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2) Late bloomer
하루 사이 눈이 무릎 넘게 쌓였다. 하얗게 물든 사방이 조용하니 새 우는 소리만이 간혹 울렸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의 겨울이 오기 전, 얼마 없는 평온한 찰나였다. 눈으로 뒤덮인 땅 특유의 차분하며 고요한 공기가 성을 채웠다.
바람이 불지 않고 시야가 확보된 오늘, 조사대가 출발하는 게 좋겠다는 왕세자의 명이 내려왔다. 부상자들을 추스르고 재정비를 하고 있던 공작들에게 왕세자의 기사들이 명을 전달했다. 세이아드의 기억대로, 망쳐 버린 기원제로부터 정확히 나흘째의 일이었다.
지난 이틀간은 성 전체가 조용했다. 아스테르는 란드리 백작을 대동하여 왕궁과의 회의를 이어가는 듯했고, 두 공작은 각자의 기사단을 정비했다. 원체 발이 넓은 퀼리에 의하면 베트리아 공작이 종종 심각한 모습으로 그녀의 영지와 전령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였다고도 했다.
과거에는 알 수 없던 사실이었다. 퀼리는 이미 죽은 뒤였고, 성 내에는 세이아드에게 소식을 전해 주는 수족이 없었다. 그 시기의 세이아드는 스스로를 완전히 모두와 고립시켰다.
“그러고 보니, 아까 레사스 전하의 기사분을 만났습니다. 안카 경이셨나? 노장이신데도 회복력이 좋으시더군요. 벌써 침대를 벗어나실 정도고.”
나갈 채비를 도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퀼리가 마지막으로 안카에 대해 언급했다. 세이아드는 눈썹 끝을 살짝 치떴다. 뜬금없이 안카를 언급한 것이 속셈이 있어 보였다.
“그걸 내게 왜 말하는 거지?”
“우리 대공께서 안카 경을 구하셨으니, 안위를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목숨을 붙여놓은 뒤는 내가 신경쓸 바 아니다.”
실력 좋은 의사들이 성에 있으니 낫지 못하는 쪽이 더 이상했다. 티테르가 다스리는 영지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의사가 중요했고, 겨울이 시작될 땐 그들 여럿을 불러 혹한기 내내 이루어지는 전투에 대비했다. 외상에 특화된 의사가 셋이나 있으니 조만간 수도로 가는 여행을 견딜 정도로는 회복할 터였다.
“굳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실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요.”
퀼리는 세이아드의 털 망토를 마지막으로 메어 주며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근신이 풀린 기념으로 제발 옷시중을 들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걸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넌 내가 무섭지도 않나.”
간이 크다는 의미였으나 퀼리는 진지하게 답했다.
“세이아드 님은 어려서부터 항상 다정한 분이셨으니 무서워할 이유가 없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시절을 들먹이는군. 퀼리, 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다시 마주한 삶은 분명 의미가 컸다. 그는 전과 같은 전철을 밟을 생각이 없었고, 그가 부쉈던 것들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가롭거나, 평화로운 삶을 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리 모른 척하기엔 세이아드는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폭주에서 깨어나던 순간이 아직도 선연하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르든 영영 그럴 것이다. 그를 뒤덮은 피비린내는 영혼에 각인되었다.
“하니, 그런 말은 조심해.”
농담으로라도 그는 좋은 사람일 순 없었다. 24살의 세이아드는 29살의 세이아드만큼 피를 묻힌 적 없지만, 그렇다 해서 겪은 과거가 사라지진 않았다.
“원래 좋은 말은 들어도 나쁠 게 없잖아요.”
냉담한 발언에도 퀼리는 싱글거렸다.
“게다가 며칠 새 뭔가 달라지신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다시금 이리 세이아드 님과 말하는 게 꿈만 같습니다.”
“과장이 심하군. 물러가거라. 채비는 끝났으니.”
퀼리는 기분이 나아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전투를 앞둔 티테르가 가질 마음가짐은 아닌지라 그는 일부러 말을 끊었다.
“어릴 적 각하는 부끄러움은 잘 안타셨는데 말이에요.”
방을 나서는 그를 퀼리가 졸졸 따라왔다. 성을 나서기 전까지 뒤를 따르는 그에게 세이아드는 당부를 하나 내렸다.
“장작은 아끼지 말고 모든 이에게 공급하거라. 올해 겨울은 유독 추울 터니.”
이맘때쯤 고뿔로 앓는 이들이 성에 많았다. 그 말을 들은 퀼리는 녹색 눈을 싱긋 휘어 웃더니, 기꺼이 그러겠다는 듯 고개 숙여 그를 배웅했다.
***
조사대의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실상 숲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는 티테르를 제외한 소수의 정예 기사뿐이었으므로, 나머지 인원은 가이드인 왕세자를 보호할 인력이었다. 레사스는 아스테르를 보호하는 이들 중 하나로 들어갔다. 그의 기사 중 유일하게 다치지 않았던 바인 또한 조사대에 참가했다.
“다시 한번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해. 논의했다시피 이번 조사는 초반부의 내핵을 파괴하는 걸로도 굉장한 성과일 터. 우리 대에서는 숲의 내핵을 구경조차 하지 못한 티테르가 많아. 그 경험이라 생각하게. 다행히 브레드히트 공작에게 경험이 있으니 좋은 인도자가 되겠군.”
들어가기 전 정화를 위해 대기한 세이아드를 비롯한 공작들에게 아스테르가 격려를 건넸다. 브레드히트 공작은 그의 말에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티테르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선왕의 지휘에 따라 서쪽 숲의 내핵을 없앴던 경험이 있었다. 지금의 브레드히트 영지가 다른 영지에 비해 제일 작은 것도 이때의 성과 덕이었다.
“쉽진 않을 겁니다, 전하.”
“알고 있네. 그대들의 안위를 제일 우선으로 해. 폐하와 그간 이야기를 나눈 결과 시작 자체에 의미를 두기로 했으니.”
아스테르는 그 말과 함께 브레드히트 공작의 어깨를 문질렀다. 본의 아니게 그들의 가이드와 떨어져 영지에 머물고 있는 두 공작을 대신해, 아스테르가 짤막한 정화를 내렸다.
아스테르와 브레드히트의 상성은 제법 나쁘지 않은 축이었고, 베트리아와는 평균치를 유지했다. 세이아드와의 상성이 잘 맞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왕세자의 능력은 굉장히 탁월한 편이어서, 레사스가 각성한 뒤에도 그의 입지가 밀리지 않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 외에도 다른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지만.
눈을 감은 브레드히트가 정화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린 세이아드는, 우연찮게도 레사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스테르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기사들과 다름없이 무장했음에도, 드러난 얼굴이 워낙 눈길을 끈 탓에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레사스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외려 세이아드를 묵묵히 주시하며, 마치 그에게 결정을 내리라는 듯 말하는 듯했다.
‘그대의 가이드는 나 하나뿐이어야 합니다.’
머릿속에 울린 목소리는 어린 청년답지 않게 진지하고 확고했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제게 그런 말을 했나 싶어 다시금 머리가 아파지려는 차, 세이아드의 뺨에 손이 닿았다.
“나의 별.”
어느새 다른 이들의 정화를 끝낸 아스테르가 그의 앞에 있었다. 흠칫 시선을 틀어 그를 보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온화하게 웃는 푸른 눈이 보였다.
“그간의 내 소홀함을 용서해.”
아스테르의 손이 세이아드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이 닿는 동시에 며칠 내내 자리하던 지긋지긋한 두통이 시원히 가라앉았다. 흠칫, 입술이 떨렸다. 그 반응을 본 아스테르의 웃음이 짙어졌다. 나긋나긋한 손길이 세이아드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이내 내려와 세이아드의 손을 잡았다.
갓 흉터가 앉은 엉망진창인 손바닥이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피부 아래로 파고드는 아스테르의 기운이 손을 타고 올라와 팔목의 깊은 상흔 역시 치유했다. 잔잔히 들끓던 파장을 가닥가닥 붙들어 진정시키는 정화의 힘에, 전신에 도사리던 고통이 사라졌다.
누구보다 선명히 그 변화를 느낀 아스테르는 팔을 뻗어 세이아드의 등을 감쌌다. 단단한 팔이 그의 상체를 옥죄더니, 아스테르의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내내 얼어 있던 귓불에 닿는 뜨거운 온도에 세이아드의 속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내가 남긴 상처 외엔 아무것도 그대에게 머물 수 없어.”
작고도 선명한 귀엣말을 들으며 세이아드는 레사스와 다시금 시선이 마주쳤다. 무표정하던 앞선 모습과 달리, 레사스의 단정한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져 있었다. 무언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보라색 눈이 괜히 거슬렸다.
‘꼭 정화하는 걸 처음 본 사람같이 구는군.’
가이드가 티테르의 파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선 접촉이 불가피하고, 티테르 또한 그들을 안정시키는 가이드에게 본능적으로 끌린다. 많이 닿을수록, 서로를 깊게 느낄수록, 정화의 힘은 강해진다. 왕실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상식일 텐데.
‘…아니. 처음일수도 있나.’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생각해 보면 그가 이런 행사에 참여한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일 터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굳이 레사스에게 가이드의 일을 세세히 말해 줄 사람 또한 없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못 볼꼴을 보인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어, 세이아드는 시선을 먼저 돌렸다. 아스테르에게 감사를 표하자 그가 낮게 웃었다.
“고작 이 정도로 충분하나?”
치유를 끝낸 아스테르의 손가락이 입술에 닿을 듯 올라왔다. 뺨과 입술 경계를 매만지는 검지를 잠시 내버려 두다가, 세이아드는 손을 들어 아스테르의 팔목을 잡았다.
“다녀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볍게 힘을 주어 그를 밀어내자 아스테르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아직 토라진 게 풀리지 않았나?”
“전하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에 제가 미천하여.”
“그렇다면 돌아와서 더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아스테르는 오늘만큼은 별다른 제지 없이 물러났다. 뒤로 물러서는 그의 손목을 놔주고 나서야 세이아드는 그들을 둘러싼 분위기를 자각했다. 남사스러운 꼴을 본 것처럼 다들 시선을 피하는 것이,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눈이 돌아간 티테르가 가이드를 잡아먹을 듯 품에 가두는 일은 전장에선 흔한 일인데 말이다.
“조심히 다녀오게나, 나의 별들이여. 우리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어.”
아스테르는 배웅과 함께 세이아드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려던 세이아드는 무의식중에 다시금 레사스가 있는 쪽을 살폈다. 아까 전의 굳은 얼굴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는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방금 그가 지은 표정이 묘하게 거슬렸다.
“그럼, 가 보도록 하지.”
눈앞에 펼쳐진 검은색 숲을 바라보던 브레드히트가 손짓과 함께 출발 신호를 내렸다. 대기하고 있던 정예 기사들이 그들과 함께 숲을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