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죽여도 내가 죽여 (3)
트레클리프 가의 집무실 안.
연로하여 머리가 하얗게 센 집사에게 보고를 받던 가일의 표정이 기묘하게 구겨졌다. 가일이 황당해하며 중얼거렸다.
“해일이 돌아왔는데, 기억이 사라진 채라고?”
“네, 그, 공자님께서 굉장히…….”
“굉장히?”
잠시 머뭇거리던 집사, 칼렌이 멋쩍어하며 입을 열었다.
“……귀엽게 변하셨습니다.”
“……귀여워?”
가일이 제가 들은 걸 의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를 손가락으로 거칠게 후벼 보았다. 그러고는 떫은 어조로 집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칼렌, 그대 혹시 남색에 취미가 있었나?”
“가주님, 제가 애 딸린 자식이 둘입니다! 어찌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집사가 억울해하자, 가일이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가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입을 다물라’는 제스처였다. 명령을 들은 집사는 억울해하면서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가일이 재차 질문했다.
“그럼 대체 왜 그 자식이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단 말이냐.”
“그것이…….”
집사가 말로 하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정원 쪽을 손짓했다. 가일이 의아해하며 창문을 곁눈질했다.
“정원? 갑자기 정원을 왜…….”
꽃이 만발한 초여름의 정원 한가운데, 아름다운 금발의 미인이 서 있었다. 금사로 수를 놓은 듯한 머리칼 아래로, 흰 피부와 가을 하늘 같은 파란 눈동자가 생기를 머금고 찬란하게 빛이 났다. 그 금발의 미인은 당연하게도 해일이었다.
해일은 정원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며 포근하고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집사가 탄성을 터트렸다.
“햐……, 정말 귀엽지 않습니까?”
가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같잖은 소리 말고 가서 일이나 하게. 곧 하반기라 준비할 것들이 많잖나.”
“알겠습니다…….”
두 번이나 꾸중을 들은 집사는 잔뜩 기가 죽어서는, 발을 끌며 가일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가일은 조용해진 방을 확인하고 다시 창문을 흘긋거렸다. 해일은 여전히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나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하기야, 기억이 있으면 이 가문으로 돌아올 리가 없지.’
가일이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탈영을 빌미로 사형 집행일을 얻어 내서 용을 꾀어내려 했거늘…….”
곰 발바닥처럼 두껍고 우악스러워 보이는 손가락이 붉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변절자 놈들을 치워 버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군.”
그러자 못마땅함에 잔뜩 구겨진 표정이 드러났다.
“안 그래도 폐하께 쓸데없는 보고까지 들어간 탓에 손을 쓰기가 어려웠는데……. 계획이 더 꼬여 버렸어.”
가일 자신이 저놈을 죽이려 했다는 보고만 올라가지 않았어도, 저놈들이 탈영한 바로 그날 수배령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마탑 쪽에서 자신의 행동을 황실에 보고한 탓에 수배령은커녕, 오히려 이쪽이 봉급 삭감이라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놈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다른 대책을 강구해 봐야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가일이 다시 만년필을 쥐고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 * *
팔랑팔랑 날아온 하얀 나비가 어깨 위에 앉자마자, 포근한 미소를 짓고 있던 해일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내 저렇게 나올 줄 알았다. 복귀하지 않으면 진짜로 린이랑 오르가를 죽일 셈이었구나.’
흔히 몸을 쓰는 기사라고 하면, 대체로 힘센 바보 이미지를 연상하지만…….
가일은 힘만 센 멍청이가 아니라, 속에 구렁이가 들어찬 호랑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꼬투리가 잡혀 뿌리 끝까지 털리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린이나 오르가에게는 트레클리프 가를 상대할 비전이 없으니까.’
그래서 죽는 걸 감수하고 귀환을 택했던 것이다.
가문이 씨몰살 당하는 것보다야 사람 한 명분의 목숨이 날아가는 게 낫지 않던가. 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판단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그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라고 생각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잔인한 새끼 같으니…….’
내가 ‘마냥 우악스러워 보여도 가일은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였다.’라는 대목과 ‘도청용 정령도 있는걸요.’라는 대사까지 기억하는 오타쿠가 아니었다면 방금의 중얼거림을 들을 수 없었겠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령에게 속삭였다.
“수고했어, 포엠. 린에게 돌아가도 돼.”
[주인에게 갈게. 인간, 몸조심해.]
“고마워. 푹 쉬어.”
그렇게 말하자 하얀 나비가 수증기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진 정령이 있던 자리를 응시하던 나는 곧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린이 칼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했지.’
가일은 그걸 빌미 삼아 ‘용과 결탁한 배신자’라며 우리를 모조리 사형대에 올려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를 탈환해 오라는 황명을 어긴 건 가일이야.’
그러니 지금의 최선은, 린과 오르가가…….
‘용과 손을 잡은 건 위독한 단장님을 구하기 위한 한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단장님을 구출해 낸 뒤엔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용과 필요 이상의 거래를 한 적은 없습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뿐이다.
‘기억을 잃은 척을 한 게 생각지도 않게 좋은 쪽으로 작용을 했네. 앞으로도 계속 백치인 척을 해야겠어.’
그렇게까지 해야지만 ‘부하들을 구하려다가 아버지에게 공격당해 기억을 잃은 불쌍한 사람’이 될 테니까. 나를 가여워하는 시선이 나와 부하들을 보호해 줄 동안, 가일을 일선에서 끌어내릴 능력이 있는 귀족을 찾아보는 게 최선이다.
나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찾을 수 있을까?’
……없으면 어쩔 거야. 안 돼도 되게 해야지.
내가 못 하겠다고 발을 뺀 순간 줄줄이 소시지처럼 가문 두 개랑 용 하나가 엮여서 망할 판인데. 내가 해내야지, 포기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지금은 나한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감정이 정돈되지 않은 채로 대화하는 것보다는, 우선 눈앞의 방해물을 치워 놓은 다음 느긋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낫겠지.
‘그래, 지금은 웃자.’
미친 척 웃으면서 시간을 벌자.
칼서스가 안전한 둥지를 마련할 만큼의 시간을 벌자.
그게 갑으로써 을을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 * *
코끝에서 느껴지는 향기가 쓰고 매캐하다. 꼭 찻잎을 불에 태우는 것 같은 불쾌한 향기였다. 칼서스는 손아귀에 쥔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으며 생각했다.
‘용들은 미각과 후각이 상당히 둔하다. 세계수를 제외한 나머지 존재에게는 자극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지.’
당장 입에 부어 넣고 있는 술과 물을 맛으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둔탁하다. 때문에 용들은 액체를 삼킬 때, 식도에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그것이 술인지, 물인지를 구분했다.
‘술도 두어 병쯤 마시면 몇 분 정도는 취기가 오르니 마시는 것뿐이지.’
그러니 지금 맡아지는 이 강렬한 향기는 해일의 것이 분명했다. 칼서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씁쓸한 향기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매캐한 향기는 절망과 슬픔을 나타낸다.’
심장이 죄어드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몸은 무사한 모양인데…….
‘……감정적으로는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인가 보군.’
대체 왜 이렇게까지 불안해하고 있는 거지?
혹시 몸만 무사할 뿐, 살해 협박 따위에 시달리고 있는 건가?
그 생각을 한 직후, 칼서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당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는데…….
-내가 아무리 태연자약해 보여도, 나도 사람이란 말이에요. 사람이니까 상처받는단 말이야…….
“…….”
구겨져 있던 미간이 점차 펴지며 평소의 표정이 드러났다. 칼서스가 입을 꾹 다물며 머리를 굴렸다.
‘설마…… 지금도 내가 가이딩을 받지 못해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가능성은 있다.
애당초 해일이 내게 실망한 것도, 가이딩을 빙자해서 사심을 채웠기 때문이다. 정리해 보자면, 그가 나라는 존재에게 애정을 가졌기에 걱정을 했고, 걱정을 했기에 그 말에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칼서스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해일이 왜 화를 냈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군…….”
해일은 타인의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게 먼저 ‘왜 가이딩을 요구하지 않느냐’고 물어 온 것도, 기다리겠다고 말한 내게 먼저 키스한 것도.
전부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행동에서 기인되었던 것이다.
‘나를 줄곧 걱정했구나.’
그의 시선 속에서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나 다름없었을 터.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그 불안감을 이용해 해일의 마음을 확인하려 들었다.
‘그것도 고작…… 해일이 내게 어디까지 허락해 줄지 궁금하다는 생각에…….’
그걸 자각하자 취기가 오르는 것처럼 귀와 뺨이 점점 달아올랐다. 해일은 생각 이상으로, 아니…… 어쩌면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좋아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해일…….”
내뱉는 숨이 뜨겁다. 이마가 달아올라 뇌가 녹을 것만 같았다.
“……다정한 네가 좋았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햇살 같은 온기에, 차갑게 얼어붙었던 마음이 너무나도 빠르게 녹아내려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를 불안하게 만들었구나.
‘주제넘게 다시 나를 아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 너는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내가 너를 지키는 것만큼은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하고 싶다.
내가 받았던 애정을, 나를 녹인 온기를 네게 돌려주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