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37화 (37/147)

#37

풀리지 않는 의문을 안은 채 세이아드는 대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일 년 새도 아닌, 일주일 새 이렇듯 회의가 연이어진 적은 그가 영지를 다스린 이래 처음이었다.

긴 세월, 악시드 성이 존재해 온 내내 많은 사람이 드나들던 대회의장은 몇 년간은 거의 쓸 일이 없었다. 실질적인 토벌이 북부의 겨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과거엔 항시 다른 티테르가 이곳으로 모였지만, 몇 년 전부터는 실드라스로 모든 행사가 이전되었다.

이번은 며칠 전보다 인원수도 많았다. 베트리아가 빠졌어도 수도에서 막 도착한 그녀의 가이드, 파르마가 참여했고 시온 실드라스 역시 당연하게도 자리를 지켰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오묘했다. 베트리아의 폭주가 뒤숭숭하긴 했어도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데다가 레사스의 각성이 큰 화제가 된 탓이었다. 덕분에 사방이 시끄러웠다.

아스테르를 대동해 회의장에 들어간 세이아드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조용히 그들에게 쏠리는 시선을 무심히 훑던 세이아드는 보라색 눈과 마주쳤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만을 주시하는 조용한 눈빛에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잡혔던 손이 괜히 불편해졌다. 일부러 망토 안으로 흉이 진 왼손을 숨기고 그는 아스테르의 뒤를 따랐다. 레사스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오는 걸 모른 척 무시했지만, 아스테르의 옆에 레사스가 앉아야 했기에 결국 지난번과 같이 세이아드는 그를 건너편에 두고 앉아야 했다.

“불필요한 인사는 생략하기로 하지. 오늘 이 자리는 베트리아 공작의 처분을 논의하는 자리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공작이 한데 있으니 결정이 수월할 터. 란드리 백작, 시작하게나.”

회의장에 있는 모두가 아스테르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일 텐데, 그는 의외로 아주 평온했다. 레사스에게 아무 힘이 없던 때에도 그를 멸시하던 아스테르 아닌가. 세이아드의 기억에도 수도에 있던 그가 분개하던 것이 생생한데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준비해 둔 거울에 란드리 백작이 손을 대자, 국왕의 얼굴이 상으로 맺혔다. 예상대로 국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왕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일제히 떨어진 인사에 왕은 껄껄 웃었다. 금갈색 눈썹이 둥글게 휘더니 곧장 레사스에게로 향했다.

- 이틀 전 있던 축복할 소식에 대해 들었네. 짐을 비롯한 왕궁의 모든 이들이, 아니, 솔리아스의 백성 모두가 기뻐하고 있어. 잘했다, 레사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왕을 따라 사람들도 웃으며 공치사를 했다. 특히나 시온은 그 누구보다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신께서 안배하신 운명이었나 봅니다. 시기가 늦은 것은 모두 전하의 힘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군요.”

- 짐 또한 레사스의 상성이 이곳에 있는 세 공작과 아주 잘 맞다는 소식을 들었네. 아주 대단한 축복이지.

그새 시온에 이어 브레드히트 또한 레사스와 정화를 시험해 본 모양이었다. 조만간 스텔라 베트리아와도 상성이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왕이 얼마나 기뻐할지가 눈에 선했다.

레사스는 무표정으로 왕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세이아드는 일부러 레사스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왕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며칠 전 그에게 호통치던 국왕의 얼굴이 그 위로 겹쳐졌다. 쌉싸름한 감정이 올라와 세이아드는 결국 화제를 돌리는 쪽이 낫다고 여겼다.

“폐하, 베트리아 공작의….”

그리고 세이아드가 입을 여는 동시에 레사스도 나섰다.

“축하보다는 베트리아 공작의 처우를 논하심이 어떠신지요.”

호탕하게 웃고 있던 왕의 미간이 살짝 굳어지려는 차, 레사스가 무표정을 지우고 싱긋 웃었다. 아름다운 흰 얼굴이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화사해졌다.

“제게는 그저 폐하의 잘했다, 한 마디만으로도 과분합니다. 드디어 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렸으니까요.”

- 그래, 네 생각이 깊다. 축하는 돌아와서 해도 늦지 않지.

부드러운 음색에 국왕의 노기가 기미를 감췄다. 그는 턱을 쓰다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상황에 대해서는 들었네. 숲을 조사하던 도중 베트리아 공작이 폭주했다고. 파르마, 이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왕의 막내 동생이며 베트리아의 가이드인 파르마가 고개를 저었다. 베트리아보다 조금 어리긴 하지만, 원체 둘의 사이가 각별한 것은 티테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기원제에 참가하기 전에도 확인했었습니다. 셀피니는 딱히 힘의 대가로 인해 고생하는 상태는 아니었어요.”

- 정화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고?

“정해진 주기마다 만나 빠짐없이 시행했습니다. 폐하께서도 제가 셀피니를 아끼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 왕실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지. 맞다. 흔한 일은 아니야. 전대 대공의 일이 불과 몇 년 전인데 그새 폭주한 티테르가 또 나오다니…. 역시 불안정한 힘이다.

시온의 표정이 굳었다. 브레드히트는 허허, 웃으며 넘기고 있었으나 듣는 티테르로서는 당연히 불쾌해질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그 불안정한 힘이 아니면 왕국을 지킬 수 없으니, 폐하의 고충이 얼마나 크실지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시온이 날카롭게 말을 받았다. 삽시간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굳었다. 왕의 푸른 눈이 순식간에 분노로 차올랐다. 잠시 말이 없던 국왕은 이내 결심했다는 듯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말했다.

- 그토록 내 고충을 잘 이해해 주니 결정이 쉽겠군. 언제고 다시 폭주할 수 있는 티테르는 커다란 불씨와 같으니, 그를 품고 있는 자체가 위험하지 않겠나. 생각해 보게. 영지로 돌아간 베트리아 공작이 폭주하면, 그녀의 딸을 비롯해 동쪽 전체가 위태로워질걸세. 상성이 맞는 가이드가 있고, 정화를 문제 없이 받았음에도 폭주했다는 건 공작의 문제 아닌가.

“하지만 베트리아 공작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습니다, 폐하…!”

브레드히트가 놀란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시온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장이 애매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왕의 편을 들지 않기엔 마음에 걸리는 일이 버젓이 눈앞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폭주로 인한 전대 악시드 대공의 처형은 실드라스가 주도했으니, 국왕과 이번 일에 대해서는 의견을 가르기 어려울 터였다.

“오라버니, 브레드히트 공작의 말이 맞아요. 베트리아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파르마 역시 왕에게 개인적으로 호소했다. 주름이 살짝 진 미간이 당혹감으로 굳어진 채였다.

- 그렇다면 마땅한 방안이 있느냐? 한번 폭주한 티테르는 또다시 폭주할 가능성이 크다. 그때도 이번처럼 운 좋게 막아 줄 티테르가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그렇다 하여 안 그래도 부족한 티테르를 매번 베트리아의 옆에 붙여둘 순 없지 않느냐?

세이아드는 조소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구도, 폭주한 티테르가 또다시 폭주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한계를 보인 즉시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 뒤를 어떻게 안다고.

“다수결로 정하는 게 좋겠군, 그럼.”

그때, 회의 내내 침묵하던 아스테르가 나긋하게 말했다.

“이곳의 모두가 솔리아스의 안위를 책임지는 이들이니, 이중 다수의 뜻을 따르는 쪽이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당연하게도 국왕의 뜻을 따를 듯하던 아스테르는 의외의 방안을 내놓았다. 국왕은 서늘하게 얼어붙은 푸른 눈으로 회의장을 쓱 훑었다. 긴 침묵으로 장내를 숨 막히게 하던 그가 이내 수긍했다.

- 좋다. 베트리아 공작에게 안식을 내리는 것에 대한 여부는 다수의 뜻으로 정하겠노라. 허나 의견과 함께 반드시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어떤 대책도 없이 그저 살리겠다, 청하는 것은 무능하고 염치없는 짓임을 명심하도록.

국왕은 베트리아를 내버려 둘 수 없는 점을 부각하며 압박을 가했다.

- 짐은 공작에게 안식을 주고자 하네. 베트리아령에는 장녀인 스텔라 베트리아가 건재하니 그녀가 그 뒤를 이을 것이고, 공작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선 합당한 보상으로 위로할 걸세.

안식은 셀피니 베트리아가 맞이하기엔 지나치게 일렀다. 올해 겨우 마흔여섯이 아닌가. 하지만 세이아드의 어머니는 이보다도 더 이른 나이에 안식을 맞이했다.

- 짐의 의견에 반대하는 이는 손을 들어 그 이유와 대안을 말하라.

세이아드는 표정 없이 장내를 살폈다. 브레드히트 공작이 곤혹스러운 듯 입을 닫았다. 대안을 생각하기 위해 그가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는 듯했다. 시온은 불편해하면서도 침묵했고, 아스테르는 그저 관찰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반대할 뜻이 없는 것 또한 명백했다.

국왕의 말은 딱히 틀리진 않았다. 티테르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불합리한 일이지만, 그러면서도 부정할 수는 없는 현실이었다. 폭주한 티테르는 위협 그 자체고, 스스로도 멈출 수 없으니 그 자체로 저주와 같았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아스테르로 인해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파르마의 문제인지, 아니면 그저 막을 수 없는 운명인지,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는 데다가 재발을 막는 방법도 모른다.

그러나 세이아드는 스스로 이미 결정을 내렸음을 알았다.

“차라리 저를 벌하세요, 오라버니.”

그러던 와중에 파르마가 나섰다. 예기치 못한 발언에 좌중의 시선이 파르마에게 쏠렸다.

- 지금 뭐라고 했느냐?

“티테르가 폭주할 일 없이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게 가이드의 몫이잖아요. 그런 셀피니가 폭주했다는 건, 제 정화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요? 책임은 제가 지는 게 맞습니다.”

- 무엄하다!

국왕이 분개하며 언성을 높였다. 노기가 들끓는 음성이 그들의 권위를 무너트릴 발언을 살벌하게 제지했다.

- 스무 해 넘게 너는 가이드의 역할을 다했다. 가이드의 힘은 어디까지나 티테르를 돕는 선량한 힘이지, 부정적인 것이 될 수 없어!

한 번도 논의된 적 없는 예민한 문제에 다들 놀란 기색이었다. 세이아드만이 이채로운 눈으로 파르마를 보았다. 가이드가 스스로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고모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상성이 맞는 가이드 없이도 버텨 온 티테르를 욕보이는 겁니다. 완전한 정화 없이도 폭주 없이 의무를 다한 이들이 넘치지 않습니까. 폭주가 일어난 것 자체가 몇백 년만의 일이기도 하고.”

그러자 아스테르가 나섰다. 예시를 들어 반박한 아스테르의 말에 파르마도 허를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국왕이 기특하다는 듯 이때를 틈타 여론을 몰았다.

- 아스테르의 말이 옳다. 정화 자체가 문제였다면 폭주한 티테르가 역사에 차고 넘쳤을 터! 전대 실드라스 공작 또한 끝내 적합한 상성의 가이드는 만나지 못했음에도, 어떠한 폭주 없이 안식에 들었다. 파르마,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이것만큼은 나 또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후작.”

브레드히트가 조심스레 파르마에게 말을 건넸다. 정화로 인해 티테르가 잘못된다는 가정은 기실 티테르들에게 외려 불안을 심어 주는 길이기도 했다. 파르마가 가파른 울음을 삼키며 얼굴을 손으로 뒤덮었다. 곱슬거리는 금갈색 머리칼이 처량하게 흔들리자, 국왕 또한 불편해졌는지 잠시 침묵했다.

세이아드는 나서야 할 때임을 알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파르마가 정화에 대한 이야길 꺼내와 잠시 관망했지만, 더는 질질 끌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공작을 지금처럼 제가 감시하면 되겠군요.”

회의장 내에 세이아드의 덤덤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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