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공평한 기회 (1)
가이딩이 끝나고, 완전히 녹초가 된 나는 소파 위에 드러누워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줄곧 고민해 왔던 문제가 해결된 탓인지, 탈력감이 느껴져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흐리멍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걱정됐어도 그렇지, 이렇게 무책임하게 쳐들어오면 어떡해요…….”
그러자 칼서스가 웃으며 다가와 소파의 아래쪽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게 너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
“그렇긴 하지만…….”
칼서스는 늘어져 있는 내 어깨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온몸으로 아양을 떨었다. 그 꼴을 보고 있으려니 차마 혼을 낼 수가 없어졌다.
나는 옆으로 돌아누워 칼서스와 눈을 맞췄다.
“폴리모프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권능을 얼마나 사용했어요? 방금 키스한 걸로 다 해소된 거예요?”
“대략…… 반 정도는 해소된 것 같다. 그렇다곤 해도 너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꽤 나아진 상태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야 솔직하게 말해 주는구나.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손끝으로 칼서스의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그래요. 앞으로는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걸로…….”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며 외쳤다.
“아, 가이딩! 물어보고 싶었던 거 있어요!”
“……뭐지?”
“권능을 한 번 쓰고 나면 가이딩을 얼마나 해야 마나 하트가 안정되는 거예요?!”
칼서스가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네가 얼마나 허락해 주느냐에 따라 다르지.”
“허락?”
“손을 잡는 걸로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안정되지만, 입을 맞춘다면 회복 속도가 제법 빠르다.”
“그래서 매번 키스하자고 덤벼든 거예요?”
“큭큭, 그래.”
칼서스는 키득거리며 손을 뻗어 내 허벅지를 가볍게 매만졌다. 곧 그의 손가락이 스멀스멀 허벅지 안쪽으로 다가왔다.
“네가 조금 더 ‘깊은 곳’도 허락해 준다면…… 더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깊은…… 곳? 깊은 곳이 어디인데?
……거기?!
나는 경악하며 칼서스의 어깨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징그럽게! 친구 사이에 그걸 어떻게 해요!”
“…….”
“어휴, 소름 돋아.”
나한테 한 대 얻어맞은 칼서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이내 잘생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심각하게 불만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해일.”
“왜요?”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그런 식으로 걷어차는 게 그대의 취미인가?”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다.”
칼서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후추처럼 알싸한 향기가 퐁퐁 흘러나왔다. 짜증이 났다는 뜻이었다.
“왜 그렇게 짜증이 났어요?”
“아무것도 아니다.”
“짜증 난 거 뻔히 느껴지는데 거짓말하기는. 아 왜 그러는데요?”
“흥.”
칼서스는 코웃음 칠 뿐, 내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갑갑해진 나는 칼서스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채근했다.
“나한테 뭐 숨기지 말라니까요?”
“못 알아들은 그대 탓이야.”
말을 안 해 주는데 내가 자세한 속사정을 어떻게 아냐고! 황당해진 나는 칼서스를 붙잡고 흔들며 화를 냈다.
“그게 왜 내 탓이…… 우읍, 응……!”
그러자 칼서스가 다시금 제 주둥이로 내 입을 틀어막고 쪽쪽거리기 시작했다. 망할 도마뱀이 ‘효과적으로 날 닥치게 하는 방법’을 하나 배운 모양이었다.
* * *
칼서스는 ‘다비 카스타’로서 나를 교육한다는 명목으로 스파이 짓을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익숙해진 왈츠의 스텝을 밟으며 칼서스가 속삭여 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독으로 트레클리프 가를 견제할 수 있는 가문은 없다. 금전적으로, 물리적으로, 권위로 대어 보려고 해도 모든 면에서 트레클리프 가가 우수해.”
“거기에 ‘단독으로’라는 말을 붙인 거 보면, 생각한 바가 있는 것 같은데……. 본론부터 빨리 말하죠.”
딴딴딴, 하고 세 박자로 울리는 노랫소리가 방 밖으로 새어 나갈지도 모르는 목소리를 덮어 주었다. 칼서스가 가볍게 턴을 하고는 다시 돌아와 나와 배를 붙였다. 숨결이 닿도록 가까운 거리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세 개의 공작 가문 중 트레클리프를 제외한 두 가문의 가주가 황태자파의 인물이다.”
나는 책으로 읽었던 지식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서부의 아인힐트와 동부의 필로네리아, 맞죠?”
“그래.”
두 사람이 하나가 된 것처럼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칼서스는 나비처럼 가볍게 움직이며 속삭였다.
“트레클리프 공작가는 대대로 아르테스 황실을 신의 후손으로 여기고 수호해 왔다. 아르테스 제국의 건국 신화에 ‘신의 피를 계승한 자만이 아르테스의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가일 그 미친 새끼가 ‘황제를 위해서’라며 나까지 죽이려고 했던 거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아르테스 신전과 황가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거군요.”
“맞다. 아르테스 신전의 사제들이 보기에는 살아 있는 신처럼 느껴지겠지.”
“흠…… 그리고 트레클리프 가는 그런 신을 호위하는 명예로운 가문인 셈이고요.”
지구인의 입장에서 따지자면 국교가 불교고, 황제가 달뢰라마1), 트레클리프 가문의 가주가 반선라마2)인 셈이네.
칼서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가일이 가주가 되기 이전부터 트레클리프 공작가는 다른 두 공작 가문보다 위세가 높았다.”
“지금은 거기에 추가로 가일이라는 사람의 명성이 더해졌으니까…….”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얼마 가지 않아 결론이 나왔다.
“……다른 두 공작가가 견제할 만하네요.”
‘같은’ 공작 가문이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다. 빗대 말하자면 같은 대표직이라고 해도 중소기업의 대표와 대기업 대표가 가지는 권위가 다른 것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일이 나의 형제들을 도륙한 이후, 아르테스 황가, 그중에서도 현 황제의 권력은 막강해졌다. ‘황가와 세 개의 공작 가문 간의 균형’을 중요시해 온 공작가 입장에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게 느껴졌을 게다.”
나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칼서스의 움직임에 맞춰 부드럽게 턴했다.
“그래서 두 공작 가문이 황태자파가 되었군요.”
“아예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테스의 명맥을 잘라 버리려 할 경우 가일과 신전을 상대해야 했을 테니, 두 공작가의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었겠지.”
황실을 적으로 돌렸다간 가일의 손에 씨몰살을 당할 텐데. 어떤 겁 없는 멍청이가 황실을 상대로 시비를 걸까. 두 공작은 그런 점에서 제법 현명한 선택을 했다.
‘죽는 것보단 미래를 위한 보험을 들어 두는 게 낫지.’
턴을 마친 나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칼서스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황태자와 나머지 두 공작가를 포섭해서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좋겠구나.”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춤을 추던 우리도 멈췄다. 칼서스와 나는 손을 가볍게 잡고 맞인사를 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식민국이 해방되면 정말 좋겠지만……. 현 황제가 그런 짓을 할 리는 없겠죠.”
“공격적으로 영토를 넓히던 데르반 아르테스와 같은 생각을 가진 모양이니 말이다.”
식민 지배를 목표로 주변 왕국들을 더 점령하려는 거구나.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현 황제는 제국의 국민에게는 선군 행세를 하지만, 지배하는 왕국의 상대로는 폭군이나 다름없는 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라의 이름과 언어, 문화는 존중해 주었지만…….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라는 명목으로 각국의 왕족을 약탈해 와 첩으로 삼았어요.”
마흔이 넘은 늙은이가 창창한 이십 대의 왕족들을 이용해 하렘을 만든 것이다. 역겹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왕국으로 격하된 국가들을 상대로 과한 세금을 징수하기도 했죠.”
“그게 혁명의 불씨가 되겠군.”
제국의 국민들은 아르테스의 황제의 위업에 박수를 치겠지만,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보면 물자와 곡식을 빼앗겨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왕국의 국민들이 보일 터.
한 명의 배를 불리기 위한 설탕과 밀가루 때문에 수십 명의 목숨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말이다.
나는 칼서스의 가슴팍에 이마를 쿡 박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칼서스가 손을 들어 내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걸 ‘일단 막아 두고’ 있는 게 가일이고요.”
착취를 당하면서도 큰 반발을 하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가일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가일을 살려 두어야 한다는 점이 불쾌해요. 하지만 그딴 놈이라도 써서 시간을 끌어야만,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남겠죠.”
가일이 전쟁의 불티를 밟아 억누르는 사이, 내부에서 소란을 일으켜 귀족들이 ‘해방’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니까.
‘억압이 반발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귀족들에게 각인시켜야 하는데…….’
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그 사실을 알릴 수 있을까…….
그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칼서스.”
“음?”
“다음 주 금요일에 황태자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열려요.”
나는 고개를 들어 칼서스와 시선을 맞췄다.
“그 전에…….”
내 입꼬리에 익살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사람을 죽인 적 있는 귀족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호오…….”
“복수의 칼날은 빈부와 귀천을 막론하고 공평하게 주어져야 하니까요.”
이번에는 칼서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아보도록 하지.”
1) 환생을 거듭하며 인간의 몸으로 땅에 내려와 불교를 설파하는 부처로 여겨진다, 티베트의 망명정부 정치 지도자이기도 하다.
2) 환생한 달뢰라마를 찾고, 그를 길러 내는 역할을 맡은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