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죽인 늑대의 수는 열 마리였다. 세이아드가 도착하기 전 레사스가 넷을 죽였고, 바인과 모나가 나머지를 처리했다. 늑대가 들이닥치자마자 그들이 나선 탓에 피해는 크게 없었다. 마을의 식량을 모아 두는 창고 문이 부서지고 몇몇 가구의 창문이 깨진 게 전부였다.
딱 필요한 순간에 이들이 있을 수 있던 건, 이곳에서만 파는 얼음 포도주를 구하기 위해 방문했던 덕분이었다. 듣자 하니 병상에 누운 안카는 굉장한 애주가였고, 그를 위로하고자 레사스가 직접 움직이기로 한 것 같았다.
다른 왕족이 그랬더라면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레사스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그는 모두에게 다정했지만 그의 옆에 있는 이에게는 끔찍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포도주는 성에도 있다. 집사에게 요청했다면 알아서 가져왔을 텐데.”
세이아드는 그의 앞에서 뻣뻣하게 굳은 채 사실을 말하는 바인을 추궁했다. 레사스의 또다른 기사인 모나는 마을의 연회장에서 늑대 고기를 굽는 걸 도와주는 중이었기에, 바인이 이 자리에 불려 왔다. 불편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한 그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성에 머무는 것 자체가 가시방석인데 어떻게 그런 요청을 하겠습니까…? 다들 전하에게 얼마나 못되게 구는데요.”
그러고는 흘끗 세이아드를 보고 잽싸게 눈을 내리까는 것이, 세이아드 또한 못된 이들 중 한 명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세이아드는 이런 종류의 무례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밥도 먹다가 체할 판인데 어떻게 얼음 포도주를 구하겠습니까. 그래서 직접 나왔죠. 덕분에 다행히 사람들을 구했으니…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바인의 어법은 왕실 기사라기엔 다소 엉성했다. 세이아드는 그가 하는 말을 빤히 듣다가 물었다.
“네 소속이 어디지?”
“저요? 저는 레사스 전하께 속해 있습니다.”
“기사단을 묻는 거다.”
왕실 근위대는 세 개의 기사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태양의 빛이 왕을 호위했고, 푸른달의 갑옷이 왕세자의 권한으로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별의 은총이 왕궁 전체를 담당했는데, 레사스의 기사는 그곳에서 차출되어 배정되었다.
“아, 저는 평민입니다. 전하께서 저를 거둬 주신 후부터 쭉 따라다니고 있지요.”
어쩐지.
레사스는 그 자신이 겪은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각성 이후 귀족이 아닌 이들을 곁에 많이 두었다. 그 특이한 행보로 인해 왕궁 내에서 반감을 많이 샀음에도 레사스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비록 천것이어도 검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전하께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고, 전하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제 목숨도 내어드릴 겁니다. 제 충성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지난번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 바인이 굳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세이아드는 잠시 침묵한 채, 한창 저녁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을 살폈다. 큼직하게 구워진 고기를 비롯해 겨울 작물로 만든 음식들이 여기저기 놓였다. 위기를 극복해 살아남았다는 기쁨이 사람들의 얼굴에 가득했다. 레사스는 그런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레사스의 지지는 이런 식으로 전국에 퍼졌다. 니르아를 처리하기 위해 나서면서도 이렇게 구한 평민들이 수백 명이 넘었을 것이다. 아스테르가 귀족들의 지지를 업었다면 레사스는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
잘못된 편에 섰다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는다. 세이아드에게 어울리는 주군은 아스테르였다. 레사스처럼 지나치게 선하고 바른 사람은 세이아드를 견딜 수 없다. 그의 힘을 빌려야 하는 지금도 매한가지다. 세이아드의 길은 따로 있었다.
“죽는 것보다 살아있는 쪽이 네 주군을 위한 길이다.”
“에? 네?”
바인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그 이상 설명하지 않고 세이아드는 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가 있는 것 자체로 모두 불편해질 것이고, 세이아드 또한 이런 자리를 즐기지 않았다. 내내 능력을 쓴 이후라 몸이 불안정하기도 했다. 왁자지껄한 곳에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기실, 그런 기분을 느껴 본 게 까마득했다. 능력을 각성하기 전의 어린 날에나 웃을 수 있었지.
“네 주군을 잘 모시고 돌아오거라.”
“가시려고요? 이제 막 저녁이 준비되었는데?”
바인은 종잡을 수 없다는 듯이 세이아드의 뒤를 따랐다. 아무 말 없이 루나가 있는 마구간으로 걸어가자 바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시원스럽게 생긴 인상의 그는 호감을 쉽게 살 만한 얼굴이어서 그런지, 저리 멍청한 행동을 해도 굳이 모자라 보이진 않았다.
“저, 그럼, 가시기 전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구해 주신 날에는 그럴 경황이 없었어요.”
세이아드는 흘끗 고개를 돌렸다. 뒤를 살피니 바인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여기 오기 전에는 티테르를 먼발치에서 볼 기회도 없어서… 그래서 무례하게 놀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모두 전하께 크게 혼났어요.”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아, 이건 말하면 안 되는 건가…?”
바인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혼자 중얼거리다가, 세이아드의 냉랭한 눈을 보더니 냉큼 말을 이었다.
“몸 상태가 좀 나아지자마자 오늘 모두 불려 나가서 다음에 대공을 뵐땐 제대로 감사를 전하라고 했어요. 받은 은혜는 절대 잊지 말라고 하셨는데, 전하께서 저희를 질책하신 건 처음이라… 다들 좀 놀랐습니다.”
여러모로 이상한 날이었다. 퀼리의 말도 그렇고, 바인의 저 말도 그렇고. 다른 누구도 아닌 레사스가 제 편을 들었을 거라고는 믿기 어려워 세이아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용건은 그게 다인가?”
“네. 어, 아뇨. 정말 가시려고요? 다들 아쉬워할 겁니다.”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차였다. 저 멀리서, 아까부터 세이아드를 찾던 쥬디가 힘차게 뛰어오며 손을 흔들었다.
“영주니임, 영주니임, 밥 먹어요!”
해맑은 얼굴로 뛰어오던 아이는 코앞까지 와서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바인이 기겁하며 달려가기도 전에 쥬디는 벌떡 일어나 다시금 반짝이는 눈으로 세이아드를 올려다보았다.
“얼른 오세요!”
늑대를 보고 엉엉 울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바인이 대견하다는 듯이 옆에서 낄낄 웃었다.
아이의 청은 당연히 거절해야 한다. 할 일이 많았다. 영지의 일부터 시작해 조사대의 일도 대비해야 했고,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서는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발걸음에 망설임이 깃들었다. 절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빛이 꼭 여동생의 어릴 적을 보는 것 같아서였다.
잘 지내고 있겠지.
오래 전 악시드 영지를 떠나 그의 숙부에게로 가 있는 세실리아가 떠올랐다. 죽기 직전까지도 세이아드는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고, 세실리아 또한 그를 찾지 않았다. 기억 속에 남은 여동생의 모습은 눈앞의 아이처럼 어린 시절에 멈춰 있었다. 성년이 되기 직전의 세실리아는 몇 번 보지 못했다.
“…그래.”
굳이 찾지 않기로 한 여동생을 대신하기 위함인진 몰라도, 세이아드는 생각과는 다르게 끝내 아이의 청을 승낙했다. 바인이 씩 웃었다.
작은 축제처럼 마을의 작은 연회장에 술과 음식이 한껏 올라왔다. 세이아드는 불편하게도 레사스의 바로 옆에 앉게 되었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상이 따로 차려진 탓이었다. 레사스는 자리를 안내받는 순간에는 상냥히 웃어 주다가, 세이아드와 단둘만 남게 되자 서늘히 표정을 지웠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를 배경 삼아 들으며 세이아드는 덤덤히 식사를 시작했다.
실은 입맛이 없었다. 능력을 쓰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대가로 인해 뒤틀린 파장이 속을 헤집은 탓이었다. 두통은 끔찍했고 전신이 찔리는 듯 따끔거렸다. 내장이 뒤엉키는 감각 때문에 식욕이 아예 없었지만, 억지로 그는 먹을 걸 찾았다. 다행인 점은 어제처럼 환청이 찾아들진 않았다는 것이다. 아스테르의 반쪽짜리 정화가 나름대로 효과는 있는 모양이었다.
말 없는 식사가 이어졌다. 세이아드는 눈앞에 놓인 고기를 몇 점 먹다가,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기 어려워 포크를 내려놓았다. 물을 마시기 위해 식탁을 살핀 그는 레사스의 앞에 놓인 나무 물병을 찾았다.
빤히 그를 주시하던 세이아드는 이내 팔을 뻗었다. 검은 털 망토 아래로 팔이 뻗어지고, 이윽고 흰색 소매 아래로 가려져 있던 붕대 감은 팔목이 드러났다. 상처가 어느새 터졌는지 붕대도 소매도 피로 물들어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수프를 뜨던 레사스가 멈칫했다. 긴 속눈썹을 흠칫 위로 치뜨더니, 그의 눈길이 세이아드의 팔목에 멈췄다. 곱고 흰 미간에 미약하게 금이 갔다. 보라색 눈동자가 세이아드의 팔목부터 손까지 훑다가, 살이 헤집어진 손바닥을 마지막으로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