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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47화 (47/147)

#47

연회의 시작은 무릇 춤이었다. 왕과 왕후가 첫 춤을 보이고 물러선 후에는 왕세자가 그 뒤를, 그 이후부터는 모두가 섞여 춤을 추기 시작했다. 왕세자는 그의 약혼자로 어려서부터 말이 나오고 있는 사클라니 후작의 여식과 첫 춤을 추었다.

아스테르가 레사스의 각성 이후로도 입지를 지킬 수 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클라니 후작이었다. 사클라니 후작가는 티테르의 작위인 공작을 제외한 귀족의 작위인 후작을 건국 이후로 이어 온 집안이었다. 재무장관의 직위를 대대로 세습했으며, 북부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그의 상단이 아니면 기름의 유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지간한 ‘불’에 대한 공급망을 쥐고 있었다.

니르아는 겨울밤이라는 조건이 붙으면 찾아드는 악마지만, 하급 니르아의 경우 커다란 불빛으로도 쫓아내는 효과가 있었다.

규모와 지속력이 큰불은 반드시 기름을 이용해야 했고, 건국 당시엔 거대한 목장을 소유하고 있던 사클라니 영지는 동물의 기름을 가장 많이 공급하는 방식으로 부를 거머쥐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들은 식물로부터도 기름을 짜내는 방식을 발명해 공급량을 늘렸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다른 분야에도 손을 뻗고 있었다.

티테르가 숲의 모든 곳을 지킬 순 없으니, 불은 모두에게 항시 상비되어야 하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사클라니 후작가가 아스테르를 지원하고 있으니, 고위 귀족들의 지지율 또한 그에게 몰려 있었다. 그것은 티테르 없이도 나라를 지킬 수 있길 원하는 국왕의 뜻과도 맞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세이아드는 사클라니 후작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제 여식의 약혼자가 될 이와 석연찮은 접촉을 하는 티테르를 아비된 도리로서 즐기는 것이 외려 이상할 것이다.

샬로트 사클라니는 세이아드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곤 했었고, 그런 자리면 세이아드는 항시 어딘가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

흘끗 살펴본 아스테르는 즐거운 미소를 띤 얼굴로 샬로트를 이끌어 춤추고 있었다. 완벽한 원을 그리며 한 바퀴를 돈 그들은 이내 세이아드를 스쳐 갔다. 샬로트의 시선이 세이아드를 스친 찰나 무섭게 굳었다. 그 표정 위로 울부짖던 샬로트의 찢어진 음성이 겹쳐졌다.

‘전하께서는 왜 저 악마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건가요! 그를 만진 손으로 절 만지시려는 건가요?’

아스테르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세이아드는 습관처럼 뒷걸음질 쳤다. 기억나지 않는 순간부터 세이아드는 아스테르가 아닌 이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저주하는 존재였으므로, 이렇듯 많은 군중 속에 있는 것이 그 또한 불편했다.

과거에 그러했듯 세이아드는 이곳을 뜨기로 했다. 무도회를 즐길 짝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거슬러 올라가 그는 연회장의 밖으로 향했다. 얼굴을 비춰야 하는 의무는 다했으니 지금부터는 티아키가 말한 빨간 머리의 뜨내기 기사를 찾아볼 예정이었다.

“세―이―아―드 님―!”

그러나 예기치도 못한 상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도저히 듣지 않고 지나칠 수 없는 선명한 부름에 세이아드가 뒤를 돌아보자, 노바가 상기된 얼굴로 그에게 뛰어왔다. 브레드히트의 여식이 아니랄까 봐 작은 몸집으로 어지간한 짐승보다 날쌨다.

“저랑 춤!”

다만 너무 급하게 온 것인지, 노바의 분홍 구두 한 짝이 벗겨졌다. 재빨리 균형을 잡은 덕에 넘어지진 않았지만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모두 그 모습을 보았다. 세이아드는 눈을 내리깔아 그의 앞에 착지한 리본이 묶인 구두를 보았다.

‘브레드히트 공녀님께서는 어쩌면 저렇게 처신이 남다르실까.’

‘티테르가 아니었다면 이곳엔 발도 디디지 못하셨을 거예요.’

‘그래서 아직까지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으신 걸까요?’

작은 속닥거림은 세이아드뿐만 아니라 노바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노바의 작은 얼굴 위로 시무룩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지간한 남성들의 마음을 녹일 정도로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세이아드는 저 표정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다.

‘…몇 분 내로 뒤집어 놓겠군.’

노바는 요정처럼 생긴 모습과 달리 절대 참지 않았는데, 원체 내놓으면 사고를 쳐 브레드히트 공작이 아직까지도 사교계에 데뷔시키지 않았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저들이 하는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난장판에 끼면 괜한 주목만 받는다. 어서 달래 주고 떠나는 쪽이 맞아.

세이아드는 노바가 바람을 불러와 입을 놀린 여성들의 드레스를 찢기 전에 나서기로 했다. 그의 짐작대로 노바의 녹색 눈이 기이한 빛을 띠고 반짝이려는 게 보였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 끝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따라 살살 흔들리는 게, 분명 능력을 쓰기 직전이었다.

“노바, 손을.”

허리를 숙여 구두를 주운 세이아드는 그 길로 다가가 노바에게 손을 내밀었다. 번들거리던 노바의 눈이 일순 본연의 색을 찾았다. 순식간에 진정한 노바가 상기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작고 사랑스러운 노바와 드디어 춤출 마음이 드신 거예요?”

“아니.”

내밀어진 손을 적당한 힘으로 잡은 뒤, 그는 상체를 숙여 무릎을 반쯤 굽혔다. 구두를 그녀의 앞에 내려놓은 세이아드가 노바를 올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서 신어.”

그 말은 노바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찰나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의 귀에도 아무 말이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면 다들 입을 다문 모양이었다. 대신 정체 모를 시선들이 그에게 쏠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제 존재가 두려운 것 같았다. 어차피 떠날 장소였으니 세이아드는 한시라도 빨리 노바를 진정시키고 싶었다.

“세이아드 님, 노바 기절할 것 같아요…. 올려다보는 세이아드 님을 살아 생전 볼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세이아드는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아무 말이나 뱉는 것이 노바의 특기기는 해도, 세이아드의 말을 썩 잘 듣는 편인 그녀는 입을 불퉁 내밀며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느린 속도였다.

“제가 원래 좀 굼뜬 편인 거 세이아드 님도 아시죠?”

훤히 보이는 꿍꿍이에 세이아드가 조소했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 그는 자세를 바로했다. 고개를 들어 노바가 억센 힘으로 쥐고 있는 손을 떼 내려는데, 노바의 뒤에 서 있는 보라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대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레사스가 빤히, 겹쳐진 세이아드와 노바의 손을 내려보고 있었다. 하얀 얼굴 위로는 표정이 없었다.

“…전하?”

잠시간 환상인가 싶었다. 그는 아까까지만 해도 수많은 귀족들에 휩싸여 형체조차 찾기 어렵게끔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삐죽 솟은 머리통만이 보였던지라 아마 오늘밤 내내 저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네, 대공.”

레사스는 얌전히도 답했다.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앗, 레사스 전하!”

세이아드의 말에 화들짝 놀라 뒤돌아본 노바가 얼른 인사했다. 동그랗게 뜬 녹색 눈에 의문이 한가득 맺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러는 노바야말로 왜 여기 있나요? 시온과 춤추기로 한 것 아니었나요?”

레사스가 말을 놓는 것은 시온이 유일했다. 노바는 다정한 레사스의 목소리에 힘입어 당차게 대꾸했다.

“제가 세이아드 님과 춤출 거라고 말하니 짜증내며 스텔라 언니에게 갔어요. 지금 막 대공께 춤을 청하던 차였답니다.”

레사스는 노바의 대꾸를 듣고 말없이 웃었다. 세이아드가 오늘 보았던 것과는 분명, 미묘하게 달랐다. 저 웃는 낯을 남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아주 익숙했는데 지금 보니 느낌이 달랐다.

“소공작에게는 미안하지만, 대공은 저와 선약을 했기에 그건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네요.”

“에에? 정말요? 언제요?”

“비밀이랍니다.”

세이아드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워졌다. 어떤 순간에는 제가 아는 레사스같다가, 어떤 순간엔 처음 보는 모습으로 저리 거짓을 잘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반년 새에 사람이 바뀐 건지 아니면 세이아드를 증오하지 않던 레사스가 저런 모습이었는진 모른다. 확실한 건, 어찌 대응할지 감을 도통 잡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제가 언제….”

라고 말하려는 세이아드에게 레사스가 다가오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나가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요?”

맞는 말이었다. 달싹거리던 입술이 다물리자 레사스가 부드러운 힘으로 세이아드를 붙든 노바의 손을 떼어 냈다.

“시온이 노바와 춤추길 고대했으니 얼른 가서 얼굴을 보여 주세요.”

“전하가 그렇게 부탁하니 일단은 들어 볼게요. 하지만 돌아오시면 꼭! 이 노바와! 춤추시는 거예요.”

노바는 명랑하면서도 살벌하게 당부하더니, 아쉽다는 듯이 세이아드를 보면서 몸을 틀었다. 어릴 적의 노바를 이런 식으로 몇 번 돌봐 준 적 있지만, 세이아드가 모두와 교류를 끊은 뒤로 마주한 적이 없어 이토록 당돌한 소녀가 되었을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도 새삼 드는 생각이, 이같은 감정을 보여 주던 소녀에게도 미움받을 정도로 스스로가 잘못된 길을 걸었다는 거였다.

“나갈까요, 대공? 이대로 있다간 대공의 얼굴이 닳을까 싶어서요.”

레사스의 말에 주변을 살피니 노바의 화려한 등장 이후 모여 있던 인파가 어느새 배로 늘어 있었다. 아무래도 레사스를 따라온 것 같은 이들이 대다수였다.

“같이 나가면 전하께 그다지 좋은 영향은 주지 못할 겁니다. 더군다나 왕후께서도 이 자리에 계시지 않나요.”

“대공께서 나를 걱정하는 걸까요?”

미치겠군.

무슨 행동을 하든 좋을 대로 해석하는 레사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세이아드는 몸을 틀었다. 진즉 나왔어야 할 연회장을 빠져나와 복도로 나오자, 아치형으로 조각된 열린 창문들로 은은한 밤바람이 불었다. 추운 곳이 익숙한 세이아드에게는 숨통이 트이는 서늘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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