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22화 (22/101)

22.

죽여도 내가 죽여 (2)

“……알고 있었어요?”

“세계수와 용의 관계이니, 네가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건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허탈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칼서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가일의 손에 죽을 뻔한 뒤에 기억을 잃은 척을 했다. 이건 응당 지금의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뜻이 아니던가? 나는 너를 이해해 주고 싶었다.”

“…….”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또 다른 질문을 꺼내 들었다.

“……가이딩이 안 된 것도 칼서스 때문이에요?”

“그래.”

칼서스는 담담히 설명했다.

“가이딩은 하는 쪽과 받는 쪽, 모두가 합의해야 이루어지는 행위다. 비윤리적인 착취를 막기 위해 있는 기능이지.”

“…….”

“인간이 세계수의 수액을 이용해서 온갖 엘릭서를 만들어 보았지만, 결국 쓸 만한 물건은 만들지 못한 이유이기도 해.”

칼서스의 손끝이 부드럽게 내 뺨에 닿았다. 이 손길 또한,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네가 기억을 잃은 행세를 하면서, 동시에 나를 가이딩 하려 하는 모습이 귀여운 나머지……. 본의 아니게 모른 체를 해 버렸구나.”

하지만 그의 다정함은 내게 모멸감을 안겨 줄 뿐이었다. 나는 터지기 직전의 둑처럼, 잔뜩 울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재미있었어요?”

“해일?”

“당신이 죽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이, 진짜 재미있게 느껴졌냐고요.”

눈매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당황한 칼서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찬 물기 때문에 번져 보였다.

“키스를 하자고 해도 알겠다고 하고, 섹스를 하자고 해도 알겠다고 하니까, 내가 편리하게 느껴졌어요?”

“그런 의도가…….”

“나는 당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는데…….”

결국, 눈가에 차오른 물기가 방울이 되어 뚝 떨어졌다.

“당신은 그게 재미있었다는 거네요.”

가슴을 가득 메운 두려움이 순식간에 배신감으로 뒤바뀌었다. 나는 격양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원망이 가득 찬 말을 쏟아 내었다.

“내가 그깟 키스라고 하니까 정말 그게 하찮은 거로 느껴졌어요?”

“해일, 그런 생각으로 거짓말을 한 게 아니야.”

“내가 나보다 당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그게 좋았다고. 내가 전전긍긍하는 꼴이 보기 좋았다고! 방금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양 뺨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물기 어린 시선으로 칼서스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아픈 걸 빌미 삼아서 날 이용하니까 재미있었어요?”

“…….”

“어떻게 걱정하는 마음을 그딴 식으로 돌려줄 수가 있어……. 내가 아무리 태연자약해 보여도, 나도 사람이란 말이에요. 사람이니까 상처받는단 말이야…….”

짓씹듯 내뱉은 말에 칼서스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그런 칼서스를 밀쳐 버리고,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든 도망가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곧장 칼서스가 달려와 나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횡설수설 사과를 늘어놓았다.

“해일, 잠깐만 기다려 줘. 내가 잘못했다. 사과하고 싶어. 가지 마. 나는 정말 네가…….”

“꺼져! 내 몸에 손대지 마!”

내가 발작을 하듯 비명을 내지르며 거부하자, 칼서스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내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

“…….”

물러난 그의 표정에는 죄책감과 절망이 뒤엉켜 있었다.

나는 그런 칼서스를 노려보며 씨근덕거리다가, 아무 말 없이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단장님?”

“어? 그 망할 도마뱀은 어디 가고 혼자 돌아오십니까?”

예이트가 살갑게 다가오다가, 내 표정을 확인하고는 당황해 제자리에 굳어 들었다.

“다, 단장님?”

살얼음이 내린 듯,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이는 얼굴. 방긋거리며 웃던 평소의 나와는 전혀 다른 얼굴일 터였다.

“생각이 바뀌었어.”

나는 지나치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트레클리프 가로 돌아갈래.”

“단장님?!”

“갑자기 왜 그런 결론이 나오신 거예요?!”

나는 손등으로 입술을 억세게 문질러 닦으며 중얼거렸다.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게 생겼거든.”

* * *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나는 마차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마차는 트레클리프 가에서 카일로스 가로 보내온 마차였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가일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빡쳤다고 아주 정신줄을 놨지…….”

나는 허탈해하며 이전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기억 속의 린이 비명을 내질렀다.

-단장님, 거기 가면 정말로 돌아가실지도 몰라요!

-진짜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단장님!

-나보다는 너희 스스로에 대한 걱정을 하려무나. 내가 단장직에 복귀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희는 복귀를 해야 하잖니.

나는 린의 등을 도닥여 준 뒤, 예이트를 보며 말했다.

-탈영은 중죄야. 내 부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대고 돌아가면 어떻게든 무마가 되겠지만……. 이대로 계속 돌아가지 않으면 너희까지 죽게 될 거야.

-하지만 단장님…….

-그리고, 이 일엔 카일로스 백작님도 연루되어 있잖아.

-…….

그 말을 내뱉자마자 오르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백작님이 탈영을 도왔다는 이유로 문책을 당하실 수도 있어, 너는 그래도 괜찮니?

오르가가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다정한 표정으로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우선, 지켜야 할 사람부터 지키자.

……개새끼, 빡쳐서 머리가 하얗게 비었는데도 주둥이 하나는 잘 놀렸구나.

정말로 논리적이고 그럴듯하면서 상대방의 약점을 확실하게 후비는 말만 골라서 내뱉었어.

“책임질 능력도 없는 새끼가…….”

이래서 사람은 주제 파악이라는 걸 잘해야 한다. 칼서스와의 관계에서야 내가 갑이지,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갑인 게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칼서스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가이딩을 받지 못하는 데다, 마땅한 둥지도 없는 상태일 텐데. 정말…… 칼서스가 죽게 될까?

“……모르겠다. 죽어도 내가 먼저 죽겠지.”

죽기 싫어서 힘껏 발버둥 쳤던 건데…….

결국 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떠안은 꼴이 됐네.

‘정말 그냥 죽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그 생각이 든 직후, 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들어 스스로의 머리를 힘껏 후려쳤다.

“이, 이! 미쳤나 이게!”

얻어맞은 머리가 얼얼하게 아파 왔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스스로의 머리를 한 대 더 후려쳤다.

‘우울증이 옮았구나! 망할!’

아니, 하지만 우울하지 않을 수가 없는 환경이잖아!

가일은 아들인 해일을 죽이려고 하지, 친구라는 놈은 날 자위 도구로 썼지…….

심지어 지금 트레클리프 가로 돌아가고 있기까지 하잖아?

‘이런 와중에 안 우울하면 그게 사람이냐? 생불이지?!’

막막하기만 한 상황에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돌아가면…… 가일은 이번에도 날 미끼로 삼으려 하겠지.”

혹은 나의 죽음으로 칼서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권능을 남발하도록 유도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권능을 사용해서 마나 하트가 약해진 칼서스는…….’

……죽겠지.

가일에게 죽임당하거나, 아니면 병사하거나. 둘 중 하나의 이유로.

죽지 않는 선택지는 없을 것이다. 세계수를 대신해서 칼서스를 가이딩 하던 내가 죽으면, 칼서스도 함께 죽는 거나 마찬가지…….

“……누구 맘대로?!”

죽여? 감히?

가일이?

칼서스를?!

‘아무리 내가 칼서스한테 개지랄을 떨고 오는 길이라지만, 그건 아니지.’

걔는…… 걔는 죽으면 안 돼!

안 그래도 인간들한테 핍박받고 평생을 숨어 산 놈인데, 이렇게 어이없게 죽게 둘 순 없잖아!

애초에 내가 칼서스에게 화를 낸 것조차, 칼서스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가이딩을 받지 못하면 쇠약해지니까. 그런 주제에 내 가이딩을 거절했으니까. 나는 그래서 걱정과 배신감에 화가 났던 것이지, 칼서스라는 존재 자체를 미워한 게 아니었다.

‘죽으려면 가일이 죽어야지, 걔가 왜 죽어!’

……일단 나랑은 싸웠지만!

싸운 건 싸운 거고, 걔가 객관적으로 불쌍한 놈인 건 불쌍한 놈인 거야.

‘잘못한 부분은 나중에 사과받고 개선해 나가면 돼. 지금 당장 화가 나서 얼굴을 보기 싫어졌다면, 시간을 들여서 감정을 정리할 수도 있어. 정 맞지 않는다면 절연을 하는 수도 있잖아.’

하지만 감정을 털어놓기도 전에 상대방이 죽어 버린다면, 용서받을 기회도, 용서할 기회도 더는 얻을 수 없다.

죽은 사람은 영영 돌아오지 않으니까.

“…….”

나는 언제나 죽음의 한 걸음 뒤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나보다 한 발짝 먼저 사라져 간 사람들을 숱하게 보아 온 존재이기도 하다.

원래 병원이란 그런 공간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건 우선순위를 구분하는 것뿐이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딴 놈이 죽이게 안 둬.”

갑인 내가 시퍼렇게 두 눈 뜨고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내 을한테 손을 대?

“죽여도 내가 죽이고야 말지, 다른 놈 손에 뒈지는 꼴은 못 봐.”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 속으로 침잠해 갔다. 가일에게는 엿을 먹이고, 칼서스의 목숨은 부지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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