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인도하는 자 (3)
아르사나 엘그리드.
그는 작중에서 <엷은 물색의 비늘과 실크처럼 윤이 도는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용>이라고 묘사된 용이었다.
‘형제가 죽은 뒤에도 편히 잠들지 못하는 걸 봐야 한다니…….’
세상도 무심하지, 용이 무얼 그리 잘못했다고 이런 일을 겪게 만드는 걸까.
내가 침울하게 그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인상을 구긴 칼서스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가일이 버거워하고 있다.”
“네?”
“아르사나의 시신엔 칼자국이 나 있고, 가일은 무척이나 지친 모습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리고 더비히의 그 청년은 그 모습을 유리 벽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어.”
칼서스가 잠시 숨을 들이쉬고는, 이어서 말했다.
“본래의 이름은 버리고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듯해. 자신을 러드라고 소개했다.”
유리 벽 너머라고 한다면, 드워프들의 마을에서 보았던 그 유리 벽인가?
‘그렇다면 지금 가일은 아르사나 엘그리드와 함께 유리 벽 안쪽에 있는 거야?’
그런데 어째서 마나 하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거지? 마나 하트의 영향을 받은 생명체는 모두 죽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체 왜…….
“아!”
불현듯 가설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곧장 칼서스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가일은 용을 죽이고도 멀쩡했던 놈이에요.”
드래곤의 마나 하트가 생물체에게 끼치는 영향은……, 방사능과 비슷한 면이 있다. 보통의 생물이 마나 하트에 노출되면 죽거나, 당장은 살았더라도 병환으로 죽는다는 점도 그렇다.
그런 마나 하트를 품은 용들이 모두 가슴이 닫힌 채로 죽지는 않았을 터. 분명 가일은 용을 사냥하는 과정에서도 마나 하트에 노출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건…….
“세계수의 열매를 이용해 치료받았기 때문에, 용의 마나 하트에 노출되어도 죽지 않는 몸이 된 걸지도 몰라요. 아니면 용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마나 하트에 내성이 생긴 걸 수도 있고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칼서스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니 용의 부속물을 채취하는 데 동원된 건가.”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황제가 가일을 보낸 모양이네요.”
나는 침울하게 질문을 던졌다.
“러드는 무슨 생각으로 가일을 찾은 걸까요?”
“죽일 생각이겠지. 가일은 용을 제외하고도 많은 수의 인간을 죽인 학살자다.”
하긴, 전쟁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기 위해 흐른 피가 강을 이룰 정도일 테니, 러드가 가일을 증오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복당한 왕국의 모두가 가일을 증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옳겠지.
“……하지만 러드는 가일을 상대할 만큼 강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도마호르 자작 영식 때랑은 다를 텐데, 괜찮은 걸까요?”
내가 걱정스러워하며 묻자, 칼서스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러드는 멍청한 녀석이 아니야. 소극적인 면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영민한 인간이다.”
그렇게 말한 칼서스는 한 번 눈을 감았다 뜨곤,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만하면 충분히 러드 쪽의 상황을 살펴보았으니, 권능의 사용을 중지한 듯했다.
“가일이 뛰어난 기사라는 걸 알고 있으니 급습이나 난투로 이긴다는 선택지는 진즉 걸러 냈을 거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독살 정도밖에 없어.”
“하지만 가일에게 독이 통할까요?”
‘와이프가 와인에 독 안 타 준 걸 다행으로 여겨라.’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가일은 작중에서 이미 세 번이나 독을 먹은 몸이었다.
‘독을 풀어 둔 우물물을 마신 탓에 다른 병사들이 여럿 죽었을 때에도, 가일은 약한 중독 증세만 보이고 말았다고 했어.’
그 외에도 독을 가진 몬스터가 수도를 덮쳤을 때, 몬스터가 내뿜은 독을 흡입했음에도 며칠 고열에 시달리다가 말았던 일도 있다.
‘그것 또한 강력한 치료 능력을 가진 세계수의 영향인 건가?’
그렇다면 가일이 독을 먹고 실제로 ‘죽을’ 확률은 적다. 가일이 조금은 더 생존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계획에 상충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러드가 독을 먹였다는 사실이 들통날 확률이 높아. 가일은 멍청하지 않으니까.’
분명 러드를 제일 먼저 용의자로 꼽을 게 분명하다. 그럼 러드는 추궁과 고문에 시달릴…….
“……잠깐만요, 칼서스.”
“뭐지?”
“러드랑 연락할 방법이 있을까요?”
칼서스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방법이야 많다만……, 왜 그러지?”
나는 그런 칼서스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이를 드러내 웃었다.
“재미있는 방법이 생각났어요.”
* * *
러드가 깨끗하게 빈 찻잔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웬만한 독은 다 써 봤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독부터, 구하기 어려운 독까지 모두 다.’
비소가 통하지 않기에 온갖 독을 다 써 보았는데도 고작 몸이 찌뿌둥하고 숨을 쉬기 좀 어려운 정도가 고작이라니. 저게 괴물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막막하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러드.]
‘그 자식을 죽일 수…….’
[러드!]
러드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선명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누, 누가 나를…….”
[러드, 나예요. 해일.]
“공자님……?”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해일이라는 걸 알아채자마자, 러드가 재빨리 인적이 드문 길목으로 향했다.
해일은 러드의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질문을 던졌다.
[지금 마탑에 있는 건가요?]
“네, 네, 공자님. 맞아요.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긴요.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갔는지 알아보려다가 알게 됐죠.]
“…….”
대답을 들은 러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울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저는 더비히로 돌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도 알아요. 가일을 죽이려는 거죠?]
“어떻게 그것까지 알고 계십니까?”
[칼서스가 능력이 좀 좋아요.]
제가 말해 놓고도 우스웠는지, 말을 마친 해일이 한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지금 러드에게 상담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요.]
“제게요? 공자님 같은 분이 어찌…….”
[저한테는 그런 거 따지지 않아도 괜찮다니까요. 저는 러드가 귀족이든 평민이든 왕국의 국민이든 신경 쓰지 않아요.]
담담한 이야기를 들은 러드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이 말을 내뱉는 상대방이, 자신의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도마호르 자작 영식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귀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같은 귀족이라도 해일은 다르다. 평민과 귀족을 구분하지 않고, 선한 사람에게는 다정하며 악한 사람에게는 단호하다. 그런 귀족의 존재는 신분제 사회에서 평생을 살아온 러드에게는 꿈만 같은 현실이었다.
그 생각에 종지부를 찍듯, 해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러드를 얼렀다.
[저는 그저 러드, 당신에게 상담을 바랄 뿐이에요. 너무 압박감 느끼지 않아도 괜찮아요.]
“공자님…….”
[기왕이면 반말도 써 볼래요? 내가 형이라고 불러 줄게요.]
“그, 그건 너무 과분합니다!”
러드가 대경실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해일이 다시 비슷한 말을 꺼낼까 싶어 급하게 대화의 주제를 바꿔 버리기까지 했다.
“제,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제힘이 닿는 한, 무엇이든 해 드리겠습니다. 복수를 도와주신 공자님의 부탁이라면 목숨도 불사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다들 못 죽어서 안달인 것처럼 굴까.]
해일은 그렇게 말하고는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러드에게 상담하고 싶은 내용은 아주 간단한 거예요.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된다고요.]
“네, 네!”
[러드, 지금 가일은 마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죠?]
러드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대답했다.
“어, 황제의 명령을 받아 피해 없이 용의 부속물을 채취하는 작업을 수행 중입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용에 대해 연구하거나, 드워프들이 용으로 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들었어요.”
[역시나. 그것 때문에 가일이 동원되었군요.]
해일은 러드에게 찬찬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마나 하트에 노출되면 보통 죽거든요. 그런데 가일은 마나 하트에 노출되어도 죽지 않는 몸이니 연구에 동원된 것 같아요.]
“아아……, 그렇군요.”
해일은 러드가 납득한 듯하자 다음 질문을 던졌다.
[가일은 지쳐 보였나요?]
“네, 네. 매일 저녁 작업을 마치고 나면 굉장히 지친 채로 방으로 돌아갑니다. 땀으로 흠뻑 젖어 있기도 하고, 두통을 호소하기도 해요.”
[용을 해체하는 작업이 무리가 되긴 하나 보군요.]
잠시 ‘으음’ 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해일이 다음 질문을 던졌다.
[아르사나 엘그리드는 몇 번째로 해체되고 있는 용이죠?]
“아, 앞에서 서부 해역의 시타 멜리엄과 남부 평야의 미레야 클레바를 작업했으니 세 번째 용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해일은 기분이 상쾌해진 사람처럼 손뼉을 ‘짝’ 소리가 나게 치더니, 러드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대답해 줘서 고마워요. 이제 질문은 다 했고……, 마지막으로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네, 네!”
러드는 해일이 자신에게 어떤 ‘특명’을 내리는 거라고 생각하며,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일이 말했다.
[제가 차를 한 종류 보내 드릴 테니까, 그걸 가일에게 먹여 주세요.]
“……차, 차요?”
러드가 당황스러워하며 되물었다.
“독이 아니라, 차요?”
[네. 좀 이상한 게 섞여 있을 예정이긴 한데 독은 아니에요. 원한다면 러드도 마셔도 괜찮아요. 맛이 괜찮거든요.]
그 대답을 들은 러드는 완전히 얼이 빠져 버렸다.
“……대체 뭘 하고 싶으신 거예요?”
[그건 러드에게도 비밀이에요.]
해일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대신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건 보장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