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63화 (63/101)

63.

에텔에는 여덟 개의 태양이 뜬다 (3)

“황족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린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당히 대꾸했다. 그 모습을 본 가일이 쥐고 있던 머리칼을 놓아주고는, 성큼성큼 린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 내가 그럴 리가 없잖나.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문책하고 있었을 뿐이다.”

“누가 머리채를 쥐고 문책을 한답니까?”

린의 시선이 가일의 몸뚱이를 쓱 훑고 내려갔다.

“그것도 그런 몰골로요.”

“…….”

모욕적인 눈길을 받은 가일의 잇새에서 이가 갈리는 까드득 소리가 튀었다. 린은 그 까드득 소리를 들었음에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리오르, 박박 씻겨 버려. 보기 추하다.”

[명 받듭니다.]

린의 등 뒤에 자리 잡고 있던 실리오르가 공중으로 붕 날아오르더니, 다이빙을 하듯 가일의 머리 위로 풀쩍 뛰어내렸다. 물로 이루어진 몸뚱이가 가일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자 파도가 치는 듯한 ‘철썩’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물에 빠진 쥐 꼴이 된 가일이 불쾌해하며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푹 젖은 머리칼이 뒤로 넘어가며 묽어진 핏방울이 주위로 튀겼다.

“……그대야말로 뭐 하자는 건가.”

“기사는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간단한 규정도 잊은 것 같아서 도와드린 겁니다.”

린은 태연하게 대꾸하며 가일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런 꼴로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면 누구라도 겁을 먹고 말을 더듬겠지요.”

“…….”

“당신이 한 건 문책이 아니라 협박입니다.”

린은 한 번 더 손가락을 휘둘러 가일의 얼굴에 정면으로 물세례를 날렸다.

“폐하께서 당신에게 권력을 쥐어 주셨다고는 하나, 그게 당당하게 황족의 권위에 도전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제를 파악하시죠.”

린은 제 할 말을 마치고는, 축축해진 가일의 옆을 스쳐 지나가 셰아드의 앞으로 향했다. 린이 품에서 반지를 꺼내 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녀님, 찾으시던 반지입니다.”

“아! 제 반지!”

“기도실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셰아드는 제게 익숙한 반지를 양손으로 꼭 쥐고는 울먹울먹한 얼굴로 린을 바라보았다.

“찾아 주셨구나, 고마워요…….”

가일이 미간을 구기며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손바닥으로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흘긋 뒤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일부러 사사건건 내 일에 훼방을 놓는 것만 같군.’

저놈이 반지를 찾아왔으니, 더 이상 셰아드 에텔을 추궁할 수는 없다. 가일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는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가일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린 멜리온.”

“…….”

“오늘의 충고는 기억해 두지.”

“기억만 해 두실 겁니까?”

린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끌어당겨 가일을 비웃었다. 그러고는 웃음기가 듬뿍 담긴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새겨 두십시오.”

가일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놈……. 네놈이 단장만 아니었어도 오늘 일은 곱게 넘어가지 않았을 거다.”

황궁 밖에서의 계급이 어찌 되었건, 황제가 있는 황궁 안에서 가일과 린은 같은 ‘단장’ 직급일 뿐이었다. 그러니 방금 벌어진 일은 어디까지나 ‘2단장이 1단장에게 경고를 했다.’ 이상으로 취급될 수 없었다.

“근무 중이니 너그럽게 넘어가 주지.”

“…….”

“여기가 근무지인 황궁이 아니라 파티 홀의 내부였다면 너는 중죄인이 되었을 것이다. 누가 뭐라 하든 나는 트레클리프 공작가의 가주이고, 너는 준백작이니 말이다. 폐하의 보살피심에 감읍하도록 해.”

가일은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터벅터벅 걸어 멀어졌다.

린은 그 뒤통수에 대고 입 모양으로 “재수 없는 새끼.” 하고 욕을 내뱉었다.

가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셰아드가 린의 옷깃을 붙잡으며 급하게 질문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반지는 어떻게 린 단장님이 가지고 계셨던 거죠?”

“아, 그거요?”

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허공에 가볍게 손가락을 휘둘렀다.

“포엠, 모습을 드러내.”

[주인의 명, 따라.]

그러자 린의 손끝을 타고 마나가 흘러나오더니, 하얀 나비의 모습이 되었다.

셰아드 왕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나비?”

“도청용 정령입니다.”

린이 소개하자, 포엠이 셰아드 왕녀의 주변을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재잘거렸다.

[나는 포엠. 주인의 또 다른 귀야.]

“귀여워라…….”

[못된 가일을 감시하고 있었어.]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말을 들은 셰아드 왕녀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린은 긴장이 풀린 셰아드 왕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단장님께서 가일의 주변에 도청용 정령을 붙여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 정령을요?”

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장님께서 말하기를, ‘가일은 생각보다 교활한 놈이니 이때를 틈타 에텔에서 일어난 봉기에 왕족이 개입했다는 증거를 억지로라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하, 하지만 반지를 잃어버린 정도로 어떻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린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황성 안에서 반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걸 핑계로, 왕녀님이 외부의 누군가와 내통했다고 주장했겠죠.”

“…….”

“그리고 반란을 꾀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씌워서 에텔 왕실에게 압박을 가하거나, 이번 출병을 정당화시키려 들었을 수도 있었어요.”

린의 예상대로라면 에텔 왕실이 반란을 꾀한 셈이 된다.

그렇게 되면 가일은 이번 출병으로 ‘반란군 제압’이 아니라 ‘에텔 왕족의 말살’을 꾀할 수도 있었을 터.

그 사실을 알아챈 셰아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다행히 늦지 않게 막았네요.”

린은 굳어 버린 셰아드의 등을 토닥여 주더니, 살짝 까치발을 들어 셰아드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리고 에텔 국경선에 혁명군을 파견해서 국경을 방어할 예정이니, 이제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셰아드의 잇새로 안도의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그녀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한 차례 비틀거리다가, 다시금 굵은 눈물방울을 퐁퐁 흘리기 시작했다.

“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은혜라니요.”

린은 그 나이대 청년답게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단장의 말에 따랐을 뿐이에요.”

“그래도…….”

그래도 덕분에 내 나라 백성들이 무사한데, 어떻게 이게 은혜가 아닐까요.

셰아드는 먹먹하게 치솟는 눈물 때문에 하고 싶었던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울먹거리다 결국 와앙 하고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린은 그런 셰아드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마음 여린 왕녀의 곁을 지켜 주었다.

* * *

“제 예상이 맞았다는 모양이에요.”

일주일이 지나고, 정기 회의가 돌아왔을 때였다. 나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테라시아가 주고 간 쪽지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셰아드 왕녀를 이용해서 나라 간 마찰을 만들려다가 실패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반지를 달라고 하셨던 거군요.”

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일은 통상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웅과는 달리, 계략에도 능하고, 눈치도 좋거든요.”

게다가 자신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게 설령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도 서슴지 않고 하는 놈이기까지 하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거기다가 나이를 먹어서 노련해지기까지 했으니……, 내가 진짜 이십 대의 해일이었다면 가일의 심계에 속수무책으로 놀아났겠지.’

내가 한평생 닥치는 대로 책을 읽던 책벌레라서 어찌어찌 막아 낸 거지, 통상의 이십 대였다면 가일의 생각을 짐작해 내지도 못했으리라.

나는 쪽지를 카르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출병을 앞당기기 위해서 시위를 이용하려고 했는데, 지금 가일의 행태를 보면 그건 위험할 것 같네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러드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에텔의 기사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기만 해야 하는 건가요?”

“그런 무서운 말씀 마세요. 저희한텐 칼서스가 있잖아요? 용이 여기 있는데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나는 잘생긴 엘프를 앞으로 들이밀어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더 생각을 해 보면 답이 생길 거예요.”

내 너스레가 먹힌 건지, 그 말을 들은 러드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신뢰해 줘서 고맙군.”

“금세 기세등등해지긴.”

칼서스는 새초롬한 대답을 들었음에도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아양을 떨었다.

“아우, 회의 좀 합시다.”

나는 낯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칼서스를 밀어 낸 뒤, 뒤늦게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쓸 수 있는 수가 얼마나 있지?’

린을 통해서 주의를 주긴 했으나, 이 정도로는 가일이 물밑에서 벌이는 모략까지 완전히 틀어막는 건 불가능하다.

‘라야나 왕녀님이 나서기엔 너무 위험하고, 그렇다고 다른 공작가의 인물을 매수하기엔 시간이 부족해.’

게다가 다른 공작가의 인물들이 굳이 지금 황궁에 드나들 합당한 이유를 만드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릴 터. 그러니 황궁 출입이 자유로운 사람 중에서, 제법 지위가 높은 사람을 찾아야 할 텐데…….

“……아.”

“해일?”

있구나.

딱 한 사람.

“이데아 아르테스.”

아르테스 황가를 이어 갈 차기 황제이자, 우리의 계획에 어울리기를 희망하는 황태자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가일은 아르테스 황가의 번견이잖아.’

그렇다면, 정통한 핏줄을 가진 아르테스 황족이 명령한다면 분명히 저항 없이 따를 터다.

나는 씩,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가 가일의 목줄을 잡아 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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