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질식할 것같이 무겁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헉, 가파르게 숨을 들이켠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살폈다. 깊게 파인 등의 상흔이 부자연스럽게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자연 치유는 가이드의 고유 능력이었다.
이것은 곧… 명백한 각성의 증거.
당혹감을 애써 감추고 느릿하게 고개를 들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본인에게 생긴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면서도, 레사스는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엉겨붙는 세이아드의 파장을 느끼는 것 같았다. 기다렸다는 듯 레사스에게 달려드는 파장이 숨 막히는지 그가 헐떡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게….”
세이아드의 파장은 레사스에게 생긴 일을 이해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생명수를 향해 달려들라고 요동을 쳤다. 눈앞의 이 순진한 가이드에게 빠져나갈 틈조차 주지 않은 채, 호흡 한 점조차도 놓치지 않고 삼키고 싶은 본능만이 남았다.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레사스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를 집어삼키는 파장을 어떻게든 받아들어 보려 하는지, 그의 가슴팍이 가파르게 들썩였다.
깜짝 놀란 어린 짐승같은 꼴을 보는 세이아드 역시 당혹스러웠다. 그의 행동으로 조금씩 과거가 바뀌었다곤 해도, 레사스의 각성이 앞당겨질 거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탓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이아드 저와 있는 순간에.
그리고 또 하나 미칠 노릇은, 복잡한 이성과 별개로 세이아드의 본능이 레사스에게 달려들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것이다. 눌러 놓은 파장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레사스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영혼이 바뀌는 변화를 겪었음에도, 이 순간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임했다.
“무엇이든 할 테니, 그냥 말해요.”
당황하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레사스는 세이아드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또렷하게 속삭였다. 처음 보는 열기로 가득한 보라색 눈이 순간 그를 삼킬 것만 같았다.
“할 수 없는 것도 해낼 테니까.”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원했던 것이긴 하나, 막상 상황이 닥치니 작은 망설임이 일었다. 레사스라는 존재 자체가 껄끄러웠다. 긴 시간 미워하고자 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말을 섞는 것조차 소원했던 이와 정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 일단 상처부터 치료할게요. 피가 너무 많이 흘렀어.”
그렇게 세이아드를 제지하던 경계심은, 레사스가 조심스레 그의 팔을 만지는 순간 녹아내렸다. 그를 잠식하던 어둠이 사라졌다. 도사리던 고통이 단숨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미칠 듯한 갈망이 채웠다.
순간 이성이 날아갔다. 망설였던 것이 무색하게끔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무작정 떠밀었다. 벽으로 밀쳐진 레사스로부터 큭, 하는 신음이 샜다. 제 가이드가 도망갈 수 없게끔 세이아드는 그를 가두고, 또 가둔 뒤, 길고 흰 목덜미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하아, 하….”
얇은 피부 아래로 두근거리는 맥박이 생생했다. 벌린 입술 아래로 차가운 숨이 샜다가 체온에 섞여 뜨거워졌다. 전신을 채우던 난폭한 파장을 한껏 쏟아 부었다. 상대에 대한 배려라곤 없는 거친 충돌이었음에도 효과가 있었다.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팔을 흠칫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능숙히 그의 파장을 제어하는 정화의 요령도 없고, 그를 제대로 만지지조차 못하는데, 맞닿은 것만으로도 아찔하게 좋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세이아드는 이를 세워 레사스의 흰 목덜미를 긁었다. 이 끝에 걸리는 촉감이 지나칠 정도로 부드러워, 멈추기가 어려웠다. 베어 물고 빨기를 반복하다, 이걸로도 채워지지 않아 세이아드는 그의 등을 붙들었다. 등에 베였던 상처는 어느새 아물어 갈라진 옷 틈으로 매끈한 피부가 느껴졌다.
“상처를 먼저… 치료, 해야….”
레사스는 쓸데없는 말을 했다. 이처럼 형편없는 정화임에도 그를 단숨에 진정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그는, 지나친 힘에 대한 형평성인진 몰라도 티테르를 치료하는 힘만은 부여받지 못했다.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세이아드는 그의 입을 다물게 할 방법으로 가장 효율적인 것을 택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한참이나 목덜미를 짓씹던 그는 초점이 나간 눈으로 레사스의 턱을 쥐었다. 날뛰는 힘으로 인해 붉어진 눈동자가 소름 돋을 법함에도 레사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소 놀란 듯 재차 방싯대는 입술을 망설임 없이 덮었다.
긴 속눈썹이 움찔거리며 크게 떨렸다. 입술이 닿자마자 잔뜩 굳은 몸을 품으로 꽉 안았다. 어떻게 할 줄 모르고 닫혀있는 입술을 거칠게 비비다가, 혀를 내밀어 핥았다. 아까부터 은은히 감돌던 좋은 체취만큼이나 입술도 달았다. 그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이 지금만큼은 세상 무엇보다도 중독적이었다.
자연스레 입맞춤을 깊게 이어 가기 위해 세이아드가 고개를 틀었다. 입술을 벌리며 그에게 좀 더 다가가려던 차, 세이아드의 뺨이 세게 잡혔다. 생각 외의 억센 힘이 용케 세이아드를 밀치는 데 성공했다. 끊임없이 느껴지던 정순한 기운이 멀어지는 것이 무척이나 언짢았다. 형형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자 레사스가 어깨를 움켜쥐었다.
“입맞춤은 처음이어서.”
헐떡거리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쉰 뒤, 그가 세이아드를 허름한 침상으로 떠밀었다. 쿵, 소리와 함께 장신의 사내 둘이 그 위로 얽혀 무너졌다.
“숨 고를 시간 정도는, 하아, 주세요.”
이번에는 레사스가 세이아드를 덮쳐눌렀다. 그는 체중을 힘껏 실어 양팔로 세이아드를 짓눌렀다. 체격이 좋긴 했어도 날렵해 보이던 몸은 짐작과 달리 단단하고 무거웠다. 긴 팔로 그를 제압한 채 내려다보는 레사스의 얼굴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하얀 이마고 뺨이고 할 것 없이 말갛고 희미한 땀으로 젖어 있었다. 밖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는데, 고작 장작 몇 개로 불을 피운 이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내가 하겠습니다.”
이마 위로 드리운 검은 머리칼 아래, 보라색 눈이 선명히 빛났다. 하는 법도 모르는 주제에 욕심이 과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레사스가 배워야 할 것이기도 했다.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말을 섞을 시간에 조금이라도 닿는 것이 좋았다. 아주 오랫동안 느껴 보지 못한 것만 같은 온기를 빠짐없이 긁어모아, 그의 비어 버린 영혼에 불어넣고 싶었다.
***
멀리서 희미하게 울새가 울었다. 가느다랗게 파고드는 햇살이 눈꺼풀을 찔렀다. 서늘한 오두막의 공기가 그를 깨웠다. 눈을 뜨자마자 느낀 것은 믿기 어려운 상쾌함이었다.
몸이 가벼웠다. 각성한 이후 일어나면 언제나 느끼던 이질감도, 두통도 없었다. 아스테르의 정화를 받았을 때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근원적인 어떤 것이 달랐다.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통증은 없어져도 희미한 피로감은 늘 맴돌았는데, 그마저도 날아간 기분이었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옆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세이아드의 털 망토를 하나로 나눠 덮은 채, 레사스가 잠들어 있었다. 밤새 그의 입술을 탐하다 겨우 놓아주었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각성한 첫날은 특히나 몸이 적응하는 과정이라 더욱 힘들 것이다.
이성이 돌아오고 나자 비로소 그가 제대로 의식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사스와 이런 상황을 보냈다는 게 묘한 자괴감을 불러왔다.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가 필요한 것도 맞았고, 그의 힘을 빌리려는 것도 맞았으나, 레사스에게 지니고 있던 감정은 원체 복잡했다. 한때 애정이었던 것은 그를 둘러싼 주변을 있는 힘껏 경멸하며 증오로 바뀌었다. 그렇게 쌓여 있던 마음이, 죽음과 함께 불태운 한없이 부정적인 감정을 걷어 내고 나자 형체를 알 수 없이 변했다.
거기다…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요소가 곳곳에 있었다. 가령 이번이 레사스의 첫 입맞춤이었다는 점이라든가, 갓 성년이 된 어린 것이라는 점 말이다. 세이아드에게 있어 레사스는 실제 나이보다도 9살이 어리게 느껴졌으니, 솜털도 마르지 않은 어린 가이드를 탐한 기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간밤의 정화는 효과와 별개로 괜한 죄책감이 들게 했다.
세이아드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끝내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그를 몰아붙였던 것 같은데, 다쳤던 흔적은 하나도 없이 깨끗했다. 분홍 입술이 색색거리는 걸 지켜보던 세이아드는 일단 상황을 살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이아드.”
바닥에 발을 딛기 무섭게 레사스가 작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깨어났다. 기척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아주 작은 움직임에 일어난 게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네, 전하.”
그러고 보니 레사스는 쭉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와 지나치게 거리가 좁혀진 기분이 드는 것이 껄끄러워 세이아드는 정신을 차린 김에 원래의 호칭을 가져왔다. 전하라는 말에 레사스는 가만히, 누운 채로 세이아드를 올려다보았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은 수더분해 보이지 않았다. 그 자체로도 수려한 외모가 강조되어, 새삼 잘생긴 얼굴이다 싶었다. 어느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용모를 유지하는 탓에 그 점만은 옛날부터 왕궁 내에서도 유명했다.
각성한 이후로는 능력을 뒷받침하고도 남는 빼어난 미모라 많은 귀족 여성이 그를 흠모했었다. 구태여 찾자면 남자 또한 있을 것이다. 가이드는 의무적으로라도 성별을 가리지 않고 티테르를 상대하는 법을 익혀야 했으니, 동성이더라도 받아 주리라 여긴 귀족이 반드시 있을 터.
어쩐지 레사스의 사적인 순간에 들어온 기분에 세이아드는 시선을 조금 피했다. 그러자 레사스가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나요.”
레사스다운 물음이었다. 자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곧장 그의 안위를 확인하는 게, 이미 가이드다웠다.
“네.”
괜찮다 못해 굉장히 양호했다. 짤막한 대답이었으나 세이아드는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그러나 레사스의 표정이 모호했다. 세이아드를 시선으로 하나하나 훑던 그는, 곧 팔목에 여전히 남아 있는 상처들을 보자마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가 정화를 제대로 하지 못했나요?”
세이아드는 흘끗 팔을 살폈다. 베트리아의 덩굴들이 꿰뚫어 둔 구멍들은 반쯤 아문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