릅니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 누가 덤비겠습니까.”

거금을 받고 고용된 용병들이 믿음직스럽게 근육질 팔뚝을 들어 보였다.

“세 시간 후 오겠습니다. 2층은 제가 다 빌렸으니 누구도 못 올라오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용병들에게 재차 당부한 테이든이 1층에 내려오자 한순간 식당이 고요해졌다. 건물을 나서는 그의 뒤로 많은 시선이 따라왔다.

아침부터 날이 흐리더니 결국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종일 방 안에만 있는 건 몸에도 정신에도 좋지 않다.

‘저녁에는 비가 그쳐야 할 텐데.’

테이든은 골목을 지나 마을을 나왔다. 꽤 먼 길을 걸어 숲길에 다다르자 커다란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마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는 진과 파르테도 있었다. 테이든은 그들에게 새로운 진통제를 받고, 헤베의 몸 상태에 대해 알렸다. 흑마법을 받아들인 이유에 마검을 만드는 것 말고도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도. 헤베가 잠들었을 때 비밀리에 이뤄지는 만남이었다.

***

곤히 잠든 헤베는 테이든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에서 깼는데, 자연스럽게 일어난 게 아니라 방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에 정신이 든 것이었다. 청력이 좋지 않은 그에게도 들릴 정도였으니 바로 문밖인 듯했다.

“어이, 이 새끼들 그냥 죽여버리자.”

낯선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다니까. 기사가 아니라 단기 고용된 용병들이야. 망이나 잘 봐, 진짜 호위기사 올라오는지.”

“골목 입구에 모습이 보이면 폭죽을 터뜨리기로 했어. 그런데 그 자식, 분위기나 외모나 귀족 같던데.”

“귀족이든 호위기사든 뭐든, 이 시기에 그런 거금을 가지고 여행하다니 분명 예사 인물이 아닐 거야.”

대화 내용으로 보아 강도들인 것 같았다.

‘아, 강도구나. 난 또 큰일이라고.’

강제로 잠에서 깬 헤베가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삐이익.

삑삑이가 헤베의 허리를 밟을 뻔하다가 앞쪽으로 미끄러졌다. 빽빽이는 여전히 발치에서 새근새근 잤다. 먕먕이는 어느새 벌떡 일어나 문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문손잡이가 움직였다.

-우우우웅.

먕먕이가 꼬리털을 바짝 세웠다. 경계심 깃든 동공이 세로 모양으로 가늘어졌다.

“진정해. 인간은 공격하면 안 된다고 했지.”

헤베는 먕먕이의 등을 토닥였다.

-애오옹.

털이 평소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손바닥 아래로 딱딱하게 경직된 근육이 느껴졌다.

“어이, 안에서 무슨 소리 안 들렸어?”

“빗소리밖에 안 들린다. 얼른 문이나 따.”

헤베는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걸 보면서 태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에겐 강도들보다 먕먕이가 발톱까지 꺼낸 게 더 큰 문제였다.

“먕먕아, 안 돼. 진정해.”

-애웅. 우우웅.

먕먕이는 마물이었으며, 이렇게 작고 귀여워도 사람 손목은 아무렇지 않게 끊어버리는 턱 힘을 지녔다. 발톱에는 독성도 있어서 한번 할퀴면 신전에 들르지 않는 이상 치유 불가능했다.

-삐익.

-빽빽.

먕먕이가 이빨까지 드러내며 경계하자 삑삑이도 옆에서 똑같이 따라 했다. 빽빽이도 잠에서 깨더니 짧은 털을 잔뜩 세웠다. 세 마리가 일제히 꼬리를 부풀렸다.

“안 된다니까… 너네 인간 공격하면 나도 보호해주기 힘들어.”

-우웅….

먕먕이가 헤베의 손에서 벗어났다. 침대를 훌쩍 내려가 문 앞에 서서 바로 공격 자세를 취하는 먕먕이를 보고 헤베가 한숨을 내쉬었다.

수면 마법이면 간단히 해결하겠지만, 헤베는 마법을 되도록 아끼고 있었다. 수명은 단 일 분도 잃고 싶지 않았다.

“이제 거의 다 열었어. 귀족 도련님은 어쩔 거야?”

“반반하게 생겼잖아. 팔아야지.”

이 와중에 문밖에서 들리는 대화는 몹시 불량했다.

‘인신매매라.’

삼백 년간의 전쟁에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당연히 범죄도 늘어났다. 종전 선언 후에는 비센티아의 재건이라는 목표를 위해 지난 범죄자들까지 대부분 힘을 합치는 분위기였지만, 모든 이의 뜻이 합쳐지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딸깍,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돌아갔다. 그 사이 강도들이 문을 여는 데 성공한 것이다.

-크릉….

먕먕이가 공격 태세를 취했다. 똑똑한 마물들은 헤베를 혼자 두고 뛰쳐나가지 않았다. 세 마리는 헤베를 가운데에 놓고 그 앞을 가로막은 채 으르렁거렸다.

‘마법을 써야겠지… 재울까. 아니면 못 들어오게….’

헤베가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을 딛는데 핑, 현기증이 돌았다.

몸이 좋지 않으니 더욱 고민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 그는 마법은 도저히 쓰고 싶지 않았다.

‘가장 수명 소모가 적은 마법을….’

굳이 강도들의 얼굴 볼 필요 없이 방에 결계만 만들려고 했다. 그게 수면 마법보다 수명이 덜 줄기 때문에. 하지만 그마저도 망설여졌다. 헤베는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더 살고 싶어졌으므로.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으읏!”

극심한 고통이 심장을 격습했다. 통증이 닥친 지 얼마 안 되어 잠깐 방심했고, 대가는 컸다. 헤베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면서 협탁과 부딪쳤다. 협탁 위에는 잠에서 깬 헤베가 물을 찾을까 봐 테이든이 울려둔 물컵이 있었는데, 부딪쳐 흔들리다가 바닥에 깨지며 흩어졌다.

쨍그랑, 소음에 강도들도 급해졌다.

“씨발, 얼른 들어가!”

들이닥친 강도들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몸을 웅크린 청년을 보고 당황했다.

“뭐, 뭐야. 이 귀족 새끼, 왜 이래?”

“몰라, 일단 묶어서 자루 안에 처넣어!”

-크르릉!

“으악, 이 짐승들은 뭐야?”

먕먕이와 마물들이 헤베에게 접근하는 강도들을 가로막았다.

두 살이 넘은 어린 마물은 눈앞의 인간이 휘두르는 단검을 피해 팔목을 물어뜯었다.

“으아악!”

뼈째로 뜯어진 손목이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졌다. 붉은 피가 솟구쳤다. 방 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최대한 조용히 진행했어야 했는데, 현장을 들키게 된 강도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야, 수면향 피워!”

강도들은 용병들을 재우는 데 사용한 수면향을 사용했다. 먕먕이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라 헤베에게 가까이 다가간 강도의 두피를 발톱으로 긁었다.

-크르….

그 공격이 마지막이었다. 네 발이 덜덜 떨리더니 곧 앞으로 엎어졌다.

“돈과 보석 모조리 가지고 가야 돼. 확인해.”

부상자들을 수습하는 사이 한 명이 극심한 고통으로 경련하는 헤베의 몸을 뒤졌다. 가운만 입었던 탓에 상체 드러났다. 강도들은 검은 것으로 뒤덮인 헤베의 몸을 보고 말을 잃었다.

“젠장, 이 징그러운 건 뭐야. 설마 독이라도 당한 건가? 기사가 독을 먹이고 튀었다거나.”

“보석 찾았어! 일단 사람 올라오기 전에 묶고 자루에 넣어.”

“마물을 세 마리나 얻을 줄이야. 평생 먹고살 돈 다 벌었네. 인간은 납치하지 말까?”

두피가 뜯어진 강도는 출혈을 막으며 씨익 웃었다. 팔목이 잘린 강도는 잠이 든 먕먕이를 발로 찼다. 그들은 새끼들을 난폭하게 자루에 던져넣었다.

‘안 돼.’

수면향 덕분에 오히려 격통이 가시고, 흐릿하게 정신이 든 헤베는 자루로 던져지는 먕먕이를 보며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그때 거센 힘이 그를 붙잡아왔다. 퍼억, 거친 주먹질에 헤베의 고개가 돌아갔다. 뇌가 지잉, 울리는 타격이었다.

“무슨 독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고 있어라.”

강도가 헤베의 어깨를 끌어안고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수면약이 발라져 있었던 건지 헤베의 정신은 빠르게 흩어졌다.

‘내가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서.’

먕먕이와 마물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

헤베의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신이 들었을 때 헤베는 습하고 어두운 곳에 갇혀 있었고, 양발, 양손목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다.

“아직 정신 못 차렸어?”

“예.”

의자 끄는 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헤베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귀 기울였다.

“이쁘게 생겼는데 아깝네.”

“어쩔 수 없죠. 무슨 병인지, 저주인지 모르니까.”

목소리가 울리고 바닥은 찬 것이 지하 감옥 같았다. 헤베는 발을 꼼지락거렸는데, 간수들은 헤베의 외모에 대한 저속한 평가만 계속했다. 이쪽을 보지 않는다는 걸 안 헤베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한 평 남짓한 공간이었고, 눈앞에 쇠창살이 보였다. 인신매매범들은 하나같이 깡마른 남자들이었고, 허리춤에는 검을 매달았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지. 먕먕이랑 애들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누군가 먕먕이와 새끼들을 자루 안에 내던지는 모습이었다. 심장이 쿵쿵, 불안하게 뛰었다.

먕먕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몸이 떨려왔다. 그런 가정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수명이 아깝다고 망설이다니. 흑마법이 뇌까지 파고든 걸까. 너무나 멍청했다.

‘테이든이… 엉망이 된 방을 발견했을 텐데. 이곳이 멀지 않다면 금방 찾아올 거야.’

사실 테이든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헤베는 당장 손목과 발목의 족쇄를 풀고 저 사내들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마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마법을 사용하면 통증이 와.’

통증이 오면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순간이동 마법은 안 된다. 마물들을 어디에 뒀는지 알아내야 하니까. 닥쳐올 통증까지 고려해서 적절한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

“어, 뭐야. 일어났네.”

사내 하나가 헤베를 발견했다. 헤베는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가운 차림이라서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여긴 어딥니까?”

“어디긴 어디야. 범죄 소굴이지. 크, 이쁘긴 진짜 이쁜데.”

사내가 헤벌쭉 웃으며 다가왔다. 다른 놈도 열쇠 꾸러미를 달그락거리며 앞에 섰다.

“너 가슴에 그건 병인가?”

“네.”

“전염병?”

회귀 전부터 ‘전염’이라는 단어에 지긋지긋한 트라우마가 있는 헤베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전염 아닙니다. 와서 주물럭거려보세요. 절대 전염 안 되니까.”

“젠장, 전염 맞나 보네.”

“아니라니까요. 얼른 만지세요. 몸 곳곳을 전부요!”

“맞네, 맞아. 아까워 죽겠네.”

뭐가 아깝다는 걸까. 헤베는 남자들을 노려봤다.

그는 몰랐지만, 오히려 격렬한 반응 때문에 인신매매범들은 전염병임을 확신했고, 끔찍한 일을 면할 수 있었다.

“저와 함께 있던 동물들은 어떻게 됐어요?”

“아, 그 날개 달린 마물들.”

“마물 아니고 새끼 사자예요. 살아 있습니까?”

“알아서 뭐 하게. 앞으로 다신 만날 일 없을 텐데.”

헤베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나 감옥의 작은 창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달빛을 받으며 반쯤 나신으로 무력하게 사내들을 올려다보는 그는 굉장히 유혹적이었다.

사내들은 창살 안으로 손을 뻗었다가 정체 모를 전염병을 상기하며 입안을 다셨다.

“야, 가서 귀족 도련님이 깨어났다고 전해라. 전염병이라는 것도.”

“네.”

한 명이 위로 올라가고 이곳엔 중년 사내 혼자만 남았다. 헤베는 조금 초조해졌지만 여전히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사용 직후 오는 극심한 고통을 그를 무방비하게 만드니까 좀 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제 고양이들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가 가진 전 재산을 드리겠습니다.”

“사자라면서.”

“사자든 뭐든요.”

“넌 정말 귀족인가?”

“네? 네, 저, 정말 높은 신분의 귀족입니다.”

“흐음, 하긴 마물들을 애완용으로 기르려면 어지간하지 않고서야 안 되겠지. 탈리 제국 사람 맞나?”

“맞아요.”

손목이 쓰라렸다. 헤베의 피부는 매우 연약한 데 비해 이 족쇄는 너무 무거웠다.

“고양이들은 어디 있어요?”

“그걸 알아서 네놈이 뭘 어쩔 수 있다고.”

“위치를 알려주시기만 하세요. 어차피 제 사지는 묶여 있고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곧 죽으니까 알려주지 못할 이유도 없잖아요.”

“이미 죽었다면?”

사내가 턱을 쓸었다. 그 대수롭지 않은 한 마디에 헤베의 사고가 멈췄다.

‘먕먕이가 죽었을 리 없어.’

작고 귀엽지만 이런 놈 따위는 단번에 해치우는 마물이다.

‘내가 머뭇거렸어.’

수명을 아끼고 싶어서 망설이는 바람에 먕먕이와 아이들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난 왜 이럴까.

마계의 출입구를 닫을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헤베는 망설였다.

줄어드는 수명이 아까워서,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는데도 불구하고.

거대한 트라우마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헤베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가운이 거의 벗겨질 정도로 흘러내렸다.

간수는 좋은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크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헤베는 흥분해 날뛰려는 심장을 꾹 눌렀다. 이 죄책감을 견디지 않으면 먕먕이를 구하지 못한다.

‘방법을 생각하자. 어떻게든 마물들의 위치를 알아내야 해.’

“농담이다. 높은 값으로 팔 수 있는데 그걸 왜 죽이겠어.”

“어디 있어요? 어차피 전 죽으니 말해주세요.”

“글쎄다.”

‘테이든은 내 기척을 느낄 텐데. 가까이에 있을지도 몰라.’

황성을 나와 테이든을 진심으로 믿게 되면서 한 번도 생각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생활을 보호할 상황이 아니었다.

다행히 이 마법은 신이 준 것으로, 사용해도 통증이 오지 않는다. 헤베는 주문을 외웠다.

“윽……!”

눈앞에 보이는 새빨간 광경에 그는 신음을 삼켰다.

-헤베.

테이든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헤베의 이름을 부르며 적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바닥을 구르는 머리 중에는 헤베가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강도도 있었다. 테이든의 검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을 베는 것처럼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으아악!”

그때 위층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뭐야?”

간수 사내가 일어났다.

테이든이 바로 지척에 와있음을 안 헤베의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테이든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이러다 간수까지 죽여버릴지도 몰랐다.

헤베는 지체없이 마법을 사용해 족쇄를 풀고 쇠창살을 구부렸다.

계단 쪽에서 아까 올라간 사내가 굴러떨어졌다. 허리께까지만 잘린 참혹한 모습에 간수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헤베가 마법을 펼쳤다.

“테이든, 안 돼!”

헤베는 사내의 앞에 서서 결계를 만들어 보호했다. 헤베의 결계와 테이든의 검이 맞닿았다.

테이든의 얼굴은 헤베를 발견하고도 여전히 냉정했으며 단지 눈썹만 한번 꿈틀했을 뿐이었다. 두 눈으로는 헤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가운 차림의 반나신, 긁혀서 피가 나는 팔꿈치와 무릎, 생채기가 난 손목과 발목, 부풀어 오른 뺨, 붉어진 눈가.

테이든의 자주색 눈이 헤베가 가로막고 선 사내를 응시했다. 주위의 모든 것을 알려버릴 듯한 차가운 시선이 던져지자 사내는 겁에 질린 채 주저앉았다.

테이든은 다시 느긋하게 헤베를 바라보며 어여쁜 미소를 지었다.

“헤베, 그것을 왜 보호하나요?”

아주 부드러운 어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처참한 살기에 헤베는 급히 입을 열었다.

“먕먕이가… 읏.”

심장 부근이 찌릿해져 오기 시작했다.

“이자가 먕먕이가 어디 있는지 알아. 삑삑이랑 빽빽이도 데리고 갔어. 어디론가 판 것 같은데 이자를 죽이면 영원히 찾지 못해.”

“…그 마물들?”

테이든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직 테이든의 생각이 흘러나왔기 때문에 헤베는 깨달았다. 테이든은 마물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엉망이 된 방 안, 사라진 헤베 뮨. 테이든의 머릿속에는 그것만이 가득했다.

“내가 머뭇거렸어. 저들이 침입하기 전에 대처할 수 있었는데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어. 나 때문이야. 나는 아이들한테 문제가 생기면….”

고통이 극심해진 탓에 헤베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쓰러졌다. 바닥과 닿기 전 테이든이 빠르게 안아왔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를 지탱해준 단단한 팔뚝이 떨리고 있었다.

“흣…. 하아.”

헤베는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번 고통은 유난히 심했다. 오늘만 몇 차례나 마법을 사용해서인지.

수명이 얼마나 줄었을까. 하루이틀은 아닐 것이다.

기절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놓은 동안 흘러가 버릴 시간이 아깝다.

“헤베.”

고통에 바르작거리는 몸을 테이든이 강하게 끌어안았다. 귓가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절망에 찬 고함 같기도 했다. 이미 안고 있으면서도 하나가 되려는 듯 절박하게 안아오는 손길은 헤베에게 혼란을 가져다줬다.

“미안해… 내가….”

내가 이기적이라. 내가 죽어서 미안해.

내 시체를 붙잡고 울게 해서.

이번에도 그러한 미래가 반복될 거라서.

결국엔 먕먕이도 지키지 못하고, 테이든도, 이 세계도 지키지 못했다.

아무리 사과를 해도 부족한데 시간이 많지 않다. 헤베는 가만히 듣고만 있는 테이든의 품에 파고들었다. 까마득한 어둠이 찾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