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116화
수겸은 얼른 현관으로 갔다. 상대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수겸은 닫힌 중문을 활짝 열어주며 상대를 맞이했다.
“갑자기 미안해요. 너무 불쑥 찾아왔죠?”
유찬의 물음에 수겸은 도리질을 쳤다. 안 그래도 갑자기 혼자 동떨어진 것 같아 쓸쓸함을 느끼던 차였으니, 유찬의 방문이 마냥 반갑게 느껴져서였다.
“아냐. 안 그래도 허전하다고 느끼던 차였는걸. 헉, 마실 거라도 줘야 하나?! 소, 손님이 온 건데!”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수겸은 조급해졌다. 주방에 냉장고가 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동동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수겸을 보며 유찬이 작게 웃었다.
“제가 손님이에요? 너무 거리감 느껴지는 거 아닌가…….”
“허억.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유찬의 서운한 표정을 본 수겸이 당황하여 손사래까지 쳤다. 맹세코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물론 아까 이사님이 들렀을 때는 손님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본래 이 집은 이사님의 몫이니 손님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유찬은 이사 온 집에 방문한 셈이니 나름 손님이 아닐까 싶어 뭐라도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절대 새삼 유찬과의 거리감을 느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알아요. 장난친 거예요.”
수겸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으니, 유찬이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제야 수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유찬을 세모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유찬은 더욱 해사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딱 지금에 해당되었다. 유찬이 저렇게 예쁘게 웃어대니 수겸은 차마 화를 낼 수 없어서 입술만 삐죽거렸다.
“미안해요. 화났어요?”
“아니야. 화난 건 아니야.”
“그럼 삐졌어요?”
“삐진 것도 아니야.”
“그럼요?”
“그냥 놀란 거야.”
볼멘소리로도 묻는 말에는 꼬박꼬박 대꾸해 주는 수겸이었다. 유찬은 터지는 웃음을 갈무리하며 수겸을 바라보았다.
“형, 저 왜 온 것 같아요?”
“어……. 글쎄? 너도 혼자 쓸쓸했어?”
“……형, 쓸쓸했어요?”
“아, 그게…… 음…… 좀 허전했다고 해야 할까? 익숙하지 않다고 해야 할까? 혼자 지내보는 게 너무 오래전 일이라, 낯설더라고.”
유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수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연습생이 되어 소속사에 들어온 이후, 회사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지냈다. 당시에는 유피트 멤버들뿐만 아니라, 다른 연습생이 머물기도 했고 나중에 유피트로 데뷔가 확정된 후로는 유피트 멤버들과 함께 숙소를 쭉 쓰고 있었다. 그러니 회귀 전을 감안하더라도 혼자 지낸 게 꽤 오래되었다.
수겸은 자연스럽게 유찬의 너른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알잖아. 나 가족 없는 거.”
“…….”
“그동안 너희랑 지내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서 잊고 있었나 봐. 내가 혼자였다는 사실을. 혼자 지내는 게 당연했다는 걸 말이야.”
“형.”
“응?”
자조적인 말에 유찬이 단호하게 수겸을 불렀다.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들어 유찬을 쳐다보니, 유찬이 담담한 눈빛으로 수겸을 올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혼자 지내는 게 당연한 사람은 없어요.”
“아…….”
“숙소를 혼자 쓰는 게 익숙해질 수는 있죠.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익숙해질 뿐이에요. 몸에 익는 거. 그게 당연해질 수는 없어요.”
“……고마워.”
유찬의 말에서 그가 자신을 위로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읽어낸 수겸이 희미하게 웃었다. 유찬은 참 다정했다. 막내인데도 속이 깊고 다정한 유찬이 지금 제 곁에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알았어. 고마워.”
“고맙긴요.”
유찬은 예쁘게도 웃었다. 수겸은 그 미소에 이래저래 안심이 되는 것 같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잊고 지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리 좋은 추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듯 아프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담담해진 것인지, 아니면 너무 아파했기에 이제 더 아플 것이 남아 있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있잖아, 유찬아.”
“네.”
“바쁘게 산다는 건 참 좋은 것 같아.”
“……갑자기요?”
“응. 잊고 살 수 있잖아. 물론 좋은 것도 잊어버리기는 하지만…… 나는 그랬거든. 힘들었던 시절을 잊을 수 있었어.”
“…….”
분위기에 휩쓸려서일까.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해도 가만히 들어줄 유찬이 옆에 있어서일까. 수겸은 생각나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늘어놓았다.
“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살 길이 막막하더라고. 물론 정부 보조금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린 나는 꽤 현실적이었거든.”
수겸은 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또래에 비해 덩치는 작았지만, 외모만큼은 예쁘장했다. 할머니께서는 오래된 텔레비전을 보시면서 ‘아휴, 우리 수겸이가 제일 잘났네’라고 말씀하시고는 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죽지 못해 몇 달을 살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죽는다는 생각을 하기에도 너무 어려서 살았던 것 같았다. 수겸은 그때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막연하게 연예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여기저기 오디션을 봤어.”
사실 수겸은 지금의 소속사에 오기 전에 이미 몇 군데 오디션에서 합격한 상태였다. 어느 곳에서는 배우 연습생으로, 어느 곳에서는 아이돌 연습생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연습생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같이 들어온 또래 연습생들은 예중, 예고 출신이었고 무용이나 작곡 등을 전공한 친구들도 많았다.
게다가 같은 학원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댄스 학원, 실용음악 학원 등 말이다. 이미 무리를 이루고 있는 연습생들 사이에 수겸이 끼어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찌어찌 끼어든다고 치더라도, 그들의 세상과 수겸의 세상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연습생 중에는 집안 자체가 부유한 경우도 꽤 흔했다. 하루하루 돈에 쪼들려 사는 수겸에게 있어선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소속사에 연습생용 숙소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데뷔가 확정된 연습생들이나 들어갈 수 있었다. 수겸처럼 생초짜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더라. 생각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나는 당장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뭐 하는 건가 싶고.”
떠오르는 기억에 수겸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꿈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다 당시 수겸이 있던 회사에 찾아온 선욱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선욱은 수겸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여기 말고 우리 회사에서 데뷔해 볼 생각은 없어요?’
그때 그 말에서 수겸은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을 느꼈다.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날 때부터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아래에 있어본 적 없는 그런 사람 같았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였다. 소속사 규모로만 보자면 당시 있던 곳이 더 컸지만, 선욱이라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기운에 수겸은 곧바로 그 제안을 수락했다.
이후의 생활은 훨씬 더 편해졌다. 연습생들이 지내는 숙소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고, 식비 역시 회사에서 전부 부담해 주었다. 덕분에 금전적인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수겸은 지나온 대형 소속사에 대한 미련은 요만큼도 남지 않았다.
“게다가 너희랑도 잘 지냈고. 여기서는 소외감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어.”
“정말요?”
“응.”
“멤버들이 다 잘해줘서 그랬나 봐.”
수겸은 기분 좋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선욱을 만난 것은 기적 같았고, 멤버들을 만난 것 역시 기적 같았다.
“그때 이사님 제안을 안 들었으면 어떻게 살았으려나 싶다니까.”
큭큭거리며 뒷말을 덧붙인 수겸은 무의식중에 유찬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유찬이 수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
“응? 뭐가?”
“힘든 이야기였을 텐데, 들려줘서요.”
“아아……. 네가 편해서 그랬나 봐.”
“다행이에요. 형한테 편한 사람이라서.”
유찬은 수겸의 머리를 한참 동안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 손길에 수겸이 나른함을 느끼며 슬그머니 잠이 들려던 찰나였다.
“형.”
“응?”
유찬의 부름에 수겸이 반쯤 잠이 묻은 나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찬이 수겸의 뺨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그 손길에 수겸이 저도 모르게 기분 좋게 갸르릉거렸다.
“저 오늘 자고 가도 돼요?”
“어?”
“손만 잡고 잔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입술만 맞대고 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