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우울증 드래곤 (3)
한평생 골골거릴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치자.
무림 세상으로 치면 구음절맥이고, 현대로 치면 나 같은 난치병 환자나, 아니면 암 환자 같은 사람이겠지.
‘하여튼 이런 사람의 눈앞에, 깨끗하게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난 거나 마찬가지인 거야.’
구음절맥 환자 앞에 공청석유, 암 환자 앞의 암 치료제.
지금 내 입장은 그런 셈이다.
‘그 상황에서 암 환자는 치료제를 사용할까, 사용하지 않을까.’
당연히 사용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실제로도 많은 암 환자들은,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신약 개발 사업에 자원하곤 한다. 나을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과 가능성 때문에.
‘보통의 사람처럼 살고 싶으니까.’
아프다는 건 생각보다 더 정신력을 많이 갉아먹는 일이다.
대중적인 질병인 알레르기성 비염만 해도, 사람들이 병원에 들러 약을 다달이 타 먹으며 고치려 노력하지 않던가.
‘그런데 왜 칼서스는 가이딩을 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지?’
아픈 상태에 익숙해지다 못해, 아픈 게 당연한 상태가 되어 버린 걸까?
‘우울증을 길게 앓은 경우, 몸이 우울한 상태를 베스트 컨디션으로 오해해서 꾸준히 우울해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칼서스도 그런 상태가 되어 버린 걸지도 모르겠네.
나는 쓰던 만년필을 정리하고,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일단 물어보러 가자.”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을’인 칼서스의 생각이니까.
나는 그대로 방을 가볍게 정돈하고, 성큼성큼 걸어 서재로 향했다.
* * *
“……제법 재미있는 질문이군.”
칼서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내 질문을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왜 네게 가이딩을 요구하지 않느냐고?”
“네.”
서재로 걸어간 나는, 칼서스가 왔느냐는 인사를 꺼내기도 전에 질문을 던졌다. 칼서스는 당돌하게 들이받아 오는 인간이 신기한지,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
“이런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칼서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안에 담긴 붉은 와인이 부드럽게 찰랑였다.
“해일.”
“네, 칼서스 씨.”
“그대는 초면인 상대에게 입을 맞출 수 있나?”
“……네?”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흐르는 건데?
‘난 그냥 가이딩에 대해서 물은 건데…….’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칼서스가 서재의 소파에서 일어나 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용들은 지쳤을 때 본능적으로 세계수의 수액을 찾도록 되어 있다.”
속삭이듯 말한 그가 살짝 허리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췄다.
“세계수의 수액은, 인간의 어느 부분으로 치환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 적 있나?”
“…….”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단순히 나는 수액을 생성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만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손을 잡는 걸로 가이딩이 되니까, 그걸로 계속 진행해 보려고 했는데…….’
칼서스의 생각은 달랐던 걸까?
나는 칼서스와 눈을 맞춘 채로,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칼서스가 말했다.
“나무껍질 아래를 흐르는 액체를 대신하는 것이다.”
“…….”
“그러니 치환한다면 피나 타액, 눈물에 해당하겠지.”
그렇게 속삭인 칼서스가 조금 더 고개를 기울였다. 그 탓에 이젠 칼서스가 가볍게 내쉰 호흡에, 달짝지근한 와인 향이 뒤섞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사이가 가까워졌다.
‘……저기, 우리 고개가 너무 가깝지 않아?’
나는 당혹스러워하며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렸다. 그러자 칼서스가 부드럽게 내 목 뒤를 받쳐,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해일, 그대는 나를 위해 살갗이 찢기는 고통을 참을 수 있나?”
“…….”
“혹은, 나와 혀를 섞거나, 나를 위해 울어 줄 수 있는가?”
거기까지 말한 칼서스가 푸스스, 부스러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마 불가능하겠지. 그대가 나를 위해 그런 희생을 보일 이유가 없잖나.”
칼서스는 그렇게 말한 뒤, 허리를 펴고 꼿꼿이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세계수는 용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 그래서 우리가 공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언젠가 그대가 세계수로서 날 돌보고 싶어지는 날이 오면, 그때 부탁을 해 보도록 하지.”
칼서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볍게 싱긋 웃어 보였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 그러니까…….
얘가 방금 말한 그거, 정리하자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억지로 키스를 하는 건 가혹한 행위니까, 강요하지 않겠다는 거지?’
정말 그 의미로 한 말이라면, 칼서스는 다정하게도 나를 충분히 배려해 주려 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무슨 그런 개소리가 다 있어요.”
“……응?”
지독하게도 바보 같으면서 쓸데없이 웅장한 말이기도 했다.
‘주둥이의 순결을 지켜서 어쩔 건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온 나한테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어떻게 감히 주둥이의 순결과 목숨을 저울질하겠단 거야? 당연히 목숨이 훨씬 소중하지!
‘내가 응급실 들락거리면서 가장 많이 본 케이스가, 남 배려하려고 아픈 거 꾹꾹 참다가 먼저 황천 가는 사람들이었거든?’
같이 온 친구들 안심시키려고, 어린 자식이 놀라지 않게 하려고, 부모님 걱정 안 시키려고.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고 웃다가 발작 한 번 오면 그대로 끝.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꽤 많았더랬다.
‘아픈 때에 어른스러운 척하다가 진짜 X되는 수가 있어.’
아프면 아픈 대로 징징거리고 어린애처럼 울기도 하고 그러란 말이야. 눈앞의 아픈 사람이 일부러 의연한 척을 하면, 도리어 보는 사람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나는 당황스러워하는 칼서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한테 키스해서 우울함이 사라질 것 같으면, 그냥 키스하면 되는 거예요.”
“……뭐?”
“고작 키스 하나에 뭐 그렇게 대단한 값어치가 있다고.”
나는 코웃음을 치고는, 칼서스가 입고 있는 셔츠의 목깃을 틀어쥐었다. 그러고 힘을 주어 당기자, 저항 없이 고개가 가까워졌다.
시야 바로 앞에서 긴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렸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니 도리어 얼이 빠진 모양이었다.
‘고지식한 새끼.’
눈앞의 인간은 그렇게 딱딱하지도 않고, 아픈 놈의 사정보다 내 기분을 중요시하는 개새끼도 아니라는 사실을 좀 일찍 깨달아 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무던하다 못해 사무적인 어투로 칼서스에게 명령했다.
“칼서스.”
“해일, 잠시만…….”
“입 벌려요.”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입술을 겹쳤다.
“읍…….”
놀란 칼서스가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떨어트렸다.
카펫 위로 잔이 떨어지며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읏…….”
나는 그 소음에도 개의치 않고, 고개를 비틀어 조금 더 깊게 입을 맞췄다.
‘고작 이런 걸 가지고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었다니.’
용이라는 종족, 그냥 의외로 담이 작은 생물이었던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 잇새로 작은 웃음이 새어 나갔다. 나는 멱살을 쥔 반대쪽의 손을 들어, 아까 칼서스가 했던 것처럼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쥐어 당겼다.
그러고는 혀끝으로 머뭇거리는 입술 새를 파고들어 굳어 있는 말캉한 혀를 부드럽게 자극했다. 칼서스의 입술에서는 달큼한 포도주 맛이 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끄러운 소음이 밀려들었다.
서글픈 감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읍, 으읍…….”
당황한 칼서스의 손이 더듬더듬 올라와 내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렸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했다.
나는 잠깐 입술을 떼고, 칼서스와 눈을 맞췄다. 얽혀 있던 혀가 떨어지며 긴 은실이 늘어졌다가, 이내 툭 끊어졌다.
“……왜요?”
“지금 그걸 몰라서 묻나?”
가슴팍에 올라가 있던 손이 위로 올라와 내 눈가를 더듬었다.
“눈물이 흐르고 있다.”
“아.”
칼서스가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러 주자, 속눈썹 사이사이 맺혀 있던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내가 눈물샘이 이렇게 헤픈 놈이었던가?’
내가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도 안 울었던 인간인데……. 여기서는 하루에 두 번씩은 우는 것 같네.
‘그래도 마침 잘됐어.’
타액으로 가이딩이 된다는 걸 알았으니, 이번엔 다른 쪽을 시도해 봐야지.
나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뺨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핥아 봐요.”
“…….”
“아까 칼서스 씨가 눈물도 예시로 들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눈물 멎기 전에, 빨리요.”
그 말을 들은 칼서스가 당황한 것처럼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하지만 그의 동요는 길지 않았다.
“……이렇게 당돌한 인간은, 드문 편인데.”
“운이 좋으셨네요.”
“한마디도 져 주지 않는군.”
속삭이던 입술이 눈가로 다가오나 싶더니, 이내 발간 혀를 내어 뺨을 가볍게 핥았다.
칼서스가 중얼거렸다.
“분명 그대가 허락한 일이야.”
“누가 아니라고 내빼기라도 할까 봐요?”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이내 그가 다시 뺨에 입술을 붙이고, 뜨거운 혀를 내밀어 뺨을 꼼꼼하게 핥았다. 솔직히, 강아지가 핥아 주는 것 같은 간질간질한 감각이 우습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아, 그리고 나중에 듣자 하니 눈물로는 가이딩이 되지 않았다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