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햇살 같은 구원자 (5)
둥지로 돌아온 직후, 칼서스가 해일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가두고는 하얀 뒷덜미를 손으로 붙들었다.
“잠, 깐만!”
해일은 무어라고 항의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칼서스는 듣지 않겠다는 듯 해일에게 곧장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뚱이가 하나가 되어 소파 위로 엉켜 넘어졌다.
“욱, 흡…….”
해일은 배려 없는 가이딩에 항의를 하고 싶었는지, 손을 들어 칼서스의 긴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칼서스는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더 깊게 겹쳤다.
“으응, 으으읍.”
깊숙하게 들어온 혀가 입 안쪽의 여린 살갗을 핥고, 입 천장을 간지럼 태운 뒤 쪽쪽 소리가 나게 혀를 빨아올렸다. 그러자 해일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읏, 윽…….”
진득한 입맞춤이 쉼 없이 이어지자,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아귀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진 건 해일의 손끝이 힘없이 소파 위로 툭 떨어졌을 즈음이었다.
“하아…….”
“흑, 케흑! 아, 미쳤어요?!”
거의 넋이 나간 해일이 까칠하게 칼서스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하아, 콜록…….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하게 굴어요? 누구 죽이려고 이러는 거예요?”
칼서스는 대답 대신 해일의 파란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다소 일그러져 있긴 하지만, 눈물로 촉촉하게 젖은 순한 눈매가 시야를 메웠다.
용의 잇새로 그르릉거리는 듯한 소리가 새었다.
‘희생적이고, 어리숙하고, 조금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한 사내.’
그런 사람의 입에서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나왔다는 건, 마주치기 싫은 척을 해서라도 동료를 구하고 싶었다는 거겠지.
‘……동료가 용에게 덤벼들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충돌을 막으려고 그런 말을 했으리라.
칼서스가 손끝으로 해일의 눈가를 문질러 닦아 준 뒤,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미련하게도 보답받지 못할 선의를 베풀고 있구나.’
하긴. 그런 녀석이니, 인간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내게도 다정함을 베푼 거겠지.
‘가일 같은 놈의 자식으로 태어난 게 아까울 만큼, 이 녀석은 다정하고 이타적이다.’
어쩌면 이 녀석이 가장 안전해질 수 있는 길은, 이대로 나와 영영 둥지에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이 둥지 안에는 이 순진한 녀석을 제 입맛대로 조종하려는 빌어먹을 인간들이 없으니까…….
길었던 입맞춤이 끝나고, 해일의 잇새로 색색거리는 숨이 터져 나왔다. 칼서스가 가이딩으로 인해 새어 나온 눈물을 혀끝으로 핥아 주며 속삭였다.
“네가 바라는 만큼 머물러도 된다.”
푸른 눈이 당황스러움을 품고 칼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칼서스의 입가에 달콤한 웃음이 걸렸다. 그림 같은 미소였다.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까.”
* * *
당황스러운 나머지 눈꺼풀이 다 파르르 떨렸다. 나는 얼떨떨하게 칼서스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얘 왜 이래?’
왜 갑자기 나한테 집의 소유권을 넘겨 버리는 건데?
죽을 때 됐어? 그래서 나한테 상속하려는 거야?
‘난 이렇게 쓸데없이 크고 넓은 집 필요 없는데?’
벌레 많으니까 농약 자주 쳐야 하지, 성 보수 수시로 해야 하지, 관리하려면 사람도 고용해야 하지…….
그걸 언제 다 하란 말이야? 나 혼자서는 그런 거 못 해.
‘네가 권능으로 관리하고 있으니까 여기 눌러앉으려는 거지, 내가 상속받을 마음은 요만큼도 없어…….’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하다가, 에둘러서 질문을 내뱉었다.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해요? 꼭 갑자기 훌쩍 떠나려는 사람처럼…….”
질문을 들은 칼서스가 다정스레 내 뺨을 쓰다듬어 주며 대답했다.
“떠나지 않는다. 내가 너를 두고 어디엘 간다고.”
“하긴, 제가 없으면 칼서스 씨를 가이딩 해 줄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조금 더 우세한 입장이라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탓에 우쭐한 마음이 든 나머지, 나는 평소라면 꺼내지 않았을 헛소리까지 입 밖으로 꺼내 버렸다.
“여기가 제 집인 건 칼서스 씨가 여기 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없으면 둥지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요?”
“…….”
“나는 당신을 가이딩 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없으면 저도 여기 머무를 이유가…….”
나불거리던 도중 문득 ‘이 말, 조금 의미심장하게 들리지 않나?’라는 자각이 들었다. 나는 말을 멈추고 내가 내뱉었던 말을 하나씩 되새김질하듯 곱씹어 보았다.
‘그러니까…… 키스를 하고, 여기가 이젠 네 집이라는 말을 듣고, 당신이 없으면 여기서 살 이유가 없다고…….’
……평범한 프러포즈 아닌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순간, 얼굴로 열이 치솟아 피부가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비명처럼 말을 내뱉었다.
“이, 이상한 의미로 말한 거 아니에요!”
신나서 나불거리다가, 소리를 질렀다가. 아주 지랄이 풍년인 나를 보는 칼서스의 잇새로 킥킥대는 웃음이 새었다.
“그럼, 무슨 의미로 말한 거지?”
“그러,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에게도 네가 필요하고, 네게도 내가 필요하다는 말 아니었나? 나는 내가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얄궂은 목소리와 함께 입술이 슬그머니 가까이 다가왔다. 순식간에 두 얼굴이 다시 키스할 것처럼 가까워졌다.
나는 기겁하며 팔을 X자로 들어 칼서스가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마, 마, 말을 왜 그렇게 해요!”
“내가 뭘?”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여기 남이 어디 있다고?”
“아악, 진짜! 그 의미로 말한 게 아니잖아요! 남사스럽다고요!”
아니, 이 드래곤 왜 이렇게 편견이 없어! 남자 대 남자라고!
남녀 사이가 아니라 남남 사이라고!
‘나는 평범하게 여자를……!’
여자, 여성을……! 그러니까, 생물학적 인간 여성을…….
어…….
‘……좋아했던가?’
……딱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항상 생존이 1순위였고, 일상은 그 뒤로 따라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유랄 게 없었던 탓일까? 돌이켜 보니 누군가가 좋아서 가슴이 뛴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남들은 사랑 때문에 미치겠다고 펄쩍펄쩍 뛰던데…….’
나는 누굴 짝사랑했던 기억조차 없네. 하물며 성욕이라거나 그런 게 생긴 적도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와, 설명하기 진짜 난감하네…….’
나는 말을 멈추고 끙끙거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칼서스에게 한마디를 건넬 수 있었다.
“……그, 연애적인 의미로 한 말은 아니라는 뜻이었어요.”
“연애적인 의미가 아니면?”
“사랑에도 종류라는 게 있잖아요. 우정이나, 부성애나, 모성애 같은 이름이 붙은…… 그런 거요.”
말을 하면 할수록 확신이 사라져서, 목소리는 점점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처럼 작아졌고 얼굴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러니까, 칼서스 씨랑 저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가끔 키스하는 친구 사이?”
“아, 말을 왜 그렇게 하냐고요!”
“사실이지 않나?”
칼서스는 그렇게 말한 뒤,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같이 지내게 된 뒤로 처음 듣는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웃는 얼굴엔 침을 못 뱉는다더니.’
즐거워하는 얼굴을 보니 무어라고 쏘아붙여 주려던 입술이 풀칠을 한 것처럼 딱 달라붙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씩씩거리며 칼서스를 노려보다가, 복수하듯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앞으로는 존댓말도 안 해 줄 거고, 칼서스 ‘씨’라고도 안 할 거예요!”
칼서스는 지나치게 흔쾌한 대답을 날렸다.
“그러도록 해.”
“아 짜증 나!”
“가끔 키스하는 친구 사이인데, 반말이 뭐 대수라고. 이젠 나를 ‘자기야’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아, 제발! 진짜! 돌았나!”
화가 난 나는 다시 칼서스의 머리채를 쥐어 잡아당겼다. 그러자 칼서스가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아프다, 놓아 다오.”라며 엄살을 피웠다.
“끝까지 놀려 먹으려고, 진짜 사람, 아니 용이 왜 그래요?! 왜 그렇게 못 돼먹었지!?”
“존대하지 않겠다며?”
“이 와중에 그걸 지적하고 싶어요?! 진짜 짜증 나게 굴지 좀 마요!”
“싫어도 어떡하나, 네 말대로 우리는 같이 살아야 하는 운명인 것을.”
칼서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나이도 먹을 만치 먹은 놈이 귀여운 척으로 넘어가려고?’
그럼 누가 넘어갈 것 같아?! 물론 난 넘어가는 쪽이야!
귀엽네, 젠장! 얼굴 한번 끝내준다! 잘생긴 놈이 아양을 떨면 이렇게나 아름다운 얼굴을 구경할 수 있구나!
기묘한 깨달음을 얻은 나는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나, 의외로 얼빠였던 걸까…….’
저 아양을 보니, 짜증이 나서 한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럴 땐 저리 꺼지라고 욕을 한바탕 퍼부어 줘야 하는데…….’
왜 이놈의 주둥이가 말을 안 듣는 걸까…….
나는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국 강아지를 대하듯 덩치 좋은 용을 품에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앓는 소리를 터트렸다.
“아…… 모르겠다. 칼서스가 형이니까 존댓말은 하는 걸로 할게요…….”
한 번 더 품 안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인지 그 소리가 듣기 싫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새삼스레 깨닫는 건데 아무래도 난 잔정이 많은 편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