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11화 (11/101)

11.

붉은 수사자 (1)

“그래, 이 늙은이를 찾았다고 하던데.”

“…….”

“무슨 목적으로 다른 기사단의 단장을 찾아온 건지 궁금하군. 무슨 이유인가?”

붉은 수사자 같은 생김새, 올해 마흔둘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젊은 외모, 그리고 눈앞의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는 저 눈빛까지.

린은 가일을 마주 본 채로 마른침을 삼켰다.

‘태도만 봐도 알겠어. 내가 뭘 제안하든 거절할 셈인 거야.’

<붉은 기사>라는 이명을 단 저 사내는 해일의 아버지이다. 하지만 동시에 황제를 지키는 제1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일은 해일과 황제 중, 황제를 택했다. 아니, 택했다고 보기에도 민망할 만큼 해일을 쉽게 내던져 버렸다.

‘언젠가 단장이 말했었어, 나의 가장 큰 적은 황제를 노리는 놈들이 아니라…… 제 생부인 가일 단장이라고.’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해일 단장은 가일 트레클리프 딘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린이 침묵하며 자신을 노려보자, 가일이 이죽거리듯 물었다.

“왜 답을 하지 않지?”

“인, 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린이 잔뜩 긴장한 채로 경례했다.

“2기사단 부단장 린 멜리온이 가일 단장을 뵙습니다.”

“2기사단 단원 예이트 셴이 가일 단장을 뵙습니다.”

“2기사단 단원 오르가 카일로스가 가일 단장을 뵙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두 기사도 마찬가지로 격식을 갖춰 경례했다. 그 모습을 본 가일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됐다. 그런 허례허식 따위 필요 없어. 본론부터 말해라.”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내려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노골적인 무시였다.

‘역시나…….’

린은 숨을 느리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힘 있게 말을 내뱉었다.

“해일 단장이 생존해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

“구조대를 파견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생존이라는 글자를 들은 직후 가일의 표정이 완전히 변했다. 가일이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린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광룡과 만났는가?”

“예.”

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올곧은 태도였다. 자신이 겪은 것이 사실이라고, 정말 용을 만났다고 온몸으로 주장하는 듯했다. 가일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만년필이 부드득,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다.

붉은 수사자의 몸 너머로 보이지 않는 기운이 넘실거렸다.

‘귀신 같은 살기…….’

무형의 살기에 압도된 기사들은 숨을 쉬는 것도 빠듯할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곧 가일이 그르렁거리며 물었다.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나?”

“진실입니다. 직접 광룡과 대면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 돌아왔지?”

……어떻게 살아 돌아왔긴.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살아 돌아왔지.

린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자, 가일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대답해라, 린 멜리온!”

흉흉한 기세였지만, 린은 전혀 겁에 질리지 않았다. 도리어 눈앞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동정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린이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해일 단장이…… 희생했습니다.”

“희생……?”

가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생존을 확인했다 하지 않았나.”

“……희생을 하긴 했으나,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하지만 린은 이번에도 가일이 원하는 ‘올바른’ 대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가일이 답답하다는 듯 탄식하며 되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질문을 들은 린은 입술을 몇 번 어물거렸다. 내뱉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는 듯했다.

결국 린은 울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해일 단장이…… 광룡의 노리갯감이 되었습니다.”

“뭐라?”

끊길 듯, 말 듯 한 흐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광룡이 해일 단장의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해일 단장은 자신이 볼모로 잡히는 것을 조건으로 저희를 무사히 돌려보내 달라고 하셨고요…….”

설명을 차분하게 듣던 가일이 돌연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즐거워하는 낯으로 중얼거렸다.

“광룡이 인간을 첩으로 삼을 줄은 몰랐거늘.”

아비는커녕,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말이었다.

린은 그 말에 큰 모멸감을 느끼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가일은 그런 린을 응시한 채, 차를 음미하듯이 제가 내뱉은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첩, 첩이라……. 그렇단 말이지…….”

잠시 뒤, 가일이 생각을 마친 후 질문을 던졌다.

“광룡이 그놈을 데려가며 뭐라고 말하던가.”

“……해일 단장을 평생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호오, 제법 푹 빠진 모양이야.”

대답을 마친 수사자는 노골적으로 흥미로워하며 킥킥 웃음소리를 냈다. 본능적인 역겨움이 치밀고 올라와, 속이 뒤집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린이 충격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몸에 힘을 주며, 분노를 내리누르려 애썼다.

‘당장이라도 저 망할 새끼의 얼굴에 주먹을 갈겨 버리고 싶다.’

하지만…… 자신은 그럴 주제도 되지 못하고, 그래서도 안 됐다. 저자의 출전에 해일의 생사가 걸려 있기 때문에.

린은 혀 위를 굴러다니는 욕설을 삼키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러니 구조대를 파견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희에겐 마법사와 정령사가 필요합니다.”

“알고 있다. 광룡의 둥지에 걸린 술식을 파훼하려면 그만한 인력이 필요하겠지…….”

가일이 독사처럼 교활하게 웃으며 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전에 둥지에 파견되었을 때는 네가 그 역할을 맡았던 걸로 아는데?”

린의 왼편에 서서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오르가가, 가일의 말에 재빨리 대답했다.

“광룡이 린의 마나 코어를 망가트렸습니다. 수복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부상이 심각하지는 않으나, 당장 며칠은 능력을 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린 멜리온 부단장의 몸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하지.”

분노를 내리누르고 있던 린이 눈을 번뜩 뜨며 소리쳤다.

“가일 단장! 당신……!”

“그만.”

가일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눈앞의 젊은 기사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참모의 머리를 쥐어짠다고 해서 그럴듯한 작전이 빨리 나오는 건 아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전쟁을 준비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지. 그 기본적인 수칙을 잊지 말게나.”

“…….”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쳐들어갔다가는 개죽음이나 당할 뿐이다.”

가일이 부서진 만년필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뒤, 손수건으로 잉크가 묻은 제 손아귀를 닦았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내 1기사단에서도 사람을 뽑아 두겠네.”

“가일 단장님께서는 직접 걸음 하지 않으십니까?”

“그걸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황제 폐하이시다. 나는 그분의 수족일 뿐이야.”

일견 광신도처럼 보이는 대답이지만, 그 속에는 ‘아들 따위보다 폐하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아무리 개국 공신이자, 황제의 오른팔인 트레클리프 가의 가주라지만, 저딴 태도라니…….’

뜻을 알아들은 린의 표정이 악귀처럼 구겨졌다. 가일은 그런 린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 내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그놈이 얼굴이라도 잘나게 태어나서 다행이군. 미끼가 되어 주니 고마울 따름이야.”

“…….”

해일뿐만 아니라, 해일을 걱정하는 모든 이를 싸잡아 조롱하는 말이었다.

린이 참아 오던 분노를 터트렸다.

“……사람도 아닌 개자식! 단장을 구출하고 나면 당신을 재판대에 올릴 거야!”

“그날을 기다리지.”

경멸 섞인 목소리에도 가일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린은 그런 가일을 벌레 보듯 쏘아보고는, 인사도 없이 쿵쿵거리며 사무실에서 뛰쳐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본 가일의 입가에 히죽거리는 미소가 걸렸다.

“젊구나, 젊어. 고작 사람 한 명분의 목숨으로 저렇게 흥분하다니.”

오르가는 제 아들을 두고 ‘고작’ 사람 한 명분의 목숨이라고 칭하는 가일을 떫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람을 물건처럼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에 구역질이 치민 탓이었다.

오르가는 몇 초간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한 번 푹 내쉬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대의 하루에 영광 있기를. 조심히 가게나. 마음 약한 부단장도 좀 챙겨 주고.”

“……무탈한, 하루…… 되십, 시오.”

오르가는 복잡한 표정으로 린의 뒤를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그 뒤를 따라 예이트가 가일을 잡아먹을 듯 노려본 뒤, 묵례를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사무실에는 가일 한 명만이 남았다.

가일은 고요해진 방과,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다가 큭큭거리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가일이 두툼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기도를 하듯이 양 손바닥을 마주 대었다.

“……드디어 때가 도래했다.”

광신도의 눈이 살기와 뒤엉킨 황홀함으로 잔뜩 번들거렸다.

“기회가 왔어……. 아르테스이시여…….”

가일이 짐승처럼 그르릉그르릉 신음하며 중얼거리더니, 이내 또다시 정신이 나간 것처럼 히죽거리며 웃었다.

“신께서 안배하신 마지막 기회로구나.”

감격이 차오른 사람처럼, 가일이 오른손으로 가슴을 짚고 중얼거렸다.

“이제 이 땅에 남은 마지막 용을 없앨 때가 된 것이다……. 데르반 아르테스이시여. 제가 폐하의 복수를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중얼거림 사이사이로, 기괴한 애정과 경외심이 뒤엉켜 느껴졌다.

가일은 빈방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기도했다.

기괴하리만치 음습한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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