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13화 (13/101)

13.

붉은 수사자 (3)

칼서스는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더니 엷은 웃음을 지었다.

“너무 괴로워하지 말거라.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 아니더냐.”

“하지만 저는 칼서스를……, 죽이려고 했었는데…….”

물론 내가 한 짓은 아니고, 원작의 해일이 하려던 일이지만…….

어쨌든 이 몸에 빙의한 이상은 나도 그 책임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정의를 위해 휘두른 칼이라곤 하지만, 가일이나 해일도 적잖은 사람을 죽였으니…….’

수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수백 수천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던가. 나는 언젠가 읽었던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나는 수만 명과 여덟 마리의 용을 죽인 ‘학살자’ 가일의 아들인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암담할 수가 없었다.

‘와……. 생각해 보니 칼서스 말고도 나한테 원한을 품을 사람이 한 무더기 있네. 유족이 능지처참을 하겠다면서 쫓아오면 어떡하지…….’

내 표정이 일그러지자, 칼서스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너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가일 같은 영웅이 되고 싶었을 네 마음도 이해하기 때문이지.”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무척 다정했다. 정말 조금도 화가 나지 않은 것 같았다. 칼서스가 손길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얼렀다.

“용을 잡아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겠지. 영웅의 자식이란 다들 그런 마음을 갖는 법이다.”

“…….”

“너는 잘못되지 않았다. 잘못된 건 어린 네가 칼을 잡게 만든 어른들이지.”

머리칼을 어루만지던 손이 조금 아래로 내려와 이마를 더듬었다. 곧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가 뒤로 넘어가고, 맨얼굴에 칼서스의 시선이 쏟아졌다.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던 칼서스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 나이를 모르는군. 얼굴은 제법 앳되어 보이는데…… 이제 스물인가?”

“서…….”

나는 반사적으로 서른이라고 답하려다가, 작중 해일의 나이를 떠올리고는 급하게 말을 바꿨다.

“곧 스물한 살이 됩니다.”

“역시 어리군.”

칼서스는 머리칼을 다시 놓고는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침착했다.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용 살해의 위업을 물려주는 건 잔인한 일이다. 태어나 백 년도 살지 못한 아이가 무얼 안다고…….”

‘미친놈아 이 새끼 만 나이로 스물이라고.’

전근대 시대의 스물이면 결혼해서 애까지 딸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거든?

해일은 작중에서 ‘이제 슬슬 장가가도 되겠네.’ 따위의 취급을 받던 놈이란 말이야.

‘그리고 살인은 어린애가 하든 어른이 하든, 범죄라는 점은 바뀌지 않잖아.’

그런데 왜 ‘살인을 해도 되는 나이다 아니다’를 따지고 있어.

아직 천부인권이 없는 세상이라 그래? 내가 가서 칸트 데려올까?

‘……칸트를 데려오면 뭐 하냐. 인권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한참 더 지나서야 시민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러니 결국 간단히 말하면, 눈앞의 이 드래곤에게 인권 사상을 주입하기엔 글러 먹었다는 뜻이다.

나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생각했다.

‘그냥 여기 콕 박혀서 히키코모리처럼 살아야지. 그래야지만 살인 같은 거랑은 담쌓고 살 수 있을 거야.’

그래, ‘이불 밖은 위험하다’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세상이 얼마나 무서우면 그런 말이 다 생겼겠나. 그런 말이 생긴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둥지에 쳐들어오는 살인마나 괴한이 있을 리가 없으니, 역설적으로 무서운 용의 옆이 가장 안전한 곳이 된단 말이지.’

그러니 혹시 모를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둥지에서 빠져나가지 않아야 한다. 둥지를 나서지만 않는다면 내가 위험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 * *

황성의 제1기사단장 집무실 안에 모인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각각 1기사단의 부단장과 2기사단의 부단장, 그리고 각 공작가에서 차출해 온 몇 명의 마법사와 기사들이었다.

상석인 가일의 자리는 비어 있었으나, 자유롭게 담소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부드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곧 긴장감과 적막이 맴돌던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가일이 나타났다.

“모두 모였나?”

위풍당당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리에 모인 모두가 후다닥 일어나 가일에게 경례했다. 가일은 그런 이들에게 손을 내저어 보이더니,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린 멜리온. 회복은 끝난 거겠지?”

“완벽하게 회복했습니다.”

“이번 일은 폐하께서도 주시하시는 일이니, 한 점 거짓이 없어야 하네.”

“네. 진실만을 말했습니다. 임무에 차질 없이 임할 수 있습니다.”

린은 결연한 태도로 대답했다.

가일은 그제야 만족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심드렁한 표정을 하곤 상석으로 향했다. 린은 그런 가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공간을 왜곡시키는 술식을 이용해 둥지를 만드는 만큼, 용이 둥지를 옮기는 일은 권능을 마구 남발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용들을 치유해 주는 세계수도 없으니, 용은 어지간해서는 한번 자리 잡은 둥지를 옮기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공격을 당한다면? 그때는 아무리 용이라고 해도 둥지를 포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용을 찾기 위해 몇 년을 허비해야 하겠지.

‘그러니 가장 빠른 타이밍에, 최대한의 전력으로 둥지를 돌파해야 해.’

이번에도 실패로 끝난다면, 해일 단장의 생사는…… 아마 앞으로도 영영 확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린의 시선이 상석에 앉은 가일에게로 향했다.

‘가일 단장의 기량이 떨어져 있다곤 하지만, 단장의 출전이 허가된 건 정말 다행이었어.’

저 인간의 인성이 바닥인 건 귀족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저자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 또한, 모두가 아는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해일 단장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저런 인간이라도 끌어다 쓰는 수밖에 없어.’

린은 곧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을 부릅뜨며 태연한 표정을 가장했다.

‘참아야 해. 지금 2기사단을 지휘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잖아.’

2기사단을 대표해서 나온 사람이, 나약하게 눈물 따위를 보여서는 안 돼. 하지만 린이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일수록, 눈시울은 점점 뜨거워져만 갔다.

‘단장…….’

결국 마음이 꺾인 린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눈물을 몇 방울 떨어트렸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익숙한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잡종 따위가 기사를 하겠다고?

-귀족인 제 아비를 믿고 설치는 꼴 좀 보라지. 저 앙상하게 마른 팔뚝으로 기사는 무슨!

-정령술? 아아, 그 엘프들이나 쓰던 주술 말인가. 고작 그딴 걸로 기사단에 들어왔다고? 마법사도 아니고, 정령사 출신이 기사라니. 기가 차서.

-꺼져! 너 같은 잡종이랑 동기로 취급받고 싶지 않다고! 너는 208기 기사 교육생에게 있어서 수치야!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타고난 특성은 바뀌지 않는다.

태어나길 엘프의 먼 후예로 태어난 린에게 있어서 정령술은 유일한 장점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같은 동기들은 ‘검을 쓰지 못하는 기사’는 인정할 수 없다며 그녀를 조롱하기 일쑤였다.

그런 린의 앞에 나타났던 것이 바로 해일이었다.

-린 멜리온.

-리, 린 멜리온이 제2단장님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다.

처음 해일을 만난 날.

흙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던 린은, 해일을 보자마자 ‘햇살로 빚어진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아름다운 외모, 고위 귀족 출신이기에 보일 수 있는 우아한 태도, 그리고…….

-힘으로 들이받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놈들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아도 된다. 객관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네 능력은 무척 우수한 편에 속한다.

……혼혈인 자신을, 그저 유능한 ‘한 사람’으로 취급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 그야말로 먹구름 낀 하늘이 걷히고, 신이 강림한 듯한 기분이 들었더랬다.

해일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린에게 손을 내밀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물론, 정규 훈련은 꾸준히 받아야 한다. 정령술을 사용하는 데도 체력이 필요하니 말이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네, 단장님.

-나는 개인적으로 그대의 능력을 높이 산다. 고로, 그대에게 2기사단 부단장의 자리를 제안하고 싶다.

그날, 린 멜리온이라는 사람의 세상이 뒤집혔다.

-내 제안을 수락하겠는가?

철창 속에 갇힌 채로 자라던 새에게, 넓고 푸른 세상이 주어진 것이다.

그날을 기점으로 린 멜리온은 더는 괴롭힘을 받지 않게 되었다. 부단장이라는 직위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린이 눈물을 힘겹게 삼키며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 아버지를 닮아 언제나 날이 서 있는 탓에 대하기 껄끄러운 면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해일은 린에게 부단장이라는 직위와, 자유로운 삶을 안겨 준 은인이기도 했다. 린이 소매를 잡아당겨 눈물을 빠르게 훔쳐 내고는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그러니까 나도 단장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의 표정엔 열의가 가득했다. 방금까지 긴장으로 굳어 있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린이 남몰래 주먹을 강하게 쥐며 속으로 읊조렸다.

‘단장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 린 멜리온,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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