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48화 (48/101)

48.

갱도 속의 왕세자 (3)

황태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되물었다.

“……자작나무 수액이요?”

현 황제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서 국무를 분담하여 돌보던 중, 전혀 예상치 못한 주제와 맞닥뜨린 탓이었다.

에일 시아노르가 설명했다.

“네, 일부 귀족들이 새로운 기호품으로 자작나무 수액을 원한다는 듯합니다. 그래서 황실에 정식 수입을 의뢰한 것 같으나…….”

에일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입을 닫았다.

‘전하께서 맡기엔 너무나도 사사로운 일이라, 말씀드리는 것도 민망하군.’

나름 귀족이라는 놈들이, 이런 것 하나 알아서 해결하지 못하고 황실에 기대다니…….

에일은 침울해진 낯으로 마저 말을 이어 갔다.

“……전하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개인 업자를 알아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자작나무 군락이 자라나는 곳은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아닌지라, 황실이 수입을 진행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에일의 예상과는 다르게, 황태자는 이 안건을 제법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가 루비 같은 눈을 굴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작나무 군락이라……. 북서부의 더비히와 거래하는 게 좋겠네요. 알테아르는 사람이 살기에 지나치게 척박해서 인구수가 적으니까요…….”

그러니 인력을 모집하고 자작나무 군락으로 사람을 보내는 데에, 더비히에 비해 시간이 더 오래 걸릴 터.

‘그러니 더비히와 거래를…….’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황태자의 머릿속에 금으로 빚은 것만 같던 라야나 왕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황태자는 아래턱을 벌린 채로 잠시 굳어 있다가,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혹시…….”

“네, 전하.”

“라야나 왕녀님을 통해서 자작나무 수액을 들여올 수 있을까요?”

“네?”

에일이 당황스러워하며 되물었다. 그 얼굴을 본 황태자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거래를 위해서는 구매자와 판매자가 필요하잖아요.”

“네, 그렇지요.”

“그 판매자의 위치에 라야나 왕녀님을 둘 수 있느냔 질문이었어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황태자는 미소를 지었다.

‘에일의 말은 옳다. 굳이 그렇게까지 귀찮은 절차를 거쳐서 자작나무 수액을 수입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굳이’ 그리하지 않을 필요도 없는 일 아니던가?

황태자는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를 꾸며 내 입가에 걸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에일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자작나무 군락이 자라는 곳은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곳이 아닙니다.”

“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그 땅을 더비히 왕가가 매입하고, 우리 황실로 자작나무 수액을 공급하는 구도를 만드는 게 어떻겠느냔 의미였어요.”

자신을 타이르는 목소리에, 에일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하기라도 했는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완전히 황태자의 연기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황태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마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자작나무 수액을 수입하는 일이 한 번으로 끝날지 아닐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신분이 확실히 증명된 자와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아예 처음부터 기반을 깔아 두는 쪽이 좋겠지요.”

“아, 확실히 그렇군요.”

에일은 황태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는 황태자의 뒷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더비히는 반란 세력이 두드러지는 나라야.’

그런 더비히에 금전적인 여유가 생긴다면, 응당 반란 세력에게도 돈이 흘러 들어가겠지.

그리고 금전적인 여유가 생긴 반란 세력은 망설임 없이 양지로 올라오려 할 터.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어야 한다.’

지금의 귀족들은 지나치게 본인의 사치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러니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이 일어나 주는 게, 차라리 제국과 더비히에게 있어 약이 될 것이다.

‘곪은 종기를 터트리지 않고 내버려 두면, 살이 썩어들어 가기 마련이다.’

황태자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에일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 건은 라야나 왕녀님과 이야기를 해 보는 걸로 하죠.”

저항을 계기로 귀족들이 백성을 짓눌러서 얻을 수 있는 건 전쟁뿐이라는 사실을 부디 그들이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 * *

내 ‘부탁’에 따라 사교 파티에 참석했던 칼서스가 알테아르의 둥지로 돌아왔다. 나는 널따란 침대 위를 굴러다니다가, 벌떡 일어나 칼서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작나무 수액 영업은 어땠어요?”

“실적이 나쁘지 않았다.”

둥지로 돌아온 칼서스가 침대 옆으로 다가오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다비 카스타’의 모습이 꿈결처럼 사라지고, 흑발을 가진 엘프의 모습이 드러났다.

“더는 치과에 가서 비명을 지를 일이 없다고 하니, 다들 달가워하는 눈치더군.”

“아하하하!”

그렇게 말한 칼서스는 침대 위로 올라와 나를 끌어안고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능력을 써서 지쳤으니, 가이딩을 해 달라는 신호였다.

나는 칼서스를 똑바로 눕혀 놓은 뒤, 그를 침대 삼아 배를 붙이고 엎드렸다. 가볍게 살갗이 맞닿으며 부드러운 가이딩이 시작되었다. 약간의 우울감과 피로가 내 쪽으로 넘어왔다.

“그 밖의 소식은 더 없어요? 가일이나 황실 쪽이 난리가 났을 텐데.”

“사교계에 두문불출해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가일이 마지막 용에게 저주받아서 죽어 간다는 소식은 돌고 있더군.”

“이야기가 외부로는 안 새어 나갔나요?”

“사교계 내에서 조금씩 떠도는 정도일 뿐, 제국 전체에 소식이 퍼진 정도는 아니다.”

나는 칼서스의 가슴팍에 뺨을 대고 늘어지며 중얼거렸다.

“그 정도면 만족스러운 성과네요.”

칼서스는 늘어진 내 등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황태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다시 칼서스와 눈을 맞췄다.

“더비히의 왕녀를 자작나무 수액의 공급자로 삼았어.”

“볼모 잡혔던 3왕녀요?”

나는 눈을 느리게 껌뻑이며 물었다.

“……더비히의 왕실에 힘을 실어 주는 행위잖아요. 황태자가 왜 그런 짓을 했죠?”

“대외적으론 더비히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라고 발표해 두긴 했지만, 내심 더비히에서 소요가 일어나길 바라는 눈치였어.”

……그럼 본인 목이 위험할 텐데?

황태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인 거지?

칼서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기에 황제가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병력을…….”

“대외적으로는 나를 견제하기 위함이라고 하더군.”

칼서스의 행동은 마탑에서 모든 형제를 인도한 이후로 완전히 잠잠해졌다. 그러니 칼서스와 더 대치해서 제국에 이로운 게 없을 텐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인위적으로 봉기를 조장했다가 밟아 주는 걸로, 이후에 일어날 혁명 운동의 싹을 밟으려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가능성이 없잖아 있는 이야기군.”

이 자식, 역시 겉만 착해 보이고 속은 여우 같은 놈이었네.

나에게 빚을 달아 놓았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황태자는 생각 이상으로 더 정쟁에 능한 것 같아.

‘이 자식이 생각보다 머리를 잘 굴리는데, 앞으로 어쩌면 좋지?’

나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중앙에 있는 제국을 치려면 여러 소국이 사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게 좋은데…….”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비히에 혁명 세력이 몰리겠지.”

바로 그 부분이 문제이다.

나는 다시 칼서스의 가슴팍에 뺨을 붙이고 늘어지며 웅얼거렸다.

“더비히는 곡식이 잘 자라는 나라가 아니라 장기전으로 가면 분명히 군량이 부족해서 불리해질 거예요…….”

칼서스가 내 웅얼거림에 대답했다.

“정 반대편인 남동쪽에 위치한 에텔이 곡식이 잘 자라는 나라이다. 사탕수수 재배도 거의 그쪽에서 맡고 있었지.”

“그렇죠. 그럼 제국은 에텔에서 막대한 군량을 확보해서 참호전을 벌일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더비히가 지금 이상으로 황폐화되는 건 순식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혁명에 대한 희망이 짓밟히고 모든 왕국민이 이전보다 더한 좌절감과 절망에 휩싸일 터.

“……이대로 더비히에서 혁명 운동이 시작될 가능성이 크니, 에텔과 더비히를 잇는 무역로가 필요해요.”

“무역로가 있다고 해도 대량의 곡식을 옮기는 데는 시간이 걸려.”

칼서스가 내 등허리를 부드럽게 도닥이며 말했다.

“동부에 무엇이 있는지 잊었나?”

“동부요?”

나는 엎드린 채로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마탑!”

“그래. 이동 마법 한 번이면 원활한 무역이 가능할 테지.”

“그 방법이 있었구나!”

한순간에 걱정이 사르르 녹아 사라지고, 온몸이 환희로 가득 차올랐다.

나는 칼서스의 양 뺨을 잡고 냅다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

“어쩜 이렇게 똑똑해요?”

“…….”

“그런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입맞춤을 받은 칼서스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더 칭찬해 줘.”

“그걸 빌미로 또 가이딩 받으려는 거죠?”

“아니야.”

칼서스가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더 칭찬해 줘. 아까처럼.”

“아까처럼이요……?”

나는 고개를 숙여 다시금 칼서스의 입술 위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를 남겼다. 그러자 칼서스가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한 번만 더.”

“으, 으음…….”

그 예쁜 미소를 보자 이유 모르게 가슴 안쪽이 간질간질해졌다. 평소에도 실컷 했던 키스인데, 어쩐지 멋쩍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데구루루 굴러 칼서스의 위에서 내려오며 외쳤다.

“이, 이제 그만!”

“왜? 내가 장한 일을 했잖아. 그럼 응당 칭찬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 그…….”

나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로 소리쳤다.

“할부로 받으세요! 한 번에 다 칭찬해 주긴 힘들어요!”

그 말을 들은 칼서스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 꼴이 얄미웠지만, 나는 이유 모를 열기에 저항하느라 그를 쥐어박아 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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