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대신전 건설 기간은 늘었다가 줄어들었다 했다. 처음엔 완공까지 삼 년을 예상했다가 중간엔 오 년으로 늘었고 나중엔 이 년으로 줄었다.
온몸에 퍼진 마기를 중화하느라 오랫동안 누워있던 헤베가 열심히 재활 운동을 하고 다시 일 년이 지나 자기 힘으로 정원을 한 바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쯤 대신전 완공이 한 달 남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결국 대신전은 설계 때 예상했던 대로 삼 년 만에 완공되는 것이었다.
헤베의 체력이 나아졌다지만 아직은 먼 길을 가기가 어려웠다. 대신전까지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는 힘들 것 같아서 수하들이 순간이동 마법을 권했지만 헤베는 거부했다.
“그동안 취미를 찾으면서 생각해봤는데 난 여행이 취미인 것 같아. 여행하면서 갈래.”
황성에서 저택까지 오면서 보냈던 열흘 남짓한 나날이 상당히 즐거운 추억으로 남은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도들의 습격이 있기 전까지, 돈 걱정 없이 가장 좋은 숙소에서 뽀송한 이불을 덮고 맛있는 빵을 먹고… 근처 관광지를 구경하다가 몸이 피로하면 일정을 뒤로 한 채 쉬고… 옆을 보면 모든 걸 맞춰주는 잘생긴 연하 남자친구가 빙긋 웃고 있고…. 모든 수발은 그 남자친구가 들었으니 얼마나 편하고 즐거웠겠는가.
헤베가 여행이 취미라고까지 말하는데 말릴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 헤베는 정말로 열심히 재활 운동을 해야만 했다.
여행까지 남은 시간, 약 보름.
인원은 물론 헤베와 테이든, 단둘이었다.
하베트는 개관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고, 진은 헤베와 테이든의 안락한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저택을 나섰다.
헤베는 여행에 대비해 조금 무리인가 싶을 때까지 운동해서 체력을 키웠다.
테이든은 헤베를 힘들게 할 생각은 없었으나 헤베가 건강해지고 싶어 해서 그 또한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헤베가 건강해진다면… 테이든도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여러 가지로…….
***
-미양!
먕먕이가 호수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밍!
-맹맹.
삑삑이와 빽빽이도 뒤따라갔다. 헤베는 테이든에게 안긴 채 마차에서 내렸다.
“애들 이름을 밍밍이랑 맹맹이라고 바꿀까 봐.”
“그러게요.”
마물들은 이제 삐익, 빼액 하며 울지 않았다. 청소년 시기라서 몸집은 아직 먕먕이보다는 작았지만 그건 먕먕이도 그사이 컸기 때문이었다. 먕먕이는 이제 완전한 성체가 되었다.
테이든은 헤베를 안고 호숫가 근처에 다가갔다. 벤치의 푹신한 방석 위에 낙엽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헤베는 낙엽을 보고 웃었고, 테이든은 덩달아 웃으면서 ‘벌써 가을이군.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라고 생각했다.
낙엽을 치운 뒤 헤베를 앉혔다. 옆구리에 끼고 온 발 받침대를 내려놓고 손수건을 깔자 헤베가 자연스럽게 맨발을 올렸다. 마차에 두고 내린 신발은 시종이 별장에 옮길 터였다.
“뭘 그렇게 봐.”
테이든이 맨발을 응시하자 헤베는 부끄러워하며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테이든은 참지 못했다. 못생기고, 아름다운 발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붙잡고 발등에 입술을 맞추자 헤베가 기겁했다.
“진짜 발에다 그러지 좀 마! 입술 놔두고 왜 발에다 하냐고. 이해를 못 하겠어. 오늘도 입술에는 한 번밖에 안 해줬으면서.”
“너무 아름다워서 어쩔 수 없었어요.”
“이게 뭐가 아름답다는 거야. 입술에는 한 번밖에 안 했는데 벌써 해가 지려고 하는데.”
헤베가 오늘 키스를 한 번밖에 안 해서 서운하다고 거듭 말해왔다. 너무 귀여웠다. 테이든이 옆에 앉자 헤베가 기다렸다는 듯 기대왔다. 어깨와 팔뚝이 맞닿았는데, 헤베의 몸은 다소 찼다. 테이든은 날씨가 좀 춥지 않나 싶었다. 물론 그는 춥지 않았으나 헤베를 오래 두기에는 쌀쌀한 날씨인 것 같았다.
“물에 들어가진 않을 거죠?”
“들어갈래.”
“음, 수온을 재봐야겠네요.”
“나도.”
일어나는 테이든에게 헤베가 답삭 달라붙었다. 테이든은 헤베를 한쪽 팔 위에 올렸다. 헤베는 테이든의 목을 감고 탄탄한 팔뚝에 엉덩이를 비비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
물가로 다가가자 마물들이 첨벙거리며 다가왔다. 뭍으로 나온 먕먕이가 몸을 부르르 떨며 물을 털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튀는 순간 테이든은 입수는 안 된다고 결론 내리고 헤베를 안은 채 뒤돌아섰다.
“어? 왜?”
“물에 들어간다면서요.”
“응.”
“별장 안에 욕탕이 넓어요.”
“그 물 말고 호수 말한 거야.”
“헤엄치기에는 물이 차가워요. 보세요. 먕먕이도 추워서 기침하잖아요.”
테이든의 말에 물장구치던 먕먕이가 퍼뜩 놀라면서 엣취, 재채기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또 다른 지시가 내려올까 봐 재빨리 별장으로 파닥파닥 날아갔다.
“한겨울도 아니고 괜찮아. 예전에는 삼일 밤낮 동안 한랭 빙하 지하 호수에서 마물을 추적한 적도 있는데.”
요즘 헤베는 건강했을 시절을 자주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귀엽고 안쓰러웠다. 테이든은 헤베를 안은 채 별장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당신 감기 걸리면 안 됩니다. 전 오늘 아주 날을 잡고 왔거든요.”
“무슨 날?”
“이제 헤베 건강하잖아요. 그렇죠? 넓은 정원도 한 바퀴 달렸지요.”
“응.”
“우리도 연애한 지 3년이 되어가고요.”
“응….”
헤베가 수줍게 볼을 붉혔다.
“저는 이제 더 못 참겠어요.”
사랑에 빠진 맑은 갈색 눈동자를 보며 테이든이 결연하게 말했다.
헤베는 발그레 홍조를 띤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뭘?”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임을 알아서 한숨이 나왔다. 모르는 척이라든가, 밀고 당기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3년까지는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테이든은 헤베의 귀에 속삭였다.
“오늘 끝까지 할 거라고요.”
“…….”
헤베의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눈을 빠르게 깜박이더니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테이든보다 더 결연한 표정이었다.
별장 내부에는 시종 몇이 있었다. 테이든은 그들에게 먕먕이와 마물들을 데리고 별채에 가 있으라고 지시했다. 종종 있는 명령이라 시종들은 순순히 따랐다. 오늘 헤베를 잡아먹을 생각이라는 걸 안다면 반항했을 터였다.
***
마침내 밤이 되었다.
침대 위에 다소곳하게 누운 헤베의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테이든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
‘너무 심장이 뛰면 안 되는데.’
걱정스러웠지만 사실 테이든의 심장이 더 크게 뛰고 있었다. 테이든은 헤베의 위에 올라가 몸을 겹쳤다. 위에서 볼 때는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체구 차이였다.
헤베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네가 원하는 자세로는 못할 것 같아.”
“제가 원하는 자세요? 그게 뭔지 알아요?”
“…….”
2년 전에 봤던 테이든의 망상을 떠올린 헤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테이든도 덩달아 빨개졌다.
“뭘 어떻게 상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한테 무리시키진 않아요. 절대로….”
테이든은 한쪽 팔로 헤베의 얼굴 옆을 짚었다. 둘 다 처음이었으나 이 밤이 아주 길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
긴 밤을 보낸 헤베는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사실 일어났다기에는 간신히 눈만 뜬 것에 불과했다. 팔다리가 언젠가 봤던 뼈 없는 마물처럼 흐느적거렸다.
“나 뼈 녹았나 봐….”
“그런가 봐요. 큰일 났네요.”
반면 테이든은 아주 멀쩡했다. 멀쩡하다 못해 피부에 윤기가 돌고 두 눈은 초롱초롱했으며 활기가 넘쳤다. 기쁨과 행복의 감정이 가득했다.
테이든은 헤베를 안아 들며 체온을 재봤다. 미열이 있었지만 기침은 없는 걸로 보아 감기는 아니었다. 단지 어젯밤 무리해서 열이 난 모양이었다. 어젯밤 헤베의 모습을 떠올리자 테이든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빨개졌다. 테이든의 체온 때문에 더 열이 오르자 헤베는 덥다며 칭얼거렸다.
침대에서 내려와 별장을 나가고 저택에 들어설 때까지 헤베는 신발을 신지 않았다. 테이든에게 안겨서 별장을 나와, 안긴 채 마차에 눕혀지고, 안긴 채 저택에 들어섰다.
진은 미리 길을 나섰고 하베트는 연구실에 틀어박혀 논문 작성 중이다. 둘 중 하나라도 있었다면 칼부림이 났겠지만 다행히 있는 사람들은 시종과 집사장뿐이었다.
저택 시종들은 제과제빵 준비를 다 해놓고 기다리던 참이었다. 거사를 치를 줄 몰랐던 헤베가 호숫가 별장에 다녀온 뒤 빵을 구울 거라고 미리 말해놨기 때문이었다. 테이든은 잠들락 말락 하는 헤베에게 속삭이듯이 물었다.
“헤베, 오늘 빵 만들 거예요?”
“내이일… 에에….”
헤베는 해롱거리면서 대답했다. 마지막 힘을 짜내 내뱉은 듯 그 말을 마치고 고개가 푹 꺾였다.
테이든은 헤베를 안지 않은 팔로 고개를 아프지 않게 붙잡고는, 집사장 데이지에게 난처한 듯 웃었다.
“보다시피 피곤해 하셔서 내일 만들게요.”
“기어코 하셨습니까.”
“하하…….”
“식사는요?”
“별장에서 간단히 수프를 먹였어요.”
“저녁 때는 연한 고기를 준비하겠습니다.”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꺼내놓은 도구들을 다 집어넣고 내일 다시 꺼내 깨끗하게 닦아서 준비해야 했지만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
테이든은 헤베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잘 덮어준 다음 그 옆에 앉았다.
새근새근 잘 자는 모습을 보니 다시 욕망이 솟구쳤다.
‘너무 심했나.’
테이든도 반성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안 할 마음은 없었다. 헤베도 몹시 좋아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쾌락에 약한 타입이라 유혹하면 바로 넘어올 것이다.
테이든은 잠이 든 헤베의 가는 머리칼과 퉁퉁 부은 눈꺼풀, 발그레한 뺨, 목덜미의 오래전 흉터 등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다가 아예 자세를 잡고 마사지를 시작했다. 허리와 팔, 다리 등을 적당하게 압박하며 주무르던 그는 해가 지기 전 연인을 깨웠다.
헤베는 아직 재활 중이었고 하루에 한 시간씩은 반드시 걸어야 한다는 하베트 스완의 엄명이 있었다. 해진 후 루니스가 만든 온실에서 걸어도 되지만, 이왕이면 햇볕 아래를 걷게 하고 싶어서 해가 지기 전 깨운 것이다.
테이든은 헤베의 열을 잰 후 신발을 신겼다.
“다행히 열은 가라앉았네요.”
“진짜 건강해졌나 봐. 오늘도 해도 될 것 같아.”
헤베는 정말 쾌락에 약한 타입이었다. 너무 순수한 나머지 욕망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테이든은 헤베의 쾌락에 약한 면을 이용하려고 했던 방금과는 달리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이라도 정신을 붙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허리는 괜찮아요?”
“멀쩡해. 그냥 조금 저릿한 거 말고는 통증이 없어.”
헤베가 자는 사이 열심히 마사지한 보람이 있었다.
“나 진짜 튼튼해졌나 봐, 테이든. 오늘 또 해도 될 것 같아.”
“…….”
테이든은 정말 정신 단단히 붙잡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정원에는 헤베를 위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아무도 지시하지 않았으나 시종들이 늘 가꾸고 꾸미는 곳이었다.
헤베의 1년은 통째로 날아갔다.
잠에서 깨어나면 조금 걷다가 다시 잠들고의 반복이었으니 저택 시종들과는 서먹한 사이였다.
중화제가 완성되고 나서야 헤베의 시간도 흐르기 시작했다.
워낙 피해망상이 심하고 경계심 많은 사람이라 마음을 여는데 최소 1년은 걸리리라 예상했는데, 헤베는 생각보다 빨리 마음을 열었다. 먕먕이와 새끼 마물들 덕분이었다.
헤베가 잠든 1년간 먕먕이와 새끼 마물들이 저택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었고, 마물들에게 잘해주고 서로 잘 어울리는 그들의 모습에 헤베도 빠르게 정을 붙인 것이다.
그에게 은혜를 갚겠다며 모인 시종들은 아주 지극 정성이라 모두 다 친위대나 마찬가지였다. 테이든은 헤베에게 이 산책로는 시종들이 직접 땅을 파고,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서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헤베는 가만히 듣기만 했고 따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는 않았는데, 이후로 산책로를 걷는 횟수가 좀 더 많아졌다.
“우리 여행에 먕먕이도 데리고 가자.”
“좋아요. 삑삑이랑 빽빽이는요?”
“걔네는 너무 사고뭉치야. 말을 안 들어. 대체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어.”
“먕먕이 말은 잘 듣던데요. 한번 으르렁하니까 바로 꼬리 말더라고요.”
“그나마 먕먕이가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놔두고 가. 감당이 안 돼.”
“전 먕먕이도 놔두고 가도 좋을 것 같은데… 아니, 장난이에요. 죄송해요. 농담이 심했죠.”
“놀랐잖아….”
“죄송해요. 헤베는 정말 먕먕이를 좋아하네요. 먕먕이가 사람이었으면 저 같은 건 아주 안중에도 없겠어요.”
“나 심장 약해서 놀라니까 그런 농담은 하지 마.”
먕먕이와 헤베의 관계는 이제 더욱 돈독해져서 테이든이 질투할 정도였다. 헤베는 농담으로 치부했지만 너무나 진심이었다.
-미양!
멀리서 집사장에게 안겨있던 먕먕이가 자기 이름이 들리자 후드득 날아왔다. 헤베는 활짝 웃었다.
“먕먕이, 왔어? 애들은?”
-미양, 먕. 먀앙.
털갈이 시즌이라 날갯짓할 때마다 털이 휘날렸다.
“엣취.”
가을로 접어든 날씨 때문인지 털 때문인지 헤베가 재채기했다. 그러고선 테이든에게 다급히 말했다.
“이거 재채기야. 기침 아니고 감기 아니야.”
“흐음.”
“나 완전 건강해.”
기침 한 번 하면 바로 온실이나 저택으로 내쫓긴 적이 많아서 하는 소리였다. 산책이 끝날까 봐 초조한 헤베의 예쁜 얼굴을 잠시 감상하던 테이든은 곧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아, 정말 귀엽네. 알겠어요. 산책 계속합시다. 먕먕이는 저 주시고.”
“응.”
헤베가 냉큼 먕먕이를 넘겨줬다. 각고의 노력 끝에 예전 근력의 반절 정도는 되찾았지만, 성체가 된 먕먕이가 퍽 무거워졌기 때문에 안고 걷기에는 힘들었다. 먕먕이 크기는 거의 테이든의 상체만 했다.
-미양.
자기가 아직도 아기인 줄 아는 먕먕이가 테이든의 품에 안기며 털을 묻혀댔다.
“난 나대족이 이렇게 크게 자라는 줄 몰랐어. 전쟁터에서는 성체 나대족을 보기가 힘들거든.”
“저도 놀랐어요. 의원 말로는 앞으로 더 자란다고 하더군요. 헤베가 타고 다녀도 된다던데요.”
“먕먕이를 타고 다닌다고? 말도 안 된다, 진짜. 아직 애긴데.”
물론 헤베도 먕먕이가 아직 아기인 줄 알았다. 그는 고롱고롱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먕먕이의 턱을 긁었다.
“날개 달린 하얀 마물 등 위에 올라탄 헤베의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벅차네요.”
“너도 살 빼서 빽빽이 등에 타.”
“노력할게요.”
테이든은 미소지으며 헤베의 발밑을 살폈다. 헤베가 조금 빠른 속도로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 앞에 혹시 돌부리나 자갈이 있지는 않은지…. 아무것도 없더라도 헛디뎌 넘어질까 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진짜로 살 빼. 정말 근사해질 거야.”
진지한 음성에 테이든이 걸음을 멈췄다.
옆 사람이 멈추고도 무려 다섯 걸음이나 더 걸었던 헤베가 뒤를 돌아봤다. 테이든은 충격받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왜?”
“저 지금은 안 근사해요?”
“근사하고 멋있긴 한데… 빽빽이 등에 올라탈 수도 없을 정도로 너무 덩치가 커졌잖아. 내가 자는 동안 근육 운동만 했나.”
“헤베는 날렵한 몸매가 좋으세요?”
“막 우락부락한 것 보다는 슬림하고 날렵한 게 좋긴 하지.”
“제가 우락부락하다고요…?”
상처받은 테이든이 부들부들 떨었다. 먕먕이가 애옥, 울면서 품에서 뛰쳐나와 멀리 사라졌다.
“우락부락…….”
테이든은 분노와 배신감, 슬픔, 비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우락부락하지 않은 남자에 대한 시기와 질투 등 온갖 감정에 휩싸인 채 헤베를 바라보았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기도 했다.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더 했다가는 테이든이 받아들인 적도 없는 마기를 내보내 세상을 멸망시킬 것 같은 분위기였다.
헤베는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맑은 웃음소리를 듣고 테이든이 눈을 깜박였다.
“와… 헤베.”
테이든은 팔짱을 끼더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애는 빨리 배운다더니 이제는 막 농담도 하고. 진짜 놀랐잖아요.”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헤베는 급격히 성장했다. 예전에는 거짓말 한 번 하려고 하면 말을 더듬거나 시선을 회피하거나 표정으로 ‘이건 거짓말이다’ 알려줬는데 이제는 꽤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웠다.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른 후부터….
여덟 살에 머물러 있던 헤베는 모든 일이 끝난 후 빠르게 성장해갔다.
“미안. 근데 이런 말에 왜 속아. 나는 당연히 네가 어떤 형태든 좋지. 날렵해도 좋고, 우락부락해도 좋고, 동그래도 좋고, 빼빼 말라도 좋아.”
“저 근사하지요?”
“어떤 모습이든, 너무 근사해.”
테이든이 미소를 머금었다. 둘은 다시 산책로를 걸었다.
해가 하늘과 땅의 경계에 걸려 있었다. 붉은 노을이 둘의 그림자를 기다랗게 만들었다. 산책로를 둘러싼 나무들은 그들이 가는 길을 울긋불긋한 낙엽으로 장식했다. 헤베는 낙엽을 피하기도했고, 낙엽만 골라 밟기도 했다. 어렸을 때 하지 못했던 장난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좋다며 연거푸 밟다가 넘어질 뻔해서 테이든에게 한 소리도 들었다.
작은 도토리를 품은 낙엽을 발견하고, 낙엽 더미로 위장한 돌부리도 발견했다. 도토리는 그대로 두고 돌부리만 테이든이 제거했다. 선선한 바람이 가느다란 갈색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헤베는 머리를 잘라야겠다고 얘기했다. 테이든은 손재주가 없으므로 시종 중 손재주 있는 이에게 맡기기로 합의를 봤다. 테이든은 제과제빵에 이어 미용도 섭렵하겠다고 다짐했다.
***
저녁 식사 시간에는 오랜만에 하베트 스완도 나왔다. 전직 부궁사이자 현직 의원인 그는 루니스 율리와 논문 경쟁을 하고 있었다. 눈 밑이 푹 꺼지고 수척해진 노인을 보면 헤베가 아니라 그가 환자인 것 같았다.
“대신전을 보러 간다고?”
“예, 이틀 후 출발합니다.”
“왜? 순간이동으로 슝 가지.”
“헤베가 여행을 하고 싶어 해서요.”
테이든이 부지런히 헤베의 접시에 고기를 잘라 나르며 대답했다. 헤베도 우물우물 먹으며 테이든의 접시에 고기와 샐러드를 날랐다. 하베트가 논문에 매진하는 건 이런 염병천병을 보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진통제는 반드시 여분까지 들고 가고 혹시 모르니 중화액도 가져가게나. 투약 시기까지 남긴 했지만.”
“네, 더 챙길 게 있을까요?”
“그 정도면 된다. 진은 어디 있지?”
“요정족은 먼저 수도로 향했습니다.”
진은 안락한 여행을 위해 여행지 숙소에 방문해 이러이러한 인상착의의 청년 둘이 오면 공손히 대하라며 거금을 뿌리고 있었다.
“그렇군.”
하베트는 다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논문은 잘 되어가요?”
그때 헤베가 물었다. 헤베는 하베트가 쓴다는 논문의 주제를 듣고 흥미를 갖고 있었다. 의학과 마법을 연관 지은 것으로, 마법으로 알약을 정제한다는 게 주제였다.
“잘 되어가네. 여기는 연구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곳이야. 때 되면 식사도 나오고 좋은 서적도 많고. 실험실 장비도 충분하지. 아주 훌륭하네.”
“대신전 다녀오면 저도 연구 좀 할까 봐요. 헤베 뮨, 이름 그대로 쓰면 난리날 테니까 가명으로 논문도 내고요.”
헤베의 말은 자신의 논문이 학술지에 당연히 실린다는 걸 전제로 했다.
아무도 이견 갖지 않았다.
헤베는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였고 논문을 쓴다면 당연히 실릴 것이며 마법학계에 대 파란을 일으킬 테니까.
“기대되는구만. 학계가 크게 발전할 거야.”
흐뭇한 하베트와 달리 테이든은 조금 불안해졌다. 사실 테이든은 본인 입으로는 백수라고 했지만 엄연히 말하면 ‘휴직’ 중인 상태였다.
처음 휴직서에 쓴 기간은 6개월이었는데, 헤베의 몸 상태가 밝혀지고 황제가 배려해준 덕에 무기한 늘어났다. 그렇게 벌써 2년이 넘었다. 이제 황제도 헤베가 대신전 개관식을 보러 올 만큼 건강이 좋아졌음을 아니, 다시 부르려 들 텐데 그 경우 헤베의 반응이 걱정되었다.
‘논문을 쓴다는 걸 보니 슬슬 한계가 온 모양이군.’
헤베가 지금까지 활동(?)하지 않고 보낸 시간은 재활을 위해서였지만 본인은 실컷 게으름 피웠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헤베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게으름 피우는 걸 혐오했다. 테이든은 과거의 일을 선명히 기억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열여덟 살이 되어 전장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었다.
막 도착한 그 전날 교전이 있었는지 다친 사람들이 많았다. 기사단장급 되는 이들도 여러 명 다쳤다. 뇌진탕으로 잠깐 기절했다 깨어난 지첸은 창백한 얼굴로 머리에 붕대를 감쌌다.
당연한 듯이 다쳐 있던 헤베는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와 지첸에게 물었다.
‘많이 다쳤어?’
‘아니요.’
‘내일 해가 뜨기 전 루비 협곡으로 가. 폭포수 중턱에 고르곤 동굴이 있는데, 파르테가 고르곤 성체들이 새끼들을 보육 중인 걸 확인했어. 날개 달린 것들이라 미리 싹을 잘라놔야 해. 나도 합류할게.’
‘알겠습니다.’
지첸은 현기증이 돌아 관자놀이를 짚었다가 지시를 끝내고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헤베를 불렀다.
‘잠깐만요. 궁사님, 다리 다쳤잖아. 여기서 내가 가져올 승전보나 기다려요. 총사령관이 수하에게 업혀서 절벽을 오르겠다는 거야?’
그 말을 듣자 헤베는 마법으로 훌쩍 날아오르고서는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라는 표정을 지었다. 거만하고 오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일반 병사가 머리에 혹이 나거나 발목을 접질리면 당장 전장을 이탈하게 했다.
테이든은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는 정말 열심히 활약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주제는 생각해둔 게 있는가?”
“삼백 년 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조상들이 일회용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답니다. 마법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것을 사용하면 간단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는데 신기하죠?”
“들어본 적 있네. 보석이나 양피지를 사용했다지.”
“역시 아시네요. 응용하면 생활에 편리한 마법을 다양하게 부여할 수 있습니다. 보석은 너무 비싸고, 양피지는 요즘은 구하기도 어렵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에 마법을 담아볼까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돌멩이에도 넣는 게 가능하더라고요. 제가 마법을 쓰면 안 되는 상태니까 파르테랑 같이 할 생각이에요. 아직 파르테한테 말은 안 했지만 분명 들어주겠죠. 안 들어준다면 내가 마법 쓴다고 하면 놀라가지고….”
“헤베, 고기 먹으면서 말해요.”
테이든이 무서운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헤베의 입에 고기를 쏙 넣었다. 헤베는 고기를 우물우물 먹고 다 삼킨 다음 다시 얘기를 이어가려 했는데 이번엔 테이든이 샐러드를 쏙 넣었다.
테이든은 헤베가 일하지 않았으면 했다. 평생 놀고먹고 편하게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헤베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을 하는 쪽이 ‘편하게 사는’ 것이리라. 테이든의 마음은 헤베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길을 응원하고, 따라가기로 정해져 있었다.
결코 짧지 않은 여행에 나서는 두 명의 차림새는 매우 가벼웠다. 헤베는 빈손이었고, 테이든만 간단한 짐꾸러미를 들었다.
먕먕이는 결국 저택에 남겨두기로 했다. 나대족은 다른 흉측한 마물과 다르게 하얀 털을 지닌 작고 귀여운 솜뭉치 같은 생김새였지만 나름 마물이라서 인간을 단번에 찢어 죽일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다. 게다가 작다는 것도 다른 마물에 비해서 작은 크기라는 것이지, 이제 몸집이 커서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기겁할 것 같았다. 예전에야 고양이로도 속일 수 있었지만….
헤베는 매우 아쉬워하며 먕먕이에게 뽀뽀하려 했다가 테이든에게 저지당했다.
오전 중 미리 준비해둔 마차에 올라 초트볼 마을로 향했다.
그동안 종종 방문했던지라 새로운 볼거리는 없었다. 테이든과 헤베는 마을을 조용히 통과했다.
마을 사람들은 헤베는 병약한 귀족 도련님, 테이든은 호위기사로 알고 있었다. 삼백 년의 전쟁으로 신분 격차가 옅어졌다지만 탈리 제국은 엄연히 신분제가 있는 나라이며, 종전 후 현 황제도 신분제를 굳건히 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펼쳤다. 게다가 테이든이 마을에 뿌린 돈이 상당해서 마을 사람들은 마차가 지나가는 동안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해 질 무렵 다음 마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하루 숙박하기로 했다.
진이 잡아놓은 숙소는 시설이 무척 좋았으며… 방이 두 개였다.
“진이 미리 계산했다고 했지? 이상하네. 왜 방을 두 개로 잡았을까.”
“글쎄요. 정말이지 모르겠네요.”
“우리가 싸웠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 진이 말해줬는데 여행하면서 다투는 경우도 많대.”
“그렇다면 요정족에게는 정말 실망입니다. 우리는 햇수로 벌써 삼 년이나 사귀었지만 한 번도 싸운 적 없는데 말이에요.”
테이든은 헤베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도 방이 두 개이거나 침대가 두 개인 숙소가 종종 나타났다. 싸우라고 물 떠놓고 기원하는 것 같았다. 헤베는 갸우뚱거렸고 테이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었다.
3.
진이 미리 길을 닦아 놓은 덕에 여행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아니… 사실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뼈와 살이 불타오르는 밤이 두 번 있었다. 한번은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에 들렀을 때 함께 온천욕을 즐기다가 테이든이 덮쳐왔고, 한번은 야경으로 유명한 어느 곳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구경하다가 달빛을 머금은 미남자의 미소를 본 헤베가 먼저 덮쳤다.
헤베의 몸은 혈액순환이 과도해지면 혈액 안의 마기가 퍼져 위험해진다. 물론 중화제를 챙겨 오긴 했지만, 자주 투약하면 내성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테이든은 헤베를 무리시키지 않기 위해 본인이 무리했다. 그는 스물셋이었다. 반면 연인은 스물아홉이고 방금(?) 죽었다 살아났으며 아직 재활 중인 병약한 흑마법사였다.
물 한 모금 없이 뜨거운 사막을 걷고 또 걷다가 두 손으로 모으면 없어질 만한 작은 물웅덩이를 발견했는데, 그 물을 단번에 들이켜지 않는 건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했다. 그렇게 참다 보니 오히려 수행이 되어 테이든은 초월자 위의 새로운 경지를 연 듯했다.
‘지금이라면 헤베의 마법과 겨뤄도 내가 이기지 않을까. 순간이동을 펼치려 한다면 저지할 수 있을 것 같군.’
테이든은 그런 생각을 하며 헤베를 깨웠다. 전날 밤에는 다행히 헤베가 유혹해오지 않았다. 한번 하고 나면 다음 날은 침대에서 내려오질 못한다는 걸 깨닫고 슬슬 본인도 자제하려는 모양이었다. 헤베는 투정 부리지 않고 일어났다.
식사는 방에서 했다. 위독한 상태에서 벗어난 뒤에도 헤베의 식사량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특히 아침 식사는 새 모이 먹듯 했지만 테이든은 더 먹으라고 하지 않았다. 가슴은 타들어 갔지만 이런 잔소리로 헤베를 신경 쓰이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
정오가 되기 전 숙소를 나서 마차에 올랐다. 오늘 둘의 목적지는 ‘엔디야키지의 다리’로, 이 근방에서 아주 유명한 관광지였다.
“테이든, 하모니카 갖고 있지?”
창밖에 스쳐 지나가는 낙엽 물든 거리를 바라보던 헤베가 물었다.
“네, 연주해주게요? 기대되네요.”
“너무 기대하진 마. 다 까먹어서.”
테이든이 하모니카를 꺼내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고 건넸다. 테이든은 손수건을 다섯 종류 들고 다녔다. 하나는 헤베의 발 받침대 덮개용도, 하나는 의자에 까는 용도, 하나는 하모니카나 피리를 닦는 용도….
헤베는 손가락을 더듬어 자세를 취하더니 곧 어떤 곡을 연주했다. 헤베가 어렸을 적 들었던 곡이었다.
하모니카 소리가 흘러나오자 마부가 잠깐 멈칫했다가 조금 천천히 말을 몰았다.
느릿한 박자에 감성적인 선율이었다.
작은 새 두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마차 창틀에 앉아 하모니카 연주를 감상했다. 하얀 새와 갈색 새였다. 하얀 새가 조금 더 몸집이 컸는데, 저보다 작은 갈색 새에게 커다란 몸을 자꾸 치댔다.
가을바람도 잠깐 마차 안에 들러 연주자가 누구인지 구경하고 갔다. 붉은 잎사귀가 바람을 따라 팔랑팔랑 날아와 마차 안에 떨어졌다. 테이든은 치우지 않았다.
전문가가 들으면 투박하다고 했을 연주였다. 아는 데까지만 마친 헤베는 하모니카를 입에서 떼다가 테이든을 보고 깜짝 놀랐다. 테이든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테이든! 너 왜 울어.”
“너무 슬프고 외로워서요. 헤베, 제가 곁에 있는데 왜 그렇게 외로운 음악을 연주하세요?”
테이든은 감수성 깊고 눈물이 많았다. 그는 훌쩍거리며 헤베에게 커다란 몸을 안기었다. 헤베는 서럽고 서운한 테이든의 넓은 등을 쓸어내렸다.
“미안. 배운 게 이것뿐이라서 그래. 딱히 외롭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이제 이 곡은 연주하지 마세요.”
“알았어….”
“아니에요. 종종 해주세요. 너무 좋아요.”
“그래, 그래.”
항상 어른스럽던 연하 남자친구가 이렇게 앵기니 너무 귀여웠다. 과거로 돌아간 것 같기도 했다. 헤베는 테이든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너도 연주할래?”
“제가요?”
테이든은 울면 바로 티가 나는 얼굴이었다. 금세 발개진 눈가와 코끝을 보며 하모니카를 건네자 테이든이 얼떨결에 받아들였다.
“내가 잠들었을 때 음악을 배웠다면서. 그림도 배우고, 마법도 다시 배우고. 맞지?”
“배우긴 했는데….”
“듣고 싶어.”
헤베가 기대 섞인 눈길을 보냈다. 테이든은 부담스러워지다 못해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헤베가 주는데 거절할 수도 없어서 하모니카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그 연주를 끊지 않은 것만으로도 테이든을 향한 헤베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큰지 알 수 있었다.
마차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작은 새 두 마리가 기겁하며 날아갔다.
***
엔디야키지 다리는 역사적 유물이다. 절벽과 절벽 사이에 마법으로 만든 것으로, 건설 시기가 무려 삼백 년 전이었는데 그 긴 전쟁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강한 마법사가 만들었기에 이토록 튼튼한가는 모두의 의문이었으나 누구도 답을 몰랐다.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마법사는 다리를 만들고, 양 끝에 비석 두 개를 세웠는데 마법으로 봉인되어있어 아무도 문자를 읽지 못했다. 다만 ‘엔디야키지의 다리’라는 이름만 해석했을 뿐이었다.
“현대 학자들은 다리를 만든 마법사를 풀 에자르 위튼, 에누가후, 테오 베리벨리 중 한 명으로 추정합니다. 모두 삼백 년 전의 대마법사로, 마법학계에도 굉장한 업적을 남기신 분들이죠. 몇 년 전에는 풀 에자르 위튼 <마법의 역사> 자필 초판본이 발견되어 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초판본에는 이 다리와 관련된 항목은 없다고 합니다. 다리의 양 끝에 있는 봉인석에 분명 학계를 뒤흔들 무언가가 쓰여있으리라 예상하는데, 안타깝게도 아무도 풀지 못했습니다. 건너편에 지어진 건물이 보이시죠? 저곳에 유명한 마법사분들이 모여계신답니다. 이건 비밀이지만 제5 마탑주분도 계시지요. 세기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천재 마법사여야 봉인을 풀 수 있다네요. 꼭 우리가 살아 있을 때 해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테이든과 헤베는 무리의 뒤쪽에서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근처에 있던 청년이 동행인에게 속삭였다.
“헤베 뮨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아? 그 대마법사는 해석하겠지.”
그들은 헤베의 왼편에 있었고, 헤베는 왼쪽 귀 청력이 좋지 않아서 듣지 못했다. 테이든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헤베 뮨은 북국에서 유배 중인 죄인인데 어떻게 부탁하냐.”
“학계에 한 획을 긋는 엄청난 사안이라면서. 죄인이든 누구든 풀면 그만 아니야?”
“근데 그 사람은 지금 벌써 40대는 됐을 거잖아. 당연히 봉인석 풀려고 시도해봤는데 못 푼 거겠지.”
“어디서 듣기로는 생각보다 어리다던데.”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유명했으니까 아무리 어려도 40대는 됐을걸.”
테이든은 새삼스럽게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만 해도 소문으로만 듣던 헤베 뮨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렇게 어린 사람이었다니. 십여 년 전부터 유명한 전쟁의 선봉장이 이렇게 어리다니 그럼 대체 몇 살 때부터 전쟁터에 있었단 말인가. 만신창이로 다쳐 있던 어린 사령관의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헤베의 인생은 정말 힘들었어….’
한편 헤베는 남자친구가 어깨를 들썩거리자 또 놀랐다.
“테이든? 왜 그래. 왜 또 울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을바람이 눈에 들어가서….”
“눈이 시려서 운다는 걸 나보고 믿으라고?”
테이든은 이제 아예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헤베, 이제 정말 눈치 생겼네요…. 으흐흑.”
전쟁이 끝나고, 힘든 시기가 지나가고 이제는 거짓말한다는 것도 눈치챌 정도로 성숙해진 헤베의 모습이 테이든의 감수성을 건드렸다.
“…….”
헤베는 잠깐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손수건 줘.”
“흐윽.”
테이든이 울면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냈다. 헤베는 손수건으로 테이든의 눈물을 닦아줬다.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재활 운동으로 땀 범벅이 된 헤베의 몸을 테이든이 닦아줄 때처럼 신중했다.
“헤베에.”
테이든이 다시 헤베에게 커다란 몸을 치대며 안겼다. 헤베는 안경을 꼈으나 테이든은 아무런 변장도 하지 않았다. 커다랗고 탄탄한 체격과 잘생긴 외모로 눈길을 끌던 자가 갑자기 울더니… 옆에 서 있던 가느다란 미청년한테 애교를 부린다…. 사람들이 시선을 다른 데로 두었다.
“저것들은 뭔데 염장질이야?”
“몰라. 무서우니까 무시하자.”
차마 둘에게는 뭐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헤베 뮨도 못 풀었다면 우리 살아있을 땐 가망 없겠네.”
“헤베 뮨이 그렇게 강한 마법사는 아니라더라. 그러니까 마물한테 당해서 흑마법사가 되었지.”
“루니스 궁사는 어떨까.”
“하긴 그분은 헤베 뮨보다 더 뛰어나다던데. 너무 바빠서 여기까지 올 시간이 없나.”
청년들의 대화는 테이든의 자부심을 자극했다. 테이든은 헤베가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비석의 봉인을 해제하고 마법을 해석할 수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헤베는 마법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마법사였고, 괜히 봉인석을 풀었다가 학자들에게 꼼짝없이 잡힐 것 같아서 못 들은 척했다.
“테이든, 눈물 그쳤어?”
“네.”
테이든의 훌쩍임이 멎었을 때 가이드의 설명도 끝났다. 짧은 자유 시간이 주어지고 헤베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광장에 원형 벤치가 있었다.
“저기 가서 앉자.”
“앉자고요?”
“응, 조금 쉬자.”
당장 비석의 봉인을 구경하러 갈 줄 알았는데 의외의 모습에 테이든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한껏 폭발했던 감수성은 다 사라지고 대번에 머리가 차가워졌다.
몸이 좋지 않은가. 설마 대화를 들었나. 무슨 일로 심기가 상한 걸까. 몸일까 마음일까. 보라색 눈에 서늘한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헤베는 테이든을 먼저 앉혔다.
“음료수가…. 뭐 시원한 거 먹을래? 시원하고 달달한 거.”
테이든은 헤베의 안색을, 헤베는 테이든의 안색을 살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테이든이 먼저 눈치챘다.
애인이 방금 울었는데 왜 울었는지 이유를 모르겠으니 일단 앉혀놓고 알아보려는 것이다.
테이든은 큰 충격을 받았다.
헤베는 항상 보살핌을 받아왔다. 여덟 살 때부터 어화둥둥 받으며 지내온 헤베가 이제는 테이든을 보살펴주려 한다.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전 괜찮아요, 헤베.”
테이든은 활짝 웃으며 헤베의 손을 붙잡았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사람들이 보든 말든 끌어 안아버렸다.
“정말 사랑해요.”
“응…. 나도 사랑해.”
테이든은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헤베를 꼭 끌어안았다. 헤베의 목소리는 테이든 품 안에서 웅얼웅얼 들렸다.
가이드는 공공장소에서 연애 행각 금지 팻말을 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
무슨 음료를 마시고 싶냐 물은 건 헤베였는데, 사러 간 건 테이든이었다.
헤베는 자몽에이드를 마시고 싶다고 했지만 테이든은 따뜻한 차를 샀다. 자몽에이드는 없었다고 발뺌할 생각이었다. 음료 두 잔을 들고 돌아가던 테이든의 한쪽 뺨이 꿈틀거렸다.
헤베 근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따로 일행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테이든이 보기에 헤베와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30cm도 되지 않았다. 안경 낀 병약 미청년에게 접근하기 위한 의도적 위치 선정이 분명했다. 일행과 얘기를 나누며 연신 헤베를 힐끔거리는 게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헤베는 아무 눈치도 못 채고 발치에 모여든 작은 새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 왔어요.”
테이든은 일부러 쿵쿵거리며 다가가 낯선 놈팡이와 헤베 사이에 육중한 엉덩이를 끼워 넣었다.
“으악.”
옆에 앉은 사람이 탄탄한 근육질 남자에게 밀려 떨어졌다. 헤베가 어리둥절하게 이쪽을 보자 테이든은 몸으로 시야를 가렸다. 체격이 좋고 위압감이 상당해서 피해자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다른 자리로 옮겼다.
헤베에게 후드를 씌우려던 테이든은 맑은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거뒀다. 헤베가 예쁜 건 죄가 아니니 그의 후드를 덮는 건 잘못되었다. 독점하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예전 같았으면 헤베의 피해망상과 낮은 자존감을 이용해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헤베의 회귀 전의 자신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어떤 파국을 낳았는지 알고 있다.
테이든은 헤베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자몽에이드는 없었어요.”
“…너 또 왜 그래? 또 눈물 나려고 해?”
헤베가 눈을 깜박거리며 테이든의 눈치를 살폈다. 걱정스러운 얼굴에 테이든은 너무나 감격했다.
“헤베.”
테이든이 헤베를 끌어안았다. 음료가 흘러넘쳤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테이든의 자색 눈동자도 이미 젖어 들어갔다.
“정말 사랑해요.”
“응…. 나도 사랑해.”
가이드는 얼른 관리소로 달려가 지금 당장 애정행각 금지 팻말을 만들라고 소리쳤다.
***
두 사람은 엔디야키지 다리의 봉인석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었으나 테이든의 힘에 밀려나면서 둘은 순조롭게 앞자리를 차지했다.
비석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쪼그려 앉아야 했다. 가로세로 1미터 크기였다. 테이든은 헤베의 몸 상태를 해결하고자 단기간에 고대어를 외운 적 있었는데, 비석에 쓰인 문자는 처음 보는 형태였다.
“이런 고대어는 처음 보는데요.”
“이런 문자는 없어. 봉인 마법 때문에 안 읽히는 거야.”
“봉인 마법도 여러 종류가 있군요. 헤베의 연구 일지와는 다르네요. 연구 일지는 텅 비어 보였는데 이건 문자는 보이는 대신 해석이 불가능하고.”
“종류가 많지만 주로 이런 식이지. 연구 일지는 내가 개량한 거고…. 근데 네가 언제 내 연구 일지를 봤더라.”
“아아…. 쪼그려 앉으니 다리가 아파요.”
“얼른 일어나. 주물러줄까?”
“괜찮아요.”
테이든이 다리를 주먹으로 두들기며 일어났다. 정말 괜찮냐는 헤베에게 테이든은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그보다 비석은 어떤 것 같아요?”
“생각보다는 약해….”
“봉인을 풀 수 있다는 뜻입니까?”
“당연하지. 나는 비센티아에 생명이 생긴 이후로 가장 강한 마법사잖아. 비석을 세운 마법사가 누군지는 몰라도 나보다는 약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안경 너머로 맑은 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아무도 풀지 못한 비석을 앞에 두고 활기가 도는 얼굴이었다.
대화를 듣던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다른 이들이 이런 대화를 나눴다면 미친놈들인가 하며 무시했겠지만, 귀족으로 보이는 신비한 분위기의 잘생긴 청년들이 이러니 그럴듯했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진짜 그렇진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외모였다.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한 가이드가 다가와 너무 가까이서 보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갔다.
헤베는 주의를 무시하고 계속 봉인석을 내려다봤다. 테이든은 점점 불안해졌다.
헤베는 마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괜히 이곳에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이제 다리를 건널까요?”
테이든은 쪼그려 앉아서 더 작아진 헤베를 달랑 들어 안았다. 가슴에 얼굴을 묻게 하고는 초월적인 능력으로 땅을 박차고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한 줄기 바람이 스치고 헤베가 고개를 드니 다리 위가 아니라 산길이었다.
“여기 다리 아닌데?”
다리를 건너자면서 와 있는 곳은 산 중턱이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테이든은 헤베를 내려놓지 않았다.
“죄송해요. 다리를 건너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봉인석이 양 끝에 있어서….”
더구나 반대쪽 끝에는 학자들의 모임 공간도 있지 않은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응, 상관없어.”
헤베도 굳이 내려달라 하지 않고 테이든의 품 안에서 편하게 자리 잡았다. 테이든이 급히 안아 드는 바람에 불편했던 것이다. 테이든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커다란 바위를 발견했다. 낙엽을 치우고 손수건을 깐 뒤 위에 헤베를 앉혔다. 헤베는 달랑달랑 다리를 흔들었다. 다행히 마음이 상하진 않은 것 같아서 테이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정도면 루니스도 풀 수 있겠어.”
“전달할게요.”
“뭐라고 쓰였을지 너무 궁금하다.”
“풀면 바로 말해달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내가 마법 사용해도 되긴 해. 중화제가 있으니까.”
“헤베!”
테이든의 노성에 놀란 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헤베는 작게 웃더니 안심하라는 듯 테이든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하지 말라면 안 할게. 걱정하지 마.”
“진짜. 놀라게 좀 하지 마세요. 저 심장 떨어져요.”
“미안.”
테이든은 말과는 달리 안심했다. 루니스 율리가 봉인을 해제할 수 있다면 헤베가 직접 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헤베가 판단하기에 세상에 봉인을 풀 사람이 자신뿐이라면 아까 그 자리에서 주저 없이 해제했을 것이다.
“너도 옆에 앉아.”
“네.”
테이든이 옆에 앉자 헤베가 기대왔다.
바위는 둘이 앉고도 자리가 남았다. 바람에 수풀이 흔들렸다. 기다란 나무들이 낙엽을 내뱉었다. 헤베의 무릎에도, 테이든의 머리에도 떨어졌다.
사람 많은 곳보다는 역시 이런 숲이나 계곡, 호숫가가 더 좋았다. 그러나 오래 있기에는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마을 구경은 하지 말까요?”
“밥만 먹자.”
“좋아요.”
헤베의 밥만 먹자는 말은 이 마을의 특산 빵은 구경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헤베는 테이든을 빤히 올려다봤고, 자기 발로 걷지 않겠다는 뜻을 제대로 전달받은 테이든이 아까보다 신중하게 안아 들었다. 헤베에게 편한 자세였다.
헤베가 자는 동안 테이든은 여행지를 다시 검열했다. 수도에 도착하기 전 유명한 관광지에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이후로는 마법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봉인석 따위는 없었다.
단순히 삼백 년간 무너지지 않은 문화유적이라는 얘기를 듣고 일정에 넣었는데, 아주 스릴 넘치고 스펙타클했다. 이제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테이든의 바람대로 남은 일정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두 사람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염병 천병 꼴값 애정행각에 당한 부상자들로 가득했다. 둘은 남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헤베는 전쟁터에서 파와이와 밀리안에게 공공장소에서 애정행각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는 했는데 저가 더 심하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파와이와 밀리안이 목격했어도 헤베에게는 별말 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렴치한 테이든만 저주할 뿐….
마지막 관광지는 동굴이었다. 보통 동굴과는 다르게 항시 열기가 흐르는 걸로 유명한 곳으로, 한여름처럼 더운 기운에 어떤 사람들은 들어가기 전부터 웃통을 벗었다.
마치 한여름 해변에 있는 듯 다들 옷차림이 가벼웠다. 테이든도 가벼운 차림이었으나 헤베는 허벅지까지 오는 케이프 코트까지 걸친 가을 옷차림이었다.
헤베는 꾸물꾸물 코트 단추를 풀었다.
“벗을 거예요?”
“응.”
벗은 코트는 당연하다는 듯 테이든에게 건넸다. 테이든도 당연하다는 듯 단정하게 접어 팔뚝에 걸쳤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헤베의 탈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소매가 넓은 긴 팔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허리춤에서 밑단을 빼내더니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어나갔다.
“아이고, 세상에 맙소사!”
너무 놀란 테이든은 이상한 소리를 내뱉으면서 후다닥 헤베를 끌어안았다.
“심장 멈출 뻔했잖아요. 뭐 하는 거예요, 대체.”
“옷 벗잖아.”
“아예 상의 탈의하려고요?”
“많이들 벗었던데.”
“제발, 헤베…. 살려주세요.”
전쟁터에 있을 때도 헤베는 아무 데서나 훌렁훌렁 벗어대서 어린 테이든을 곤란하게 했다. 그러다 흑마법을 받아들이고 흑혈화 현상이 생기면서 노출을 하지 않게 됐는데, 흑혈화 범위가 심장 한정으로 좁아 들자 갑자기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살려달라니.”
쩔쩔매는 테이든의 모습에 헤베가 웃음 지었다.
테이든은 웃을 수 없었다. 정말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수많은 관광객에게 헤베의 살결을 보이기 싫었다. 아무리 자신이 독점욕을 참기로 했더라도 이건 아니었다.
“헤베…. 저도 안 벗었잖아요. 당신 추위 잘 타서 이 정도는 덥지도 않을 텐데 왜 그래요. 놀리지 마세요, 진짜.”
“알았어, 안 벗을게. 울지 마.”
헤베가 웃음기 머금은 채 테이든을 달랬다. 정말로 단추를 잠그는 걸 보고 테이든은 안심했다. 테이든은 뚱한 얼굴로 헤베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한 줌도 안 될 것 같은 허리에 셔츠 밑단을 집어넣고, 케이프 코트도 다시 입혔다. 코트에는 후드도 달려 있었는데, 확 씌워버릴까 하다가 그만뒀다.
***
“마물이 있네….”
헤베는 동굴에 들어서기 전부터 비밀을 알아챘다.
테이든도 마물의 기척을 느끼고 헤베의 귓가에 속삭였다.
“없앨까요?”
“없애야지.”
헤베가 당연하지 않냐는 듯 대답했다.
두 사람은 줄의 가장 마지막에 서 있다가 가이드가 다른 데를 보는 틈에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섰다.
“거기, 두 분. 그곳은 들어가면 안 됩니다.”
바로 경고가 내려왔다. 두 사람이 워낙 이목을 끄는 생김새인 탓이었다. 아무리 안경을 꼈다 해도 헤베의 미모와 분위기는 가려지지 않았고, 테이든 또한 탄탄한 체격과 잘생긴 외모 탓에 많은 관심을 모았다.
“얼른 나오세요.”
동굴 경비병과 가이드, 방문객들의 당황한 시선이 둘을 향했다. 테이든은 헤베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물었다.
“무시할까요?”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동굴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헤베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책임자를 만나자.”
“네.”
테이든이 책임자를 불러오게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헤베를 안은 뒤 출입 금지 구역으로 훌쩍 뛰어내리고는 검을 꺼내는 것이었다.
아주 효과적이었다.
계약 용병으로 보이는 경비병들이 관광객과 가이드를 내보냈다. 한 명은 책임자를 부르러 달려가고 나머지는 테이든과 헤베를 경계했다. 궁수들도 와서 화살을 겨눴다. 테이든은 여유로운 눈으로 그들을 훑었다. 다들 열심히 전투태세를 취했지만 검을 한번 휘두르면 추풍낙엽처럼 날아갈 사람들이었다.
“따뜻해.”
헤베는 기다란 종유석에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 대면서 데웠다.
테이든은 그 모습을 보고 헤베가 추웠구나, 생각했다. 아까 윗옷을 벗으려 했던 게 장난이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렇게 더운데도 추워하는 걸 보면 헤베의 몸은 아직 정상이 아니었다.
대치한 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책임자가 도착했다. 수염을 키운 젊은 귀족과 상인이었다.
안 그래도 동굴 관광 사업에 찔리는 바가 있었던 둘은 용병들을 이끌고 급히 달려왔다가, 한 몸처럼 포개진 연인을 보고 잠깐 얼어붙었다.
“이보시오. 덥지도 않은가.”
그 꼬라지를 보고 당황한 귀족은 무슨 일이냐는 물음보다 엉뚱한 질문을 먼저 던져버렸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등껍질 교체 시기가 됐는지 덥진 않네요.”
“…….”
헤베의 말에 귀족과 상인이 길게 탄식했다. 절망이 어려 있었다.
귀족은 용병 단장과 측근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내보냈다. 테이든도 검을 집어넣었다.
먼저 상인이 말했다.
“혹 희귀종 보호단체에서 나온 분들이오?”
“아닙니다.”
“그럼….”
“우선 자초지종을 설명하세요. 근처 마탑도 연루된 건가요?”
안경 쓴 미청년이 정확하게 짚어왔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온 사람처럼….
이 동굴의 열기는 마물의 등껍질이 내뿜고 있었다. 동굴 밑바닥에 불을 내뿜는 마물 수 마리를 잡아다 가둬놨다.
삼 년 전, 전쟁이 끝났을 때 이 마을은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농작지에서 하도 작물이 자라지 않아 마법사의 탑에 의뢰하니, 마물의 마기가 쌓여 향후 십 년간 그 어떤 작물도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나마 수도와 가까워 황성에서 식량을 조달받았으나 언제까지 도움받을 수만은 없었다. 마을 자체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상인이 먼저 꾀를 냈고, 마을이 속한 근처 대도시의 귀족이 희귀종 밀매단체를 알아봤다.
상인과 귀족 모두 인마전쟁에 참전했기 때문에 어떤 마물을 골라야 하는지 알았다. 그들은 등껍질에서 불길을 내뿜는 마물 수 마리를 거금을 들어 구입한 뒤 어두운 밤, 마기가 쌓여 아무도 걸음하지 않는 농작지에서 죽였다.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등껍질을 제거하고 사체만 불태웠다. 동굴까지 옮기고 보존하는 데에는 마탑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행위는 일 년마다 반복되었다.
등껍질의 열기가 사그라질 때마다….
이런 시기였다. 다른 곳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터였다.
상인은 띄엄띄엄 실토했다.
두서없는 설명이었지만 헤베와 테이든은 정확히 알아들었다. 테이든은 가만히 헤베의 지시를 기다렸다.
헤베는 무언가 고민 중인 듯했다.
침묵이 흐르는 동굴에 열기가 가득했다.
노심초사하던 귀족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마물이 땅을 못 쓰게 만들어서 어쩔 수 없었소. 우리를 핍박하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아뇨….”
마물 세 마리를 키우고 있는 헤베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마탑에서 설명해주지 않았습니까? 등껍질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쌓이면 동굴에는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돼요. 못 쓰게 된 농작지처럼 변한다고요.”
“그건 마법사분들이 주기적으로 해결해주고 계시오.”
“마물 수는 한정적인데 나중엔 어떻게 조달할 생각입니까? 번식에는 실패했을 텐데.”
“그걸 어떻게….”
귀족과 상인이 크게 놀랐다. 희귀종 밀매단체는 이 마물을 번식시키려고 어떻게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귀족과 상인이 아는 건 여기까지였고, 사실은 그 어떤 마물도 번식한 적이 없었다. 희귀종 밀매단체가 숨기는 비밀이었다.
“씨가 마르면… 사업은 접을 수밖에…. 어디서 온 분들이길래 마물 번식에 실패했다는 걸 어떻게 아십니까?”
상인이 존대를 사용하며 물었다.
헤베는 정답을 알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마계의 문이 닫히고 비센티아에 남은 마물이 번식 능력을 잃었다는 얘기는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 알았다.
그는 다시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헤베를 보고 테이든이 말했다.
“우선 자리를 옮기죠.”
마기라는 단어가 나온 뒤부터 여기에 헤베를 두는 게 불안해졌다. 테이든의 마음을 읽었는지 헤베가 고개를 끄덕였다.
***
둘은 근처에 있다는 상인의 저택으로 향했다가 열악한 환경에 기겁해서 진이 미리 잡아놓은 숙소로 옮겼다.
관광지의 신축 건물이라서 깔끔하고 괜찮았다.
“보시다시피 전 일단 마을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재산을 모으지 않고 모두 투자하고 있습니다….”
상인은 정상참작이 될까 해서 말해왔다. 확실히 상인의 집보다는 관광객 숙소의 환경이 좋기는 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비밀로 해주시오. 마기라면 마탑 마법사들이 해결해주며, 인마전쟁에도 참전한 정예 용병들이 마물을 처리하고 있소. 삼 년간 한 마리도 놓친 적 없소. 동굴의 비밀이 마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엄벌이 내려질 것이고 우리 마을은 굶어 죽겠지.”
“앞으로 얼마나 유지할 거라고 예상합니까?”
“10년이오.”
“마물이 그렇게 많이 살아있다고요?”
“수가 많지는 않지만 동굴이 좁아서 다섯 마리로 일 년을 유지할 수 있소. 방금 이자의 저택을 보면 아시겠지. 마물을 사들이는 데에 전재산을 투자했소. 나도 마찬가지요. 우리 마을이 살길은 이것뿐이오.”
귀족이 간절하게 애원해왔다.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헤베가 마물을 이용하는 걸 문제 삼고자 했다면 관광객이 있을 때 밝혔을 터였다.
“테이든.”
“네.”
헤베의 부름에 테이든을 제외하고 모두가 경악했다. 금발에 보라색 눈을 지닌 체격 좋은 미청년이 금발에 보라색 눈을 지닌 체격 좋은 신탁의 영웅과 이름이 같다니…….
“마기가 쌓였다는 농경지를 보고 와.”
“농담하지 마세요. 당신을 혼자 두고 갔다 오라고요?”
테이든이 택도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왜, 내가… 이 사람들한테 당할 것 같아?”
“네.”
“하… 참 나.”
전 총사령관이며 전 궁사이자 현 흑마법사인 헤베가 답답하고 어이없어서 테이든을 노려봤다.
“가서 보고만 와. 파르테나 하베트 의원이 나서면 어느 정도 걸리겠는지.”
“전 마법에 문외한이니 같이 가시죠.”
“이 정도는 알잖아.”
“알아도 몰라요. 당신 혼자 두고는 안 가요.”
“마기 가득한 곳에 날 데리고 가겠다고?”
“아, 저, 그곳의 마기라면 잠깐 정도는 괜찮습니다. 저희 같은 사람도 몇 분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용병 단장이 손들고 끼어들었지만 무시당했다.
테이든은 단호한 시선으로 헤베를 응시했다.
절대로 혼자 두고 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전해졌다.
사귄 지 삼 년 만에 처음으로 둘 사이에 냉기가 흘렀다.
귀족과 상인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을 몰아붙이던 낯선 청년들이 갑자기 싸우려 하니 이게 뭔가 싶었다. 결국 헤베가 최후의 수를 썼다.
“내가 순간이동을 할까…?”
“…….”
패자가 조용히 일어났다.
용병단장이 길 안내를 하겠다고 했지만, 테이든은 어디인지 느껴진다며 혼자 나섰다.
“5분 안 걸려요. 그동안 이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걱정마시오. 우리도 강자와 약자 구분하는 머리는 있소.”
테이든이 창문을 활짝 열고서는 거침없이 뛰어내렸다. 이왕 할 거 빠르게 끝내고 올 생각이었다.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한 명은 생각 중이었고, 다른 이들은 그 한 명의 눈치를 살폈다.
헤베는 고민에 잠겨 있었다. 한동안 숨어있던 피해망상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귀족은 눈치가 빨라서 헤베가 그들을 벌하지 않으리라는 걸 금방 알았다. 그는 확인차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도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었소. 마물보다 인간이 먼저 살아야 하지 않겠소…?”
“그거야 그렇죠…. 제가 걱정하는 건 그런 부분이 아닙니다.”
헤베도 세상에 마물의 존엄성과 보호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딱히 공감한 적 없었다.
‘마물을 왜 보호해? 사람이 아무리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벌써 그 잔인함과 잔혹함을 잊었단 말이야?’
라면서 먕먕이의 말랑한 뱃살을 만지작거렸을 뿐이었다.
“그럼…?”
“마물을 이렇게 다루면 안 돼요. 마물은 금기여야 합니다.”
비록 헤베는 마물을 세 마리나 기르고 있지만…. 마물은 약한 생물이 아니다. 사체에서 흘러나온 마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무서운 존재이다.
이 마을이 불운하게 둘에게 걸린 것이지 여기만은 아닐 것이다. 헤베처럼 상대적으로 온순한 마물을 데려다 애완동물로 키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마을에서는 마물끼리 싸움을 붙여 돈을 벌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헤베는 이런 식으로 마물을 이용하다가 부작용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마물을 불쌍하게 여기는 흑마법사가 나타난다든가.
마물을 별것 아니라고 여기고, 인간 아래라고 여기는 흑마법사가 나타난다든가.
마물과 마계, 흑마법은 금기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아예 역사에서 잊혀야 한다. 마치 없었던 존재처럼.
삼백 년의 전쟁은 흑마법사들 때문에 일어났다. 마물을 가벼이 여기고, 마계에 흥미를 가져 흑마법을 연구한 학자들 때문에 비센티아는 너무 오래 고통받았다.
흥미조차 갖지 못하게끔 금기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흑마법사인 헤베에 대한 소문도 점점 좋아지고, 마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도 커지고 있다.
헤베는 모든 게 자기 탓인 것 같았다. 변절한 흑마법사를 제대로 처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 아닐까. 본보기로 단호하게 처벌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제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랬죠?”
“아, 안 건드렸소!”
자책하는 사이 열린 창에서 테이든이 훌쩍 뛰어내렸다. 테이든은 창문을 닫고 상념에 잠긴 헤베에게 다가왔다.
“안 건드렸는데 표정이 왜 이 모양이에요.”
“테이든….”
헤베가 테이든에게 안겨 왔다. 찬 공기가 훅 끼쳐왔다.
테이든은 헤베의 눈빛만 보고 저택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잠들었던 죄책감이 몸을 일으켰음을 바로 알았다.
좌중을 훑었으나 설명해줄 사람이 없었다. 테이든도 설명은 바라지 않았다.
“농작지를 확인했는데 범위가 넓어서 마기가 빠지려면 두 사람이 나선다 해도 수년은 걸릴 것 같아요. 쓸 수 없는 땅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마물을 이용해서는 안 돼. 마물은 완전히 잊혀져야 하는 존재란 말이야. 다른 방법으로 관광지를 만들 순 없을까?”
테이든은 헤베의 또렷한 갈색 눈을 보며 마물에 대한 동정심이 없음을 확인했다.
테이든은 안심시키려는 듯 빙긋 웃었다.
“그게 걱정이었어요? 관광지로 만들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우리가 그걸 같이 고민해줄 이유는 없어요. 그것보다 일단 이것부터 확실하게 정할게요. 이들을 처벌할 생각은 아닌 거죠?”
테이든의 말에 상인과 귀족이 긴장했다. 상인은 선처해달라며 절을 했지만 귀족은 자존심 때문인지 꼿꼿이 허리를 폈다. 그들의 뒤에서 용병단장이 헤베와 테이든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이 아니라 외모를 뜯어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까지는 봐주고.”
헤베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봐줘도 되는 걸까? 흑마법사 헤베 뮨이 처형당하지 않아서 사람들도 안심하고 마물을 이용했다. 이 상인과 귀족이 처벌받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더더욱 안심하고 마물을 이용하려 들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뭐라고 벌할 수 있을까.
타락한 배신자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
테이든은 헤베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걸 참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 숙인 헤베의 표정을 보기 위해서였다.
“궁사에게 맡기기로 하죠. 사실 우리가 정하는 것도 월권이죠.”
“응…. 맞아.”
헤베가 순순히 대답했다.
“일단 관광은 중지하세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테이든이 상인과 귀족을 보며 말했다. 둘은 눈치가 빨랐다.
“예.”
“알겠소.”
그들은 후다닥 방을 나갔다. 용병단장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면서 끝까지 헤베를 쳐다봤다.
‘눈치챘군.’
테이든은 용병단장이 헤베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걸 알았다.
헤베 뮨의 위명은 삼 년 전과는 달라졌다.
어쩔 수 없이 흑마법사가 된 억울한 영웅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반, 스스로 배신했다고 주장하는 이가 반이었다. 용병단장의 이야기를 들은 상인과 귀족은 마을에 헤베 뮨이 방문했다는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쉬쉬하던 옛날과는 달리….
욘로 마을의 제이 빵집도 이제는 간판에 ‘헤베 뮨이 먹고 오열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지 않은가.
만약 소문이 퍼지면 그게 이 마을을 먹여 살리는 관광 사업이 될 것이었다.
헤베의 표정은 조금 우울했다. 테이든에게 생각이 그대로 읽혔다.
‘마물에 흥미 갖는 이들이 생긴 건 나 때문이야.’
따지고 보면… 그의 추측이 맞았다. 헤베가 비센티아에 미치는 영향은 그 어떤 존재보다 컸으니까.
그러나 당신의 책임이 맞다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헤베, 마음 쓰지 마세요. 폐하께 말해서 조금 더 강하게 단속하라고 하면 돼요.”
“테이든….”
“네.”
헤베가 후드를 벗었다. 테이든은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상태였다. 둘은 손을 맞잡았다.
헤베가 뾰로통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월권이 아니면 되겠지….”
“…….”
“복직할까….”
테이든은 간신히 표정 관리했다.
왜 생각이 이렇게 튀지?
정말이지 헤베 뮨은 헤베 뮨이었다.
4.
마지막 날 찝찝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보름간의 여행은 대체로 즐거웠다. 빵도 맛있었고, 이렇게 많은 유적지가 보존되고 있었다는 것도 놀랍고, 야시장에서는 재미난 서커스도 구경했다. 낮을 바쁘게 보내면 밤에는 녹초가 되어 잠들었지만, 때에 따라 뜨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헤베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오늘 아침에도 키스했다.
키스는 정말 짜릿하고 좋다.
이따가 또 해야지.
진이 예약해놨다는 마차가 그동안은 화려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마차는 황성에서 쓰던 것만큼이나 화려하고 값비싸 보였다. 수도에 들어설 때 관문을 통과하기 쉽도록 일부러 이런 걸 준비한 듯했다.
대신전 개관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면서 황성에선 임시로 정문을 개방했다. 많은 사람이 지나다녔다. 귀족과 상인, 평민이 섞여 있었다. 마법사 로브를 입은 학생들 앞을 우락부락한 용병 단체가 지나가고, 다갈색 피부의 농민들 사이로 레이스 소매 셔츠를 입은 귀족들이 끼어들었다. 황제는 어떻게든 신분제를 강화하려고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수도에 올수록 신분 격차가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다.
황성에는 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목적지인 서쪽 성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헤베는 마차 창으로 대신전을 구경했다.
높다랗게 뻗은 기둥, 헤게르미의 창조 신화가 조각된 백색 외벽, 하늘과 맞닿을 듯한 지붕. 눈에 다 담기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새삼 감개무량했다.
‘대신전이 완공되면 헤게르미의 전지전능한 힘도 되살아난다고 했어.’
헤게르미를 뵙게 된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사죄도 해야 한다.
혼날 각오 또한 하고 있다.
혼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지만…….
“도착했네요. 주위를 돌면서 외관을 더 구경할까요?”
“아니, 내리자.”
“네.”
마부가 마차를 멈추고 문을 열었다. 테이든이 먼저 내린 뒤 헤베에게 양팔을 벌렸다. 신발을 신지 않은 헤베가 그대로 테이든에게 안긴 채 성에 들어갔다.
그들이 살던 곳은 3년 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복도에 헤베의 초상화가 몇 개 더 장식되었다는 점이다. 소문이 좋아졌다는 게 드러났다.
‘소문이 좋아지면 안 되는 거였어.’
울 정도로 기뻐한 테이든에겐 미안했지만 헤베는 이제라도 소문을 제대로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없었다. 전에 비해 눈치가 생긴 헤베는 그것이 낯가리는 자신을 위한 배려임을 알았다.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침실로 향했다. 이 성에는 서재나 회의실도 있고, 응접실도 따로 있지만 수하들과의 모임 장소는 언제나 침실에 딸린 티테이블이었다.
“헤베 님!”
주인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방 안에 수하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세 달 만에 보는 밀리안과 파와이가 벌떡 일어났다. 밀리안은 살이 조금 쪘고, 파와이는 그만큼 말랐다.
“딱 시간 맞춰서 오셨네요. 여행은 즐거우셨어요?”
“응, 진 덕분에 잘 보냈어. 너희는 잘 지냈어?”
“육아하느라 바쁘죠. 아주 죽겠어요.”
“릴리는 얌전해 보이던데.”
“다들 겉모습만 보고 그렇게 말하는데 누굴 닮았는지 망아지가 따로 없다니까요. 예전에 육아할 때보다 더 힘들어요.”
“네가 예전에 언제 육아를 했어?”
“아, 아니. 안 했구나. 말실수했네요. 하하.”
셋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머지 인원의 시선은 헤베의 두 발에 향했다. 신발은 신지 않고 양말만 신은 채 테이든에게 편히 안긴 모습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속으로 삼켰다.
“헤베 님, 신발은 어디 갔어?”
지첸이 묻자 헤베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마차에 두고 내렸어.”
“…안겨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겠지? 뭐 발목을 삐었다거나.”
“헤베 님은 건강하세요. 신발을 비롯한 짐은 마부가 정리해서 올려보낼 거예요.”
테이든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테이든은 헤베를 위해 준비된 게 분명한 푹신한 방석이 깔린 소파에 조심스레 내려놨다. 진이 기다렸다는 듯 낮은 높이의 발 받침대를 준비했다.
저택에 함께 사는 진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저택에서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테이든 품에 안겨있기도 했으니 지금은 많이 배려해주는 것이다….
헤베는 발 받침대에 발을 올려놓고 나머지 인원과 인사했다.
“루니스, 오랜만이야.”
“예, 건강하신 모양이군요.”
“네가 온실을 만들어준 덕분에. 고마워.”
반 년만에 보는 루니스는 머리를 짧게 자른 상태였다. 안부인사를 나눈 뒤 테이든이 루니스에게 말했다.
“궁사, 할 얘기가 있으니 잠깐 볼까요.”
“저와 말입니까.”
“예.”
테이든이 루니스를 데리고 나갔다. 진과 마우가 헤베를 흘깃했는데, 헤베는 조금도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헤베는 한때 루니스가 테이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오해였다는 걸 알았다. 또한 자신을 향한 테이든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서 아무리 매력 있는 자와 둘만 둔다 해도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테이든 공작이 루니스를 왜 데리고 가는 거예요? 무슨 일 있었어요?”
“별일 아니긴 한데.”
헤베는 수하들에게 엔디야키지 다리와 동굴 관광지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동안 진이 헤베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랐다.
“엔디야키지 다리 봉인석이라. 들어본 적 있어. 나도 도전해보고 싶은데.”
“파르테, 진지하게 말하지 마. 진심 같아서 우스우니까.”
지첸이 비웃자 다른 사람들은 웃었고 파르테는 째려봤다.
“루니스가 너무 말도 안 되게 뛰어나서 그렇지 나도 나름 천재라고 불리는 마법사거든요.”
“얼씨구. 지금 누구 앞에서 천재를 갖다 붙이나.”
“헤베는 예외고!”
“귀청 떨어지겠네. 지 부끄러우면 꼭 이렇게 소리를 지른단 말이야.”
지첸이 귀 후비는 시늉을 했다. 헤베는 재미난 연극을 보는 것처럼 구경했다. 파르테와 지첸은 틈만 나면 티격태격하는 연인 사이였다. 언제나 꿀 떨어지는 헤베와 테이든과는 달랐다. 파와이와 밀리안의 경우에는 아이를 키우면서 종종 다투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일행 중 세 쌍이 연인인데, 진과 마우, 루니스는 아직 연인을 만들지 않았다.
‘때가 되면 어련히 만들겠지.’
헤베는 굳이 소개해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첸 경은 보면 볼수록 파르테 놀리는 재미로 사는 것 같아요.”
“반응을 봐봐. 재밌잖아. 여기 계신 전 사령관님도 나 못지않게 놀려대곤 했는데.”
“내가 파르테를? 언제?”
“이제 막 시치미도 뗄 줄 아네.”
“아니, 나 진짜 기억 안 나.”
“헤베가 언제 나를 놀렸다고 그래. 전혀 안 놀렸어. 한 번도 없어. 그러니까 절대로 테이든한텐 말하지 마….”
파르테가 핏기 가신 얼굴로 말했다. 사실 이 대화를 테이든의 청력이라면 이미 듣고 있을 터라 수하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와중에 파르테가 지첸한테 사람을 위험에 빠뜨려 놓고 뭐가 재밌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헤베도 웃으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전쟁터에 있을 때가 생각났다. 아주 어렸을 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이렇게 동그랗게 모여서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는 했다. 그때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 수의 세 배 만큼 되었다. 중간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누군가 음악에 자신 있는 사람이 우쿨렐레나 하모니카를 연주하면 다함께 박자에 맞춰 아무렇게나 가사를 붙이며 노래를 불렀다. 헤베는 이름 모르는 병사에게 하모니카를 배웠고, 중년의 기사단장에게 우쿨렐레를 배웠다. 헤베가 연주하면 다들 재롱부리는 손주 보듯 흐뭇하게 웃으며 손뼉 쳤다. 그 기사단장은 때때로, 탐스러운 빵을 보란 듯이 달랑달랑 흔들며 헤베의 앞을 지나가고는 했다. 차가운 수프를 떠먹던 헤베가 홀린 듯이 뒤따라가면 머리를 잔뜩 헤집어 놓고서 빵을 건넸다.
헤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전쟁터를 회상하면서 미소 지을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테이든은 말한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힘들고 괴롭기만 했다고. 모두 당신을 학대했다고.
그러나 결국엔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웃지 않는가.
살다 보니….
살아가다 보니 상상도 못했던 경험을 하게 된다.
불과 삼 년 전만 해도 삶에 아무 미련 없었고 앞으로도 미련 따위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죽음이 무척 두려웠다.
이런 진귀한 행복을 알아버렸으니까 앞으론 희생 같은 건 못할 것 같다.
“아이고, 내가 졌어. 뭐 엔디야 무슨 다리라고? 가자. 내일 개관식 끝나면 바로 출발해.”
파르테와 말싸움하던 지첸이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수하들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헤베 또한 마찬가지였다.
“있잖아, 아이고라고 하니까 생각나서 말인데.”
헤베는 고맙고 미안한 수하들에게 여행하면서 겪은 재미난 일을 공유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한 동굴 주변이 뜨거웠거든. 여기저기 옷 벗은 사람들이 많아서 나도 벗으려고 하니까 테이든이 아이고 세상에 하면서 말리는 거야. 웃기지?”
“아… 재밌네요. 그 테이든 공작이 아이고라니.”
“그렇지? 웃긴 거 또 있어. 광장에 원형 벤치 의자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내 옆에 가까이 앉았거든. 그러니까 테이든이 그 사이에 커다란 덩치를 막 낑겨 넣는 거야. 너무 웃겼어.”
“하하, 참 재미있어라.”
마우가 손뼉 치며 좋아했다. 진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지첸이 딱딱하게 웃으며 동료들을 둘러봤다.
‘여기 누구 둘만의 시시콜콜한 사랑 이야기 물어본 사람?’
‘닥치고 웃어요. 애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헤베가 눈치가 생겼다지만 그런 생각들까지 읽지는 못했다.
“테이든은 하모니카도 되게 못불어. 작은 새들이 막 기겁하면서 날아가 버려서 삐졌어.”
“정말 듣고 싶네요.”
“마음이 여려서 그런지 가을바람에도 감성적이더라. 막 울고.”
“그렇군요. 울었군요.”
“그리고 내가 우락부락하다고 하니까 시무룩해졌어.”
“세상에….”
이야기가 점점 사소해졌다.
수하들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었지만… 할 말 못 할 말 다 꽁꽁 숨기고 혼자 죽으려 했을 때보다는 이렇게 염병 천병 떠는 게 훨씬 나았다. 나중에 테이든을 놀릴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열심히 반응해줬다.
***
헤베가 수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그때 테이든은 루니스와 함께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는 테이든과 헤베가 성에 도착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부른 참이었다. 테이든도 어차피 엔디야키지 다리와 동굴 관광지 때문에 황제를 알현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는 삼 년간 고생이 심했는지 다소 야윈 모습이었다. 은근히 헤베 뮨을 다시 보기를 바랐던 황제는 테이든만 와서 실망했다.
“테이든 공작, 자네는 언제 복귀할 건가? 마물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생긴 것도 다 인력 부족 탓이네. 헤베 뮨에게 복귀하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자네까지 쉬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아직은 계획 없습니다.”
일거리에 치이고 있는 황제가 테이든에게 호소했으나 테이든은 끝까지 복귀 의사나 시기를 밝히지 않았다.
황제가 정말로 황명을 내린다면 강제로 복귀해야 하겠지만 황제는 한숨만 연거푸 내쉴 뿐 그러지 않았다.
테이든이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건 헤베가 아직 뜻이 없다는 말이므로….
황제는 이제 다시는 헤베에게 무엇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엔디야키지 다리엔 궁사가 알아서 봉인을 풀만 한 마법사를 보내게. 동굴 관광지에도 마을 단위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도록 전문가를 보내겠네. 하지만 각지에 흩어진 마물을 이용하는 세력을 추적하는 건 불가능해. 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수가 없네.”
“예.”
테이든이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자네나 헤베 뮨 같은 경험 많은 자들이 흩어진 세력을 추적한다면 좋겠지만….”
황제가 눈치를 살피며 말을 줄였다. 테이든의 반응은 아주 냉담했다. 황제도 그냥 해 본 말이었다. 헤베에게 강제로 업무를 할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헤베 뮨은 방에 있겠군….”
“…….”
“근위대장.”
황제가 측근을 불렀다. 근위대장은 테이든에게 다가와 들고 있던 작은 사각 함을 건넸다. 헤베가 대신전 개관식에 온다는 말을 듣고 황제가 직접 준비한 선물이었다.
“헤베 뮨에게 주게.”
“열어봐도 됩니까?”
“상관없네.”
테이든은 서슴없이 상자를 열었다. 궁금했는지 루니스도 기웃거렸다.
내용물을 확인한 루니스는 숨을 깊게 들이켜고는 눈을 감았다.
“오래전부터 그에게… 주고 싶었네.”
황제가 말했다. 많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묵직하게 알현실에 가라앉았다. 근위대장은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테이든은 상자를 닫고 두 손으로 받치며 감사하다고 인사를 올렸다. 루니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를 알현하고 나온 루니스와 테이든은 곧바로 헤베에게 향했다.
수하들에게 즐거운 염장질을 하고 있던 헤베는 루니스와 테이든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테이든은 인력 부족이라는 말은 쏙 빼놓고 싶었지만 루니스가 전부 일러바쳤다.
“엔디야키지 다리는 파르테랑 마우, 지첸이 가. 파르테랑 마우가 함께라면 봉인을 풀 수 있을 거야. 누가 세운 비석인지 궁금하니까 해석하고 나면 나한테도 꼭 알려줘.”
“응.”
“네.”
헤베는 자연스럽게 지시를 내렸다.
“인력 부족은 예상했어. 마물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해도 당장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 일에 사람을 쓰기는 힘들지. 위기감을 가지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정말 위험해지지 않는 이상은 안전불감증을 갖게 돼. 이런 데에 사람을 보내봤자 예민하다는 말만 들을 거야.”
헤베는 잠시 고민했다.
테이든은 다 식은 차를 들이켰다.
“아무래도 헤베 뮨을 처형했다는 소문을 내야겠어.”
마침내 헤베가 결정을 내렸다.
“소문은 모두 거짓이었고 헤베가 스스로 배신자가 됐으며 흑마법 때문에 정신이 악해져 역모를 꾀하려 했다고 하자.”
“그게 뭔….”
‘당신을 우상으로 여기는 일대기를 쓰는 마당에 갑자기 그게 무슨 개소리세요?’ 라고는 차마 하지 못하고, 수하들은 테이든을 쳐다봤다.
이런 상황을 반쯤 예상했던 테이든이 빙긋 웃으며 헤베에게 말했다.
“그렇게 소문을 퍼뜨려 흑마법사는 역모죄인이라는 인식을 퍼뜨리려는 거군요.”
“응, 그러면 아무도 흑마법에 흥미를 갖지 않을 테니까. 지금은 흑마법과 마물이 아주 나쁘고 끔찍한 것이라는 인식이 부족해. 마물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면서? 환장할 노릇이야. 관심 두는 것만으로도 죄로 만들어야 해.”
“과연 효과적인 방법이겠네요.”
테이든이 헤베에게 동조하는 것처럼 말했다. 일대기가 엎어질 상황이었지만 수하들은 반박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테이든은 헤베의 소문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울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헤베를 격리하려 했던 자가 그러는 광경은 충격이었다. 그렇게 울기까지 할 정도이니 이제 와 헤베의 명성에 흠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헤베. 사람들이 흑마법이나 마물에 관심 갖지 않게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그 신뢰는 틀리지 않았다. 테이든의 말에 헤베가 귀를 기울였다.
“다른 방법?”
“굳이 처형이 아니어도 되죠. 죽었다고 소문내는 거예요. 대마법사 헤베 뮨조차 마기를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고. 헤베가 전쟁터에서 하얀 털을 가진 마물을 데리고 와 애완동물 삼았다는 건 유명하잖아요. 사실 헤베는 그 마물의 마기로 인해서 흑마법사가 되었고, 마기가 쌓여서 죽게 된 거죠. 그런 소문이 퍼지면 ‘아무리 귀엽고 작은 마물이라도 대마법사를 죽일 정도의 마기를 가졌구나. 가까이하면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테이든이 오랫동안 준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술술 말했다. 설득력 높고 근거도 있었다.
다만 헤베를 오래 좋아해 온 사람들….
헤베가 흑마법사가 된 후에도 타락자라고 부르지 않으며 감사해하고, 이러한 소문까지 만들어 퍼뜨린 평범한 사람들. 예를 들어 헤베와 재회하기 전의 하베트 스완이나 데이지 집사장 같은 사람들. 그들은 속사정을 모르고 몹시 슬퍼하겠지만… 테이든이 알 바는 아니었다.
“음…. 괜찮은 방법 같아.”
“그렇죠?”
다행히 헤베가 받아들였다. 테이든은 안도감을 감추며 친위대에 눈짓했다. 진이 제일 먼저 말했다.
“훌륭하고 깔끔한 계획이군요. 찬성합니다.”
“저도요. 대마법사를 죽이는 마기라니 정말 무섭네요. 마물은 건드려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샘솟아요.”
“헤베 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도 함께 알려야겠군요. 그럴수록 효과 있을 테니까.”
“그럼 그렇게 하자.”
모두가 찬성하니 귀가 얇은 헤베는 더 이상 자기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이로써 헤베의 명성은 지켜졌고 본인은 모르는 헤베의 일대기도 순조롭게 쓰이게 되었다.
“루니스, 폐하께 말씀드려서 내 사망 날짜를 잡아.”
“네.”
황제가 놀라 넘어갈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 참. 폐하께서 헤베에게 이걸 주라던데요.”
테이든이 상자를 건넸다. 뚜껑이 푸른 빛깔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나한테?”
“네, 선물이라고 합니다.”
“선물….”
헤베는 처음 듣는 단어인 것처럼 낯설게 읊조렸다.
황제에게서 이런 종류의 선물을 받은 적은 없었다. 헤베가 섣불리 열지 못하고, 마치 폭탄을 앞에 둔 것처럼 가만히 보고만 있자 지첸이 상자를 가져갔다. 지첸은 상자를 열지 않고 살짝 흔들어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투박한데. 훈장 같은 걸까.”
“나 줘 봐.”
파르테는 무게를 가늠하고는 말했다.
“가벼운데. 편지일지도 몰라. 이 보석함 자체가 값비싼 선물이고.”
“어디 땅문서 아닐까요? 전쟁이 끝나고 주인 없이 버려진 영지가 많다던데.”
“그럼 귀족 임명장일 수도 있겠다. 폐하가 요즘 신분제를 확고히 다지려고 애쓰시잖아요.”
“오, 헤베 님. 드디어 공작 되시는 거예요?”
친위대가 분위기를 가볍게 만든 덕분에 헤베의 경계심도 조금 누그러졌다.
“열어봐. 뭔지 보자.”
헤베에게 직접 열게 해야 하나 싶었던 파르테는 테이든의 눈치를 살피고는 무언의 허락을 받고 상자 뚜껑을 열었다.
“이건….”
편지도, 땅문서도, 귀족 임명장도 아니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지갑이었다. 헤베의 머리색과 눈색을 생각해서인지 갈색이었고, 마법으로 가공한 듯 가죽임에도 무게가 매우 가벼웠다. 앞면에는 금실로 헤게르미의 인장이 수놓아져 있었고, 뒷면에는 헤베 뮨의 이니셜이 박혀 있었다. 고무줄로 된 입구를 열자 수표 몇 장이 보였다. 천금이라고 할만한 액수의 수표들이었다.
황제에게도 헤베가 여덟 살부터 스물여섯 살까지 전쟁터에 살면서 지갑을 가질 생각도 안 했던 게 사무쳤던 모양이었다. 고행의 길을 걸어온 대마법사에게 보내는 감사의 표현이었고, 물건값도 계산할 줄 모르게 만들어버린 것에 대한 뒤늦은 사죄였으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응원이었다.
친위대는 호들갑 떨지 않았다.
단지 테이든이 다정한 눈빛으로 헤베를 바라봤을 뿐이었다. 헤베는 잠시 지갑을 만지작거리더니 테이든을 쳐다봤다. 테이든이 빙긋 웃었다.
“좋은 지갑을 얻었네요, 헤베.”
“응….”
“지금 바로 바꿀까요?”
“응.”
헤베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지갑은 3년 전 저택 근처 마을에서 구입했던 것이었다. 두 개를 나란히 두자 황제가 선물한 것이 더욱 빛이 났다.
원래 있던 지갑에서도 꽤 많은 액수의 돈이 쏟아졌다.
지첸이 과하게 부러워하며 먹을 걸 사달라고 졸라댔다.
헤베는 이제 돈도 많고, 지갑도 있고, 음식점에서 먹을 걸 살 줄도 알았다. 품질 좋은 지갑이 생긴 헤베는 너무 신이 나서 당장 나가자며 벌떡 일어났다가 머리가 핑 돌아서 모두에게 한 소리 들었다.
그날 친위대는 전 사령관의 돈으로 마음껏 포식했다.
***
대신전 개관식은 성대하고 화려했다. 참석자가 많아서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진행됐는데, 헤베와 테이든은 오후에 참석했다.
‘헤게르미…….’
헤베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렸다.
‘이제는 힘을 되찾으셨는지요….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죄송한 것도 많아요. 신께서는 제게 빚진 게 없으시니 혹여라도 그런 생각은 마세요…. 대리자님은 잘 계신가요? 그분은 끝까지 걱정이 많으셨어요. 저는 그분께 감사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세계 일로 바쁘다던데 안부를 전해주세요….’
기도를 드리는 헤베의 마음속에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남은 이야기는 꿈에서 만났을 때를 기약하고 고개를 들었다. 높다란 천장에서 새어 들어온 하얀 빛이 기도 중인 수많은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
옆에서 간절하게 기도드리는 테이든에게도 빛의 손길이 닿았다. 반짝거리는 금발, 내리깐 눈꺼풀. 간절하게 모은 두 손. 시선을 느꼈는지 속눈썹이 잠깐 떨렸다. 헤베는 테이든이 저 때문에 기도를 멈추지 않기를 바랐는데, 정말로 테이든은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멈추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곳은 대신전이구나.’
헤베는 생뚱맞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대신전이 완공되었구나.’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전쟁이 끝났어…….’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억누르기 힘든 격정적인 감정이 터져 나왔다.
저마다 간절함을 품고 기도드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헤베는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나의 전쟁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해가 지고 나서는 화려한 폭죽이 하늘을 수놓았다. 가을 초입이라 날이 쌀쌀했기에 루니스의 명을 받은 마법사들이 하룻밤 동안 황성을 초여름 날씨로 만들었다. 정문은 이튿날 오전까지 개방해놓을 예정이었다. 황제가 신분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지만 아직 요원한 듯, 귀족이고 평민이고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려 놀았다.
헤베와 테이든은 일행과 함께 대신전 앞 광장의 분수대를 구경했다.
아기는 맡겨놓고 온 파와이와 밀리안이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했다. 지첸과 파르테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손을 붙잡고 있었다. 헤베도 테이든에게 폭 안긴 상태였다. 진과 마우, 루니스는 어색하게 서 있었다….
무지개 빛깔을 뽐내는 분수 쇼가 펼쳐졌다.
많은 사람이 박수 치며 감탄했다.
헤베는 어린애처럼 입을 헤 벌렸다.
“황제 미쳤나 봐. 오늘 국고를 파탄 낼 모양이야.”
“전쟁이 끝나고 비센티아에서 열린 가장 큰 축제로 기록될 것 같네요.”
“상징적인 의미는 있겠지만….”
그때 헤베는 빵 냄새를 맡고 코끝을 들었다.
대신전이 드디어 완공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서 오늘 한 끼도 먹지 않았다. 기도도 드리고 개관식도 끝나니 이제 허기가 몰려왔다.
“헤베 님, 저기서 빵 나눠주고 있어요.”
마우가 한발 늦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일행은 사람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빵은 물론이고 갖가지 과일과 고기 등이 진열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먹을 만큼 가져갔다. 황제는 정말로 오늘을 대륙 최고의 기일로 정할 모양인 듯했다. 헤베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화려하고 호화로운 축제는 비센티아의 모든 이에게 확실하게 각인할 것이다.
정말로 삼백 년의 전쟁이 끝났고, 평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맛있는 냄새 난다.”
오늘 수프도 제대로 못 삼킨 헤베 때문에 걱정 많았던 친위대가 안도했다. 테이든은 헤베를 안은 팔을 풀었다.
“가지고 올게요. 여기 있어요.”
“내가 가져올게. 다들 기다려!”
헤베가 신이 나서 말하고는 빵 담는 줄 뒤에 섰다. 즐거워하는 모습에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헤베는 종종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스스로 하고 싶어 했다.
“이런, 죄송해서 어쩌죠. 빵 다 떨어졌네요.”
앞 사람들이 빵을 너무 많이 가져가서 헤베의 앞에서 딱 끊겨버렸다.
헤베는 딱히 아쉬워하지 않았으나 보는 이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테이든이 혀를 차고, 진은 얼른 빵을 구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빵 못 받으셨어요?”
빈손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던 헤베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동그란 밤송이 머리 소년이었고, 깔끔한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제 것 좀 드실래요?”
“괜찮아요. 가족이랑 같이 먹어요.”
“자요. 고르세요.”
헤베가 사양했지만 소년은 빵 접시를 내밀었다. 헤베는 소년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접시에는 다양한 종류의 빵이 담겨 있었다.
“그럼 이거 하나만 먹을게요.”
“더 골라도 되는데요. 욕심 좀 내면서 사세요.”
“전 이대로가 좋아요. 고맙습니다.”
“저도 고마웠어요. 오래 사세요.”
꾸벅 인사한 소년이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지켜보던 친위대는 매우 수상한 모습에 수군거렸다.
“누구죠? 왜 고맙다는 걸까요. 헤베를 아는 사람인가.”
“독이 있나 확인해봐야겠어요.”
“난 소년을 따라갈게.”
“그러진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헤베 표정 보면.”
테이든이 숙덕거리는 수하들에게 말했다. 수하들도 헤베의 표정을 봤다.
헤베는 소년이 사라진 군중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 가볍고 편한 미소는 의심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테이든에게도 새로운 얼굴이었다.
최근 그가 이렇게 편하게 웃은 적 있었던가.
소년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질투심이 솟았다.
“테이든!”
헤베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너무 행복하고 이 행복을 빨리 나누고 싶다는 얼굴로 테이든에게 달려왔다.
“이런.”
보고 있던 테이든은 아직 재활 중인 다람쥐가 뛰는 걸 보고 놀라서 자리를 박찼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는데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테이든이 감싸 안자 헤베는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이 받은 걸 보여줬다.
“나 이거 받았어. 같이 먹자.”
작은 크로와상이었다. 헤베는 두 개로 나눠서 하나는 테이든에게 줬다.
테이든은 갑자기 뛴 헤베에게 현기증이 있지는 않은지 살피고서 물었다.
“헤베, 방금 그 어린애는 누구예요? 아는 사람 같던데.”
“있어…. 밤송이.”
헤베가 미소 지었다. 휘어지는 눈매와 호선을 그리는 입술을 보며 테이든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빵은 담백하고 쫄깃했다. 헤베가 손가락으로 뜯어 우물우물 씹는 동안 테이든은 한입에 다 먹은 상태였다. 헤베는 남은 빵을 내밀었다.
“이것도 먹어.”
“당신 먹어요. 소중한 첫 끼인데.”
“너도 나 때문에 식사 걸렀으면서…. 그럼 우리 나눠 먹자.”
헤베는 남은 걸 다시 절반 뜯었다. 테이든은 웃으며 받아 들고는 이번엔 한입에 다 먹지 않고 뜯어 먹었다.
헤베는 사탕에 이끌려서 전쟁터로 들어왔다. 전투에 승리하면 전 궁사는 달콤한 사탕과 부드러운 빵을 줬다. 항상 주는 것도 아니어서 한달에 한번만 얻어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헤베는 그렇게 맛있는 빵을 테이든이 달라고 하면 전부 다 줄 것이다.
그때 멀리서 장이 꼬여서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을 한 수하들이 보였다.
회귀 전엔 어떻게 이들을 의심했을까?
할 수만 있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헤베는 그들에게 손짓했다.
손톱만 한 양을 또 쪼개서 모두에게 나눠줬다. 헤베가 너무 방긋방긋 예쁘게 웃고 있어서 수하들은 거부하지도 못했다.
오늘 첫 끼를 먹는 전 사령관의 빵을 다 빼앗아 먹게 되어 기분이 복잡한 수하들과 달리 헤베는 몹시 행복했다.
5.
개관식 이튿날 아침, 헤베는 눈가에 부드러운 느낌이 들어서 눈을 떴다. 테이든이 손가락으로 속눈썹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잠이 덜 깬 헤베가 배시시 웃자 테이든도 미소 지으며 헤베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둘은 침대에서 꽁냥거리다가 한 시간 후에야 일어났다.
테이든은 헤베를 무릎 위에 앉히고 빵을 뜯어 먹이면서 물었다.
“꿈에서 헤게르미는 잘 만났어요?”
“아니.”
“…못 만났다고요?”
“응, 꿈에 안 나오셨어.”
테이든이 눈썹을 찌푸렸다. 헤베가 재활 운동을 시작하기 전이 떠오른 것이다. 대리자가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신전에서 며칠을 보냈다. 중화액 반응도 성공적이고 앞으로 재활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힘들어 하는 헤베 때문에 저택에 비상이 걸렸던 시기였다.
그때 테이든은 신에게 헤베의 심기를 어지럽힌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협박했고, 바로 응답이 있었다.
“오후에 기도드리러 가죠. 오늘 밤에는 반드시 나올 겁니다.”
테이든은 다시 신을 협박할 생각으로 말했다. 그러나 헤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안 그래도 돼.”
그 목소리가 무척 가볍고 개운해서 오히려 불안해진 테이든은 헤베의 얼굴을 신중하게 살폈다. 무언가 숨기고 있진 않은지. 그러나 헤베는 빵을 먹느라 오물오물 입술을 움직이면서 테이든을 향해 귀여운 표정만 지어올 뿐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 얼른 여행이나 가자.”
헤베가 안심시키려는 듯 예쁘게 웃었다.
“…….”
테이든은 미간을 좁혔다.
헤베의 피해망상은 이제 줄어들었지만 테이든의 헤베의심증은 아직 한참 진행 중이었다. 이것도 헤베의 업보였다.
***
저녁에 황성을 나섰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 여행이었다. 헤베의 피로 누적을 걱정한 루니스와 파르테가 순간이동을 제안했으나 개관식이 끝나고 묘하게 들뜬 헤베는 여행을 고집했다.
이번에는 둘뿐이 아니었다.
진은 당연히 순간이동으로 먼저 돌아가려 했는데, 헤베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나랑 여행하기 싫어…?’
헤베는 이제 과거와 같은 심각한 피해망상을 앓지 않았지만, 친위대의 과보호는 여전했으므로 진은 여행이 너무 하고 싶었다며 커플 사이에 끼어들었다. 물론 혼자 죽을 생각은 없었다.
‘헤베 님, 지첸 경이 이스탄에 일정이 있다더군요. 마침 저택 근처입니다.’
지첸 또한 물귀신 작전을 사용했다.
‘파르테랑 마우도 엔디야키지 다리에 가야 하잖아. 어차피 가는 길이지?’
육아에 바쁜 파와이, 밀리안과 궁사 일로 바쁜 루니스를 제외하면 친위대 절반 이상에 여행길에 함께했다. 만족한 사람은 헤베 뿐이었다.
***
엔디야키지 다리에 도착했을 때 마우는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다. 테이든과 헤베의 염장질은 말해봤자 입만 아프고, 지첸과 파르테의 티격태격도 이제는 염병 천병으로만 느껴졌다. 진의 경우에는 무심하고 무뚝뚝해서 크게 영향받지 않았지만 마우는 밤마다 잠을 못 잤다.
마침내 엔디야키지 다리에 도착했을 때 마우는 어떤 팻말을 발견했다.
[공공장소 애정행각 절대 금지]
[애정행각 시 벌금 10만 골드]
누군가 둘 같은 눈꼴신 커플이 또 있었나 보다. 팻말을 뽑아다 들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거 보이죠? 다들 봤죠? 애정행각 금지입니다. 껴안지 마세요. 악, 거기 둘, 껴안지 말라고요!”
헤베의 허리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듯 팔을 풀지 않는 테이든을 보고 마우가 발광했다. 테이든이 허리춤에서 지갑을 꺼내며 수줍게 말했다.
“10만 골드 가져가세요.”
“아아아악.”
마우가 스트레스에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반면 10만 골드를 물 쓰듯 쓰긴 어려운 지첸과 파르테는 조금 떨어졌다.
“테이든, 그러지 마. 마우가 싫어하는데… 저렇게 보기 싫다는데….”
헤베가 테이든의 품을 벗어났다. 의기소침한 목소리에 마우는 이를 바득 갈면서 농담이라고 말해야만 했다.
루니스 율리 궁사의 정식 명을 받고 방문한 것이기 때문에 마법 학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학자 중에는 전쟁에도 참전한 마법사들도 있어서 일행을 바로 알아봤다. 신탁의 영웅을 보게 되어 영광이라며 연회라도 열 기세였다. 헤베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테이든 뒤에 숨었다. 테이든은 평범한 귀족 신분의 연인이라고 소개했다.
일행은 늦은 밤 관광객이 모두 빠져나간 뒤 봉인석 앞에 섰다.
헤베는 파르테에게 어떤 마법진을 사용하고 어떤 주문을 외워야 하는지 세세히 설명했다.
파르테 혼자서는 불가능했고, 마우가 보조 마법을 사용해서 겨우 풀었다. 지첸이 보란 듯이 환호했다가 파르테에게 한 대 맞았다.
봉인석을 세운 사람은 풀 에자르 위튼이었다. 비석 내용은 평범했다. 몇 년, 몇 월, 며칠. 지역 귀족 가문의 의뢰로 다리를 세운다는 내용이었고, 아래에는 만드는 데 참여한 마법사들 명단이 있었다. 굳이 봉인해놓은 이유는 천재의 장난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마우와 파르테는 비석 결과를 보고하러 황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우는 그렇게 괴로워해놓고 막상 헤베와 헤어지려니 속상했다.
“저택에는 일주일 후 도착 예정이시죠?”
“응.”
“한 달 후쯤 갈게요. “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마우는 징그러운 커플을 보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도, 꼭 저택에 와서 스스로 염장질을 당했다.
“조만간 놀러 갈게, 헤베.”
“응.”
파르테는 깔끔하게 인사하고 떠났다.
마우, 파르테가 사라지자 지첸은 더욱 힘들어했다. 딱히 사랑하는 사람과 멀어져서 힘들다기보다는 수다 떨 상대가 없어져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진은 본래 무뚝뚝하고, 테이든은 헤베 말고는 관심 없고, 그렇다고 헤베와 대화 좀 할라치면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져 자유롭게 떠들 수가 없었다.
지첸의 답답함이 쌓여갈 때쯤 목적지인 이스탄에 도착했다.
“거, 뭐. 여행 말고 할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임무나 하고 가든가. 근처 분화구만 살짝 살펴보는 되는 일인데.”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뮨의 친위대인지라 막상 헤어진다고 하니 아쉬워서 넌지시 헤베를 유혹해봤다. 헤베는 고민하는 눈치였으나 진은 미간을 사정없이 구겼고, 테이든의 보랏빛 눈은 서늘해졌다.
“죄송해요, 안 됩니다.
헤베가 입을 열기도 전에 테이든이 부드럽게 거절했다.
“저희도 너무 함께 있고 싶은데, 임무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고, 슬슬 투약 시기라서요.”
“아, 그렇지. 참.”
지첸이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투약 시기라는데 더 꼬실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헤베도 잊고 있었는지 아, 하고서는 지첸을 달랬다.
“어차피 지금은 다른 애들도 없잖아. 나중에 한가해지면 다같이 여행이나 하자.”
“그런 날이 올까. 죄다 한 자리 맡고 있어서…. 비센티아에서 제일 바쁜 녀석들일걸요.”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더라고. 내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나서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
“누군가 죽지 않는다면 분명히 다같이 여행할 날이 올 거야.”
“…….”
헤베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어놓고서는 해맑게 웃었다.
***
마침 끼니때인지라 식사 후 헤어지기로 한 일행은 진이 미리 알아둔 고급 식당으로 향했다.
룸 형식으로 이루어진 곳에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데, 바깥 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얼마나 시끄러워졌는지 청력이 좋지 않은 헤베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무슨 일 있나?”
과거라면 포탄이 터졌다든가 마물의 습격 같은 얘기를 했을 헤베가 눈만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테이든은 그런 헤베가 너무 사랑스럽고 기특하고 장해서 다시 코 끝이 찡했지만, 지첸과 진 앞이라서 눈물을 참았다…. 옆에서 지첸은 테이든의 넘치는 감수성을 알아채지 못한 척하려 애썼다.
“알아보겠습니다.”
진이 복도로 나가니 다른 방의 손님들도 나와서 직원에게 묻고 있었다.
“이보시오. 밖에 무슨 일 있소?”
“헤베 뮨이 죽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마기에 침범되어 죽었다고… 황제폐하께서 직접 발표하셨습니다!”
곧 식당 내부에도 긴급 호외가 돌려졌다.
진이 헤베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 장 받아왔다. 그들이 아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헤베 뮨이 마기에 침범되어 결국 사망했다.
954년 10월 21일, 헤베 뮨은 공식적으로 죽음을 맞은 것이다.
헤베는 자신의 사망 기사를 보며 표정이 밝아졌다.
“이젠 마물을 얕보거나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지겠지?”
“네, 그럴 거예요.”
“기쁜 날이니까 내가 쏠게!”
“좋지요. 잘 먹겠습니다.”
새 지갑과 많은 돈이 생긴 헤베는 틈만 나면 자신이 계산하려 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대부분의 경비가 헤베의 지갑에서 나왔다. 헤베에게는 이런 여행을 수백 번 더 해도 탕진되지 않을 재산이 있었는데, 물론 그 재산의 출처는 테이든과 친위대였다. 그의 지갑은 앞으로 영원히 빌 일 없었다.
***
여행은 순탄하게 흘러갔고 마침내 둘은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늦가을, 울긋불긋한 낙엽으로 물든 저택의 모습에 헤베가 크게 감탄했다.
작년까지는 몸도 안 좋고 재활에 집중하느라 바깥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는데,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두 해나 놓쳤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헤베가 바깥 구경을 하느라 저택에 들어가지 않자 진이 말해왔다.
“산책하실 거라면 전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정리해야 할 게 있어서.”
“응.”
“몇 시쯤 들어오실 겁니까?”
“저녁은 같이 먹자.”
“예.”
진은 헤베가 여행지에 들를 때마다 구입한 기념품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저택에 들어갔다. 정원에는 집사장 데이지를 비롯한 시종들이 마중 나와 있었는데, 진 혼자 들어오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진이 그들에게 헤베의 말을 전했다. 시종들은 매우 아쉬워했다.
“저녁 식사라면 시간이 많이 남았네요….”
“예, 참고로 헤베 님께서는 점심을 아직 드시지 않았습니다.”
“산책하면서 드실 간단한 도시락을 만들어야겠군요.”
“이건 헤베 님께서 손수 고르신 기념품들입니다.”
“세상에, 저희를 위한 선물까지.”
데이지가 감격했다.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진 혼자 들고 들어온 게 신기할 정도였다. 시종들은 우선 헤베의 도시락을 만든 뒤 선물을 고르기로 했다.
그때 헤베는 테이든과 함께 저택 외부를 한 바퀴 돌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일 정원만 돌고 담벼락 바깥은 돌 생각을 안 했네. 이렇게 경치 좋은 줄 알았으면 여기도 자주 나왔을 텐데.”
“네…. 춥지는 않으세요?”
“선선하고 좋은데. 넌 추워? 추우면 들어가자.”
테이든은 날이 쌀쌀하고, 헤베가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먹지 않아서 이만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굳이 걸어야 한다면 품에 안고 거닐고 싶었다.
“저도 괜찮아요. 바람이 너무 세지 않아서 좋네요.”
하지만 헤베가 원한다면… 테이든이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택의 주인에게 애정 깊은 시종들이 외관도 아름답게 꾸며놨기에 확실히 눈요깃거리는 많았다.
담벼락을 넘어 피어있는 장미 덩굴은 낙엽보다 새빨갰고, 헤베가 특별히 아끼는 라넌큘러스도 둥글게 꽃밭을 이뤄서 길을 심심하지 않게 해주었다. 길바닥은 내부와는 달리 울퉁불퉁한 돌로 되어서 테이든은 헤베가 넘어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폈다. 보기엔 예쁘지만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매끄럽게 바꾸라고 지시해야 할 듯싶었다.
“이것 봐. 들꽃이 돌을 뚫고도 예쁘게 피웠어.”
“그러게요. 역경을 딛고서 잘 자랐네요.”
담벼락 사이에 피어난 작은 들꽃을 발견할 때마다 헤베가 귀엽게 웃었다.
-먀먕!
그때 담 위에서 하얗고 커다란 게 달려들었다. 이대로 헤베에게 안기면 뒤로 넘어지겠다 싶어서 테이든이 얼른 헤베의 앞을 막고 먕먕이를 안아 들었다.
“먕먕아! 오랜만이야.”
-미양, 먕. 먕먕.
“그래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한달 반만이었다. 헤베가 몹시 반가워하며 먕먕이를 쓰다듬었다.
“삑삑이랑 빽빽이는 두고 왔어?”
-먕먕먕.
“응, 그랬어. 귀여워라.”
헤베가 귀엽다기엔 너무 커다래진 먕먕이에게 입 맞추려 하자 테이든이 눈썹을 찌푸리며 손으로 헤베의 얼굴을 감쌌다.
“입술은 안 된다고 했을 텐데요.”
“응?”
“쓰다듬거나 말랑거리는 건 돼도 입술은 갖다 대지 말라고 제가 분명 말했습니다만.”
“아, 맞다.”
헤베가 웃으면서 발꿈치를 들었다. 테이든은 고개 숙여 헤베의 입술에 키스했다. 먕먕이가 품 안에서 뛰어내렸다.
꼬리로 땅을 탁탁 내리치면서 얌전히 기다리던 먕먕이는 두 인간이 떨어질 생각을 안 해서 테이든의 돌처럼 단단한 허벅지를 앞발로 퍽, 쳤다. 작은 인간은 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테이든은 몇 번 무시하다가 거의 공격 수준으로 맞고 나서야 헤베를 놔줬다. 헤베는 해롱해롱했다.
“들어갈래요?”
이 틈을 타 테이든이 유혹했지만 헤베는 고개를 저었다.
“낙엽이 너무 예뻐. 구경할래…. 먕먕아, 등에 이건 뭐야?”
숨을 몰아쉬던 헤베가 먕먕이 등에 포대기를 발견했다. 테이든이 천을 풀자 도시락통과 음료, 담요가 나왔다. 테이든은 얼른 담요로 헤베의 몸부터 꼼꼼하게 감쌌다.
“집사장이 준비했나 보군요.”
“도시락이라.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조금만 걸으면 오두막이 있으니 거기서 먹어요.”
“응.”
둘은 길을 계속 걸었다.
저택의 동쪽을 돌 때 헤베의 시야에 붉게 물든 풍경이 가득 찼다. 커다란 산이 가을로 뒤덮여 있었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새파래서 더욱 대비되는 붉은 색이었다.
앞으로 헤베는 노을보다 붉은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바로 낙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가을 산을 올려다보면서 이렇게 벅찼던 적이 있었나?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붉게 물든 숲을 보면 한숨만 나왔다. 이제 곧 겨울이구나. 추운 건 힘들어. 이번 겨울에도 많은 사람이 죽겠지….
고작 몇 년이 흘렀다고 이제는 울긋불긋한 산을 보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감탄을 흘린다.
어느 가을이 떠올랐다. 무엇이 낙엽이고 피인지 알 수 없었다. 헤베는 땅에 떨어진 낙엽을 모아 무덤 위를 덮었다.
어느 겨울이 떠올랐다. 동상에 걸린 발가락 두 개를 절단하고 막사를 나오니 이미 많은 병사가 얼음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어느 봄이 떠올랐다….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전쟁에서 벗어난다는 건 이런 것이었다. 두려움 없이 회상하는 것…. 가을로 물든 산을 앞에 두고 마법을 외우던 어린 자신과 마주 봐도 무섭지 않은 것.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헤베.”
테이든이 마법에 걸린 듯 멈춰 선 헤베에게 다가왔다. 부드럽고 따스한 품에 안긴 헤베는 테이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벅차고 아름다우니 눈물이 나왔다.
-먕.
먕먕이가 위로하듯이 헤베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어쩔 거야. 네 감수성이 옮았나 봐.”
“그런가 봐요. 연인은 닮는다잖아요.”
“너도 울어.”
“지금요?”
“응.”
“좋아요.”
테이든은 흔쾌히 대답하고는 정말로 바로 눈시울을 붉혔다.
감수성 뛰어난 연인이 가을에 물든 산 앞에서 서로 끌어안고 우는 동안 먕먕이는 열심히 털을 묻히며 둘을 위로했다.
테이든이 말한 오두막은 저택 뒤쪽에 있었다. 먕먕이가 후다닥 날아가 오두막에 쌓인 낙엽을 치우고 자리를 만들었다. 테이든은 도시락을 감쌌던 천을 바닥에 깔았다. 졸졸졸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곳도 있었어? 처음 와 봐.”
“저도 두 번째예요. 그동안 집사장이 계속 관리하고 있었나 보네요.”
테이든이 도시락을 열었다. 건강 식단을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장식으로 먹고 싶게끔 꾸며놨다. 그 짧은 사이 준비했다는 게 놀라웠다.
“개울도 흐르네…. 개구리도 있어. 겨울잠 잘 준비해야 할 텐데.”
헤베는 오두막 안쪽으로 올라올 생각을 안 했다. 오두막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들꽃과 개울, 물레방아, 개구리, 수초 등을 구경했다.
너무 잘 꾸며도 문제라는 생각을 하면서 테이든이 도시락을 들고 다가갔다.
“아, 하세요.”
“네가 먼저 먹어.”
“헤베 먹으면요.”
헤베가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 테이든은 건강 식단 중에서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것부터 헤베에게 먹였다. 우물우물 맛보는 헤베를 테이든이 긴장하며 응시했다. 다행히 입맛에 맞는 듯했지만 자리 잡고 먹으려 하진 않았다. 헤베는 개울가에 쪼그려 앉아 손을 담갔다. 어린애 같았다. 너무 들뜨고 신나서, 세상에 재미있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식사는 뒷전인 어린애.
테이든은 도시락을 들고 헤베를 따라다니면서 한 숟가락씩 먹였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건 좀 심하지 않나. 나이가 몇인데.’
그러면 테이든은 답해줄 말이 아주 많았다.
저분은 여덟 살에 전쟁터에 끌려 오셨고…. 그쪽이 엄마아빠 손 붙잡고 시장도 구경하고 요리도 배우고 그러는 동안 저분은 상식 하나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우리는 모두 빚이 있고….
전쟁이 끝나고 멈춰 있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한 거라면 엄연히 헤베는 어린애가 맞았다.
테이든은 헤베가 인적 드문 숲이나 호숫가가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 많은 광장이나 시장에서 이렇게 행동한다 해도 도시락을 들고 따라다니며 한입씩 먹여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헤베의 구경을 끝내게 할 수 있었다. 아주 쉬웠다.
테이든은 먕먕이랑 같이 개구리를 구경하는 헤베에게 말했다.
“헤베, 저 정말 배고파요….”
“어? 너도 얼른 먹어야지!”
헤베가 후다닥 위로 올라갔다. 테이든 몫이 분명한 큼직한 도시락을 들고 내려와서는 발돋움하더니 테이든이 해준 것처럼 고기를 한 점 찍어서 테이든의 입가에 가져가 댔다.
“아, 해.”
“아.”
“포크까지 먹진 말고.”
테이든이 크게 입을 열었다가 닫자 헤베가 웃음을 터뜨렸다. 테이든은 헤베를 데리고 오두막에 올라와 자리 잡고 앉았다.
-미양.
먕먕이도 헤베 옆에 앉았다. 뒤에서 보면 먕먕이와 헤베의 덩치가 비슷했다.
그들은 파란 하늘 아래 붉은 산을 바라보며 식사 시간을 이어갔다.
***
낭만적인 분위기에 헤베의 마음이 흐물흐물한 게 눈에 보여서 테이든은 안에 들어가길 재촉하질 않았다. 헤베가 기침을 하지 않았다면 저녁까지 있었을 터였다.
헤베가 작게 기침하자마자 테이든은 헤베를 달랑 안아 들어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미 진이 욕탕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테이든은 헤베를 탕 안에 두고 먼저 씻고 나왔다.
데이지가 테이든에게 물었다.
“저녁 식사 시간을 미룰까요?”
“아뇨, 제시간에 준비해두세요. 빵도 함께.”
“예.”
테이든은 뽀송뽀송한 수건을 챙겨서 다시 욕탕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여행이 편안했다지만 무려 한 달 반이다. 외출을 끝내고 안락한 저택의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근 헤베는 몹시 나른해졌다.
테이든은 물렁물렁해져서 물에 잠기려 하는 헤베를 꺼내 닦았다.
“자면 안 돼요. 저녁 식사하기로 약속했어요, 헤베.”
“알았어.”
헤베가 하품하며 테이든에게 온몸을 기댔다. 뼈가 없어진 듯 흐물거렸다. 테이든은 헤베의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과 뽀얀 살결을 닦으며 체력이 얼마나 남았을지 가늠해봤다. 오늘 밤에 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아까 기침도 했고. 그러나 헤베가 유혹해온다면 넘어갈 의향이 있었다. 황성에서 저택에 오는 동안 일행 때문에 뜨거운 밤을 보내지 못한지라 애가 탔다.
저택 내부는 온도 조절이 되어 따뜻하지만 혹시 몰라서 헤베에게는 긴 팔 상의를 입히고 테이든은 대충 반소매 셔츠를 입었다.
두 사람이 1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벽난로 앞에 하베트와 진, 시종들이 모여 있었다.
테이든은 벽난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고 헤베를 옆에 앉혔다.
“거참 여행이 길기도 하군. 한 달 반이라니.”
“춥지만 않았어도 더 했습니다. 논문은 잘 쓰고 계세요?”
“겨울엔 완성할 듯싶네.”
“루니스보다 빠르겠네요. 루니스는 내년 얘기하던데.”
“그쪽은 궁사라 바쁘고, 나는 이것 말고는 아무 일도 안 하니까 당연하지.”
“심심하세요?”
질문한 건 헤베인데 하베트는 힐끗 테이든 눈치를 봤다. 심심하다고 말하면 분명 일거리를 만들어 내쫓을 인간이었다.
“아니, 딱 좋네. 난 여기서 죽을 때까지 논문이나 쓰며 살 것이네.”
테이든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하베트는 등골이 서늘해져 화제를 돌렸다.
“여행 이야기나 하지. 진에게 짧게 듣긴 했지만 한 달 반이나 아주 즐거웠던 모양인데.”
“재미있었습니다. 내년 봄에 또 가려고요. 첫 번째 도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나른했던 헤베가 잠에서 깬 듯 떠들었다. 중간에 먕먕이가 삑삑이와 빽빽이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테이든이 아이고, 라고 했으며 하모니카 연주가 무척 서툴고, 우락부락하다고 하니까 시무룩해진 것까지….
아무도 묻지 않은 둘만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된 진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감쌌다.
***
저택에 돌아온 지 사흘 후 헤베와 테이든은 초트볼 마을에 방문했다.
헤베 뮨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시큰둥했다. 그러나 시큰둥한 자들도 장례식에는 참석했다. 여러 곳에서 이렇게 자발적인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비센티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기에 테이든은 흐뭇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국장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역시 헤베 뮨은 비센티아의 영웅이에요.”
반면 헤베는 떨떠름했다.
“이게 좋은 현상인지는 모르겠어. 괜히 흑마법사를 우대하는 심리가 나타나면 안 되는데….”
“그렇진 않을 거예요. 실제로 희귀종 밀매단체에서 마물 거래를 금지했다잖아요.”
“효과가 있는 건가?”
“그럼요.”
테이든은 헤베를 안심시키며 음식점에 들어섰다. 본래 장례식을 주최한 마을 촌장집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으려 했으나 예상보다 허술해서 급히 식당을 예약했다. 둘과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많은지 작은 마을의 작은 음식점은 가득 차 있었다.
“주문하고 올게요. 앉아 있어요.”
“응.”
테이든이 웃돈을 얹은 덕에 얻어온 경치 좋은 창가 자리였다.
창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었다. 헤베 뮨을 애도하는 이들과 시큰둥한 이들이 같이 모여 밥을 먹기도 했다.
‘나는 진짜 죽었구나.’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이번엔 가짜로 또 죽었다. 어딘지 싱숭생숭했다.
그때 맞은편에 모르는 사람이 앉았다.
“혼자 오셨습니까? 합석 좀 할까요.”
살구색 피부의 잘생긴 청년이었고, 까만 상복을 입고 있었다. 헤베는 눈을 깜박였다. 이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말 걸지 않으므로.
“여기 사람이 아니군요.”
“아, 어떻게 아셨는지. 여행 중인데 헤베 뮨 장례식이 있다고 해서 들렀습니다. 주문은 하셨습니까?”
“아직… 했어요.”
“아직이라는 겁니까, 했다는 겁니까? 안 했다면 제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군요. 같은 여행자끼리 말입니다. 그쪽도 이 마을 주민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어요?”
“딱 보면 알지요. 여행 중이라면 저와 함께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청년이 헤베에게 대놓고 추파를 던졌다. 헤베는 눈치채지 못했다.
“날이 추워져서 여행은 그만뒀습니다. 그쪽도 봄 되면 다시 여행하는 게 어때요? 곧 겨울인데.”
“오… 절 걱정해주시다니 정말 마음씨 좋은 분이군요.”
청년이 오해했다.
“여행을 그만뒀는데 이 마을에 계신 걸 보면 헤베 뮨 장례식에 참석하러 오셨나 봅니다.”
“그것도 맞는데. 근처에 살아요. 저쪽에…. 저택에.”
“아, 초대해주신다면 감사히 가겠습니다.”
전혀 초대할 마음이 없었던 헤베가 대화를 복기했다.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게 서투른 그는 무언가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저는… 그 뜻이 아니라.”
그때 생글생글 웃고 있는 청년 뒤로 팔짱 낀 테이든이 보였다. 한쪽 눈썹은 한껏 치솟은 상태였다.
헤베는 눈치가 없었지만 테이든의 표정은 읽혔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헤베가 멍하니 뒤쪽을 보자 청년도 갸웃하며 고개를 돌렸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탄탄한 체격의 잘생긴 남자를 보고 청년이 크게 움찔했다.
“…저 사람은 무슨.”
“제 일행이에요.”
“일행이요?”
청년이 헤베와 테이든을 번갈아 봤다. 테이든이 한 걸음 다가왔다. 사람이 아니라 아주 거대하고 어두운 무언가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청년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다시 쓰러질 것 같았다. 살벌한 위압감에 청년이 입술만 뻐끔댈 때 테이든이 입을 열었다.
“넌 뭐야.”
“…….”
청년은 이 순간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참 잘 어울리십니다.”
청년은 테이든을 향해 엄지를 척 내밀고는 서둘러 음식점을 나갔다. 생존본능이 뛰어난 이였다.
테이든은 자리로 오지 않고 청년이 도망친 방향을 보며 물었다.
“저 미친 새끼는 뭐예요?”
“여행 중인데 내 장례식에 참석했대.”
“하….”
“테이든, 초면에 ‘넌 뭐야.’ 같은 말 하면 안 돼.”
헤베가 예쁜 미간을 찌푸리며 엄격하게 말했다. 테이든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고는 성큼성큼 다가와 앉았다.
“당신은 경계심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나와 말 섞지 마세요. 헤베 뮨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해도요. 당신에게 말 거는 사람은 열 명 중 여덟 명은 어떻게 좀 수작 걸어보려는 변태 새끼고, 한 명은 손 좀 잡아보려는 변태 새끼고, 남은 한 명은 얼굴 좀 만져보려는 변태 새끼니까요.”
잔소리가 다다다 쏟아졌다. 듣던 헤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게 뭐야. 결국 다 나쁜 사람이라는 거잖아.”
“네, 정답이에요.”
테이든이 자기 빼고 다 나쁘다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다.
음식점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아주 고요했다.
“이것 봐요. 아닌 척하면서 다 신경 쓰고 있다니까. 내가 자리만 비우면 당신에게 말 걸 틈을 노리면서….”
“그 반대일 것 같은데.”
“당신은 조용히 해요.”
테이든이 토라진 듯 입을 내밀었다. 헤베는 일어나더니 테이든 옆에 앉았다. 허리에 팔을 감고 어깨에 얼굴을 비비자 테이든은 곧 헐렁헐렁한 표정이 되어 헤베를 안아왔다. 커다란 몸을 치대며 서운함을 토로하는 게 정말 귀여웠다.
***
저택으로 돌아온 둘은 잠깐 떨어졌다. 테이든이 해야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헤베는 마물들과 함께 1층 벽난로 앞에 앉아 마법 학술지를 읽었다.
테이든은 헤베와 잠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업무를 금세 끝냈다. 2층의 집무실에서 나와 바로 헤베에게 달려가려는데, 난간 아래로 독서 중인 모습이 보였다. 양옆에는 삑삑이, 빽빽이가 호위하듯이 앉아 있었다.
-밍밍밍.
“으응.”
-매앵.
“그래.”
애교부리듯 작게 우는 마물들을 쓰다듬으며 학문 정진에 심취한 그의 모습은 너무 아름답고 고상했다.
테이든은 그대로 구경 삼매경에 빠졌다.
그는 헤베와 취미를 공유하고 싶어서 학술지를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했지만 그의 마법 지식으로는 열 장도 넘기기 힘들었다. 헤베의 몸을 치료하느라 세상 모든 마법서를 읽었음에도 근본적으로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표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헤베는 읽는 데 막힘 없었다. 아마 논문을 쓴다면 많은 마법사가 해석하며 읽어야 할 것이다.
‘헤베의 가명을 준비해둬야 하나. 아니면 가족이라고 하거나.’
테이든은 헤베의 성격을 잘 알았다.
언젠가는 분명히 공익을 위해 일하려 할 것이다. 논문부터 시작해서…. 많은 이가 헤베 뮨의 나이를 40대라고 알고 있고, 헤베는 상당히 어려 보이니 친아들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헤베 뮨에게 배우자가 있었느냐며 놀랄 사람들을 생각하니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동생으로 소개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더욱 안 좋아졌다.
헤베에게 피붙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자신은 헤베와 피를 공유한 이를 절대로 좋아하지 못했을 터이므로.
어른스럽고 성숙하던 그가 점점 의심증이 심해지고 애같이 구는 건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우선 과거에는 헤베가 너무 미성숙하고 정신적으로 약해서 테이든이 제대로 정신 붙잡고 이끌어야만 했다.
또한 헤베가 얘기하는 상대라 봤자 친위대와 황제 정도였고, 모두 테이든의 눈치를 보느라 그가 정한 선을 침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피해망상이 희미해진 헤베는 주변인들에게 경계심을 풀고 사르르 예쁘게 웃고 다니기 시작했다. 본래도 헤베에게 집착이 심한 테이든은 미칠 것 같았다.
‘헤베가 많은 사람과 척졌으면 좋겠다….’
스물세 살 테이든은 그런 무섭고 음습한 생각을 하며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
데이지가 헤베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마법사님.”
독서 중인 사람을 굳이 뭐하러 부른단 말인가. 연인인 나도 말 걸기를 참고 있는데.
테이든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데이지를 노려봤다.
“무슨 일이세요?”
헤베가 안경을 벗으며 데이지에게 물었다.
“마법사님, 오늘 식사는 고기를 넣은 순한 볶음면인데 괜찮으실까요.”
“헤베라고 부르라니까요.”
“고기볶음면 괜찮습니까, 마법사님?”
“데이지도 참 고집 있네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집사장과 헤베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모습이 무척 사이좋고 화기애애해 보였다. 테이든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다시 집무실로 들어왔다. 더 있다간… 평범한 사람과 평범하게 대화하는 헤베를 방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독점욕과 집착을 참는 건 힘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다 당신을 싫어한다고 말했어야 했을까?
헤베는 왜 저렇게 쉽게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는 걸까?
내게만 웃어준다면 좋을 텐데.
그는 나를 사랑하고 신뢰하니, 내 말 한 마디면 다시 헤베를 그늘 안으로 숨길 수 있어….
어둡고 달콤한 유혹이 그에게 손을 뻗어왔다.
-무웅.
테이든이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그때 먕먕이가 열린 창을 통해 들어왔다. 마물은 어두운 기운을 내뿜는 테이든을 발견하고 털을 세웠다.
“먕먕아.”
-매옹.
“혹시 사람 물고 싶으면 물어도 돼.”
-애우우웅.
먕먕이는 낮게 울면서 질색하더니 계단을 내려갔다.
테이든은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헤베는 데이지와의 대화를 끝내고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계단에서 먕먕이와 마주친 헤베는 몹시 반가워했다.
“우리 먕먕이, 털이 차네. 밖에 있다 왔구나.”
-먕.
“몸이 왜 이렇게 뻣뻣할까. 무서운 거라도 봤어?”
-매옹.
“응, 먕먕아. 귀여워.”
‘누가 보면 아주 며칠 만에 보는 줄 알겠군….’
몇 번이나 경고한 덕에 먕먕이에게 뽀뽀하려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싫었다.
-먀악.
“조용히 해. 테이든 일하는 중이니까.”
-뭉뭉.
“왜 막아. 여기 무서운 거라도 있어?”
흉계라도 꾸미는 듯한 얼굴이던 테이든은 헤베가 문 앞에 다가오자 얼른 표정을 바꾸고 책상 앞에 앉았다.
-똑똑.
헤베가 두 번 노크하고는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었다.
“앗, 헤베. 마침 저 일 끝났는데.”
“…테이든!”
테이든은 밝게 웃고 있었는데, 헤베는 테이든의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입술이 왜 그래?”
그는 다람쥐처럼 포르르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테이든의 뺨을 감쌌다.
“피가 나잖아. 입술 깨물었구나.”
“네….”
“무슨 일 있었어? 일이 어려웠던 거야?”
“그냥 좀.”
테이든은 헤베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면서 허리를 끌어안고 무릎 위에 앉혔다. 경계하던 먕먕이는 테이든의 상태가 본래대로 돌아왔음을 알고 총총 집무실을 나갔다.
“초트볼 마을 지원 건 때문에 힘들었어? 다음부터는 나도 저택 일을 도울게.”
“그게 아니라….”
‘헤베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면서 너무 예쁘게 웃어서요. 앞으로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라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네, 잠깐 두통 때문에.”
“연고 바르러 가자. 두통약도 먹고.”
“헤베가 발라줄 거예요?”
“응.”
“얼른 가요.”
테이든은 조금 전까지는 기분 좋은 척만 하고 있었지만 헤베가 직접 연고를 발라준다는 말에 정말로 기분이 좋아졌다.
침실로 들어온 헤베는 테이든을 앉히고 손을 깨끗이 씻은 뒤 연고를 꺼냈다.
“옛날 생각난다. 나 아팠을 때 네가 연고 발라주고 싶어 했는데.”
“저도 기억나요. 헤베가 계속 거부해서 상처받았어요.”
“미안.”
“괜찮습니다. 과거 일이니까요.”
“이제라도 입술 깨물 테니까 발라주든가.”
헤베가 묻자 테이든이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 펄쩍 뛰었다.
“제발요, 헤베.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저 심장 놀란다고요.”
“알았어.”
헤베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테이든도 빙긋 웃었다. 역시 헤베가 웃는 게 좋았다. 다른 사람도 이 예쁜 모습을 보는 건 싫지만, 우울한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테이든은 헤베에게 험한 짓 하기에는 그를 너무 좋아했다.
그는 헤베가 겪었다는 미래가 파국을 맞은 이유는 자신이 이 독점욕과 집착을 참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하들의 반목을 방조하고, 오해는 부추겨서 헤베를 외톨이로 만들었으리라. 또 다른 테이든 엔더웨이가 어떤 결말이 올지를 알려줬으니 결코 그 전철은 밟지 않는다. 앞으로도 이렇게 꾹 눌러 참으며 헤베를 예쁘게 웃게 할 것이다.
연인이 침실 안에서 깨 볶는 그때 복도 모퉁이에서 귀 기울이던 하베트와 진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테이든이 헤베와 대화하는 집사장을 음산하고 서늘한 눈으로 볼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테이든도 두 사람이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안심해도 되는 건가?”
“예.”
“이것 참 아슬아슬하구만. 예전에도 그랬나?”
“늘 비슷합니다. 헤베 님께서 항상 시의적절하게 테이든 공작을 다뤄주신 덕분에 폭발한 적은 드뭅니다.”
“살 떨리는군. 얼른 내려가세.”
하베트와 진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1층으로 내려갔다.
테이든은 헤베에게 험한 짓 하기에는 그를 너무 좋아한다. 하지만 주변인에게는 얼마든지 난폭해질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데이지와 시종들에게도 경고해 줄 필요가 있었다.
다음 날, 테이든과 헤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붙어 있었다. 저택 일거리는 진에게 맡기고 둘은 꽁냥꽁냥 실내 데이트를 했다.
시간이 유난히 빠르게 흘렀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진과 하베트는 한 숟가락 먹고, 헤베의 얼굴을 한번 보고, 한 숟가락 먹고, 얼굴을 보고 하다가 테이든에게서 경고를 들은 뒤에야 제대로 식사했다.
식사 후, 테이든과 헤베는 산책을 나왔다. 산책은 이제 식사하기 전 손을 씻는 것처럼 당연한 습관이 되었다.
해가 진 가을밤은 제법 추웠기 때문에, 헤베는 정원을 거닐어 모두를 걱정시키기보다는 온실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넓은 정원 한켠을 차지한 온실은 항상 초여름처럼 따뜻하게 유지되는 곳으로, 헤베가 약 먹고 잠들기를 반복하던 시절 루니스가 울면서 만들었다. 물론 울었다는 건 헤베에게는 비밀이었다.
마법사들이 주기적으로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유지비가 상당했지만 뮨의 친위대는 이런 온실을 백 개는 더 운영할 재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무료로 봉사해줄 마법사들도 많았고.
천천히 걷던 헤베는 어느 꽃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못 보던 꽃이네.”
“틸라스에만 피는 희귀한 종입니다. 황성에 진상된 걸 제가 가지고 왔어요. 엄청 예민해서 순간이동 마법으로 옮겼죠.”
“진짜 예쁘다. 꽃잎이 투명하고 보석 같아. 향도 좋고.”
“그렇죠?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아요. 헤베처럼.”
“그게 무슨 말이야. 죽었다 살아난 나는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그런 건가.”
“당신은 항상 이 꽃 같았어요. 이 세상 것이 아닌데 세상에 피어나버린 투명하고 예쁜 꽃 말이에요.”
테이든이 근사하게 웃었다. 헤베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테이든은 얼굴 이곳저곳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둘은 다시 천천히 걸었다.
계절이 가을에 들어서며 온실이 자주 쓰일 것을 알고 다시 조경했기 때문에, 곳곳에 처음 보는 꽃과 나무가 심겨 있었다. 얼마나 부지런히 관리했으면 잎사귀 위에 먼지 하나 없었고, 바닥은 맨발로 걸어도 될 것 같았다.
헤베는 이렇게 편한 일상을 누리는 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애썼을지를 생각했다. 감사함보다 미안함이 먼저 들었다. 이러한 충성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누릴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저들이 원하니까.
헤베는 이 무게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지 오래였다.
규모는 넓은데 헤베의 걸음은 느리고, 중간 중간 벤치에 앉아 노닥거리느라 한 바퀴 도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다.
이미 밤은 늦었지만, 헤베는 온실을 나갈 생각이 없어서 출입구 쪽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았다.
“따뜻하고 넓어서 여기에 침대만 두면 하룻밤 자도 되겠어.”
“헤베에… 이젠 가야 해요.”
테이든은 앉지도 않고 어린애처럼 귀여운 말투로 졸랐다.
“알아. 잠깐만 앉았다가 가자.”
헤베가 옆자리를 툭툭 치자 테이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기울이고는 앉았다.
테이든이 앉자마자 헤베가 몸을 기대왔다. 헤베는 몸이 찰 때가 많은 데 비해 테이든은 항상 따뜻해서 이렇게 닿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스무 살 때도 이미 완벽한 몸이었지만 스물셋이 되면서 더욱 감탄을 자아내는 몸이 되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넓은 가슴, 둔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적당하게 두꺼운 근육….
그에 반해 자신은 살갗도 하얗고 말랑거리기만 했다. 헤베는 납작한 배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나도 근육 단련할까.”
“좋은 생각이네요. 일어나면 바로 시작하도록 준비해놓을게요.”
“왜 이렇게 반겨? 내가 이런 몸인 게 싫었던 거야?”
“그럴 리가요. 단지 근육 단련을 하면 튼튼해지고 그러면 더 많은 밤을 불태우며 보낼 수 있으니까…. 물론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지만, 헤베가 더 건강해지면 좋잖아요.”
“계획 세워 봐. 이번 가을하고 겨울은 운동으로 보내고 내년 봄에는 여행을 떠나야겠어.”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너랑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
헤베는 밀고 당기기를 못하는 성격이었다. 순수한 사랑이 담긴 말에 테이든이 활짝 웃었다.
행복해하는 테이든의 얼굴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흘러넘쳤다.
헤베는 문득 테이든에게 키스하고 싶어졌다.
그 생각을 하며 테이든의 보랏빛 눈을 보는 순간 테이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테이든이 손을 뻗어와 목 뒤와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쌌다.
헤베는 깃털 같은 가볍고 부드러운 키스가 내려앉을 걸 예상하며 눈을 감았다. 그들의 키스는 항상 처음은 가볍고 부드러웠다가 두 번째 입맞춤 때 격렬해졌으니까.
헤베의 작은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
테이든의 입술이 처음부터 강한 힘으로 짓눌러왔다. 입술을 아예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강하게 빨아들였다.
예상과는 다른 격렬한 키스에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당황스러워 밀어내려고 했지만 테이든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바르작거리는 헤베를 힘으로 고정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뜨거운 열기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근처에 핀 꽃들에게 자의식이 있다면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헤베가 점점 숨이 차서 몸에서 힘이 빠질 때쯤 테이든이 입술을 놓아줬다.
헤베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테이든은 힘없는 헤베의 몸을 끌어당겨 자신 위에 올리고는 안정적으로 안았다.
기다란 속눈썹에는 물기가 맺혔고, 그 아래에서 갈색 눈은 배신감과 충격으로 그렁그렁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게 정말 키스가 맞아,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처음부터 강하게 짓누를 수가 있어? 어떻게 날 이렇게 난폭하고 사납게 대할 수 있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내려다보던 테이든이 나직하게 물었다.
“싫었어요?”
“…너무, 좋았어….”
헤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예쁜 입술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테이든은 다시 그 입술을 삼키는 대신 몽롱한 헤베의 이마에 키스했다.
“당신에게 체력이 생기면 이런 키스를 조금 더 오래, 많이 할 수 있겠죠.”
“운동 열심히 할게.”
“이제 자러 갈까요?”
“응….”
테이든은 헤베를 안은 채 일어났다. 온실을 나오자 시종들이 공손히 인사했다. 헤베가 테이든에게 안겨 이동하는 건 너무 흔한 모습이라서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
온실 산책을 끝내고 저택에 돌아온 헤베는 진, 하베트와 인사를 나눴다. 데이지를 비롯한 사용인들, 먕먕이, 삑삑이, 빽빽이와의 인사도 끝낸 뒤 헤베는 테이든과 함께 2층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욕실에 함께 들어갔다가 한참 후에 나왔다.
둘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함께 침대 위에 누웠다. 그들은 온실과 오두막, 어떤 운동을 할지와 다음 여행지 등에 대해 소소한 얘기를 나눴다. 침대 옆 협탁에는 손가락만 한 약병이 있었다.
두 사람은 늘 몇백 년 만에 만난 연인처럼 애틋했지만 오늘 더욱 애틋한 이유는 오늘이 바로 일 년에 두 번 있는 중화제를 투여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다달이 투약하던 게 이만큼 발전했다.
헤베는 앞으로 서른 시간 잠들 예정이었고, 테이든은 앞으로 서른 시간 애간장이 타들어 갈 예정이었다.
“이제 슬슬 잘까.”
헤베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테이든은 헤베의 옆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준비됐어요?”
“응, 너도 자야 돼. 꼭. 열 시간 이상은 자야 해.”
“글쎄요.”
“대답이 왜 이래. 안 되겠어. 약속하자.”
“전 초월자라고요. 서른 시간 깨어있는 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빨리 손가락 걸어.”
헤베가 노려보자 테이든은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약속할게요. 헤베도 꼭 시간 맞춰서 깨겠다고 약속해요.”
“응.”
테이든은 헤베의 새끼손가락 끝에 입 맞추고 일어났다.
약병은 아주 작았다.
뚜껑을 열자 역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하베트와 수하들은 이 역겨운 냄새를 어떻게든 완화해보려고 했지만 중화 효과를 위해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테이든이 약병을 건네자 잠깐 상체만 일으킨 헤베는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하는 사람처럼 한입에 털어 넘기고 다시 누웠다.
둘은 말없이 시선을 마주했다. 말똥말똥했던 갈색 눈에 점점 졸음기가 드리워졌다. 테이든은 헤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잘 자요. 일어나면 제가 옆에 있을 거예요.”
“응…. 너도 꼭 자. 약속했어.”
“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이윽고 헤베가 잠들었다.
마기 중화제를 투여하고 나서 잠드는 것은 수면이 아니라 동면에 가까웠다. 말 그대로 죽은 듯이 자는 것이다…. 테이든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옅은 호흡과 느려진 심장 박동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수천 번, 수만 번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테이든은 헤베의 옆에 누웠다.
헤베는 인마전쟁을 끝내기 위해 흑마법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하지만 흑마법을 받아들여서 정작 무엇을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테이든의 추측은 마검을 만들어준 것까지가 한계였다. 창백해진 낯으로 마검을 건네기 전부터 이미 마물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으니 무언가를 한 건 분명하지만….
헤베는 분명히 인마전쟁을 끝낼 결정적인 무언가를 했다. 그 대가로 평생 숨 쉬듯이 사용해왔던 마법을 더는 사용하지 못하게 됐으며, 마기에 침범되지 않도록 중화제를 달고 살아야만 한다. 죽음을 겪기까지 했지만 이 정도로 끝났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사실 헤베 자신은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 덕에 정신적으로 성장했고, 결과도 좋으니 잘한 선택이었다고.
테이든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헤베가 회귀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사랑 같은 감정은 눈치채지 못했고 이뤄지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러나 그걸 다행이라고 여긴다면 헤베가 한번 죽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뜻이었으므로… 테이든은 결코 헤베처럼 결과가 좋으니 다 좋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이렇게 죽은 듯이 자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불안함과 무력감이 치솟았다. 평생을 함께할 후회와 두려움이었다.
테이든은 헤베의 코끝을 건드렸다. 그는 뒤척이지도 않고 잤다.
테이든은 옅은 숨소리를 들으며 일부러 다른 생각을 했다.
가령, 서른 시간 후 그가 깨어나면 할 일들.
열심히 운동을 시키고… 체력이 좋아지면 뿌듯해할 모습. 여린 팔뚝을 내보이며 자랑하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울지를 생각했다.
내년에는 다른 나라로 여행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는 탈리를 벗어난 적이 없으니까. 이제 곧 겨울이니 따뜻한 나라로 여행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밤이 깊어졌다. 테이든은 잠이 오지 않았다. 반드시 자겠다는 헤베와의 약속은 처음부터 어길 생각이었다. 어둡고 외로운 서른 시간을 보내야 하겠지만 참을 수 있었다.
반드시 아침이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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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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