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프롤로그
눈보라가 불었다. 흰 결정이 섞인 거친 공기가 숲을 날카롭게 헤집고, 세이아드는 그 속에서 고개를 간신히 세웠다. 당장에라도 등을 짓눌러 그를 쓰러지게끔 할 듯한 바람이 버거웠다. 평생을 함께한 몰아치는 겨울의 칼바람이 오늘따라 낯설고 시렸다. 닿는 곳마다 얼어붙어 살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팠다.
속에서 올라온 기침과 함께 입 안에 피가 찼다. 울컥 차오른 핏물은 가슴팍을 한번 들썩일 때마다 역류했다. 시큼하고 비릿한 냄새가 사방에서 났다. 흰 눈이 내리고 있음에도 사위가 온통 붉었다.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그는 눈앞에 내려앉은 광경을 천천히 담았다.
사방에 널린 핏기 없는 늘어진 얼굴들 위로 피가 뿌려져 있었다. 차가운 대지에 겹겹이 쌓인 시체가 이곳저곳에 작은 산을 이루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침묵에 잠겨 영면에 들어 있었다. 성한 시체가 하나도 없었다. 강인한 힘에 의해 단숨에 잘려 나간 듯한 거대한 상처가 망자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죽은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는 듯, 그저 텅 비어 놀란 채였다.
세이아드는 저 상처가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 알았다. 누워 있는 저들의 얼굴 또한 알았다.
“저기 보입니다! 찾았습니다!”
“다들 이리로!”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나 싶더니, 인기척이 차차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법 먼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달려온 기운들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세이아드의 등 뒤를 포위했다. 삽시간에 드리운 그림자들이 세이아드를 둘러쌌다. 세이아드가 지닌 것과 다름없는 강한 파장들이 그의 피부를 찔렀다. 내내 그를 쫓아온 왕국의 수호자들과 기사들이었다.
“저 악마가 능력을 쓸 수 없게 최대한 그림자를 없앨 테니, 다들 조심해.”
남자의 목소리가 들림과 함께, 태양보다 밝은 흰빛이 공중으로 퍼졌다. 그러나 사방을 희게 물들인 빛으로도 눈앞의 참상을 가릴 순 없었다.
“시온, 저자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않게 조심해요.”
“알겠어, 노바. 넌 언제든지 저놈의 목을 벨 수 있게끔 준비해. 스텔라는 저놈을 포박해 주고.”
눈 속에 파묻혀 조용한 발걸음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세이아드는 무릎 꿇은 채 앞을 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동 없이 앉아 있는 그를 예민하게 경계하는 사람들의 눈길이 느껴졌다.
이윽고 얼어붙은 땅이 쿠르르, 진동하며 울리더니 이내 딱딱한 흙 속에서 말라붙은 뿌리 넝쿨들이 솟구쳤다. 굵직하고 단단한 나무뿌리들이 세이아드의 발목, 허벅지, 허리 할 것 없이 그를 꽉 붙들어 속박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신이 꽉꽉 묶이고 나서야 사람들이 서서히 그에게 가까워졌다. 세이아드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솔리아스의 악마라 불리더니 끝내 그 이름을 따라갔군.”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가 세이아드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세이아드는 고개를 들지도,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까부터 보고 있던 시체들을 하염없이 주시할 뿐이다. 그의 시선이 자리한 곳으로 눈길을 돌린 남자는, 그 광경이 더없이 괴로운 듯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갈무리해 두었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래, 다 네가 죽인 무고한 기사들이다! 수를 셀 수조차 없어!”
절규 같은 비명과 함께 금방이라도 세이아드의 목을 벨 듯 남자가 칼을 휘둘렀으나, 칼날이 목에 닿기 전 곁에 선 여자가 그를 말렸다.
“시온, 그만해! 티테르의 처형은 우리 권한 밖이야.”
“이 끔찍한 악마는 한시라도 빨리 죽는 게 맞아!”
악마라는 말이 세이아드의 귓가에 울렸다. 고막이 크게 상한 건지 들리는 소리가 하나같이 먹먹하고 흐릿했다. 아까부터 이마에서 흐르던 피가 눈썹을 타고 내려와 속눈썹에 고였다. 무겁게 늘어지는 속눈썹이 시야를 붉게 가렸다. 새빨갛게 물든 장면들 속에서 세이아드는 눈앞에 쌓인 저 시체들이 전부 자신의 손으로 앗아 간 목숨이라는 걸 자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나라를 지키는 티테르인 자신의 손으로.
새카맣게 칠해져 있던 기억이 느릿느릿 돌아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유리 너머에 갇혀 남의 일을 보는 것처럼, 그가 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꼭 다른 사람이 한 일을 보는 기분이었다.
혹한기의 마지막 달. 창궐하는 괴물, 니르아를 죽이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전투를 치르던 중이었다. 힘을 쓸 때마다 드문드문 의식이 사라지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죽여야 할 것들이 아닌 지켜야 할 것들을 죽이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먼 과거, 힘을 제어하지 못해 폭주했던 티테르는 존재해 왔으나 이렇게까지 많은 학살이 일어났던 적은 역사상에 없었다. 니르아와 인간을 구분하지 못해 죽였던 이는 있어도, 제 종족만을 이렇게 끔찍하게 죽인 티테르는 들어 본 적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세이아드는 다른 이들보다도 유독 결벽적으로 폭주를 경계해 왔다. 힘을 쓴 날이면 반드시 가이드를 찾았고, 그의 가이드와는 완벽한 상성을 자랑했다. 상성이 맞지 않으면 몰라도, 늘 그를 돌보던 가이드가 있었으니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하필이면 왜 갑자기 혹한기의 끝자락에 의식을 잃은 것인지, 근원을 알 수 없었다.
“노바, 시온. 물러서. 전하께서 오셨어.”
끊임없이 귓가를 울리던 고함과 분노 어린 웅성거림이 갑자기 잦아들었다. 일순 조용해진 공기 속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밟는 소리가 사락, 사락, 울리더니 이윽고 장신의 사내가 세이아드의 앞에 멈춰 섰다. 눈보라에 젖은 바람 냄새와 피 냄새만 가득하던 공간에 얼음새꽃 냄새가 은은히 퍼졌다. 세이아드만이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희미하게.
“전하, 부디…! 제발, 무고한 목숨을 달래 주십시오.”
세이아드는 겨우 눈을 돌려 고개를 들었다. 느릿하게 올라간 시선 끝에는 하얗고 온화한 얼굴이 있었다. 솔리아스의 떠오르는 태양, 레사스 왕자. 한때는 세이아드가 내려다보아야만 했던 작고 어린 소년은 이제 그보다도 커진 키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악시드 대공.”
나직이 내뱉는 목소리는 다른 이들과 달리 격동하지 않았다. 분노로 떨리지도 않았고 증오로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언제나와 같이 차분하고 서늘했을 뿐이다. 밤하늘을 담은 눈으로 세이아드를 보며 웃어 주던 눈이 저렇듯 변한 지 오래전이다.
감정을 쓰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무미건조하고 냉정한 시선.
“이것이 그대가 원했던 길인가? 스스로의 힘 하나 다루지 못해 이토록 많은 피를 묻히는 것이?”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돌아오는 물음에 세이아드는 입술을 달싹였다. 끔찍한 사실을 적시하며 쏟아지던 비난에도 움직이지 않던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도 어쩐지 뭔갈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열린 입에서 나온 것은 목소리가 아닌 검붉은 핏덩이였다.
쿨럭, 낮게 깔린 기침이 울리며 피가 쏟아졌다. 가슴팍이 크게 들썩이며 부풀어 오르고 가라앉을 때마다 세이아드는 피를 토했다. 레사스 왕자는 잠시 침묵하며 그 광경을 주시했다.
누구보다도 강인한 육체는 왕국 내 모든 티테르의 힘을 합친 공격에 의해 이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구태여 목이 베이지 않더라도 그는 어차피 죽을 터였다. 죽음이 점점 다가왔다. 세이아드의 속은 진창이 되어 있었고 외피는 넝마처럼 변했다.
“그대를 구할 이는 아무도 없다. 왕세자께서는 네 처분을 내게 넘겼다.”
줄곧 모시던 왕세자가 저를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는 말에, 세이아드는 눈을 감았다. 의식이 돌아오면서 자신이 한 짓을 깨닫는 순간부터 예상했던 것이다. 폭주하는 동안 그가 죽인 이들의 수는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왕세자가 아닌 국왕이어도 절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평생을 바친 충성의 끝이 허망했다. 왕세자의 명에 따라 묻혀야 했던 많은 피들이 고작 이런 결말을 위해서였나, 싶었다. 억울한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밝혀 주겠다고 약조하며 그를 거둬 가던 왕세자는 결국 아무것도 이뤄 주지 않았다.
제가 이리 폭주할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터이니 어쩔 수 없겠다 싶으면서도, 언제나 곁에 있으며 저를 진정시켜 주겠다던 주군이자 그의 가이드가 지금 이곳에 없다는 사실이 한없이 비참했다.
분노와 배신감보다는 괴로움이 밀려들었다. 가슴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허무하고 무서울 정도로 절망스러웠다. 이상하리만치 오래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영혼이 갑자기 감정을 되찾은 듯, 세이아드는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에 짓눌렸다.
한평생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던 삶의 끝이 바로 이런 것이었나?
어머니를 억울하게 잃은 뒤부터 세이아드는 오직 하나만을 보고 살았다. 어머니의 무고함을 밝혀 주겠다 맹세한 왕세자를 굳건히 왕위에 올리고자, 누구보다도 니르아를 많이 죽여 공을 쌓았고 둘째 왕자인 레사스를 견제했다. 그런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왕세자 하나뿐이었는데, 그 유일한 존재는 지금 이곳에 없었다. 그를 살려 주긴커녕 죽음조차 지켜봐 주지 않았다.
허망했다, 그저.
세이아드는 힘겹게 눈을 떠 그를 둘러싼 이들을 보았다. 핏발이 선 붉은 눈으로 그를 노려다 보는 남자, 시온은 왕국의 사랑 받는 티테르였고, 노바는 세이아드를 존경하며 따르던 소녀였으며, 스텔라는 세이아드가 주변의 모든 사람을 쳐 낸 이후에도 한동안 그를 챙기던 동료였다. 이 모든 티테르 중에서 오직 세이아드만이 추악했다.
그는 지금 이곳에서 오롯이 혼자였다. 그의 아는 모든 이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으며, 그가 모시던 주군에게서도 버림받은 채.
그들로부터 눈을 돌려 세이아드는 레사스 왕자를 주시했다. 반항할 의지가 없는 세이아드의 창백한 얼굴을 본 왕자는 조용히 그의 가슴 중앙에 칼끝을 댔다. 밤하늘의 보라색이 담긴 눈동자가 세이아드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동요 없이 건조한 차가운 얼굴을 보며 세이아드는 불현듯 어떤 과거를 떠올렸다.
‘이드. 나를 버리지 말아요….’
오직 세이아드만이 어린 왕자를 품어 주던 때가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폐궁의 왕자에게 다가간 그날 이후, 왕자는 어린 새처럼 세이아드만을 따랐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먼 과거의 일.
가문의 몰락과 함께 세이아드가 그에게 앞으로 찾아오지 않겠다고 말하던 그날, 왕자는 울면서 그의 발치에 매달렸다. 그의 신분도 뭐도 상관없다는 듯 간절하고 처절하게.
물기에 젖은 보라색 눈이 얼핏 지금의 왕자와 겹치는 순간, 세이아드는 괴로운 깨달음과 조우했다. 건너편에 선 이 모든 이들은 세이아드가 제 손으로 직접 저버린 자들이라는 걸.
“당신처럼 끔찍한 이는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왕자는 더는 말조차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장검 손잡이를 쥔 흰 손에 푸른 핏줄이 섰다. 아주 짧은 침묵 후, 길고 곧은 손가락이 손잡이를 꽉 다잡았다. 결정을 내린 손이 단숨에 움직였다.
세이아드는 콰직, 하고 파고드는 칼을 느꼈다. 얼어붙을 정도로 시린 고통이 뼈를 가르고 몸에 푹 박혔다. 숨이 턱 막혔다. 간신히 맥동하던 심장이 갈라지며 끝을 예고했다. 통증은 한순간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의식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찰나 같기도 했고 영겁 같기도 한 마지막 길에서, 세이아드는 강렬한 후회를 마주했다. 이 끝을 거슬러 올라간 모든 순간이 정말 그가 원해서 했던 일이었나 싶어서.
그래,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세이아드는 이 많은 이들을 절대 죽이고 싶지 않았다. 목적을 위해 누구도 옆에 두지 않고 살았지만, 그 행동의 기저에는 제 의무만큼은 다하겠다는 마음이 항상 존재했다. 더 많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소수의 목숨을 저버렸던 것도 모두 그런 의지에서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단 하루라도 가능하다면, 스스로를 죽여서라도 이 일을 막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죽어 가는 자의 뒤늦은 후회일 뿐,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안다.
미련에 물든 의식이 흩어졌다. 까만 어둠이 내려앉았고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를 가두고 있던 육신이 사라지는 감각과 함께 완전한 종말이 도래했다.
그렇게 어둠에 묻혀 사라지던 그때, 세이아드는 기이한 환상에 갑작스레 휩쓸렸다. 하얀 대낮의 왕궁은 불타오르고 있었고 니르아들이 부서진 성벽을 기어 넘었다. 크고 작은 새카만 괴물들에게 수많은 사람이 밟히거나 먹혀 죽었고, 하늘을 밝히던 태양이 삽시간에 사라지며 달이 없는 밤이 찾아왔다. 마침내 그들의 밤을 되찾은 니르아들은 도망가는 이들을 남김없이 학살했다. 피가 강물처럼 흘렀고 비명이 사방을 채웠다.
‘이게 대체…?’
세이아드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니르아를 처단해야 할 티테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사람들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니르아에게 먹혀 사라졌다.
‘그만, 그만해! 다들 어디 있는 건가!’
세이아드의 외침은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끔찍하게 메아리쳤을 뿐이다. 그의 눈에 수많은 죽음이 씌워졌을 때쯤, 눈앞의 장소가 바뀌었다.
무너지는 왕궁 속에서 세이아드는 홀로 검을 들고 서 있는 레사스 왕자를 보았다. 그의 발치에는 싸우다 죽은 기사들이 즐비했다. 혼자 있는 왕자의 앞으로 여태껏 본 적 없는 거대한 니르아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비틀린 악몽을 모아 만든 것만 같은 뱀을 닮은 괴물은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더니, 곧 레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괴물의 아가리가 왕자를 삼키는 순간, 세이아드는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