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전쟁터에 들어와 헤베 뮨을 처음으로 본 신입 병사들의 생각은 대개 이러했다.
‘이렇게 어리다고?’
병사들은 손가락 쪽쪽 빨던 어린 시절에도 헤베 뮨의 명성을 들어왔다. 그의 실제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막연하게 20대 후반은 되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김새만으로는 10대 중반에 불과해 보였다.
외모 또한 놀라웠다. 가느다래서 더 연해 보이는 갈색 머리칼과 동그랗고 맑은 갈색 눈동자, 오뚝한 콧대와 하얀 피부, 붉은 입술…. 누가 봐도 전쟁터가 아니라 대저택에서 안락한 삶을 누릴법한 도련님이 아닌가.
여기서 신입 병사들은 생각했다.
‘아, 헤베 뮨은 정체를 숨기고 있구나.’
그 유명한 대마법사는 정체를 숨기고 예쁘장한 소년을 데려와 대역으로 두었다고 여긴 것이다. 허리에 검을 차긴 찼지만 휘두를 힘도 없어 보이는 예쁜 소년을 지키면서 싸워야 한다니 한숨도 나왔다. 대역이라도 좀 위엄 있는 자로 구하시지….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선임들은 초년병들의 착각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그들도 처음에 했던 착각이며, 한 번 전투를 치르면 따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게 될 테니까.
열여덟 살 소년의 마법은 그의 예쁘장한 외모와 다르게 파괴적이고 잔혹하다. 그 압도적인 학살을 보고 나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병사가 필요할까?
우리가 필요한가…?
“어때요?”
마우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도입부 나쁘지 않죠?”
진은 대답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다음 장을 넘겼다.
여덟 살 때부터 헤베를 보아 온 중년의 기사단장이 어디서 났는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탐스러운 빵을 달랑달랑 흔들며 헤베의 앞을 지나갔다. 맛도 안 나는 수프 그릇을 들고 퍼먹고 있던 대마법사가 입을 헤 벌리고 기사단장을 따라갔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곧 빵은 헤베의 손에 들렸다.
팔뚝만 한 커다란 빵이었다. 헤베는 바로 먹지 않고 조르르 막사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는 다쳐서 쉬고 있는 파르테 인듀런스가 있었다. 참전한 지 1년째인 파르테는 헤베와 동갑이라는 이유로 보조마법사가 되었다가 빠르게 친해졌다. 헤베에게 있어서는 첫 동갑 친구였다. 둘의 옆에는 냉랭한 표정의 요정족 소년도 함께였다. 얼마 전 란다 산맥 전투에서 헤베가 직접 데리고 온 이였다.
헤베는 빵을 삼등분해서 그들과 나눠 먹었다.
진은 페이지를 넘겨 중간 부분을 펼쳤다.
‘뮨의 친위대’가 모두 모인 시점이었다.
얼마 전 교전에서 대패한 뒤 헤베는 막사 안에서 두문불출했다. 수하들 눈치를 보면서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가 병사들과 눈을 마주치면 바로 쏙 숨어버렸다. 패한 건 헤베의 탓이 아니었다. 식량과 식수를 비롯한 물자가 제때 도착하지 않아 굶주림으로 지친 상태에서 기습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전멸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는데, 그건 오로지 헤베의 마법 덕분이었다. 살아남은 병사 중 일부는 총사령관을 비난했지만, 상관을 욕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인간 심리였다. 승패와 관련 없이…. 헤베는 성격상 병사들을 다독이는 연설 따위도 하지 못한 채 숨어 지냈고, 그것은 병사들에게 오만하게 비쳤다.
병사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어리고 오만한 대마법사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욕의 수위가 선을 넘을 때가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기본적인 상식이 많이 부족하긴 하죠. 얼마 전에는 시장이 뭐냐고 묻던데요. 생일이 뭐냐고 물은 적도 있고, 유명한 관광지 얘기가 나왔는데 먹는 거냐고 물어보기도 했어요.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저렇게까지 세상 물정 모르는 건 좀 문제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는 너무 커서 많은 병사에게 들렸다. 그중에 마우도 있었다.
“닥쳐, 좆 같은 새끼야.”
마우는 스무 살이었고, 말을 하던 병사도 그 또래로 보였다. 병사는 이번 교전에서 고향 친구를 잃었다. 마우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병사의 멱살을 붙잡고 말했다.
“저 사람은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들어왔어. 주위 어른들이 알려준 거라고는 탈골된 뼈를 맞추는 방법이나 숨어있는 마물을 찾아내는 방법 따위밖에 없는데 시장이니 생일이니 무슨 수로 알겠어, 씨팔놈아. 오히려 우리 사령관이 생일이 뭔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느껴야 하지 않냐고. 아니면 너네도 어릴 때부터 무기 취급이나 받으면서 살아본 다음에 욕하든가!”
마우는 씩씩거리며 병사를 내동댕이쳤다. 그녀가 뮨의 친위대에 합류하게 된 계기였다.
마우가 없을 때 그 역할을 하는 이는 파와이나 밀리안이었다. 지첸은 욕하지 않고 대뜸 주먹질하는 타입이었고, 진은 좌천 보내는 것으로 대응했다.
육아는 힘들다. 아이 정신 상태가 매우 피폐하여 피해망상과 자기혐오가 가득하다면, 심지어 어디 한가하고 고즈넉한 곳에서 마음을 치유할 시간도 없는 환경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만 그들의 경우는 다행히도 공동육아였다….
“헤베 님이 보시면 안 되겠군요.”
“어차피 보좌관님만 다 보면 태울 거예요.”
힘든 나날이 떠오른 진은 잠깐 한숨을 내쉰 뒤 페이지를 넘겼다.
정찰하느라 멀리 나가 있던 지첸이 빵을 가지고 돌아왔다. 흰 털을 지닌 새끼 마물을 조물거리던 헤베는 빵 냄새에 이끌려 나왔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고 빵은 주인을 찾아갔다. 다같이 나눠 먹기엔 작은 빵이었다.
총사령관에게 이목이 쏠렸다.
우리 작은 다람쥐는 빵을 누구에게 먼저 가져갈 것인가. 부사령관인 진, 가장 오래 안 친구인 파르테, 화려한 걸 좋아하니까 루니스?
여러 쌍의 시선이 각자 기대를 품고 헤베의 뒤를 따랐다.
헤베가 찾아간 곳에서 신탁의 영웅이 활짝 웃었다.
기분이 안 좋아진 진이 눈썹을 꿈틀했다.
전쟁 막바지, 겨울.
작전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각자 부상을 치료하고 대충 상황을 수습한 친위대는 자연스레 헤베의 막사로 향했다. 살짝 열린 틈으로 헤베가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시선의 끝에는 부상자를 돌보는 테이든이 있었다. 여기저기 땟국물 가득한 병사들과는 달리 혼자 천연한 빛이 났다. 어디서 씻고 왔는지 금색 머리칼에는 기름이 흐르지 않았고, 피부도 하얬으며 의복 또한 구김 없이 깔끔했다.
테이든은 부상당한 병사에게 자상하게 미소 지은 뒤 다음 병사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땀을 닦아줬다. 몇 명을 보살피는 동안 헤베의 막사에서 잘 보이는 각도로 자세를 유지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고결했다.
햇수로 2년째, 친위대는 테이든을 볼 때마다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있잖아…….”
수하들이 다가오자 헤베는 고민이 있다며 말했다.
“심장이 갑자기 거세게 뛰는 병도 있어?”
“갑자기 심장이 거세게 뛰는 병 말입니까.”
“응, 특히 특정한 누군가를 볼 때면 몸에서 뛰쳐나올 기세로 심장이 뛰는데 아프거나 하진 않아. 뭘까…. 병은 아니겠지. 이런 저주가 있다고는 못 들었는데.”
거의 공개 고백이었다.
“그런 저주가 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몸을 보중하십시오.”
진만이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착잡했다.
이 거리라면 들렸을 것이므로…….
그들의 예상대로 막사 밖에서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돌보는 척하던 테이든이 그야말로 날아갈 듯 행복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의 미간에 주름이 잔뜩 만들어진 것을 보고 마우가 속삭였다.
“놔둬요. 어차피 헤베 님이 감정 자각하려면 500년은 있어야 해요. 아무튼 이번 생은 아니에요.”
반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날로부터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둘은 연인이 되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죽었다 깨어난다면 모를까 절대로 사랑이란 감정은 자각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얼마나 마음에 안 들었으면 하늘까지 치솟을 기세였다.
친위대는 <뮨의 일대기> 작업 중이었고, 그가 읽고 있는 것은 마우가 작성한 초고였다.
“굳이 사랑 이야기를 넣을 필요가 있습니까.”
“많이 넣지는 않을 거예요. 회귀라는 건 믿기 어려우니 사랑의 힘으로 극복했다고만 쓸 생각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그들도 헤베가 회귀했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알았다. 헤베가 죽은 뒤 테이든이 세상을 멸망시켰다고. 듣는 순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라면 분명 그리했을 테니까. 그들도 멸망에 앞장섰으리라는 건 듣지 않아도 알았다.
전쟁터라는 잔인하고 끔찍한 공간에 싹을 틔워버린 여린 화초를 애지중지 열심히 키워놨더니 흑마법사가 되어 죽었다?
행복에 겨운 얼굴 보겠다고 힘들게 양육한 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일반인이 회귀했다는 사실과 그 이유 등을 납득하기는 어려울 테니 통째로 들어낼 생각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어쨌든 사랑의 힘이 크잖아요. 헤베 님이 흑마법사가 된 이유도 결국 사랑 때문이었고…. 테이든이 다친 그 날 흑마법을 받아들이셨으니까요.”
“우연입니다. 테이든 공작이 다치지 않았어도 그날 흑마법사가 되셨을 겁니다.”
“그래도 정황상….”
“일대기에 사랑 때문에 흑마법을 받아들였다고 쓸 생각입니까?”
“그렇게는 못 하죠. 흑마법사가 된 건 본의가 아니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한데.”
“사랑 부분은 다 제외하도록 하죠. 사심이 섞인 부분도.”
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예에….”
마우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재미는 있었어요?”
“…….”
진은 말없이 초고를 태웠다.
이 초고는 친위대끼리 즐기려고 쓴 것이고 정식 일대기는 좀 더 담백하게 쓸 예정이었다. 물론 담백한 일대기가 완성된 후에도 헤베가 그걸 볼 일은 없었다.
그가 본다면 첫째로 타락한 흑마법사를 불쌍하게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 죄책감이 솟구칠 것이고 둘째로 자기가 너무 순진하게 묘사되는 점에 크게 토라질 것이며 셋째로 과거의 이런저런 일들이 다 친위대와 테이든의 계략이었다는 걸 알면 충격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헤베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진다면 누군가 쓴 소설이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최근 헤베는 취미를 찾기 위해 열심이었는데, 동화나 시, 소설 등 독서는 장르를 불문하고 취향이 아닌 듯했다. 그가 흥미를 갖고 읽는 건 어렵고 복잡한 용어로 도배된 학술지뿐이었다. 때문에 하베트 스완과 루니스가 그에게 보여줄 논문을 올리겠다고 경쟁 중이었다.
“헤베 님께서 대신전 개관식에 참석하기로 하셨습니다. 당분간은 집필 중지입니다.”
“오, 정말 오신 대요?”
“일반 귀족으로 위장해서 오신다고 합니다. 황제폐하와 측근만 알고 계시니 다른 이들에겐 말하지 마십시오.”
“네. 후후, 오랜만에 보네요.”
마우가 즐거운 듯 웃었다. 헤베와 함께 저택에서 사는 진과는 달리 마우는 황성 수호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으로서 황성에 머물렀다. 현업을 유지 중인 것이다. 루니스야 궁사로서 바쁘게 지내고, 지첸과 파르테, 밀리안, 파와이 모두 비센티아의 평화를 위해 직업을 유지했지만 진은 미련 없이 백수가 되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헤베의 곁에 머무르는 이는 친위대 중 테이든과 진뿐이었다.
“일주일 전 저택에 오지 않았습니까.”
“네, 그러니까 오랜만이죠.”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진이 일어났다. 마우는 응접실 앞까지만 배웅 나왔다. 그녀는 헤어지기 전 다시 한번 물었다.
“일대기는 좀 재미있었어요?”
진은 잠깐 하늘을 한 번 쳐다본 후 대답했다.
“슬프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