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방치한 검에 녹이 스는 것처럼 돌보지 않은 감정 또한 닳고 무뎌진다. 정해진 목표를 위해서만 간혹 반응하던 세이아드는 그 외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끔찍한 삶의 끝에서야 세이아드는 후회라는 마음과 간신히 마주했으나, 그 외에 마모된 다른 감정이 쉬이 찾아들진 않았다.
그러므로 타인의 호감을 사는 행동 또한 세이아드에게는 막연한 일이었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거나 경멸받는 것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외의 감정을 받아 본 적이 까마득했다. 아스테르만이 그의 이런 모습을 기꺼이 여겼을 뿐이다.
아스테르를 떠올리자 속이 엉켰다. 검을 휘두르던 손이 멈췄다. 홀로 쓰는 연무장 중앙, 흙바닥에 검을 박아 놓고 그는 숨을 골랐다. 잠시간 뜨겁게 달아올랐던 전신이 식기 시작했다. 숲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휘몰아쳐 검회색 머리칼을 헝클었다.
세이아드가 죽기 전까지, 아스테르는 세상에 남은 유일한 선의였다.
그의 가이드만큼은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은 어머니와 세이아드의 말을 들었다. 그의 분노를 이해하고, 그의 목적을 위해 손수 편들어 준 은인이었으며, 그를 유일하게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정화의 주인이었다.
수많은 니르아를 죽이고, 괴물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치우고 온 날이면 아스테르는 기꺼이 그의 안식처가 되었다. 마음껏 자신을 껴안게 해 주며 그의 등을 쓸어 주었고, 그와 함께 흘러드는 파장이 세이아드의 고통을 앗아 갔다.
그러나 다시금 돌아와 겪게 된 아스테르의 일면은 세이아드로 하여금 의구심을 품게 했다. 과거에는 그저 합당한 일이라 생각했던 그의 ‘처벌’이 마음에 걸렸다. 아스테르가 정말 그를 중요한 전력으로 여겼다면, 구태여 정화를 하지 않음으로써 전투에 지장을 줄 가능성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아스테르에게 정말 세이아드가 필요했던가?
왕세자의 옆에서 세이아드는 피할 수 없이 후계 싸움에 휘말렸다. 아스테르를 위시한 파벌은 국정에 관여하는 티테르의 힘이 줄어들길 원했고, 레사스를 필두로 한 실드라스의 파벌은 티테르의 입지를 향상시키고자 했다.
그런 후계 싸움과는 관계없이 가문의 오명을 씻는 것만이 중요했던 세이아드는 아스테르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 외엔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이 없었다. 세이아드는 아스테르를 위해, 티테르로서 티테르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행위에 발담았다.
그는 티테르 없이 나선 왕실 기사단의 니르아 토벌에 그림자로 참여해 니르아를 죽이게끔 도왔다. 티테르의 힘없이도 ‘인간’만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의견이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대로, 폭도나 도적을 제압하는 일에는 세이아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전투를 한 번이라도 목격한 사람들로 인해 ‘솔리아스의 악마’는 그 악명을 왕국 전체에 떨쳤다.
티테르의 힘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주며 사람들의 두려움을 쌓은 덕에, 세이아드가 죽기 직전쯤에는 왕국 내에서 전에 없이 티테르를 싫어하는 이들이 생긴 상황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세이아드는 그에게 주어진 의무를 이행했으며, 그로써 아스테르 또한 기쁘게 했으니.
그렇게 믿고 살았던 삶의 끝에서 세이아드는 그의 가문을 어느 누구보다 더럽힌 자신을 발견했다. 가문의 힘은 복권되지 않았고 어머니에 대한 진실 조사도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폭주만큼은 예상치 못한 일이라 하더라도, 세이아드의 행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지 아스테르는 분명 알았을 것이다. 세이아드만이 몰랐을 뿐.
예전엔 볼 수 없었으나 지금은 알겠다. 아스테르는 그가 원했던 걸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죽음의 순간에 그를 방치한 아스테르의 모습과 정화를 중단하고 축객령을 내리던 어젯밤이 겹쳐졌다. 짙은 회의감이 올라오며 세이아드의 마음 어딘가를 공허하게 했다.
또 이런 느낌이다. 죽어 가던 당시에 느꼈던, 텅 비어 버린 듯한 허무함.
어느새 차갑게 얼어붙은 손끝이 시렸다. 검을 쥔 손을 빤히 내려다보던 세이아드는 낮은 한숨을 삼켰다.
과거가 어떻든, 이제 중요한 건 폭주를 막는 것이다. 물론 레사스가 얼마나 그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른다. 그의 힘이 시조인 라만처럼 강력하다 하더라도 폭주를 막는다는 보장은 불가능했다. 그저 세이아드 자신의 추측일 뿐이지.
더군다나 지금은 과거와는 묘하게 상황이 달랐다. 고작 이 정도의 전투로도 환청을 들을 정도로 부작용이 심하다면, 폭주의 시기가 당겨질지도 몰랐다.
‘안 돼.’
가정만으로도 피가 식었다. 또다시 그런 짓을 벌일 순 없다. 그리 많은 이가 죽어서는 안 된다. 그것만큼은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만약 막을 수 없다고 느껴지는 시기가 온다면….
괴로운 가정 속에서 세이아드는 호흡을 고르고 이성을 되찾았다. 스스로 폭주할 것임을 인지하고 있으니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막을 방법은 분명 존재한다. 언제고 위험한 기미가 느껴지면, 그때는, 그 자신을 죽이면 된다. 간단하다.
그가 살아있음으로써 많은 이가 죽는다면, 그 일이 생기기 전 스스로를 막는 게 옳았다. 가장 효율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법이었다.
세이아드는 지금 그의 삶을 찬찬히 되새겼다. 그의 하나뿐인 가족은 그를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낸 지 오래고, 지상 어디에도 그를 아끼는 이는 없었다. 세이아드 또한 지키고자 하는 이가 없었으니, 세상에 그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북쪽 숲을 지킬 이가 사라진다는 점인데….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 북쪽의 영주가 없어도 이곳을 지킬 방법이.’
세이아드는 폭주를 막을 수 없을 때를 대비해 몇 가지 방안을 고려해 보았다. 일단은 두 공작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과거와 달리 그들이 살아있게 된다면, 세이아드의 부재를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숲. 밤의 숲을 없애야 했다.
왕이 지지하고 있는 계획이니 이 시기를 이용해 북쪽의 위협이 되는 숲을 아예 제거하는 것만이, 안전하게 그의 부재를 해결할 수 있었다.
불가능한 일에 가깝지만, 그전까지 누구도 감히 실행한 적 없는 계획이기도 했다. 시도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손님으로 머무는 두 공작이 살아서 숲을 빠져나가게끔 하려면 숲의 구조를 그가 먼저 파악해야 했다. 미리 알고 있다 해서 미래를 바꾸기가 턱없이 어렵다는 걸 어제의 일로 깨달았으니까.
해결할 일은 당장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폭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숲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모든 계획에는 어찌 되든 레사스가 필요했다. 절 향한 그의 강한 경계를 조금이나마 삭혀야 한다.
문제는 레사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점이다. 앞으로 두 달 남짓한 사이에 그와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회복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다.
이유는 시온 실드라스 때문이었다.
각성과 함께 단숨에 후계 싸움의 중심으로 뛰어들게 된 레사스의 옆에는 시온이 있었다. 세이아드 스스로가 실드라스 가문에 대한 분노를 억누른다고 하더라도, 실드라스 가문이 세이아드가 레사스에게 접근하게끔 내버려 두지 않을 게 확실했다.
애당초 왕자의 각성은 실드라스 가문으로 인해 생긴 결과였다.
기원제에 참여한 후 왕성으로 돌아간 레사스는 실드라스 가문, 아니, 시온 실드라스의 초대로 남부에서 겨울을 보냈다. 시온은 새 영주로서 처리할 일이 끝나자마자 왕자를 부른 것이다.
충성스러운 기사, 안카를 잃은 레사스를 달래 주고자 시온은 따듯한 남부에서의 요양을 권했다. 남부의 겨울은 북부와 비교할 수 없이 짧았고, 해가 오래 뜨는 탓에 니르아의 힘 또한 약했다. 혹한기를 나는 데 큰 무리가 없는 곳이니 그들 누구도 위험한 일이 생기리라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북부에서 생겼던 일이 남부에서도 생겼다. 그해 겨울, 모든 숲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하나씩 일어났다. 조사대를 다시 꾸리자는 왕의 발언에 힘이 실린 해였다.
남부에서는 보기 드문 상급 니르아가 혹한기의 마지막에 나타난 탓에, 시온 실드라스가 크게 다쳤다. 다른 티테르의 지원이 필요한 상급 니르아를 혼자 처리한 결과였다. 부상 자체는 치료할 만한 것이었으나, 지나치게 힘을 쓴 탓에 파장이 그의 내부를 진창으로 만들었다. 이같이 시온의 목숨이 위협받던 상황에 딱 맞춰 레사스가 각성했다.
힘의 탄생부터가 이러했던 탓에, 레사스와 시온의 관계는 왕국에서 가장 낭만적인 일로 손꼽혔다. 음유 시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그해 겨울에 만들어졌다. 그저 모욕적인 언사로만 레사스를 견제했던 아스테르의 행보가 바뀐 것도 그때가 기점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 두 달 안에 레사스의 경계를 누그러뜨려야 하는데, 도저히 방안을 떠올릴 수 없었다. 사람을 다루는 건 세이아드의 특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는 세이아드가 경멸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마구간에 들어섰다. 짐승 특유의 비린내와 마사의 악취가 맡아지자 답답함이 조금 풀렸다. 그는 과거부터 짐승을 돌보는 시간만큼은 즐겼다. 성년이 된 해에 선물받았던 말, 루나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 또한 세이아드의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만들었다.
“하하, 잘 먹네. 누가 주인 안 닮았다고 할까 봐 먹는 것도 어쩌면 이리 똑같니.”
그러나 조용해야 할 마사에는 선객이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세이아드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서자 거기엔 근신 중인 퀼리가 있었다.
“너도 알지, 루나야? 각하가 보기와는 다르게 단 걸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말이야. 어릴 때는 이 퀼리가 주는 사과를 그렇게나 잘 드셨는데….”
퀼리는 루나에게 사과를 먹이고 있었다. 원체 손을 가리는 녀석이라 어지간한 사람은 상대도 안 하는 녀석이, 낯이 익은 놈이라고 사과를 먹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새빨간 사과 조각이 흰 주둥이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 꼴을 지켜보던 세이아드는 퀼리가 사과를 한 조각 더 주려는 차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퀼리가 히이익, 기겁하며 냉큼 몸을 틀었다. 루나 역시 사과를 씹어먹으며 세이아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각하!”
근신 중이란 걸 잊었는지 퀼리는 찔려 하긴커녕 되레 얼굴을 환히 밝혔다.
“이 퀼리의 마음을 어떻게 아시고 운명처럼 여기 나타나셨나요?”
과한 호들갑에 세이아드가 표정을 굳혔다. 퀼리가 이처럼 정신없던 녀석이던가? 분명 유난을 떠는 편이긴 했으나, 그것도 성년이 되기 전의 일이다. 가주가 된 이후론 이리 구는 걸 못 봤다.
“넌 근신 중이 아니었나?”
“아버지가 그새 고자질을 하셨군요! 하지만 전 잘못한 게 없는걸요? 옳은 일을 하고 벌을 받을 수는 없죠. 저는 정의로운 반항 중입니다.”
세이아드는 팔짱을 낀 채 퀼리의 당당한 표정을 가늠했다. 캘러안에게서 본 묘하게 자랑스러운 기색도 그렇고, 전에 본 적 없던 면모들이 의아하게 다가왔다.
“뭘 잘했길래 그리 당당한 건지 모르겠군.”
“대공님을 향한 제 충성심을 증명한 사례가 하나 더 늘었죠.”
말없이 그를 쳐다보자 퀼리는 멋쩍은 듯 눈을 굴렸다. 길게 묶은 은발을 괜스레 헤집은 뒤 그가 말을 늘어놓았다.
“다들 대공님께서 목숨을 구해 준 것도 모르고, 어제 있던 일로 헛소리를 하잖아요. 저주를 받았다느니 뭐니 하며 왈왈거리길래 정정해 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