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번견 (3)
내가 심란함에 바닥을 바라보고 끙끙거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시종이 방문을 노크하고는, 카일로스 백작이 나를 찾아왔다는 말을 전했다.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걸음 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를 들여보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내가 허락하자, 오르가가 직접 문고리를 잡고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 너머에는 허리가 꼿꼿한 반백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선 그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예를 표했다.
“의식이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저는 이 카일로스 백작저의 주인인 에르쉬 카일로스입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맞받으려 했으나, 곁에 서 있던 린이 내 어깨를 눌러 도로 자리에 앉혔다. 결국 나는 어정쩡하게 앉은 채로 카일로스 백작의 인사를 받았다.
“해일……입니다. 편하게 해일이라 불러 주세요.”
“제가 어찌 감히 트레클리프 공자님을 그리 부를 수 있겠습니까.”
카일로스 백작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정말로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오르가가 침착한 목소리로 백작을 설득했다.
“아버지, 단장님이 부상으로 기억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단장님이 편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해일 경이라고 불러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세상에.”
당황한 백작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그러면 예외적으로 해일 경이라고 호칭하도록 하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사회성을 끌어올려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자, 카일로스 백작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었다. 마주 보며 부드럽게 웃던 카일로스 백작이 손짓으로 칼서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이쪽 분은…….”
방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칼서스에게 모여들었다. 린과 오르가는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잠시 시선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 새……, 이분은!”
“그! 러니까, 단장님의…….”
“연인일세.”
“친구입니다!”
“친구예요!”
상반되는 설명에 카일로스 백작이 당황스러워했다.
“……어느 쪽의 말을 믿어야 하는 게냐.”
“친구입니다!”
“연인이라니까.”
“단장님의 기억이 날아갔는데 그걸 어떻게 믿어, 이 망할 도마뱀 자식아!”
결국 참지 못한 린이 삿대질을 하며 거친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칼서스는 과장되게 상처받은 표정을 짓더니, 힘없이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해일, 네 부하들이 나를 이렇게나 핍박하는데, 어찌 한마디도 하지 않을 수가 있어.”
“저, 저 뻔뻔한 새끼가!”
린이 달려들어 칼서스를 떼어 놓으려 하자, 뒤에서 오르가가 린을 잡아당기며 말렸다. 나는 약한 척 내 목덜미에 고개를 비비적거리는 칼서스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칭얼거리는 걸 보니까 진짜 많이 아픈 것 같은데? 가일이랑 싸우다가 다친 건 아니겠지?’
눈앞에 있는 칼서스가 많이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순식간에 마음이 약해졌다. 나는 우물쭈물 칼서스를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다.
칼서스는 내가 칭얼거림을 받아 줬다는 게 기뻤는지, 환하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단장님! 받아 주시면 안 됩니다!”
“맞아요! 사악한 계략이에요!”
린과 오르가는 세상이 망한 것처럼 경악하더니, 나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칼서스가 시무룩해졌잖아.”
“그게 다 약한 척이라니까요?!”
오르가가 답답해하며 자신의 가슴을 퍽퍽 소리가 나게 두들겼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꼭 북을 치는 소리 같았다.
‘고릴라는 가슴을 쳤을 때 나는 소리로 서열을 정한다더니, 오르가는 고릴라였던 걸까?’
광대버섯 먹은 멧돼지처럼 소리를 지르는 린과, 고릴라처럼 가슴을 쳐 대는 오르가라니.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짐승 같을 수가…….
‘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사람처럼 말해야지……. 보기 추하다 얘들아…….’
나는 사람답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한 척을 하는 데에도 이유라는 게 있을 수 있잖아. 논쟁을 피하고 싶어서 약한 척을 하는 사람도 있고, 싸움이 싫어서 약한 척을 하는 사람도 있어. 그건 방어 기제이지 계략 같은 게 아니야.”
그 말을 들은 린이 이마를 짚었다. 나는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생긋 미소를 지어 주며 말했다.
“그리고 연인이라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도 이 정도는 괜찮잖아? 고작 어깨동무 정도인걸.”
“단장니임!”
“사람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죠! 저 새끼는 사기꾼이라니까요?!”
얘들아. 적당히 하고 사람답게 말을 하렴.
목소리가 크다고 이기는 게 아니란다.
이제는 저런 놈들을 부하로 데리고 있어야 하는 스스로가 측은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둘을 가볍게 혼냈다.
“이제 그만 하자. 백작님이 당황스러워하시겠다.”
그 말에 린과 오르가의 입이 동시에 다물렸다. 나는 그 틈을 타 카일로스 백작에게 사과를 건넸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아, 아니요. 그건 못난 아들을 둔 제가 할 말입니다.”
백작은 당황스러운 것처럼 손사래를 치더니, 곧 주먹을 들어 제 아들의 머리통을 강하게 후려갈겼다.
경쾌한 빡 소리가 방을 울렸다.
“악!”
“약혼자가 보고 있는데 계속 채신머리없게 굴 테냐!”
“저만 채신머리없게 군 게 아니잖아요!”
“이게 버릇없이 감히 언성을 높여!”
백작의 주먹이 한 번 더 오르가의 뒤통수를 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약혼자……?”
“저를 말하는 거예요.”
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멜리온 후작가와 카일로스 백작가는 대대로 교류가 많았거든요. 같은 남부 귀족이기도 하고, 광산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점도 비슷해서요.”
아, 그러고 보니 린 또한 귀족 가문의 영애였지.
비록 어머니가 엘프 혼혈인지라 사교계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지만, 멜리온 후작이 특별히 아끼는 딸이라는 서술이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둘이 약혼자라는 내용은 원작에선 언급이 안 됐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린이 슬쩍 고개를 숙여 귓속말을 해 주었다.
“단장님이 실종된 이후로 계속 저러셨어요. 부단장이었던 제가 단장직으로 올라가면 준백작의 작위를 받을 테니까요.”
“아…….”
가주는 한 명뿐이다.
쉽게 말하면 가문의 대를 이어 귀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자식들 중 한 명뿐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오르가는 장남이 아니기에 귀족 작위를 이어받을 수 없다. 즉, 장남이 가문을 이어받은 뒤에는 ‘백작 영식’으로서 영위하던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장이나 부단장은 예외적으로 <준귀족>으로서 영지를 하사받게 되지.’
자식에게 영지를 물려줄 수는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귀족으로 취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해일의 뒤를 이어서 린이 단장이 되면, 린은 준백작이 될 거야.’
그런 린과 오르가가 결혼을 한다면 그는 오르가 카일로스가 아니라 ‘오르가 멜리온’이 된다.
‘혼인 후, 법적으로 계급이 높은 쪽의 성씨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지.’
이 경우 ‘백작 영식’인 오르가보다 ‘린 멜리온 준백작’이 더 계급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오르가가 <멜리온 백작 부군>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된다면 가문의 권세가 커지겠네. 카일로스 백작이 제법 여우 같은 짓을 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혼담은 어려서부터 오간 건가?”
“아니요. 그냥 아버지와 백작님이 젊으셨을 적에 농담으로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을 뿐이에요.”
린은 고개를 숙여 장난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아버지는 카일로스 백작가를 뒷배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계세요.”
“확실히 그렇겠네. 사돈지간이 되면 가문 간의 결속이 단단해질 테니까.”
“그렇죠. 그래서 남매처럼 자란 저랑 오르가만 곤혹스러운 상황이에요.”
나는 멋쩍다는 듯 웃는 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기 있으면 불편해질 걸 알고 있었을 텐데, 나를 왜 여기로 데려왔어? 다른 마땅한 곳이 없었던 거야?”
“……기억 안 나시겠지만, 트레클리프 가의 영향력은 막강해요. 개국 공신의 공작 가문인데다, 황제의 외척이기도 하고, 동시에 전쟁 영웅이 가주인 가문이기도 하잖아요.”
이렇게 들으니까 새삼 해일의 혈통이 대단하게 느껴지네.
전쟁 영웅에, 개국 공신에, 황실의 외척이라니.
“카일로스 백작님이 제게 호의적이시기도 하고, 카일로스 영지가 변방에 있기도 해서……. 가장 오래 단장님의 존재를 숨겨 줄 수 있는 가문이 카일로스 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불편을 감수한 거구나.”
린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트레클리프 가문이 압박을 넣는다면 금방 들킬 거예요. 그때는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막막해하는 린을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다음에 벌어질 일은 벌어진 다음에 생각하면 돼. 너무 초조해할 필요 없어. 그럴수록 도리어 생각이 좁아질 수 있으니, 거꾸로 느긋하게 생각해 보자.”
그러자 린이 뺨을 발갛게 붉히며 ‘헤헤’ 하고 웃었다. 싱그러운 청춘의 풋풋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린이 수줍어하며 무어라고 한마디 더 하려는 순간이었다. 카일로스 백작이 방정스러운 말투로 린을 불렀다.
“린, 우리 예쁜 며늘아가! 먹고 싶은 것은 없더냐?”
“아버지! 그만 좀 하세요!”
“넌 빠져 있어라!”
“린이 부담스러워한다고요!”
오르가가 시커먼 낯빛으로 카일로스 백작을 붙들고 늘어졌다. 린은 그 모습이 우스웠던 건지, 뒤를 돌아보더니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정상인이 한 명 줄었구나. 카일로스 백작도 미쳤어.’
나는 부처처럼 은은하게 웃으며 시끌벅적한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즈음, 내 어깨에 기대어 있던 칼서스에게서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려 칼서스를 확인했다.
칼서스의 낯빛이 평소보다 조금 어두웠다.
‘그러고 보니까…… 피부가 닿아 있는데도 아무런 불쾌감이 없잖아?’
기분이 나빠지지도 않고, 눈물이 나오지도 않는다니.
꼭 가이딩이 안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칼서스한테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