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가난한 자에게도 달콤함을 (1)
시간이 조금 지나 분위기가 침착해지자, 시르야가 입을 열었다.
“더비히는 곡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지금의 더비히에 대한 설명을 차근차근 이어 나갔다.
“북서쪽에 위치해 있어 사시사철 추운 날씨를 유지하는지라 곡식이 나지 않는 것도 이유이고, 재화가 부족해 곡식을 사 올 수 없는 것도 또 다른 이유이지요.”
이런 가난함에 익숙해졌는지, 슬픈 내용을 설명하는 시르야의 얼굴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동요를 보인 건 시르야가 아니라 가네시아였다.
“제국이던 시절의 더비히는 가난하지도, 척박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가네시아의 말을 듣고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더비히에서도 곡물이 잘 자랄 때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가네시아는 침착하게 ‘제가 올해로 서른넷이 되었습니다.’라는 말부터 꺼냈다. 전쟁이 벌어진 20년 전에 이미 열넷의 나이였다는 의미였다.
가네시아는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 놓고, 손가락으로 대륙의 서쪽 부근을 짚었다.
“엘프들이 본래 서쪽에 자리를 잡고 생활했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아, 아니요……. 처음 듣습니다.”
가네시아의 손가락이 주르륵 미끄러지듯이 올라가 더비히와 알테아르 사이를 가리켰다.
“엘프들이 위치해 있던 곳은 더비히에서 조금 더 북쪽에 있던 산맥입니다. 지금은 자작나무 군락으로 뒤덮여 있지만, 30년 전까지만 해도 거기엔 엘프들이 살았어요.”
가네시아는 손끝으로 그 지점을 콕콕 두드리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더비히의 사람들은 엘프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살았습니다. 엘프들은 인간들의 건축 기술을 필요로 했고, 인간들은 엘프들의 정령술이 필요했거든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정령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엘프들은 자연에 간섭할 수 있었죠. 그러니 정령술을 이용해 더비히에서도 작물이 자랄 수 있도록 했던 거군요.”
“맞습니다.”
정령술을 이용하면 척박한 대지에서도 꽃이 피게 할 수 있고, 바위틈에서도 곡식이 낱알을 맺도록 할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확실히 척박한 더비히에서도 농사가 가능했을 터.
‘훌륭한 선택이야.’
그렇다면 지금은 왜 정령술을 이용해서 농사를 짓지 않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가네시아의 말에 집중했다. 가네시아는 북서부에서 중앙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하지만 제국이 더비히를 정복한 뒤, 엘프들은 황제의 명령으로 중앙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드워프들이 황제의 명령으로 동부에서 중앙으로 터전을 옮겼듯, 엘프 또한 북서부에서 중앙으로 터전을 옮겨 왔다는 거구나.
“터전을 옮긴 후유증으로 다수의 엘프들이 병에 걸려 죽어 갔죠. 그리고 살아남은 엘프들은 드래곤과의 전투에 징집된 탓에 전사했습니다.”
“……그래서 순혈 엘프들이 멸족하고, 혼혈 엘프들만이 살아남은 거네요.”
가네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인간과 피가 섞인 엘프들은 정령술에 그리 능하지 않았기에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군인으로서의 가치가 없으니 살려 두었을 뿐이라는 의미였다.
‘순혈 엘프가 모두 죽은 것도 제국의 탓이었어.’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의 악행을 가리기 위해 드래곤에게 오명을 뒤집어씌운 거였구나.’
내가 어두운 표정을 짓자, 칼서스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나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손등을 문질러 주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카르나가 자조하듯 웃으며 가네시아의 말을 이었다.
“엘프들 없이는 농사가 불가능했으니, 더비히는 금세 황폐해졌습니다. 그나마 왕실에서 저장해 둔 구황 작물을 농민에게 보급했기에 굶어 죽는 사람들은 적었지만…….”
“왕실의 곳간이 비어 버릴 만큼 가난한 나라가 되었죠.”
러드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더비히를 벗어나 제국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가족을 잃었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제국인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지라, 고개를 들고 있을 면목이 없었다.
카르나가 그런 나를 보며 급하게 말을 덧대었다.
“지금은 그나마 상황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자작나무 수액과 외피를 수출하기로 결정되면서 왕실에 조금씩 돈이 들어오게 되었거든요. 모두 라야나 누님 덕분입니다.”
러드가 카르나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저하, 그것도 저분들의 공로입니다.”
“……뭐?”
“황실에 자작나무 수입을 의뢰했다던 카스타 영식이 바로 칼서스 님입니다.”
“하, 하지만 카스타 영식은 은발을 가진 북부의…….”
카르나가 혼란스러워하며 후드 사이로 삐져나온 칼서스의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 눈에 띄는 백금발의 머리칼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그 시선을 느낀 칼서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용은 모습을 바꿀 수 있다.”
“…….”
칼서스가 조용해진 카르나에게 한마디를 더 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해일이 지시한 대로 움직인 것뿐이야.”
그 말을 들은 나는 인상을 와작 찌푸리며 칼서스를 노려보았다.
‘자꾸 나한테 공로 몰아 주지 말라고! 내가 언제 너한테 그걸 지시했어! 너한테 알아서 하라고 떠넘긴 거잖아!’
너 솔직히 말해 봐, 카르나가 귀찮아서 나한테 자꾸 공로 떠넘기는 거지!
안타깝게도 카르나는 내가 칼서스에게 따질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형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더비히가 작물을 수입해 올 수 있었습니다!”
“아하하…….”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도원결의를 맺겠네.
나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한 뒤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 수입해 오는 정도로는 부족할 거예요.”
“네?”
“혁명이 시작되면 제국은 전쟁을 질질 끌 가능성이 큽니다. 에텔을 통해 군량을 보급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
나는 침착한 척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러니 사탕수수의 값이 떨어진 지금, 우선적으로 당밀을 수입해 와야 합니다.”
“당밀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추출하고 남는 부속물을 당밀이라고 합니다. 지금 마시고 있는 럼의 원재료이기도 하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칼서스 앞에 놓인 빈 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당밀은 영양가가 풍부합니다. 곡물 한 줌과 당밀 한 스푼이 가진 영양이 엇비슷한 정도라고 알고 있어요.”
“그, 그렇군요!”
“게다가 당밀은 곡물에 비해 값이 저렴하니, 한 번에 많은 양을 구매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네 사람이 ‘와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러드가 나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공자님의 지혜에는 매번 감탄하게 되네요. 어떻게 이런 것들을 척척 생각해 내실 수 있는지…….”
낯간지러운 칭찬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내가 계산한 게 아니에요. 나는 역사책에 적혀 있는 대로 읊고 있는 것뿐입니다…….’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세계사를 필수로 배우거든요.
나는 거기 적혀 있던 내용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뿐이에요…….
나는 또다시 칭찬이 돌아올까 봐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하여튼……, 지금의 우선순위는 당밀입니다. 그다음이 보리나 밀이에요. 지금 당장 모든 걸 사 올 여건은 안 될 테니 차곡차곡 준비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굳이 차곡차곡 준비할 필요가 있나?”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적잖아요. 너무 욕심을 내면 안 돼요.”
“자금이 적다고?”
칼서스가 그 말을 듣더니, 후드를 뒤로 젖히고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있는데 돈 걱정을 왜 하고 있지?”
“…….”
“…….”
나는 얼떨떨하게 마주 후드를 벗고 칼서스와 눈을 맞췄다.
“둥지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둥지는 어차피 공간을 왜곡시켜 만든 공간이다. 지금 사라진 건 둥지의 입구일 뿐, 왜곡된 공간 안에 존재하던 것들이 사라진 건 아니야.”
칼서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공중에서 새파란 보석 하나가 나타나 칼서스의 손바닥 위로 뚝 떨어졌다.
그건 엄지손톱만 한 사파이어였다.
칼서스는 그걸 테이블 위에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말했다.
“금과 보석이라면 산 하나를 쌓을 만큼 가지고 있어. 그리고 소금과 설탕도, 이런 방 두어 개는 가볍게 채울 수 있을 만큼 보관하고 있지.”
“…….”
“소금과 설탕만으로도 전쟁 시 발생하는 많은 질병들을 막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어요…….”
칼서스는 오만하게 아래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에겐 다비의 둥지도 있어.”
“…….”
칼서스의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한낮의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눈가가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제국의 부유함도 용의 앞에서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돈 걱정 따위 하지 마.”
“…….”
“에텔을 털어 오겠다는 생각으로 군량을 비축해.”
그 말을 들은 모두가 넋이 빠져 칼서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도 넋이 나간 것처럼 멀거니 칼서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칼서스…….”
“왜.”
“당신이 내 갑이라서 너무 행복해요…….”
‘갑’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한 칼서스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법카 찬스를 얻은 나는 행복해하며 칼서스에게 달려들어 뺨에 쪽쪽 입술 도장을 찍어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