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28화 (28/101)

28.

공평한 기회 (2)

황태자 탄신 기념 파티 나흘 전, 가일이 또다시 내게 식사 제안을 해 왔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가일이 부르는 대로, 순순히 식사 자리에 나갔다.

가일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무섭도록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는 다 되었겠지?”

“네, 아버지.”

나는 대답과 동시에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앞에 앉은 사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마냥 해맑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꼴을 본 가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정말,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군. 내 피를 이은 놈이 저런 쭉정이라니.”

……웃는 얼굴에 침을 뱉다니, 저 독한 새끼.

‘듣는 쭉정이 기분은 생각 안 해? 내가 가서 거울이나 보고 오라고 말해 줘야 직성이 풀리겠니?’

사람이 쓰레기를 보면서도 웃어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할 것이지, 거기다가 대고 쭉정이라며 빈정거려? 내가 웃는 표정을 유지한 채로 가일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가일이 고개를 들어 질문했다.

“뭘 그렇게 바라보지?”

“헤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은 뒤, 배운 대로 스테이크를 한입 크기로 썰어 입으로 가져갔다. 마음 같아서는 스테이크가 아니라 가일을 썰어 버리고 싶었지만, 저놈이 벌써 죽으면 내가 수습해야 하는 난장판의 스케일이 커지니 참아야 했다.

나는 스테이크를 우물우물 씹으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그 쭉정이 손에 죽을 줄 알아, 개새끼야.’

내가 너는 진짜 꼭 죽여 버린다.

콱 씨.

* * *

예정된 황태자의 생일날, 나는 2기사단을 상징하는 푸른색의 제복을 갖춰 입고 연회에 참석했다.

연회를 위해 마련된 홀의 내부에는 한껏 멋을 부린 귀족들이 가득했다. 색색의 드레스와 연미복이 가득한 게, 보고 있는 내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기사는 연회에 참석할 때 제복 차림으로 와도 된다고 해서 다행이야.’

그게 아니었으면 연미복을 새로 맞춘다면서 가일이 다섯 번은 더 나를 찾았을 테지. 내가 한숨을 쉬며 홀의 가장자리로 향하자, 시종 한 명이 쟁반을 들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

“…….”

시종은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평범한 인상의 마른 남성이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흥분을 억지로 참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웃으며 쟁반 위에 놓여 있던 샴페인 한 잔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받은 시종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샴페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생각했다.

‘……준비한 퍼포먼스에도 이상이 없는 것 같네.’

그렇다는 건 계획한 대로 오늘…….

“단장님!”

“일찍 오셨네요?”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 등 뒤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린과 오르가가 서 있었다.

“너희 둘도 왔구나.”

린과 오르가는 2기사단의 기사답게 파란 바지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린은 풍성한 머리를 말꼬리처럼 높게 올려 묶은 모습이었고, 오르가는 왁스를 사용해 머리를 정돈한 채였다.

‘인물들이 훤칠하네.’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귀여운 부하들을 감상했다. 그러자 린이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 자식은 어디 있어요?”

“아버지는 따로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갔어. 오늘 이 자리에서 마주치는 일은 없을 거야.”

대답을 들은 린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녀는 해맑게 꺄르르 웃으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럼 저는 이만 갈 테니까, 오르가랑 여기 계세요.”

“응? 린 너는?”

“저는 발코니에 있어야 해요.”

대답을 마친 린이 멋쩍다는 듯 몸을 배배 꼬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혼혈이라서, 헤헤헤.”

“…….”

나는 의아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혼혈이면 개막 선서 자리에 못 끼나?’

옛날 신라의 귀족들이 진골 성골을 따졌듯이, 순혈 인간이 아니면 아르테스 황족의 선서를 못 듣는다거나……?

‘그렇다고 해도 개막 선서가 끝날 때까지 혼자 테라스에 있으면 심심할 텐데.’

나는 곁눈질로 오르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오르가는 미련이 가득한 얼굴로 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린이 간다니까 섭섭해하는 거야? 아닌 척하더니, 나름 린을 약혼녀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네. 귀여운 자식…….’

나는 싱긋 웃으며 린과 오르가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그냥 셋이 같이 있자. 개막 선서는 듣고, 춤은 한 곡 추고 가야지.”

“단장님…….”

오르가가 감동한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이고, 약혼녀랑 같이 있게 돼서 좋냐?’

그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귀여워서, 나는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기억을 잃었더니 몸치가 되어서 말이야. 린이랑 오르가 너희가 도와줘야 할 것 같거든.”

“저희가요?”

“응. 춤추는 모습을 좀 보여 줘. 내가 보고 배울 수 있게.”

이렇게 말하면 린이랑 오르가가 파트너가 되어서 춤을 출 테니, 스킨십도 좀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한 뒤, 이번에는 린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놀이공원에 가자는 말을 들은 아이처럼 설렘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린, 너 사실…… 내심 오르가가 약혼자인 게 마음에 들었던 거니?

‘이 귀여운 녀석들……. 좋으면 좋다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지. 어른이 큐피드 역할을 맡게 해?’

그래도 귀여우니까 봐준다!

아직 어리고 귀여운 애들이니까! 어른이 좀 도와줄 수도 있지!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너희를 빼면 나는 아는 귀족이 따로 없잖아? 그러니까 나랑 있어 줘. 소중한 단장이 외톨이가 되게 내버려 둘 셈은 아니지?”

“단장니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린이 눈가를 찡그리더니, 이내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단장님은 정말 착한 분이에요…….”

응? 너 왜 울어? 내가 뭐 잘못했니?

내가 당황스러워하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을 즈음, 오르가가 갑자기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단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왜, 왜들 그래? 어, 어어?”

그, 그냥 춤 좀 추라고 했을 뿐인데 왜 울어? 너희 원래 그렇게 쉽게 감동하는 애들이었니?

‘얘들아, 진정 좀 해!’

나는 곤란해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린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다른 손으로는 오르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뒤에서 낯선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다정하시네요. 트레클리프 공자.”

“응……?”

뒤를 돌아보자, 백금발과 루비처럼 붉은 눈을 가진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이 서 있었다. 그가 다시금 활짝 웃으며 말했다.

“깊게 감명받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린과 오르가가, 급하게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했다.

“화, 황태자 전하……. 타, 탄신일 축하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스무 번째 탄신일 축하드립니다.”

아, 쟤가 황태자야?!

나도 린과 오르가를 따라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스무 번째 탄신일 축하드립니다.”

“하하, 편하게 계세요. 아직 연회가 시작된 것도 아닌걸요.”

넉살 좋게 웃으며 우리를 잡아 일으킨 황태자가 다시금 나를 콕 집어 말을 붙였다.

“트레클리프 공자, 안타까운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기억을 잃으셨다고요.”

역시 황족이라 그런가, 소식이 빠르네. 가일에게 직접 보고받은 건가? 나는 부러 더 살갑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괘념치 마세요. 잃어버린 기억은 다시 쌓으면 되는 일입니다.”

대답은 들은 황태자의 얼굴에 발그레한 기운이 돌았다.

“방금도 생각했지만……. 무척 다정하고 사려 깊으신 분이시네요.”

“황송합니다……?”

“저어, 그래서 말인데……. 선서가 시작되기 전까지 함께 있어도 괜찮을까요, ‘해일 경?’”

“당연히 괜찮지요. 영광입니다, 전하.”

……그런데 언제 봤다고 갑자기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거지? 방금까지 트레클리프 공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황제파 사람인 줄 알고 견제하는 걸려나?’

황태자랑 괜찮은 사이를 유지해야 가일을 밀어내기 쉬워질 텐데……. 그럼 좀 좋은 인상을 남겨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반사적으로 싱긋 미소를 지으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태자가 무척이나 수줍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사실…….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광룡에게 몸을 던졌다가 이리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존경스러운 마음에 불쑥 말을 걸어 버렸네요…….”

……아!

내가 트레클리프 공작가의 가주가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친분을 쌓아 두려고 하는 거구나? 나는 황태자의 의도를 알아채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 과분한 칭찬을 들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부끄럽네요.”

“아아…….”

황태자는 그 대답에 심히 감동했는지,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앞으로도 꾸준한 친분을 쌓고 싶을 만큼이요.”

오, 그렇게 나를 좋게 봤어? 황태자가 나를 견제하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좀 수월하겠는데?

내가 뿌듯하게 웃고 있던 때였다. 갑작스럽게 홀 안에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꺄아아아악!!”

“으아아악! 아아아악!!”

황태자가 급하게 표정을 굳히며 소리쳤다.

“무슨 일입니까?!”

한 영애가 주저앉은 채로 소리를 내질렀다.

“도, 도마호르 자작 영식이 칼에 찔렸어요!”

그녀는 울먹거리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시종 복식을 한 남성과 통통한 영식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시종은 바닥에 엎어진 도마호르 영식의 등 위에 올라타, 나이프로 그의 뒷덜미 정 가운데를 조준한 채였다.

‘저대로 칼을 찔러 넣는다면, 경추가 끊어져서 즉사하겠는데.’

시종이 잔뜩 흥분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허억, 허억……. 다, 다가오지 마! 다가오는 놈이 있으면 이 자식을 죽여 버릴 거야!”

시종은 그렇게 소리를 친 뒤, 빠르게 나를 곁눈질했다. 신호를 받은 나는 칼서스에게 들리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준비해.”

“…….”

“내가 신호하면, 그때 움직여.”

그러자 내 양쪽에 서 있던 린과 오르가가 대답했다.

“네, 단장님.”

“명심하겠습니다.”

“…….”

너희 말고, 이 자식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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