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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9화 (9/147)

#09

쉬익, 쉬이익, 소리를 내는 수십 개의 다리가 달린 거미는 어떠한 붉은 안광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둠을 빚어 만든 덩어리의 모습에 삽시간에 모두가 공포에 질렸다.

“괴, 괴물이다!”

“도망쳐!”

“전하, 전하를 지켜라!”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현장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중급 니르아를 상대해 본 적이 있는 경험 있는 기사들만이 공포를 억누르고 왕태자를 지키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괴물이 더 빨랐다. 높고 긴 다리들이 무자비하게 들이닥쳐 왔다. 일순간에 모두가 흩어졌다. 세이아드는 뒤로 몸을 물리며 외쳤다.

“전하를 모시고 모두 물러나!”

세이아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니르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사람이 많은 곳, 즉 왕태자가 있는 무리로 가려는 속셈이었다. 세이아드는 호흡을 짧게 가다듬은 뒤 땅을 박찼다. 일반인과는 비교되지 않는 빠른 속도로 니르아의 옆에 붙은 그는, 손끝으로 천천히 기운을 모았다. 이렇게 큰 니르아는 공격을 받으면 유독 광폭해지기에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에서 처치하는 것이 맞지만….

어쩔 수 없군.

몸이 능력을 쓸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세이아르의 검은 눈동자에 붉은 안광이 어렸다. 그의 부름을 받은 어둠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사방에 일렁이는 횃불로 인해 만들어진 니르아의 긴 그림자로부터 기이한 변화가 생겼다. 주인을 따라 똑같이 움직이던 그것은, 세이아드가 주먹을 쥐는 찰나 땅에서부터 솟구쳤다.

대지 위의 어둠으로부터 수백 개의 뾰족한 칼날이 솟아올랐다. 검은 창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것은 그림자가 차지한 면적에서 동시에 솟아나, 곧장 니르아의 몸을 찔렀다.

키에엑―!

아래에서부터 거미의 몸통을 찌르는 창들에 의해 니르아가 멈춰 서며 몸을 비틀었다. 거미의 긴 다리가 버둥거리며 사방을 휩쓸었다. 사람이 피하기엔 지나치게 크고 빠른 니르아의 발작을 제지한 건 베트리아였다.

기사들을 덮치는 거미의 다리를 베트리아의 덩굴들이 휘감아 허공에 가뒀다. 대지로부터 뻗어 나온 나무뿌리가 이때를 틈타 니르아의 몸통까지 옭아맸다. 일시적으로 니르아를 저지한 걸 확인한 세이아드는 주변을 살폈다. 그는 피하다 쓰러진 기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전하가 가신 방향을 확인했나?”

앳된 얼굴의 청년은 이제 봐도 갓 성년이 되었을까 싶었다. 앞서 작은 니르아를 처치했던 이들 중 하나인 그는, 세이아드의 붉은 동공을 보는 동시에 덜덜 떨며 뒤로 물러났다.

“아, 악마…. 악마다…!”

손바닥으로 땅을 짚어 일어난 기사가 칼을 뽑아 들었다. 능력을 사용함에 따라 안광이 변한 그에게 늘 따라오는 반응인지라, 세이아드는 기사를 상대하는 대신 몸을 틀었다. 그러자 기사가 비명 같은 기합과 함께 그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너 같은 놈을 전하에게 보낼 줄 알아!”

세이아드를 대신해 그의 그림자가 기사를 덮쳤다. 악악거리는 그를 제압해 둔 채 세이아드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사방이 난리였다. 죽은 자들이 더러 보였고, 노련한 기사들만이 넘어지거나 다친 이들을 수습해 신전 쪽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공포가 작용하는 범위가 크다.

중급 이상의 니르아는 능력에 따라 사방에 ‘공포’를 퍼트렸다. 존재 자체로도 소름이 돋는 걸로 모자라, 사람의 약한 마음과 정신을 건드려 부자연스러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조금 전의 어리숙한 기사는 그걸 이겨 낼 경험이 없었을 터였다.

어둠을 그의 수족으로 데려오는 세이아드의 힘은 지상에 현존하는 모든 그림자를 이용할 수 있게끔 했다. 붉은 안광과 함께 퍼지는 어둠은 세이아드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를 악마로 보이게끔 했다.

“대공, 상황이 좋지 못하네. 무슨 영문인진 몰라도 그대의 말이 맞았어.”

그때 브레드히트 공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경계 쪽으로 니르아가 계속 나오고 있소. 작은 놈들이지만 수가 많아. 이미 다섯 마리를 죽이고 오는 길이오.”

공작이 경계를 가리켰다. 기억과 같았다. 큰 놈을 따라 나온 작은 것들의 수가 상당해 전력이 흩어졌던 것까지. 동면에 들었던 놈들이 이렇게 이른 시기에 깨어난 것은 여태 없던 일이었다. 들이닥치는 니르아로 인해 온통 혼란스러워졌던 것 모두 전과 같았다.

“전하는 찾았습니까?”

“베트리아 공이 이미 신전 쪽으로 전하를 호위해드렸소. 이제부터 거길 기점으로 막을 생각이오.”

“레사스 왕자도 거기 있는 겁니까?”

레사스의 언급에 공작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아차 싶은 기색으로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부터 찾아야 했기에 왕자의 안위를 확인하진 못했소.”

왕위 계승 1순위이자 가이드인 아스테르를 먼저 지키는 게 티테르의 임무인 건 맞았다. 그러나 그가 묻기 전까지 아무도 그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을 어수선하게 했다. 세이아드는 숲을 바라보다 브레드히트에게 말했다.

“왕자는 내가 찾겠습니다.”

“그대가?”

기이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이 브레드히트가 되물었다. 용건이 끝난 세이아드는 대꾸하는 대신 곧장 숲 쪽으로 몸을 틀었다. 뒤에서 브레드히트가 외쳤다.

“거 대답 좀 하면 덧나나!”

공작의 말에 잠시 제압당해 있던 니르아가 괴성으로 대신 대꾸했다. 저 정도 중급 니르아는 어지간한 티테르 혼자서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 뒤처리는 공작이 알아서 할 수 있을 듯싶었다.

세이아드는 정신을 집중해 어둠을 파헤쳤다. 속삭이는 어둠을 따라 먼 곳까지 의식을 보내니 레사스 왕자의 기운이 느껴졌다. 경계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다만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어림잡아 위치를 알아낸 세이아드는 막 자리를 떠나려던 기사 두 명을 불렀다.

“거기, 나를 따라와라.”

“저, 저희 말입니까?”

“당장.”

기사들은 세이아드를 보고 겁에 질린 기색이긴 했으나, 다행히 아까 전의 어린 것처럼 굴진 않았다. 주저하면서도 티테르의 명을 어길 순 없는지 그들은 억지로 발걸음을 뗐다. 혼자 움직이는 편이 세이아드에게는 당연히 더 편했음에도 기사들을 데려갈 수밖에 없는 건, 왕자의 일행에 부상자가 많을 걸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숲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얼음 결정이 폐부를 찔렀다. 바깥과 달리 이미 눈이 쌓인 안쪽을 파헤치며 걸어가자, 기사 한 명이 물었다.

“저, 그,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세이아드는 침묵했다. 그는 정말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아서, 상세한 설명이나 격려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원체도 조용한 성격이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말이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숲에 들어가기에 이만한 인원으로는 무리입니다. 훨씬 강한 기사들이 뒤에 남아 있으니….”

“쉿.”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기사의 말을 끊고 세이아드는 손을 들어 보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쏘아보는 그의 모습이 두려운 듯 떨리는 호흡이 느껴졌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을 깬 것은 멀리서 들리는 비명이었다.

안카 경!

소리를 들은 건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모두 고개를 돌렸다. 세이아드는 앞서 뛰기 시작했다.

“놓치지 말고 따라오거라. 부상자가 있을 터니 너희가 그들을 수습해야 한다.”

한 번 땅을 박찰 때마다 나무들이 휙, 휙 지나갔다. 세이아드는 몸으로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며 미로와도 같은 어둠을 헤쳤다. 혹시라도 그를 놓칠 기사들이 따라올 흔적을 남기며 소리가 난 곳으로 도착했다. 작은 공터에 들어서자 보이는 광경은 곰처럼 보이는 니르아 네 마리와 대치하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바인, 옆을 봐!”

레사스의 외침과 동시에 니르아가 육중한 몸을 기사에게 날렸다. 레사스의 경고를 들은 기사가 황급히 니르아를 피했다. 다친 채 쓰러진 이들을 그의 등 뒤에 모아 둔 레사스는 검을 든 채로 다른 곰을 상대했다. 멀쩡히 사람의 숫자가 왕자를 포함해 고작 둘이었다. 세이아드는 땅을 살폈다. 숲 자체가 워낙 어두워 정교한 그림자를 만드는 게 힘들었으니, 기운을 빌려와 몸을 쓰는 쪽이 맞았다.

“전하, 저희를 두고 도망가십시오. 승산이 없습니다.”

어깨가 크게 할퀴어졌는지 안카는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고 돌에 기대있었다. 그런 그의 말이 레사스를 잠시 방해했다. 크게 동요하며 그가 멈칫하는 찰나, 주위를 노리고 있던 나머지 두 마리 니르아가 부상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안카!”

왕자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변했다. 상대하던 니르아에게 등을 내주고 레사스는 안카가 있는 쪽으로 달렸다. 최대한 검을 써서 저것들을 죽이려 했던 세이아드는 작전을 바꿨다. 부작용이 강하게 오겠지만, 그림자를 불러오는 것만이 안카를 살릴 길이었다.

눈의 안광이 검붉게 변했다. 세이아드의 의지를 따라 숲을 덮은 어둠이 움직였다. 왕자의 일행을 덮치려는 괴물에게 거꾸로 벼락이 친 것처럼, 땅에서부터 뻗어온 긴 창들이 박혔다.

그아아! 그아아아!

세이아드는 움직임이 저지된 괴물에게 단숨에 달려들었다. 지면을 박차고 장검을 휘둘러 정확히 그것의 미간을 겨냥했다. 날카로운 검끝이 콰직! 소리와 함께 미간 중앙의 핵에 박혔다. 세이아드와 비슷한 붉은 안광을 띠고 있던 니르아 하나가 그와 동시에 파스스, 검은 재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는 손쉬웠다. 세이아드는 숨 쉬듯이 검을 휘둘러 나머지의 미간을 깨트렸다. 피가 한 방울도 묻지 않은 검을 내리자, 공터에 뒤늦게 달빛이 희미하게 내렸다.

흠. 세이아드는 짧은 한숨을 삼켰다. 그를 향한 노골적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우뚝 서서 절 보고 있는 레사스가 있었다.

절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이 엉망이었다. 그의 의복은 괴물이 아닌 다친 이들의 피가 묻어 온통 붉었고, 부드러운 머리칼은 땀에 젖어 이마에 반쯤 붙어 있었다. 흰 얼굴 위로는 눈물이 흘렀던 자국이 있었다. 그럼에도 검은 꼭 쥔 채, 그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겠다는 듯이 안카와 기사들의 앞을 막고 있었다. 간절함이 잔상처럼 얼굴 위에 어려 있었다.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뒤에 있는 이들을 살폈다. 찢겨 나간 방어구와 살점부터 꼴이 엉망이었지만 니르아에게 정신이 먹힌 이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말없이 살아남은 이들을 보고 있다가, 레사스의 기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주홍색 머리에 주근깨가 어린 청년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크게 움츠리며 속삭였다.

“솔리아스의 악마….”

작은 속삭임이었으나 주변이 워낙 조용했던 탓에, 청년의 중얼거림이 선명했다. 그 말을 듣는 동시에 침묵하던 기사들 또한 흠칫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단숨에 퍼진 거북한 공기가 주변을 어색하게 했다. 생존자들의 얼굴 위로 안도와 공포가 혼재했다.

솔리아스의 악마.

그가 가문의 수장이 된 뒤부터 얻은 악명은, 세이아드의 성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힘이 워낙 니르아의 것과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빛내는 사신이 구세주처럼 보일 수 없다는 걸 그 또한 잘 알았다.

숱하게 듣고, 겪은 일이다. 세이아드는 감흥 없이 그들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러고는 레사스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전투 중에 등을 보이는 건 자살하려는 행위와 다름없습니다.”

고압적인 붉은 눈이 레사스를 내려다보았다. 세이아드는 말을 이었다.

“주군을 지켜야 할 기사들을 대신해 싸우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지켜 낸 목숨이 과연 가치 있을지 모르겠군요. 고기 방패라도 되어 전하를 온전히 지키는 게 맞았습니다.”

세이아드는 진심으로 충고했다. 레사스의 기사들은 레사스를 지키기 위해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지키고자 역으로 본인이 위험해지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없었다.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어리석은 짓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는 니르아를 처단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그처럼 강한 정화의 힘을 가진 이가 죽는 건 메꿀 수 없는 손해였다.

세이아드의 말이 뼈를 찔렀는지, 쓰러져 있던 기사들의 얼굴 위로 자책이 어렸다. 그러더니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힘겹게 레사스를 향해 무릎 꿇었다. 그중에는 안카 경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대공의 말이 맞습니다.”

“본분을 다하지 못한 저희를 부디 벌해 주소서.”

일제히 입을 모아 하는 말에 레사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레사스는 그 광경을 보면서 미간을 굳혔다. 봄에 불어닥친 눈보라처럼 온화한 얼굴 위로 싸늘함이 깃들었다.

“목숨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레사스의 음성은 차분하면서도 싸늘했다.

“그러니 대공의 조언은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살려주신 은혜에는 반드시 보답하도록 하죠.”

파랗게 타오르는 듯한 목소리는 아주 확고하게 레사스의 분노를 대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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