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울증 드래곤 (2)
‘저게 무슨 개소리야.’
인간이 아니라 다른 존재였어도 멀쩡히 숨 쉬고 있다가 죽고 싶다는 생각이 옮아 오면, 그게 정신과 의사라도 화들짝 놀랄걸.
‘질문할 걸 질문해라, 넌 눈치도 없냐?’
사람이 눈앞에서 찔찔 울고 있는데, 달래 주지는 못할망정…….
하지만 갑씩이나 되어서 을에게 윽박을 질러서는 안 된다. 을에게도 사회적인 약속에 따라 인권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암암, 사람이 양심과 도덕을 지키면서 살아야지! 남한테 함부로 윽박지르면 안 돼!
나는 스스로가 소리 지르지 못하는 이유를 합리화……,
아니, 을의 권리를 지켜 주기 위해 예의를 갖춰 대답했다.
“……인간이 아니라도 이런 충동이 들면 놀라기 마련이에요.”
“그런가.”
대답하는 중에도 계속 새어 나온 눈물이 뺨을 흥건하게 적시고, 턱을 따라 방울져 떨어졌다. 나는 손등으로 턱을 문질러 닦으며 생각했다.
‘하여튼, 이렇게 우울해하는 걸 보면 꽤 오랫동안 가이딩을 받지 못해서 정신이 망가진 것 같은데…….’
……그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꼈다고 하면, 칼서스가 아까처럼 화내려나?
‘난치병으로 응급실을 들락거리던 때,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 바엔 죽는 게 낫겠다고 악을 지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툭하면 아나필락시스로 기도가 부어오르는 탓에 발작과 질식으로 황천을 오갔고, 간신히 살아났다 싶으면 바로 다음 날 퇴원해서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내가 언제 쓰러질지 모르니, 치료비를 미리미리 벌어 둬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점점 마음이 단단해져서, 나중엔 웬만한 일에는 멘탈이 흔들리지 않을 지경이 됐지만.’
언제 면역 반응이 올라와서 ‘꽥’ 하고 뒈질지도 모르는 몸으로 살고 있는데, X같은 일 두어 개가 대수냐? 죽는 거에 비해서 더 무서운 일이 뭐가 있다고.
……라는 생각으로 반쯤 득도한 채 살아갔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래서 하필 내가 빙의된 걸지도 모르겠네.’
나는 순식간에 감정을 정리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돌리기 시작했다.
“저 피곤해요.”
나는 칼서스가 우는 날 보고 당황했을까 봐, 일부러 뻔뻔하게 피곤하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칼서스가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하긴, 그 많은 함정들을 다 파훼하며 왔을 테니 제법 피곤하겠구나.”
……그건 내가 아니라 진짜 해일이 한 거긴 한데. 어쨌든 그것도 이 몸뚱이가 한 짓은 맞긴 하지.
‘듣고 보니 좀 몸이 뻐근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무렵, 칼서스가 발끝으로 바닥을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바닥에 빛으로 된 선이 길게 늘어지며 방향을 표시했다.
“이걸 따라가면 네가 묵을 방이 나올 게다. 오늘은 일단 거기서 쉬도록 해라.”
말을 마친 칼서스는 가까운 데에 위치해 있던 서재로 쑥 들어가 버렸다.
‘……이,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
손님은 직접 안내해 주는 게 국룰이거늘! 손님맞이 이딴 식으로 할래?!
‘……내가 을을 생각해 주는 착한 갑이라서 봐준 줄 알아!’
나는 닫힌 문을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이내 칼서스가 지시한 대로 빛의 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쫄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 * *
빛으로 그린 선의 끝에 있던 방문을 열자, 고풍스러운 내부가 드러나 보였다.
나는 방 안을 가볍게 둘러보며 생각했다.
‘꽤 사용감이 있네. 가구에 미세하게 난 스크래치라거나.’
부드러운 아이보리 색의 올리브 나무로 짜인 책장도 그렇고,
창가에 놓인 서류 책상도, 그 서류 책상의 가장자리에 가지런하게 정리된 필기구와 색 바랜 양피지도. 모든 물건에서 약간씩 생활감이 묻어났다.
‘그렇다는 건 분명, 사람이 여기서 살았다는 건데…….’
칼서스가 이전에도 다른 사람과 지내본 적이 있다는 건가?
“흐음…….”
나는 빛바랜 양피지와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상념에 빠졌다. 그러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갑작스럽게 칼서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얼 그리 신기해하고 있지?]
“필기구…… 헉, 미친, 깜짝이야!”
이 미친 도마뱀 새끼!
날 감시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놀란 나머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칼서스가 흐리게 웃으며 설명했다.
[본디 세계수와 용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가 처한 상황을 느낄 수 있지.]
“아, 그렇구나.”
[너도 언젠가는 내가 보고 듣는 걸 같이 느낄 수 있게 될 게다.]
“그건 좀 신기하네.”
나는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칼서스가 아까 하던 말을 이어 설명했다.
[어쨌든…… 그 필기구들이 마음에 든다면 그대가 사용해도 좋다. 내겐 이제 의미가 없는 도구들이라 말이야.]
“아…….”
다른 사람이 썼던 게 아니라, 칼서스가 예전에 쓰던 것들이구나.
이 방도 그러면 칼서스가 쓰던 방이겠네?
‘그럼 다 고급이겠네.’
콧대 높은 용이 수백 년을 쓰던 물건일 텐데, 그 세월을 견뎠다면 당연히 고급품이겠지.
‘살아서 이런 물건을 써 보는 날이 오다니.’
나는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들뜬 마음을 감추기 위해 차분한 어조로 칼서스에게 말을 걸었다.
“마음에 들어요. 제가 사용할게요.”
[그래.]
칼서스가 잠시 침묵하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필요한 게 더 있다면 아까 본 서재로 오면 된다. 만약 길을 잊었다면 내 이름을 부르고.]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대답을 하고 나니, 실이 끊어지는 것처럼 무언가가 ‘뚝’ 하고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꼭 블루투스 연결이 해제된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스마트폰 심은 것 같네.’
역시 소설 속 세계관이라 그런지, 신기한 기능이 많구나.
‘나중엔 소설에서 읽어 봤던 걸 더 물어봐야지.’
정말 용들은 ‘권능’이란 걸 쓸 수 있는지, 세계수의 수액을 사용하면 정말 죽은 사람도 살려 낼 수 있는지. 정말로 세계수는 100년에 한 번만 열매를 맺는지 등등.
소설 내에서 애매하게 언급됐던 것들도 많으니, 이 기회에 궁금증을 풀 수 있겠지.
‘물론, 웬만큼 친해지기 전까지는 못 물어보겠지만…….’
물어봤다가 죽으면 어떡하겠니……. 궁금증보다는 당연히 목숨이 더 중요하지…….
그러니 그것들은 나중으로 미뤄 두기로 했다.
‘지금은 양도받은 필기구를 이용해서 일기를 쓰는 게 우선이야.’
날짜가 며칠 지났는지, 무슨 일을 겪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런 사실들이 내게 현실감을 안겨 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겪어 온 일들을 나중에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당장 메모뿐이잖아? 그러니 날짜 감각도 유지할 겸, 일기를 쓰는 게 가장 좋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 넣었다.
<슈덴베르트력 377년 2월 9일>
참고로 말하지만 날짜는 칼서스의 진술을 통해서 알아냈다. 날짜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내 탓이 아니라 칼서스의 탓이다.
어쨌든, 칼서스는 내게 달력을 보여 주며 오늘의 날짜를 짚어 주었는데, 거기엔 난생 처음 보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몇 초가 지나자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오르듯이 자연스럽게 글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본래의 해일이 쓰던 글자이기에, 몸에 기억이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칼서스는 내게 날짜를 알려 주더니, 이내 소파로 돌아가 내내 술만 퍼마셨다.
아무래도 이 우울증 드래곤은 알콜의존증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하릴없이 술만 퍼마시는 놈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술만 퍼마시면 어떡하냐고 건강 좀 챙기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러자 칼서스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용으로 태어나서 이런 소리를 다 들어 본다며 오히려 한참을 껄껄 웃어 댔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사람이 다른 사람-사람은 아니지만-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아무래도 이 용은 상상 이상으로 미쳐 있는 모양이다.
<슈덴베르트력 377년 2월 10일>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배가 고픈 줄도 몰랐는데.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허기가 밀려들었다.
나는 그제야 칼서스가 내게 ‘식사를 할 장소’와 ‘씻을 장소’를 알려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 길로 칼서스가 머무는 서재로 가서 ‘배가 고프고, 목욕도 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칼서스는 나를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그 직후 개운한 느낌이 듦과 동시에, 허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놀라서 반사적으로 머리를 만져 보자, 엉망으로 떡이 지고 뻗쳐 있던 머리가 가지런해진 게 느껴졌다.
칼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날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더니, 이내 매일 아침 서재로 오라고 했다.
나중에 듣자 하니, 그게 바로 용이 가진 권능이었다는 모양이다.
판타지 속의 능력을 몸으로 겪는 건 정말 기이하고 독특한 기분이었다.
“…….”
양피지 위에 가지런하게 한글을 적어 가던 나는, 문득 어떠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 이틀 사이에…… 칼서스가 가이딩을 해 달라고 먼저 부탁한 적이 없지 않던가?
“……아무래도 이상한데.”
내가 본 칼서스는 오랫동안 가이딩을 받지 못해서 술에 의존증이 생긴 용이다. 그렇다면 분명 내 존재가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져야 정상일 터.
그런데 어째서 칼서스는 ‘가이딩을 해 달라’고 먼저 부탁하지 않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