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127화
“……미쳤군.”
선욱은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어찌 보면 자신에게 기대어 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수겸이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일 텐데, 그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본능대로 하고 싶은 욕심이야 왜 없겠느냐마는,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 참아야 했다.
언젠가 수겸을 안는 날이 올 터였다. 반드시, 선욱이 그렇게 만들 것이었다.
“으어…… 헉, 이사님?”
잠에서 깬 수겸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선욱의 다리를 베고 자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사님의 어깨에 기대 잠든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본격적으로 자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황한 수겸이 민망함에 뒷덜미를 긁적거리자 선욱이 부드럽게 웃었다.
“잘 잤어?”
“네에……. 그렇긴 한데, 저 때문에 이사님은 불편하셨겠어요…….”
“전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으니까, 걱정 마.”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정말 괜찮으셨어요?”
수겸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나 수겸의 우려와는 달리 선욱은 외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수겸은 겨우 안심이 되었다.
힐끔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리니,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중반쯤에 잔 것 같으니, 못해도 거의 한 시간은 잔 셈이었다.
“이사님도 쉬셔야 하는데, 제가 너무 오래 있었네요. 죄송해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수겸이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는 갈 채비를 했다. 그런 태도가 더 서운하게 한다는 걸 수겸은 정말 모르는 모양이었다.
선욱은 씁쓸한 마음을 숨기고 애써 여유롭게 웃으며 수겸을 배웅했다.
“다음에 또 놀러 와.”
“넵!”
“진심이야.”
“헤헤, 네. 그럴게요.”
놀러 오라는 말을 가볍게 넘기는 것 같아 진심이라는 말까지 덧붙인 선욱이었다. 그럼에도 수겸은 여전히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 입안이 썼다.
선욱은 엘리베이터 앞까지 수겸을 배웅했다.
“들어가셔도 되는데…….”
“엘리베이터 타는 것만 볼게. 금방 오겠네, 뭐.”
유치하게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선욱은 저도 모르게 투덜거리듯 말하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수겸을 좋아하면서 유치해지기는 했지만, 수겸이 자신의 유치한 감정까지 알아차리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수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금세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선욱은 제자리에서 그가 있던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 *
“너무 자서 밤에 잘 수 있을지 모르겠네.”
숙소에 들어온 수겸은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며 소파에 길게 늘어져 누웠다.
말똥거리는 정신을 달래며 가사 종이를 펼쳤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사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으려니, 아까 잘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졸음이 슬그머니 몰려들었다.
그때였다. 휴대폰이 진동음을 냈다.
수겸은 휴대폰을 슬쩍 꺼내 봤다. 연락한 상대는 유찬이었다. 수겸은 반가운 마음에 가사 종이를 놓고 휴대폰을 두 손으로 쥐었다.
[유찬: 형 뭐해요?]
[가사 외워]
[너무 많다 흑ㅠ]
[유찬: 그쵸 확실히 정규 앨범이라 곡이 많더라고요]
[그니까!]
[물론 좋긴 하지만..]
[유찬: 형 내일은 뭐해요?]
[내일도 비슷할것 같은데]
[왜??]
[유찬: 혹시 괜찮으면 저랑 밥 먹으러 갈래요?]
[그래! 좋지]
[근데 뭐 먹을거야?]
[유찬: 고기 먹어요]
[헉]
[찬성]
원체 고기를 좋아하는 수겸은 기쁜 마음으로 대꾸했다.
여러모로 기분이 좋았다. 유찬이 먼저 개인적으로 약속을 잡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일전에 한번 이야기가 나오긴 했는데, 그때는 스케줄 문제로 약속이 어그러지기도 했다.
이미 먼 과거가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전생에서의 유찬을 떠올려 보면 이렇게 개인적으로 약속을 잡는 일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멤버들이랑 다 같이 모여 밥을 먹을 때도 힐끔거리며 수겸의 눈치를 살피던 유찬이었으니까.
[유찬: 그럼 내일 11시에 형네 숙소 앞에 갈게요]
[ㅇㅋ]
[낼 봐1]
[!]
[유찬: 네, 잘자요.]
특별한 이모티콘도 없는, 어찌 보면 딱딱하기까지 한 메시지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유찬다웠다.
수겸은 유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메시지에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평범하다 못해 흔하기까지 한 일상이었지만, 어쩐지 두근거렸다.
한껏 부푼 마음을 달랜 수겸은 다시금 가사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어째선지 아까도 한참 보았던 가사가 조금은 더 달달하게 느껴졌다.
* * *
“……죽을 것 같아.”
눈을 뜬 수겸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 늦게까지 소파에 누워 가사를 외운다는 게, 그대로 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딱히 잠자리를 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소파에서 자고 일어나면 몸이 뻐근할 수밖에 없었다.
수겸은 사후강직이 온 것 같은 몸을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쭉쭉 늘이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고는 뚜둑 소리가 나며 비명을 질러대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도 할 겸, 뜨거운 물로 지지면서 몸을 풀어줄 겸이었다.
쏴아아아아.
수압 좋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한참 맞고 있으려니, 다행히 한결 몸이 개운해진 기분이었다.
시원하게 샤워를 마친 수겸은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47분이었다. 11시에 유찬이 오기로 했으니 서둘러야 했다.
젖은 머리를 말리는 손이 급해졌다. 드라이기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머리를 말린 수겸이 서툰 손길로 드라이를 하며 헤어 스타일링을 시도했다. 그러나 수겸이 손을 댈수록 머리는 점점 더 괴상해져만 갔다.
결국 수겸은 욕실로 달려가 머리를 물로 적셨다. 붕붕 떴던 머리가 차분해지면서 그나마 보기에는 더 나아졌다.
수겸은 서둘러 옷방으로 향했다. 연한 청바지와 하얀 티, 그리고 그 위로 면 재킷을 걸쳤다. 물론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마스크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찬: 천천히 나와요]
준비를 마친 수겸이 휴대폰을 들여다보자, 10시 54분에 유찬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지금 시간은 11시 2분이었다.
수겸은 답장할 시간도 없어 얼른 신발을 꿰어 신고는 숙소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이미 유찬이 서 있었다.
“미안해, 늦어서!”
“괜찮아요. 이 정도는 늦은 것도 아니에요.”
유찬이 다정하게 웃으며 말하더니, 이내 수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향한 곳은 수겸의 젖은 머리였다.
“머리 다 말리고 나와도 되는데.”
“아, 그게 아니라…….”
“이러다가 감기 걸려요.”
상냥한 걱정에 수겸은 젖은 머리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런 걱정을 받는 것도 꽤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서 머리 좀 말리고 가요.”
“아니야, 괜찮아. 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나 배고파서 그래. 얼른 가자.”
수겸의 말에 유찬은 더 이상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걱정이 되기는 한 모양이었다. 마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듯 느릿느릿하게 걸었으니까.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어서 유찬은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예, 금방 가요. 예, 예. 알겠어요.”
수겸은 그가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밥 먹을 때 더 만날 사람이 있는 건가 싶어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질문할 틈도 없이 건물 밖에 나가자마자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타야만 했다. 유찬이 잡아둔 택시인 모양이었다.
그제야 수겸은 조금 전의 통화는 택시 기사님과 한 모양이라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출근 시간을 지나서인지 도로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택시는 딱히 크게 막히는 구간 없이 도로를 쌩쌩 달렸다.
그렇게 30분 넘게 달린 후에야 택시는 한 고깃집 앞에서 멈춰 섰다.
“감사합니다!”
수겸은 쾌활하게 인사를 건넨 뒤 택시에서 내렸다.
눈앞의 고깃집은 돼지고깃집이었는데, 꽤 오래된 곳 같아 보였다. 그런데 아직 간판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오픈 전인가 본데?”
“괜찮아요.”
“괜찮아? 문을 안 열었는데 뭐가 괜찮…….”
수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찬이 가게 문을 열어젖혔다. 얼핏 본 거긴 하지만 오픈 시간이 오후 4시부터라고 문 한구석에 적혀 있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혼자 가게 밖에 내내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수겸도 유찬을 따라 조심스럽게 가게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