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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100화 (102/143)

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100화

잠시 얼어붙어 있던 수겸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오해가 깊어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를 거절하려고 했다거나, 그 마음을 피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의 행동이 어떤 여파를 가져올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당장 말도 안 되는 오해로 차이겸에게 상처를 주는 것만 피하고 싶었다.

수겸은 빠르게 욕실을 나왔다. 거실을 가로질러 가는 차이겸의 뒷모습을 발견한 수겸은 마음이 급했다.

“자, 잠깐! 차이겸!”

수겸의 부름에 이겸이 멈칫하더니, 이내 뒤를 돌아보았다.

수겸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이겸에게 달려갔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인데, 그 거리가 유난히도 멀게 느껴졌다. 아마 이 거리를 지금 좁히지 않으면 정말 두 사람의 거리가 멀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손 닿으면 닿을 거리, 수겸은 차이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이겸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 몸이 뻣뻣해졌다.

그러나 조급함에 마음이 널뛰는 수겸은 이겸의 몸이 목석처럼 굳은 걸 알아차릴 정신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내 말 좀 들어봐. 나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한 가지만 확실히 말해두자면 절대 너를 거절하려던 건 아니야. 그냥 너무 혼란스러워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그랬어. 정말이야.”

“……송수겸.”

“물론 그렇다고 너를 좋아한다 뭐 그런 건 몰라. 모르겠어. 맞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자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왜냐하면, 아니라고 말하기엔 왠지 말이 나오지 않아. 그렇다고 좋아한다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지금 얘 뭐라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맞아, 사실 나도 내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주절주절 생각나는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던 수겸은 결국 자조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가만히 수겸의 말을 듣고 있던 이겸 역시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송수겸, 진짜 웃겨.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아, 나도 모르겠다니까! 근데 능력껏 받아들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받아들이라고, 알겠어? 유남쌩?”

“그렇게 말하면 나는 나 좋을 대로 받아들일 건데.”

“아! 그렇게까지 받아들이진 말고, 적당히. 알았어?”

차이겸의 장난기 어린 말에 수겸이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그러자 차이겸은 큭큭 소리 내어 웃는가 싶더니, 이내 수겸을 꼭 끌어안았다.

졸지에 그의 품에 안긴 수겸은 당황했지만, 그보다 안도감이 더 컸다. 다행히 오해는 풀린 모양이었으니까.

“송수겸, 나는 정말 모르겠어.”

“뭘 말이야. 너 좋을 대로 해석하겠다며.”

“그거 말고.”

“그러면?”

제 말뜻을 모르겠다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수겸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냅다 모르겠다니, 대체 뭘 모르겠단 말인가.

물론 수겸 역시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야 천지지만 맥락 없이 튀어 나온 말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네가 너무 좋아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작정한 거야? 날 꼬시려고? 가만히 있어도 충분히 좋은데, 도대체 나보고 어떡하라고 이렇게 귀엽게 구는 거야?”

“……누구세요?”

“뭐?”

차이겸이 이렇게 낯간지럽고 부끄러운 말을 할 리가 없다. 툭하면 시비를 걸어대던 차이겸이 하는 말치고는 너무나 달달했기에 수겸은 괴리감을 느꼈다.

“너 차이겸 아니지? 차이겸 발톱 먹은 쥐지?”

“……말을 해도 이 상황에 발톱 먹은 쥐는 뭐냐, 대체.”

“그 동화 몰라? 발톱 먹은 쥐. 발톱 먹으면 쥐가 발톱 주인으로 변신하잖아.”

“아는데, 이 상황에 굳이 발톱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냐, 이 말이야. 내 말은.”

“그치만 생각이 났는 걸…….”

이겸의 타박에 수겸은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차이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끌끌 혀를 찼다.

수겸은 민망함에 콧잔등을 긁적거렸다. 그러다가 아직 이겸과 서로를 얼싸안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새삼 뺨이 붉어졌다.

“야, 야. 차이겸, 좀 놔봐…….”

“싫은데.”

수겸이 작은 몸을 바르작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차이겸은 더 강한 힘으로 수겸을 끌어안았다. 마치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듯이.

“송수겸 네가 자발적으로 나한테 안기는 날이 또 언제 있을 줄 알고 이렇게 쉽게 놔줘.”

“그야 그렇지만…….”

“거봐.”

“그, 그래도 다른 멤버들이 보면…….”

“보라고 해. 나야 좋지.”

“나는 안 좋거든!”

뻔뻔하기만 한 이겸이 대답에 수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이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찍었다. 그러자 차이겸은 ‘악’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와, 너무한 거 아냐?”

“그러게 놔달라고 할 때 놔줬으면 되잖아!”

“쳇.”

차이겸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다가 이내 씩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얄미운 한편 안심이 되었다.

수겸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다른 멤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앞으로 제 마음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방법을 찾은 것 같아서였다.

가슴에 담아두지 말고, 순간순간 생각나는 말을 하면 된다. 오해가 깊어지지 않도록, 감정이 골이 생기지 않도록.

‘괜히 꽁하게 담아뒀다가 나중에 탈나지 말고.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다 풀어야 해. 해결하지 못한 갈등은 너네 사이에서 실금을 만들어. 그 위로 뭘 자꾸 뭐가 쌓이면 와장창 깨지는 거야.’

민성이 한 말이 생각났다. 물론 민성은 유피트가 싸웠다고 생각해서 빨리 화해를 하라는 뜻에서 한 말이기는 했지만, 지금 상황에 적용하더라도 틀린 말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도 그랬다. 무언가 일은 계속 터지는데 왜 그랬는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스컴에서 떠드는 대로 받아들였고, 이렇다 할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하고 유피트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단순히 그룹이 망했다는 걸 떠나서, 그 후로도 충분히 안부 정도는 물으며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대화를 하지 않아서.

수겸은 다른 멤버들에게도 생각나는 말이 있으면 바로바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무슨 생각 해?”

“대화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묻자.”

“뭘 또. 넌 맨날 하나만 묻자고 하는데 그게 대단히 곤란한 거더라.”

수겸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차이겸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차이겸은 억울한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일단 말해봐. 들어보고 곤란한 거면 패스할게.”

“스피드 퀴즈 하냐? 패스하게.”

“태클 거는 걸 보니 차이겸이 맞군. 쥐가 아니었어.”

“아직도 그 이야기야?”

“됐고, 얼른 물어봐.”

기가 차다는 듯한 차이겸의 말을 끊은 수겸이 당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이겸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차이겸은 표정을 굳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대체 전생에서 나랑 스캔들이 났다는 여자는 누구야?”

“갑자기 그걸 물어본다고? 몰라, 기억 안 나.”

수겸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미간을 팍 구겼다.

생각해 보면 차이겸이 그 여자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하기는 했다. 그런데 막상 그가 그 여자에 대해 물어보니 영 탐탁지 않은 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딱히 질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짜로, 그냥…… 그냥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는 거잖아?

“아, 잘 생각해 봐. 그게 정말이라면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짐작이라도 하면서 조심할 거 아니야. 그 여자를 피하든 어쩌든.”

“……하긴.”

맞는 말이기는 했다. 수겸은 더는 거절할 명분이 없기에 생각에 잠겼다.

그 여자의 이름이 뭐였더라……. 걸그룹 출신이었는데…… 성이 이씨였던 것 같긴 하고…….

“기억 안 나. 걸그룹 출신이고 성이 이씨라는 거밖에.”

수겸의 말에 이겸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잠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겸이 휴대폰 액정 화면을 수겸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이 사람 맞아?”

여자의 사진을 본 수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수겸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검색어를 보니 ‘이씨 걸그룹 출신 연예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씨 성의 걸그룹 출신 연예인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 중에 바로 그 여자를 찾아낸 게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심쩍기도 했다. 역시 평소에 호감이 있었다든가, 이 여자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이 사람인지 어떻게 알았어?”

“……말 안 할래.”

“아, 왜!”

자기는 묻는 말에 다 대답해 주었는데 차이겸은 답변을 거절하니 억울해진 수겸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차이겸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쓰레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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