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조용한 복도에서 세이아드의 뒤를 따르는 발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차분하면서도 일정한 보폭으로 세이아드와 거리가 벌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 느껴졌다.
정처없이 그저 사람의 기척이 제일 적게 감지되는 곳으로 향하다 보니 정원이 나왔다. 무릇 무도회장 근처의 정원은 밀회의 장소일 텐데, 조용한 걸 보니 함부로 사람이 다닐 수 없는 장소인 성싶었다. 아스테르의 궁이나 레사스의 남쪽 궁 외엔 왕실의 구조는 세이아드도 잘 알지 못했다. 들르는 곳이 워낙 뻔하니 거대한 왕궁에서 꿰고 있는 곳이 적었다.
“대공께서는 제 흔적을 좇는 재주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늘어선 정원수들을 보며 세이아드가 걸음을 멈추자, 때 맞춰 레사스가 읊조렸다. 영문 모를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밤의 달을 등진 그가 세이아드를 가만히 응시했다. 짧은 시간 사이에 익숙해질 정도로 레사스는 언제나 마주치면 그를 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여기가 제 새로운 거처인 것은 어찌 아시고, 이 길로 오셨나 싶어서요.”
세이아드는 그 말과 함께 레사스의 선물이 중앙궁으로부터 왔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러자 낮에 있던 일이 겹쳐지며 순간 혼란해졌다.
“그렇다면 그곳엔 왜 계셨던 겁니까?”
“거야….”
레사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세이아드는 습관처럼 방관하기 위해 물러서려 했으나, 그의 등 뒤를 높은 정원수가 막았다. 그의 키보다 높은 정원수는 네모난 초록벽처럼 정원을 감싸고 있었다.
“대공이 오기를 기다렸으니까요. 반년이나 그대를 보지 못했어요. 대공에게 내가 드디어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걸 알자마자 너무 긴 시간을 떨어져 보냈죠.”
낮에 있던 대화에서 온갖 신경을 곤두세워서인가.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버거운 말들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대신 물어보기로 했다. 그가 이러는 연유를.
“전하께서는 저와 대체 뭘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를 믿지는 않았지만, 표면적으로 보기에 레사스가 원하는 것은 이전 관계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왕후가 싫다는 그의 말에 레사스는 어머니를 부정하며 세이아드를 잡았고, 시온 실드라스와의 관계를 짚는 말에는 숲을 없애겠다는 선언을 했다.
다만 세이아드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제 와서 굳이 저와의 관계를 되돌려 레사스가 무엇을 얻느냐는 것이었다. 소중했던 관계고 세이아드의 마음에도 분명 깊숙이 자리 잡은 시간이었음은 맞지만, 몇 년 전의 일이다.
서로를 가족처럼 보듬었던 시간에 필적할 만큼 세이아드는 레사스에게 질 나쁘게 굴었다. 그를 걸핏하면 무시했고 아스테르의 의지에 따라 모욕했다. 믿기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과거에서 다시 깨어난 이 시점에도, 이미 세이아드는 레사스에게 많은 상처를 준 상태였다.
그렇게 홀대받고 모욕당했으니 둘의 관계는 기실 노바나 스텔라와 같은 사람들보다 더 나빠야 하는 것이 합당했다. 시온 실드라스가 의심하며 경계하는 게 오히려 당연했다.
“전하의 어린 시절에 말동무가 되어 드렸던 것은 기억합니다. 하나 저는 말하신 바처럼 전하와 저의 끈을 잘라냈으며, 왕세자 전하를 보필하며 긴 시간 불경하게 굴었습니다. 전하께서도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절 보면 경계하며 저의 모든 행동을 경멸하셨던 것 아닙니까?”
속마음을 이렇듯 털어놓아 본 게 요즘 들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말을 길게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이아드의 말을 가만히 듣던 레사스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속삭였다.
“내가 대공을 좋아하니까요.”
잔잔한 목소리와 태연한 표정 때문에 순간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다.
“내가 그대를 볼 때마다 기대하고 실망한 건, 내가 알고 있던 대공답지 않은 모습을 보는 게 싫었기 때문이에요. 나의 모든 행위는 대공의 다정한 말에서 비롯되었는데, 정작 그걸 알려 준 그대는 더는 그런 것을 따르지 않았어요.”
“전하께서 보아 온 모습이 바로 저입니다. 사람은 바뀝니다, 전하.”
“그리고 대공은 다시금 내가 알던 그 사람으로 돌아왔죠.”
“아닙니다. 저는 그저….”
더는 상처입히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이, 혀 끝에 걸렸다. 레사스는 마치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다정히 말했다. 딱히 웃지 않는 얼굴임에도 그렇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대공은 언제나 내가 아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그걸 몰랐을 뿐. 나는 대공께서 나의 곁에 있는 이들로 인해 그렇게 아파했을 거라곤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이 뒤에 이어진 레사스의 말이, 세이아드가 억지로 세우고 있던 단단한 벽을 끝내 무너트렸다.
“미안해요.”
상처를 준 것은 오직 세이아드 저 자신뿐이었을 터인데, 미안하다는 말은 레사스의 입에서 나왔다. 세이아드는 한껏 짙은 눈썹을 일그러트리곤 입을 다물었다. 굳게 다물어진 입매로 떨리는 숨이 새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딱 한마디.
고작 그 한마디가 소리 없이 세이아드의 안에서 크기를 불려 오던 응어리를 깨트렸다. 돌보다 단단해 도저히 깨질 기미가 없던 그것에 작은 금이 갔다. 눈이 아플 정도로 환하게 뜬 달이 레사스의 머리 위에 있었다. 정원에 내려앉을 듯 가까이 다가온 상아빛 달은 꼭 처음 만난 그 밤 같았다.
“내게 다시 다가온 이유가 뭐든 상관없어요. 대공은 내가 필요하고, 우린 앞으로 자꾸 얽혀야 할 사이니….”
사뿐사뿐 다가온 레사스가 세이아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화해할까요?”
자상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그걸 잡아달라는 듯 그를 쓰다듬었다.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는 손을 보았다.
내팽개쳐진 손을 다시금 내밀어 이끄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세이아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것을 하지 못해 잃어버린 인연이 많았다. 끝내 홀로 죽어 갔던 것은 세이아드의 마음이 지금의 레사스처럼 용서하는 법을 알지 못해서였다.
분명 그는 억울했고 또한 그것을 잊지 않지만, 더는 모두를 미워할 순 없었다. 그 끝이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비참했다.
이 손을 잡는 게 맞는 선택일까.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바뀌기 시작한 과거이자 현재를 어떻게 해야 잘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스테르가 자신을 아낀 적 없다는 것을 마음으로 체감했듯이, 제 앞의 레사스가 절 아낀다는 것 또한 마음으로 알 수 있었다.
실은 언제나 알았다. 정작 레사스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제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레사스가 끝끝내 그를 포기하기 전까지 세이아드와의 유대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단지 세이아드는, 그걸 알면서도 소년을 미워하길 택한 자신을 돌아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스스로의 부끄러운 감정을 조우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었기에.
“다툰 적 없으니 화해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밀려드는 선득하고도 버거운 감정을 어떻게든 삼키며 세이아드는 겨우 대꾸했다.
“저 홀로 세운 가시이니, 그것을 제가 거둬감이 맞겠지요. 전하께서는 사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레사스의 말처럼 그는 폭주를 맞이하기 전, 혹은 숲을 없애기 전까진 서로를 보아야 하는 사이다. 제가 아무리 그를 밀어내도 자꾸만 그가 이리 굴겠다고 결심했다면, 날을 세워 아집을 부리는 것보단 필요한 타협을 해야 했다.
일부러 레사스를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이제 세이아드는 그를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전보다는 무례하지 않게 굴겠습니다. 당장은 그 정도로 만족해 주십시오.”
오랫동안 무감각해진 감정이 단숨에 돌아오는 건 어려웠다. 굳은 응어리 틈으로 살짝 새어 나오는 미세한 감정들을 겨우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세이아드의 현재 최선이었다. 그러나 레사스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듯이, 내내 표정이 없던 얼굴 위로 소년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잡아 주세요, 손.”
살랑거리는 손끝이 세이아드를 재촉했다. 정화라는 명목으론 아무렇지 않게 잡던 것이 목적을 상실하자 낯간지러운 행위가 되었다. 하지만 레사스를 다시금 잘 돌봐 줘야 하는 어린 동생으로 생각하니, 가슴 안쪽을 긁던 감각이 사라지고 한결 편안해졌다.
세이아드는 말없이 손을 쥐었다. 희고 부드러운 손은 확실히 작년 겨울에 비해 조금 더 크고 단단해져 있었다. 무언가 바뀌고는 있다는 것이 이제사 실감이 났다.
옳은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다시는 되돌릴 수 없으리라 생각한 관계가 손에 잡힌 것을 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엉켜 있던 삶의 한 부분이 풀린 느낌에, 연회가 시작된 이후 자신도 모르게 굳어 있던 몸의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그리고 우습게도 세이아드의 감각을 이어받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잡아달라 청한 레사스가 외려 흠칫 굳는 게 느껴졌다.