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53화 (53/101)

53.

가난한 자에게도 달콤함을 (3)

여름이 끝나고, 가을과 겨울을 지나 어느덧 따듯한 봄이 돌아왔다. 봄을 맞은 나무는 파릇파릇한 새잎을 틔웠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짐승들은 녹색으로 뒤덮인 산을 자유롭게 오갔다.

그러나 제국의 황제는 이러한 봄의 파릇파릇함을 즐길 수 없었다. 그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에일에게 되물었다.

“……심을 밀이 없다니?”

“그, 그것이…….”

에일이 고개를 푹 수그리며 재차 설명했다.

“작년에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물을 많이 끌어다 쓴지라, 밀 수확량이 부족했었답니다. 그래서 종자로 써야 했던 양의 밀까지 다 먹는 데에 사용한 것 같습니다…….”

“가을에 파종한 밀은 어찌 되었는가?”

“그것이…… 저수지의 물까지 사탕수수 재배에 사용한 탓에 농수로 사용할 물이 없어서…….”

이른 봄에 가뭄이 드는 건 제법 잦은 일이다. 에텔의 사람들은 그럴 때를 대비하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비축해 두었다가, 가뭄이 드는 봄에 사용했다.

그러나 지난해 재배한 것은 밀뿐만이 아니었다.

‘사탕수수는 밀보다 많은 물을 들여서 재배해야 해.’

그러다 보니 저수지에 물을 비축하기 무섭게 사탕수수 밭에서 그 물을 끌어다 쓴 것이다.

“그 결과로, 물이 부족해서 밀이 채 익기도 전에 말라 죽어 버렸다는 모양입니다.”

“…….”

에일은 당황스러워하는 황제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국에서 비축해 둔 밀을 에텔로 보내 종자로 삼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제국의 백성들은 어쩌란 말인가?”

황제가 미간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호통을 쳤다.

“제국의 백성들은 하찮은 구황 작물을 먹고, 에텔의 백성들에게 밀을 먹게 하자는 말인가?!”

“소, 송구합니다!”

에일이 급하게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았다. 바닥에 쿵 소리가 나게 찧은 이마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황제의 앞이기에 앓는 소리를 낼 수조차 없었다.

황제가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제국으로 보내는 밀의 양은 작년과 동일하게 하라.”

“…….”

에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에텔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안 그래도 에텔은 대대로 왕실이 선정을 펼친 것으로 유명한 데다 오랫동안 큰 분란 없이 평화로웠던 나라이다.

‘제국 때문에 에텔의 백성이 먹을 밀을 빼앗는다고 하면, 에텔의 왕족이 난리를 피울 텐데…….’

……하지만 대륙을 평정해 그 권력이 살아 있는 신이나 다름없는 황제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

에일은 힘겹게 입을 열어, 황제의 명령에 답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대답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올린 에일의 표정엔 심란함이 묻어났으나, 낮은 곳을 굽어보지 않는 황제는 에일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 * *

나는 찻물을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지금쯤 중앙은 난리가 나 있을 거야.”

내가 차를 마시고 있는 곳은 칼서스가 새로 마련한 둥지였다.

둥지는 어김없이 베르사유의 궁전처럼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는데, 나는 그 궁전의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농지를 빼앗아 사탕수수를 기르고, 저수지의 물까지 닥닥 긁어 썼어. 밀을 똑바로 수확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단장님, 진짜 교활해요.”

린은 그렇게 말하며 칼서스가 구운 스콘을 반으로 갈라 한쪽 면에 잼을 발랐다.

칼서스는 그런 린을 노려보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교활한 게 아니라 현명한 거다.”

“노려봐도 안 무섭거든? 위협할 거면 단장님 옆에서 좀 떨어지기나 하든가.”

“해일과 나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야.”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린은 인상을 구기며 본드로 붙여 놓은 것처럼 내 곁에 착 달라붙어 있는 칼서스를 삿대질했다. 오르가는 그런 린과 칼서스를 한심하다는 눈길로 바라봐 주고는,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장님, 그러면 에텔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대로 굶어 죽게 둬야 하는 건가요?”

“내가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에텔은 원래 풍족한 도시였으니 이렇게 대대적인 가뭄은 난생처음 겪어 보는 일일 거야.”

“그럼 더더욱 에텔을 도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먹을 물자는 충분해. 작년에 옥수수와 보리도 추가로 확보해 뒀고, 더비히에서 콩도 수확하고 있으니 그걸 수출할 수도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전자를 들어 오르가의 잔에 따듯한 홍차를 따라 주었다.

“다만 우리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왜요?”

“곧 에텔에도 혁명을 외치는 무리가 생길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오르가는 눈을 끔뻑거리며 의아해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제국에서 에텔에 대한 구휼 정책으로 구황 작물의 종자를 보냈잖아.”

“그게…… 왜요?”

이번에는 칼서스가 어이없어하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구황 작물의 종자를 보내면서, 납세해야 하는 밀의 양을 줄여 준다는 문서는 보내지 않았다. 그게 뭘 의미할 것 같나?”

“……아!”

오르가가 그제야 손뼉을 치며 외쳤다.

“제국이 밀을 독식하려는 속셈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에텔은 곡물이 풍부한 나라라 백성 대부분이 주식을 빵으로 삼았을 텐데, 빵의 가격이 네다섯 배 오르면 어떻게 되겠어?”

“……제국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겠죠.”

돈이 있음에도 빵을 사지 못하고, 싹이 난 감자를 도려내 먹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때를 노려 비축해 뒀던 작물을 에텔에 공급할 거야.”

그렇다면 더비히는 ‘가장 척박한 왕국’으로 불리고 있음에도 에텔에게 선의를 베푼 것이 된다.

“작물을 헐값에 공급해 주면서, 서부의 혁명군이 비축해 둔 물자를 쪼개 에텔의 백성을 구하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퍼트리면, 순식간에 에텔에서 혁명군 세력에 가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럭무럭 불어나겠지.”

“…….”

“…….”

굶주림을 겪기 시작한 에텔의 백성들은, 지금껏 굶주려 온 더비히의 백성들에게 순식간에 동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동질감은 곧 공감으로 변할 것이고, 공감이 형성된 백성 사이에는 연대가 생겨날 터.

“제국은 혁명 운동의 조짐이 보이는 서부 쪽을 견제하느라, 병력을 서쪽에 몰아 뒀어. 그러니 처음으로 혁명 운동을 벌이는 곳은 남동쪽에 있는 에텔이어야 해.”

“동쪽의 병력이 약해서, 에텔이 승산이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

나는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국 내부가 혼란에 빠져서 우왕좌왕거릴 게 뻔하잖아? 그때를 노려서 서부에서 밀고 들어가야지.”

“…….”

“동부로 기사를 배치한 순간 더비히가 중앙으로 밀고 들어갈 거야. 에텔은 중앙하고 오래 대치할 만큼 병력이 강하지 않으니까, 병력이 동쪽에 집중된 사이에 최대한 빠르게 중앙을 점령하고 해방을 선포해야지.”

“와…….”

오르가의 감탄 소리를 들은 칼서스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반년간 이것 하나 이해 못 하다니. 대체 기사라는 것들이 전술에 대한 공부도 안 하고 뭘 했나?”

“아 도마뱀 넌 좀 닥치라고!”

“너는 우리 혼낼 권한도 없거든?!”

짜증 섞인 외침을 들은 나는 양손으로 칼서스의 귀를 막아 주며 투덜거렸다.

“왜 그래, 칼서스가 혼 좀 낼 수도 있지. 천 년 묵은 어르신인데 어르신 대우 좀 해 주면 뭐 어때서.”

“너…….”

귀를 막았으나,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내 말을 들은 칼서스가 황당해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 내가 틀린 말 했어요?”

“…….”

내가 뻔뻔하게 나오자, 칼서스가 미간을 구겼다. 그러고는 칭얼거리듯 내 어깨에 이마를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키스해 줘.”

“또 키스해 달래. 이미 다섯 번이나 해 줬잖아요.”

“내 기분을 망쳤으면 책임을 져야지.”

“가이딩은 더 무리예요.”

“그럼 ‘칭찬’이라도 해 줘.”

나는 린과 오르가가 앉은 쪽을 흘긋거리며 말했다.

“……애들이 보잖아요.”

“여기서 제일 어린 건 너야.”

“그래도 제 부하니까 애들이죠.”

“키스해 줘.”

칼서스는 집요하게도 키스해 달라는 말을 내뱉으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얼굴이 다 홧홧해졌다.

‘이 망할 드래곤, 왜 이렇게 키스에 집착하는 거야……’

가이딩을 해 달라고 하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요새 들어 자꾸 칭찬을 빌미로 이유 없는 키스를 받으려고 한단 말이지.

‘자꾸 칭찬이라면서 키스를 조르니까, 기분이 이상해지잖아…….’

그렇다고 애타게 졸라 대는데, 안 해 줄 수도 없고…….

나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다가, 앓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혀 넣지 말기.”

“응.”

“입술 깨물지 말기.”

“그래.”

“입술 핥는 것도 금지예요!”

“알겠어.”

나는 칼서스에게 확답을 받고 나서야 고개를 기울여 그와 입술을 겹쳤다. 잠시 맞닿았던 입술은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조금만 더.”

“이익!”

“뺨에도, 콧등에도, 이마에도 해 줘.”

“아,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아요!”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칼서스를 노려보았으나……. 망할 도마뱀은 긴 속눈썹이 자라난 눈을 느리게 껌뻑이며 눈빛으로 나를 채근했다.

‘내 용만 아니었으면 진짜 모른 척해 버렸을 건데…….’

……내 용이라 참는다!

나는 결국 그의 칭얼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얼굴 위로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눌러 주었다.

덕분에 린과 오르가는 차를 마시다가 연신 헛구역질을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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