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번견 (4)
카일로스 백작과 오르가가 연신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 대자, 린은 ‘단장님의 휴식에 방해가 되겠다’며 오르가를 걷어차 방 밖으로 쫓아내었다.
“단장이 나을 때까지 올 생각도 하지 마!”
“나, 나보다 네가 더 소란스럽게 굴었잖아!”
“나도 나갈 거야! 네가 먼저 나가는 것뿐이거든?!”
그렇게 말한 린은 고개를 돌리더니, 이글이글한 눈으로 카일로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님.”
“…….”
카일로스 백작은 미래의 며느리에게 미운털이 박히고 싶지 않았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제 발로 방을 벗어났다.
“정말, 오르가 저 자식…… 철이 덜 들어서 저러나…….”
“하하…….”
린이 뒤돌아 나와 눈을 맞추더니,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멋대로 흥분해서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니 괜찮아. 너도 이만 가서 쉬어. 나는 칼서스랑 있을게.”
“…….”
린이 칼서스를 한 번 노려보고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저 도마뱀이랑 둘이 계셔도 괜찮겠어요?”
“응. 괜찮아.”
칼서스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내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린은 칼서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못 말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드디어 둘만 남았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칼서스를 가이딩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칼서스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이젠 물어봐도 괜찮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기억을 잃은 척을 해야 하니,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지만……. 적당히 유도 신문을 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생각이 정리되자마자 칼서스를 불렀다.
“저, 칼서스.”
“음?”
죽은 듯 내 어깨에 기대어 있던 칼서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칼서스는 인간이 아니신 거죠? 엘프……이신가요?”
“아아.”
칼서스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데포트 산맥의 주인이었던 용이다. 용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는 게 있나?”
“딱히…….”
“둥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어요.”
이 새끼, 왜 자꾸 다른 말만 해?! 그냥 똑바로 말하면 될 것이지!
우리가 가이딩 때문에 평생 동거해야 하는 입장이 된 거라고 왜 속 시원하게 말을 못 하니!
나는 갑갑한 마음에 바로 대화의 노선을 틀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린에게 묻는다는 걸 잊었는데…… 제가 왜 여기로 오게 된 거죠? 제가 왜 숨어야 하는 입장이 된 건가요?”
“인간들이 우리가 지내던 둥지를 습격했기 때문이지. 참고로 인간은 용이라는 종족을 증오한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럼 저는요?”
“…….”
“저도 인간이잖아요.”
질문을 받은 칼서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너는 제외다. 너는 나를 이해하려 해 주었지. 그게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이유야.”
“…….”
……저번에도 눈치가 없다는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이쯤 눈치를 줬으면 적당히 알아먹어야 하는 것 아닐까?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갑갑하게 굴지 말고 가이딩 얘기를 좀 해 달라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했다.
‘이상하게 감정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면 벽을 치는 것 같단 말이지……. 아직 내가 편하지 않은 건가?’
하긴, 만난 지 한 달 언저리밖에 되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속내를 털어놓겠는가. 이 정도 경계심을 유지하고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병을 숨기는 태도는 내키지 않는단 말이야…….’
짜증이 난 탓에 표정이 굳자, 칼서스가 쩔쩔매기 시작했다.
“……내가 뭔가를 실수한 건가? 네가 불편해질 이야기를 했어?”
“그 반대에요.”
“음?”
나는 칼서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이야기가 너무 두루뭉술해요.”
“…….”
“불편한 부분을 피해 가려고 하는 것처럼 대략적으로만 말씀하고 계셔서, 도리어 제가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칼서스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나는 잠시 칼서스의 표정을 살피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어르기 시작했다.
“그냥 있는 대로 말해 주세요. 저랑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반했고, 왜 함께 살게 되었는지. 그 모든 일들을 들려 달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나는 정말로 연인을 대하는 사람처럼 달콤한 웃음을 꾸며 내었다. 물론 칼서스처럼 잘생긴 사람이 보기엔 오징어나 나나 거기서 거기일 테지만. 어쨌든 우는 얼굴보단 웃는 얼굴이 낫겠지.
“연인이었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사소한 것들까지 다 말해 주세요.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당신이 어떤 용이었는지.”
“……좋지 않은 동기로 만나서, 설명하기 조금 껄끄럽다. 네가 죄책감을 가질 수도 있어.”
“그걸 제가 몰라서 묻는 것 같아요?”
나는 칼서스의 손등 위에 내 손을 조심스럽게 얹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걸 딛고 연인이 된 거잖아요.”
“…….”
“안 그래요?”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도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칼서스가 힘이 빠진 사람처럼 맥없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생각한 거지만, 너는 참 특이하군.”
칼서스의 양손이 느릿하게 움직여 내 양손을 쥐었다. 한없이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직설적이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워. 그리고 단단하면서도 무르지.”
“네?”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한없이 다정해지는 네게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칼서스는 그 말을 내뱉더니, 내 손바닥을 당겨 와 자신의 뺨을 감싸 쥐게 했다. 그리고 그 손 위로 다시 칼서스의 손이 덮였다.
‘이런 자세…… 좀, 민망한데…….’
민망해진 내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자, 칼서스가 엷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바라는 대로 설명하기 전에…….”
“…….”
“너와 키스하고 싶어.”
……기억 돌아오기 전까진 친구로 지내자며? 결심한 지 30분 만에 전언 철회야?
나는 황당함에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가이딩이 급했나 보네.’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려고 했는데, 힘들어서 안 되겠나 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무릎걸음으로 칼서스에게 성큼 다가갔다.
‘역시 아픈 사람 방치하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아…….’
그리고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와 입술을 겹쳤다. 곧 입술이 열리고, 잇새로 혀가 파고들어 질척하게 얽혔다.
그 순간 나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읏, 응…….”
혀가 입 천장을 훑고 지나가자 등줄기가 저릿해졌고, 칼서스가 내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 당기자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부드럽게 입 안을 휘젓는 감각에 발끝이 오므라들기까지 했다.
‘전혀 불쾌하지 않잖아.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좀 좋은데?’
가이딩이 가져다주던 불쾌함 대신 부드럽게 가슴을 달구는 것은 선명한 쾌감이었다. 타액으로 젖은 혀가 얽히며 들리는 질척한 소리에 얼굴로 열이 몰렸다.
‘이거, 가이딩이 아니라, 그냥 키스 아닌가……?’
칼서스와 손을 잡거나, 포옹하거나, 키스를 하면 자연스럽게 가이딩이 되는 게 아니었던 거야?
‘손도 잡았고, 포옹도 했고, 키스도 하고 있잖아. 그런데 왜 가이딩이 안 되는 거지?’
당황스러움에 칼서스의 키스를 피해 고개를 돌리자, 타액으로 촉촉해진 입술이 드러난 목덜미를 훑었다.
“잠깐, 이건…….”
“키스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이건 키스가 아니, 잖…….”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칼서스의 입술이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다시금 타액이 얽히고 혀를 빨아 당기는 난잡한 소리가 울렸다.
‘칼서스, 이 새끼야! 잠깐만 기다려 봐, 가이딩이 안 되고 있잖아! 그런데 왜 계속 키스하는 거야!’
나는 다시금 그의 키스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칼서스의 입술이 목덜미로 향했다.
“하아, 아……. 칼서스, 잠시만……. 정말 잠깐만…….”
게다가 이번에는 셔츠 자락 아래로 칼서스의 손이 파고들었다. 크고 따듯한 손이 배를 타고 올라가 갈비뼈의 볼록한 굴곡을 손끝으로 훑었다.
그 간지러운 애무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읏, 잠깐……. 안 돼…….”
태어나 처음 겪는 자극에 어깨를 떨며 중얼거린 때였다. 닫혀 있던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단장님, 카일로스 백작님께서 저녁 만찬에 단장님을…….”
“…….”
“모셔…….”
그리고 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는 민망함에 작은 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게,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난 그 말을 남긴 뒤 도롱이 벌레처럼 몸에 이불을 둘둘 말고 침대 구석에 웅크려 앉았다. 제자리에 앉아 있던 칼서스가 ‘쯧’ 소리가 나게 혀를 차더니 중얼거렸다.
“기막힐 정도로 때를 잘 잡아서 오는구나. 노크하는 법도 모르는 게냐?”
“……이, 이, 이!”
놀라서 굳어 있던 린이 순식간에 언성을 높이며 침대 위로 달려들었다.
“이 짐승 새끼! 잡아다가 도마뱀 통구이로 만들어 버릴 거야!!”
“할 수 있다면 해 보시지.”
“당장 꺼져! 이 성에서 나가!!”
린은 거의 광기에 차서 칼서스를 향해 마구 주먹을 날려 댔다.
나는 이불 아래에 숨어 떠들썩한 욕설을 듣다가, 수치스러움에 앓는 소리를 터트렸다.
‘내 존엄이 아스팔트에 눌어붙은 껌처럼 납작해졌어…….’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날아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