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갱도 속의 왕세자 (4)
약 보름 뒤, 우리는 러드와 함께 서부로 향했다. 그는 탄광으로 쓰고 버려진 갱도를 통해 우리를 혁명군이 모인 장소로 안내했다.
횃불을 든 러드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조금 길이 험하고, 공기가 부족하지만……. 여기로 가야만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어서요.”
“저희는 괜찮아요. 이렇게 안내해 주시는 것도 감사한걸요.”
그 대답을 들은 러드는 흉터로 일그러진 입꼬리를 끌어 올려 밝게 웃었다. 뚜렷한 행복이 화상조차 감춰 주어 쾌활한 미소가 무척 보기 좋았다.
“두 분을 여기로 모시고 올 날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다시 말하지만 정말,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렇게까지 감사받을 일도 아닌걸요. 중요한 일은 다 러드 씨가 노력해 주신 덕분에 성사된 거잖아요?”
러드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래도 저는 두 분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걸요. 제가 직접 복수할 기회를…….”
“거기!”
갱도 너머에서 빛바랜 로브를 입은 남성이 불쑥 나타났다.
‘키는 훤칠하게 크지만, 목소리는 조금 앳된 편이야.’
스물 전후의 나이로 추정되는데, 정체가 뭐지?
그렇게 생각한 직후 러드가 활짝 웃으며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하, 접니다. 러드예요.”
“너였구나.”
인사를 들은 남자는 망설임 없이 후드를 뒤로 젖혀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금으로 빚어 만든 듯한 선명한 금발과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앳된 미남이었다.
‘긴 금발의 생머리와 금색 눈동자, 더비히의 왕족이구나.’
더비히의 왕족은 자신들의 금발을 신성하게 여기기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금발을 길게 기르는 편이라고 했다.
‘알아보기 너무 쉬운 특징이야.’
눈에 도드라지는 특징 탓에 혁명군 수장으로 활동하기 어려웠을 텐데, 대단한걸.
내심 감탄하고 있자, 왕세자가 터벅터벅 걸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누굴 데려온 거지?”
“아, 이쪽 분들은 저를 도와주셨던 분들인데, 혁명군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모셔 왔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왕세자와 마찬가지로 후드를 뒤로 젖히며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횃불 너머로 보인 눈이 희번덕 빛나며 살기를 드러냈다.
“이 빌어먹을 제국 놈이!”
눈을 혁혁하게 뜬 왕세자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내 목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목을 부러트려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행동이었다.
“윽!”
하지만 그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내 바로 옆에 서 있던 칼서스가 왕세자의 배를 걷어차 공격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칼서스에게 걷어차인 왕세자가 뒤로 나동그라지며 거센 기침을 내뱉었다.
“컥, 쿨럭!”
“저하!”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칼서스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사람을 그렇게 걷어차면 어떡해요, 사람은 갈빗대가 부러지면 죽는다고요.”
“널 공격하려 했어.”
“그건 그렇지만…….”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네가 타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칼서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네 목숨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
“네가 타인을 걱정하듯, 나도 너를 걱정한다. 그러니 너 또한 다쳐서는 안 돼. 내게 계속해서 걱정을 끼칠 생각은 아니지?”
“……미안해요.”
그 말을 듣자 아껴지고 있다는 감각이 피부로 와닿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하더니 양 뺨이 뜨듯하게 달아올랐다.
‘요새 칼서스가 더 다정해진 것 같아…….’
언젠가 한 번은 고맙다고 말해 줘야 할 텐데.
‘아, 그게 있었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칭찬’이 떠올랐다.
나는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곤, 뒤꿈치를 들어 칼서스의 입술 위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맞춤을 남겼다.
“저, 저!”
배를 걷어차인 왕세자가 바닥에 넘어져 끙끙거리다가, 칼서스와 나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미친 제국 놈들이! 지금이 연애 놀음이나 하고 있을 때라고 생각하나?!”
“어, 칼서스랑 저는 연인이 아닌데요.”
“…….”
“그냥 친구예요.”
그 한마디에 순식간에 갱도 안이 적막에 휩싸였다.
왕세자가 허탈해하는 목소리로 러드를 불렀다.
“러드.”
“……네, 저하.”
“원래 저런 놈들이더냐?”
“……네, 원래 저러십니다.”
러드는 그런 왕세자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저하께서 염려하신 것처럼 위험한 인물들은 아니고, 그냥……,”
잠시 말을 멈춘 러드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이상한 분들이세요.”
이상해? 나랑 칼서스가?
어디가 이상한데?
나는 당황스러워하며 러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러드,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계셨어요?”
“엉뚱한 면이 있으셔서…….”
“네? 저는 언제나 진지한데요?”
나만큼 진지하게 식민국의 안위를 고민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래? 나도 혁명군 못잖게 노력하고 있잖아.
‘나도 한국인인데! 식민 지배의 고통을 잘 이해하고 있는데! 내 어디가 그렇게 엉뚱하다는 거야?’
내가 배신이라도 당한 양 억울한 표정을 짓자, 러드는 이번에도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꼴을 보던 왕세자가 한숨을 터트렸다.
“……말을 말자.”
그러더니,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제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좀 전은 내가 좀 흥분했군. 회의실은 이쪽이다. 다른 이야기는 그곳에서 마저 하지.”
잠시 멍한 얼굴로 자리에 서 있던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도착한 곳은 시가지 외부의 건물.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 건물은 술집으로 위장해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가 암호를 말하면 숨은 회의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두 명 더 미리 와 있었구나.’
둘은 붉은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채로 회의실 의자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세자가 우리 둘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접할 건 싸구려 럼밖에 없지만, 그거라도 마시겠는가?”
“나쁘지 않지.”
칼서스는 반갑다는 듯 웃으며 대꾸하고는, 이내 내 쪽을 보며 말했다.
“해일, 넌 안 돼.”
“……저도 알아요.”
취해서 이번엔 왕세자한테까지 닥치라고 소리 지를 생각은 없었다. 칼서스가 굳이 말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금주했을 터였다.
내가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자, 왕세자가 투박한 글라스 잔에 술을 담아 칼서스에게 건넸다.
“모인 김에 통성명부터 하지.”
왕세자는 제 자리를 찾아 앉으며 말했다.
“나는 카르나 더비히. 더비히 왕국의 2왕세자이자 혁명군의 수장이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서 자리에 착석한 뒤, 후드를 벗어젖히며 말했다.
“저는 해일 트레클리프 서, 트레클리프 가문의 차기 가주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붉은 로브를 입고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씨근덕거렸다.
그 모습을 본 칼서스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느긋하게 그를 진정시켰다.
“걱정 않아도 된다. 해일은 가일에게 큰 정을 갖고 있지 않아. 게다가 가일은 해일을 죽이려 한 적도 있지.”
“……부모가 자식을?”
“그래. 그런 이유로 해일은 가일과 척을 졌다. 더는 부모 자식이라고 부를 수 없는 관계가 되었지.”
그 말을 듣자 주위에서 ‘자식을 죽이려고 하다니.’, ‘역시 피에 미쳐서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일 욕을 하니까 순식간에 분위기가 풀렸네.’
아까 내 정체를 듣자마자 화를 냈던 사람도 이젠 진정한 것 같고.
그럼 슬슬 칼서스 소개를 할 차례인가?
나는 사람들이 조금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이쪽은 칼서스 데포트. 데포트 산맥의 주인이었던 용이에요.”
그 말을 듣자마자 왕세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엉뚱하다더니, 농담이 제법인데?”
“네?”
“꽤 웃겼어.”
왕세자가 키득거리며 되물었다.
“동명이인이라는 의미지?”
“아닌데요?”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진짜 용이요. 마지막으로 남은 아홉 번째 용.”
“…….”
대답을 들은 왕세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 눈가를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트레클리프 가의 차기 가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네,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용이 너와…….”
“적당히 하지.”
칼서스는 나와 왕세자의 말을 끊더니, 손을 들어 제 후드를 뒤로 넘겨 젖혔다.
그와 동시에 끔찍하리만큼 아름다운 엘프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기는 좁아서 본래의 모습으로 변하기는 어려우니, 일단 인간이 아니라는 것까지만 받아들여 둬라.”
“…….”
“…….”
충격적인 아름다움을 목격한 사람들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칼서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약간 구겼다.
“왜 대답이 없지?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여기는 건가?”
“……칼서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칼서스에게 다시 후드를 뒤집어씌우며 말했다.
“얼굴이 대화에 방해될 수도 있으니까 후드 벗는 건 좀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요.”
칼서스가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
“내가 뭘 했다고?”
“잘생겼잖아요.”
“그게 왜 대화에 방해된단 건지 모르겠군.”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요. 나한테는 얼굴로 사용인 홀린다고 투덜거렸으면서!”
“그건 네가 예쁜 얼굴로 싱글싱글 웃고 다니니 한 말이었어.”
“칼서스는 안 웃어도 다른 사람 홀리거든요? 저기 저 표정 안 보여요?”
내가 칼서스와 투닥거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러드가 테이블을 똑똑 두 번 두드리고는 입을 열었다.
“두 분.”
“네, 러드.”
러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두 분 다 후드를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기왕이면 입도 좀 닫아 주시고.”
“…….”
……왜 나까지 다시 후드를 써야 하는 건데요?
나는 억울함에 눈으로 항의했지만, 러드는 부처처럼 미소를 지은 채로 ‘후드를 쓰세요.’라고 다시 말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얌전히 후드를 뒤집어쓰고 입도 다문 신세가 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