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17화 (17/101)

17.

번견 (2)

감겨 있던 눈이 가물가물하게 뜨이고, 정신이 돌아왔다.

‘윽, 목 아파……. 담이라도 왔나?’

나는 꾸물꾸물 몸을 일으키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침대의 왼편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와 내 어깨를 붙들고 소리쳤다.

“단장님!”

“해일 단장! 정신이 들어?! 나 기억하겠어?!”

“단장님! 깨어나셨군요!”

……린이랑 오르가잖아? 얘들이 왜 여기 있지?

내가 당황하며 그 둘을 바라보자, 이번엔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다 진정해라. 방금 깨어난 환자 더 놀라게 만들지 말고.”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엘프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는 게 보였다. 당연하게도 그는 폴리모프한 칼서스였다.

‘린에 오르가에 칼서스까지……. 얘들이 왜 한자리에 모여 있지?’

얘들 한자리에 모아 놓으면 전쟁 나지 않아? 왜 여기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거야?

‘아, 맞다. 나 때문이구나?’

내가 가일 손에 목이 졸리다가 기절해 버렸지, 참.

그래서 다들 날 걱정하느라 한마음 한뜻으로 여기 모여 있던 거구나.

내가 부상을 입고 쓰러졌으니까, 걱정스러워서…….

‘……잠깐, 그렇다는 건…….’

순간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주인공이 사고를 당하고 나면 꼭 기억 상실 같은 걸 겪지 않던가?’

그리고 기억 상실로 인해 당연한 사실을 기억 못 하고, 어리바리하게 구는 전개가 꽤 많았었지.

‘그래, 해일이 충격으로 기억을 잃고 무능력한 백수가 되었다고 하면 탈영으로 취급이 안 될 거야! 산재 처리해 줄 거라고!’

이번이 지나가면 다시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으리라!

나는 강한 확신을 품고 두통에 시달리는 척,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 머리가…….”

“다, 단장, 괜찮아?”

“……죄송하지만, 누구신데 저를 단장이라고 부르시는 거죠?”

내가 혼란스러워하며 되묻자, 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스러워했다. 그녀가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단장?”

“단장님, 괜찮으세요?”

“실례지만, 저랑 아는 사이이신가요……?”

그 말을 들은 린과 오르가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저 흔들리는 동공……. 내 연기가 잘 먹히고 있구나!’

자신감을 얻은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러분은 왜 여기에……. 아니, 그 전에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린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 단장…….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뒤를 이어서 오르가가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분노했다.

“젠장, 가일 그 자식 때문에……!”

정말 전형적인 <소설 속 엑스트라>처럼 말하는구나.

아주 바람직한 태도야.

연기가 먹히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나 의외로 연기에 소질이 있는 것 같……,

“크흑…….”

“흐아아앙…….”

“어, 어어?”

저기 얘들아, 왜 갑자기 우는 거야?!

나 아직 안 죽었어 얘들아!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왜 곡소리를 내냐고! 불길해 보이잖아!

내가 당황해서 쩔쩔매고 있자, 오르가가 훌쩍거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단장님. 저희가 단장님을 지켜 드리지 못했어요…….”

뭘 지켜?! 나를?! 나를 왜 지켜?! 니들이 뭔데?!

‘단장은 해일이잖아?! 근데 너희가 뭘 지켜, 인마!’

오르가에 이어, 이번에는 린이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가일 그 개자식의 목을 잘라 버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저렇게 청초한 얼굴로 저만큼 살벌한 대사를 뱉을 수 있다니. 린 멜리온, 얘 생각보다 무서운 캐릭터였구나.

나는 떨리는 입매를 감추기 위해 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어차피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인걸요. 너무 심려치 마세요.”

“으아아앙…….”

“크흐흑! 단장님!”

그러자 두 사람은 아예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어린아이처럼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단장님,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희가 지켜 드릴게요!”

“네!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저희가 꼭 단장님을 지켜 드릴게요!”

아니, 얘들아. 그럴 필요 없어.

내 인생은 칼서스 저 새끼 하나만으로도 벅차다고!

‘들러붙지 좀 마, 제발! 나 육아에 소질 없어! 칼서스 하나 돌보는 걸로도 내 인생이 빠듯해!’

나는 은근슬쩍 칼서스를 흘긋거리며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칼서스가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두 광신도의 품에서 나를 끄집어내었다.

칼서스는 두 사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양팔로 나를 감싸 안으며 질문을 던졌다.

“이름은 기억이 나나?”

“저, 그러니까, 해일……이었던 것 같은데…….”

“성씨는?”

“모르겠어요…….”

황망한 얼굴로 대답을 하자, 칼서스의 손이 위로하듯 내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전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다. 칼서스는 내 몸만 있으면 되니까 충분한 게 맞겠구나.’

내가 기억이 있든 없든 칼서스를 가이딩 해 줄 몸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칼서스 입장에서는 정말 ‘몸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어쩐지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칼서스가 관리해 주는 부동산이 아쉬운데, 저놈은 내가 살아만 있으면 아쉬울 게 없겠네.’

이렇게 들으니까 꼭 을과 갑이 뒤바뀐 느낌이라 뒤숭숭하잖아.

‘하지만 나는 칼서스의 부동산이 없어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지만, 칼서스는 내가 없으면 생존이 힘들어진다고.’

그러니까 내가 갑이고 칼서스가 을이어야 맞는 건데…….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내 계산은 완벽하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내가 조용히 고민하고 있자, 칼서스가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기억이 없어서 혼란스러울 테니, 간단한 설명을 해 주지.”

“헉, 맞다.”

“단장님에게 설명을 드려야 했는데, 너무 놀라서 잊어버리고 있었어.”

칼서스는 두 멍청이를 향해 ‘입 다물어’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인 뒤, 나를 보며 생긋 웃어 보였다. 제법 가증스러운 미소였다.

나른한 목소리가 운율을 타듯 조곤조곤 들려왔다.

“그대의 이름은 해일이고, 나의 이름은 칼서스 데포트.”

얼굴이 아름다운 미친놈이 말했다.

“그대는 나의 반려일세.”

그 말을 듣자마자 울화가 치밀었다.

‘이 새끼가 약을 팔아? 너 내가 만만하냐?’

다행히도 나만 울화가 치민 게 아니었다. 옆에서 같이 이야기를 듣던 린이 냅다 칼서스에게 쌍욕을 날렸다.

“이 미친 새끼가! 감히 그딴 망발을 지껄여?!”

옳지, 잘한다 린.

더 때려! 팩트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이 미친 도마뱀을 때려 주는 거야!

“단장은 연애에 관심이 없다고! 너랑 그런…… 그런 관계였을 리가 없잖아!”

기대하기 무섭게 그런 얄팍한 말로 변론을 시작하다니. 차라리 단장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컸겠다!

‘도움이 안 되는구나.’

나는 은은하게 해탈한 미소를 지으며 린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칼서스가 비릿하게 웃으며 주둥이를 털기 시작했다.

“청혼은 이쪽에서 받았다. 해일이 내게 ‘당신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다.’고 매달려 왔었어.”

헛소리하지 마, 이 사기꾼아.

그거 부동산 얘기였잖아.

누가 그걸 곧이곧대로 믿겠냐?

“단, 단장이…… 그랬을 리가…….”

……여기 있네.

린, 너는 왜 그 말에 넘어가고 있어? 척 들어도 개소리잖아!

‘시발, 대놓고 헛소리를 하고 있는데……. 내가 기억 상실인 척을 해야 하니까 저기에 반박할 수가 없네…….’

나는 일그러지려고 하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컨트롤하며 물었다.

“그, 그렇다는 건…… 혹시, 저희가 부부였다는…….”

“아, 혼인은 올리지 않았으니 공식적으로는 연인이었지.”

개소리하고 있네. 연인은 개뿔이. 본인이 가끔 키스하는 친구 사이라고 주절거렸으면서!

칼서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확실히 네게 청혼은 받았었어.”

“……제가요?”

이 새끼가 왜 자꾸 청혼 운운을 하는 거야.

너는 나 같은 거랑 결혼하고 싶냐?!

‘아니지, 어차피 나랑 살 비비고 살아야 하는 입장이니까……. 이 기회에 결혼을 명목으로 종신 계약을 하려는 건지도 몰라.’

확실히 살 비비고 살 거라면 친구보단 부부라고 부르는 편이 자연스럽긴 하겠지. 확실히 칼서스에겐 그게 최선으로 느껴졌을지도 몰라.

‘그래도 그렇지. 만난 지 한두 달쯤 된 용이랑 결혼하는 건 무리거든요.’

우리가 비록 키……, 키스를 하는 사이긴 하지만!

아직 한 침대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하진 않았잖니.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필요성도 못 느낀다고…….’

속이 울렁거리는 상상을 한 탓에, 최선을 다해 평온한 척을 하고 있던 표정이 구겨졌다. 그걸 본 칼서스가 손끝으로 구깃구깃해진 미간을 쓰다듬어 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네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는 평범한 친구 사이로 지내도 괜찮다. 네가 싫어할 만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

평범한 친구로 지내자고 하는 놈치고는 손가락이 좀 자유분방한데.

내 미간에 닿아 있는 이건 뭐야?

‘그리고 가이딩은 어쩌려고? 내가 스킨십이 싫다고 거부하면 못 닿을 텐데, 그건 걱정도 안 돼?’

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만에 하나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요?”

칼서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지. 이미 한 번 사랑해 본 사이이니, 이번엔 더 쉽게 사랑에 빠지게 될 거야.”

“우욱……. 큼큼. 캑캑캑.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기침이 다 나오네.”

……잘생긴 얼굴만 아니었으면 방금 한 대 쳐 줬을 텐데. 잘생겨서 봐줬다. 잘생겨서.

하지만 나는 참아도 저 녀석들이 참아 줄까?!

나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린과 오르가가 대놓고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우웩, 미쳤나 봐. 진짜 단장한테 빠져도 단단히 빠졌네.”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 담담하게 할 수가 있지? 늙으면 수치심도 없어지나?”

그렇다기보다는…….

갑이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기 위한 을의 처절한 사기극이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자존심 센 용이 이렇게 비굴하게 사기나 치고 있다는 점이 이상한데.’

혹시…… 아프기라도 한 건가?

안 그래도 새벽에 발작 같은 걸 일으켜서 그 난리를 쳤었는데, 거기다 가일이랑 싸우기까지 한 거잖아.

‘그럼…… 진짜 우울증이 심해져서 미쳐 버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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