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햇살 같은 구원자 (3)
린은 아주 반갑다는 듯이 내 앞으로 척척 걸어오며 말했다.
“목소리를 듣고 알아차렸어. 해일 단장도 둥지에서 무사히 빠져나왔구나! 우린 단장이 죽은 줄로만 알았어!”
나는 씩씩하게 걸어오는 린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미친, 미친 안 돼! 내가 해일이 아닌 걸 알아볼 거야! 만나면 안 된다고!’
내가 기겁하며 물러서자, 칼서스가 슬쩍 내 앞을 가로막고 서더니 작은 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지?”
“예, 옛날 동료요. 그런데 지금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칼서스는 내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나 싶더니,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겠다.”
린은 나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듯이 선 칼서스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해일 단장, 옆에 그 사람은 누구야?”
“나 말인가?”
“네, 당신이요. 실례지만 누구신데 해일 단장과 같이 있는 거죠?”
린의 당돌한 물음에, 칼서스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뾰족한 엘프 귀와, 찬란하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한 외모가 드러나 보였다. 그 얼굴을 본 린이 깜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에, 엘프?”
“순혈 엘프는 멸종하지 않았나?”
칼서스가 오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엘프가 아니다.”
“하지만 귀가 뾰족한데…….”
린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으며 슬쩍 칼서스의 귀를 손가락질했다.
“어, 어엇.”
그 직후 린은 저 혼자 깜짝 놀라 숨을 집어삼키고는, 다른 쪽 손가락으로 스스로의 검지를 접어 넣었다. 린이 죄책감이 서린 표정으로 웅얼웅얼 변명했다.
“예의 없이 굴 생각은 아니었어요. 멋대로 손가락질해서 죄송해요.”
……저 허당 기질을 보니 실감이 나네. 정말 린 멜리온이 맞구나…….
하는 짓이 엉성하고 어리바리하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한 캐릭터인지라 독자들이 예뻐했었지.
‘엘프의 피를 계승했기 때문에 정령술 실력이 좋다는 서술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떠올린 때였다.
칼서스가 린의 질문을 무시하듯, 그녀를 내려다보며 고압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둥지에서 빠져나왔다 하였지.”
“……너!”
린은 그 한마디를 듣더니, 무언가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엘프의 피를 계승한 자가 명한다!”
린이 가볍게 선언을 하자, 그녀의 하얀 손을 따라서 마나가 휘몰아치듯이 모여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눈치 좋은데?’
바로 칼서스가 용인 걸 눈치채고 공격 태세에 들어가다니. 보통 깡이 아니네. 해일이 유독 아끼는 부하였다더니, 이런 능력이 있어서 그랬구나.
하지만 칼서스는 자신을 경계하는 린이 영 못마땅했는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의 손아귀에서 경쾌한 ‘딱’ 소리가 울린 직후, 린의 손을 휘감았던 마나가 산산이 흩어졌다.
“크흑……!”
“요즘 아이들은 예의를 모르는 것 같군.”
마나가 흩어진 뒤, 린은 제 가슴팍을 부여잡고 제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마, 마나 코어가…….”
뭐야, 방금 그걸로 마나 코어가 무너진 거야? 진짜 그 ‘딱’ 소리 한 번에?
‘……손짓 한 번에 천재라고 묘사됐던 정령사를 무력화시키다니.’
다시는 칼서스 앞에서 깝치지 말아야지…….
‘이런 사기 캐를 8명이나 죽인 가일은 대체 무슨 괴물이란 거야?’
내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는지, 칼서스는 건조한 표정으로 린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꼭 죽어 가는 벌레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무감했다.
“남의 둥지에 멋대로 침입한 것도 모자라서, 어른을 공격하면 쓰나.”
“…….”
“곱게 돌려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해도 모자랄 텐데.”
나는 우아하고 고고하게 말하는 칼서스를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저 얼굴로 말하면 꼰대 발언도 우아한 충고가 되는구나.’
그나저나, 불멸의 종족씩이나 되어서는 왜 그렇게 마음을 좁게 써? 네가 무서운 소리를 하니까 저쪽에서 경계를 하는 거 아냐. 넌 어린애를 상대로 진심으로 싸우고 싶냐? 도덕 몰라, 도덕?
‘그리고 능력도 좀 작작 써. 네가 능력을 쓰고 나면 나랑 주둥이 맞대야 하잖아.’
비위도 좋지. 남자인 나랑 주둥이를 비벼야 하는데 능력을 쓰고 싶을까? 나는 네가 아픈 것만 아니면 별로 주둥이 비비고 싶지 않은데.
내가 차마 말로는 뱉지 못할 속마음을 궁시렁거리는 사이, 칼서스의 정체를 알아챈 린이 고함을 쳤다.
“젠장, 빌어먹을 광룡! 너 우리 단장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당장 말해!!”
소리치는 린은 흡사 광대버섯을 주워 먹은 멧돼지 같았다. 나는 그 험악한 모습을 보며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얘야, 너도 좀 진정하렴.’
나 아직 이 도마뱀한테 나쁜 짓 같은 거 안 당했…….
‘……잠깐, 생각해 보니까 나쁜 짓은 내가 저지른 것 같은데?’
칼서스는 기다려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먼저 주둥이를 비볐잖아……? 어라, 얘들아? 아무래도 가해자는 나인 것 같거든?
린, 그 손가락질 나한테 좀 해 줄래? 아무래도 내가 가해자인 것 같은데?
“무슨 짓이라…….”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칼서스는 되레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소설에서 등장하는 전형적인 악당 같은 몰골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을 것 같나?”
“이 자식이!”
넌 또 왜 지랄이야?
왜 애가 오해할 만한 말을 하고 그래?
‘이러다 진짜 싸움 나겠는데?’
그럼 진짜 곤란한데. 여기 수도 외곽이잖아. 그럼 진짜로 가일이 용 잡겠다고 달려올 수도 있지 않나?
‘어떡하지? 말려야 하나? 싸움은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 끼어들어야 하나?’
……개뿔이, 누가 들어 주기나 하겠냐?
변변찮게 평화주의자 행세를 하면서 끼어들었다가는 내가 가장 먼저 다진 고기 신세가 될 것이다. 나는 차분히 주제 파악을 마친 뒤, 다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곧 린이 다시금 소리를 내질렀다.
“너, 단장에게 권능을 사용해서 금제를 걸었지?! 그래서 단장이 꼼짝도 못 하고 네게 잡혀 있는 거지?!”
일그러진 눈매를 따라 눈물이 고였다가, 뚝 떨어졌다.
칼서스는 분을 참지 못하고 울기 시작한 린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더니 마치 아이를 어르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의외로 마음이 잘 맞아서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잖나?”
여유로운 칼서스에 비해, 린은 절벽 끝에 몰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목소리로 단언했다.
“너희 용들은 사악하니까!”
린은 그렇게 말하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마나가 손 주변을 휘몰아치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린은 망설임 없이 칼서스를 향해 소리쳤다.
“용들은 다른 종족이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냉혈한들이잖아! 그러니 세계수를 독점하기 위해서 인간들을 학살한 거고!”
“…….”
“외가의 엘프들도 용들의 욕심 때문에 다 죽었어! 나는 그래서 황제 폐하의 기사가 된 거야, 인간과 엘프 모두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는 깊은 원한과 살기가 담겨 있었다.
칼서스의 입가에 지어져 있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인간…….”
칼서스가 낮은 목소리로 짓씹듯이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듣자 등골이 쭈뼛 서며, 본능적으로 칼서스가 눈앞의 ‘인간’을 살려 보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 칼서스!”
“넌 나서지 마라.”
칼서스가 나를 제 뒤로 숨기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붉은 머리의 소녀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을 주워 힘껏 내던졌다. 능력이 사라졌으니, 이렇게나마 발악을 하려는 듯했다.
일견 악독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도리어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일갈하듯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해일을 돌려줘! 그 사람은 내 단장이야! 너 따위에게 붙잡혀 있을 분이 아니라고!”
죽음을 불사하고 내뱉는 고함에, 칼서스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인간들이란, 정말 반성을 모르는 종족이군.”
조용히 중얼거린 칼서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까 린이 보여 줬던 것의 배가 되는 마나가 넘실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친놈아, 시가지에서 뭐 하는 거야!’
기겁한 내가 칼서스를 붙잡아 당기며 소리쳤다.
“안 돼!”
능력 쓰면 안 돼! 사람 죽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너랑 나도 뒤질지도 모른다고!
‘능력 쓰느라 마나 코어에 무리가 가면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하잖아!’
너 이 새끼, 이래 놓고 또 칭얼거릴 셈이지?! 주둥이 비비자고 징징거릴 거지?!
‘지금도 남정네랑 주둥이 비비면서 찔찔 짜는 신세인데, 날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 셈이야!’
하지만 눈이 돌아간 칼서스는 내 손을 뿌리치며 화를 냈다.
“비켜!”
“안 된다고 했잖아요!”
내쳐진 손아귀가 아렸지만, 나는 다시금 칼서스의 팔뚝을 억세게 붙들었다.
그러자 칼서스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어, 눈이…….’
샛노란 눈의 중심에 위치한 동공이 파충류의 그것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그걸 본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위로 뻗어, 칼서스의 뒷덜미를 붙잡고……,
“헉……!”
“세상에……!”
……당겨서, 입술을 맞대었다.
거의 들이받듯 부딪친 입술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