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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10화 (10/147)

#10

세이아드는 침묵으로 의문을 대신했다. 그가 한 말 중 어디에도 틀린 건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쪽은 레사스였다.

목숨에 귀천이 없다는 건 옳지 않다. 악한 자는 죽어 마땅하고 선한 자는 살아야 하듯이, 어린아이의 목숨이 오래 산 이들보다 소중하듯이, 살아서 더 큰 도움이 될 자를 살리는 게 맞았다. 세이아드가 배워 온 것은 그러했다. 티테르와 가이드의 목숨은 곧 나라의 안위와 직결되니, 살아도 니르아의 먹이가 될 기사들보다는 가이드인 왕자를 살리는 게 더 중했다.

세이아드는 진심으로 왕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레사스가 또다시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지 않게끔 설득하려던 그는, 이내 레사스의 호흡이 고르지 못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최대한 숨기려곤 하지만 가슴팍이 불안하게 들썩거렸다. 천천히 레사스를 훑다 보니,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그의 손등을 타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쳤군.’

태연하게 굴어 잠시 눈치채지 못했다. 부상자를 데리고 언쟁하는 취미는 없으니, 일단은 성으로 데려가는 게 낫겠군. 왕자의 기사들 또한 시간을 지체하면 더 위태로워질 수 있었고.

“전하를 구해드린 게 아니라 니르아를 죽였을 뿐입니다.”

세이아드는 그리 답했다. 지금의 레사스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어떠한 것도 없었다. 레사스의 적대감을 어느 정도는 누그러트리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게 맞았지만, 그가 영문을 모르게끔 화를 내고 있으니 결국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괜한 빚을 매겨 이것보다 더 레사스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손해였다.

허나 레사스의 표정은 세이아드의 말이 끝나자 더욱 참담해졌다.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세이아드로부터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의 서늘한 목소리가 거짓인 것처럼 다정하게 그의 기사들에게 말했다.

“몸이 최대한 성한 이들이 다른 이들을 돕게. 안카 경은 내가 부축하지.”

의무를 다하지 못한 이들에게 베풀기엔 과분한 친절이었다. 그러나 기억 속의 레사스는 언제나 저랬다. 그가 힘을 얻은 뒤에도 언제나 그의 사람들을 지나치게 챙겼고, 누군가의 죽음에 비통해했다. 레사스는 세이아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세이아드는 몸을 틀어 숲속으로 들어섰다. 레사스를 비롯한 이들이 쉽게 헤쳐나오게끔 나뭇가지를 쳐 내며 왔던 길을 되짚고 있자니, 그를 따라오던 두 명의 기사들과 마주쳤다. 헐떡거리며 뛰고 있던 그들은 세이아드를 보자마자 헉, 하며 멈췄다.

“죄송합니다, 대공! 최대한 대공을 뒤따랐으나 저희가 부족하여….”

세이아드는 그들의 말을 끊고 뒤를 가리켰다.

“부상자들이 있으니 가서 돕거라. 레사스 왕자께서도 저곳에 계시니, 전하의 안전에 가장 신경 쓰도록.”

“아,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황급히 세이아드의 지시를 따라 뒤쪽으로 뛰어갔다. 그들이 레사스 일행과 합류한 걸 어둠 속에서 확인한 세이아드는 몸을 틀어 다시금 앞서 길을 트기 시작했다.

***

기원제를 위해 준비했던 연회장은 한순간에 부상자 수용소가 되었다. 누구도 감히 예상하지 못했던 심각한 사태에 성안의 분위기는 단숨에 경직됐다. 사망자가 여럿 나오고 부상자가 넘쳐났다. 의식을 치르러 갔던 이들이 반송장이 되어 돌아오자 지켜보는 이들의 간담 또한 서늘해졌다.

세이아드가 처리할 일 또한 무수했다. 왕성을 비롯해 각각의 티테르 가문에게 알릴 전서구를 날리고, 피해 규모를 파악한 뒤 수습할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부상자를 돌보기 위한 인력을 재편성한 뒤, 성의 약재와 식량을 분배하고 나서야 세이아드는 숨을 돌렸다.

창밖 너머의 세상이 온통 까맸다. 검은 염료로 창을 칠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두워, 그는 창을 열었다. 살을 에는 바람이 불어오며 피부를 차갑게 식혔다. 그를 향해 날아드는 바람을 쐬는 순간, 세이아드는 머리를 후벼파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동시에 전신의 감각이 일제히 증폭됐다.

바람 부는 소리가 귀를 터트릴 듯 웅웅 울리고 눈알이 시려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뜀박질하며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함이 밀려드는 그 찰나, 귓가로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드, 나의 복수를 해주렴. 나를 이렇게 만든 이들을 모두 죽여. 죽이렴, 죽여. 죽여 버려!’

날카로운 칼날이 안에서부터 거꾸로 세이아드의 전신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쉬지 않고 반복되는 환청에 그는 벌떡 일어섰다.

‘고작 이 정도 일로 부작용이 찾아왔다고?’

허공에서 들리는 소리와 전신을 엄습하는 통증은 능력에 대한 부작용이다. 그 증상은 어느 정도의 힘을 썼느냐에 따라 변했다. 한두 마리의 중급 니르아를 죽이는 것으로는 환청에 시달리진 않는다. 기껏해야 끝없는 불면과 신경통만이 전부였을 뿐, 환청을 동반하는 건 그가 많이 혹사했을 때나 일어나던 일이었다.

‘왜? 무슨 이유로?’

불안감이 세이아드를 훅, 덮었다. 폭주가 일어나던 그 당시가 겹쳐졌다. 환각이 그를 잠식하고 환청이 그를 떠밀던 순간이 생생했다. 니르아라 생각하고 죽였던 것들은 모두 그가 지켜야 할 힘없는 이들었다. 검을 타고 줄줄 흐르던 피가 생생했다. 니르아를 죽였다면 응당 깨끗했어야 할 그의 손은 온통, 사람의 피로 가득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죄책감이 그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경기를 일으키며 창에서 물러난 그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바람으로 인해 쾅, 닫힌 문을 등지고 복도를 휘청이며 걸었다. 복도의 횃불이 일렁거리며 그림자를 흔들었다.

정신없이 복도와 계단을 지나 도착한 곳은 아스테르의 방이었다. 그의 몸이 기억하는 대로, 그의 정신이 명하는 대로, 세이아드는 지금의 그를 유일하게 도울 수 있는 이에게 도착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왕실 기사들이 갑작스러운 방문을 제지했다.

“대공, 날이 밝은 뒤 돌아오십시오. 전하께서는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입을 여는 순간 두통이 찾아들었다. 증폭되는 환청이 세이아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모두 죽이렴, 아가. 다들 우리를 증오하는 이들이란다.’

세이아드의 그림자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그는 주먹을 쥐어 손톱으로 살을 헤집었다. 따끔한 고통이 손바닥을 찢었다.

“전하를 뵈어야겠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잔뜩 잠겨 갈라진 목소리에 기사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곤란한 눈빛을 교환한 그들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날이 밝으면 다시 오십시오.”

“내가….”

세이아드의 눈에 붉은 기가 돌았다. 음산한 목소리가 스산히 깔렸다.

“두말하게 만들지 말거라.”

흉흉한 살기에 기사들이 반응했다. 잔뜩 긴장한 그들은 겁먹은 기색을 억지로 숨기곤 검집에 손을 올렸다. 날카로운 기세가 서로 부딪쳤다. 세이아드는 주먹에 더욱 힘을 주며 숨을 골랐다. 숨이 막혀왔다. 목구멍에 끊임없이 모래를 붓는 것처럼 갈증이 타올랐다. 이대로 가다간 죄 없는 이들을 해칠 것만 같아 그가 뒤돌아서려는 차, 방문이 열렸다.

“들어와, 이드.”

귀가 녹을 듯한 달콤한 음성이었다. 햇빛에 녹는 눈처럼 세이아드는 무너지듯이 그에게 달려갔다. 그의 고통을 덜어낼 유일한 존재를 으스러트릴 듯 세게 안았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를 아무렇지도 않게 끌어당긴 아스테르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보는 기사들에게 웃었다.

“너희는 물러가도 좋다. 대공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하니, 방해하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부작용에 대한 언급임을 알아들은 기사 둘이 허리를 숙인 후 문을 닫았다. 귓가로 들리는 대화 소리가 그저 먼 곳의 일 같았다. 세이아드는 아스테르를 안자마자 느껴지는 부드러운 향에 숨을 깊게 들이켰다. 가슴팍을 들썩이며 그는 아스테르의 등을 부여잡고 매달렸다.

“아스테르, 어서, 제게…, 안식을….”

조금만 더 이 상태로 있다간 사람을 죽일지도 모른단 두려움이 세이아드를 간절하게 만들었다. 거친 힘으로 등을 긁는 세이아드를 아스테르는 침착히 마주 안았다.

“쉬이, 이드. 보채지 마.”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잘게 경련하는 그를 아스테르가 차분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의 손바닥이 등을 쓸어내릴 때마다, 몸속으로 부드러운 파장이 밀려들었다. 아스테르의 정화는 언제나 황홀할 정도로 따듯했다. 긴 겨울 얼어붙은 땅을 녹여 주는 햇살처럼 화사해, 세이아드처럼 홀로 추운 이를 무서울 정도로 이끌리게 했다.

“벽난로에 장작을 충분히 때지 않은 건가? 뺨이 차가워.”

등을 만져 주던 손이 얼굴로 옮겨 왔다. 한껏 긴장해 날이 세워졌던 몸이 사르르 풀렸다. 그 누구보다 사나운 맹수를 손길 하나로 길들인 아스테르는 세이아드를 침대로 이끌었다.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은 그를 따라, 세이아드는 언제나 그러했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석조 바닥에서 시린 냉기가 올라왔다. 추위에 무던한 몸은 부작용에 시달릴 때면 누구보다도 추위에 약해졌다. 덜덜 떠는 그를 아스테르가 다정히 내려다보았다.

“큰일이 있어서 힘을 제법 쓴 모양이야.”

뒤로 넘겼던 검회색 머리칼이 세이아드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는 손길을 따라 아스테르의 파장이 스며들었다. 환청은 완전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전신을 강타하는 뒤섞인 감각은 여전했다. 소리는 지나치게 컸고 몸은 죽을 듯이 시렸으며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정화가 한참 더 필요했다. 멍하게 풀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아스테르는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조용히 세이아드의 머리칼을 만져 주던 그가 허리를 숙였다. 정화는 보통 가벼운 접촉으로 끝나지만, 티테르의 상태가 심각할수록 깊이 관여되는 정도가 달랐다. 아스테르는 세이아드가 이리 시달릴 때면 그의 이마에 입 맞추어 그를 진정시켰다. 상태가 안 좋아질 때면, 그보다 더한 행위가 간혹 이어졌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아스테르의 입술이 이마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의 금색 눈을 올려다보자 아스테르가 사르르 눈을 휘어 웃었다. 금방이라도 안식을 내려 줄 듯이 다가왔다. 그러나 입술은 이마에 닿지 않았다. 대신 바로 근처에 멈추어, 작게 열렸다.

“왜 굳이 레사스를 구하러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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