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60화
“에이, 안 먹어봐도 그 느낌이라는 게? 예? 다 있잖아요.”
수겸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선욱이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사이 멤버들은 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알아차린 수겸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태원을 바라보자, 태원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른 거 마시고 싶으면 마셔.”
“아니에요, 은근 맛있네요.”
“아저씨 맛이?”
“그러니까요, 저 아저씨 취향인가 봐요.”
선욱의 물음에 수겸은 킬킬거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선욱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겸은 홀짝거리며 술을 마셨다.
“천천히 마셔요.”
“이것보다 어떻게 더 천천히 마셔?”
유찬의 당부에 수겸이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시원하게 원샷으로 때려 마시는 것도 아니고 홀짝홀짝 고양이가 물 먹듯 술을 마시고 있는데, 천천히 마시라고 하니 억울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유찬은 자신의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지 짐짓 엄한 표정으로 수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기세에 눌린 수겸은 유찬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두 번 홀짝거릴 시간에 한 번만 홀짝거리는 정도로 횟수를 줄였다.
“안주도 먹어.”
한솔이 자그마한 치즈를 꼬치로 콕 찍어 수겸의 입가에 밀어주었다. 수겸은 아기새처럼 얌전히 받아 물고는 치즈를 오물거렸다. 부드러우면서도 크리미한 맛이 알코올의 쓴맛을 중화해 주었다.
“오, 이거 되게 맛있어.”
수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진실의 동공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한솔에게서 꼬치를 뺏듯이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방금 자신이 먹은 치즈를 찍어 한솔에게 내밀었다.
“아, 해.”
“뭐야, 형이 챙겨주니까 기분 되게 좋은데?”
“그랬어? 우리 솔이가 내 애정이 고팠구나?”
“나야 언제나 형의 애정이 고프지.”
“오구, 그랬구나. 내 동생, 형이 미처 몰랐네.”
수겸은 한솔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슬그머니 올라가는 한솔의 입꼬리를 본 수겸은 괜스레 흐뭇함에 뿌듯했지만, 멤버들의 표정에는 옅은 불만이 어렸다.
“수겸아, 과일 먹어. 너 과일 좋아하잖아.”
“맞아, 나 과일 좋아해. 이렇게 손질된 과일.”
태원의 말에 수겸이 맞장구를 쳤다. 수겸은 과일 자체는 좋아하지만, 직접 과일을 깎거나 잘라 먹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즙이 뚝뚝 떨어지는 과일의 경우에는 옷에 과즙을 흘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에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완벽하게 손질된 과일만 먹는 편이었다.
다행히 준비된 과일은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그저 포크로 콕콕 찍어 먹으면 될 뿐, 껍질을 벗기는 등 손을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수겸은 흐뭇하게 웃으며 예쁘게 잘린 멜론을 한 조각 골라 입에 넣었다.
풍부한 과즙이 입안에 퍼졌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멜론 철이 아니라서 엄청나게 달고 맛있지는 않았지만, 치즈와 알코올로 다소 텁텁해진 입안을 개운하게 만들어주기에는 충분했다.
“이것도 마셔봐, 수겸아.”
선욱이 붉은 빛깔의 칵테일을 내밀었다. 수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냉큼 새로운 칵테일을 받았다. 새콤한 첫맛과 달콤한 끝맛 사이로 씁쓰레한 알코올 향이 느껴졌다.
오늘 마셨던 술 중에는 가장 취향에 맞았기에 수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괜찮아? 마실 만해?”
“네!”
선욱의 물음에 수겸은 쾌활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선욱은 바텐더를 바라보며 같은 술을 추가했다. 수겸은 새로운 술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홀짝거리며 마저 술을 마셨다.
수겸이 칵테일을 한 잔 다 비울 때쯤, 새로운 칵테일이 등장했다. 타이밍 좋게 나온 술에 수겸은 연이어 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세 잔. 수겸은 빠르게 칵테일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 * *
“어으, 어으으으으, 어으…….”
수겸은 눈을 뜨기도 전부터 앓는 소리를 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의 죽어가는 소리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뜨니, 이 층 침대의 천장이 수겸을 맞이했다.
“저승인가…….”
저승이 이렇게 현실감 넘치는 곳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겸이 저승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만큼 힘겨워서였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속은 누가 안에서 쥐어짜고 있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수겸은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얌전히 누워 있었다.
“혀, 엉, 태원이 혀엉…….”
숙취에 죽어가면서도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사람은 태원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같은 방을 쓰고 있기에 수겸 자신을 구제해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태원의 답이 없자, 수겸은 같은 이유로 또 다른 룸메이트를 찾았다.
“소, 솔아…… 솔아, 살려줘…….”
그러나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실망한 수겸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고 가만히 누워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일단 살려면 물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수겸은 말 그대로 생존 본능에 따라 간신히 기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걸음마를 막 배운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문밖으로 나선 수겸은 곧장 주방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방을 나서자마자 앞에 서 있는 차이겸 때문에 갈 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뭐, 뭐야……?”
그냥 얌전히 서 있기만 하면 무시했을 테지만, 그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굳어 있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졸지에 수겸은 술도 깨지 못한 채 이겸의 눈치까지 살펴야만 했다.
“마셔.”
“어, 어?”
“마시라고.”
무서운 기세와 달리 이겸은 척 보기에도 달달해 보이는 식혜 한 잔을 내밀었다. 시원해 보이는 식혜의 존재감에, 조금 전까지 그의 기세에 쫄아 있었다는 것마저 깨끗이 잊어버린 수겸이 기껍게 식혜를 받아 들었다.
단숨에 식혜의 액체를 비우고, 잔 아래 깔린 밥알까지 비워낸 수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으어, 어, 살겠다…… 아, 아니. 아직 살 것 같진 않다.”
아무리 식혜가 달달하고 시원하다고 하더라도,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포션도 아닌데 숙취로 죽어가는 사람을 한순간에 살려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버쩍 마른 입안을 적시기에는 충분했지만, 다른 숙취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이야기 좀 해.”
“무슨 이야기……. 나 죽을 것 같아.”
“죽는단 소리 하지 마.”
“……알았어.”
이겸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수겸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냥 하는 말로 왜 저러나 싶긴 했지만, 일일이 따져 묻기에는 이겸의 목소리가 무서워도 너무 무서웠다. 수겸은 당장 드러누워 쉬고 싶었지만, 그에게 이끌려 거실로 향했다.
“다, 다들 왜 그래?”
거실에 도착하니 아까 그토록 애타게 찾던 태원과 한솔을 비롯한 멤버들이 모두 거실에 모여 있었다. 심지어 선욱마저도.
“이, 이사님…… 안 가셨어요?”
숙취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기는 하지만, 선욱의 옷이 어제와 같다는 것쯤은 떠올릴 수 있었다. 수겸은 그가 밤새 숙소에 있었던 것인가 싶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힐끔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시간은 10시를 조금 넘은 상태였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지막으로 시간을 봤을 때는 새벽 3시였다. 그렇다면 벌써 7시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지금까지 선욱이 함께하고 있는 것인가 싶어 더럭 두렵기까지 했다. 선욱의 상태를 보아하니 한숨도 자지 못한 것 같아서 더 걱정이 되었다.
“왜, 왜 그러세요……?”
“수겸아.”
“네에…….”
“밤새 고민을 해봤는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래.”
“뭐가요……?”
평소와는 달리 무겁기까지 한 선욱의 목소리에 수겸은 멤버들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힌트라도 주라는 의미를 담아 간절히 멤버들을 바라보는데, 그들 역시 선욱과 비슷한 상태였다.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한 수겸이 마른침을 삼키며 선욱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난 생이 전생이라면 이번 생이 두 번째인 거야?”
“……네?”
수겸은 제 귀를 의심했다.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숙취가 싹 날아간 것 같았다.
갑자기 그가 웬 전생 타령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인 불안감에 목덜미가 선득해졌다.
“나도 하나만 물어볼게.”
이번에는 차이겸이 끼어들었다. 이미 한차례 폭탄을 맞은 수겸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겸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까 긴장이 되면서도 이것보다 더한 이야기가 있긴 할까 싶어 한편에선 편안한 마음도 있었다.
“……남자병이 도대체 뭐야?”
이겸의 물음에 수겸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전생보다 더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도 무지하게 수치스럽고, 수치스럽고, 또 수치스러워서 당장 어디로든 숨고 싶은 이야기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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