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갱도 속의 왕세자 (1)
황태자, 이데아 아르테스는 침대 위에 드러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거의 넋을 놓다시피 한 것 같은 몰골이었다.
그가 루비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멍하니 생각했다.
‘가일은 용에게 저주받았고, 마지막 용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도 사실이었어.’
마지막 용은 세계수가 없는데도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데다가, 무척이나 교활한 면모를 보이기까지 했다.
가일에게 문제를 만들어 그쪽으로 정신이 쏠리게 만든 다음, 마탑을 습격해 여덟 용을 약탈하다니. 보통의 사람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참모가 있더라도 떠올리기 어려운 방안일 터.
그럼에도 그걸 계획하고 성공시키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이미 인간은 마지막 용에게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천재가 갑자기 둔재가 될 리가 없듯, 용이 갑자기 아둔하고 멍청해질 리가 없어. 용은 무조건 다음 수를 계획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인간끼리 뭉쳐서 용을 막아 낼 방도를 찾아내는 일일 것인데…….
황태자가 돌연 망연자실한 채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잘생긴 얼굴이 두 손바닥 아래에서 엉망으로 구겨졌다.
“망했어.”
이런 와중에도 다들 제 배를 불릴 생각만 하지, 남을 도울 생각이나 주변의 소국을 돌보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제 입에 들어갈 게 초콜릿인지 사탕인지를 구분하는 일이나 할 줄 아는 놈들이다. 그런 머저리들과 대체 무슨 논의를 하란 말인가.
“이래서 폐하께 소국에 적대적으로 구는 귀족들에게 벌을 주라고 매번 건의드렸던 건데…….”
건의를 올리면 무엇 하나, 제 아비인 황제 역시 썩어 빠진 귀족인데.
“하아…….”
황태자가 두 팔을 힘없이 침대 위에 툭 내려놓았다. 그런 황태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금으로 빚은 조각 같던 라야나 더비히. 그녀와 발코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때의 기억이었다.
-라야나 왕녀, 몸은 좀 어떠신가요?
-왜 그런 걸 여쭈시는 거죠?
황태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졌지만, 라야나 왕녀는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경계심을 드러내 보였다.
황태자는 그런 왕녀가 경계를 풀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귀족들의 텃세가 걱정되어서 묻는 거예요. 고국을 떠나 타국에 왔으니, 적응이 어려울 듯싶기도 하고요.
황태자는 그렇게 말한 뒤 약간 멋쩍고 부끄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표정을 지을 적이면 모두가 자신을 귀엽게 여겨 주곤 했으니, 이번에도 이 방식이 통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라야나 왕녀가 잘 지내시다가 고국으로 돌아가셨으면 해요.
황태자는 온점을 찍듯,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라야나 왕녀의 표정을 살폈다.
기대한 것과 달리, 라야나 왕녀는 그저 한 줌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으로 빚은 조각 같다는 생각이 사실이기라도 한 것처럼 온기 따위 없는 냉랭하고 싸늘한 얼굴이었다.
-알량한 동정 따위 필요 없어요.
-……왕녀?
-우리에게 제국의 칭호를 돌려주지 않을 거면서, 나를 여기서 꺼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왕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눈을 몇 번 깜빡여 북받친 감정을 털어 내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눈앞의 개미에게 설탕 한 꼬집을 던져 주는 것과, 지금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그 두 가지 일에 무슨 차이가 있죠?
-…….
-내가 잘 지내길 바란다고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무표정하던 그녀의 미간이 아주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전하, 저는 전하와 탄신일이 같습니다.
-…….
-그리고 저는 전하보다 삼 년 이르게 태어났어요. 전하와 제가 딱 세 살 차이라는 뜻이지요.
라야나의 금색 눈동자가 무심하게 황태자를 직시했다.
-그럼에도 저는 볼모라는 이유로 전하, 당신의 아버지와 억지로 결혼해야 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고작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해, 발코니로 나오라고 한 건가요?
그 대답을 들은 황태자의 낯빛이 순식간에 희게 질렸다. 놀란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샴페인 글라스까지 떨어트렸다.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때렸다. 황태자는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왕녀의 말에 대답했다.
-왕, 왕녀,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그런 의도가 아니든 맞든 상관없어요. 결국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라야나 왕녀는 무릎을 꿇어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하나 주웠다. 끝이 뾰족하게 깨진, 큼직한 유리 조각이었다.
왕녀는 그 유리 조각을 황태자의 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런 소리를 할 거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 줘요. 내가 황태자의 손에 죽었다는 이유로 우리 더비히가 당신네 제국에게 원성을 토해 낼 수라도 있게.
-…….
황태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제 손 위에 놓인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런 황태자의 귓가에 라야나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당신이 황태자라는 칭호를 걸고 있는 이상. 당신은 절대로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기억해요.
라야나 왕녀는 황태자의 손 위에 놓인 유리 조각 위로 손바닥을 덮었다. 그러자 예리하게 깨진 조각이 그녀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라야나 왕녀의 피가 뚝, 떨어져 황태자의 손바닥을 뜨듯하게 적셨다.
-당신네 제국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걸 마지막으로 왕녀는 입을 닫고, 황태자와 조용히 눈을 맞췄다. 고요하기만 한 눈꺼풀 아래의 눈동자에서는,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
기억을 되새김질한 황태자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녀의 말대로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게 아니야.’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직시하려 들지 않았을 뿐인, 비겁자였다.
‘우리에게는 영웅인 가일이, 왕국의 사람들에게는 악귀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걸……. 알고는 있으면서도 이해하려 들지는 않았어.’
황태자가 다시금 손을 들어 올려 마른세수를 했다.
“이럴 때 해일 경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해일 경이라면 나처럼 이렇게 실수하지 않고 라야나 왕녀를 잘 도닥여 주셨을 텐데…….”
벌어진 손가락의 틈새로 먹먹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난 정말 쓸모없는 놈이야…….”
* * *
흥분으로 이마와 귓바퀴까지 벌겋게 변한 러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눈을 껌뻑거리며 말했다.
“저, 정말 공자님의 말씀대로였어요!”
“아하하.”
“갑자기 가일이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어요. 그 꼴을 보는데 얼마나 후련하던지!”
무척 얼떨떨해 보이지만, 달가워하는 기색이 더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나는 통쾌해하는 러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걸로 가일이 완전히 무력화됐다고 여기면 안 돼요.”
그 이야기를 들은 러드가 웃으며 “예?” 하고 되물었다. 나는 러드에게 살갑게 웃어 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가일은 아주 조금 더 버텨 줄 필요가 있거든요.”
“……버텨 주다니요?”
러드는 어리둥절한 투로 되물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듯했다.
나는 러드와 눈을 맞춘 채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가일을 죽인다고 해서 제국의 병력이 한순간에 흩어지지는 않아요. 가일을 대신할 누군가가 통솔권을 쥐겠죠.”
아르테스 제국의 기사단장은 총 일곱 명.
그 말인즉슨, 수도를 지키는 가일의 영향력이 가장 클 뿐이지, 가일이 죽은 뒤 통솔권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혹은 가일이 죽었다는 걸 이유로 들며 제국 내부의 귀족들이 더 강하게 똘똘 뭉칠 수도 있어요. 그럼 상대하기가 귀찮아지잖아요?”
“아…….”
“그러니 가일이 살아 있을 때 귀족들을 이간질시켜야죠.”
러드가 학구열 넘치는 학생처럼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하면 귀족들을 이간질시킬 수 있을까요?”
“음, 가장 근본적인 것부터 돌아보는 게 좋겠네요.”
나는 러드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장 기초적인 부분부터 차근히 설명했다.
“우리는 왕국의 해방을 원해요. 왜냐면 많은 왕국이 제국의 귀족들에게 상납해야 하는 세금 때문에 굉장한 적자를 보고 있고, 심지어는 제국의 귀족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하잖아요. 이건 굉장히 비인도주의적인 일이에요.”
“네, 공자님의 말씀대로예요. 정확해요.”
“그런데 귀족들이 이런 행위를 지속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 질문을 던지자, 러드의 표정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그가 한참이나 망설이더니, 결국 한숨과 함께 한마디를 터트려 냈다.
“……본인들은 즐거우니까요.”
“네, 그 말 그대로예요.”
나는 태연한 낯으로 러드의 말을 긍정했다.
“이런 짓이 즐거우니까 하는 것뿐이에요. 본인의 기쁨을 위해 왕국의 백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본인이 먹을 설탕을 만들기 위해 수십 수백 명이 마셔야 할 식수를 가로채 차나무와 사탕수수를 기르죠.”
실제로 사탕수수를 기르기 위해 밀밭을 여러 개 밀어 버리고, 강물을 가둬 댐을 만드는 바람에 농사에 사용할 물이 부족한 상황이 왔다지.
“그러니 우리는 그걸 이용할 거예요.”
러드는 거기까지 듣자 무언가를 알아챈 사람처럼 손뼉을 쳤다.
“그들이 향유하는 문화를 박살 내시려는 거군요!”
“정확해요. 우리는 지금부터 남의 것을 탐내는 돼지들에게, 네 배 속에 들어간 게 독이라고 사기를 칠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러드와 나는 동시에 못된 장난을 꾸미는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