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7화 (7/101)

7.

햇살 같은 구원자 (2)

“내가 졌다.”

뭐야 왜 갑자기 너 혼자 패배하고 그러세요.

‘내가 뭘 잘못했나? 들어주기 쉬운 소원을 고르려다가 외려 용의 자존심을 꺾어 버린 거야?’

내가 불안한 표정으로 칼서스를 올려다보자, 그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흑빵이라……. 사러 가려면 번화가로 나가야겠구나.”

“어?”

정말 들어주는 거야? 진짜?

이런 하찮은 소원도 들어줘? 그것도 화 안 내고?

‘소설 속에서 묘사된 광룡은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광룡이 미칠 광 자를 쓰는 광룡이 아니라, 빛 광 자를 쓰는 광룡 아니야?

왜 이렇게 착해?

“나갈 채비를 하자. 로브를 입어 본 적은 있겠지?”

“어, 네…….”

나는 도리어 당황한 채로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사이 칼서스가 안고 있던 나를 놓아주고, 허공에 대고 권능을 사용했다. 그러자 검은 로브 두 벌이 나타나 그의 손 위에 툭 떨어졌다.

칼서스가 개중 하나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본가가 그립지는 않은가? 가족이 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군.”

“아…….”

“가일 트레클리프가 용에게 적대적이니, 차마 말하지 못한 건 아니겠지?”

“그, 그건 아니에요…….”

“그럼?”

“그냥,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요.”

그게 아니라…….

내 가족은 대한민국 납골당에 모셔져 있어서 보고 싶어도 볼 길이 없거든요…….

게다가 여기 있는 가족은 해일 트레클리프 서의 가족인지라, 나랑은 얼굴도 모르는 사이고…….

‘뭐…… 진짜 해일도 가족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딱히 거짓말은 아닌가?’

소설 속의 해일은 무훈을 세우는 데에 미친 듯이 집착하던 캐릭터였다.

물론 사람들은 나날이 발전하는 그를 보며 ‘정석 먼치킨이다’, ‘이게 진짜 사이다다’라며 좋아했지만…….

아마 해일 본인은 업적을 쌓을수록 상당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하필 <붉은 기사> 가일이었으니까.’

아홉 마리 용 중 여덟을 살해한 전설적인 기사 가일.

머리칼과 눈 색이 피처럼 붉다고 하여서 <붉은 기사>라는 이명이 붙은 그는, 노화로 인해 기량이 떨어지자 해일을 통해 마지막 용인 칼서스 데포트를 죽여, <용 살해>의 위업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덕분에 해일은 아버지를 굉장히 무서워했지.’

가일이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이번에야말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하고 기대할 만큼.

나는 생각을 마치고, 칼서스에게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제 아버지는…….”

“…….”

“별로 그리워할 만한 분은 아니에요…….”

그 한마디에 칼서스가 굳어 들었다.

나는 그 틈을 타 주섬주섬 로브를 주워 입은 다음, 칼서스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외출을 채근했다.

칼서스는 몇 분간 넋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날 내려다보다가, 이내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칼서스가 용언을 사용해 이동시켜 준 곳은 수도의 외곽 쪽에 있는 번화가였다. 그는 들쭉날쭉한 크기의 대리석 조각으로 포장해 놓은 도로 위를 성큼성큼 걸으며 말했다.

“귀족들은 거의 걸음 하지 않지만, 용병이나 기사들의 왕래는 잦은 곳이지. 그래서 값싼 안주들을 파는 가게가 많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술집이라는 뜻이네요.”

“그래.”

칼서스는 간단하게 대답한 뒤, 약간 낡아 보이는 문 안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무로 짜인 문은 소름이 끼치는 끽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서 오십쇼.”

안으로 들어가자,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껄렁한 인사가 들려왔다.

해일은 칼서스의 뒤를 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죄다 근육질인 사람들밖에 없네……. 정말 다들 기사 내지는 용병인가 봐.’

오랜 시간 판타지 소설을 읽어 온 탓인지, 펍 특유의 분위기에 가슴이 다 떨렸다.

칼서스는 펍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는, 손짓으로 종업원을 불러 말했다.

“보드카 한 병, 그리고 흑빵과 스프 아무거나.”

“알겠습니다.”

칼서스가 우아한 목소리로 주문을 하자, 종업원의 태도가 순식간에 깍듯해졌다. 아무래도 칼서스를 귀족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나는 종업원이 주방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칼서스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칼서스, 이런 곳이 꽤 익숙한가 봐요?”

칼서스가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더니,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긴 삶은 지루하니, 가끔 이렇게 마실을 다니곤 했다.”

“아아.”

2000년대에 쏟아져 나온 판타지 소설에서는 많은 드래곤들이 유희의 명목으로 인간들과 뒤섞여 살아가곤 했으니, 광룡 살해자에도 그런 설정이 있을 법하지.

나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종업원이 쟁반을 들고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쟁반 위에는 보드카 한 병과 빈 잔 두 개, 한입 크기로 잘린 흑빵과 묽은 스프가 올라가 있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계산은 이걸로 하지.”

칼서스는 은으로 만들어진 동전 하나와, 적동으로 만들어진 동전 하나를 꺼내 종업원에게 건넸다.

“은화는 주인에게 주는 값이고, 동화는 네 몫이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

“저, 정말이십니까?”

“펍 주인에게 뺏기기 전에 조용히 하는 게 좋을 텐데.”

“아, 네, 넵…….”

종업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입을 다물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칼서스는 테이블 위에 놓인 흑빵과 스프를 내 쪽으로 밀어 주더니, 당연하다는 듯 보드카를 병째로 가져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버럭 짜증을 냈다.

“술에 너무 의존하면 안 된다니까요.”

“한 병 정도야, 입가심이지.”

“또 아저씨 같은 소리 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적당한 두께로 잘려 나온 흑빵을 하나 집어 스프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 직후 표정을 종이처럼 와자작 구겼다.

‘……씨발, 이게 뭐지?’

흑빵은 상한 것처럼 시큼하고, 잘 씹히지도 않을 만큼 겉껍질이 질기고 딱딱한 데다 퍽퍽하기까지 해서……. 꼭 부슬부슬한 사포를 씹어 먹는 느낌이 났다.

‘게다가 스프는 물 탄 귀리죽 같은 맛이야……. 밀가루나 우유는 전혀 안 넣었나?’

이쯤 되니 원작의 해일이 내뱉었던 평가가 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서스는 모래 씹는 표정으로 음식을 우물거리는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귀족 도련님, 평민 음식에 대한 환상은 이걸로 다 깨졌겠지?”

“어윽…… 네. 다 깨졌네요.”

칼서스가 보드카를 기울이며 말했다.

“흑빵은 한 번에 대량으로 만들어 오래 보관해 둬야 하니,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부러 퍽퍽하게 굽는 경우가 많다.”

“아…….”

……하긴, 보통 이런 곳은 중세나 전근대 시대를 배경으로 하니까 냉장고가 없겠구나.

‘그러려면 모든 음식을 상온에 보관해야 하니, 보존 식량에 가깝게 만들어야 했겠네.’

……왜 이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죠.’라는 멘트가 떠오르는 걸까.

‘케이크는 신선한 우유를 잔뜩 사용해 만든 버터와, 귀한 설탕을 잔뜩 쳐서 만드는 음식이었지…….’

귀족이 아닌 이상은 평생 동안 한 번도 먹어 볼 수 없는 음식임이 분명하단 뜻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지만, 왜 그런 소문이 생겨났는지는 알겠네…….’

평민들은 이런 퍽퍽한 빵이나마 겨우 먹고 사는데, 귀족들은 버터와 설탕을 펑펑 처먹고 있으니…….

속된 말로 존나 빡쳐서 그런 말이 나온 거구나…….

나는 고등학생 때 들은 세계사 수업을 떠올리며 입 안의 흑빵을 고무처럼 질겅질겅 씹어 삼켰다.

‘판타지 세상에 대한 두근거림은 개뿔이…….’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마법이 걸려 있는 칼서스의 둥지가 천국이었네.

“도련님이면 도련님답게 밀 빵이나 먹는 게 좋을 거야.”

“둥지에 음식이나 갖다 놓고 그런 소리를 하세요.”

“큭큭큭…….”

칼서스가 웃음을 터트리자,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 몇 명이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전투복을 입은 덩치 큰 사내 둘과, 로브를 걸친 작은 여성 한 명의 조합이었다.

[이런, 도련님이라는 소리가 저 테이블까지 들린 모양인데.]

칼서스는 곧바로 눈치를 챈 듯, 이전처럼 본인의 생각을 공유해 왔다. 그러고는 입 밖으로 한마디를 뱉었다.

“더 먹을 건가?”

“……그럴 필요는 없어 보여요.”

“그럼 바로 일어나지.”

칼서스는 바로 내 팔뚝을 잡아 일으켜 세운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 예상대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도 우리를 따라 나왔다.

나는 로브 사이로 그들을 흘긋거리며 생각했다.

‘질 나쁜 용병인가?’

원작의 초반부에, 해일에게 시비를 걸며 돈을 요구했다가 흠씬 두들겨 맞은 놈들이 나왔었지. 이것도 그거랑 비슷한 일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뒤쪽을 흘긋거리고 있자, 체구가 작은 여성이 성큼성큼 걸어오며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젖혔다.

“이봐!”

붉은 곱슬머리와 두드러지게 맑은 녹색 눈. 그리고 약간 앳된 듯한 외모가 돋보이는 미인이었다.

‘어? 잠깐만, 이 묘사 본 적이…….’

내가 당황해서 굳어 든 순간, 붉은 머리의 여성이 소리쳤다.

“해일 단장! 나야, 린 멜리온!”

……예상했던 그 캐릭터가 맞잖아!

해일이 아끼던 천재 정령사이자, 독자들의 귀염을 독차지했던 허당, 린 멜리온!

‘동시에 해일의 보좌이자 부단장이었던…….’

어라, 그렇다는 건…….

린이 내가 ‘해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챌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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