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24화
“얘 짖기도 할까……?”
태원의 물음에 아무도 선뜻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와 주길 바랐는데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정적의 의미를 깨달은 태원은 씁쓸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짖기도 할 것 같구나. 아니라고 해주길 바랐는데.”
안타까운 혼잣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수겸이었다. 신나게 마셔라, 부어라 해대며 술을 마시더니 기어코 꽐라가 되고 말았다.
“수겸아, 이거 몇 개?”
“두 개, 아니아니. 세 개. 아니, 그러니까 두 개. 왜 두 개냐면 두 개거든.”
손가락 두 개를 펴서 내보였더니, 혼자 심각하게 얼토당토않은 이유까지 설명해 주는 수겸을 보고 태원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저 녀석, 제대로 맛이 갔구나.
“형, 형. 속은 좀 괜찮아?”
“어? 어어. 어, 아니. 안…… 괜찮아!”
“어, 안 괜찮다는 거구나. 화장실 갈래?”
“아냐, 괜찮다니까.”
“그래, 그렇다고 치자.”
이번에는 한솔이 수겸의 상태를 확인했다.
가슴 아프지만, 수겸은 취했다. 한솔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를 향한 마음으로도 쉴드를 칠 수 없을 정도로 취했다.
“갈 준비 하자.”
“응.”
“얼른 가자, 쟤 사고 치기 전에.”
“네.”
“왜?”
태원의 말에 수겸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입으로 대꾸했다. 정작 수겸만은 왜 돌아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왜냐면…… 형이 너무 피곤해, 수겸아. 가서 자야겠어.”
“왜 피곤한데?”
“응, 너 때문…… 이 아니라, 그냥 삶이 그렇네.”
“삶이 피곤해?”
수겸은 태원의 말에 당장에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태원은 잠시 별생각 없이 둘러댄 말을 금세 후회했다. 아무리 수겸이 취했다고 한들, 우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아냐, 그냥 해본 소리야. 삶은 조금도 피곤하지 않아.”
“나는 피곤했어……. 되게, 되게 피곤했어.”
“……그랬어?”
직전까지와 완전히 다르게 음울해진 수겸의 목소리에 태원이 멈칫했다.
수겸의 말에 동요한 것은 비단 태원만은 아니었다. 다른 멤버들 역시 걱정 섞인 눈으로 수겸을 바라보았다.
“응, 피곤했어. 힘들고…… 슬프고.”
“뭐가 그렇게 피곤하고 힘들었어?”
태원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졌다. 그의 물음에 수겸은 눈가가 붉어졌다. 금세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후회가 돼서…….”
“뭐가 그렇게 후회가 됐는데?”
“남자병에 걸린 게…….”
“……어?”
“내가 왜 그랬을까, 응, 형아. 이사님이 그렇게 말렸는데…… 민성이 형도 말리고…… 왜 고집을 부렸지.”
태원은 수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최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이겸을 바라보며 눈짓으로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겸 역시 짚이는 구석이 없는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겸에게 별 대답을 받지 못한 태원은 한솔과 유찬에게도 입 모양으로 ‘뭐래?’ 하고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도리질뿐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아니, 일부러인가? 실수로 그런 건 아니니까……. 그치만 무슨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그냥 남자답고 싶었어…….”
중언부언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문장 구조가 제대로 이어지는 말이었다. 구조만 그럴 뿐이고,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내용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니, 형. 나는 진짜 그냥 남자답고 싶었다……? 예쁜 것도 좋지, 좋은데에…… 나도 막 어, 어, 어? 근육도 빵빵하고…… 가슴도 크고…… 형처럼……. 내가 형 가슴 되게 좋아하잖아…… 알지?”
“아니, 전혀 몰랐는데……?”
“그걸 왜 몰라, 내가 얼마나 쳐다봤는데! 어떻게 몰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그래, 내가 눈치가 없었네. 미안.”
태원은 사과를 하면서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이 사과해야 할 사안이 맞는지 의아한 탓이었다.
하지만 취한 사람을 상대로 논리적으로 다가가 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게다가 수겸이 정말로 기가 막히고 서운한 것 같았으니, 일단은 제 잘못이 맞았다.
“아무튼 있잖아, 형……. 나는 남자답고 싶었어……. 그뿐이었어……. 그게 그렇게 큰 여파를 가져올 줄 몰랐단 말이야. 진짜야, 몰랐어.”
“어어, 그래. 알았어.”
“태닝한 것도…… 형이 섹시하잖아…… 까무잡잡해 가지고…… 땀 흘리고 있으면…… 어, 얼마나 어? 가슴도 큰데…….”
“둘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마워.”
계속 수겸이 무어라 말을 하고는 있으니, 맞장구는 쳐줘야겠는데 여전히 그의 말이 무슨 소린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고 감도 오지 않았다.
태원은 대충 대꾸해 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수겸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런 말을 하는지 고민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그런 거거든……. 수염…… 수염은 있잖아…… 그거는…… 그냥 길러보고 싶었어……. 나는 수염은커녕 털도 안 나잖아……. 근데 형, 나는 왜 털이 안 날까?”
“……어디에? 아, 아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말하지 마. 제발, 제발 말하지 말아주라. 그냥 대답하…….”
“거시기에.”
‘대답하지 마’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어코 답을 듣고 말았다.
적나라한 대답에 태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가 곧장 떴다. 눈을 감고 있으려니 자연스레 머릿속에 털이 없을 수겸의 그곳이 상상된 탓이었다.
당황한 태원은 황급히 손부채질로 붉어진 얼굴을 식히다가, 허공에서 다른 멤버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 역시 당황했는지 시선이 제각기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나도 수북하고 싶은데…….”
“입 닫자, 수겸아.”
“응.”
태원의 말에 착하게도 대답한 수겸은 어색해진 분위기도 모른 채 헤실헤실 해맑게도 웃었다.
* * *
“아우우우욱, 속 쓰려. 으어어어, 어억.”
눈을 뜬 수겸이 죽는 소리를 내며 천장을 맥없이 올려다보았다.
숙취의 늪에 빠진 수겸은 당장에라도 토악질을 할 것만 같아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어제의 기억이 송두리째 날아갔음은 물론이거니와 속이 울렁거려 죽을 판이었다.
“멍멍아, 일어났어?”
“멍멍……?”
수겸은 태원의 부름에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그러자, 태원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멍멍이 잘 짖네.”
“나……? 나보고 한 말이야?”
“여기 너와 나, 둘뿐인데 누가 더 있어?”
“내가 왜 멍멍이야?”
“그 이유를 몰라서 멍멍이란다.”
“뭔 소리야…….”
도돌이표와 다를 바 없는 문답에 수겸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숙취 때문에 안 그래도 머리가 핑핑 돌고 있는데 영문 모를 소리를 따져볼 기력은 없는 탓이었다.
“일어나. 해장해야지.”
“못 일어나겠어.”
“그럴 것 같아서 꿀물 타 왔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형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잡소리 그만하고 얼른 마셔.”
“넵.”
태원의 타박에 수겸은 빠르게 수긍하며 그가 내미는 꿀물을 받아 들었다.
옅은 노란빛이 도는 액체를 들이마시자, 달달하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꿀물의 달콤한 자극에 토막토막 끊겼던 뉴런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단숨에 꿀물 한 잔을 말끔하게 비운 수겸이 조금 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물론 여전히 내내 누워 있고만 싶은 마음이 만만이었지만, 조금이나마 정신이 들었을 때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진리만은 잘 알고 있었다.
수겸은 태원의 도움을 받아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이겸이 끓여둔 것으로 추정되는 맑은 콩나물국이 한 대접 준비되어 있었다.
“다른 멤버들은?”
“글쎄. 다들 어디론가 사라졌네. 내 생각이기는 하지만 널 보기 껄끄러워서 튄 게 아닐까?”
이상하게 비어 있는 숙소에 의문을 가진 수겸이 물었지만, 돌아온 것은 또 다른 의문을 더하는 답이었다.
“엥? 왜 날 보기가 껄끄러워?”
“있어. 그런 이유가.”
“왜? 나 어제도 토했어?”
“아니. 하지만 차라리 토하는 게 나았어.”
“엥, 무슨 일이야? 뭔데 그래?”
“궁금해하지 마. 사실 나도 껄끄러우니까. 너를 콩나물국 앞까지 인도했으니 나도 이제 그만 사라질게.”
“어어, 형! 태원이 형!”
사라지겠다는 말이 장난은 아닌지 태원은 정말 어리둥절해하는 수겸을 두고서 일말의 미련도 없이 숙소 현관으로 향했다.
“태원이 형……!”
쾅.
대답 대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영문 모를 상황에 수겸은 숟가락만 든 채 멍하니 얼어붙었다.
“차이겸! 차이겸! 솔아, 한솔아?! 유찬아! 유찬아악!”
수겸은 혹시나 싶어 남은 세 사람의 이름을 차례로 외쳐보았다. 그러나 애타는 부름이 무색하게도 쥐 죽은 듯 조용한 정적만 가득했다.
“뭐, 뭐야, 뭔데.”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도 없는 외로운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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