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레사스의 웃음은 보기 드물지 않았지만, 저에게만큼은 오랜 세월 자취를 감췄던 것이었다. 과거 남에게 웃던 레사스는 틈틈이 목격했어도 제게 웃는 레사스는 긴 시간을 통틀어 지금이 유일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웃던 레사스는 어린 소년이었다. 지난 삶과 이번 삶을 통틀어 장성한 레사스가 그의 앞에서 웃는 일이 없었기에, 세이아드는 어렴풋이 웃는 그가 어릴 적과 별 다를 바 없으리라 여겼다. ‘굳이’ 상상하자면 말이다.
그러나 완연한 남성이 된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처음 보는 방식으로 웃었다.
짙은 눈썹이 부드럽게 펴지며 고혹적인 눈동자가 잘게 접혔다. 길게 올라간 속눈썹 사이사이로 부서진 햇살이 가느다란 음영을 눈가에 드리웠다. 소리 없는 미소가 분홍빛 입술 위로 느슨하게 퍼졌다.
낯설다. 지나치게 낯설어 가슴이 선득했다.
봄볕이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뜨거웠다. 뒷덜미에 내려앉는 열기 때문인지 숨이 흐트러졌다. 세이아드는 제게 찾아든 수상한 감각들이 언짢아졌다. 굳게 다문 입술 너머로 떨리는 숨을 삼키고 그는 일부러 표정을 굳혔다. 기습이라도 당한 느낌이었다.
…무슨 꿍꿍이지?
레사스와의 간극이 조금 줄어들었다고 여긴 지난겨울에도 세이아드는 그의 미소의 끝자락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보지 못했으니 저에 대한 호감은 녹아서 땅으로 자취를 감췄으면 감췄지, 나아질 순 없었다.
“아닙니다.”
웃어 버린 레사스에 대한 반발로 세이아드는 필요 이상으로 정색하며 부정했다. 빈정 상할 반응인데도 레사스는 외려 더욱 웃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술의 호선이 짙어만 갔다.
“대공이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일 텐데요?”
끝내 레사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스몄다. 대체 어디서 웃을거리가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남들은 마주치기만 해도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는 것이 악시드 대공 아닌가.
의미조차 둘 필요 없는 헛소리에 지나치게 휘둘렸다. 세이아드는 스스로를 질책하곤 딱 잘라 말했다.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이제 좀 입을 다물 법도 한데, 레사스는 끝을 몰랐다.
“대공처럼 길눈에 밝은 사람이 그랬다면, 그 또한 날 생각하다 이곳으로 온 모양이지요. 얼마나 황홀한 우연인가요.”
세이아드는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그냥 뒤돌아가려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 그는 끝내 불경한 질문을 뱉었다.
“못 보던 새 크게 아프셨습니까?”
차라리 미친 쪽이 나았다. 저리 하는 말에 죄다 의미가 없음을 아니까. 어떻게든 얼굴을 봐야 하는 상황에서 레사스가 자꾸 저리 굴 거라고 가정하니 등골이 서늘했다.
세이아드는 진심이었는데, 레사스는 제 불경한 말을 듣더니 아예 웃음을 흘렸다. 나직하게 깔린 웃는 소리에 진정 즐겁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거기서 멈추질 않고 흰 손을 들어 입가를 살짝 가렸다. 인상을 찡그린 세이아드가 상당히 위협적인 기색으로 노려보자, 레사스가 겨우 멈췄다.
“나는 항상 그대가 마음을 숨기는 데 능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대공은 거짓말에 무척이나 서툰 거였군요.”
“갑자기 이러는 영문이 뭡니까. 싫어하는 이에게 경멸받는 취미라도 생기셨습니까?”
봄철 꽃내음이 한창인 시기에 세이아드의 목소리에만 서리가 내렸다. 그리고 레사스는 잘도 서리밭을 헤쳐 와, 세이아드를 바로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난 대공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웃음기 사라진 얼굴이 진지했다. 레사스의 말을 듣자마자 곧장 부정하려던 세이아드는 순간 멈칫했다. 레사스는 그에게 실망하고, 그를 모욕하지 말라고 청하고, 그가 어떤 이라고는 말했으나 싫다는 말을 꺼냈던 적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싶으면서도.
“나는 그저 대공이 보고 싶은 모습을 흉내 냈을 뿐이죠. 그대가 나를 편히 미워하게끔.”
덤덤하고 잔잔한 레사스의 고백에 덮어 둔 죄책감이 올라왔다. 지난날 레사스가 말했던 것과 같이 레사스는 세이아드에게 어떤 것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그런 그를 끊어 낸 것은 세이아드였기에.
그편이 모두에게 옳았다는 것은 여전히 확신한다. 그러나 레사스는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었다. 거짓말이라는 걸 아는데, 그냥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이제 와서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꾸신 겁니까.”
“그거야, 이제 대공은 내가 필요하니까요.”
레사스는 반년 전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어투였다. 그가 지닌 힘이 어떤 것인지 자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짚어 낸 지금 이 말은 부정한다면 거짓임을 알기에, 세이아드도 입을 닫았다. 레사스의 저런 태도는 극히 혼란스럽고 거북했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그를 피할 순 없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 줘요. 날 찾으러 이곳까지 온 거죠?”
대화 내내 세이아드가 물러선 거리를 지켜 주고 있던 레사스가 서서히 다가왔다. 금세 거리가 좁혀져 몸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싱그러운 향이 레사스의 근처를 맴돌았다.
“파르마 고모님께 듣기로는 그간 왕세자 전하께 충분히 정화 의식을 받질 않았다고 하더군요. 굳이 고모님의 말이 아니어도 느낄 수 있어요.”
왼쪽 손등 위로 간지러운 느낌이 퍼졌다. 부드럽고 조심스레 닿은 레사스의 손끝이 세이아드의 흉터를 매만졌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섞인 레사스의 기운이 혈관을 타고 퍼졌다.
깔끔하게 가라앉질 않고 거칠게 속에서 충돌하던 파장이 레사스를 느끼자마자 게걸스레 돌변했다. 기운이 흘러 들어오는 곳으로 온갖 열감이 쏠렸다. 간질거림이 전신으로 퍼지더니 욕망이 솟구쳤다. 절 자극하는 흰 손을 붙들고 으스러트릴 듯 잡은 다음, 눈앞의 사내를 꽉 안고 싶었다. 그것은 세이아드의 감정이나 의지와는 다른, 티테르로서의 본능이었다.
‘그들이 주는 황홀함을 경계해.’
으레 깊은 정화에 들어서려 하면 불쑥 떠오르던 어머니의 말이 간만에 머릿속을 울렸다. 세이아드는 티테르와 가이드라서 만들어지는 이 욕망의 작용이 싫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현혹되는 기분이다. 실은 좋아하지도 않는 이를 좋아한다고 여기게끔, 그렇게.
“지금은 됐습니다.”
세이아드는 일부러 레사스의 손을 세게 쳐 내며 거절했다. 짝, 하는 마찰음이 크게 울렸다. 레사스는 흔들리지도 물러서지도 않은 채 거절당한 손을 흘끗 보았다. 전처럼 세이아드의 행동에 인상을 쓰거나 입술을 꾹 깨무는 모습은 없었다.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 덤덤했다.
“그럼 언제가 그대에겐 적절한 시기일까요. 곁에만 가도 파장이 이리 날뛰는데, 참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해요.”
억지로 쳐 내긴 했으나 레사스의 말처럼 정화가 간절했다. 곁에서 숨만 쉬어도 이리 몸이 차분해지는데, 저 하얀 살결을 질릴 만큼 문지르고 짓씹으면 메마른 속이 얼마나 채워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을 따라 그리 굴려고 하니, 자꾸만 보고 싶어서 왔냐는 레사스의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 지나치게 휘둘리고 싶지 않은 아집이 솟았다.
“대공이 말하지 않았나요. 폭주를 막게끔 도와 달라고.”
못 보던 새 마음을 다루는 법이라도 익힌 건지, 레사스는 능숙하게 고삐를 쥐어 왔다.
“나는 기꺼이 대공이 나를 이용하게끔 협조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대는 나를 마음대로 하세요. 체온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어 드리고, 입을 맞추어 달라면 언제고 해 드리겠습니다. 말했잖아요. 나는 그대의 가이드라고.”
귓가로 흘러드는 말이 죄다 야릇했다. 살짝 눈을 피하자 보랏빛 눈동자가 진득하니 시선을 따라왔다. 세이아드를 꿰뚫어 보는 듯이 그가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동산에 숨은 사슴처럼 맑고 순진한 얼굴이었다.
“지난번의 입맞춤이 별로였던가요? 그것만큼은 그대가 가엾게 넘겨 주세요. 남의 입술을 맛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니, 분명 부족했음을 나도 알고 있어요. 대공의 입술이 사과보다 달아, 어떻게 그것을 맛봐야 할지 길을 잃고 제멋대로 굴었습니다.”
저런 얼굴로, 잘도….
잠시 가라앉았던 봄날의 뙤약볕이 목덜미를 뜨겁게 달구었다. 저딴 말을 지껄이는 건 아스테르도 한 적 없었다. 능청스러움이 아스테르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나 했는데, 겨울 사이 확실히 돌아 버린 모양이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왕세자 전하와 비교하기도 힘들 만큼 서툴고 형편없었던지라, 당장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괘씸한 마음이 커서, 세이아드는 일부러 아스테르를 불러왔다. 만난 순간부터 쭉 평온해 보이던 레사스의 표정이 그 순간 처음으로 무너졌다. 태연해 보이던 흰 얼굴이 일순 굳었다. 짙은 검은 눈썹이 미약하게 일그러지더니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상처받은 것처럼 일렁였다.
그 반응에 당황한 것은 세이아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아스테르에게 뒤처질 것도 없는 위치인데다, 그전에도 아스테르에게 위축되는 모습은 보이지 않기에 이렇게까지 반응하리라곤 여기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