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티테르는 보통 사람들보다 회복력과 체력이 월등히 좋았고, 잘 맞는 가이드의 정화를 받으면 지니고 있는 본연의 회복력을 한층 강화시킨다. 세이아드의 몸이 이렇듯 아문 것은 레사스의 정화 덕이었다. 완전히 낫지 못한 것은 여기까지가 스스로 회복 가능한 한계이기 때문이었다.
레사스는 다른 가이드처럼 티테르를 치유하진 못한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이 부분은 기억하는 과거와 같았다. 레사스가 각성한 시기가 달라져 설마 싶었으나 예상을 빗나가진 않았다. 레사스는 유례없이 강력한 가이드였으나, 티테르를 치유하지는 못하여 그의 정적에게 질타받았다. 각성도 늦고 그 능력마저도 완전하지 못한 반 푼짜리 가이드라고 말이다.
“제대로 하신 게 맞습니다.”
그걸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세이아드의 긍정에도 레사스는 자책감어린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있으리라 기대한 능력일 터니 실망하는 건 알겠는데, 지나치게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왜 상처가 남아 있는 건가요.”
“모든 가이드에게 치유력이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내 상처는 아물었죠. 하면, 내게도 그런 힘이 있다는 뜻일 텐데?”
“각자 타고난 성격이 다르듯 능력도 다른 것뿐입니다.”
기이한 일이긴 하나 그뿐이었다. 당장 왕실에 있는 다른 왕족만 하더라도 치유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이가 많았다. 아스테르의 치유력이 원체 뛰어날 뿐.
“전하의 힘에 대해선 궁으로 돌아가시면 자세히 파악할 이들이 많을 겁니다. 일단은 돌아가는 쪽이 좋겠군요.”
이른 아침인 것 같으니 해가 지기 전에 숲을 빠져나가야 했다. 숲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만 가면 말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늦어도 오늘 밤까진 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돌아가면 할 일이 많았다. 베트리아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급했다. 그녀에게 일어난 갑작스러운 폭주가 무척이나 마음에 걸렸다.
“나의 티테르는 대공이니 다른 이들에게 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계획을 세우던 세이아드가 흠칫 몸을 굳혔다. 설핏 미간을 찡그리곤 레사스를 살피자, 반듯하게 간이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절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정화는 어차피 티테르와의 교류 아닌가요. 대공을 정화하면서 익힐 걸, 구태여 왕실의 이들에게 조언을 구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진심으로 그의 티테르가 되라는 소리인가? 세이아드는 처음 제안을 받은 순간부터 의아했던 것을 결국 묻기로 했다.
“전하께서 굳이 저 같은 자의 가이드가 될 필요가 있으신가요. 저는 전하의 힘을 조금 빌리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치를 떨며 싫어하는 이를 피해도 모자랄 판에, 앞에 둘 이유를 모르겠군요.”
세이아드 자신에겐 명확한 목적이 있다 쳐도 레사스에겐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애당초 그에겐 시온 실드라스라는 아군이 존재했다. 티테르를 이끌게 된 남부의 수장이 그의 편이고, 이런 상황에서 기적같이 각성을 했으니 왕위를 노린다면 외려 세이아드를 내치는 쪽이 맞았다. 실드라스와 프로시어스가 한 곳에 있는 건 그림이 되지 않는다.
냉소적으로 지적한 세이아드의 말에 레사스가 눈을 내리깔았다.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긴 얼굴이 어딘지 우울해 보였다. 흰 얼굴에 깃든 처연한 기색에 살짝 곤혹스러워지려는데, 레사스가 덤덤히 말했다.
“대공이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으니, 눈앞에 두기로 한 겁니다. 더는 그대가 악행을 벌이는 걸 두고 볼 수 없으니까요.”
그쪽이 차라리 말이 되었다. 세이아드는 그가 이맘때까지 악시드 대공으로서 했던 일들을 되짚었다. 영지 전체의 분위기가 흉흉해진 건 차치하고, 어지간한 원조 요청을 거절한 것부터 시작해 효율적으로 니르아를 잡기 위해 소수의 마을을 희생시킨 적도 있었다.
제일 큰 피해가 있었던 것은 사 년 전의 일로, 동쪽의 베트리아가 요청한 원조를 세이아드가 거절함으로써 변방의 큰 마을이 통째로 니르아에게 사라진 적이 있었다. 지리상 가까운 티테르가 그였기 때문에 동쪽의 요청은 북쪽에 제일 먼저 도달하나, 세이아드는 그 청을 거절했다. 베트리아는 그 일로 세이아드를 저주하며 척을 졌다.
“나는 베트리아 공작령에서 생긴 비극을 다시금 반복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때맞춰 레사스 또한 그 사건을 짚었다. 왕궁에만 머물던 그가 제 행적을 꿰뚫고 있는 것이 의아하면서도, 원체 말이 많았던 일이니 알만하다 싶었다. 주변에서 말이 나왔겠지.
영주가 된 지 1년이 막 지났을 때쯤이었을 것이다. 세이아드는 홀로 처음 겨울을 나고 있었다. 여동생은 성을 떠났고 북쪽에 존재하는 티테르라곤 세이아드가 유일했다. 동쪽의 요청을 받았을 시기에 그는 경험 부족으로 많은 기사들을 잃은 상태였다. 남을 도울 인력이 세이아드에게도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정을 설명하는 대신 그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적에게 등을 내보이는 것과 다름없다. 다른 가문의 티테르로 종속되는 대신 그에게 영지를 지킬 기회를 한번 받았으니, 세이아드는 약점이 있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됐다.
남들이 알아도 달라지는 것 없을 사정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저는 일 년의 반을 얼어붙은 땅에서 보내고, 전하께서는 추위에 약하시지 않습니까.”
어린 레사스는 계절이 바뀔 땐 꼭 고뿔을 앓았다. 차가운 바람에도 언제나 새하얗게 질리곤 했다. 아침엔 유독 추위를 타 남들보다 따듯한 겉옷을 챙겨 주는 것도 필수였다.
그런데도 유독 눈이 오는 것 하나는 좋아했다. 왕궁이 있는 수도는 남부와 가까워 거의 눈이 내리지 않았으나, 어쩌다가 눈이 내리면 레사스는 눈치를 보면서도 그 광경을 같이 보자고 했다. 새하얗게 내리는 눈을 보며 레사스는 ‘이드가 보는 북부의 눈도 이런가요?’ 하고 묻곤 했었다.
“…그건 어릴 적의 일입니다.”
레사스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그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표정을 볼 순 없었다.
“지금은 추위를 타지 않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레사스는 한참 어리게만 보였지만, 세이아드는 그걸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대신 덤덤히 수긍한 뒤 할 일에 착수했다. 오두막 벽에 세워진 검을 챙긴 다음 그는 조심스레 오두막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확 끼치는 얼어붙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는 오두막 주변을 눈대중으로 살폈다. 서서히 뜨기 시작한 해가 환히 보였다.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들이 유독 오두막 근처만큼은 없어, 하늘이 가려지지 않고 해를 고스란히 내리쬐게 했다. 아마도 이러한 위치 때문에 레사스가 용케 별 탈 없이 이곳까진 온 모양이었다. 오두막을 지은 이유가 있는 듯했다.
햇볕이 닿은 오두막 주위는 눈이 조금 녹아 문을 열 정도는 됐지만, 숲 안을 보니 쌓인 높이가 상당했다. 어림잡아 무릎까지 오는 눈을 뚫고 내려가려면 상당히 고될 듯했다. 속도가 느려질 테니 당장 출발해야 한다.
“지금 떠날 건가요?”
주위를 살피는 사이 어느새 레사스가 뒤에 와 있었다. 가까이서 들린 말소리에 흠칫 몸을 돌리다가, 등 뒤에 있는 그의 상체와 팔이 살짝 닿았다.
소름이 삐쭉 목덜미에 돋았다. 간지러운 감각이 등줄기를 긁고 내려갔다. 닿기만 해도 확 퍼지는 청량한 감각이 무서울 정도로 기분 좋았다. 아스테르와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베푸는 정화를 모든 티테르가 하나같이 칭찬했던 게, 바로 이 같은 이유인가 싶었다. 갑자기 잠긴 목을 낮게 가다듬고 그는 레사스로부터 살짝 떨어졌다. 자꾸만 닿다 보면 이 감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아스테르처럼 그 힘을 제한하는 이도 아니었다. 원한다면 언제까지고 베풀어 줄 것 같았으니, 그 편안함을 경계해야만 한다.
“해가 지기 전까지 마을에 가야 합니다.”
이렇게 눈이 높게 쌓인 곳은 아무리 두꺼운 털신을 신어도 삼십 분만 걷다 보면 발의 감각이 사라진다. 밤이 되면 눈이 얼기까지 하니 해가 떠 있을 때 니르아를 피해 여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레사스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만 세이아드가 물러선 만큼 한 발자국 따라붙었다.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몸을 틀어 나가려는 세이아드의 목덜미에 레사스가 손을 댔다. 흠칫 고개를 틀자, 같이 덮었던 털 망토를 레사스가 다시금 그의 등에 둘러 주었다.
“어제 보니, 나보다는 대공이 추위를 많이 탈 것 같아서.”
따듯한 손등이 목을 살짝 스쳤다. 지나친 자국 모양대로 화상이 난 것처럼, 닿은 부위가 뜨거웠다.
“잘 여미고 가세요.”
무표정으로 속삭인 레사스의 나직한 한마디가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것은 가당찮은 염려에 대한 거부감인 동시에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