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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11화 (11/147)

#11

자상한 속삭임이 서늘하게 이마에 닿았다.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그저 가이드가 주는 안정에 매달리던 세이아드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오늘따라 나의 별이 하는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군. 그 새끼가 더러운 실드라스의 핏줄이라는 걸 잊은 건가, 이드? 전대 악시드 대공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북부의 명예를 곤두박질치게 만든 이들이 실드라스 가문 아닌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아스테르는 고개를 기울였다. 머리칼을 만져 주던 손이 내려왔다.

“구태여 죽일 필요도 없지만 살려 둘 필요도 없는 버러지가 바로 레사스다. 솔리아스의 성을 가질 자격이 없는, 추악한 레아나 왕비의 자식인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손등으로 세이아드의 뺨을 어루만지던 그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저 다정하게만 내려다보던 얼굴 위의 미소가 지워졌다.

“그러니 말해 봐.”

흰 손이 뻗어와 세이아드의 턱을 쥐었다. 세이아드는 눈을 내리깔아 하얀 손등 위로 돋아난 푸른 핏줄을 가만히 응시했다. 가볍게 고개만 틀어도 떨쳐 낼 수 있는 힘이었으나 내버려 두었다. 일종의 명제였다. 세이아드는 아스테르를 거역할 수 없다는, 긴 세월이 만든 명제가 그의 이런 행위를 내버려 두게끔 했다.

“오늘 내 옆이 아닌 그놈의 옆에 있었던 이유를.”

고통으로 흐릿하던 정신이 그 말에 드디어 제자리를 찾았다. 잠시 잊고 있었다. 아스테르가 얼마나 자신의 것에 날을 세우는 사람인지를. 긴 세월 그의 충견으로 살아온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레아나 왕비의 핏줄을 구한다는 걸 용납하긴 어려울 터였다.

알고 있었음에도 예기치 못하게 찾아든 강한 반작용에 이성을 잃었다. 폭주를 겪은 경험이 세이아드를 잠시 냉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은 아스테르를 등질 수 없다. 레사스가 각성하기 전까진 아스테르가 반드시 필요하니까. 게다가 레사스가 전에 없이 강력한 가이드였어도, 그의 파장이 저와 얼마나 맞는지도 불분명했다. 그걸 확인하기 전에는 아스테르의 비위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선으로 행동하는 게 맞다.

스스로를 질책한 세이아드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주관하는 기원제이니, 잡음이 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날뛰는 감각을 억지로 무시하며 그는 과거의 저라면 할 법한 말을 어떻게든 떠올렸다.

“아무리 무능한 왕자여도 말은 나올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결국 사라질 소리다. 차라리 이번에 죽는 게 나았어. 레아나의 핏줄이 하나라도 사라지는 쪽이 나라에 이롭다.”

턱을 쥔 손가락에 힘이 점점 들어갔다. 아무것도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정적이 그들을 짓눌렀다. 아스테르가 잘게 웃더니 턱을 놓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것만큼은 넘어가기 힘들군. 나가거라. 정화는 여기까지야.”

빌어먹을.

쉬이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건 알았으나, 혹한기가 시작한 지금 이럴 줄은 몰랐다. 날카롭게 숨을 들이켜며 세이아드가 짙은 눈썹을 찡그렸다. 반듯한 미간에 고통 어린 주름이 졌다.

“…전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샜다. 아스테르로 인해 잠시 진정했던 파장이 요동치며 방 전체를 채웠다. 단숨에 맹수보다도 흉흉해진 세이아드를 보고도 아스테르는 위축되지 않았다. 그저 다정히 웃을 뿐이다.

티테르의 기운은 가이드에게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능력을 써서 가이드를 압박할 순 있지만, 가이드를 해한 티테르에겐 똑같은 반작용이 가해졌다. 그게 솔리아스의 왕족이 티테르를 휘두를 수 있는 이유였다. 티테르에겐 반드시 가이드가 필요했으나, 가이드는 그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왕국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서 원했을 뿐.

“이리 구시기엔…,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처벌은 차후 내리셔도 되지 않습니까.”

아스테르는 이런 식으로 세이아드를 벌했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을 할 때면, 따듯한 칼날로 그를 위협했다. 세이아드의 파장은 아스테르가 아닌 왕가의 핏줄과는 전혀 맞지 않기에, 세이아드를 이 고통에서 해방시킬 이는 그가 유일했다.

긴 시간 이리 굴지 않아 잊고 있었다. 아스테르의 밑에 막 들어갔던 어린 날엔 자주 겪었던 일이나, 그에게 완전히 종속된 뒤로는 아스테르 또한 그를 지금처럼 다룬 적 없었다.

“버티지 못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 아닌 걸 알아. 필요한 처치는 했으니, 물러가거라. 밤새 나를 생각하고 네 죄를 참회해.”

세이아드는 거친 호흡을 삼켜 숨겼다. 그가 이렇게 나온다면 더는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까지 포함한 경험을 통해 몸소 알고 있었다.

“충분히 나를 생각한 게 느껴지면, 그때 평온을 불러 주겠다.”

아스테르는 나른한 웃음과 함께 턱을 괴었다. 세이아드는 가만히 그 모습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을 찢고 긁는 감각을 무던히 누르며 그는 아스테르의 방을 벗어났다. 주먹 쥔 손으로부터 흐른 피가 복도에 점점이 떨어져, 그가 가는 길의 궤적을 그렸다.

아스테르가 원했던 대로 세이아드는 휴식을 허락받지 못했다. 성안의 소리가 섞여 들어와 자꾸만 그를 헤집었고, 핏줄을 날카로운 바늘로 긁는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 머리를 터트리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겨지는 두통은 덤이었다.

하지만 참을 만했다.

그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창백하고 서늘한 얼굴 어디서도 고통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씩 미세하게 찡그려지는 짙은 눈썹만이 그가 조금 불편하다는 걸 나타냈다.

티테르가 치르는 ‘대가’는 그가 지닌 힘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서 달랐다. 힘을 쓰는 모두가 만성적인 두통은 기본적으로 지니지만, 그조차도 주기와 정도가 달랐다. 그리고 북부의 영주는 언제나, 본인이 아니고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려 왔다.

세이아드의 어머니인 전대 악시드 대공 또한 그러했다. 평소에는 호쾌하고 시원스럽던 여인은 혹한기가 들이닥치면 언제나 악몽에 시달렸다. 강철처럼 단단해야 하는 프로시어스의 영주로서 세레나는 남들의 앞에선 이를 티 낸 적이 없으나, 세이아드의 앞에서만큼은 그 무게를 드러냈다. 이능이 없는 아버지나 가주와는 거리가 먼 여동생에겐 언제나 이 모습을 숨겼다.

‘아아악-!’

어머니의 손짓 하나에 수많은 가구가 박살이 났다. 어린 세이아드는 어머니의 침대에 웅크려 앉아 그녀의 세상이 무너지고 재생되는 걸 수천 번 목격했다. 고통을 참기 위해 끝내 어머니가 스스로를 해하기 시작할 땐 세이아드가 그걸 막아야 했다.

한 번은 물었다. 왜 그냥 폐하에게 가지 않으시냐고. 어머니의 가이드는 황제였으며, 사냥이 시작한 동안 중앙의 왕족은 그들의 티테르 곁에 머물렀다. 황제는 혹한기가 오면 늘 이곳에서 겨울을 지냈다.

‘이드, 나는 네 아버지가 아닌 이에게 닿고 싶지 않아. 그들이 주는 황홀함을 경계해. 네가 사랑하는 이가 누구인지, 현혹되지 않고 명심하렴.’

전대 대공은 그녀의 하나뿐인 언약자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긴 은발을 늘어트린 차가운 용모의 대공은 사랑하는 남편을 볼 때면 남들이 상상할 수 없던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남부에서 태어나 수도에서 자문관의 직책을 이행하던 아버지는, 태생이 자상하고 따듯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궁에 들를 때마다 종종 마주치던 아버지를 먼저 마음에 품었고, 긴 시간의 구애 끝에 그를 북부로 데려왔다.

폐가 약해 찬바람을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성은 언제나 따듯했고, 나갈 일이 있을 때면 아버지의 앞에 불어오는 찬바람을 어머니가 막았다.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 그랬기에, 좋았던 만큼 괴로웠다.

정화를 위해 가이드와 반드시 접촉해야 하는 일이 어머니에겐 어느 순간부터 지옥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이와 손조차 잡고 싶지 않았던 것이 대공의 마음이었기에, 마지못해 받아야 하는 지경까지 버티고 버티는 그녀를 왕 역시 불쾌해했다. 서로를 신뢰해야 할 가이드와 티테르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지간해선 찾아올 일 없다는 폭주가 유독 그의 집안에만 생긴 건 이 때문이었을까.

어렴풋한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며 세이아드는 초상화를 다시금 살폈다. 자신 있게 웃고 있는 은발의 여인은 기실 세이아드보다는 그의 여동생과 비슷한 용모였다. 저 얼굴을 볼 때면 언제나 죄책감을 느꼈다. 어머니의 무고를 밝히지 못하고 실드라스 가문과 공생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러나 지금, 한 번의 죽음을 겪고 기이한 소생을 마주친 오늘.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머니가 했던 말이 정말 진실인가?

아무도 어머니를 믿지 않았기에 세이아드는 어머니를 반드시 믿고 싶었다. 도주할 수 있음에도 도주를 포기한 세레나는, 한이 맺힌 눈으로 그를 보고 말했다.

‘실드라스가 나를 함정에 빠트렸어. 이드, 반드시 네 가족을 지키거라. 네 아버지를, 네 여동생을 그들로부터 보호해!’

피투성이가 된 손이 창살을 으스러트릴 듯 잡고 있었다. 죽어 가는 손과 어머니의 독기 어린 목소리는 세이아드를 이끄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끝엔 어머니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이를 죽이고 처형당한 자신이 있었다.

그는 생각을 멈췄다. 약해진 틈을 노려 두통이 그를 엄습했다.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움직였으나, 사실 그는 이미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는 아버지도 여동생도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가 손을 쓸 틈도 없이 어머니의 죽음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고…, 여동생은 이곳을 떠났다.

어쩌면 그렇기에 어머니의 결백만큼은 밝히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어머니의 말을 헛되이 치부하고 싶지 않지만, 더는 의심 없이 믿을 수도 없었다. 그 자신이 폭주를 한번 겪고 나니, 어머니의 증상이 폭주와 흡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헛소리라 결론짓기 어려운 것은, 어머니의 그 말 때문이었다.

‘나는 전하를 해하려 한 적이 없단다, 이드. 폭주도 하지 않았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태양이 저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덮치려 했던 거대한 니르아를….’

그 말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다. 폭주에서 비롯된 환각이라고 넘기려니 또 다른 과거의 일이 하나 떠오른 탓이었다.

‘타칸에서 대낮에 니르아를 봤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남긴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되었죠. 그대가 그걸 조사해야겠습니다.’

죽기 1년 전의 일이었다. 아스테르와 왕위를 두고 한창 경쟁하던 레사스가 세이아드를 불러 저런 말을 했었다. 그 이후 들이닥친 일이 많아 기억에서 지웠던 일이, 신기하게도 지금 떠올랐다.

그때 어떤 답을 했더라….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말이었을 것이다.

‘전하의 개새끼에게 명하십시오. 전하의 말이라면 발도 핥을 이가 바로 옆에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헛소문에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세이아드가 그리 답할 때 레사스의 옆에는 시온이 있었다. 실드라스 공작이자 레사스의 충실한 티테르인, 남부의 사랑받는 영주. 세이아드를 제압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이기도 한 시온은 예로부터 그의 호적이라 불리곤 했었다. 하지만 그 시기쯤 되어 시온은 다른 이유로 왕국에 이름을 날렸다.

레사스의 정인.

그게 시온의 또다른 명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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