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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8화 (8/147)

#08

가라앉은 침묵을 등 뒤에 두고 걸어가는 기분이 묘했다. 가시밭을 밟는 것처럼 불편했고 어쩐지 가슴이 답답했다. 왜 이런 불쾌한 감각을 느끼는지 알 수 없어 세이아드는 입매를 굳혔다. 방금 목격한 광경이 이유 없이 부채감을 남겼다.

솔직히 평하자면 오늘의 아스테르는 기분이 좋은 편이었다. 그의 기분이 평소보다 언짢았다면 레사스는 이보다 더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말을 들을 수도 있었다. 이마저도 지금은 양호한 편으로, 차후의 아스테르는 수시로 그가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을 벌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아스테르의 행동을 지탄하지 못했다. 왕실이 왕실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가이드의 힘을 가지기 때문이었고, 그게 솔리아스라는 성을 달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세상의 눈에 레사스는 솔리아스이나 솔리아스여선 안 되는 존재였다. 그의 핏줄인 왕과 왕후마저 그를 외면했으니, 감히 타인이 레사스를 변호할 수 없었다.

세이아드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숱하게 보아온 광경이기도 했으니 이제 와서 이상하게 여길 이유도 없는데, 왜인지 마음이 껄끄러웠다. 굳이 입 밖으로 멸시하지 않아도 왕자 본인이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책망하는 걸 잘들 알 텐데.

“이드.”

불현듯 불린 애칭에 세이아드가 눈을 깜빡였다. 아스테르의 푸른 눈이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횃불이 일렬로 늘어선 신전의 기둥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의식이 목전이었다.

“오늘따라 이상해. 내게 집중을 못하고 있군.”

가늘게 접힌 눈이 세이아드를 꿰뚫을 듯 살폈다. 파장으로 서로를 읽는 가이드와 티테르이니만큼, 아스테르는 세이아드의 변화를 언제나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말해 봐.”

그를 감싸는 아스테르의 음성은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듯 다정했다. 무엇이든 고해도 될 것 같은 자상한 모습이었다.

“…돌아볼 가치도 없는 이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시는 듯하여.”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 없는 말이었는데, 이성보다 충동이 앞섰다. 세이아드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내 명을 거역하고 그놈을 본성에 두었나?”

아스테르는 피식 웃으며 제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설 속에서는 악마의 시체를 올려 두었다는 그곳에는 악마를 대신한 제물이 있었다. 미리 기절시켜 둔 염소가 네 발이 묶인 채 눕혀져 있었다.

“의식 당일에 불미스러운 잡소문이 도는 게 성가셨을 뿐입니다.”

앞서 아무 언급이 없기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넘어가려나 싶었던 가정이 의미 없었다. 아스테르처럼 확실한 이가 눈치채지 못하는 쪽이 말이 되지 않았다.

“평소보다 말이 많아. 그 또한 너답지 않군.”

말이 끝나는 동시에 아스테르는 검을 뽑았다. 의식이 있는 날에만 쓸 수 있는 검, ‘거룩한 죽음’은 대대로 솔리아스의 왕들에게 대물림되는 보물이었다. 몇백 년의 세월에도 녹이 슬지 않는 흰 검신이 그 진귀함의 증표였다.

“그러나 나의 별이 벌인 일이니, 더는 묻지 않겠다.”

아스테르는 몸을 틀었다. 세이아드는 그의 뒤로 물러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티테르들의 앞에 섰다. 일렁이는 횃불이 만든 주홍빛이 아스테르의 머리 위로 드리워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이 땅을 지키는 별들께 간절히 청하오니, 사방을 덮는 어둠으로부터 가엾은 이들을 밝혀 주소서. 약속과 헌신의 증표로 오늘 이 자리에 어둠을 잘라 바치겠나이다.”

반투명한 흰 칼날이 높게 치솟았다가 직선으로 내리꽂혔다. 날카로운 검날은 단숨에 염소의 가슴을 꿰뚫어 심장을 갈랐다. 돌로 된 제단 위로 흥건히 퍼지던 피가 모서리를 타고 내려와 바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비릿하게 풍기는 피 냄새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새빨간 흔적을 보는 동시에 세이아드는 설원을 뒤덮던 수백 구의 시체를 떠올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금부터 기원제를 시작하겠다. 솔리아스의 안전과 영광을 위해, 나의 기사들은 앞으로 나아가 오래된 악을 처단하거라.”

왕의 권한을 인도받은 아스테르가 그를 대신해 선언했다.

***

적막이 짙게 깔린 어둠, 긴장한 숨소리가 간간이 그 침묵을 깼다. 숲과 영지의 경계이기도 한 신전을 지나 그들은 밤의 숲 초입으로 들어섰다. 밤의 숲은 광활한 북쪽 전체를 덮은 곳으로, 그 끝이자 중심부에는 니르아를 만드는 핵이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숲의 끝까지는 도달하지 못했기에 아무도 그 실체는 알 수 없었다. 어떠한 강한 능력을 가졌더라도 가이드의 능력이 그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한, 티테르가 무한히 힘을 쓸 수는 없었던 탓이다.

무리의 앞에는 의식을 치를 경험이 적은 기사들이 긴장한 채 경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프로시어스 가문의 궁수들이, 그리고 제일 후방에는 왕족을 호위하는 기사들로 이루어졌다. 세이아드와 다른 두 공작은 그 중앙에서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원래는 저 먼 뒤에 영지민들이 의식을 구경할 수 있도록 공간을 어느 정도 두었으나 세이아드는 오늘 모든 이를 저택에 두었다. 영주의 난데없는 결정에 성안이 소란스러웠다. 아마도 그의 악명을 탓하며 허무한 귀환 축제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로 나타날 것인가?

그가 겪었던 과거라 믿는 경험을 토대로 미리 대비하긴 했으나, 저 멀리 느껴지는 기운은 죄다 볼품없이 약했다. 그걸 느낀 건 비단 세이아드만이 아닌지 브리데히트 공작이 슬쩍 말했다.

“아무래도 대공의 기우였던 모양이오.”

그것 보라는 듯 베트리아가 낮은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기분을 따라 사방에 있는 나무가 사악, 사악, 흔들렸다. 동쪽의 티테르는 예부터 대지와 관련된 것들을 다뤘는데, 이번 대의 티테르인 베트리아는 숲과의 교감이 유독 강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숲의 경계의 안에 완전히 들어왔을 때까지도 사방이 조용했다. 긴장하던 어린 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돌리려는 그 찰나, 놀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그림자가!”

소리친 방향으로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곳에는 어둠과 하나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이면 형태를 갖춘 늑대만 한 몸집의 덩어리가 있었다. 까만 칠흑 속에서 좁게 붙은 두 눈이 벌겋게 빛났다.

“하급 중에서도 하급이군. 눈이 저리 쉽게 보이니 말이야.”

브리데히트 공작이 덤덤히 평했다. 그의 말마따나 급이 낮은 니르아일수록 심장이 쉽게 보이는 곳에 있었다. 보통 두 눈처럼 기능하는 붉은 안광 근처가 니르아의 핵이고, 급이 높아질수록 그것들은 종잡을 수 없는 위치에 핵을 숨겨 두었다.

“다들 침착히! 횃불을 가까이 대고 돌격대는 붉은 눈을 노려라!”

베트리아 공작이 소리쳤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괴물에 놀랐음에도, 기사들은 곧 훈련받은 대로 대열을 갖췄다. 횃불이 확 가까워지자 니르아의 모습이 확실히 드러났다. 늑대의 형상을 검은 덩어리가 몸을 낮추며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대들의 영지에서도 마주할 것들이다. 그대의 가족을 지킨다고 생각하며 임하는 게 좋아.”

뒤에서 여유롭게 그 광경을 구경하던 아스테르의 말과 동시에, 기사들이 공격에 나섰다. 후방의 궁수가 먼저 활을 쏘자, 몸을 잔뜩 낮췄던 니르아가 급격히 몸을 부풀리며 달려들었다. 한 마리로 보였던 그것의 뒤로 연이어 여러 마리가 뛰쳐나왔다.

“머리, 머리를 부숴라!”

보통의 늑대보다도 훨씬 높게 도약한 니르아는 잽싸기까지 했다. 기사들은 잠시 그 차이에 당황했으나, 실력 있는 이들답게 능숙하게 무리를 나누어 니르아를 포위했다. 캥! 하는 짐승의 비명이 울리더니 첫 승리가 거두어졌다.

“생각보다 금방 적응하는군. 나설 일은 없겠어.”

베트리아 공작의 말처럼, 간혹 지나치게 어린 신입이 합류했을 경우 니르아에게 몸을 내어 주는 경우도 있었다. 니르아는 사람을 덮쳐 그것의 정신을 부숴 먹기 때문에, 그냥 부상을 입는 것보다도 그 후유증이 컸다.

“모두 정리했습니다!”

“정찰 결과 당장에 더 보이는 것들은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섯 마리의 니르아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심장의 핵을 깨면 니르아는 빛에 흩어지는 그림자처럼 허공으로 산화했다. 훨씬 밝아진 듯한 어둠의 농도에 다들 안도의 한숨과 웃음을 터트렸다. 평온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아스테르가 그의 앞에 돌아온 수십 명의 기사에게 치하했다.

“그대들의 노력으로 올해 또한 무사히 지나갈 것일세. 수고했군.”

“감사합니다, 전하!”

“이제 돌아가지. 올해는 작년보다도 빨리 끝났군.”

니르아의 수와 크기에 따라 종종 두 시간이 넘게 소모되기도 하는 의식은, 아스테르의 말처럼 이번엔 빠르게 끝이 났다. 애당초 소탕이 아닌 기원의 목적이기에 숲의 경계에서 머무는 시간 자체는 워낙 짧았다. 관례대로라면 이제 돌아가 축제를 열고,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사흘간 영지 전체에 식량을 배급하고 성의 광장에 영지민들을 초대하면 되었다.

‘…내가 봤던 건 모두 환상인 건가? 사실 내 기억들이 다 광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대로 마무리될 듯한 평온한 공기에 세이아드는 혼란스러워졌다. 5년 전의 기억이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작은 니르아를 처치하며 의식이 마무리되는 듯하던 순간, 소리 없이 들이닥친 거대한 니르아의 모습이.

커다란 마차 세 대를 합친 것보다도 큰 거미 형상의 그것은 둔해 보이는 몸집과 달리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람들을 덮쳤다. 소리 없는 사형선고처럼, 니르아의 습격으로 인해 기사 하나가 순식간에 죽었다. 비명과 함께 대열이 단숨에 엉망이 되었고, 도망가는 사람들과 왕자들을 지키려는 기사가 섞여 난리가 났다. 그때의 지옥이 아직도 이리 생생한데, 그 모든 게 사실은 없었던 일이고, 망상이라면?

“말로만 듣던 니르아도 별거 아니네. 이대로라면 티테르가 정말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그때 문득, 세이아드의 귓가로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이 들렸다. 휙 고개를 돌리니 어린 기사 하나가 제 동료들에게 들릴 정도로만 작은 목소리로 웃으며 무용담을 자랑하고 있었다. 불현듯 강한 기시감이 드는 바로 그 순간, 세이아드가 소리쳤다.

“뒤를 보거라!”

그의 말이 허공에 울리는 동시에, 길고 굵은 거미 다리가 어린 기사를 머리에서부터 그대로 내리찍었다.

콱!

“으아아악!”

어린 기사는 비명을 지를 찰나조차 얻지 못하고 그대로 으깨졌다. 그를 대신해 비명을 지른 동료가 바닥으로 넘어지며 뒤로 굴렀다. 그와 함께 횃불의 불빛을 삼켜 버릴 정도로 커다란 덩어리가 기사들의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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