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혹한기의 초입이긴 했으나 숲은 며칠 전보다는 잠잠했다. 니르아가 나오지 않는 낮이기도 했고, 경계 쪽의 니르아를 세이아드가 그간 미리 죽여 둔 탓이기도 했다. 오늘을 대비해 최대한 위험 요소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나중을 위해 붉은 끈을 나무 가지에 묶어 가며 길을 만들며 나아갔다. 높게 솟은 나무들 사이로 지저귀는 새소리가 울렸다. 북부의 악시드에만 서식하는 잿빛 울새가 낮부터 바쁜 모양이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차분한 바람이나, 얼어붙은 눈에서 올라오는 생생한 숲 냄새가 기이한 평온함을 주었다. 긴 나무 그림자가 빼곡히 펼쳐진 땅을 보며 세이아드는 이곳이 언젠간 평범한 숲이 될 수 있을지, 그런 생각을 했다.
“경계의 핵을 본 적 있소, 대공?”
그답지 않게 한 시간이 넘게끔 묵묵히 걸어가던 브레드히트가 말을 걸었다. 일부러 그와 베트리아의 뒤에서 걷고 있던 세이아드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이 당시의 그는 아직 숲의 중심에 들어간 적 없었다. 브레드히트와 베트리아의 죽음에 한이 맺힌 그들의 자식이 4년 뒤 자원해서 조사대를 적극적으로 꾸린 이후에나 각 영지의 숲을 파훼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세이아드가 희생을 방관한 기사들 또한 많았다.
“없소.”
“그렇겠지. 전대 대공이….”
민감한 이야기인지라, 브레드히트는 말을 꺼내다 말았다. 그러자 내내 잠자코 있던 베트리아가 이어받았다.
“전대 대공도 숲의 핵을 본 적은 없었으니, 그 자식이 봤을 리 없지요. 우리 세대는 선왕의 조사대에 참여한 적 없으니.”
놀랍게도 베트리아 공작은 어머니의 친우였다. 처형당한 어머니를 위해 무엇 하나 한 것 없으며, 그녀의 결백을 딱히 믿어 주지도 않았으나, 어쨌든 그런 존재였었다. 그 같은 행위가 죄책감을 줬는지 베트리아는 한동안 세이아드의 친우였던 스텔라와 함께 북부를 방문하곤 했으나, 일 년 뒤 일어난 사고 이후 연을 끊었다.
과거의 세이아드는 그냥, 모든 티테르가 싫었다.
폭주는 그들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임에도 그리 결벽적으로 어머니를 잘라내는 것이 기만적이었다. 늘 대적자로 불리길 원하면서도 북부만큼의 책임을 지지 않은 남부의 행위도 증오스러웠고, 그런 남부의 실드라스를 도운 브레드히트도 싫었으며, 최소한의 의리조차 지키지 않은 베트리아 또한 위선적으로만 보였다.
미워할 이유는 끊임없이 나왔다. 그러나 사람을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은 그만큼이나 본인을 갉아먹는 일이라, 세이아드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도 두지 않음으로써 그를 평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세이아드는 제대로 그들과 충돌하고 싸워 본 적 없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치열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행동으로 모든 걸 판단한 후, 그 아래에 숨겨진 마음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언뜻 보면 스스로에게 제일 안전한 방법이었으나, 동시에 세이아드의 마음 어딘가에 응어리를 남겼다. 살아 있는 매분 매초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그를 짓눌렀다. 자꾸만 커져 가는 그것을 무시하기 위해, 세이아드는 또다시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 했다.
“두 분의 입에서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꾹 참으려고 하던 응어리가 속에서 날뛰는 기분이었다.
“얽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존재이니 진즉 기억에서 지우셨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과거의 세이아드는 그들의 앞에서 어떤 원망과 분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감정조차 사치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견 냉정하게 들리지만 기실 날이 선 세이아드의 말에, 베트리아가 외려 먼저 반응했다.
“해야 할 일을 한 이들에게 괜한 분노를 돌리지 마시오, 대공. 티테르라면 공과 사를 엄연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늘 냉소적이고 무뚝뚝한 베트리아는 보기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브레드히트는 미묘한 죄책감이 어린 얼굴을 하면서도 그녀의 의견에 동조했다.
“폭주한 티테르는 죽음 외에는 제압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지 않나, 대공. 전대 대공의 일은 불가피한 것이었소.”
세이아드는 조소했다. 감옥에 갇힌 어머니는 사리분별이 확실했으며 사람들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세이아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선 브레드히트 공작의 말이 맞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어머니의 경우는 아니었다.
“감옥에 갇힌 전대 대공이 하신 말은 두 분 모두 들으셨을 텐데.”
비꼬는 말투에 베트리아가 이를 악물고 반박했다.
“세레나의 말은 증명할 길이 없는 허언이었다. 모두의 증언과 반대되는 한 사람의 말을 대공이라면 믿을 수 있겠나?”
세이아드는 베트리아의 형형한 갈색 눈을 보았다. 브레드히트와 분명히 대조되는 그녀의 격렬한 반응은, 세이아드로서도 예상치 못했다.
그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언짢고 짜증나면서도 마음을 건드렸다. 베트리아의 행동이 어쩐지 강한 죄책감의 표식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언쟁할 때가 아니야!”
브레드히트가 그때 다급히 외쳤다. 손에 들고 있던 세검으로 앞을 가리킨 그를 따라 일제히 시선을 돌리니, 저 멀리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붉고 둥근 원석처럼 보이는 것이 몸체의 중앙에 박은 세계수였다.
“생각보다 깊지 않은 곳에 초입의 핵이 있군. 이제부터는 다들 조심하게나. 나무의 핵은 그냥 부술 수 있는 게 아니야. 저걸 건드는 순간, 그걸 지키는 니르아들이 일제히 깨어날 걸세.”
“하지만 지금은 해가 뜬 시간이 아닙니까?”
기사 하나가 의문을 표했다.
“이곳은 밤의 숲이 아닌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주는 데다가, 핵의 근처에 있는 것들은 그 힘을 이용해 깨어나는 것 같더군.”
그렇다면….
“핵이 있는 곳이라면, 낮이어도 니르아가 활보할 수 있는 겁니까?”
어머니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아주 조금 더 올라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의 지적에 베트리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브레드히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핵은 숲속에만 존재해. 자네가 말하는 것이 전대 대공의 유언을 뜻하는 거라면….”
브레드히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을 느꼈는지, 브레드히트가 몸을 휙 돌렸다. 그들 모두가 느낀 것처럼 조용하던 숲 안쪽에서 뭉글거리며 일어나는 검은 덩어리들이 보였다. 그 광경이 꼭 땅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같았다.
“침입자를 알아차렸나 보군. 쉽지 않을 줄 알았어.”
브레드히트의 말처럼 경계의 핵을 지키는 니르아는 수가 무척 많았다. 숲 밖으로 기어와 인간을 침략하는 것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수에, 기사들 또한 딱딱하게 굳었다.
거리를 빠르게 좁히며 달려드는 덩어리들을 노려보던 베트리아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먼저 박찼다. 그녀의 의지를 따라 땅속에서 덩굴들이 솟아나 쏜살같이 앞으로 뻗어졌다.
“다들 이곳에서 벗어나지 말고, 달려오는 것들을 중심으로 상대하게. 앞은 우리가 막을 테니!”
브레드히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잔잔하던 바람을 날카롭게 일으켰다. 대기를 다루는 그의 능력을 따라 만들어진 투명한 칼날이 달려오는 니르아를 꿰뚫었다.
앞선 티테르들의 선공에 따라 숫자가 빠르게 줄어든 하급 니르아를 기사들이 마저 죽이는 사이, 세이아드는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지금까지는 세이아드가 기억하는 5년 전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핵이 기억보다 조금 더 빨리 나오긴 했으나, 주변을 지키는 하급 니르아들을 제외하곤 그가 얼추 봤던 것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상급 니르아는 언제, 어디서 등장한 거지?
오감을 한껏 끌어올려 세이아드가 사방을 경계하는 사이, 전투는 나름대로 순조롭게 흘러갔다. 하급 니르아를 많이 죽여 본 기사들은 힘을 크게 낭비하지 않고 그것들의 핵을 파괴했고, 앞선 공작들 또한 별 무리 없이 니르아를 도륙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작은 것들을 모두 죽이고 내핵까지 접근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때, 작게 갈라져 내리쬐던 숲 위의 햇빛이 사라졌다.
머리 위에 떠 있던 해가 한순간에 사라지며 숲 위로 거대한 그림자 드리웠다. 갑작스레 드리운 어둠에 기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어두웠다. 그러나 그것은 밤이 찾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해를 가리는 거대한 무언가 때문이었다.
“브레드히트!”
세이아드가 외쳤다. 아득한 그림자로 덮여 있던 내핵 근처에서, 숲의 나무처럼 거대한 높이를 자랑하는 어둠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길고 두꺼운 팔은 다리까지 늘어져 있었고, 머리는 곰의 모양이었다. 그것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진동했다.
“기사들을 후퇴시키게, 대공!”
심각한 목소리로 브레드히트가 외쳤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이아드가 명했다.
“다들 입구까지로 퇴각한다. 여기서부터는 티테르의 영역이니, 당장 물러나!”
처음 보는 거대한 괴물의 모습에 기사들의 안색은 창백했으나, 그들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망설임을 괴물이 읽었다. 인간의 감정에 기민히 반응하는 것들답게, 찰나의 주저함을 놓치지 않고 그것은 인간의 무리 중 제일 약한 곳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육중한 몸집과 달리 그것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손에 들고 있던 곤봉을 휘둘렀다. 정확히 세이아드와 함께 있는 기사들을 노린 동작이었다.
곤봉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찰나 세이아드는 그의 힘을 풀었다. 당장이라도 내려칠 듯하던 곤봉을, 그것의 그림자를 통제해 붙들었다. 조종하는 것의 무게나 규모에 따라 세이아드가 써야 하는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갑작스레 무리한 탓에 속이 크게 뒤집혔다.
“가거라, 당장!”
이를 악물고 윽박지르자, 숙련된 기사들은 공포를 극복하고 황급히 물러났다. 몇 초의 유예 뒤에 그림자의 구속이 풀리며 곤봉이 지면을 후려쳤다.
귀청을 울리는 쾅! 하는 충격음과 함께 나무가 박살 났다. 다급히 후퇴하는 기사들을 위해 세이아드가 공격을 막는 사이, 브레드히트와 베트리아는 괴물의 핵을 찾기 위해 거대한 몸집을 도륙하고 있었다.
브레드히트의 바람이 곤봉을 든 괴물의 팔을 잘랐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롭게 지나간 바람을 따라 괴물의 팔이 무너졌다. 쉴 새 없이 돋아나는 덩굴들로 베트리아가 괴물을 구속하는 사이, 기사들을 대피시킨 세이아드가 전투에 합류했다.
“전면에선 핵이 보이지 않아! 이놈의 뒤를 살펴보게, 대공!”
브레드히트가 자른 괴물의 팔은 금세 돋아나기 시작했다. 핵을 파괴하지 않는 한 니르아는 끊임없이 자신의 형태를 재생시켰고, 급이 높아질수록 그 속도가 빨랐다.
세이아드는 브레드히트를 도와 그림자에서 만든 창으로 괴물의 사지를 도륙했다. 잘리고, 잘린 그것은 비틀거리면서도 버티더니 이내 둘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쿵, 넘어졌다. 그때를 틈타 세이아드는 그의 힘을 끌어와, 놈이 깔고 앉은 그림자에서 수백 개의 창을 불러왔다.
콰드득 박혀든 창들로 인해 흩어진 까만 니르아의 본체에서 세이아드는 어렴풋이 그것의 핵을 발견했다. 그것은 거대한 놈의 발치에 숨겨져 있었다. 핵을 찌르기 위해서는 놈이 넘어져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베트리아, 발! 놈의 발을!”
니르아의 하체 쪽에 있는 베트리아에게 세이아드가 외쳤다. 그의 부름을 들은 베트리아가 고개를 든 순간, 세이아드는 불현듯 이상한 걸 느꼈다. 그를 쳐다보는 베트리아의 눈동자가 기괴했다. 검은자위가 없이 마치 눈이 뒤집힌 듯 하얗게 변한 눈동자가 불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