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29화 (29/101)

29.

공평한 기회 (3)

너희를 부른 게 아니긴 한데…….

‘……상관없겠지. 린이랑 오르가가 이번 일로 이름을 알리면, 추후 보상으로 황제에게서 영지를 받을 테고……. 그러면 은퇴한 뒤에도 영주로 살 수 있을 테니까. 외려 좋은 일이야.’

나는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다, 다, 다가오지 마!”

시종복을 입은 남성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러자 도마호르 자작 영식의 목덜미를 타고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 자식을 죽여 버릴 거라고!”

“흐윽, 끅, 끄흑…….”

도마호르 자작 영식은 고통스러운지 끅끅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 꼴이 어찌나 안타까우면서도 추한지,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나는 굳은 미간을 손끝으로 문질러 편 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침착하게, 계획을 세운 대로 행동하자.’

나는 고개를 들고 남자를 향해 물었다.

“도마호르 자작 영식을 골라서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보이는 대로 한 놈 붙잡은 것뿐이야! 가까이 오지 마!”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그대는 도마호르 자작 영식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습격했습니다.”

“네가 뭘 안다고……!”

“증거는 도마호르 자작 영식의 손목에 있어요.”

나는 이어서 연설을 하듯 주변을 휘둘러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도마호르 자작 영식의 손목에 달린 커프스 장식을 보십시오. 저건 아카데미에서 검술 정규 과정을 수료한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커프스입니다.”

아카데미에서 검술 정규 과정을 밟은 대부분의 귀족은 견습 기사가 된다. 바꿔 말하자면, 이자의 실력을 어느 정도 증명해 줄 수 있는 증표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많은 귀족이 그걸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렇기에 제국에서 살아가는 자라면, 저 증표를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다.

“당신이 정말 ‘아무나 보이는 대로’ 잡으려 했다면, 이 점을 신경 썼을 겁니다. 제압하려다가 도리어 제압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윽…….”

“도마호르 자작 영식에게 무슨 원한을 품은 겁니까?”

그 원한을 말해요. 모두가 보는 지금 이 자리, 이 장소에서.

당신의 가슴 깊이 흉터를 새겨 넣은 자의 추악함을 낱낱이 드러내는 겁니다.

‘게쉬 도마호르를 명예와 함께 죽여 버리세요.’

그자가 당신의 동생을 죽였듯이, 당신도 그를 죽일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살인할 권리’는 없지만, 타인의 권리를 지켜 주지 않으면 자신의 권리 역시 존중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자의 ‘살아남을 권리’를 지켜 줄 의무가 없습니다.

“무슨 사연으로 그를 공격하게 됐습니까?”

“아…… 아…….”

침착한 시선이 안타까운 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의 케케묵은 원한이 두 눈을 타고 흘러넘쳤다. 터져 나온 설움은 가슴 위에 돋아났던 살결을 걷어 내고, 또다시 뜨거운 피가 흐르게 했다.

남자가 오열하며 소리쳤다.

“이 자식이 내 동생을 죽였어……. 이 자식은 살인마야……!”

그 한마디에 사방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상에……!”

“도마호르 자작 영식이?!”

나는 그 반응을 듣지 못한 것처럼 올곧게 남자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자세한 정황을 들려주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남자는 그런 나의 눈을 바라보며 고여 있던 슬픔을 토해 냈다. 슬픔을 쏟아 내는 목소리의 끝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제…… 동생은 부모님을 따라 간단한 장신구 가게를 운영하던 녀석이었고, 저는 아르테스로 상경해서 직장을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고향에서 축제가 열린다기에, 잠시 고향인 더비히 왕국에 돌아갔습니다.”

남자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눈물을 닦을 손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축제로 번잡하고 떠들썩할 줄 알았던 마을은 완전히 감옥처럼 경직된 분위기로 변해 있었어요.”

“왜죠?”

“바로 이 자식 때문입니다!”

칼자루를 쥔 손이 사정없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 그의 아래에 짓눌려 있던 도마호르 자작 영식의 잇새로 ‘으으’ 하는 신음성이 터졌다.

“이 자식은, 번잡한 길에서 동생과 부딪쳤다는 이유만으로 제 동생에게 소매치기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리고는 벌을 주겠답시고 그 자리에서 제 동생의 양 다리를 부러트렸어요!”

“어머!”

“잔인해……!”

눈물을 흘리는 두 눈이 점점 벌겋게 변했다. 분노를 억지로 내리누르느라 실핏줄이 터진 탓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다리가 부러질까 두려워하며 집에 숨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이 그렇게…….”

……장례식 같은 분위기로 물들어 있던 것이다.

남자는 준비한 대사를 마저 내뱉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의 말이 흐느끼듯 이어졌다.

“저는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동생을 치료하려 했지만, 동생의 다리는 발끝부터 점점 썩어들어 갔고……. 동생은 결국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

“어찌 그런 짓을…….”

탄식을 터트리며 도마호르 자작 영식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혐오와 경멸이 섞였다. 그리고 또 그런 시선들 사이로, 분노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정식으로 재판을 열었으면 됐잖아! 왜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서, 이 성스러운 황태자 전하의 탄신일을 망쳐!”

“맞아! 복수를 할 거였더라도 조용히 했어야지!”

하찮은 네 이야기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당장 눈앞의 연회가 우선이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비판의 목소리였다.

“제가 이 성스러운 날을 망쳤다고 저 사내를 비판하였습니까?”

황태자가 목소리를 낸 한 귀족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일갈했다.

“저보다 먼저 불만을 터트리는 것 또한 오만입니다. 당신이 진정 저를 존중했더라면 저보다 먼저 목소리를 높여 저 사내를 지탄하지 않았겠지요.”

황태자의 날 선 지적에 귀족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얼굴을 붉히며 물러나는 귀족을 싸늘한 얼굴로 노려보던 황태자가, 이번에는 질문을 던졌다.

“들으셨다시피, 당신에게는 재판이라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복수를 택한 이유가 무엇이죠?”

“……평민이 감히 재판을요?”

남자가 황태자를 비웃으며 말했다.

“재판을 열기 위해서는 신전에 의뢰를 해야 하는데, 우리 같은 평민에게 그럴 돈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평민이 신전에 의뢰를 하려면 십 년을 꼬박 일해야 합니다!”

“아…….”

“제 벌이로는 남은 한 명의 가족이었던 아버지의 약값을 대기에도 급급했습니다.”

황태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귀하의 아버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제게는 이제 남은 가족이 없어요.”

“…….”

“그래서 죽을 각오로 이 자식을 찔렀습니다.”

체념한 듯, 진정한 듯했던 남자의 숨이 다시금 거칠어졌다.

“저는 죽어도 상관없는 몸입니다! 이제 잃을 게 없으니까요! 지옥 불에 몸이 불타오른대도 상관없습니다! 이 자식과 함께 지옥에 떨어질 수만 있다면!”

남자가 칼자루를 쥐고 있던 한 손을 떼어 내 주머니를 뒤적거려 함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함의 뚜껑을 열고 단숨에 도마호르 영식의 머리 위로 그것을 들이부었다.

함에 들어 있던 건 폭약이었다.

남자가 광기에 젖은 사람처럼 이를 드러내 웃으며 외쳤다.

“여기 있는 당신들도 잘 기억해 둬야 할 거야! 귀족이랍시고 떵떵거리면서, 우리 같은 평민을 쥐새끼처럼 대하는 놈들이 많을 테니까!”

“…….”

“나를 잡아도, 또 다른 녀석이 이렇게 숨어들어서 네놈들의 숨통을 다 끊어 놓을 거야. 확신할 수 있어.”

남자는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주머니를 한 번 더 뒤적여 성냥을 꺼내 들었다. 성냥을 문지르는 ‘착’ 소리와 함께, 비명 같은 목소리가 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르테스는 멸망할 것이다!”

나는 그 순간 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린! 보호막이다! 사람들을 지켜!”

“네!”

“오르가! 린을 보조해!”

“명 받듭니다!”

그와 동시에 오르가가 가장 가까이에 놓여 있던 장식용 검을 집어 들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뒤를 이어 린이 정령을 소환했다.

“엘프의 피를 계승한 자가 명한다! 실리오르! 물로 장벽을 만들어!”

곳곳에 놓여 있던 잔에서 음료가 빠져나오며 아름다운 벨루가의 형태를 그렸다. 벨루가는 눈 깜빡할 사이에 남자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거대한 물의 장벽을 만들어 내었다. 오르가는 장벽을 헤집고 기어 나오려 하는 불기둥을 오러를 두른 검으로 베어 상쇄시키며 그녀를 보조했다.

폭발하는 소리와, 단단한 물의 장벽이 그 열기를 막아 주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에서 빛처럼 빠르게 쇄도하며 검을 휘두르는 이의 발소리가 한데 뒤섞이며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의 장벽이 거두어지자, 까맣게 그을려 알아볼 수 없게 된 한 줌의 잿더미가 드러났다.

나는 몇 초간 그 잿더미를 응시하다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사한가?”

대답이 머리를 울렸다.

[더비히의 청년은 무사하다. 조금 그슬리기는 했지만, 치료를 하면 금방 나을 정도야.]

“네, 도마호르 자작 영식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무사합니다.”

두 가지 대답을 들은 나는 한숨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그러자 머릿속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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